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현재의 이슈들
흑인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 미국 흑인 해방 운동을 중심으로 *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시市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 네 명에게 살해당한 후 미국 전역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 물결로 뒤덮였다.
이 운동은 미국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인종차별 반대 운동으로 성장했다. 〈USA투데이〉에 따르면 5월 26일 ~ 6월 29일 사이에 미국 모든 주에 있는 총 1735개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운동의 특징을 이렇게 지적했다. “흑인 청년이 이끄는 대열에서 백인·라틴계 청년들이 함께 행진하는 다인종 시위다. 미국에는 대규모 시위도, 오래 이어진 운동도 적잖았지만, 규모가 크면서도 오래 이어진 운동은 거의 없었다.” 인종차별뿐 아니라 실업, 가난, 전염병 같은 노동계급 공통의 경험이 이런 다인종 저항의 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반란은 2007년 시작된 월스트리트발 경제 위기가 해결되지 않은 결과이자, 2019년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분출했던 반란 물결의 미국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경찰의 흑인 살해를 규탄하며 시작됐지만, 운동이 성장하면서 체계적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흑인 해방으로 나아갈 방향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인종차별은 무엇이고 왜 유지되는지를 간단히 살펴본 후, 미국의 지난 흑인 해방 운동들의 배경과 전략을 검토한 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흑인 해방의 가능성과 전략을 간단히 짚고자 한다.
인종차별의 등장과 유지
인종차별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는 ‘피부색 등 바꿀 수 없다고 여겨지는 특성에 근거한 체계적 차별’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듯, 인종차별은 17~18세기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아주 특수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생겨났다.
자본주의 사회는 형식적·법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예속 노예에 의존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하지만 ‘굶어 죽을 자유’가 있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도망치면 생산력 증대를 뒷받침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미국 남부의 대농장주들은 ‘노동자보다 더 낮은’ 존재를 만들어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그저 편견(허위의식)임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 사회적 토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인에 대한 노예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시작된 인종차별은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도 유지됐다. 이를 위해 지배계급은 집요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크게 두 가지 필요에서였다.
첫째, 자본가들은 인종차별로 인종이 서로 다른 노동자 집단들에게 바닥을 향한 임금·노동조건 경쟁을 조장했다. 실제로는 처지가 비슷한 노동자 집단 사이에 마치 ‘극복될 수 없는’ 듯한 장벽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어렵게 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종차별로 ‘백인’ 노동계급을 ‘타자他者’와 분리시켜 막대한 이득을 얻는다. 인종차별은 흑인뿐 아니라 백인 노동자들도 자신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능력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은 미국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온 이주 노동력을 흡수하며 성장했는데, 지배계급은 독일·동유럽·아일랜드·남유럽·아시아·라틴아메리카에서 노동력이 대거 이주할 때마다 인종차별을 동원해 ‘토박이’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를 분열시켰다.
흑인은 18~19세기 미국 노동시장에서 최하위·미숙련 부문이었고, 흔히 백인 노동자의 대체 인력으로 활용됐다. 심지어 흑인은 파업 파괴자로 이용되기도 했다. 저항에서 패배한 백인 노동자 일부는 패배의 이유가 흑인 때문이라고 생각해 인종적 적대감을 키웠다. 이 역시 자본가들에게 득이 됐다. 이는 특히 경제 불황기에 두드러졌다. 지배자들은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 대중에 전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인종차별을 이용해, 책임을 떠넘길 대상을 만들어 냈다.(“너희의 삶이 파괴된 것은 외부에서 온 인종 때문이야. 그러니 우리 인종의 것을 빼앗는 자들을 배척해야 해.”) 이런 패턴은 인종차별을 심화시키고 극우의 부상을 낳았다.
둘째, 인종차별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국가간 경쟁(제국주의)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돼 왔다. 인종차별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정교하게 구체화됐고, 이후 지금까지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인종차별을 고수하는 이유 중 하나다.
3 특히 21세기 서구의 제국주의를 인종차별과 떼어내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 정치인들은 공화·민주 양당 모두 중동에서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슬림 인종차별을 적극 부추겼다.
최근의 대표적 사례가 무슬림 인종차별이다.이 때문에 트럼프 같은 유별난 개인들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층 일반이 (정도·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인종차별을 조장한다. 체제 자체가 인종차별에 맞춰 구축돼 있다.(즉 인종차별은 그저 편견이나 음모가 아니다.) 흑인들은 교육 기회가 훨씬 적고, 취업할 일자리도 더 적으며, 훨씬 더 강력한 처벌을 받는다. 노동자 집단 사이에 극복될 수 없는 선천적 차이가 있다는 관념을 정당화하는 온갖 인종적 편견들이 교육·언론 등 수많은 수단으로 유포된다.(반면 그들의 이해관계가 같다는 주장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초 미국 흑인 사회주의자 허버트 해리스가 지적했듯, “인종차별이 변치 않는 인간 본성이라면 인종 분리 정책 같은 걸 만들어 인종차별을 주입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전사前史
미국이 건국한 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1800년, 흑인과 백인이 단결한 노예 항쟁이 분출했다. 당시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기치인 자유·평등·박애를 걸고 싸웠다. 이런 투쟁들은 영웅적이었지만 노예제를 사수하고자 한 지주들에 의해 패배했다.
흔히 노예 해방 전쟁이라고 알려진 미국 남북전쟁은 갓 개척된 서부에서 임금 노동 방식과 대농장 노예 노동 방식 중 무엇이 더 효과적인 착취 수단일지를 둘러싼 것이었다. 미국 북부의 지배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남부의 노예 기반 사회를 분쇄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노예제 자체를 공격했다. 그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후 커다란 위기에 빠진 미국 남부에서 흑백의 온전한 평등을 요구하는 급진 공화주의 운동이 분출했다. 남부의 피지배 계급이었던 흑인과 가난한 백인 소작농들이 이 운동의 핵심이었다. 이 운동은 국가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공화주의에 기반해 인종 평등한 사회 체제, 소작농 부채 탕감 등을 요구했다.
1860년대 후반에 이 운동은 남부 미시시피주에서 인종적으로 평등한 공교육 체계를 쟁취했고, 다른 몇몇 주들에서 소작농 부채를 탕감했다. 1868년 총선에서 흑인 하원의원 14명, 상원의원 2명이 배출됐는데 모두 남부 주에서 나왔다. 지방정부 선출직에도 흑인이 800명 넘게 당선했다.
그러나 북부 지배자들은 노예제를 임금 노동으로 대체하고 싶었던 것이지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쟁 후 10년 만에 옛 남부 지주 대다수가 사면 복권됐고, 남부와 북부 지배자들은 인종차별적 테러 단체 ‘쿠 클럭스 클랜KKK’이 활개치도록 묵인했다. 급진 공화주의자들은 처음에는 공화당 정치인들에, 나중에는 복권한 노예주들의 정당 민주당에 기대하다가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 운동에 동참했던 남부 흑인들 상당수가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생겨난 북부로 도망쳤다. 다수는 하층 노동계급이 됐지만, 소수는 중간계급으로 진출했다. 그 과정에서 흑인 사이에서 계급 분화가 일어났다. 흑인 중간계급 역시 차별 받았고 더한층의 계급 상승은 제약받았지만, 흑인 노동계급·빈민에 견주면 상대적으로 나은 것이었다.
남부의 백인 소작농들도 공격받았는데, 한 통계에 따르면 1870년대 말을 지나면서 남부에서 투표가 가능한 만큼 재산이 있는 백인의 수가 반토막났다.
그 결과 미국 남부 여러 주에서 ‘짐 크로 법’Jim Crow Law으로 통칭되는 악명 높은 인종 분리 법들이 통과됐다. 지배자들은 이런 법들로 흑인과 백인들의 삶 전체를 분리해 단결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런 제도적 인종차별은 양차 세계대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군대(미군)가 인종 분리적이었을 만큼 강력하게 유지됐다.
이 벽을 넘어서는 정치 운동이 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평등권 운동의 두 가지 전략
인종차별에 맞서 거대하게 부상한 정치 운동이었던 평등권 운동의 배경에는 제2차세계대전 후 장기 호황이 있었다. 경제 호황 때문에 흑인들이 촌락에서 이탈해 도시로 편입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흑인들은 대개 북부로 이주했지만 남부 대도시들로도 유입됐다. 반 세기 전만 해도 흑인 다수가 촌락에 살았지만, 이제 대다수가 도시에 살게 됐다. 흑인들의 처지가 변했다.
특히 남부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면서 인종 분리 정책이 점차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이 형성됐다. 백인 노동자들과 집단 노동을 해야 하는 흑인들이 인종 분리를 철저히 지키려면 엄청난 비효율을 감수해야 했다.
지배자들은 그런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흑백 분리를 고수했다.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얻는 득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종차별 때문에 삶 자체가 불안정한 흑인 노동계급과 신분 상승을 열망하던 중간계급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것은 그들에게 현재뿐 아니라 미래가 걸린 문제였다.
운동의 첫 단계는 흑인 중간계급 단체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가 주도하는 법률 소송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이는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고, NAACP는 반체제 단체로 지목됐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시작한 것은 과거 노동운동에 영향 받은 흑인 활동가들이었다. 재봉사, 고용 가사 노동자, 버스 기사, 제조업 노동자 등이 인종에 따라 분리된 통근 버스를 거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1955년에 앨러배마주 몽고메리시 시내버스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 좌석을 백인에게 양보하기를 거부하다 체포돼 투쟁이 시작됐는데, 파크스는 재봉 노동자였다. 또 이 운동의 최초 핵심 조직자였던 에드 닉슨은 고참 노동운동가였다.
4 와 제2차세계대전에 뒤이은 사회주의자 마녀사냥 때문에 그런 지도력을 공급할 정치 조직은 사실상 파괴된 상태였다.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은 전투적 흑인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노력 덕분에 널리 확산됐다. 그러나 이 운동의 정치적 지도력은 노동계급에 있지 않았다. 1930년대 말 공산당의 실패흑인 중간계급 단체들이 운동의 방향을 주도했다. 이들은 가난한 흑인들의 분노와 교감하면서도, 백인(과 국가)의 “선의”에 호소한다는 전략을 사용했다. 26세 청년이었던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가 그런 정치를 대표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을 흑인들이 미국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기회라고 봤다. 비폭력 저항이 그 핵심 전술이었다.
이런 방식은 대대적인 사회적 충돌을 원하지 않는 흑인 중간계급에 적합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대개 가난하고 무장하지도 않은 데다 독자적 조직과 정치도 없던 흑인 노동자들도 이를 (목숨을 잃는 것보다) 안전한 전술이라고 여겼다. 고작 몇 달 만에 운동은 미국 남부의 상당 지역을 포괄하는 대중 행동으로 부상했다.
이후 흑인 대학생들이 (역시 1930년대 노동자 투쟁 전술에서 착안해) 연좌 시위를 주도했다. 1960년 백인 전용 간이식당에 흑인 학생 네 명이 며칠 동안 연좌한 시위는, 두 달 만에 남부 70여 개 도시로 번졌다. 여기 영감을 받아 북부에 있던 흑인들(과 일부 백인들)이 동참하면서 평등권 운동은 전국적 운동으로 도약했다. 이제 이 운동은 흑백 분리 제도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철폐하라고 요구하게 됐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제도적 인종차별을 철폐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존 F 케네디 정부는 대중적 반발을 피하려 잔혹한 탄압은 피하면서도, “운동이 비폭력이어야만 지지하겠다”며 단서를 달았다. 한편 민주당은 온건 지도부를 민주당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런 어정쩡한 대응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온건파 지도부와 민주당의 거리는 좁혀졌지만, 운동의 압력은 미국 지배자들을 상당히 곤란하게 했다. 남부 흑인들의 투표권을 지키느라 냉전 경쟁에마저 지장을 받을 지경이 됐다. 결국 1964년에 흑인의 투표권을 법으로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은 하나의 목표를 성취했다.
같은 시기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에 도전하는 강력한 대중 운동으로 성장했다. 이들 운동에 영향 받아, 예컨대 성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이 탄생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때였다.
이 대목에서 평등권 운동은 본격적으로 분화했다. 일부가 보기에, 기존의 비폭력 방식은 남부 지배자들이 을러대는 “대반격”을 전혀 막지 못할 것 같았다. 투표권을 쟁취했으니 다른 차별도 철폐하라고 요구해야 한다고도 봤다. 반면 온건파는 투표권이 보장되고 흑인의 계급 상승을 막는 제도적 장벽들이 철폐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봤고, 더 큰 사회적 충돌이 벌어질까 겁에 질렸다.
킹 목사는 암살당하기 얼마 전까지 이 두 갈래의 분화를 중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봤다. 반면 급진 흑인 투사 맬컴 엑스는 바로 이 시기에 운동의 전투적 부위와 공명하며 평등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좌파의 영역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전투적 평등권 운동은 다른 운동들과 연결돼 더 강력해지는 대신, 분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블랙 파워’ 운동이 자라났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직접 겪은 흑인들이야말로 타협하지 않고 인종차별에 일관되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투표권 쟁취를 끝으로 운동을 접어야 한다고 비난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흑표범당은 그런 경향을 대표했다. 흑표범당은 1966년 창당했는데, 당시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암살된 1964년 이후 1968년까지 미국 북부 대도시들에서 대규모 흑인 소요 사태(“와츠 폭동”)가 한창 번지던 시기였다. 초기 흑표범당은 “경찰 감시” 활동으로 유명해졌는데, 이는 무장 자경단을 조직해 경찰의 흑인 탄압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이들은 인종차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해야 한다는 맬컴 엑스의 주장에 공명했다. 흑표범당 내에는 여성, 성 소수자 등 다양한 천대받는 흑인 집단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전투적 부위를 대표했던 민주사회를위한학생들SDS 등과도 우호적으로 교류했다.
그러나 흑표범당은 마오주의적 게릴라 투쟁 전략을 중시했고 노동계급 운동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보다 흑표범당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소소한 복지를 제공하며 사회의 가장 “천대받는 주변부”를 조직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넓혔다.(이런 활동은 때로 그들의 급진적 무장 활동과 충돌을 빚었다.)
5 처럼 ‘블랙 파워’ 운동과 노동운동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DRUM은 작업장 안팎에서 차별에 맞서기 위해 비공인 파업을 벌이며 성장했다. 그러나 DRUM 내부에서는 백인 노동계급과의 관계 문제를 두고 사회주의자들과 ‘블랙 파워’ 지지자들 사이에 긴장이 상시적으로 존재했다. 이 때문에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 노동자들의 피켓라인을 존중했는데도 DRUM은 동료 백인 노동자들과 연대 행동을 조직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런 약점 때문에 DRUM은 사측의 분열 시도에 매우 취약했다.
한편, 닷지혁명적노동조합운동DRUM‘블랙 파워’ 운동은 흑인 분리주의라는 그 자체의 정치적 한계 때문에 ─ 가장 선진적인 분파조차 ─ 흑인 해방 운동에 백인 노동계급 대중을 동참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급진적 흑인 해방 운동 세력을 고립시키고 마침내 분쇄할 수 있었다.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 다수가 투옥되거나 살해됐다.
거리 운동이 사그라들면서, 평등권 운동 참가자들 다수는 이제 대안이 온건파밖에 남지 않았다고 여겼다.
주류화
온건파는 흑인이 기성 정치권 고위직에 진출(‘주류화’)해 국가 기구를 활용해서 인종차별적 사회를 개혁한다는 전략을 추구했다. 이전까지는 스스로의 시위나 운동 조직의 힘에 기대하던 적잖은 사람들이 이제는 고위직인 흑인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는 신분 상승을 원하는 흑인 중간계급에 알맞은 전략이었다. 평등권 운동 덕에 흑인들이 그전까지는 진출할 수 없던 엘리트 기관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흑인 중간계급의 규모가 성장했다. 1970년대 초반 5년 동안 흑인 3000여 명이 선출 공직에 새로 진출했다. 1960년대 린든 존슨 정부 때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적극적 우대 조처Affirmative Actions는 차별 반대 운동의 일부를 제도 정치로 포섭하기 위한 것들이었는데, 흑인 (상층) 중간계급의 공직 진출에도 도움이 됐다.
1970년대 초 세계 유가가 폭등하면서 경제 불황이 닥치자, ‘주류화’ 전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민주당에 (소수는 공화당에) 충성해 작은 요구라도 이루기를 바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불황 때문에 정치인들(과 국가)은 흑인 노동 대중의 요구를 들어줄 여지가 크게 줄었는데도 말이다.
1984년 민주당 예비경선은 분기점이 됐다. 흑인 평등권 운동 온건파의 대표 인사였던 제시 잭슨 목사는 ‘무지개연합’ 선거운동을 건설해 민주당 대선 후보에 도전했다.
잭슨은 흑인뿐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 등에 대한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레이건의 제국주의 전략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세웠다. 잭슨은 예비경선 초반에 놀라운 돌풍을 일으켰지만 결국 민주당 권력층 후보 월터 먼데일에 패했다. 당시 노동운동 기반 온건 좌파들은 레이건 재선을 저지하려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며 잭슨 지지를 거부했다. 경선에서 패한 잭슨도 먼데일의 투표 부대로 동원됐다.
반면 레이건은 손쉽게 재선했다. 이후 민주당에 대한 흑인 정치인들의 의존은 더 심해졌다. 우파를 저지하고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길은 민주당에 충성하는 것뿐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잭슨의 선거 운동은 평등권 운동 당시의 노선 차이가 종식되는 과정이었다. 독립적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얼마 안 남은) 흑인 전투파는 고사했다.
그 과정에서 흑인 민족주의(분리주의) 정치는 모종의 정체성 정치로 퇴행했다. 이들은 1960년대의 급진성을 잃고, 사회 변화 전략에는 더는 별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 이 안에서 노동계급을 주된 구성원으로 하는 전투적 부문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됐고, 이에 따라 국가를 타도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이런 정치는 심지어 민주당의 반反노동계급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급진적 흑인 이론가 매닝 매러블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실상 이들[흑인 정치 이론가들]은, 합참의장 콜린 파월, 보수적 대법관 클래런스 토머스, 쇠락해 가는 도시 빈민가의 흑인 실업자들, 흑인 노숙자들, 굶주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흑인들의 이해관계가 철학적·문화적·인종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 이는 계급적 지위가 향상된 흑인 프티부르주아에 안성맞춤인 이론이다.” 이런 정치는 미국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특히 20세기 후반을 거치며 흑인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함께 흑인 내부의 차별도 심해졌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부유한 흑인들은 더 부유해졌지만 가난한 흑인들은 더 가난해졌다(이는 21세기에도 계속됐다). 많은 흑인들이 분노를 제도 정치에 기대지 않고 표출할 방법은 1992년 LA에서처럼 소요를 일으키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여겼다.
‘주류화’ 전략은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사실상 완성됐다. 오바마의 당선은 실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기대가 하늘을 찔렀고, 주류 논평가들은 이제 미국이 ‘탈인종’ 사회가 됐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런 환상에 금이 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바마는 임기 시작부터 노동 대중의 희망을 저버렸다. 오바마는 경제 위기를 이용해 노동 대중의 삶을 공격하고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구제했다. 임기 첫 해였던 2009년 3월 오바마는 주요 시중은행 CEO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과 쇠스랑 사이에는 내 정부만이 있습니다.”
오바마는 지배계급 일부의 인종차별적 공격을 받았지만, 그 자신도 중동 전쟁을 계속하며 무슬림 인종차별을 이용했다. 그가 흑인이라는 점은 부차적이었다.
오바마 임기 동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오히려 심해졌는데, 흑인과 백인 사이의 빈부 격차뿐 아니라 흑인 간 소득 격차도 커졌다. 흑인 대통령 정권 하에서 부유한 흑인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흑인들은 더 가난해졌다. 흑인 하위 소득 계층의 실질 소득은 2007~2015년에 오히려 줄었다. 경찰의 흑인 살해도 오바마 정부를 거치며 오히려 늘었는데, 이는 오바마 정부 시기 경찰에 대한 군용 무기 지급이 폭증한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흑인 정치인들이 국가를 견인하리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인종차별이 유별난 개인이나 단체의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성에 뿌리박힌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는 분열 지배 전략에 의존해 존속하기 때문에 각종 차별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지배 전략을 집행하는 핵심 주체가 국가다. 따라서 선의의 흑인 공직자가 자본주의 국가 기구에 소수의 개혁을 펼치고 더 나은 교육을 해서 체제가 인종차별을 버리게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흑인을 공직에 진출시키는 것이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체계적 인종차별에 맞서려면 대중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강화됐다. 지금 벌어지는 운동에서 평등권 운동의 급진주의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대안
8 다.
맬컴 엑스는 1964년에 이렇게 지적했다. “인종차별 없는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틴 루서 킹은 1967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인종차별, 경제적 착취, 군사주의란 병폐들이 서로 모두 연결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나머지를 그대로 둔 채 그 중 하나만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인종차별에 맞서는 문제는 인종차별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자본주의에 맞서는 것과 연결돼 있다. 그 때문에, “인종차별의 강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 요소는 계급투쟁의 수위”미국 흑인 해방 운동의 역사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수위가 높을수록 인종차별의 영향이 약해졌다. 캘리니코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흑인 차별이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중적 노동자 조직들 ─ 1880년대의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 1890년대 초의 미국노동동맹AFL, 1914년 이전 몇 년간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 의 거대한 파고가 인종 장벽을 넘어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을 단결시켰다.” 9 반면, 실업 증대와 대중의 생활 수준 공격에 맞서 효과적 투쟁에 실패하면 인종차별이 더 기승을 부렸다.
그러면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노동계급 투쟁의 보고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여기서도 좋은 사례를 보여 줬다. 1920년대 초 혁명 러시아를 방문했던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미국 흑인들은 “세계 최초로 인종 분리가 완전히 철폐된 사회”를 목격하고 커다란 영감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으로 돌아가 공산당을 창당했다.
볼셰비키는 흑인들이 다가올 미국 혁명의 전위가 될 것이라고 봤다. 따라서 신생 미국 공산당은 흑인 노동자 조직을 핵심 목표로 삼았고, 뉴욕 할렘 등 북부 흑인 밀집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공산당은 남부에 조직자를 파견해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벌이며 당을 건설했다. 거의 목숨을 건 일이었다.
공산당은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단결한 노동계급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14개 언어로 간행물을 발행했고, 그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에서도 흑인들을 조합원으로 적극 모았다.(당시는 대부분 노동조합이 흑백 분리에 따라 지부를 만들던 때였다.)
공산당 활동가들은 정치 쟁점에도 적극 개입했다. 대표적인 것이 ‘스코츠보로의 9인’ 사례였다. 1931년, 앨라배마주 스코츠보로에서 백인 소녀 둘이 흑인 소년 아홉 명과 자의로 성관계를 가진 후 당국의 강요와 수치심 때문에 강간당했다고 진술한 일이 있었다. 강간범으로 지목된 흑인 소년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온건 흑인 단체들은 방어를 외면했지만, 공산당은 전국적 캠페인을 조직했다. 공산당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 흑인 소년들에게 자본주의 법정에서 가능한 최상의 재판을 받게 하자. 그러나 자본주의 법정이 공정하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흑백이 단결한 전투적 노동계급 투쟁만이 이 소년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끈질긴 캠페인의 결과, 결국 아홉 명 중 네 명은 기소가 철회됐고, 아무도 사형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노력 덕에 초기 공산당은 흑백이 단결한 노동자 파업을 이끄는 등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흑인들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미국에서 노동운동이 중요한 패배를 잇달아 겪던 시기 이는 두드러진 성과였다. 이후 평등권 운동이 즐겨 사용했던 연좌 시위, 피케팅, 거리 행진 등의 전술은 모두 이 때의 활동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파업이 분출했을 때, 공산당은 스탈린의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민주당 루스벨트 정부에 적극 협조했고, 인종차별 운동을 방기하더니 마침내 당을 자진 해산했다. 흑인 노동자 투사들은 대거 방치됐고, 제2차세계대전 종식 후 미국 정부의 강도 높은 사회주의자 마녀사냥 물결 속에 대거 해고·투옥됐다.
이상의 사례들이 혁명가들에 남기는 교훈은 이렇다. 첫째, 혁명가들은 인종차별의 여러 측면에 맞선 투쟁에 깊이 연루돼야 한다. 혁명가들은 이런 투쟁에서 거리의 항의 운동과 작업장의 투쟁을 연결시키려 노력해야 하고, 인종 간 장벽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그런 과정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강력한 정치적 운동이나 모범적 투쟁이 분출하더라도 그 운동이 인종차별의 뿌리를 겨냥하게 되려면 자의식적 정치와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정치 조직이 필요하고, 이 조직은 인종차별 철폐가 노동계급 단결과 자본주의 철폐의 필수 조건임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독립적·노동계급적·다인종적 조직이어야 한다.
주
- 이 글은 노동자연대가 6월 12일 주최한 온라인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
- 관련 논의는 김준효 2020을 보라. ↩
- 이에 관한 일반적 논의는 글룩스타인 2018을 보라. ↩
- 관련 논의는 시모어 2011을 보라. ↩
-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김인식 2020을 보라. ↩
- 닷지는 크라이슬러 자동차의 주요 사업부다. ↩
- Marable 1993. ↩
- 그러나 1992년 LA 소요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라틴계도 참가한 다인종적·계급적 소요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 소요를 “미국 최초의 현대적 다多인종 반란”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시 이 점에 관해 다루며 영국의 1981년 소요에 관한 고故 크리스 하먼의 분석을 원용했는데, 하먼은 경찰의 인종차별을 계기로 점화됐던 현대 영국의 소요들이 사실상 모두 다인종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요인으로 경제 위기와 실업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꼽았다(Callinicos 1992; Harman 1981). ↩
- 캘리니코스 1994, p145. ↩
- 캘리니코스 1994, p145. 그러나 당시 미국 노동계급 내의 인종 간 분열은 노동조합 운동에도 반영됐다. 당시 산업 투쟁으로 급성장한 AFL 내 노동조합 관료층은 이 분단선을 기껏해야 묵인하고 더 나쁘게는 적극 부추겼다. 이 분열은 이후 AFL을 기반으로 사회당이 창당된 후에도, 그리고 1920년대 초 미국 노동운동이 결정적 패배를 겪을 때까지도 극복되지 못했다. 당시 사회당 안에서 인종과 출신을 뛰어넘는 계급 단결을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유진 뎁스 한 명뿐일 때도 있었다. IWW는 작업장 내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인종을 뛰어넘어 단결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예외였지만, 작업장 바깥의 정치 운동에는 별다른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미국 남부에서 짐 크로 법에 맞선 투쟁이 벌어졌을 때나 북부에서 흑인 빈민들의 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
참고 문헌
글룩스타인, 도니 2018, ‘혐오의 컨베이어 벨트를 멈추기.’ 《마르크스21》 24호. 책갈피.
김인식 2020, ‘뉴딜과 1930년대 미국 노동운동의 교훈.’ 〈노동자 연대〉 325호. https://wspaper.org/article/24014.
김준효 2020, ‘미국을 휩쓰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규탄 시위: 배경과 전망.’ 〈노동자 연대〉 325호. https://wspaper.org/article/24024.
시모어, 리처드 2011, ‘변모하는 인종차별.’ 《마르크스21》 11호.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1994, 《현대자본주의와 민족문제》, 풀무질.
Marable, M 1993, ‘Beyond Racial Identity Politics.’ Race and Class 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