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티베트, 좌파 *
2008년 초 티베트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와 항의 시위들은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1950년대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올림픽 성화 봉송이 전 세계를 돌 때[2008년]에 항의 시위가 분출해, 티베트 민족주의의 잠재력을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중국 지배에 대한 반대가 여전히 광범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전 세계 좌파들은 티베트 항의 시위 지지 여부를 두고 분열했는데, 일부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반면 다른 일부는 티베트 민족주의와 그 운동 지도부를 미국이 지원하는 것에 관해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 짧은 글에서 2008년 항의 운동을 개괄한 다음 1949년 이후 티베트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중국과 티베트에 대한 몇 가지 논쟁적인 주장들을 검토하고, 티베트가 오늘날 중국 사회에 대한 분석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필자는 티베트인들의 항의 시위를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양상의 항의 시위와 같게 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인 좌파와 전 세계 좌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민족 억압이라는 특수한 문제가 있다.(무슬림이 다수인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위
1 주말이 되자 시위대 수천 명이 경찰의 대규모 체포와 군대 투입에 항의해 돌을 던지며 싸웠고, 저항 세력들이 라싸의 일부 지역을 장악했다. 중국 정부는 19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티베트 망명자들은 사망자 숫자가 80명이 넘는다고 했다.
이번 항의 시위는 1959년 실패한 봉기(아래 참조)의 기념일인 2008년 3월 10일에 티베트자치구의 구도區都 라싸에서 시작됐다. 소수의 불교 승려들이 평화 시위를 벌이자 중무장한 경찰이 이를 진압했다. 더 많은 승려들이 대규모 연행에 항의하자 중국 공안은 처음에는 최루가스와 곤봉을 사용했고, 그다음에는 실탄을 사용했다. 2 영국
6 1987년 10월과 1989년 3월에도 라싸에서 대규모 반란이 있었지만, 라싸 밖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7 항의 시위가 이번처럼 지리적으로 확산된 전례가 없었기에, 중국 지배자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참가자들의 정확한 규모를 알기는 불가능하지만, 〈뉴욕 북 리뷰〉의 티베트 전문 기자 로버트 바넷은 이렇게 주장했다. “시위 참가자 중 대략 80퍼센트가 티베트 고원의 동쪽 지역 ─ 칭하이성, 쓰촨성, 간쑤성 ─ 출신인데, 중국은 이 지역을 티베트로 간주하지 않는다.” 8
런던대학 경제학부의 티베트 전문가 한 명은 이렇게 지적했다. “시위 규모를 보나 시위 진압에 군대를 투입한 것을 보나 1950년대 이래로 전례 없는 사건이다.”9 이번 소요 사태의 본질이 인종차별적 학살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 반란자들은 중국 은행, 정부 건물 같은 중국 지배의 상징물들을 주로 표적 삼았다 ─ 중국인 기업가에 대한 습격이 적잖았고, 거리에서 개별 중국인에 대한 공격도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정부는 라싸 시위대가 한족인 중국인들과 후이족回族 무슬림들을 공격한 것으로 꾸미고는10 게다가 중국인 관광객들(2007년에는 200만 명이 넘었다)이 점점 늘어나면서 라싸가 “이국적인” 관광지가 됐지만, 이 점을 빼면 티베트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라싸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만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트인들이 중국인 기업가들에게 자신들의 좌절감을 쏟아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은 1960년대에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반란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억압을 상징하는 백인 소유 기업을 표적으로 삼은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 경찰과 군대가 저지른 폭력이 훨씬 더 많았다.
이런 공격은 1980년대 이래로 티베트에서 경제 발전이 급격하게 진행된 결과다. 특히 라싸에서 경제가 매우 빠르게 발전했지만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그 수혜를 전혀 얻지 못했다. 신규 일자리와 경제적 기회의 대부분은 한족과 후이족 이주민들 차지였는데, 이들은 티베트인들에 대해 무관심했고 최악의 경우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티베트 민족주의의 놀라운 부상은 중국 정부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안겨 주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민족주의나 티베트 독립을 현 상황보다 더 선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지도 않음에도) 자신들의 열망을 구현할 인물로 본다. 1949년 이후 티베트의 역사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1949년 이후의 티베트
1949년에 “역사적” 티베트는 문화적·언어적 공동체entity였지만 정치적 공동체는 아니었다. 상층 지주와 라마들(불교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독립적 티베트 정부가 이 지역의 주요한 두 성들(지금은 티베트 자치구에 속해 있다)을 다스리고 있었다. 북쪽의 암도Amdo성(지금은 칭하이성과 간쑤성으로 통합됐다)과 동쪽의 캄Kham성(지금은 쓰촨성과 윈난성으로 통합됐다)은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지방 군주가 지배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티베트 사회는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지배계급 내에서는 주요한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1950년 초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암도와 캄을 장악했다. 인민‘해방’군이 라싸로 진격한 그 다음해인 1951년에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가 당시 티베트 지배계급을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중국 지배를 받아들이는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한 티베트 공산당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의 당면 우선순위는 티베트 정부와 엘리트들과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 그러므로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생각은 모두 뒤로 미뤄졌다. 우리는 계급투쟁이나 착취 쟁점은 물론이고 대중 선동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2 ─ 이 있었지만 이 시기 중국 지배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티베트에서 종교적·정치적 서열 2위인 판첸 라마Panchen Lama의 적극적인 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1955년에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지도적인 승려와 지주들은 티베트와 중국의 완전한 통합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된 위원회에 참가했다.
초기에 약간의 저항 ─ 한 역사가는 이렇게 적었다. “1950년 초 라싸에 있던 중국인은 ‘라싸 거리는 한족에게 안전하지 않다’ 하고 보고했다.”13 때문이기도 했고, 또 공산당이 캄과 암도에서 매우 상이한 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55년에 중국 정부는 강제적인 토지 집산화를 추진하며 유목민들에게 정착을 강요했다. 1955년 말부터 캄과 암도에서 투쟁이 전면화했고, 1956년 초반에 윈난성에 속한 캄에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 14 이 항쟁은 잔혹하게 진압됐고 ─ 한 지역에서는 군인들이 농민들이 피신해 모인 절을 폭파시켰다 ─ 피난민 수천 명이 라싸를 떠났다.
하지만 허니문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티베트 내에 있던 많은 지도적인 공산당 관료들의 “위대한 한족 국수주의”15 그러나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이었음에도 중국공산당은 이 때문에 티베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고, 이 사건 그 자체와 캄에서 온 피난민 모두 때문에 긴장은 고조됐다. 1959년 3월 라싸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 반란이 패배한 뒤에 달라이 라마와 피난민 수천 명이 인도로 망명했다.
대만 국민당 정부와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이 봉기에 대해 제한적인 지원밖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지원 때문에 사람들이 고무되지도 않았고, 이들이 제공한 무기조차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16 이 반란 직후 중국공산당은 조심스런 정책을 포기했고, 티베트 중부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확립했다.
중국은 CIA가 이 봉기를 직접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체링 샤카Tsering Shakya는 중국 정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애초에 시위는 “중국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뿐 아니라, 그들[티베트 민중]의 지도자를 배신했다고 여겨진 티베트 지배 엘리트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샤카는 장인 길드와 (매우 소수인) 티베트 노동계급의 조직인 상호부조회의 지도적인 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17 대약진운동이 캄과 암도에 미친 영향은 중국의 그 어느 곳보다 최악이었다. 칭하이성의 한 현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굶어 죽었다. 간쑤성, 칭하이성, 쓰촨성 사망자의 합이 중국 나머지 지역 전체의 사망자 총합보다 많았다. 이 지역은 농촌 경제가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호시절에조차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 관료들은 반란 탄압, 강제 집산화 외에도 농민들에게 전통적인 보리 농사를 중단하고 밀을 재배하도록 강제했는데, 밀은 그렇게 높은 고지에서는 잘 자라지 않았다. 18 칭하이 출신인 판첸 라마는 밀 재배 정책을 되돌리라고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지만, 이 때문에 비판받고 결국 감옥에 갔다.
티베트 중부 지역은 대약진운동을 겪지 않았지만,19 문화혁명으로 티베트에서 티베트 문화가 전면적인 공격을 당했다. 대체로 중국을 지지하는 한 저자는 이렇게 썼다.
대약진운동, 중국 정부의 막중한 요구, 군대 주둔 때문에 티베트 전역에서 생활 수준이 하락했다. 그런데 1966년 이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무자비한 파괴와 투쟁 때문에 손해가 막심했다. … 티베트인 수천 명이 살해됐다는 소문은 차치하더라도, 홍위병의 만행은 입증할 수 있는 것만 봐도 소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자살로 내몰렸다. 티베트 옷을 입고 있거나 한족이 아닌 머리 스타일을 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다. 종교와 관련된 것은 모두 파괴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21 인민‘해방’군이 이 반란을 진압했고, 반란 지도자들은 라싸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하지만 이는 티베트에서 중국이 실패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1969년에 천년왕국 신봉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 18개 현을 포괄했지만 결국 중국인·티베트인 관료들이 자행한 대학살로 끝났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자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실패한 경제 전략을 포기하고 “시장 사회주의”와 세계경제에 대한 문호 개방을 추진했다. 새로운 전략의 일환으로 개인의 자유를 상당 부분 허용했는데,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티베트에서는 중국 정부가 대다수 티베트인들의 상황이 악화됐음을 인정하게 됐다. 덩샤오핑과 함께 최고 지도부에 있었던 후야오방은 급격한 정책 변화를 추진해, 티베트에 긴급 구조를 제공하고 사원寺院 폐쇄를 해제했으며, 티베트인 관료들의 지위를 빨리 높여 줬다. 1980~1985년에 티베트에 사는 중국인 중 거의 절반이 티베트를 떠났다.이런 부분적인 개혁으로도 티베트에서 생활 수준이 높아졌고, 티베트인들의 일상을 옥죄던 최악의 제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은 더 많은 변화를 갈망했다. 1987년 9월 시위는 달라이 라마가 미국을 방문해 중국이 가장 난처하던 때에 벌어졌다. 이 시위 후에도 소규모 시위들이 이어졌다. 1987년 초 후야오방은 국가 경제 전략에 대한 자신의 주장 때문에 제거됐지만, 티베트인들은 후야오방 제거를 “[티베트] 자유화”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였다.
23 하지만 이 항의 시위는 1989년 5월 베이징에서 시작된 더 거대한 운동과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톈안먼 광장” 학살에 묻혔다. 티베트는 텐안먼 광장 학살 이후 이어진 전국적 탄압에도 시달려야 했다.
1989년 초 판첸 라마가 죽으면서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지지한 핵심 지도자가 사라졌다. 1개월 뒤 중국공산당 티베트자치구 서기는 티베트 민족주의에 대한 유화적 태도 때문에 해임됐다. 판첸 라마의 장례 행렬이 경찰과 충돌했고, 1989년 3월 5일에는 중국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최소 10명이 사망했다. 뒤이어 벌어진 소요 사태는 1959년 이래 가장 거대한 저항으로 발전해 라싸의 중심부를 3일 동안 장악했다. 계속된 탄압으로 수백 명이 살해됐고, 수천 명이 감옥에 갔다.24 이들 중 한 명이 죽으면 그 정신이 임종 당시에 태어난 어린아이 육체에 깃든다고 알려져 있다. 승려들이 판첸 라마의 화신일 듯한 후보 아이들을 달라이 라마에게 데려가면, 달라이 라마가 누가 다음 판첸 라마인지를 결정한다. 반대로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면 누가 다음 번 달라이 라마인지를 판첸 라마가 결정한다.
판첸 라마를 이을 인물을 찾는 과정에서 중국은 티베트의 종교 기구 안에서 지지를 더 잃었다. 티베트 신정 체제에서 핵심 인물은 판첸 라마와 달라이 라마 두 명이다.25 이 반란이 진압된 후 이전에는 중국 지배를 지지했던 수많은 지도적 승려들이 축출당했다. 종교 계승자를 장악하려는 [중국 정부의] 시도는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사회의 종교적·정치적 최고 지도자로 굳히는 결과만 낳았다.
그래서 판첸 라마 사후 달라이 라마가 다음 판첸 라마를 찾는 시점에, 중국 정부도 중국에 우호적인 승려들을 조직해 판첸 라마의 화신을 찾았다. 1995년에 양측은 자기가 찾은 쪽이 [진짜] 판첸 라마의 화신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최종 선택한 사람은 그 가족과 함께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전에 판첸 라마가 있던 티베트 제2의 도시인 시가체日喀则의 한 사원에, 중국 정부가 선택한 사람을 판첸 라마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 것이 문제가 됐다. 중국 지배에 대한 종교적 지지의 근거지였던 곳에서 되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경제 발전도 티베트인들이 중국 지배에 순응하게 하는 데 거의 도움이 안 됐다.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으로 농업의 사영화가 추진되고 뒤이어 향진기업이 성장했고, 1991년 이후에는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수출지향적인 소규모 산업이 성장해 경제가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26 그러나 티베트는 이 중 어느 것도 경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서부와 동부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면서 중국 경제에서 점점 더 부차적인 지역이 됐다. 티베트 경제가 중국 전체에 견줘 수치상 더 빨리 성장했다고 하지만, 이는 출발점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티베트에서 경제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국가 영역에 집중돼 있었고, 티베트인들은 정부의 관급 공사나 건설 공사에서 거의 배제됐다. 27 최근 성장한 관광업에서도 티베트인들보다는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나 중개인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티베트환경네트워크Tibetan Environmental Network’는 이렇게 지적했다.
2000년 이래 경제 발전에서 두드러진 성과는 2001년에 정부 지출이 75퍼센트 급증한 덕이었다. 그 결과 2001년에 지방정부 재정적자 규모는 지방정부 국내총생산GDP의 70퍼센트를 넘어섰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은 대다수 티베트인들의 주요한 일자리 공급처인 농업으로 전혀 흘러가지 않았다. “경제 발전”은 매우 야심 찬 강제적인 주택 개량 계획이라는 모습으로 티베트 농촌에 빠르게 침투했다. 정부는 2006년 한 해에만 티베트 인구 10퍼센트의 주택을 개량했다고 주장했다. 2008년 3월에 영국 방송 프로그램인 〈디스패치Dispatches〉의 “티베트에서의 보도”는 이런 정착 정책의 현실을 잘 보여 줬다. 미국 인디언이나 호주 토착민들에 대한 정책과 마찬가지로, 이 정착 정책의 목표는 유목민들을 보호구역 안에 정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용이 없는 농촌 게토에는 알코올 중독이 판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주택 개량 사업은 사회 안전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된 측면도 있지만, 개척자들이 티베트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더 많이 약탈하는 데에 도움될 것이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은 경제 발전에서 더욱 배제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피억압자의 한숨이자 심장 없는 세계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이 말은 1949년 이후 티베트의 경험에 딱 들어맞는다. 티베트에서 불교는 티베트인들이 중국 지배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면서 더 강화됐다. 점령에 반대하는 격렬한 항의가 운명과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강조하는 종교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 모순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 신념의 실질적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가 소외뿐 아니라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도 표현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50년 넘게 지배했지만,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온다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 듯하다.
티베트와 좌파
30 거의 모든 공산당들이 쿠바공산당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중소갈등이 오래 전에 끝났고, 대부분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중국 인민을 강력히 지지한다. 우리는 티베트 문제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은 우리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연대다.” 이 선언이 베네수엘라와 중국 사이에 석유 거래가 늘어난 배경인 듯하다. 31
좌파들 사이에서도 티베트 항의 시위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거의 모든 좌파는 항의 시위를 예상치 못했다. 쿠바공산당이 중국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32 나 슬라보이 지젝 33 같은 반자본주의자들이 중국의 지배가 평범한 티베트인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이를 옹호한 것은 정말 충격적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부 좌파들이 중국에 대한 아무리 작은 비판도 불편해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뉴 스테이츠먼〉 기사에 대한 다음의 논평은 그 한 예일 뿐이다.
하지만 마이클 파렌티우리가 다른 나라에 개입하거나 침략하지 않고 그들이 선택한 대로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가 중국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조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나는 것이다.
물론 항의 시위에 대한 대다수 언론의 보도는 위선적이기 때문에, 이런 위선을 폭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티베트 점령에 반대하는 것과 이라크·아프가니스탄·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중국을 최강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한 보루로 보는 대다수 좌파들의 견해에 맞서,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 ─ 우리는 그 어느 쪽 지배계급도 지지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 ─ 라는 예전의 구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좌파가 티베트 항의 시위, 티베트 독립 운동, 티베트 독립 사상(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다)을 반대하는 배경에는 세 가지 주요 논지가 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장악할 권리가 있다; 달라이 라마는 봉건제를 회복시키려는 반동적 인물이다; 티베트 독립 운동은 미국 제국주의가 쓰는 장기판 위의 졸이다.
“티베트는 중국의 것이다”
우리는 이 주장을 일거에 다룰 수 있는데, 앞선 문장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면 된다. “티베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이.” 8세기 이후 티베트-중국 관계에 대한 중국의 설명이 전적으로 사실이더라도 티베트 민중에게는 자결권이 있다. 평범한 티베트인들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중국에 포함되자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점령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중국의] 역사 설명조차 사실이 아니다. 티베트가 여러 차례 점령당한 것은 맞지만, 티베트에서 중국을 몰아낸 적이 있거나 중국 지배가 형식상의 지배일 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략 1250년경 티베트는, 징기스칸이 세웠고 나중에 중국 원나라를 세운 몽골 제국에 통합됐다. 1368년에 몽골 제국이 한족의 명 왕조에 망하면서 이들 사이의 관계는 느슨해졌다. 대체로 중국 편인 한 역사가에 따르면, “1566년부터 명 왕조가 몰락한 1644년까지 베이징과 라싸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관계가 전무했다.” 명 왕조는 더욱 팽창적인 청 왕조에 의해 무너졌는데, 청 왕조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왕리슝
1727년부터 1911년까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나타내는 주요한 상징은 주장대신钦差驻藏办事大臣[황제를 대리하여 신장에 머무는 관리 - 역자] 관청이었다. … 그러나 라싸에서 청 제국의 존재는 “주로 주장대신 자신과 몇 명의 병참 담당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티베트어를 하지 못해 통역자에 의존했으며, 일 년에 몇 차례 순시를 위해 라싸를 비운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라싸에서 보냈다.
1904년에 영국군이 잠깐 티베트를 점령했는데, 티베트에서는 [영국] 중앙정부의 제재를 받지 않고 약탈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침략자들은 한 달도 머무르지 않고 떠났는데, 그로 인해 티베트 정부와 중국의 통치 모두 심각하게 약화됐다. 청 왕조가 1911년에 무너지자 티베트 정부는 이 기회를 틈타 모든 중국 군대와 관리들을 내쫓았다. 그때부터 1949년까지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적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영국 지배기로 보지만, 티베트 정부는 영국에게서 약간의 무기를 손에 넣었고, 인도와는 무역 거래를 했으며, 영국이 티베트에 대사를 파견하려는 것을 거부했다. 어떤 기록을 보면, 1940년대 말에 티베트에는 유럽인이 단 6명뿐이었는데, 그중 3명은 티베트 정부가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37
역사를 보면, 티베트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중국의 지배나 영향력 행사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티베트 지배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사실상 중국이 무력으로 티베트 대중을 지배할 권리를 옹호한다는 것이다. 흔히 티베트 구체제가 끔찍했다는 이유로 이를 정당화하곤 한다. 물론 1959년 이전까지 티베트는 매우 가난했고 질병이 창궐했으며 봉건적 노예 소유주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영국·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에서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논리다. 이들이 식민 점령한 곳 어디서도 우리가 바라는 그런 [이전보다 진보한] 사회가 재확립된 사례는 없었다. 그러므로 티베트에서 중국의 티베트 점령이 “역사적 진보”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달라이 라마
38 망명한 달라이 라마 정부가 알제리민족해방전선·베트남민족해방전선·산디니스타 같은 “고전적” 민족해방운동과 같지 않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가 이끌고 다니는 저명 인사들을 조롱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그리고 필자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운동은 독립이 아니라 중국 지배를 유지하는 하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티베트 독립 운동 지지는 망설인다. 이런 태도는 이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39 하지만 그 무엇도 쿠르드 민족이 받는 민족적 억압을 완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에게 특정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투쟁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특정 조직을 지지하는지의 여부와는 구분된다. 예컨대 이라크와 이란 내 쿠르드 단체들은 지난 60년 동안 그 지역의 변화하는 정치 지형에 따라 자국 지배계급, 인근 국가의 지배계급, 러시아나 미국 같은 제국주의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이에 비춰 보면, 특정한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는 그 지도부의 정치에 대한 지지에 따른 조건부 지지가 아니고, 독립 후 생겨날 사회의 성격에 따른 조건부 지지는 더욱 아니다.(1959년 이전 사회를 복구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할 것이며, 달라이 라마나 그 주변 인물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단정할 증거도 없다.) 달라이 라마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것을 명료하게 밝히도록 하기도 힘들다. 많이 인용되는 인터뷰에서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주장했다.
현대의 모든 경제 이론을 살펴 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는 도덕적 원칙에 기초한 반면 자본주의는 성과와 이윤에만 집착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평등이라는 토대 위에서 부의 분배와 생산수단의 평등한 활용에 관심을 둔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권리가 박탈당한 사람들의 운명뿐 아니라 노동계급 ─ 즉 대다수 ─ 의 운명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소수가 강요하는 착취의 희생자들에게도 관심을 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에 관심이 있다. 그 경제 체제는 공정한 것 같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조지 부시나 앙겔라 메르켈을 만났을 때 이를 부각하지는 않았을 성싶다. 실제로 티베트 운동의 지도부는 정부 구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세계 열강과의 어떤 거래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예컨대 아일랜드공화국 운동이나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지도부와 꽤 달라 보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유사하다.
미국 제국주의의 도구?
티베트가 미국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주장은 티베트 투쟁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여러 주장 중 가장 심각한 주장이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다. 이스라엘의 평화 활동가 우리 아브네리는 널리 인용되는 기사에서 이런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나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티베트 독립] 운동을 이용한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티베트인들을 지지한다. 명백히 CIA는 소요 사태를 기획하고 조직했으며, 미국 언론들은 전 세계적인 선전 책동을 주도하고 있다.
42 미국의 개입과 관련한 더 폭넓은 논점에 대해서는 쉽게 제쳐버릴 수 없었다. CIA가 1956~1958년의 봉기에 참여한 티베트인 중 소수를 훈련시키고 무장시키는 데 관여했던 것은 사실이다(비록 숫자는 적고 영향력도 미미했지만). 1959년에 달라이 라마의 피난을 CIA가 도운 것도 사실이다(요원 단 두 명이 개입한 것이었다 해도). 43 하지만 미국이 그 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에서 지출한 비용과 비교하면, 티베트에 사용한 자금이나 물자는 극히 적으며, 그나마도 베트남 전쟁이 가열되던 1960년대 내내 줄었다. 그룬펠드는 1970년에 “CIA의 자금이 완전히 말랐다”고 지적하면서 “1959년 이후 미국의 개입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티베트에서의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하고 결론지었다. 44
체링 샤카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에서 이 같은 주장을 반박했지만,1971년 리차드 닉슨의 중국 방문 후 미·중 양국은 소련에 맞서 상호 협력 관계에 접어든다. 중국이 미국 제국주의의 불변의 적대 상대라고 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곤 하지만 말이다. 이 동맹의 대가 중 하나가 티베트 망명 집단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미·중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미국의 전략가들이 중국과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경쟁 심화를 우려하면서 몇몇 티베트 조직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재개됐다.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아에서 “색깔 혁명”에 깊숙이 개입했던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NED’이 티베트를 지원하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인 듯하다.
45 둘을 합해도, 아프가니스탄의 다양한 무자헤딘mujahideen[이슬람 전사 ─ 역자] 집단들에 제공된 수천만 달러에 견주면 새 발의 피다. 사실상 티베트는 미·중 관계와는 대개 상관이 없다. 네오콘의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a New American Century’를 옹호하는 두 사람은 이렇게 썼다.
이 단체가 지원 규모를 발표한 마지막 해인 2006년에 이들은 티베트에 있는 11개 조직에 약 30만 달러를 ─ 주로 땅콩으로 ─ 제공했다고 밝혔다. 파키스탄의 노동조합 한 개를 지원하는 프로젝트에도 이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다.미국은 싫든 좋든 간에 티베트에서 중국의 주권을 대체할 실질적 대안이 없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 독립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기회가 없는데도 독립을 목표로 내세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47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미국은 중국을 방해하려는 목적에서 티베트 [독립 운동] 단체들에 소규모 형식적인 지원을 할 수도 있겠지만 티베트는 계속 부차적 존재로 남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미국이 중국을 군사적 경쟁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티베트 운동을 전략적 동맹으로 간주하고 이용할 것이며(“코소보 선택”), 일부 티베트 운동도 그렇게 간주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는 희박한 가정이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실현되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 경제는 긴밀히 연결돼 있고, 서로는 경쟁자일 뿐 아니라 미래의 성장(미국의 경우 약한 경기침체가 올 경우)을 위해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정치적으로도 중국과 미국은 경쟁자이자 동반자다. 중국은 미국의 계속되는 아프가니스탄 지배와 더 넓게는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고(이것이 티베트와 신장에서 자행되는 탄압을 방어할 명분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대처하는 데도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그리고 여러 티베트 단체들은 자신들에 제공되는 무엇이든 수용할 테지만, 티베트 민족주의와 이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단체들이 미국 제국주의의 도구로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티베트에서 중국의 지배라는 냉혹한 현실과 티베트인 대부분이 중국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지지를 얻고 있다. 티베트 독립 운동 지지 여부를 둘러싼 서구 좌파들 사이의 논의에는 민족 억압과 저항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인식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특정 티베트 독립 운동 단체를 지지할 것인지, 티베트 독립은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독립 티베트의 국경선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은 부차적이다. 2008년의 소요 사태와 항의에서 중요한 점은 이 사건들이 중국 지배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극명히 보여 주었다는 것, 칭하이성·간쑤성·쓰촨성 같은 티베트 지역에서 티베트 민족주의 의식이 각성함을 보여 주었다는 데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중국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을 환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일들도 환영해야 한다.
결론
48 , 올림픽 성화 봉송 방해를 규탄하는 시위들이었다.(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시위들은 프랑스 슈퍼마켓 체인인 까르푸를 겨냥했다.) 49 중국 내부에서 민족주의가 분출하면 그 화살이 쉽게 정부로 향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로서는 민족주의의 분출이 언제나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시위들이 정부에 좋은 일은 아닐지라도 이 시위가 끌어들이는 대중이 다른 대상에 항의를 전가하도록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중국 내부에서 티베트 항의 운동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민족주의 정서의 폭발50 그러나 이런 폭발과 티베트인들의 항의 시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2005년 상반기에 중국 전역에서 대략 100명이 대중 시위 와중에 살해됐다. 51 이는 티베트 항의 시위 사상자와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숫자다. 이 차이에는 경찰과 군대의 “개입 기준” 차이가 반영돼 있다. 한족이 다수인 지역에서 경찰과 군대는 시위대에 거의 발포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군대나 무장 경찰을 배치하지도 않는다. 티베트와 이슬람 지역에서는 무장 대응이 기본이다.
2000년대 초 이래로 중국의 농촌과 도시에서 대중 시위, 파업, 소요가 점증하자, 중국 정부는 시위권과 파업권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52 이와 반대로 티베트와 이슬람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들은 중앙 정부를 겨냥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듯 비치며, 지방 관리들이 중앙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모호함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지방의 항의 시위들은 종종 지방 관료나 경영주들을 겨냥하는데, 중앙 정부가 이 사실을 알면 즉시 사태를 바로잡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한 농민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몇몇 악독한 관리들이 중앙에 사실을 숨기고 있다. 농민들이 불만을 드러내지 않으면 황제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내가 황제에게 말하면 그는 나에게 고마워하고 나를 돌봐줄 것이다.”53 불교에 영향을 받은 상당수 중국인들도 티베트 문화를 존중하고, 티베트 독립까지는 아닐지라도 항의 운동에는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는 명백히 소수 견해일 뿐이다. 2008년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는 티베트에서의 항의 운동을 계기로 무슬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는데, 54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은 앞으로 벌어질 시위들에 더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다.
중국 내부에도 티베트인들의 시위에 대한 지지가 일부 있다. 반대파 지식인들이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정부를 비판하고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호소하는 청원서를 배포했다.중국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주요한 동기는 이곳에서 얻는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보다는 전략적 이유와 민족주의적 자부심 때문이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티베트 자치구의 경우에는 점령 비용이 점령으로 얻는 이득보다 더 크다. 중국에서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과 티베트인들이 다수인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인구 면에서는 중국 전체 인구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중국은 나라 전체에서 주요한 격변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들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들 인구를 주변화하는 경제 발전은 이들 지역에서 중국 지배에 대한 반감을 더 깊어지게 할 것이다. 앞으로 충돌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문제는 좌파들이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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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arlie Hore, China, Tibet and the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no.119호(June 2008).
↩
- “Gunfire On The Streets Of Lhasa As Rallies Turn Violent”, Guardian, 15 March 2008, www.guardian.co.uk/world/2008/mar/15/tibet.china1. ↩
- “Paramilitaries Open Fire On Hundreds Of Monks And Nuns At Tibet Rally”, Times, 25 March 2008, www.timesonline.co.uk/tol/news/world/asia/article3612661.ece. ↩
- “Tibetan Monk Speaks Out”, BBC News, 21 March 2008, http://news.bbc.co.uk/1/hi/world/asia-pacific/7308890.stm. ↩
- “Tibet Protests Spread To Neighbouring Provinces”, Guardian online, 16 March 2008, www.guardian.co.uk/world/video/2008/mar/16/xiahe.gansu. ↩
- “Tibet Demonstrations 2008”, Free Tibet, www.freetibet.org/newsmedia/2008-protests-summary. ↩
- “Tibet Untamed: Why Growth Is Not Enough At China’s Restive Frontier”, Financial Times, 31 March 2008. ↩
- Barnett 2006에 1987년 반란의 목격담이 포함돼 있다. ↩
- Barnett 2008. 내가 본 바로는 이 기사가 항의 시위들의 확산에 대한 뛰어난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절의 다른 곳에서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을 인용한다. ↩
- 중국의 민족에 대한 공식 목록에 따르면, 한족은 인종적으로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 집단이며, 후이족은 이슬람을 믿는 인종이다. ↩
- 어떻게 티베트 사람들이 경제 성장에서 배제됐는지에 대한 서구의 설명은 “Tibet: Death by Consumerism”, New Statesman, 30 August 2007, www.newstatesman.com/200708300022와 Barnett 2006 그리고 French 2003을 보라. ↩
- Goldstein, Sherap and Siebenschuh 2004, pp160-161. ↩
- Grunfeld 1987, p111. ↩
- 생생한 예를 보려면 Goldstein, Sherap and Siebenschuh, 2004, pp169-184를 참고하라. ↩
- 그 항쟁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Shakya, 1999, pp136-144를 참고하라. ↩
- Grunfeld 1987, pp144-160, and Shakya 1999, pp 170-180. 두 책은 미국 중앙정부부와 국민당의 개입의 범위를 매우 상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두 책에서 공통적인 내용은 관련된 사람이 소수라는 점과 그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다는 점이다. ↩
- Shakya 1999, pp192, 199. ↩
- 대약진운동(1958~1960년)은 농촌을 집산화하고 도시와 농촌에서 착취를 거대하게 증대시켜 산업 발전을 촉진시키고자 한 재앙적인 시도였다. ↩
- Becker, 1996. 베커는 대약진운동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자료를 제공한다. 대약진운동이 암도와 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Becker pp166-182를 보라. ↩
-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은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이 권력 장악을 유지하고 그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주로 젊은이로 구성된)들은 “권위적인 인물들”과 혁명 전에 중국의 상징이었던 것들을 공격했는데, 1968년 초반 이후부터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통제에서 차츰 벗어났다. ↩
- Grunfeld 1987, pp180-181. ↩
- See Shakya 1999, pp344-347. ↩
- Wang Lixiong 2002를 보라. ↩
- 이 폭동들을 자세하게 묘사한 인쇄물은 거의 없다. 여기서 밝힌 내용은 Hilton(2000 pp197-198)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망자 숫자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사를 보라. “Chinese Said To Kill 450 Tibetans In 1989”, New York Times, 14 August 1990. ↩
- 이런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Grunfeld(1987, pp37-45)를 보라. Siegel(1986, pp137-162)은 불교에 대해 훌륭한 유물론적 해석을 하고 있다. ↩
- Hilton 2000, pp262-274. ↩
- 더 많은 내용은 Hore 2004를 보라. ↩
- 한 티베트 망명자가 정부 수치들을 분석한 것은 www.phayul.com/news/tools/print.aspx?id=8864를 보라. ↩
- “Deciphering Economic Growth in the Tibet Autonomous Region”, www.tew.org/development/eco.growth.tar.html. ↩
- Marx 1844 (강조는 원문 그대로). ↩
- 예를 들어 Aida Calviac Mora, “Cinco Preguntas Sobre Tíbet”, Granma, 11 April 2008을 보라. www.walterlippmann.com/docs1875.html에서 영문 번역을 볼 수 있다. ↩
- “We Fully Support China On Tibet: Hugo Chavez”, the Hindu, 11 April 2008; “Venezuela And China Boost Ties With Refinery Deal”, Reuters, 10 May 2008. ↩
- Parenti 2007. ↩
- Slavoj Zizek, “No Shangri-La”, letter to London Review of Books, 24 April 2008, www.lrb.co.uk/v30/n08/letters.html. ↩
- www.newstatesman.com/200805010020. ↩
- Grunfeld 1987, p37. ↩
- Wang Lixiong, 2002. ↩
- Grunfeld 1987, pp72-78. ↩
- 예를 들어 French 2003을 보라. ↩
- 예를 들어 Chaliand 1980을 보라. ↩
- “Tibet and China, Marxism, Nonviolence”, http://hhdl.dharmakara.net/hhdlquotes1.html. ↩
- Avnery 2008. ↩
- Shakya 2008. 이 글은 다양한 망명 티베트 운동과 티베트 내부의 저항 사이의 몇 가지 분기점을 추적하고 있다. ↩
- Norbu 1994, p195. ↩
- Grunfeld 1987, pp157, 158. ↩
- 수치를 보려면 www.ned.org/grants/06programs/grants-asia06.html을 참고하라. ↩
- Bernstein and Munro 1998, p214. ↩
- 더 자세한 내용은 Hore 2004를 보라. ↩
- 예를 들어 “Sympathy On The Streets, But Not For The Tibetans”, New York Times, 18 April 2008, www.nytimes.com/2008/04/18/world/asia/18china.html을 보라. ↩
- “Protests In China Target French Stores, Embassy”, Washington Post, 20 April 2008. ↩
- 나는 최근 Hore 2008에서 이 주제를 다룬 여러 책을 논평했다. ↩
- Leonard 2008, p73. ↩
- Quoted in O’Brien and Li 2006, p45. 이 문헌은 특정 황제가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계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
- “Chinese Intellectuals Condemn Tibet Crackdown”, International Herald Tribute, 24 March 2008, www.iht.com/articles/2008/03/24/asia/chinasub.php. ↩
- “Muslim ‘Separatists’ Protest As Unrest Spreads In China”, Guardian, 2 April 2008, www.guardian.co.uk/world/2008/apr/02/ch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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