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시적 군사 경제
상시적 군사 경제(‘영구 군비 경제’ 또는 ‘영구 전쟁 경제’라는 용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군비(무기) 증강이 경제 전반의 이윤율 저하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상시적 군사 경제의 효시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군국주의적으로 편제된 국가 자본주의였다. 레닌은 이를 두고 ‘전시 국가 독점 자본주의’ 또는 단순히 ‘국가 자본주의’라고 일컬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군비 경제는 그 효과가 인지되기도 전에 전쟁 직후 포기됐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소련이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상시적 군사 경제를 성취했다. 비슷한 때에 일본도 그랬다. 1930년대 중엽에는 독일도 히틀러 치하에서 상시적 군사 경제 체제를 확립했다. 곧이어 이탈리아와 중남미와 영국도 군비 증강 중심의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갔고, 미국조차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갔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도 군비 경쟁은 다시 격화됐다. 이번에는, 냉전을 벌이는 양대 초강대국(즉,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군비 경쟁이었다.
뜻하지 않은 효과
이 군비 증강 드라이브가 경제 부양 효과가 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래서 1944년 1월 제너럴일렉트릭GE 사의 찰스 윌슨은 “우리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영구 전쟁 경제다” 하고 말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도되지 않은 역사적 결과”였던 것이다. 죽기 몇 년 전인 1958년에 쓴 책에서 급진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제2차세계대전 종식 이후 미국 경제 번영의 직접적 토대는 전쟁 경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만약에 군비 축소와 진정한 평화가 양국 사이에 이루어진다면 경제적 ― 따라서 정치적 ― 문제들이 당연히 그리고 절망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소련이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만 해도 주식 시장의 매매에 즉각적인 변동이 발생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규모의 협정이 타결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협상이 타결된다는 두려움이 일면, 주식은 신경과민 상태가 되어 소위 평화 공포를 나타내게 된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면 보통, 정부 대변인들은 무엇보다도 전쟁 준비를 하느라고 현재 지출된 비용과 앞으로도 지출될 비용이 더욱 증가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1958년 1월 4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처했을 때도 미국 대통령은 군수 계약 금액이 1957년에 356억 달러이던 것이 1958년에는 472억 달러로 증가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경제 상태와 전쟁 준비 간의 이러한 상관 관계는 모호하지 않으며, 은폐돼 있지도 않다. 이 관계는 공공연하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보도된다. …
… [중략] …
… 군국주의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그 자체가 목표가 됐으며, 경제 정책은 그 수단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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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 호경기가 ― 오직 그것만이 ― 미국을 1930년대의 불경기로부터 구해 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 재래식·비재래식 전쟁 물자가 그칠 새 없이 생산됐다. 그 결과는 우리가 두루 아는 바처럼 지난 10년에 걸쳐 위대한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케인스주의적 좌파
2 전쟁이 끝나던 해인 1945년의 군사비는 국민총생산GNP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3 1946~1967년도 간에 미국 정부는 예산 총액의 57.29퍼센트인 9,040억 달러를 군사력을 위해 사용했고 겨우 6.08퍼센트밖에 안 되는 960억 달러만을 교육·보건·노동·복지·주택·지역개발 등에 사용했다. 4 또, 1966년에 항공기·미사일 산업은 연구 개발을 위해 54억 달러를 사용했고, 그 비용의 대부분을 연방 정부에서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건·교육·후생부는 그것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비용만을 할당받았다. 5
그러나 전후 좌파에게 장기 호황과 군비 증강 사이의 상관 관계는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량주의자들인 케인스주의자들은 호황이 케인스주의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클리프의 비유를 빌면 “닭의 울음소리 때문에 해가 뜨는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적자 재정에 의한 공공 지출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케인스의 조언을 따랐던 정부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1960년대 초까지 각국 정부는 긴축 재정 정책을 추구했다. 대신에 각국 정부는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예컨대 1930년대 중엽에 겨우 36억 달러의 연평균 재정적자(1934년 36억 달러, 1935년 30억 달러, 1936년 43억 달러)를 발생시켰다 해서 루스벨트에게 매우 분개했던 미국 자본가들은 1941~1942년 590억 달러의 재정적자에는 괘념치 않았다. 독일의 예를 들면, 1932~1937년에 민간 소비는 12억 달러밖에 증대하지 않은 반면 국민총생산은 107억 달러나 증대했는데, 새로운 생산은 대부분 무기와, 군비 산업들인 중공업에서 이루어졌다.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
호황의 존재를 인정한 사람들이 호황의 원인을 얼토당토않게 케인스 파 경제 정책으로 돌렸다면, 극좌파는 아예 호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자들과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전반적 위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안타깝게도 트로츠키 자신이 1930년대 말에 자본주의의 파국을 점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사회 개혁과 대중의 생활 수준 향상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그는 예측했다.
하지만 전후 세계 자본주의는 붕괴하기는커녕 유례 없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이와 함께 개혁주의가 부활했다. 그래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득세했다. 영국의 역대 노동당 정부들 가운데 1945~1951년 애틀리 정부가 가장 효과적인 개혁주의 정부였다. 애틀리 정부 하에서 노동 계급의 생활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완전 고용과 사회보장 제도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서구 전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7 실제 상황을 정면으로 대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대표적인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여러 해 동안 장기 호황의 현실을 부정하다가 1964년에는 위기로의 경향이 거의 사라진 ‘신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8
나치 체제와 스탈린 체제 하에서 고립과 고통을 당해 온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심리적으로 기적을 믿어야 하는 처지였다.”호황과 위기를 모두 설명한 토니 클리프
그러나 1974년에 심각한 공황이 찾아왔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대학과 언론과 기업인 단체에서 순식간에 완전한 비주류로 전락했다. 머지않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옳았음이 입증됐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 전 30년간의 장기 호황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던 ‘근본주의자들’이 갑자기 신뢰를 얻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호황에 대해 설명하려 노력해 온 ‘수정주의자들’이 일찍부터 있었다. 그들은 ‘영구 전쟁 경제’론자들로 불렸던 오크스/밴스와 토니 클리프였다. 클리프의 영구 군비 경제 이론은 그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앞서 나는 소련이 서방과의 군사적·경제적 경쟁을 위해 영구 군비 경제 체제로 돌입한 최초의 경제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처럼 국가 자본주의와 영구 군비 경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그 이론들도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소련을 이해하는 것이 서방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다.
국가 자본주의에 의한 영구 군비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나라들 사이에서 일반화된 이후 30년 동안 자본주의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이것은 고전적 자본주의의 정기적 경기 변동 주기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왜 영구 군비 경제의 상황이 이렇게 달라졌는지 이해하기 위해 고전적인 경제 위기의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잉 생산
‘과잉 생산’은 상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 상품이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여 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다국적 기업들이 식료품을 갖다 버리는 가운데 아프리카와 북한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 건축 붐이라는데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든다. 철강 회사가 문을 닫는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농민들이 쟁기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자기들이 팔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했음을 갑자기 깨닫는다. 그 결과 그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든다. 상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한다. 재고가 더 늘어난다. 공장 가동률이 더 떨어진다.
과잉 생산 위기는 더 악화되고 불황이 심화된다. 이 과잉 생산은 이윤을 위한 생산인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과잉 생산은 불합리한 것이지만, 우연한 것은 아니다. 과잉 생산은 자본의 본성 자체에 내재한 것이다.
한편으로, 경쟁 때문에 기업주들은 될수록 생산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윤 때문에 그들은 될수록 임금을 낮추려 하고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보수를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려 한다. 그 결과 생산품의 양과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력 사이에 격차가 벌어진다.
만일 생산품과 대중의 제한된 구매력 사이의 이 격차를 메울 수 없다면 자본가들은 상품을 충분히 팔지 못해, 이윤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과소소비론의 핵심 주장과 달리, 이 격차는 새로운 생산 수단에 대한 지출로써, 즉 신규 기계·설비류에 대한 투자로써 메울 수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경제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윤을 위해 투자한다. 따라서 투자는 주기적으로 순환한다.
이윤율이 높아 경영주들이 낙관적이면 기를 쓰고 투자해 경기는 호황이 된다. 새 공장을 짓고 기존 공장을 확장한다. 실업자가 줄어들고 취업자가 늘어나면 노동자들이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대한다. 이 덕택에 경제는 더 확대된다.
하지만 호황은 자멸의 씨앗을 내포한다. 모든 또는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한꺼번에 쇄도하듯이 투자함에 따라 원자재와 기계·설비류와 노동의 가격이 올라, 마침내 이윤을 잠식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이쯤 되면 사업 전망이 달라져, 자본가들은 투자를 위해 쇄도했던 것만큼이나 빨리 투자를 감축한다. 과잉 생산 위기가 다시 나타나고, 호황은 경기 후퇴와 불황으로 바뀐다.
그러나 불황 또한 영구적이지 않다. 호황이 물가를 상승시켜 마침내 이윤을 잠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불황은 물가를 하락시켜 마침내 이윤율이 회복된다. 투자가 다시 시작된다.
이리하여 산업 혁명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 전체는 호황과 불황의 교대가 특징이었다.
비생산적 소비로 격차 메우기 그런데 앞서 언급한, 생산된 상품과 대중의 구매력 사이의 격차를 생산 수단이 아닌 무기에 대한 투자 지출로 상당 부분 메운다고 가정해 보자. 무기 생산은 사치품이나 광고·마케팅 또는 투기처럼 생산재도 소비재도 아닌 비생산적 지출 형태다. 물자가 상당 부분 비생산적 부문으로 전용됨에 따라 생산적 부문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율은 둔화되게 된다. 그리하여 이윤율 저하 경향은 상당히 뒤로 늦춰지게 된다.
물론 대규모 무기 부문은 다른 상황에서였더라면 증대하는 생산적 투자로 사용될 수도 있었을 자원의 대량 낭비를 나타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부담은 미국 경제를 지배하는 대기업들 사이에서 거의 균등하게 분담됐으므로, 생산적 투자를 확장할 각 기업의 능력은 대략 동일한 양으로 억제됐다. 그 결과 단기 경제 성장이 전에 경제 주기의 ‘호황’ 부분에서 지녔던 열광적인 속도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이었던 반면, 그것은 주기의 불황 부분에서 겪었던 중단 같은 것은 겪지 않았다.
전후戰後와 전전戰前 경제를 비교하는 것은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를 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전전 경제는 빠른 속도로 약진하다가, 숨을 헐떡이며 갑자기 멈추었다. 거대한 무기 비용의 낭비라는 ‘부담을 안고 있던’ 전후 경제는 더 느리게 전진했으나, 예전처럼 돌연히 멈추지는 않았다. 그것의 이윤율은 억제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것은 해마다, 10년마다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그것의 장기 성장률은 그 전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리하여 세계 체제는 “1950년과 1965년 사이에 1913년과 1950년 사이보다 두 배 빠르게, 그리고 이 전 한 세대 동안의 거의 절반의 속도로” 성장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군비 지출은 잉여 가치의 일부를 낭비적 ― 비록 지배 계급들의 제국주의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뜻에서 그들에겐 ‘생산적인’ 낭비겠지만 ― 생산으로 전용하는 한편, 미국과 전 세계의 수요와 고용 수준을 떠받치는 구실을 했다. 이것은 다른 경제들, 특히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들이 자기들 이윤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신규 공장과 기술에 대한 투자에 쏟음으로써, 그리하여 그 생산물을 수출 ― 특히 미국으로 ― 함으로써 성장할 여지를 만들어 줬다.
이 덕택에 독일과 일본 경제는 장기 호황 동안 급성장했다. 초강대국들과는 달리,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와도 달리, 독일과 일본은 높은 수준의 군비 지출 부담이 없었다. 이 덕분에 두 나라는 특히 수출 시장에서 기회가 충분했던 반면, 국제적으로 고정자본 양을 증대시켜 놓았다.
1960년대 말쯤 생산에 필요한 자본 양이 다시 증가하면서 이윤율이 떨어졌다. 이것은 결국 1974년의 위기를 불러왔는데, 석유 가격 인상은 이윤율 하락으로 허덕이던 자본가들이 마침내 투자를 멈추게 만든 결정타였을 뿐이다.
1974~1975년의 위기가 모든 곳에 고르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회복이 진행되자마자 새로운 위기가 1979~1981년을 강타했다. 1990~1992년에도 위기가 엄습했다. 높은 실업, 낮은 성장, 대규모 자본 파괴가 뒤따랐다.
이것이 장기호황이 끝난 이후 20여 년 동안의 세계경제 상황이었다.
주
참고 문헌
렌즈, 시드니 1984, 《군산복합체론》, 지양사.
밀즈, C 라이트 1982, 《역사와 책임》, 도서출판인간.
하먼, 크리스 1995, 《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 풀무질[이 책의 1장과 2장의 새 번역은 《마르크스21》 12호와 13호에 각각 실려 있다].
Cliff, Tony 1999, Trotskyism After Trotsky, London, 1999[《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이수현 옮김, 2011, 책갈피].
Mandel, Ernest 1964, “The economics of neo-capitalism”, Socialist Reg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