서평
《임금 노동과 자본》, 《임금, 가격, 이윤》 카를 마르크스
모든 임금 인상 투쟁을 방어하며
올해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두드러져 보인다. 문재인의 ‘비정규직 제로’가 ‘정규직화 제로’였음이 드러났고 그나마 ‘정규직화’도 대부분 용역회사의 다른 이름인 자회사 직접고용으로의 전환이거나, ‘중규직’이라 불리는 무기계약직화로 귀결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은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무더위 속에 서울 톨게이트 지붕 위에서 농성하고 있다. 국립대병원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직접고용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생명·안전 관련 업무는 직접 고용하겠다던 ‘희망 고문’이 정말 고문이 되고 있다.
자회사 전환, 무기계약직화 등 고용 형태만 바뀌었을 뿐 임금 등 처우 개선은 거의 이뤄지지 않거나 심지어 더 나빠진 경우도 있다. 불과 2년 전 문재인을 비롯한 모든 대선 주자들의 공약이었던 최저임금 1만 원은 예견된 ‘소득주도성장’ 정책 파산의 유탄을 맞아 추락했다. 2년 동안의 인상마저 무위로 돌리는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로 학교 비정규직 등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은 오히려 깎였다. 정규직화 대상도 되지 못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3일 동안 파업했다.
세계경제 침체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등으로 경제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더욱 탐욕스러워진 자본가 계급은 정규직의 임금 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바닥 수준인 최저임금을 찔끔 인상하는 것조차 눈꼴 시린 것이다. 그래서 내년 최저임금은 역대 가장 낮은 수준인 2.87퍼센트가 인상됐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삭감된 셈이다. 사회의 전체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중 자본가 계급이 가져가는 비중이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꾸준히 늘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장기화하고 제국주의 경쟁이 격화하는 등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어느 때보다 혁명적 대안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할 시기에, 변화의 전망을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내로 가두며 후퇴하는 좌파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회진보연대 한지원 씨는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자본가들의 반격을 당한다며 최저임금 인상 투쟁조차 반대한다. 그러나 내년 최저임금이 실질적으로 삭감됐음에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나경원은 “최저임금 폭탄”이라며 게거품을 물었다. 이처럼 끝이 없는 이윤과 축적 경쟁의 노예인 자본가 계급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다.
1997년 이후 경험한 것처럼, 경제 위기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비정규직 확대, 파견 노동 등 불안정 노동 확대, 임금 삭감, 복지 삭감 등의 공격들이 가차없이 이어졌다. 그 후 경제성장률은 일부 회복했지만, 2008년 경제 위기로 다시 추락했다. IMF 경제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처방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재인 정부는 해고, 임금 삭감, 복지 삭감, 규제 완화 등 신자유주의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임금 삭감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장기화하고 있는 불황은 기존 부르주아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정치 불안정이 일상이 됐다. 트럼프, 시진핑, 아베 등 특별히 ‘꼴통스런’ 자들이 앞에 나서서 제국주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있다. 동아시아, 중동 등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충돌의 위험이 증대하며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가 그 어느 때보다 들어맞는 듯하다. 이렇게 정치·경제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 내의 대안으로 이끌려가는 것은 걱정스런 일이다.
양극화의 한쪽에서는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고용 확대 등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투쟁의 정당성을 고무하고 방어해 투쟁을 더 일반화된 계급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할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일부가 이러한 투쟁들의 의의를 깎아 내리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대안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체제가 장기 불황으로 불안정해지면서 좌파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러한 낯선 상황의 영향을 받게 되고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토대를 이루는 관계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금
《임금 노동과 자본》은 마르크스가 1847년에 브뤼셀독일인노동자협회에서 한 강연을 정리해 1849년 《신라인신문》에 논설 시리즈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9년 《신라인신문》에 연재하면서 “지금의 계급 투쟁들과 민족 투쟁들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적 관계들”(모든 강조는 마르크스의 것)을 “노동자들이 이해하기” 바란다고 했다. 이처럼 이 책은 당시 노동자들의 투쟁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1845년과 1846년의 감자 고사병과 흉작이 민심의 동요를 부채질하고 1847년 물가 상승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대륙 전역에 혁명적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투쟁은 마르크스가 “현대 사회를 갈라놓고 있는 두 계급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대전투”라 불렀던 1848년 유럽 전역의 노동자 계급 혁명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투쟁이 구질서를 일소하는 혁명적 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임금, 가격, 이윤》은 1865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 회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 원고다. 총평의회 회원인 존 웨스턴은 실질 임금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이 쓸모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 투쟁의 불가피성과 필요성, 그리고 이 투쟁이 임금제도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하고 논증했다.
1 이라며 최저임금 인상 요구를 폄훼한다.
마르크스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임금 인상 투쟁의 중요성을 폄훼하는 주장들이 널러 퍼져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지배계급과 그들의 언론에 의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된 지 오래고, 노동운동 내 좌파마저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사회진보연대의 한지원 씨뿐 아니라, 박준형 노동위원도 “별다른 근거는 제시하지는 못한 채 도덕적으로 법정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만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운동”박준형 씨는 경제 위기의 시기에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있어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제공해 줄 능력이 안 되는데도 임금을 인상하면 이윤율이 더 하락해 경제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충분한 이윤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임금 인상은 불가능하고 쓸데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 자본가들의 “무노동 무임금” 주장도 비판할 수 없다. 파업으로 노동을 멈추고 이윤 생산을 멈췄으니 임금은 받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임금에 대해 이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수행되고 난 뒤에 임금을 받기 때문에” 또,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은 노동 자체의 가격 또는 가치인 듯한 외관을 띤다.”(《임금, 가격, 이윤》)는 이유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은 노동하는 순간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자신의 것도 아닌 것을 판매할 수는 없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능력 즉,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그리고 이 노동력 판매에 대한 대가가 임금이다. “임금이란 사람들이 보통 노동의 가격이라고 부르는 노동력의 가격에 대한, 인간의 살과 피 이외에는 머무를 곳이 없는 이 독특한 상품의 가격에 대한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노동력은 자본가가 생산을 위해 미리 구입해야 하는 기계, 재료와 마찬가지다. ... 노동력은 기계, 재료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것”(《임금 노동과 자본》)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이용해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은 자본가의 책임이지 노동자의 책임은 아니다.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경제 위기의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지 않다.
그러면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은 어떻게 결정되나? 노동력도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상품이므로, 모든 상품의 가격(가치의 화폐적 표현)과 마찬가지로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량(능력이 천차만별인 개인의 노동량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으로 정해진다. 매일 매일의 현 세대 노동력을 만들어 내고 또 다음 세대 노동력을 길러내는 데 사용되는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량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각 나라의 “역사적 또는 사회적” 영향을 받는 “전통적인 생활수준”도 임금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의 순전히 육체적 필요에 더해 필수품이 된 고가의 스마트폰·자동차 등의 구입 및 유지 비용, 명절과 휴가 비용, 자식들의 사교육 비용 등과 노동자들의 조직화 정도, 계급투쟁의 전통 등이 임금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1987년 대중파업으로 쟁취한 큰 폭의 임금 인상, 최근 자본가 계급이 그토록 폐지하고 싶어하는 연공급 호봉제 등도 이에 포함된다.
상품의 가격을 자본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 자본가들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격 즉, 임금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자본가들의 반격에 직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본가들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다른 상품과 달리 노동력은 고통에 반응하고 스스로 조직해서 저항할 줄 아는 인간의 살과 피에 내재한 독특한 상품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자본가들에게 특별한 상품이다. 자본가의 소유가 된 노동력은 자본가의 통제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는 데 쓰인다. 이것이 다른 상품과 구분되는 노동력의 “독특한” 성격이다. 기계나 원료와 같은 생산수단들은 그것이 가진 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자신의 가치를 새 상품에 그대로 이전할 뿐이다. 그러나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이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 이상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루 8시간 노동 중 4시간이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면, 나머지 4시간은 그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는 잉여 노동시간이 된다. 이 부분이 자본가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노동자들로부터 착취하는 잉여가치로서 이윤의 원천이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자본가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치 이상을 생산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이렇게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소비됨으로써 자신의 가치인 임금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자본가를 위한 이윤도 함께 만들어 낸다. 즉 노동자가 만들어낸 전체 가치가 임금과 이윤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노동자가 새로 만들어 낸 전체 가치의 규모는 정해져 있다. “그러면 임금과 이윤의 상호 연관에서 그것들의 하락과 상승을 결정하는 일반적 법칙은 무엇인가? 임금과 이윤은 반비례한다. 자본의 몫인 이윤은 노동의 몫인 하루 임금이 하락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상승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윤은 임금이 하락하는 정도로 상승하며, 임금이 상승하는 정도로 하락한다.”(《임금 노동과 자본》)
그래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은 노동력이 만들어낸 가치를 두고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운명적 관계다. 노동력의 가치는 가변적이며 “자본가는 끊임없이 임금을 노동자의 육체적 최소까지 감축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노동자는 끊임없이 반대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결국 투쟁하는 각각의 힘의 문제로 귀착한다.”(《임금, 가격, 이윤》)
임금 인상 투쟁
그러면 지금과 같이 경제 위기가 장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 인상은 자제해야 하나? 아니면 자본가 계급의 이윤을 압박하더라도 더 많은 임금을 쟁취해야 하나?
박준형 씨는 노동자 운동이 “노동자 계급의 국민경제의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벌 대기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투쟁의 성과로 정규직화되는 것은 상위 10퍼센트 임금 노동자를 조금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아 “계급적 단결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니 이런 건 그에게 대안이 아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국민경제 붕괴의 위기에” 애써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한다. 임금 인상과 같은 “방어적 경제투쟁으로는 국민경제의 붕괴를 막을 수 없고, 결국 애초 방어하고자 했던 임금과 노동조건도 지킬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지배계급이 노동자들과 자본가 계급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고,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며 노동자들의 양보와 희생을 강요하는 주장과 본질에서 같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 함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은 하나이자 똑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이를 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약하는” 이해 관계, “이것이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관계의 공통성”이라고 했다. 마르크스가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 …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임금 노동과 자본》)라고 했으니, 마르크스가 비꼰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통의 이해 관계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인 셈이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이해 관계를 가지고 “국민경제 붕괴의 위기”를 막아야 한다면, 지금 같은 경제 위기의 시기에 노동자들은 회사 살리기, 경제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 임금 인상, 일자리 지키기와 확대, 복지 확대 등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자제해야 한다. 사회진보연대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양보를 주장하고 최저임금 인상마저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금 노동과 자본주의는 하나인데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연연한다면 임금 노동을 철폐한다는 목표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회진보연대가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노동운동이 임금 인상과 같은 경제투쟁에서 벗어나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진지하게 들리지 않는다.
2 한다면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 노동자는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취업자와 실업자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지 않으면, 취업자들이 더 높은 임금을 두고 경쟁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의 시장법칙들은 힘을 잃는다.” 3 고 한다. 그래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는 임금을 올려 격차를 더 벌리지 말고 임금과 일자리를 양보하고,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호봉제를 요구해서 기껏해야 상위 10퍼센트 임금소득자를 약간 늘리는 투쟁에 몰두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시장법칙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성동조선소나 한국지엠 노동자들이 임금이 삭감되고 일자리를 줄이는 대안을 선택했으니 그들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대범한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장기 불황의 시기에는 일자리가 적고 실업자가 많아 노동자들 간 경쟁이 치열하므로 임금 인상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진보연대는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대범한 운동들을 확대해야”마르크스는 “여러분이 공급과 수요를 임금 규제 법칙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쓸데없이 임금 상승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유치한 짓일 것이다.”(《임금, 가격, 이윤》)고 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경쟁에 내몰리는 것은 생산수단을 자본가 계급이 모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경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자본가 계급에게서 빼앗아 와야만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사라진다. 노동자들에게 임금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훈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축적이 진전되는 것과 동시에 자본 구성에는 누진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총자본 가운데 고정자본 부분 … 은 임금 또는 노동을 구입하는 데 할당되는 자본 부분에 비해 더 누진적으로 증가한다.” 자본가들이 타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계 설비 등 생산수단에 더 많이, 더 빠르게 투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노동자에게 불리하고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된다. 축적이 잘 이뤄지는 호경기에 노동자들의 절대적 생활수준이 나아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자본가들이 더 많은 생산수단을 지배하게 돼 상대적 불평등은 더 커진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유지되는 한 이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불리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잉여 시간이 강요된 것에 비례하여 임금을 인상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인상함으로써 과도 노동을 방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과 자기 종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오직 자본의 전횡적 침탈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일 뿐이다 … 현대 산업의 모든 역사가 보여 주고 있듯, 자본은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무모하고도 무자비하게 노동자 계급을 극도의 피폐 상태에 빠뜨리려 할 것이다”(《임금, 가격, 이윤》).
150여 년 전에 마르크스가 한 이 말은 오늘날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행태와 다르지 않다. 10대나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산업재해로 죽어간 노동자들,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에 따라 자회사를 거부하고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고 해고된 1500명의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 ‘해고는 죽음’임을 비극적으로 보여 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등등.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가격을 놓고 자본가와 싸워야 할 필요성은 자신들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조건에 내재해 있”고, “만약 자본과의 일상적 충돌에서 비겁하게 물러난다면,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더 커다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스스로에게서 박탈하는 셈”(《임금, 가격, 이윤》)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와 임금 노동을 철폐하는 더 커다란 운동을 이끌려면 이러한 일상적 투쟁을 건너뛸 수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으며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 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장기불황이 지속되고 제국주의적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는 그 분리가 불안정할 수도 있다. 임금과 노동조건, 일자리를 공격받는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특정한 조건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맞서는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은 필요하고 정당하며 지지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일상적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전후해 유럽과 러시아에서 혁명적 투쟁에 앞장선 노동자들은 높은 급여를 받고 있던 비교적 안정된 금속 노동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레닌은 이들을 ‘노동귀족’이라 잘못 규정했지만 러시아 혁명 후 이러한 관점을 교정하고, 혁명가들에게 아무리 보수적인 노동조합이라도 개입해서 혁명 활동으로 이끌어야 함을 힘주어 말했다. 지금 ‘특권층’으로 잘못 규정되고 있는 민간과 공공부문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도 다르지 않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들도 자신의 조건이 공격받으면 전투적으로 변모할 잠재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체제가 위기에 빠져 약점을 노출했을 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가짜가 준별된다. 제1차세계대전 전야에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일컬어지던 독일사민당 지도자 카를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를 주장했다. 국경을 초월한 경제적 통합 과정이 정치에도 반영돼 지정학적 갈등이 사라져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체제 내화한 결과였다.
사회진보연대가 지금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의 한 국면이 아니라 “최종적 위기 국면”이라 진단하면서도 혁명적 대안이 아닌 온건한 대안으로 기우는 것은 모순이다.
마르크스의 두 고전은 강의 원고인 만큼 가치, 가격, 잉여가치, 이윤, 임금 등에 대해 짧고 쉽게 설명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특징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이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인 개념들이다. 그리고 장기화하는 경제 위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안내하는 길잡이 구실을 할 것이다.
주
참고 문헌
박준형 2019.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 평가: 공멸인가 변혁을 향한 전진인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19년 여름호 통권 167호.
사회진보연대 2019. “1분기 마이너스 성장 어떻게 볼 것인가? 소득주도성장 탓? 긴축재정 탓?”, 사회진보연대 웹소식지 《사회운동포커스》 2019년 5월 15일.
한지원 2019, “저임금·임금격차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접근방향”.〈사회운동포커스〉 2019년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