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현재의 이슈들
1930년대의 대불황과 미국의 뉴딜
1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로 평가한다. 미국 경제의 경우, GDP나 공장가동률 또는 국제무역 등에서 이번 경제 위기가 1930년대 대불황에 아직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위기 초반 실업률 통계는 1930년대 대불황에 버금갈 정도였다. 2020년 3∼4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가 본격화한 지 단 6주 만에 미국의 경제활동인구 1억 6000만 명 중 3800만 명이 실업수당을 신청했기 때문에 실업률이 23.7퍼센트에 이르렀다. 1930년대 초반의 실업률은 25퍼센트 가량이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코로나19가 초래한 세계경제 위기를 1930년대 대불황코로나19의 백신이나 치료제가 금세 개발된다면 이번 세계경제 위기가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학 전문가들의 예상에 따르면, 백신이나 치료제가 향후 1∼2년 내에 개발될 가능성이 매우 낮을 뿐 아니라 조만간 2차 대유행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산업 활동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의 경제 위기가 심각한 또 다른 이유는 2008년 금융부문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에서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2008년의 경제 위기에 직면해 각국 정부들은 양적완화 같은 케인스주의적 처방을 실행했지만 경기는 회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산 거품만 키웠다.
이번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도 각국 정부들은 무제한 양적완화와 부실기업 지원 같은 대규모 경기부양책들을 내놓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이와 다르지 않게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이를 한국판 뉴딜정책이라고 홍보한다. 1930년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추진했던 뉴딜정책이 경제를 위기에서 구출하지 못했듯이, 한국판 뉴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각국 지도자들이 저마다 뉴딜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이 때 1930년대의 대불황과 미국의 뉴딜정책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대불황의 시작 역사가 키건은 1930년대 대불황이 미국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29년부터 1940년까지의 대공황은 지금까지의 경제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다. 대공황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를 황폐화시켰다. 대공황은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부를 파괴했으며, 1929년의 노동력 중 4분의 1을 실업의 대열에 몰아넣었으며, 수백만 명의 희망과 열정을 사라지게 했다.”
3 이런 번영의 토대는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
1930년대 대불황은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0월 24일이나 ‘마의 화요일’로 알려진 10월 29일의 증시 폭락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경제 위기의 전조는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갤브레이스는 1920년대 후반을 미국 역사에서 활기 넘치고 구속 받지 않았으며 완전히 행복했던 시대로 묘사했는데,1920년대 미국은 국제적 강국으로 부상했고, 미국의 산업 생산은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도약했다. 1919년 미국 자동차 생산량은 165만 대였는데 1929년에는 세 배나 증가해 458만 대에 이르렀다. 자동차뿐 아니라 냉장고, 레코드 플레이어, 전기 다리미, 선풍기, 전등, 토스터기, 진공 청소기 등 내구성 소비재 가전제품이 등장해 생산과 소비가 크게 증가했다. 소득이 증가하고 노동시간이 감소해 여가가 늘었고, 이는 다시 소비재 소비로 이어졌다. 농업과 제조업에서 생산성이 향상됐다. 가솔린 엔진 트랙터 개발, 농장 기계화, 헨리 포드의 T형 포드 설계, 이동 조립 라인moving assembly line 도입 등으로 생산성이 향상했다.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새 시대에 접어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직후 농산물 품귀로 상승했던 농산물 가격이 풍작, 안정적 생산, 생산성 향상으로 하향 안정되면서 농업 부문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기업 수익성이 하락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경기가 후퇴하지 않도록 1924~1927년 저금리 정책을 유지했다.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산업 생산이 완연한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거품의 형성과 발전에는 속도가 붙었다. 당시 플로리다 부동산 붐이 일었다. 심지어 해변에서 10킬로미터가 떨어진 곳도 온화한 해변 휴양지로 소개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도시에서는 찰스 폰지라는 사기꾼이 등장해 엄청난 수익을 약속하며 거액의 투자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갤브레이스가 《1929 대폭락》에서 잘 지적했듯이, 주택·부동산 붐에 이어 증시 과열이 나타났고, 이런 거품은 경제의 견실한 성장에 기초한 것이라는 과도하게 낙관적인 평가가 팽배했다. 그러나 플로리다 부동산 붐은 허리케인이 이 지역을 휩쓸고 가면서 산산조각났다. 찰스 폰지는 자신이 약속한 수익이 차입금 증대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표1. 1929~1941년의 GNP 변화 추이
1926~1929년 | 1929~1933년 | |
명목GDP | 7.0 | -45.6 |
실질GDP | 10.6 | -26.5 |
광공업생산 | 15.3 | -35.5 |
주택 착공 | -40.0 | -81.7 |
소비자물가 | -3.4 | -24.0 |
기업 수익 | 68.9 | -80.0 |
수출 | 8.9 | -68.0 |
경상수지(GDP 대비) | 0.8 | 0.3 |
실업률 | 8.7 | 24.9 |
4 이런 낙관적 전망은 후버뿐 아니라 많은 정치·경제 지도자들도 공통으로 갖고 있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는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희망에 가득 차 있다” 5 고 믿고 있었다. 1930년대 대불황이 임박했는데도 증시는 신고가新高價를 경신했고, 증시에 대한 한없는 도취감도 만연해 있었다. 내셔널 씨티뱅크씨티은행의 전신 은행장 찰스 미첼은 “주식시장이나 산업의 기초 및 신용의 구조에 대하여 어떤 나쁜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주가는 항구적인 고수준으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회가 1929년 초부터 경기 후퇴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도취감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1929년 3월 4일 미국 31대 대통령에 취임한 허버트 후버는 “신의 가호 하에 우리나라에서 빈곤을 추방할 날이 멀지 않아 오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대불황에 대한 후버의 정책
미국 역사상 최악의 평가를 받는 대통령 중 한 명이 후버다. 그가 재임하고 있던 기간에도 대공황이 초래한 결과들을 모두 후버 탓으로 돌리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 폐허가 된 판자촌은 후버 주택이라고 불렸고, 동전 한 푼 없는 텅 빈 주머니는 후버 주머니라고 불렸다.
1930년대 대불황은 당시의 사상(자유방임주의)과 경제 제도들(금본위제, 균형예산 등)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처럼 동요하고 흔들리는 구체제의 마지막 보루를 자처한 후버는 비극을 맞았고, 그 반사이익으로 성과는 모호했지만 새로운 시도를 했던 루스벨트는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대공황이 막 터졌을 당시 후버가 실행에 옮긴 정책들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시 여기는 것들이었다.
6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1932년 대통령으로 당선했을 당시에 세출 축소와 균형예산을 굳게 약속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 후보 지명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세입이 세출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도 일반 가정과 마찬가지로 1년쯤은 지출이 수입을 약간 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습관이 지속되면 빈민구제소에나 가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7 하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정권 초기에도 공무원 봉급을 일률적으로 인하하는 것을 포함한 정책들을 내놓기도 했다. 8
균형예산 정책이 한 사례다. 1930년대 초 후버는 균형예산 정책을 두고 ‘경제 회복에 가장 필요한 요소’이고, ‘긴요한 조처’이자 ‘나라를 위해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정부와 개인의 재정적 안정의 기초’라고 말했다.9 국내에서는 균형예산 기조를 유지했다. 그는 실업 구제와 복지 사업 지출을 위한 적자 재정 편성은 국내 경제를 더 악화시킬 뿐 아니라 실업자들을 일하게 하는 인센티브를 제거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낭비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재무장관 앤드류 맬론은 후버의 정책을 “노동 청산, 주식 청산, 농민 청산, 부동산 청산”이라고 요약했다. 이런 정책은 불황을 통해 기업이 파산하고 임금·농산물·부동산이 적정 가격에 이를 때가지 하락한 다음에는 경제가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고를 반영했다. 10 당시 금융계를 대변하는 정기간행물들은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대불황이 매우 유익하다는 기사를 실었고, 구세군 건물 창문에는 “경제 공황은 도덕심의 각성, 정신적 재생, 정의의 회복에 의해 치유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11
1929년 주가 폭락과 경기 침체에 직면한 후버는 그 위기를 단순히 경제의 불균형에 따른 일시적 조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후버는 국제 무역과 금융 질서에서는 금본위제를 유지했고,1929년 말 후버 대통령은 기업주들에게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해고를 자제하라고 요청했다. 임금 수준을 유지하면 구매력이 유지돼 경기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기업가들은 임금 삭감을 번영으로 복귀하는 적절한 방안이라고 생각해 임금 삭감을 단행했다. 당시 대표적 기업이었던 유에스스틸의 1932년 주당 임금은 1929년보다 63퍼센트나 줄었다. 임금 삭감뿐 아니라 실업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12 그러나 보호무역주의는 농산물을 수출하는 미국 농민들이 무역 보복을 당하는 악영향만 초래했다.
다른 한편, 후버는 미국 경제의 약점은 국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무역과 관련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후버는 1930년 6월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제정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했고, 1931년 6월 정부 간 배상과 채무에 대해 1년간의 지불 유예를 선언했으며, 금본위제와 활발한 국제무역 유지에 강한 집착을 드러냈다.1920년대에 무분별한 대출과 투자 때문에 재정 상태가 열악해진 농촌의 작은 은행들이 먼저 파산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 곡물 가격 하락과 경제 위기로 농민들과 상인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남부 지방 최대의 투자금융 회사인 캘드웰 앤 컴퍼니가 파산하면서 아메리칸 익스체인지 신탁은행도 함께 무너졌다. 캘드웰, 테네시은행 파산으로 반코켄터키와 연합 은행 15곳이 파산했고, 서부 캐롤라이나에서도 은행 15곳이 파산하는 등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다. 1930년 12월에는 뉴욕 브루클린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이 파산했다.
13 그러나 간접적이고 미약한 구제 정책으로는 급락하던 경제를 회복시키기는커녕 급락을 중단시킬 수조차 없었다.
1929년 미국에는 시중은행이 2만 4970개 있었다. 그러나 1933년에는 1만 4207개로 줄었다. 국채의 대부분을 갖고 있던 큰 은행들은 1929년 8707개에서 27.5퍼센트가 파산해 1933년에는 5606개로 줄었다. 후버는 농촌 지역 은행들이 파산하자 서둘러 재건금융공사를 설립했고, 긴급구제건설법을 재정해 주정부의 공공사업 활동을 보조했다.1930년대의 대불황이 시작되면서 세계 2위의 공업국인 독일도 무사하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 보험사가 파산하고 1932년에는 오스트리아 최대은행인 크리스탈안슈탈트 은행이 파산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세계 1위의 미국 경제도 마찬가지였는데, 1929년과 뒤이은 대불황이 금세 지나갈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실업자가 1200만 명으로 증가해 실업률이 25퍼센트에 이르렀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 1주일 동안 강제로 은행들을 휴업시켜 예금 인출과 지불을 중단했고, 그제서야 은행 위기가 진정됐다. 이 은행 위기로 미국의 금융 체계가 사실상 붕괴했음이 드러났다.
대불황 발생 원인에 대한 주류 경제학의 설명 2008년 경제 위기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냈고 1930년대 대불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벤 버냉키는 “대불황을 이해하는 일은 거시경제학의 성배를 찾는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했다.
대불황의 원인과 관련해서는 유효수요 부족을 원인으로 보는 피터 테민이나 크리스티나 로머 등 케인스주의자들, 통화공급의 부적절함을 원인으로 보는 밀톤 프리드먼 등 통화주의자들, 신용 위축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문제를 제기하는 벤 버냉키, 국제 금융 체계의 불균형에서 원인을 찾는 베리 아이켄그린, 세계 헤게모니의 위기를 주요 원인으로 꼽는 찰스 킨들버거 등의 논의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대표적 케인스주의자 피터 테민은 소비자 지출과 투자 지출의 하락, 1930년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수출에 미친 악영향이 1930년대의 대불황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케인스주의자들은 대체로 유효수요 부족을 대공황의 원인으로 제시하는데, 유효수요 부족을 초래한 요인으로는 보호무역주의로 말미암은 미국 곡물 수출의 하락, 토지 가격 하락으로 말미암은 수요 부족, 주식시장과 자산 버블의 붕괴로 말미암은 실질 부富의 감소, 빈부격차의 심화로 말미암은 소비 감소 등을 제기한다. 일부 케인스주의자들은 주택과 자동차 등 내구소비재 시장의 포화 상태로 인한 ‘자본 한계효율성의 갑작스런 붕괴’도 한 요인으로 지적하지만, 여러 다양한 요소들 중 하나로 취급한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자들은 유효수요가 왜 줄어들거나 사라졌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핵심을 놓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미국화폐사》의 저자인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는 1930년대 대불황을 주로 명목 통화 공급량의 전례 없는 감소로 인한 총생산의 둔화로 설명한다. 즉, 중앙은행이 총생산의 증가에 맞춰 적절하게 통화를 공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실물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7 그러나 테민은 이런 통화주의적 설명이 틀렸다고 반박한다. 통화량이 감소했다면 이자율이 상승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회사채 수익률은 도리어 하락했다. 물론 명목 통화량은 감소했지만 물가도 하락했으므로 실질 통화량은 감소하지 않았다. 18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1928년 뉴욕 연준은행장 벤자민 스트롱이 갑작스럽게 죽어 통화 정책에 혼란이 생겼다고까지 주장한다.다른 한편 벤 버냉키는 프리드먼과 비슷하게 대공황의 원인을 실물부문이 아닌 곳에서 찾지만, 화폐 공급이 아니라 금융 체계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프리드먼과 차이가 있다. 버냉키는 어빙 피셔의 부채-디플레이션 이론의 뼈대를 이어받아 신용-디플레이션 이론을 주장했다. 피셔는 공황이 발생하면 은행의 부실 채권이 증대하면서 대출을 줄이게 되고 이것이 디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버냉키는 이 설명에서 ‘은행의 부채’ 대신 ‘금융 체계의 몰락으로 인한 신용 위기’를 넣어 설명했다. 피셔와 버냉키의 설명은 공황의 확산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한 면이 있지만 위기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찰스 킨들버거는 자본주의 역사를 조망적으로 관찰하며 1930년대의 대불황을 자본주의 변화의 한 변곡점으로 파악한다. 즉, 자본주의가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 체제에서 미국 중심의 달러 중심 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헤게모니 위기가 나타났는데, 바로 제1차세계대전, 세계 대불황, 제2차세계대전이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20 이미 1920년대에 금본위제가 초래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는데도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이 허황되게 금본위제를 고수하려 했던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925년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인데, 이 때문에 영국 파운드화가 과대평가되면서 영국 경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킨들버거가 말한 영국의 헤게모니는 영국 산업의 우위와 금본위제였다. 1914년 이전 런던은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였고, 많은 국가들이 무역 흑자로 생기는 금을 런던에 보관했다. 그러나 아이켄그린은 영국의 헤게모니라고 알려진 것이 실제 현실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영란은행도 지불 불능에 처해 다른 나라의 준비금에 의존해야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켄그린은 영국의 헤게모니 쇠퇴보다는 금본위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국제적 협력의 붕괴가 1930년대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또, 독일이 지불할 전쟁 배상금을 두고 연합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금 준비금을 비축하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금본위제의 작동이 방해 받았고, 이 때문에 사태가 악화했다고 봤다. 그래서 아이켄그린은 금본위제라는 오래된 믿음에서 벗어나 각국이 적절한 환율 정책을 폈더라면 대공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1920년대의 상황을 잘 묘사하지만 금본위제를 파탄에 이르도록 한 각국의 내적 동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주류 경제학 이론들은 서로 상대방의 논리에서 나타나는 허점을 한두 가지 반박할 수는 있었지만 1930년대 대불황의 원인을 꼭 집어 제시하지는 못했을 뿐 아니라 반론에 제대로 답변하지도 못했다. 반면 이윤율의 위기를 대불황의 원인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이 있다.마르크스주의의 설명
주류 경제학과 좌파 학자들 심지어 일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대공황을 마르크스의 기본 이론에 기초할 때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바로 이윤율 저하 경향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축적(투자)은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력의 확대보다 더 빠르게 진행된다. 따라서 투자 대비 잉여가치, 즉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착취율을 높이거나 생산 기술을 고도화해서 일시적으로 이윤율 하락 경향을 억제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공황 자체가 기업 설비의 가치를 대폭 하락시키고 대규모 실업을 발생시켜 임금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이윤율을 회복시키기도 한다. 조셉 질먼, 셰인 메이지, 루이스 코리 등은 미국의 이윤율을 추계한 결과 하나같이 1880~1920년대에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약 40퍼센트 하락했음을 보여 줬다. 그 원인은 앞서 설명했듯이, 노동력 대비 투자의 비율, 즉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었다. 1922년부터 1929년 초까지 실질 임금은 고작 6.1퍼센트, 소비는 18퍼센트 상승했지만, 공업 생산량은 3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이런 불균형은 대공황 직전에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산출량이 소비보다 세 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24 투자처를 찾지 못한 유휴자본이 1920년대 후반의 거품 형성을 더욱 조장했다. 앞서 말한 플로리다 주택 붐이나 폰지 사기 외에도 라디오 수신기 산업도 거품의 한 예다. 이 신생 산업이 엄청난 이윤을 약속하는 듯이 보이며 돈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투기 같은 거품은 부를 이전시킬 뿐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은 줄이지 못했다. 25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려면 이처럼 커져가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그런데 앨빈 핸슨이나 R J 고든의 연구 결과를 보면, 생산적 투자가 이 간극을 결코 메우지 못했다.1925년부터 주택 경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신규 투자로 더 많이 생산된 자동차와 라디오의 판매가 정체하다가 감소했고, 이는 다시 전력량과 철강 산업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생산재 산출량은 1929년 한 해에만 25퍼센트 하락했고, 그 다음 해에는 25퍼센트 더 줄어들었다. 실물경기 하강에 자본가들은 비생산적 지출을 줄였고, 그 결과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고 부동산 대출을 많이 해 준 은행이 파산하게 됐다. 크리스 하먼은 미국의 위기가 형성되고 폭발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생산적 지출과 투기로 생산적 투자 부족분을 메우고 민간 대출로 소비를 지탱하는 것에 의존한 대규모 호황. 그런 호황 뒤에 찾아온 침체는 그만큼 골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침체에 빠진 나라가 세계 최대 공업국이었던 만큼 그 파장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루스벨트의 등장과 제1차 뉴딜정책
27 이는 은행들이 무분별하게 투자하다 손실을 입어 예금 지급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었다. 루스벨트는 금융 체계를 분할하고 칸막이화해 한 쪽의 부실이 다른 쪽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연방예금보험공사FBDIC를 설립해 역사상 처음으로 예금자 보호를 시행했다.
루스벨트가 취임할 당시 미국의 금융 체계는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루스벨트는 은행을 강제 휴업시켜 지불 불능 사태에 빠진 은행들에 잠시의 여유를 제공했고, 이어서 1933년 글래스-스티글법으로 알려진 은행법을 발표했다. 뉴딜정책에서 금융 체계 개혁의 핵심은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하고 상업은행에 이자 지급 상한제를 도입하는 등 규제를 강화한 것이었다.28 금융 체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금융 체계 개혁은 당시 대중의 불만을 사고 있던 J P 모건 같은 금융가가 금융계를 지배하는 것을 가로막고 연준이 중앙은행으로서 구실을 실질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다른 한편 루스벨트는 1938년 국가모기지기관인 패니메을 설립해 노동자들이 주택을 쉽게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패니메는 주택 모기지의 유통시장을 창출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로 인해 노동자 대중의 일상적 삶이 금융 체계에 긴밀히 결합됐다.
케인스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1930년대의 뉴딜정책이 금융자본을 억압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소수 금융과두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제거하고 금융 체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주택 소유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의 소득 중 일부가 패니메 같은 금융기관에 긴밀히 연결됐다.
후버의 재임 마지막 해인 1932년의 회계연도에는 세입이 세출의 반도 되지 못했다. 사실 대불황 기간 내내 균형예산을 달성한 적이 없었으므로 후버는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던 셈이다. 경제 위기에 대처하려면 균형예산이 아니라 재정 지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1936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다수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 부의 집중을 완화하고 소득분배 불균형을 해소하고 대중의 구매력을 높이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뉴딜정책의 입안자 중 한 명인 몰턴은 전형적인 과소소비론자였다. “소득분배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 생산과 소비가 잘 조화되지 않는 현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은 정세의 원인은 총소득 중 저축으로 흘러가는 비율의 증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의 총생산 능력을 흡수하기에 충분한 시장 수요를 발견하지 못한 만성적 현상에 처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920년대의 번영기에도 저소득층은 항상 빈곤 상태에 있었다. 1927년에도 평균임금은 113달러에 지나지 않았고, 4인 가구의 연소득은 1000달러 미만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1750~2000달러가 필요했다. 즉, 미국 전체 가정의 3분의 2 이상은 기초적인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30 미국노총AFL을 포함한 노동조합이 제시한 경제 재건안도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 해소에 맞춰져 있었다. 루스벨트가 집권한 직후는 경제 상황이 가장 심각한 때였다. 루스벨트는 서둘러 긴급 자금을 경제에 공급했다.
벌과 민즈는 1930년대 미국에서 부의 집중과 기업 집중이 극도로 심각했음을 보여 줬다.31 루스벨트는 1933년 13개 주요 산업이 소재한 주의 주지사와 함께 회의하는 자리에서 “임금의 계속적인 인하가 다른 고용주에 대한 부정 경쟁의 한 형식이 돼 노동자의 구매력을 감소시켜서 산업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지적했고, 1933년 7월 24일 노변담화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여 생산품에 대한 구매력을 증진시키도록 하는 것은 NIRA의 가장 핵심적인 정신이며 명백한 원리”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전국산업부흥법NIRA에 따른 공공사업비로 33억 달러를, 농업조정법AAA에 따른 농산물 보상으로 5.92억 달러를 투입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긴급 구제 사업을 펼쳤다.32 1933년에 입법화된 농업조정법은 농산물의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할 목적의 특별법으로, 경작 면적을 줄여 생산을 제한하는 대신 경작하지 않는 토지에 대해 보상을 해 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경작이 허가된 토지의 생산이 더욱 집약화되면서 과잉생산으로 말미암은 가격 하락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33
이처럼 대표적인 뉴딜정책인 전국산업부흥법이나 농업조정법은 대중의 유효수요 확장을 목표로 했다.이처럼 1933~1935년 제1차 뉴딜정책의 특징은 정부의 자금살포였다. 특히 1934년의 재정지출 규모는 루스벨트의 취임 연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럼에도 미국 경제는 자유낙하만을 겨우 면한 정도였다.
표2. 대공황기 미국의 정부 재정 지출(단위: 10억 달러)
연도 | 재정지출 |
1931 | 3.671 |
1932 | 4.535 |
1933 | 3.864 |
1934 | 6.011 |
1935 | 7.010 |
1936 | 8.666 |
1937 | 8.442 |
1938 | 7.626 |
1939 | 9.492 |
1940 | 8.995 |
제2차 뉴딜정책과 더블딥
제1차 뉴딜정책의 결과 경기가 부분적으로 회복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플레가 나타났다. 또한, 1935년 연방대법원이 NIRA와 AAA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구제기금으로 경기를 부양시키는 방식은 더는 활용할 수 없게 됐다. 연방대법원의 보수적 판결로 대표되는 보수파의 반발과 부분적인 경기 회복 조짐 때문에 루스벨트는 다시금 균형재정으로 되돌아 갔다. 그 결과 예산 적자는 줄어들었지만 경기 부양에 필요한 자금은 정부 공채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 적자는 1936년 43억 달러, 1937년 27억 달러, 1938년 7억 4000만 달러로 계속 줄었지만, 국채는 1933년 220억 달러, 1937년 358억 달러, 1941년 490억 달러로 증가했다.
1935년부터 시작된 제2차 뉴딜정책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는 대기업에 대한 태도였다. 이것은 제1차 뉴딜정책으로 시행된 대규모 공공사업들이 대기업들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었다. 예를 들어, 대기업 13곳이 미국 전력의 4분의 3을 장악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1935년 지주회사법을 제정해 대기업을 견제했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세금을 대기업에 부과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35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는 AAA의 본래 기능을 담은 ‘토양보존 및 국내 할당법’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AAA에 포함돼 있던 지독히 불공정한 조항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36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NRA가 무효화됐지만 로버트 와그너 상원의원이 제출한 일명 ‘와그너법’이 제정됐는데, 그 내용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탄압하는 ‘부당노동행위’로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이 합법적인 과정으로 정착됐다.제2차 뉴딜정책의 세 번째 요소는 사회보장 추진이었다. 제1차 뉴딜정책은 시혜 중심이었지만, 제2차 뉴딜정책은 사회보험 제도의 일환으로 노인과 실업자에 대한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이 때문에 뉴딜정책이 복지국가의 모델로 제시되기도 한다.
1935년 루스벨트는 사회보장청과 사업진흥청 등을 설치하고 실업자들을 위한 노동 구제 제도를 마련했다. 특히 사업진흥청은 예산 규모가 50억 달러로 다른 어떤 기관보다 많았다(나중에 실행 과정에서 예산 규모는 65억 달러로 증가했다). 사업진흥청은 1935~1941년에 최고로 많을 때는 노동자 210만 명을 고용했다. 사업진흥청은 비효율적이고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도 벌였지만 학교·우체국·사무소·공항 건설 등 사회적 가치가 있는 사업들도 벌였다. 사업진흥청은 실직 노동자 외에도 실직한 작가나 예술가도 지원했다. 사업진흥청과 함께 등장한 전미청년국은 16~20세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했다.
1929년 820억 달러에서 1932년 4백억 달러로 떨어진 국민소득은 1935년에 거의 720억 달러로 상승했다. 이런 인상적인 경기회복 덕분에 루스벨트는 정부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균형예산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루스벨트는 연방준비은행의 이사회를 설득해 이자율을 인상해서 통화를 긴축시켰다. 또한, 구제 계획 예산을 삭감했다. 예를 들어, 1937년 1~8월에 사업진흥청의 예산을 절반으로 줄여 노동자 150만 명을 무급으로 휴가 보냈다. 이런 정책 전환은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경기회복의 토대가 매우 취약했을 뿐 아니라 민간 부문의 회복은 아직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산업생산 지수는 1937년 117에서 1938년 5월 76으로 하락했다.
표3. 1929~1941년 미국의 노동력, 고용, 실업(단위: 백만 명)
연도 | 노동력 | 고용 | 실업자수 | 실업률 |
1929 | 49.1 | 47.6 | 1.5 | 3.2 |
1930 | 49.8 | 45.5 | 4.3 | 8.7 |
1931 | 50.4 | 42.4 | 8.0 | 15.9 |
1932 | 51.0 | 38.9 | 12.1 | 23.6 |
1933 | 51.5 | 38.8 | 12.8 | 24.9 |
1934 | 52.2 | 40.9 | 11.3 | 21.7 |
1935 | 52.8 | 42.2 | 10.6 | 20.1 |
1936 | 53.4 | 44.4 | 9.0 | 16.9 |
1937 | 54.0 | 46.3 | 7.7 | 14.3 |
1938 | 54.6 | 44.2 | 10.4 | 19.0 |
1939 | 55.2 | 45.8 | 9.5 | 17.2 |
1940 | 55.6 | 47.5 | 8.1 | 14.6 |
1941 | 55.9 | 50.3 | 5.6 | 9.9 |
노동자 400만 명이 추가로 일자리를 잃었다. 표3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제2차 뉴딜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에도 실업자는 800만 명 이상을 유지했고 실업률은 계속 15퍼센트 이상이었다. 이런 취약한 경제는 1941년에 완전히 회복되면서 1929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데, 바로 전쟁 준비를 위한 경제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29년 증시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 그리고 멀리는 제2차세계대전까지도 그 원인은 제1차세계대전과 전쟁 당사국인 주요 자본주의 국가 간 관계의 급격한 재편에 있었다. 영국의 정치가 원스턴 처칠은 1929년 대공황을 포함한 시기를 ‘제2차 30년 전쟁’이라고 표현했고, 1933년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는 “우리는 4년째가 아니라 19년째 세계적 위기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요약하면, 뉴딜정책은 몇 가지 중요한 정책들을 통해 부분적인 경기회복을 이끌었지만 회복의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또한, 루스벨트는 전임자보다 압력을 적게 받았지만 균형예산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적자 재정을 확대하는 데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루스벨트의 이런 태도는 보수파의 반발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규모 적자 재정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그 당시의 규범이 작동했다. 그 당시 케인스주의자들이나 루스벨트는 대공황에 직면해서 대규모 적자 재정을 시행하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민간 부문의 투자 의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고 자제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경제는 제2차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전쟁 경제로 나아가면서 대공황의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뉴딜정책 평가
40 폴라니는 이런 ‘거대한 전환’을 이룬 이정표가 되는 사건들로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러시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뉴딜의 출범, 독일에서 나치즘의 국가 사회주의 혁명, 국제연맹이 무너지고 대신 폐쇄형 제국들이 나타난 것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폴라니는 뉴딜정책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보는 혼란을 드러냈다. 41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9세기 문명의 기초를 이루던 세력 균형, 금본위제, 자유주의적 국가 등의 제도들”은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 비롯됐는데, 이런 자기조정적 시장이 확립하려던 경제적 자유주의 노력이 1930년대 초 파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42 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했다. 뉴딜정책이 민간기업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부의 재정지출을 추진한 것이라면, 스탈린과 히틀러 등은 국가를 통해 민간기업을 통제하고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재편함으로써 1930년대의 대불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베리 아이켄그린은 1930년대의 대불황에서 벗어나게 한 공헌은 뉴딜의 루스벨트가 아니라 히틀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쉬벨부시는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즘을 하나로 묶어 정치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슷한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뉴딜정책과 나치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슷한 목표와 수단을 동원했다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하워드 진은 뉴딜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좌파적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시즘적이라고 하는 것까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진은 루스벨트 행정부가 전체적인 계획이 없이 사태에 대응해 실험과 개선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적이라고 평가했다.1930년대 미국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와 이를 해결하려는 급진적인 운동들이 있었다. 노령자에게 연금 200달러를 매달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타운센트 운동, 코글린 신부의 사회정의 운동, 루이지애나 출신 상원의원 휴이 롱의 부富 공유 제안 등이 그것들이다. 또한 팀스터(트럭 운전수 노동자)나 방직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 물결도 존재했다. 바로 이런 저항들 때문에 루스벨트는 와그너법 같은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 대불황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 등 각종 사회 제도들이 도입됐는데, 이런 개혁 입법들이 시행될 수 있었던 동학은 대불황의 여파로 급진화된 대중의 투쟁과 저항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급협조주의를 선택했던 좌파의 우울한 결말도 존재한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미국공산당은 1935년 스탈린의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지배계급 내 온건파에 대한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미국의 노동운동은 독립적인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루스벨트의 민주당에 파묻히고 말았다.
1930년대 대불황과 뉴딜정책은 몇 가지 점에서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뉴딜정책은 미국 자본주의를 대불황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뉴딜정책이 약간 효과를 보는 듯하다가 1937∼1938년의 심각한 더블딥에 빠졌다. 미국 자본주의가 1929년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1941년 이후였다.
반면 소련과 독일 그리고 일본은 국내 산업 생산을 전쟁 준비를 위해 재편함으로써 1930년대 대불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나 그의 뉴딜을 지지했던 케인스 모두 민간기업들을 강력하게 통제할 정도로 경제에 개입하지 못했고, 따라서 경제 개입의 효과도 미적지근했다.
둘째, 1930년대의 대불황은 국가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계기가 됐다. 대불황의 여파로 당시의 경제 입안자들은 전에 믿고 있던 고전파 정설을 버리고 뉴딜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경제 개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경제 개입이 커지면서 정부 부문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됐고, 연준이 실질적으로 중앙은행 구실을 하게 됐다.
또한 위기에 직면해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무능력이 드러나면서 연방정부의 구실이 경제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증가했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는 미국 자본주의에서 연방정부의 강화로 나타난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GDP에서 연방정부의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1930년대 대불황 이전에는 정부 예산이 GDP의 5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의 뉴딜정책이 추진되는 동안에는 정부 예산이 GDP의 10퍼센트에 이르렀고, 제2차세계대전을 겪은 뒤로는 20퍼센트를 넘나들게 됐다.
미국의 국내총생산에서 연방정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퍼센트)
셋째, 1930년대 대불황이 오늘날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1930년대 대불황이 미국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위기였다는 점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1930년대 대불황을 순조로운 역사 발전에서 나타난 하나의 일탈로 보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상으로 인식한다.
1930년대 대불황은 케인스주의적 뉴딜정책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 경제는 전쟁에 돌입한 1941년 이후에야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회복했고, 국내총생산도 대불황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는 자체적인 원인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제적·군사적 경쟁을 벌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로 초래된 이번 위기와 관련하여 1930년대 대불황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미국 자본주의가 제1차세계대전을 거친 뒤로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고 1920년대에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지만 그 번영이 바로 1930년대 대불황의 원인이 됐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시작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두 차례의 전쟁과 한 차례의 심각한 공황, 러시아 혁명 같은 격변을 수반했다. 오늘날 우리는 2008년의 위기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로 인해 1930년대 대불황 이래 최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1930년대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위기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격변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 보통 1930년대의 대불황은 ‘1929년 대공황’ 또는 ‘1930년대의 대공황’ 등으로 표시하고, 영어 표현도 Great Depression으로 고유명사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공황恐慌이라는 단어가 일본 용어이고 또 경제 위기에 대한 심리적 측면을 나타내는 panic에 해당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요즘은 영어의 crisis를 번역할 때 공황보다는 경제 위기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널리 사용했던 대공황 대신 대불황이라고 표현했다. ↩
- Keegan 1990, p5. ↩
- 갤브레이스 2008. ↩
- 박무성 1979, p23; 스마일리 2008, p17. ↩
- 박무성 1979, p24. ↩
- 갤브레이스 2006, p31. ↩
- 갤브레이스 2006, p31에서 재인용. ↩
- 갤브레이스 2006, p31. ↩
- 미국은 1933년까지 금본위제를 고수했지만 정작 금본위제의 본산인 영국은 1931년에 포기했다. 프랑스는 1936년까지, 독일은 1930년대 내내 고수했는데, 금본위제를 고수한 국가들의 경제는 무역 상대국들의 화폐 평가절하로 가격 경쟁력을 잃으면서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피터 테민, 베리 아이켄그린 같은 경제학자들은 금본위제에서 빨리 벗어나 모든 나라들이 화폐 평가절하를 통해 경쟁력을 회복했더라면 대공황을 빨리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테민 2001, p54). ↩
- 이런 사고는 1980년대 이후에 다시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다. ↩
- 박무성 1979, p67. ↩
- 제1차세계대전 당시 유럽 국가들은 미국한테 막대한 자금을 빌렸는데, 특히 프랑스는 독일한테서 전쟁 배상금을 받아 이 차관을 갚으려 했다. 그러나 독일은 배상금을 갚을 여력이 없었고, 그 때문에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에 대한 채무는 유럽 국가들의 경기회복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
- 후버가 시행한 미온적 경기부양책조차 균형예산 정책 때문에 효과가 더 떨어졌다. 후버 정부는 늘어나는 연방 예산 적자를 만회하려고 1932년 세입법을 도입했는데, 그 탓에 연방 정부가 걷어들이는 평균 개인소득세가 두 배로 올랐고 부가세율도 크게 올랐다. 세입법 도입은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에 또 다른 악영향을 미쳤다. ↩
- Bernanke 1995. ↩
- 테민 2001. ↩
- 프리드먼 & 슈워츠 2010. ↩
-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연방준비은행 12곳으로 구성됐는데, 그 중 뉴욕 연준은행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서 실질적인 중앙은행 구실을 했다. ↩
- 양동휴 1994, p229. ↩
- 킨들버거 1998. ↩
- 아이켄그린 2016, pp50-51. ↩
- 아이켄그린은 1930년대 대공황이 1929년 미국의 주식시장 붕괴에서 시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즉,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 이전의 경제 상황이 대공황이라는 알을 이미 부화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
- 대표적으로는 하먼 2009이 있다. ↩
- 하먼 2009, p189. ↩
- 앨빈 핸슨은 1923~1929년에 투자된 자금의 거의 절반이 기업 투자였고, 그 중에서도 3분의 1만이 신규 투자였다고 밝혔다. 고든은 1920년대 설비 산업 호황에서 내구생산재 비중은 약 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하먼 2009, pp190-192). ↩
- 물론 투기 거품이 일면서 비생산적 부문의 지출이 증가했지만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을 메울 정도는 아니었다. ↩
- 하먼 2009, p193. ↩
-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처럼 운용되지 못하게 규정한 이 법은 1999년 그램-리치-블라일리GLB법의 제정으로 폐기됐다. GLB는 1998년 미국 최대 은행지주 회사 시티코프가 증권사 트레블러스(투자은행 살로몬스미스바니와 보험 영업을 하는 자회사를 보유한 금융 복합 기업)를 인수·합병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해 제정됐다. 그 결과 미국 최초의 겸업 은행인 시티그룹이 탄생했다. ↩
- 미국 연준은 1907년 위기에 대한 대응을 위해 1913년에 설립됐지만 수동적 구실만 했다. 즉, 연준은 은행들의 준비금 요구와 같은 통화량 증대에 수동적으로 대응할 뿐이었고 금리 조절이나 통화량의 능동적 증대와 감축 같은 근대적 의미의 구실은 뉴딜 시기에 처음 했다. 그래서 연준이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이 된 것은 뉴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 박무성 1979, p145에서 재인용. ↩
- 1932년 콜롬비아대학교 법학과 교수인 아돌프 벌은 가디너 민즈와 함께 《현대 기업과 사유재산》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대기업이 발전하려면 기업의 소유권과 지배력 분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Berle & Means 1932). ↩
- 1933년 초 NIRA와 AAA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산업부흥청, 공공사업청PWA, 농업조정청, 농업보장청, 재입주청,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 등의 기구가 설립됐다. 1933년 5월 설립된 연방긴급구제청FERA은 전국의 구제 대상 가족에게 매달 평균 15달러를 지급했고, 연방과잉구제회사FSRC는 과잉 농산물의 매입했다. 공공사업청은 실업자를 고용해 공공사업을 벌였고, 전미청년국NYA은 해마다 청년 50만 명을 고용했다. 시민자원보존단CCC은 지방의 공공사업에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매달 30달러를 지급했는데, 1933~1941년에 모두 250만 명을 고용했다. 1935년 루스벨트는 긴급구제법ERA을 제정해 48억 달러의 자금으로 각종 공공정책을 추진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사업진흥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으로, 노동자 780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1인당 매달 60달러를 지급했다. ↩
- Weinstein 1980, pp35-36. ↩
- 프라이델 & 브린클리 1985, pp262-269. ↩
- 박무성 1979, p187. ↩
- 루스벨트는 와그너법이 미 의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보수파의 반발에 대항해 노동자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이 법안에 서명했다. 와그너법도 위헌 소송이 걸렸지만, 이번에는 연방대법원이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경제가 더블딥의 조짐을 보이고 대중의 불만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루스벨트와 뉴딜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태도가 변했음을 보여 준다. ↩
- AAA에는 소작농과 차지농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새 법에는 생산을 줄이는 대가로 받는 보상금을 소작인이나 차지농과 나눠 갖도록 규정했지만, 이 또한 빈농의 처지를 개선시키지 못했다. ↩
- 휴버만 2001, p414. ↩
- Chandler 1970, p5. ↩
- Robins 1934, p1. ↩
- 폴라니 2009, p152. ↩
- 폴라니 2009, pp140-152, 406. ↩
- 쉬벨부시 2006. ↩
- 진 1980, p56. ↩
- 1930년대 이래 지금까지 미국의 노동운동과 일부 좌파운동은 민주당과의 연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가시적인 모습을 띠지 못한 이유는 바로 좌파의 민주당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이정구 2020). ↩
- 하먼 2009, p199.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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