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지금의 이슈들
고립의 종식? 팔레스타인과 아랍 혁명 *
1 베를린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다. 팔레스타인 민중저항위원회는 이렇게 밝혔다. “장벽을 아무리 높게 쌓아도 결국에는 무너질 것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듯이 팔레스타인의 장벽도 이스라엘의 점령과 함께 무너질 것이다.” 2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벌여도 팔레스타인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한다.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이 장벽에 균열을 내는 동안 이집트 정부가 팔레스타인 영토 주변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자 지구와 접경한 국경이었다. 이집트 정부는 라파 근방 이집트 국경을 따라 13km에 이르는 완충지대를 비우고 가자 지구 남쪽을 봉쇄했다. 3 두 사건은 팔레스타인이 처한 어려움의 핵심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났으며 괄시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아랍 정권들에게도 배척당하고 고립됐다. 이 포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2014년 11월 9일 예루살렘 인근 마을들에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장벽에 상징적인 균열을 냈다.4 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전해에 이스라엘 언론인 알루프 벤은 이스라엘과 미국 정치 지도자들 모두가 “라이스[대통령, 즉 무바라크 — 글쓴이]의 안녕을 위해 기도” 5 했다고 썼다. 벤은 이렇게 덧붙였다. “전 세계 정치인 중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무바라크였다.” 6 이 이집트 독재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미국의 충성스러운 친구이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고 경제적 관계를 돈독히 다졌다.
2011년 1월 아랍 혁명이 시작되자 해결책이 손에 잡힐 듯했다. 독재자들이 쫓겨나고 대중운동이 국경 너머로 확산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례 없이 어려운 조건에서 홀로 싸우는 처지에서 벗어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존 질서에 맞서 일으킨 반란의 일부가 됐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대는 예루살렘 해방을 외쳤고, 가자 지구로 파견된 대표단은 이집트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혁명으로 단결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스라엘 지배자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우려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에후드 바라크는 “역사적인 지진”이 중동을 강타했으며 이스라엘이 정치적 “쓰나미”무엇보다도 무바라크는 대중 저항 역사가 깊은 이집트 사회에서 자주적인 정치 활동을 30년 동안 탄압해 왔다. 무바라크를 물러나게 한 혁명의 기운은 이 전통을 되살리고 발전시켰다. 전례 없는 규모의 거리 시위와 대중 파업이 일어났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연대 시위를 조직했고 타흐리르 광장의 정신을 본보기로 삼아 인티파다를 촉구했다. 오랫동안 이런 투쟁에서 고립돼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제 아랍 지배자들에게 맞서고,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제국주의적 동맹에 맞서는 것이 공통의 대의임을 확인했다. 한동안 카이로의 혁명적 변화가 예루살렘의 해방을 가능케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전망은 희미해져 갔다. 아랍의 수도首都들에서 시작된 반혁명 때문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운동 내의 첨예한 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팔레스타인과 아랍 세계의 혁명적 과제에 관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글은 중동이 정치적 격변에 휩싸인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곤경,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과 쇠락도 다룰 것이다. 이 운동은 이제 1950년대 이래 가장 약화돼 있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지향, 이스라엘과의 타협,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수용도 다룰 것이다. 최근의 혁명적 투쟁들, 특히 이집트 혁명에서 팔레스타인 문제가 띤 중요성, 팔레스타인 투쟁이 중동 전역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의 일부가 되는 새로운 전망도 살펴 볼 것이다.
“불간섭”
7 고 말한다. 라자 칼리디는 “혁명 정신”이 상실된 것은 아닌지, 운동이 “민족주의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한 형태의 식민주의를 다른 형태의 식민주의로 대체”하는 데에 그친 것은 아닌지 묻는다. 8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타락해 이스라엘과 그 동맹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라고 칼리디는 말한다. “오슬로협정 이전에는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 언제 그랬냐는 듯 이스라엘과 강대국을 포용하고 신자유주의의 유혹에 넘어갔다.” 9 그러나 근래의 팔레스타인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보면 이와 같은 변화는 그리 놀랍지 않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의 위기가 너무도 심각한 나머지 팔레스타인 활동가들과 학자들은 오랫동안 회피해 오던 문제를 마침내 공공연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오마르 바르구티는 민족 지도자들이 “완전한 혼란”에 빠졌고 “효과적인 저항 전략을 수행할 능력을 본질적으로 갖출 수 없었다”10 대부분은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에 정착했다. 원래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이었던 이들은 이제 베이루트, 다마스커스, 암만 11 같은 도시의 난민 캠프나 정착촌에 수용됐다. 부와 더 나은 교육을 누린 소수 팔레스타인인들은 걸프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성장하는 석유 부문에 기반을 둔 이 신생 국가에서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에서 일정한 구실을 했다. 망명자들의 이러한 분포는 1950년대에 등장한 민족주의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난민들은 대부분 여전히 빈곤에 시달리고 정치적으로도 홀대받았다. 이들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고용, 주거, 교육, 탄압, 귀국이었다. 아랍 정권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와 그것이 더 광범한 대중적 분노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해 난민 캠프와 정착촌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1948년 나크바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12 고 평했다. 일부는 부유해졌고 그중에는 쿠웨이트에 기반을 둔 젊은 사업가 집단이 있었는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다른 팔레스타인 난민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대부분 아랍 국가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경제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의미한 정치적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국가가 없는 맹아적 부르주아지였다. 아라파트 그룹의 핵심 목표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다.
걸프 국가로 이주한 유복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경험은 달랐다. 이곳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건설 부문과 상업 부문의 사업가로서, 또는 전문직(교사, 의사, 변호사, 토목기사, 관리자)으로서 신생 국가들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드 이브라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산유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주민 공동체가 됐다”13 이 주장은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서 사는 팔레스타인인과 망명한 팔레스타인인을 망라한 모든 계급의 팔레스타인인에게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다. 파타의 전략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아랍 국가에 사는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의 구실은 무엇인가? 파타의 견해는 분명했다. 파타는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철저히 민족적인 방식으로 수행해야 하며 모두가 “불간섭”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랍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4
1950년대 초반부터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은 아랍 지도자들, 특히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이스라엘에 맞선 군사적 행동을 로비했다. 중동 내 특권층의 일부로서 이들은 대통령, 왕, 군주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를 좌시하지 말아 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자신들이 이 지배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릴 날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아랍 정권들은 언사만 강경했지 팔레스타인을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시킬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남반구 전역에서 반식민지 투쟁이 벌어진 195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지역 전체를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켜야만 팔레스타인 해방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 아랍민족주의운동ANM에 지지를 보냈다. 1959년 아라파트 등은 쿠웨이트에서 파타를 설립할 때 정반대 전략을 주장했다. 즉, 아랍의 단결을 이루려면 팔레스타인을 먼저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15 그럼에도 파타는 1967년 이스라엘 군이 서안 지구를 점령했을 때 수백여 명을 무장시켜서 그 전략을 실행하려 했다. 대부분은 금세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혔고 이런 실험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러나 파타는 민병대를 유지하고 무장 항쟁을 핵심 수단으로 삼아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킨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주장은 기이할 뿐 아니라 자가당착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곳에서 온갖 정치적·경제적 투쟁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 정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파타는 신생 중동 자본주의의 일부로서 부상했고 파타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려 했다. 아랍 지배계급은 이들의 후원자였고 궁극적으로는 동반자였기 때문에 “불간섭”은 파타의 전략에서 본질적 요소였다. 파타의 전략에 내재한 모순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비록 근본에서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었지만, 동시에 급진 민족주의 운동이 반식민지 투쟁에서 거둔 성공에 감화하기도 했다. 이들은 1965년에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무장 투쟁을 선포하면서 자신들의 투쟁이 알제리, 중국, 베트남, 쿠바의 게릴라 전략과 어깨를 견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라파트에 따르면, 1964년 중국을 방문한 파타 대표단은 게릴라 전략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제기를 들었다. “그들은 말했다. ‘당신들이 하겠다는 것은 허황되다. 불가능할 것이다. 해방시킬 영토에 기반이 없고, 기반을 일궈 낼 가능성도 없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텐가? 게릴라전에 적합한 조건이 아니다.’”16 에 합류하면서 파타는 금세 PLO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아랍민족주의 운동도 무장 조직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을 출범시켰다. 무장 항쟁이 성장하자 급진적인 정치를 표방하는 여러 분파와 소그룹이 생겨났지만 이들은 사실상 운동 내에서 아랍 국가들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17 한편 파타는 걸프 정권,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지배자들과 연계를 유지했고 1969년에 이들과 악마적 거래를 했다. 공산당원들이 파타를 주도한다는 주장이 “더러운 거짓말”임을 사우디 국왕에게 납득시킨 파타 지도자들은 사우디 왕국에게서, 사우디에서 일하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에게 소득의 5퍼센트를 세금으로 부과해 얻은 수익을 모두 PLO에게 넘겨 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8 파타는 사우디 정부에게서 직접 상당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기도 했다. 앨런 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파타가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후에 드러났듯이 사우디를 등에 업은 파타는 아무도 파괴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물론 사우디가 용인할 만한 정책을 추구하는 한 말이다.” 19
1964년 나세르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설립해 팔레스타인 문제에 신경을 쓴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점점 더 불만스러워 하는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을 다잡으려 했다.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온 젊은 투사 수천 명이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에 고무된 아랍 국가 시민들과 함께 페다이fedayeen패배
20 분위기가 급진화하면서 충돌이 불가피해졌고 결국 1970년 요르단에서 갈등이 폭발했다.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전례 없는 지지를 누리고 있었고, 요르단 왕정이 운동에 보인 적대감을 고려하면 이 취약한 왕정 국가와 운동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다. 파타 창립 멤버인 무함마드 다우드 아우다(아부 다우드)에 따르면, 젊은 장교들과 활동가들은 요르단 정권에 대항해 조속히 파업에 돌입하자고 호소했지만 아라파트는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21 “우리는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는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매우 자주 논의했지만 … 아라파트는 언제나 ‘안 된다’고만 했다. 아라파트는 후세인이든 다른 아랍 정권이든 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해방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했다.” 22 결국 후세인 국왕이 공격에 나섰고 1970년 “검은 10월”과 이후의 야만적 전투에서 페다인 수천 명이 전사했다. 결국 파타는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쫓겨났다.
파타가 벌인 무장 저항 운동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게릴라전 전략을 실행하지 못했지만, 아랍 정권과의 충돌을 불러왔다. 레바논과 요르단에서 PLO는 금세 난민 캠프를 장악했고 이 난민 캠프들은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구역이 됐으며 그 안에서 활동가들은 점점 더 중앙 정부의 권위를 거슬렀다.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은 아랍 정권을 적대한다는 발상을 — 심지어 생존 전략으로서 그래야 하는 상황에서도 — 철저히 배격했다. 파타는 아랍 정권들과 (석유 기업들의 형태를 한) 기업 이해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복잡한 관계망에 얽혀 있었다. 반면 일선에서 싸우는 페다인은 아랍에서 가장 소외되고 빈곤한 지역 출신들이었고, 사회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파타 지도부는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이는 앞으로 벌어질 더 심각한 문제들의 전조였다.
팔레스타인 운동은 요르단에서 입은 타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그후 십 년 동안 이 운동은 레바논에 갇혀서 팔랑헤라고 하는 파시스트 세력과, 시리아군, 남쪽에서 침략해온 이스라엘의 충돌에 거듭 휘말렸다. 게다가 운동은 “레바논화化”하기 시작했다. 즉 온갖 분란을 배양하는 종파 분단 위에 세워진 레바논 국가와 연관된 분파주의, 배타성, 술수가 운동에 악영향을 끼쳤다. 아랍 정권들도 팔레스타인 운동을 자기들끼리의 각축장으로 이용하여 해로운 영향을 줬다. 1982년 이스라엘은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고 결국 PLO를 레바논에서 내쫓았다. PLO는 튀니지, 예멘, 수단에 유명무실한 본부를 세웠다. 민족 해방 전략으로서의 무장 투쟁은 끝장났다.
23 이를 두고 심지어 이스라엘의 경제재정부 장관인 가드 야코비조차 “야금야금 진행된 사실상의 합병 과정” 24 이라고 인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경제를 위한 저렴한 노동력으로 전락했다.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노동자 3분의 1은 이스라엘 일자리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들이 처한 조건은 식민지 반투스탄 25 (아파르트헤이트 시설 남아공의 “보호구역”)을 연상케 했다. 26 상황은 다시금 폭발 직전으로 치달았고 결국 1987년 12월 인티파다가 시작됐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인 대부분이 이 놀라운 운동에 가담했다. 수개월 동안의 파업, 보이콧, 시위 등 지역 수준에서 벌어진 온갖 행동들은 PLO의 공식 기구를 뛰어넘는 지역 수준의 활동가 네트워크에 의해 조직됐다. 한 라말라 현지 보도에 따르면
그 다음 투쟁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 동안 이집트와 요르단에게서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빼앗았다.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은 토지와 수자원을 장악하고 토착 경제를 이스라엘 “본토”로 통합해 신속하게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정착촌이 건설된 방식은 19세기 유럽인들의 식민지 건설을 연상케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에서 했던 것처럼 토착 마을을 밀어내고 토지를 강탈해 이스라엘인만 사는 요새화한 거주 단지를 조성했다. 강탈이 끊이지 않으면서 나크바가 이어졌다. 1988년에 이르자 서안 지구의 52퍼센트, 가자 지구의 21퍼센트가 이스라엘의 손아귀에 떨어졌다.이곳 활동가들은 PLO가 팔레스타인 민중의 유일하고 정통성 있는 대표라는 구호를 확고하게 고수했지만, 현장에서는 자신들이 주도력을 발휘했다. 이 지도부는 현지의 이름 없는 뭇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 기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사태에 압도돼 명백히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현지 저항 지도부들을 통제하는 데에서 애를 먹었다. 평소에 동원하던 군사적 수단으로도 이들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이는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라파트, 파타 지도부, 아랍 정권들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 인티파다가 중동 전역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환기시키고 아랍 정부들의 무대응에 대한 분노가 확산돼 중동 전역에서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이집트의 사태 전개가 특히 중요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집트 국내 정치의 오래된 주요 쟁점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오랜 반식민지 투쟁 동안 좌파에게 핵심 쟁점이었고, 이슬람주의 운동의 초점이기도 했다. 1948년 이래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전쟁이 네 차례 있었고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영토 일부를 점령하기도 했다. 1978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팔레스타인 민중을 배신하자 대중적 분노가 광범하게 일었다.
28 운동은 핵심적인 산업 중심지인 마할라 알쿠브라로 확산됐다. 이곳 노동자들은 인티파다에 실질적으로 연대하라고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경찰들과 싸웠고 이집트 정부가 미국, 국제통화기금IMF과 영합하는 것을 비난하며 무바라크 퇴진을 외쳤다. 이집트 내무장관은 “사보타주와 선동”에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폭동 진압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했다. 29 필 마셜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집트인들은 1987년 인티파다에 호응해 대학가와 금요예배에서 대중 집회를 열었다. 한 이슬람주의 설교자는 이렇게 역설했다. “우리는 성전(지하드)을 위해 이스라엘 쪽 국경을 열 것을 요구한다.”연대 운동은 이제 자체의 동력이 생겼고, 매 시위 때마다 정치적 일반화가 가속화됐다. 이집트는 모든 아랍 정권이 우려하던 바 즉, 팔레스타인 문제가 중동에서 가장 반체제적인 요소라는 점을 확인시켜줬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시온주의에 저항하면서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와 대적하게 됐다. 아랍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연대하면서 자기네 사회의 계급 관계, 자국 지배계급과 세계 체제를 결속하는 관계들과 대적하게 됐다.
연대 운동이 터키, 수단, 쿠웨이트,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시리아로 확산되자 아랍 정권들은 PLO 지도부를 불러서 운동의 힘을 억제하는데 일조하게 했다. 아라파트는 몸소 쿠웨이트를 찾아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쿠웨이트 정권의 지지를 칭송해서 그곳 활동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다른 PLO 고위 관리들도 집회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 문제를 알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고 있으니 팔레스타인인이 아닌 사람들의 시위는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활동가들이냐 중동 정권들이냐는 선택지에서 PLO 지도부는 후자를 택했다.
31 일년 후 요르단에서 유사한 시위가 벌어지자 PLO 지도부는 이 “동안 지구의 인티파다”를 억누르는 데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중동이 1950년대 이래 가장 불안정해지자 뭔가 조치가 필요하고 팔레스타인이 핵심 문제라는 공감대가 중동 정권들 사이에 형성됐다. 이런 상황에서 걸프 동맹국들에게 압력을 받은 미국이 점령 지역에 대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PLO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후퇴를 했고, 이스라엘 통치자들은 가자와 서안 지구에 팔레스타인 “소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지리한 논의를 마지못해 시작했다. 1993년 아라파트가 조인한 오슬로협정은 팔레스타인 항쟁에 해악을 끼친 새로운 후퇴기를 열었다.
인티파다의 여파는 중동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감지됐다. 1988년 10월 알제리에서 분출한 대중 저항에서는 긴축에 반대하는 장기 집회와 파업에 팔레스타인 항쟁의 상징이 동원됐다. 아랍 국가들이 알제리 정권을 옹호하고 나서자 사우디 언론들은 저항이 또 “전염병”처럼 퍼지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을 표했다.신자유주의 팔레스타인
32 이와 같은 새 합의가 마련되자, 이스라엘은 새 정착촌을 건설하고 정착촌 구역과 도시를 연결할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서안 지구의 가장 비옥한 농토 상당 부분을 계속 점령해 나갔다. 식민지화는 거침없이 진행됐다. 1993년에 팔레스타인 영토 내 이스라엘 정착민은 28만 1800명이었지만, 2002년에는 42만 7617명에 달했다. 33 자치정부에게 얼마 안 되는 영토가 (오슬로협정의 계획에 따라) 배분됐을 때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또다시 토지 점령을 이끌었다. 1998년 외무장관 아리엘 샤론(이후 총리가 된다)은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서둘러 행동에 나서 더 많은 고지를 점령해야 합니다. … 우리는 영토를 확장할 것입니다. 점령하는 것은 우리 것이 될 것이고 점령하지 않은 것은 저들에게 떨어질 것입니다.” 34
공식적으로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모두 득을 보는, 양국 관계사의 돌파구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실로 재앙이었으며 이것의 함의는 최근이 돼서야 온전히 드러났다. 아라파트가 합의한 “소국가”는 뿔뿔이 흩어진 작은 영토들에 불과했다. 신생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사실상 PLO가 자치정부가 됐다)가 행사하는 지배력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현지의 사소한 문제를 제외한 모든 사안을 좌우할 만큼 광범한 권한을 행사했다.35 에 매진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그림의 일부일 뿐이었다. 오슬로협정은 미국 전략가들이 고안한 더 거대한 계획의 한 요소로서, 신자유주의 원리를 따르고자 하는 미국 동맹국들의 노력에 기반을 둔 협력 체제 내로 이스라엘과 점령 지역을 경제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충실하게 협조했다. 오슬로협정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찾는 것은 깃발의 평화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시장의 평화다.” 36 오슬로협정이 조인될 무렵 이미 많은 이웃 국가에서 상당한 변화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91년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은 가혹한 긴축정책, 새로운 시장화, 규제 완화 법안을 포함한 경제개혁·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오슬로협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경제적 관계는 완전히 “정상화”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특화산업단지QIZ 37 설립과 같은 아랍-이스라엘의 공동 경제 활동도 포함돼 있었다. 38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교리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번영”과 맞바꾸면서 팔레스타인 경제도 이 중동 협력 체제의 일부가 됐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지리학자 오렌 이프타첼이 말한 “야금야금 진행되는 아파르트헤이트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간 전체를 유대화하려는 비타협적인 시도”39 서안 지구의 농업 부문은 황폐해졌고,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농촌 청년들은 이스라엘에 미숙련 노동력을 제공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이스라엘산 식품과 공산품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팔레스타인의 상공업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스라엘 경제는 팔레스타인 경제 활동이 수축하는 것에 비례해 성장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제조업자, 중개인, 이스라엘 정부의 호의를 입은 소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커다란 득이 됐다. 이런 상황은 점령이 지속될수록 번창하는 새로운 팔레스타인 자본가 계급의 기반이 됐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군과 협력함으로써, 나중에는 이스라엘 당국에게 권한을 부여받아 주요 상품을 수입하거나 수출하고 이스라엘 건설업과 서비스업에 노동력을 공급함으로써 부를 쌓았다.
사실 오슬로협정에 따른 경제적 변화는 1967년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정책을 더 심화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들을 값싼 노동력과 핵심 자원을 이스라엘에 대주는 부속지처럼 취급했다. 이스라엘의 토지 점령은 경작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7~1974년 사이 서안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경작하던 토지는 3분의 1로 감소했고, 팔레스타인인의 관개지 경작(대부분 요르단 계곡에서 이루어졌다)은 90퍼센트 감소했다.40 이스라엘 관리들과 사업가들은 손쉽게 수익을 냈다. 이들은 무역에 대한 지배권뿐 아니라 자치정부와 현지 NGO들에게 흘러 들어오는 해외 원조로도 이득을 취했다. 아담 하니예는 이렇게 말했다. “서안 지구는 이스라엘에서 온 여러 상품들의 전속 시장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소비가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본금으로 충당됐기 때문에 이러한 시장의 수익성은 굉장히 높았다. 자치정부에 대한 해외 원조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원조인 동시에 이스라엘을 위한 원조이기도 했다.” 41 이스라엘 관리들은 해외 원조를 정책적 도구로도 활용했다. 이들은 해외 원조를 허용된 경로로만 들여와 이 과정에서 특정한 팔레스타인인들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당연히 그 특권의 수혜자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공모자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긴밀하게 엮인 자들이었다.
오슬로협정에서 아라파트가 주요 경제 분야에 대한 공식적인 지배권을 이스라엘에 양보하는 바람에, 자치정부가 무엇을 수입하고 수출할 수 있는지를 이스라엘 관리들이 결정하게 됐다. 2005년에는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수입 75퍼센트가 이스라엘에서 왔고 수출의 88퍼센트가 이스라엘로 갔다.42
“파야드화”43 아라파트는 특히 “미스터 팔레스타인” 이미지에 걸맞는 금욕적인 생활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오슬로협정과 자치정부 수립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파타 지도부는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적, 걸프 정권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이유로 팔레스타인 운동 내 급진적인 활동가들에게 수십 년 동안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파타가 조직의 자산을 착복하고 비위를 일삼았다고 비판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PLO 고위 간부들은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이나 아랍의 왕들, 대통령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검소하게 살았다.44 오슬로협정 체결 이후 5년 만에 자밀 힐랄은 경제 환경이 눈에 띄게 변했다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의 영향력이 커지고 … ‘구조조정’의 기치 하에서 민간부문이 중시됐다.” 힐랄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급속히 커졌다고 지적했다. 45 신자유주의 정책은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대한 새로운 봉쇄 정책과 결합돼 정확히 그런 효과를 냈다. 그에 따라 자치정부와 연관된 소수 팔레스타인인들은 더 부유해졌고 다수는 삶의 조건이 급격히 악화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 전략가들은 먼저 이스라엘과 현지 주민을 중재할 협력자를 물색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군에 협조하는 팔레스타인 관료 기구와, 현지 경찰력을 포함한 민간 행정기구, 현지 민병대를 모집해 PLO와 영향력을 다툴 마을연맹을 설립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민족운동을 약화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이 실패는 투쟁의 부활에 헌신하는 신세대 활동가들을 탄생시킨 1987년 인티파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특권층, 이스라엘 군 당국, 점령에서 직접 이익을 얻는 이스라엘 기업 사이에 정립할 관계의 청사진을 그렸다. 오슬로협정이 체결되자 이 핵심 집단은 확장됐고, 걸프 지역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 소작지를 보유한 전통적 지주계급을 비롯한 “귀환” 자본을 포섭했다.46 고 레일라 파르사크는 지적한다. 1992년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인의] 입국을 허용하는 취업 허가증을 11만 5000건 발급했는데, 1994년(오슬로협정 이후)에는 발급 건수가 6만 5000건, 47 1996년에 이르러서는 불과 3만 6000건으로 줄었다. 48 이후에 발급 건수는 다시 증가했지만 이스라엘 전략가들이 다른 곳을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처로 삼으면서 결국 다시 떨어졌다. 마이클 엘만과 스마인 라셔는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해외 노동력으로 대체하려는 명확하고 공공연한 정책” 49 이 도입됐다고 했다. 탈규제와 노동이동의 시대에 전 세계에서 일어난 변화에 발맞춰 이스라엘도 아시아와 동유럽 이주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처음에 팔레스타인인보다 더 비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법”화 되고 착취하기에 매우 적합해졌다. 특정 고용주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50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영토 내 실업률도 차츰 상승했다. 가자 지구의 실업률은 1993~2000년 동안 15.1퍼센트에서 32.5퍼센트로, 서안 지구의 실업률은 10.1퍼센트에서 23.8퍼센트로 올랐다. 51 사회적 궁핍을 나타내는 다른 지표들과 빈곤 수준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1993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 고용에 대한 새로운 규제를 도입했다. 지난 25년간 팔레스타인인 노동력은 이스라엘 경제에 필수적이었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노동시장에 의존한 덕에 이스라엘 관리들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주 노동자를 들여오면서 “이스라엘에서 들여오는 상품과 대對이스라엘 무역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의존이 고착화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수요가 팔레스타인인들의 고용 상황을 좌우하게 됐다”52 10년 후 경찰 인력은 5~7만 사이로 증가했다. 53 서안 지구 예방보안군은 지브릴 라흐줍(아부 라미)이, 가자 지구 예방보안군은 무함마드 다흘란(아부 파디)이 지휘했다. 이들이 지휘한 대원들은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CIA에게 훈련을 받았고 이스라엘을 통해 미국에게서 무기를 공급받았다. 54 금세 이들은 임의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재판 없이 구금하고 재소자를 고문했으며 독립 출판물을 폐간하고 단체들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치정부 지도자들의 집행관으로서 신속하게 움직여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기존 또는 신생 사회·정치 질서를 압도한 다음 자신들에게 협조하게 만들었다”고 그레이엄 어셔는 썼다. 55
자치정부 지도자들은 다른 문제에 골몰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통제하고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보안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파타 지도부의 권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PLO는 1960년대 이래 광범한 정치적 조류들을 포괄했다. PLO 내에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나, 공식적으로는 민주적 사회주의 원칙을 지지하는 급진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인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과 같은 조직들도 있었다. 1987년 인티파다에서는 여성, 학생, 농민, 마을 위원회, 노동조합, 독립 문화단체 등 풀뿌리 조직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오슬로협정을 이용해 이러한 운동, 특히 운동 내 급진적인 부위를 억누를 팔레스타인 세력을 심어서 저항이 중동 전역으로 “전염”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구역에서 이스라엘 군이 막사와 경찰서를 떠나자 그 자리를 팔레스타인 보안군이 채웠다. 자치정부는 제복 경찰과 사복 경찰 “정보” 부서들을 거느린 여러 기관으로 이루어진 공안 기구를 세웠다. 가장 핵심적인 기구는 예방보안군Preventive Security Service이었다. 수만 명의 인력이 모집됐다. 1990년대 중반에 자치정부 경찰 총수는 필요한 경찰 인력이 4만 명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56 2003년 IMF가 실시한 자치정부 재정 조사에 따르면 1995~2000년 자치정부 수입 중 9억 달러 가량이 아라파트와 그의 경제·재정 고문이 관리하는 “특별 계좌”로 입금돼 팔레스타인과 해외의 투자에 쓰였다. 57 아라파트 자신은 계속해서 검소하게 살았지만 다른 지도자들은 빈곤이 만연한 팔레스타인에서 새로 얻은 부를 과시적으로 소비했다. 라말라 등지에 새로운 주거 지역이 건설됐다. 이곳에서 “아부(PA의 지도적 인사)” 58 들은 경비가 삼엄하고 도시 엘리트층이 거주하는 저개발국가의 고급 주택단지를 연상케 하는 저택을 지었다. 이런 관행은 민족운동 전반에 해악을 끼쳤다. “민족주의의 징표”는 이제 중요하지 않으며 “게임의 법칙”을 지배하는 것은 돈이요 자치정부가 운영하는 경찰국가 내에서의 입김이라고 여기는 부패한 관료들은, 심지어 1차 인티파다 때 존경받던 젊은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줬고 그들을 그런 데에 물들게 했다고 팔레스타인의 베테랑 언론인 라미스 안도니는 지적한다. 59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특권들이 자치정부 엘리트들에게 몰렸다. 고위 관료들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면서 토목 사업 계약이나 주요 상품의 독점 공급 계약을 배분하고, 이동통신 기업과 텔레비전 방송국에게 영업권을 배분했으며, 사법 체계에 대한 장악력을 이용해 귀중한 토지 자원을 할당했다. 팔레스타인 영토에 투자하려는 기업들은 자치정부 관료들을 거쳐야 했다. 문지기 구실을 한 일부 고위 관료들은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모았고 걸프 자본, 걸프 국가와의 관계를 구축하거나 재구축했다. 가자 지구 예방보안군을 지휘하는 무함마드 다흘란은 아랍에미리트의 투자자들, 최고 관료들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오슬로협정 이후 10년도 안 돼 다흘란의 개인 자산은 1억 2000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하마스
60 이스라엘의 봉쇄, 끊임없는 식민, 거듭되는 군사 개입 때문에 빈곤이 만연했다. 그러다가 2000년에 2차 인티파다가 터졌다. 또 한 번 지속적인 대중 반란이 일어났지만 1987년만큼 활력이 있지는 않았다. 저항은 금세 이스라엘과의 무장 항쟁으로 수렴했다. 이 불리한 싸움에서 이스라엘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같은 해에 이스라엘은 아파르트헤이트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해 수많은 팔레스타인 공동체들을 더 고립시키고, 팔레스타인인들이 주요 경작지들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미 뿔뿔이 흩어진 팔레스타인 영토 간 통신도 더욱 어렵게 했다.
대다수 민중의 생활 수준이 붕괴했다. 1999~2007년 사이 팔레스타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다. 서안 지구 가구의 56퍼센트, 가자 지구 가구의 75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았으며 이는 역대 최악의 수준이었다.61 1987년 무슬림형제단의 한 분파가 가자 지구에서 설립한 하마스는 1차 인티파다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하마스에 호의적이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더 경계한 이스라엘은 세속적 민족주의가 받는 지지를 이슬람주의가 빼앗아 오기를 바라며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용인했다. 62 1990년대에 하마스는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꾸준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전형적인 포퓰리즘 전략인 복지 사업을 벌였고, 이스라엘에 협조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비판했다. 글렌 로빈슨은 오슬로협정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하마스가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파타는 이슬람주의자들인 하마스에게 빠른 속도로 지지를 빼앗겼다.오슬로협정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권리를 실현해 주지 못하자, 하마스는 위신이 높아지고 행동할 기회도 더 많아졌다.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점령을 완전히 거두어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하마스는 더 강해졌다. 하마스는 애초부터 오슬로협정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저항 세력이 될 수 있었다. … 하마스는 오슬로협정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의 정치적 대안이 됐다.
64 하마스가 내세운 핵심 구호 “이슬람이 답이다”는 무슬림형제단에게서 기원한 것이며 온갖 목적에 끼워맞출 수 있을 만큼 모호했다. 하마스는 처음 몇 년 동안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해 왔으나, 2004년에 들어서는 파타와 나란히 협상 임해 군사 활동도 중단하려 했다. 몇 년 간 하마스는 자치정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거부해왔으나, 방침을 바꾸고 선거에서 금세 놀랄만한 성과를 거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이슬람 파시스트”로 규정하여 국제적인 무슬림 위험 세력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러나 사실 하마스는 제한적인 목표와 실용적인 실천을 추구했다. 하마스도 파타의 협소한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하마스 창시자 셰이크 야신은 이렇게 주장했다. “하마스의 전장은 팔레스타인 영토다. 우리의 싸움을 점령지 바깥으로까지 끌고 나오고 싶지는 않다.”65 쿠데타 시도는 역풍을 낳았고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파타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팔레스타인은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와 서안 지구에서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압바스 정부로 분열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신속하게 봉쇄하고 2008년 12월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자치정부는 거침 없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스라엘과의 공조를 추진했다. 2007년 압바스는 살람 파야드를 총리로 임명했다. 경제학자였던 압바스는 1990년대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파견된 IMF 측 대표였다.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선호한 인물이었으며, 세계은행과 함께 ‘팔레스타인 개혁·개발 계획’PRDP을 설계했다. 이 계획은 급속한 시장화를 제안했다.
아라파트는 2004년에 사망했고 파타 창립 멤버인 마흐무드 압바스(아부 마젠)가 그의 뒤를 이었다. 압바스는 카타르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며 오랫동안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매진해 온 자였다. 2006년 하마스는 자치정부 입법위원회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마스 소속 ‘변화와 개혁’ 후보들은 132석 중 74석을 얻었고, 하마스 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야는 총리가 됐다. 이스라엘은 경악했고 미국은 가자 지구에서 무함마드 다흘란에게 쿠데타를 사주했다.팔레스타인 경제가 가야할 길은 다변화되고 번영하는 자유 시장 경제이며, 이를 주도할 선도적 민간부문은 아랍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사회, 역내 시장과 세계 시장에 열린 사회,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공정한 사회에 필요한 경제적 근간을 제공할 것이다.
67 이스라엘 정착촌의 모습을 닮은, 카타르 투기꾼들의 자금으로 건설된 이 언덕 위의 부촌은 압바스가 친히 서명한 강제수용 법안에 따라 몰수한 촌락의 토지 위에 지어졌다. 서안 지구에는 산업 단지가 조성됐다. 그곳에는 터키의 TOBB-BIS 개발 그룹 같은 해외 사업자들이 운영하는 사업장도 있었다. 이웃한 요르단처럼, 최저임금 미만을 받으며 노조를 결성하지도 못하고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된 외국인 노동자들을 주로 고용하는 특화산업단지를 도입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샬럿 실버는 이러한 산업 단지들이 “팔레스타인을 외주화”하는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68 특화산업단지는 이스라엘 기업과 합작회사를 차릴 기회를 열기도 했다. 자치정부가 이런 시도를 하기 전부터 이미 팔레스타인 기업들은 이스라엘 정착촌 내 농업 관련 사업 단지에 투자를 해 왔었다. 69 타리크 다나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기업들은 심지어 이스라엘에 대한 일부 유럽 국가의 보이콧과 규제를 우회하려고 이스라엘 정착촌 생산품을 “팔레스타인 산”으로 둔갑시켜 수출하는 데에 관여했다고 한다. 70
신자유주의 개혁은 열광적으로 추진됐다. “파야드주의” 하에서 서안 지구는 허구적인 전 지구적 풍요의 네트워크에 통합될 터였다. 금세 표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쇼핑몰, 호텔, 레스토랑, 고급 자동차 전시장이 건설되고,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는 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인 라바위시市는 “팔레스타인 최초의 계획 도시이자 … 팔레스타인 사상 최대 민간 부문 사업”으로 선전됐다.71 2013년이 되자 서안 지구 공공 부문 노동자 65퍼센트가 빚을 지고 있다고 답했다. 72 자치정부도 자신들의 빚을 갚지 못했고 공무원에게 월급조차 지급하지 못할 때가 자주 있었다. 2012년 팔레스타인 영토의 실업률은 27퍼센트에 달했고, 실질임금은 2006년 대비 10퍼센트나 낮았다. 73 그러나 자치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미국 전략가들, 국제 금융기구, 이스라엘 정치인, 기업의 노예가 됐다.
건설업이 성장하고 개인 소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커진 서안 지구의 개발 “거품”은 급증하는 주택담보대출과 개인신용 대출에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빚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지만, 2008~2012년 사이 서안 지구의 소비자신용 규모는 여섯 배나 증가해 4억 1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2012년 부동산·건설 신용 규모는 5억 달러를 넘었고 대부분은 미국과 걸프 국가 은행이 대출해 준 것이었다.팔레스타인을 팝니다
74 시리아에서도 정도는 덜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던 유사한 정책이 추진됐다. 75 팔레스타인에서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전례 없는 기회를 맞이했다.
열강, 국제 기업, 은행들이 중동을 바꾸기 위해 세운 계획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이웃한 이집트처럼 모든 것이 상품이 됐다. 무바라크 치하 이집트에서는 잇달아 시장화와 규제 완화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면서 부패한 거래를 통해 국가 자산이 국내 기업인들과 해외 투자자들에게 팔려나갔다. 한때 국가 자산으로 여겨진 모든 것이 결국 개방됐다. 무바라크와 그가 총애하는 수하들의 이익을 위해 “시장화”하고 사적 소유로 넘길 수 있는 모든 것들, 토지, 수자원, 발전, 제조업, 농업 지원, 은행 등이 개방 됐다.이스라엘 점령 하에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는 과거 “식민지 세계”가 유럽 열강에게 받은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군사 기구가 현지의 저항을 억누를 수 있었고, 갈수록 유순해진 민족주의 운동 지도부는 유혹에 약했다. 걸프 정권들의 형태를 한 중동 자본들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긴밀히 관여해 영향권을 확장하고 골치 아픈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길들이려 했다. 오슬로협정은 이런 구상에서 나름의 구실을 충실히 하려 하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을 팔레스타인 영토의 공식 통치자 자리에 앉혔다.
76 운동의 부상은 파타를 좌경화시켰고, 파타 지도부는 국가적 자원을 대중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했다. 파타는 (처음에는 레바논과 요르단에서) 학교, 진료소, 병원으로 된 복지 체제를 마련했고, 민족운동의 맥락에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들을 건설했다. 사메드 조직 77 이 추진한 대단치 않은 산업화 계획을 내놓았을 때 아라파트는 이것이 “관료주의에서 자유롭고 혁명의 결의와 정신이 깃든 자주적인 팔레스타인 경제와 공공부문의 핵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78 PLO는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면 토지, 수자원, 광물 같은 국가 자산을 포괄적인 민족 발전 계획에 사용하겠다는 전망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고수했다. 오슬로협정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러한 전망을 포기했다. 이들은 나세르의 후계자들, 다른 중동 지배계급과 신자유주의적 지향을 공유했으며,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소유하던 자원을 이러한 지향에 따라 시장에 내맡기고 자신의 이익 추구에 동원하려 했다. 그 결과 사회 계급 문제가 팔레스타인 역사상 전례 없는 중요성을 띠게 됐다.
파타는 아랍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같은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으로 1950년대 설립됐다. 그러나 파타는 집단적인 투쟁에 팔레스타인 대중을 동원하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었고, 팔레스타인 대중의 열망은 다른 지향을 낳았다. 중동 전역의 투쟁에서 드러난 변화 염원에 영향을 받은 지향이었다. 1950~1960년대에 벌어진 이집트 자유장교단 운동의 급진 민족주의, 이라크의 혁명적인 반란, 알제리와 예멘의 반식민주의 운동에서 드러났듯이 이런 지향의 초점은 정치적 독립, 토지·산업·금융·상업의 국유화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개혁에 있었다. 라쉬드 칼리디는 이렇게 말했다. “PLO는 심지어 레바논의 난민 캠프에 망명 중일 때조차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떠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민족끼리]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급진적인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랫동안 여기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은 결국 완전히 파산했다. 이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토지를 빼앗고 농민들을 쫓아내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입막음한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치정부의 보안 기구는 “점령의 연장이었며, 자치정부의 조치에 반역이니 배신이니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고 타리크 다나는 주장한다. 79
PLO는 단 한 번도 중동의 대중 투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PLO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제국주의, 중동 지배계급에 맞선 공동의 이익을 내세울 기회를 팔레스타인인에게서 빼앗아 가는 데에 열과 성을 다했다. 파타는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일부였지만 그 대중적 참여자들의 조직이 아니었다. 1970년의 요르단, 1987년 1차 인티파다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파타는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요구를 제기할 기회를 걷어찼다. 파타 지도자들은 민족 단결을 강조했다. 이는 이스라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맥락에서는 타당한 과제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중동에서 사태 전개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 용인이 됐을 때 민족 단결을 강조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중동의 다른 운동과 연대하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과 중동 지배계급에게 도전할 가능성을 꺾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공공연하게 이스라엘, 미국과 동맹을 맺고 신자유주의를 추진하자, 무조건80 BDS 운동은 빠르게 확산됐다. 특히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국제적인 사회 정의 운동과의 창의적인 교류가 이를 가능케 했다. 팔레스타인 점령지의 수백여 단체들이 BDS 운동의 선언문을 지지했고, 많은 이들이 노동조합, 종교 단체, 학생 조직, 해외의 연대 운동과 교류하며 연대를 건설했고, 팔레스타인의 고립을 완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파타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이들은 처음으로 전 세계 청중에게 주목받았다.
주류 민족주의의 위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기층 활동가들이 보이콧·투자철회·제재BDS 운동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고립과 기존 지도부의 통제를 돌파하려 한 것이었다. 2005년에 시작된 BDS 운동은 PLO를 우회했다. BDS 운동가 오마르 바르구티는 당시 PLO가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대의를 “이스라엘의 불의와 공존하기 위한 공허한 과정”으로 축소한 뒤 “수년 간 총체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 서술한다.혁명
’[이스라엘의 그늘 아래 있는 국가]를 세우려고 민족운동을 포기했다. 이제 파타가 상대하는 대중은 신자유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재편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며 자기 이익을 점점 구체화했다. 민족문제는 기업 자본과 국제금융 기구, 미국과 걸프 국가가 주도하는 신제국주의에 맞선 공동 투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가 됐다. 강탈, 추방, 수십 년의 이스라엘 식민지배 경험을 간직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은 계급 적대 정치학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게 됐다.
1950년대에 파타는 중동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할 독립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1990년대가 되자 파타는 본래 팔레스타인 영토의 일부만을 다스리는 ‘그림자 국가바로 이런 상황에서 2011년에 이집트의 대중 운동이 무바라크를 제거했다.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이에 기뻐했고 미움받던 독재자가 대중 항쟁에 의해 몰락한 것(여기서 대규모 파업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을 축하했다. 〈일렉트로닉 인티파다〉는 가자 지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마스르, 마스르, 마스르, 마스르” ⋯ 가자 시티 거리에 운집한 군중이 이집트의 아랍어 이름을 외쳤다. … 황금 독수리로 치장된 흑백적색의 이집트 깃발 수백여 개가 가자 시티의 주요 도로인 우마르 알무크타르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았고, 많은 이들이 과자를 나누며 불꽃놀이를 즐겼다.
82 팔레스타인 출신이 많은 도시 암만에서도 “이집트 만세”, “다음은 누구인가?”, “내일은 압바스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83 팔레스타인 활동가이자 작가인 알리 아부니으마는 이렇게 썼다.
가자 주민들은 튀니지와 카이로에서 외쳐지던 구호를 이렇게 외쳤다. “민중의 소원은 압바스 퇴진.”아랍 혁명은 아랍 세계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식을 다시금 일깨웠다. 한동안 이러한 의식은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고,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에나 나오는 순진한 발상으로 치부됐으며, 아랍 통치자들이 명백히 말살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아랍 독재자들은 … 아랍 민중의 기백 또한 죽었다고 생각했다. 혁명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자각을 되살렸고, 변화가 국경 너머로 확산돼야 한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팔레스타인 운동은 결정적 국면에 처했다. 중동에 단단히 뿌리내린 권력 구조에 맞서는 운동으로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맞았다.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식”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거리와 작업장에 있는 사람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을 단결시켰다.
85 그러나 압바스는 살아남았고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팔레스타인인 수천여 명이 월경을 시도할 때 이를 저지할 수 있었다.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처음에 더 신중했다. 마흐무드 압바스는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에게 지지를 표명했고, 경찰에게 라말라에서 일어난 혁명 지지 시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치정부가 독재 정권들을 선호하고 대중운동을 경멸한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축하 분위기가 확산되자 압바스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내각 전원 사퇴를 종용하더니 대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자치정부의 보안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압바스의 생사는 이스라엘과 공조하여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진압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수개월 동안 팔레스타인은 결정적 고비에 있었다. 2011년 6월, 이스라엘 관리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국경 인티파다”로 결집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마주한 이스라엘의 접경 지역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를 우려했다.86 그러나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 국가 내 핵심 권력 기반인 군부에게 도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비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무슬림형제단 후보 무함마드 무르시가 2012년 대통령에 당선하자 무슬림형제단은 팔레스타인에 관해 나 몰라라 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헌신해왔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무슬림형제단은 가자 지구를 그냥 그들의 운명에 맡겨 버렸다. 이집트의 세속주의 야당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헌신하겠다고 거듭 약속했음에도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가자 지구, 더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점령 문제를 회피했다. 2012년 나세르 추종자이자 대선 후보였던 함딘 사바히는 자기가 당선하면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팔레스타인 투쟁을 지원하고, 아랍 영토를 침탈한 시온주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87 사바히는 선거 유세에서 수많은 이집트 노동자와 혁명가들의 지지를 끌어모았지만 선거가 끝나자 침묵에 잠겼다. 무슬림형제단뿐 아니라, 자유주의자, 사민주의자, 이집트공산당 등의 다른 세속주의 야권 세력과 마찬가지로 사바히도 이집트 국가를 지휘하는 군부에게 도전하는 문제에서 마비됐다. 스탈린 시대의 잔재에 물든 민족주의자들과 공산당원들은 군부를 국익의 화신이자 “민중”의 역사적 대변자로 치켜세우고 군부 엘리트와 타협을 모색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의 급진적 활동가들을 배신했다. 2013년 7월 압델 파타 엘시시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자 이집트 내에서 팔레스타인을 가장 헌신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쫓겨났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은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수많은 시위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시위대는 이스라엘과의 조약과 무역 협정을 파기하고 가자 지구 쪽 국경을 개방하라고 무바라크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최고군사회의SCAF에 요구했다. 2011년 9월 대규모 군중이 카이로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습격했고, 이스라엘은 대사관 직원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최고군사회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요지부동이었고 이는 2011년 12월 대선으로 집권한 무슬림형제단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형제단의 자매조직인 하마스는 무바라크의 몰락이 “이집트 혁명 승리의 첫걸음이며 우리는 이 혁명의 모든 요구를 지지한다”고 환호했다.88 2014년 이스라엘은 다시 가자 지구를 야만적으로 공격했고, 이스라엘인들마저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인정했다. 이스라엘의 자유주의 일간지 〈하아레츠〉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 편으로 여겼던 나라[이집트 — 글쓴이]가 가자 지구를 불타도록 내버려뒀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했고 분노했다”고 전했다.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팔레스타인의 이익을 아랍 국가 내 대중운동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정서가 더 강해졌다. 이는 지난 50년 동안의 팔레스타인 저항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다. 알리 아부니으마가 주장하듯이, “혁명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자각을 되살렸고, 변화가 국경 너머로 확산돼야 한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중동 지배계급은 신자유주의 의제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에서 변화를 일으키고자 마음을 굳게 먹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쟁점은 혁명적 변화와 팔레스타인의 자유에 헌신하는 정치적 조류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은 “아랍의 봄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했다.주
-
출처: Philip Marfleet, An end to isolation? Palestine and the Arab revolutions.,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 145.
↩
- 이 글의 초교에 대한 논평을 해준 앤 알렉산더, 알렉스 캘리니코스, 엘리 마플릿, 존 로즈 그리고 앨런 왓츠에게 감사하다. ↩
- Ma’an News 2014. ↩
- Faheem and Thomas 2014. ↩
- Mozgovaya/Haaretz 2011. ↩
- Benn 2010. ↩
- Benn 2010. ↩
- Barghouti 2011, p56. ↩
- Khalidi 2014. ↩
- Khalidi 2014. ↩
- 나크바는 아랍어로 참사나 재앙을 뜻하는 말로, 1948년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과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추방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
- 베이루트는 레바논의 수도이고 다마스커스는 시리아의 수도이며, 암만은 요르단의 수도다 ─ 역자. ↩
- Ibrahim 1982, p48. ↩
- 파타Fatah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 운동을 의미하는 Harakat al-Tahrir al-Watani al-Falastini의 두문자를 뒤집어놓은 것인데, 그 의미는 쿠란에서 “개방” 또는 “승리”를 뜻한다. ↩
- 파타의 정치 전략의 변천과 불간섭 원칙에 대해서는 Schulz 1999를 보라. ↩
- Hart 1989, p157. ↩
- 아랍인들의 반이스라엘 무장 게릴라 ─ 역자. ↩
-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는 PLO 내 다양한 그룹을 후원했다. 이후 시리아는 알 사이카(리비아민족군 ─ 역자),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총사령부PFLP-GC, 팔레스타인해방전선, 팔레스타인인민투쟁전선 등 여러 분파를 후원한다. ↩
- Hart 1989, p286. ↩
- Hart 1989, p286. ↩
- 레바논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훌륭한 설명은 Sayigh 1979를 보라. ↩
-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지도자들은 보통 운동 내에서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가명으로 불렸다(아부 다우드는 다우드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
- Hart 1989, p304. ↩
- Rabbani and Hajjar 1988, p26. ↩
- Johnson and O’Brien 1988. ↩
- 남아공의 흑인 자치구역으로 1993년에 폐지됐다 ─ 역자. ↩
- Hanieh 2013, p105. ↩
- Johnson and O’Brien 1988. ↩
- Mideast Mirror 1988b. ↩
- Mideast Mirror 1988a. ↩
- Marshall 1989, pp167-168. ↩
- Mideast Mirror 1988c. ↩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20퍼센트를 포괄하는 서안 지구의 3퍼센트(A지역)만 “직접” 통치한다. 팔레스타인 인구의 70퍼센트를 포괄하는 서안 지구의 24퍼센트(B지역)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통치한다. 서안 지구의 70퍼센트(C지역)는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통치하고 있는데, C지역 내에는 고립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역이 227곳 있다. Gorenberg 2007, pp370-373와 Hanieh 2013, pp107-109를 보라. ↩
- Central Bureau of Statistics, 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1992-2006 and List of Localities, the Populations, and Symbols, 1995-2005. Statistical Yearbook of Jerusalem, Jerusalem Institute for Israel Studies, 1991-2004, cited in FMEP (Foundation for Middle East Peace), 2007. ↩
- BBC News 1998. ↩
- Yiftachel 2005, p128. ↩
- Davidi 2000에서 인용. ↩
- 미국 수출 때 관세를 면제받는 특구 ─ 역자. ↩
- 곧 이집트와 요르단에도 세워진 특화산업단지는 특정한 이스라엘의 투입물을 포함한 제조업 제품에 대해서는 무관세로 쉽게 미국에 수출했다. ↩
- Hanieh 2013, p104. ↩
- Hanieh 2013, p110. ↩
- Hanieh 2013, p110. ↩
- 살람 파야드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를 지내며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뜻한다 ─ 역자. ↩
- 1984년 튀니지에서 필자가 칼릴 알-바지르(“아부 지하드”로 불린 유명한 파타 지도자)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도시 외곽의 작고 가구도 없는 집의 레이더 밑에서 생활했다. 1988년에 그는 거기서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살해됐다. 살라 칼라프(“아부 이야드”)도 1991년 튀니스에서 같은 운명을 맞았다. ↩
- Hanieh 2013와 Abunimah 2014를 보라. ↩
- Hilal 1998, p124. ↩
- Farsakh 2002, p13. ↩
- Ellman and Laacher 2003, p11. ↩
- Farsakh 2002, p13. ↩
- Ellman and Laacher 2003, p39. ↩
- 10년 동안 노동자 30만 명이 이런 방식으로 충원됐지만 그 중 20만 명이 허가를 취소당해 불법 이주노동자가 됐다. Ellman and Laacher 2003, pp7, 19. ↩
- Farsakh 2002, p20. ↩
- Usher 1998, p148. ↩
- Usher 2006는 이 수치가 추정치라고 한다.. ↩
- El Fassed 2006와 Rose 2008. ↩
- Usher 1998, p155.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은 일간지 〈예디오트 아하라노트〉(1993년 9월 7일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우리가 하던 일을 더 잘 해낼 것이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것이며 — 이 점이 더욱 중요한데 — 이스라엘 병사들이 앞으로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할 것이다.” Usher 1998, p154에서 인용함. ↩
- Kuttab 2013. ↩
- International Monetary Fund 2003. ↩
- 많은 인사들의 별명이 아부~(~의 아버지)로 불리기 때문이다 ─ 역자. ↩
- Andoni 2004. ↩
- Hanieh 2013, p116. ↩
- 이슬람저항운동(Harakat al-Muqawamah al-’Islamiyyah)의 두문자인 하마스Hamas는 아랍어로 “열광”을 의미하며, 정치적 맥락에서는 더 정확하게는 “열정”으로 번역된다. ↩
- Robinson 2004. ↩
- Robinson 2004, pp125-126. ↩
- Milton-Edwards and Farrell 2010, p163. ↩
- “Palestine Papers”-Rose 2008을 보라. ↩
- 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2007, p19. ↩
- www.rawabi.ps/about.php를 참고하라. ↩
- Silver 2012. ↩
- 다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경제장관에게서 얻은 증거를 근거로 팔레스타인 기업가들이 서안 지구와 요르단 계곡의 이스라엘 정착촌에 투자했다고 보도했다. Dana, 2014a. ↩
- Dana 2014a. ↩
- Abunimah 2014, p85. ↩
- Dana 2014a. ↩
- UNCTA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2013, p6. ↩
- Marfleet 2013. ↩
- Hinnebusch 2012. 요르단에서는 이보다 더 미적지근한 시도가 있었다. Baylouny 2008을 보라. ↩
- Khalidi 2014. ↩
- PLO의 경제 기구 ─ 역자. ↩
- Khalidi 2014에서 인용. ↩
- Dana 2014b. ↩
- Barghouti 2011, pp56-57. ↩
- Almeghani 2011. ↩
- Almeghani 2011. ↩
- Almeghani 2011. ↩
- Almeghani 2011. ↩
- Naami 2011. ↩
- Yaghi 2011. ↩
- United Press International 2012. ↩
- Al-Ghoul 2013. ↩
- Diab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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