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경제 위기 시기 복지국가 전략의 의미와 한계
2008년 말에 경제 위기가 본격화하고 경제 위기의 대안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케인스주의 대안 경제 모델과 함께, 전후에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을 채택한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복지국가 모델이 관심을 끌고 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지난 3월 대표 취임 연설에서 “서민중심형 복지동맹으로 노동의 정치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노대표는 그 뒤에도 ‘묻지마 식 반MB 연대’를 비판하며 서민 복지동맹 중심의 “민들레 연대”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복지동맹”이라는 용어는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몇 년 전부터 진보진영 일각에서 복지국가 전략의 주요 과제로 논의돼 왔다. 민주노동당 분당 직전 진보정치연구소가 발행한 《사회 국가, 한국 사회 재설계도》(후마니타스, 2007)에서 장석준 연구기획실장 등이 이를 제시한 바 있고, 그보다 전에 장석준, 오건호 등 ‘사회연대전략’ 입안자들도 그 핵심 목표가 바로 ‘복지동맹’ 형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외에도 윤도현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가 쓴 《한국의 복지동맹》(논형출판사, 2009)이나 조원희 교수 등 대안연대회의의 주요 논자들이 펴낸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도 ‘복지동맹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을 한국 사회 개혁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최병모, 이상이 교수 등이 주도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도 《복지국가 혁명》(논형출판사, 2009)에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은 훨씬 광범하다. 우선 NGO들이 그런데, 이는 주요 NGO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복지 개혁을 요구하며 입법 활동을 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흔한 오해와는 달리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언제나 “복지국가를 옹호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정열을 쏟아 왔다.”
그러나 ‘복지동맹-복지국가’라는 대안은 단순히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건설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단순 복지 확대 요구와는 차이가 있다. 물론 ‘복지동맹-복지국가’를 주장하는 논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집권을 통한 ‘복지동맹’ 구축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전략의 장단점과 복지동맹론이 안고 있는 약점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특히,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후마니타스, 2007)를 쓴 고세훈 교수의 주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교수의 주장이 앞서 소개한 논자들과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비교적 일관되게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제시해 복지국가 전략을 논하는 데서 논점을 분명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복지동맹론과 관련해서는,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윤도현 교수와 장석준, 오건호 등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다만, 복지동맹론의 실천적 과제로 제시되는 사회연대전략은 필자가 이미 여러 차례 비판한 만큼 이 글에서는 길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한국 사회의 복지 현실을 살펴보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복지 문제를 보는 기본 관점을 소개할까 한다.
열악한 한국의 복지 현실
3 국내 총생산에서 공적 복지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퍼센트도 안 돼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다.
1987년 이래 한국의 복지가 꾸준히 확대됐다고는 하나 “한국이 신뢰할 만한 복지국가라고 떠벌릴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4 은 1997년에 9퍼센트대였는데 2008년에는 15퍼센트로 증가했다. OECD 국가 중 터키(18퍼센트), 멕시코(18퍼센트), 미국(17퍼센트), 일본(15퍼센트) 다음으로 높은 비율이다. 5
개혁 정부 10년 동안에도 한국의 복지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빈곤과 양극화가 심해졌다. 1997년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적 복지 정책은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한 복지제도들을 후퇴시키는 면마저 있었다. 상대적 빈곤율6 취업자 전체의 40퍼센트만이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고, 빈곤층인데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정부의 공식 발표로만 4백10만 명이나 된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복지 비용을 줄이려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아예 복지제도 바깥으로 밀어냈다. 비정규직이 대표적이다. 2009년 8월 건강보험공단이 진보신당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9년 현재 2백17만 2천 명이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76.7퍼센트) 보유 재산이 5천만 원 미만인 빈민이고 여기에는 19세 이하 아동도 47만 5천 명이나 포함돼 있다. 또, 생산가능연령인구(3천1백45만 명) 중 61퍼센트가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지급되는 복지 급여도 형편없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지급하는 급여나 실업급여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고,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지급되기 시작한 국민연금은 ‘용돈’ 수준도 안 된다. 그 가운데 형편이 가장 나은 건강보험도 실제로는 전체 진료비의 절반 정도밖에 보장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나 여성 등 상대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복지의 취약함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한국의 복지 수준은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한다. 유럽의 복지국가들보다 경제 발전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서유럽의 주요 선진국들은 1인당 국민소득이 현재 한국보다 훨씬 낮을 때부터 훨씬 많은 복지비를 지출했지만, 그렇다고 이 나라들이 후진국으로 추락한 일은 없었다(〈표〉 참고).
복지를 늘리려면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없다. 한국의 복지 재정이 취약한 이유는 기업주와 부자 들이 그 부담을 회피하기 때문이지 노동자들이 내는 세금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기업주와 부자들의 부담만 유럽 복지국가 수준으로 높여도 지금보다 훨씬 나은 복지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림2〉에서 보듯이 한국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노동자 기여 비율은 OECD 평균보다 높고 여느 선진국과 비교해서도 크게 낮지 않은 반면, 고용주들의 기여 비율은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낮다.(이 그림에서 덴마크와 네덜란드 등 몇몇 복지국가들의 고용주 기여 비율이 낮은 것은 이 나라들에서는 대체로 직접세 중심의 조세 제도를 통해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직접세 비중도 낮고 법인세도 꾸준이 낮아지고 있다.)
7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삽질 예산을 늘리느라 저소득층 지원 예산을 삭감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장악한 경기도 의회는 초등학생 급식비 지원까지 삭감해 버렸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들어 ‘역대 처음’으로 GDP 대비 복지 비중이 낮아지는 일이 발생했다.” 8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보통 사람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고 있는데도 형편없는 복지마저 더욱 후퇴시키려 한다. 복지 예산을 사상 최대 규모로 책정했다는 주장은 얄팍한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이 분석한 것을 보면 이는 전체 예산 규모를 줄여 복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게 한 눈속임에 불과하다.따라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복지 삭감 정책에 맞서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다. 진보진영은 복지 삭감에 맞서는 저항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를 확대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그런 투쟁에 언제나 동참해 왔다.
그런데 고세훈 교수를 포함해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복지를 단순히 체제 안정화 도구로만 이해하는 ‘기능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지적이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실제로 복지를 단순히 체제 안정을 위한 자본가들의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옛 소련과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서방을 비난하려고 퍼뜨렸던 이데올로기인데, 노동계급을 수동적 존재로 여기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이 물씬 풍겨난다.
복지를 바라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관점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제도를 자본주의적 현상으로 보고, 복지제도가 형성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하나는 노동계급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이따금씩 베푸는 시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그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에서야 나타났고 앞의 두 요인이 결합하면서 현실화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집단적으로 개선하고자 단결해서 싸웠는데, 그 요구 가운데는 임금 인상뿐 아니라 간접 임금(사회 임금), 즉 복지도 포함됐던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계급과의 전면전을 불사하지 않고는 한번 제공된 복지를 하루아침에 없애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를 확대하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언제나 1백 퍼센트 지지했다. 그것은 단지 노동자들의 처지가 열악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를 바탕으로 한 사회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회의 부가 오로지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과도한’ 복지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었다. ‘과도한’ 복지란 노동자들이 다른 피억압 민중과 심지어 자본가들을 착취한다는 뜻인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에 더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자본가 계급의 처지에서도 제한적이나마 복지제도가 필요함을 보여 줬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돼 마치 지배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동안 노동자들이 누려 온 복지를 모두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가 진보진영에도 퍼져 있지만 이것이 과장임을 이해하게 해 준다. 얼마 전 작고한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크리스 하먼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이 창출하는 부에 의존하며, 복지 삭감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저항이 크기 때문에 복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언제나 저들이 말한 대로 성공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곧,
자본주의에는 자본으로 하여금 싫더라도 일정한 사회적 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내적 요인들이 있다.
자본가계급이 부유해지는 방법은 오직 사람들의 일할 수 있는 능력(‘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질병, 사고, 영양 부족 등은 노동력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신체 건강한 노동인구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즉, ‘노동력 재생산’에 신경 써야 한다). 노동자들이 실업 중에도 건강하게 생존해서 경기가 회복되면 다시 착취받을 수 있도록 보건 의료 서비스와 기타 급여를 제공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다음 세대 노동자들의 양육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들을 착취할 때 충분한 이윤을 뽑아낼 수 있도록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 노동 규율을 심어 줘야 한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인적 자본’에 대해 걱정하고 학교 교육의 ‘부가가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노동력 재생산은 단지 노동자들의 물질적 건강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사기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소를 원하는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가들은 자기 처지에 만족하는 노동자들을 원한다. 정년퇴직하자마자 굶어죽을 것을 걱정하는 노동자들이 일에 성의를 다할 리 없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생리적 요소뿐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요소도 있다.
영국에서 복지제도가 발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보어전쟁이었다. 영국군 지원자 가운데 전선 투입에 부적합할 정도로 체력이 약한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 1906년에 자유당 정부가 노령연금과 학교급식을 도입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노동력은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여느 상품처럼 수동적이지 않다. 노동력은 인간 존재의 살아 있는 표현이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노동력 회복’인 것이 노동자에게는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임금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임금을 둘러싸고도 계급투쟁이 벌어진다. 자본의 관점에서도 일정 수준의 사회적 임금과 보통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필요한데도 그렇다.
이 점은 자본이 자신의 협소한 경제적 이익에 진정 부합하는 방향으로 복지국가를 재편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자본의 처지에서는 현행 복지제도에서 생산적 노동인구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은 유지하거나 심지어 확대하고, 반면 만성 환자들과 장애인, 은퇴한 노동자 등을 부양하는 데 드는 ‘비생산적’ 지출은 줄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즉, 자본의 처지에서는 한편으로 잉여가치 추출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서라도 복지제도의 일부분은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필수적인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을 제거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렵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내부 시장 도입, 시장 원리 실험, 외주화, 사유화, 민간 연금 등이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오른다. 이것들은 사회보장 기능을 탈정치화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사회보장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복지 부문의[공공]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쉽게 해 주는 기제들이다.
하먼의 지적은 좌파가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맞서는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지 않으면 신자유주의에 맞선 운동의 사기저하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10 물론 제2차세계대전 뒤에 이어진 장기 호황기 때보다 훨씬 격렬한 계급투쟁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당시에 복지국가 건설을 이끌어낸 노동자 투쟁은 자본가들이 보기에 체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또,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매우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30년대 대불황 시기에도 프랑스와 미국의 노동자들은 강력하게 투쟁해서 이런 과제를 부분적으로 성취했다.오늘날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복지 확대 같은 개혁을 얻기 위해서라도 체제의 논리 자체에 도전하는 투쟁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동자 투사들은 노동자 투쟁을 “자기제한적”으로 만드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장애물을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경제 성장, 국가, 의회 등을 바라보는 태도가 포함된다. 이런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올바른 관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마르크스주의적 변혁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가 계급의 처지에서도 제한적이나마 복지제도가 필요하다는 분석의 둘째 이점은, 고세훈 교수와 한국의 일부 복지국가론자들과 달리 복지국가의 성립을 단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집권에 의한 것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일부 복지국가론자들은 유럽의 복지국가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집권을 통해 형성된 것이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집권은 자본가 지배를 벗어난 것이므로 여기에 ‘자본의 필요’라는 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고세훈 교수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지 못한 곳에서도 복지제도가 도입됐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일 뿐 경제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의 필요’ 운운하는 것은 국가를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자본주의 국가를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관점을 드러냈다.
좌파의 논지가 국가를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의 산물로서 이미 자본에 의해 정치적으로 침투되고 지배되는 영역으로 간주하는 한, 경제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좌파의 이론 체계에 있어서 국가는 무능하며, 신자유주의에 있어서 국가는 무익하거나 무용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복지국가의 형성과 후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타협과 배신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지국가 전략
복지국가 전략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해서 복지 수준을 질적으로 높이자는 전략이다. 이 전략의 바탕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 결함을 안고 있지만 노동자 정당이 국가를 장악해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면 체제의 결함을 교정할 수 있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국가관이 놓여 있다.(이는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복지국가는 시장 실패에 대한 정치적 수습과 견제 혹은 시장 논리의 과잉에 대한 민주적 투쟁, 타협, 선택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의회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 폄하하지 않으며, 의회민주주의가 갖는 여러 정치적 장치를 통해서 노동계급의 힘이 사회경제적으로 증시[원문 그대로 — 인용자]될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한 것이었다. … 세계화 [시대에] 희망은 역시 국민국가에 있다.
그래서 복지국가론자들은 복지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국가를 선택한다. 이 점에서는 고세훈 교수의 입장이 다른 논자들보다 특히 더 단호하다. 그의 주장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길게 인용하겠다.
자본주의란 시장을 가장 우월한 자원 배분의 도구로 간주하는 경제체제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시장이란 매우 불완전한 장치이자 제도이다. 단기적 불황이 장기적 공황으로 발전하거나, 자유경쟁 체제의 이상과 상반된 자본의 집중과 집적, 빈부의 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기도 한다. 시장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공평하고 중립적이지 않다. 시장에서 개인의 자유는 재산과 경제적 지위에 따라 차등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경쟁의 불공정성과 계약의 불평등성은 시장에 내재하는 기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를 보자. 노동자들은 단 하루도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본(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노동시장에는 공급과잉 상황이 만성화되고, 고용된 노동자들조차 임금 삭감과 해고의 두려움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 자유롭고 평등한 거래와 계약은 실현되지 못하고, 양자 사이의 불평등과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적 의존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의 가정과는 달리 이러한 일이 시장 체제 안에서 시장 원리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때 “정부가 간섭을 안 했다면 …” 혹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르도록 내버려 뒀다면 …” 하는 자유주의의 항변은 부질없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시장은 크거나 작거나 정치의 구조물이었고, 시간이 주는 확실성이란, 케인스의 말대로, 결국은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복지 ‘의존성’ 논리를 통렬히 반박한다.
[국가의] 복지 공여가 의존성을 키우고 노동 의욕을 감소시킨다는 주장도 결함투성이다. 우선, ‘의존성’이라는 지적은 초점을 벗어난 문제 제기다. 예컨대, 우연히 돈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 실업자가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당하고, 기댈 가족이 없어서 국가의 도움을 받으면 의존적이므로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부자 남편을 만난 자식 있는 여자와 국가 복지에 의존해야 하는 편모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엄마와 아이를 굶길 수는 없다.
따라서 빈부 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의 완화는 단순히 개인적 노력이나 몇몇 제도, 혹은 민간 보험 등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복지를 민간에 맡기자는 것은 복지를 아예 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복지 정책을 추진한 김대중·노무현 두 전임 정부뿐 아니라 이런 정책에 맞서기보다는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려 한 다수 NGO 리더들의 태도도 겨냥하고 있다. 비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고세훈 교수는 이들이 계급적 관점을 버리고 지배적 ‘담론’에 포섭돼 “기득권층의 논리를 편들고 가해자의 심리에 자연스럽게 동화됐다”고 비판한다.
대기업 노조에게 비정규직을 위해 파업도 할 줄 모르는 노동귀족이라고 욕하다가 막상 파업하면 귀족이 파업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불편을 겪게 되면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국민경제를 파탄에 몰아넣는 존재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그는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따라서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국가에 시장의 문제를 교정할 정책을 요구하는 것 — 예컨대 국유화 등 — 이 무의미해졌다는 일부 개혁주의자들과 좌파 일각의 주장은 과장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세계화가 실제의 현실이라기보다는 담론적 측면을 더 많이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자 철회나 외국인 직접 투자(FDI) 등 산업자본의 이동은 단순히 임금이나 세금의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원료 공급의 근접성, 유통 구조의 편리성, 숙련노동의 존재 여부, 정치적 안정도, 국가의 총체적 거시경제정책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아직 FDI의 대부분은 고임금과 고세금의 국가들 간에 이루어지며, 국내 투자에 비하면 그 비중 또한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더욱이 국가별로 투자율, 저축률, 실질 이자율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엄존한다는 사실은 금융자본의 이동 또한 개별적 국민 국가들의 재정 금융 정책을 자동으로 수렴시키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국가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그의 지적은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국가 정책에 맞서는 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다수 NGO 리더들의 태도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다.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런 NGO 리더들의 태도를 줄곧 비판해 왔다.
NGO 이론가나 활동가들은 이처럼 국가가 하던(또는 해야 할) 복지 업무를 NGO가 싼값으로 제공하는 것에 대해 ‘빈곤층의 주체화(권력 이양)’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큰 의의를 부여한다. … 여기에 국가도 시장도 아닌 대안이라는 의미도 부여된다. … 그러나 복지 업무의 민간 역할 확대는 국가도 시장도 아닌 대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현실에서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정부의 복지 [삭감] 정책과 맞물려 추진됐다.
사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복지 업무의 민간 역할 확대는 명백히 정부의 비용 절감이라는 관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두 정부는 복지 확충이 절실히 필요할 때 그런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출범했지만, 정부가 나서 복지를 제공하기는커녕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처럼 복지국가를 비판하는 논리를 원용하며 사실상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민간단체들이 사회서비스 제공에 나서도록 만들고, 복지에 시장을 도입했던 것이다.
상위 20퍼센트의 소득을 하위 20퍼센트의 소득으로 나눈 비율이 1990년대에는 5배 미만이었는데,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5.43배로 증가했고 노무현 정부가 임기를 마친 직후에는 8.41배로 치솟았다.
2007년 현재 사회서비스 일자리의 평균 임금은 연간 6백44만 원 정도로 지방정부나 기업의 추가 보조를 감안하더라도 평균 임금은 최저 임금을 약간 넘는 월 77만 원 수준이다. 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의 경우 급여가 월 20만~30만 원 수준이다. 고용기간도 1년 이내로 고용 불안정성도 문제다.
[이처럼] 사회복지 서비스의 질이 낮아지고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악화한 상황을 보면 복지의 시장화가 국민을 행복하게 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서 ‘노동계급의 힘’이 핵심적 구실을 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강조점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노동계급 자신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있다. 그가 말하는 ‘노동계급의 힘’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면서 발휘하게 되는 힘이다.
일단 정치적 민주화가 도입 확대되기 시작하면, 이미 산업적으로 노동조합운동 수준에서 활성화된 노동운동은 노동자 정당(사민 정당)의 수준에서 자신의 이해를 정치화시킨다. 이때 노동자 정당은 노동조건, 고용, 빈곤 등과 관련된 다양한 개혁 입법을 입안하고 정책화함으로써 시장에 대한 노동의 종속 정도를 완화할 뿐 아니라, 그러한 성취를 기반으로 다시 노동의 계급적 연대를 고취하고 그 연대에 기초한 정치적 동원을 재차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면, 복지국가란 노동의 연대와 정치적 동원이 가능케 한 개혁 입법의 누증에 다름 아니며,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 자원으로서 다시 노동의 연대와 동원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결국, 복지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총체적으로 정치적 민주화, 즉 계급으로서 노동의 정치적 동원을 허용하는 의회주의가 노동자 정당의 동원과 개혁 역량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상 복지 선진국들의 경우, 노동의 권력 자원을 지지와 동원의 근거로 삼았던 사민 정치야말로 복지국가의 발전을 견인한 핵심적 요인이었다.
고세훈 교수는 “한국이 복지국가로의 문턱 진입에 실패한 요인”이 바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제도권 진입 실패에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 권위주의 정치의 유산으로서 미완된 민주주의야말로 복지국가로의 ‘문턱 진입’에 일차적 장애이며, ‘진입 이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하여 노동계급의 실질적 정치세력화가 갖는 의의는 실로 막중하다 할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제도 정치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고 결국 집권함으로써 복지제도를 발전시킨 스웨덴이나 영국 등을 모델로 삼는다.
물론 그도 1970년대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쇠락을 비판한다. 특히 영국의 신노동당과 블레어 정부를 “유럽 사민주의 가운데 가장 오른쪽으로 급진화한 현대화론자로 평가”하며 그들이 “계급적 선택”을 포기하고 “주어진 예산 내에서의 우선순위”에 집착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고세훈 교수는 그러한 쇠락의 원인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격과 대응에 있다고 보지 않고 ‘과거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의존해 온 계급 구조의 해체’, ‘정체성 정치’, ‘복지국가의 재정적·도덕적 위기’,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등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모순이게도 그는 자신의 글 곳곳에서 이런 주장의 문제점을 낱낱이 반박하고 있다. 예컨대 전통적 계급 구조가 해체됐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용구조가 변하고 노동계급의 규모와 성격이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변함없는 한 소외와 착취를 경험하는 계층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제조업 산업 노동자의 숫자가 급감하고 전문직, 사무직이 급증했다는 사실이 전통적 노동계급의 요구, 열망, 투쟁, 조직 형태의 쇠퇴를 직접적으로 의미하지도 않는다. 사실 20세기 노동운동사에서 동질적 노동운동이란 처음부터 현실과 무관한 이론적 가정이었으며, 사민주의의 발전은 정치 행태와 정책적 실천 모두에서 줄곧 계급 협력과 계급 타협, 나아가 초계급적 연대에 적지 않게 의존해 왔다. 전간기에 비하면 오늘날의 노조 조직률 하락 또한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이라 볼 수 없으며, 노조 운동의 기본 골격도 비교적 건재하다.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에 확고한 이해관계를 가진 공공 부문 노동자는 이미 가장 방대한 노조 조직을 갖고 있으며, 공공 부문을 포함한 전문직,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동시에 가장 전투적인 노조를 형성하고 있다.
또, 그는 자신의 책 다른 부분에서는 “정체성 정치의 부상도 계급적 기반을 둔 사민주의 정치가 쇠락하게 된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인 측면이 강하다”고 지적하고 ‘복지국가의 재정적·도덕적 위기 논리’도 실제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훨씬 크다고 지적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서유럽 사민 정치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켰다”는 것도 절반만 맞는 얘기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사이에 유럽과 남미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그보다 급진적인 좌파 정당들이 줄줄이 집권에 성공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고세훈 교수의 비판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비록 지금 사회민주주의 정당 지지도가 낮아지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룩한 복지국가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가 결론에서 한국 사회에 제시하는 대안(‘이해관계자 복지’)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해 복지국가를 건설한다’는 대전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국가 권력뿐 아니라 시장 권력도 민주화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계화 속에서 사민주의의 쇠락과 관련한 논의가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교훈이란 진정한 의미의 계급 타협은 시장 자체의 민주적 제도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거 사민주의적 타협이 국가의 민주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교정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이제 사민주의는 시장 권력의 문제를 그 내부로 포괄해 냄으로써 공세적인 희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고세훈 교수의 주장을 이렇게 길게 살펴본 까닭은 복지국가 전략이 큰 틀에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답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는 유럽 복지국가 형성과 후퇴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한 구실을 살펴보면서 복지국가의 후퇴가 순전히 외부 조건이 변해서 생긴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능동적 선택이기도 했음을 보여 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변절이나 배신이 사회민주주의 정치인 일부의 문제나 각국 정당별 특성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전략 자체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에서 복지를 확대시키기 위해서도 근본적 사회 변혁적 전략이 필요함을 주장할 것이다.
유럽의 복지국가 - 영국과 스웨덴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복지제도를 최소화하려고 했다. 특히 그들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이윤율 하락 압력을 받으며 복지제도를 후퇴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특정 조건에서는 복지를 대거 확대하라고 요구하며 싸웠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그 뒤 4반세기가 바로 그런 시기였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복지국가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장기 호황과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 덕분에 가능했다.
22 게다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의 상황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와는 달랐다.”
예를 들어 1944년 영국에서 벌어진 파업 일수는 3백71만 4천 일이었다. 이는 전쟁 전 10년 동안의 파업 일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것이다. 무엇보다 석탄 산업의 파업 일수는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1944년을 통틀어 광산업에서 노동쟁의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56만 8천 명이었다. 그해의 노동손실일수는 2백48만 일로, 그 전 17년 동안 이 기록을 뛰어넘은 경우는 딱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훨씬 더 의미심장한 수치는 노동쟁의 건수였다. 1944년의 노동쟁의는 1천2백53건이었고, 이것은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쟁의가 가장 많았던 그 전 해보다 50퍼센트 증가한 수치였다.”무엇보다 1945년에 세계는 자본주의 역사상 최장기간의 호황에 들어갔다. 당연히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전쟁 기간에 무거운 부담과 큰 희생을 치른 노동자들이 전후에 필연적으로 제기할 요구들을 누그러뜨리는 데는 호황이 도움이 됐다.
1945년 7월 총선 결과는 전쟁을 겪으며 노동자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 준 하나의 징후였을 뿐이다. … 그들은 전시에 완전고용을 경험했고, 평화 시기에는 완전고용으로 가난과 불행과 차별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대규모 병력이 유지되고 있던 군대조차 이집트, 인도, 말레이시아에서 군인들이 제대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제 사병들을 투입해 중대한 사회 변화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호황 속에서 노동계급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집권한 노동당은 사상 초유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부터 1948년 1월까지 노동당 정부는 영국은행과 석탄·가스·전력·교통 산업을 모두 국유화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국유화는 2백만~3백만 명의 노동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약 5분의 1에 해당했다.” 또, 식료품 보조금 4억 6천5백만 파운드는 노동자들의 생활비를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민의료서비스NHS 도입은 그 절정이었다. “오늘날 [영국에서] 결핵이나 구루병처럼 전에 흔했던 질병들이 드물어지고 전반적으로 건강이 많이 개선된 것은 부분적으로 국민의료서비스 덕분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은 단순히 노동계급의 열망만 반영한 것은 아니었고 끊임없이 동요하며 자본가들과 타협해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한 복지제도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애틀리 정부의 보건부 장관인 어나이린 베번은 영국 복지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NHS 도입 당시 전문의들의 압력단체인 영국의사협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베번은 보수당과 보수언론의 지지를 받는 자들에게 양보했고 그 결과 장차 국민의료서비스가 조금씩 허물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베번의 전기 작가인 존 켐벨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다. “분명히 베번은 병원 전문의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전에 비영리 민간 병원에서 무보수로 하던 일을 똑같이 하면서 이제는 급여를 받았다. 일거양득이었다. 지방정부 산하의 비영리 기관인 일급 병원의 정규 급여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환자들한테서 수수료도 따로 받았다. 베번이 ‘내가 그들의 입에 황금을 듬뿍 넣어 줬다’고 말한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베번은 전문의들에게 황금뿐 아니라 권력, 즉 새로운 서비스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강력한 힘도 줬다.” [그래서] 의학저널 《랜싯》은 1946년 11월에 NHS가 “1년 전의 예상과 달리 결코 사회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했다.노동당은 대대적인 국유화 조처를 단행했지만 국제 수지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이내 “국민의료서비스를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1950년 한국전쟁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한국전쟁으로 국방 예산이 많이 늘어나자, 이것을 둘러싼 갈등 끝에 결국 1951년 4월 베번이 사임했다.”
사실, 여러 면에서 1945~1951년의 노동당 정부는 가장 제한적인 개혁들 이외의 개혁들은 가로막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애틀리 정부에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느낀 만큼만 양보했다. 자본가들이 노동당이 의회에서 다수당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6백여 명이 의원석에 앉아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지도 않았고, 자본가들은 ‘여론’을 거슬러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기업주들은 노동계급의 힘은 두려워한다. 1944년쯤 노동자들은 1926년 총파업 이후 볼 수 없었던 투쟁 능력과 자주적 행동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이 노조 관료들을 통해, 노조 관료들이 실패하면 군대를 투입해 성공적으로 억제한 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힘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핵심적 물음에 답하기 전에 또 다른 복지국가 사례인 스웨덴을 살펴보자.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열강들과 달리 대공황의 충격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게다가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던 다른 유럽 열강들에 철강, 기계부품 등을 대량 수출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전후에나 경험한 호황을 미리부터 경험하고 있었다.
급진적 사회화 노선을 사실상 포기했으나 이를 대신할 만한 별다른 사회주의적 정책 대안이 없었던 1920년대에는, 사민당은 ‘이념이 없는 정당’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던 중에 1930년대 들어 찾아온 경제 공황이 사민당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 것이다.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 정책을 골간으로 한 1930년대의 공황정책은, 사민당에게 있어 공황을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는 직접적 정책 효과 이상의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경제 위기 극복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인은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 정책이 아니었다. 1931년에 자유당 정부는 종래의 금본위제를 포기하였는데 이는 스웨덴 크로나화의 대폭적 평가절하를 초래하여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 독일 나치 정부의 재무장 정책으로 인해 스웨덴의 철강, 기계부품 등의 대독 수출이 크게 증가한 것도 경기 회생에 크게 기여하였다.영국의 NHS처럼 스웨덴 복지제도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금 제도 발전 과정에도 노동자 투쟁의 발자국이 아로새겨져 있다. 1933년 세계적인 대공황 상황에서 당시 생산직 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임금을 받던 건설부문 노동자들이 열 달 동안 벌인 강력한 투쟁의 여파로, 2년 뒤인 1935년에 “공적연금 혜택의 범위를 급격히 확대하는” 연금 개혁이 시행됐다. 그 3년 뒤에는 스웨덴노총LO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히 높인 살쮀바덴 협약이 체결됐고 이는 현대 스웨덴 노사관계 모델의 기초가 됐다. 당시 스웨덴은 노르웨이, 영국 등과 함께 노동쟁의 빈도가 가장 높은 나라였다. 1945년에 벌어진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업 물결(노동손실일수가 한 해에 무려 1천만 일을 넘었는데 이는 1933년의 갑절이었다)은 정부가 제2차세계대전을 핑계로 실시한 임금 통제 정책을 무너뜨렸고, 이듬해에 “공적연금을 질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킨” 기초연금이 도입됐다.
그런데 1940년대 말 이후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고의 정책 과제로 부각한다. 사민당 정부는 LO에 임금인상을 억제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조합원들의 불만을 사자, LO는 1950년대 초에 새로운 거시경제운영 모델을 사민당에 제안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렌 모델’, 또는 ‘렌-마이드너 모델’이다. 렌-마이드너 모델의 골자는 연대임금 정책에 긴축재정 정책과 “노동력의 원활한 이동을 지원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더한 것이었다. 긴축재정 정책은 애초 취지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간접세가 도입되고 세율도 꾸준히 인상됐다. 복지 재정 부족이 이유였다.
그런데 연대임금 정책은 실질임금 하락, 산업합리화에 따른 노동강도 강화, 노동조건 악화, 기업 수준 노조의 무력화를 낳았다. 결국 1960년대 말에 광부들을 시작으로 “풀뿌리 노동자들의 불만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됐다.”
30 을 비교해보면 임금유동으로 인한 임금 상승분이 전체 임금 상승분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것은 연대임금 정책이 임금인상 억제 정책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큰 폭의 임금유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중앙 단체교섭이나 산업별 단체교섭에서 합의된 임금 수준이 기업들의 임금 지불 능력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에서 결정됐다는 점을 보여 준다. 중앙 단체교섭 체계를 통해 시행된 연대임금 정책은 노동자들 내부의 임금 격차를 줄이는 효과를 냈지만 노동과 자본 간의 기능적 소득분배의 측면에서는 노동측의 임금소득 증가를 억제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는 산업별 단체교섭에서 결정된 명목임금 상승률이 실질생산성 증가율에 크게 못 미쳤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31
1952년부터 1972년까지의 임금 상승률과 임금유동
1968년 반란이 유럽을 휩쓸던 때에 스웨덴 광원 노동자들은 LO의 계급협조적 지도부에 반발해 강력한 비공인 파업을 벌였고 이는 당시의 정치적 급진화와 맞물려 급속히 확산됐다. 그 결과 바로 이듬해에 공적연금의 최저선 보장을 강화하는 특별보충급여가 도입됐다. 또, 이런 반란에 직면한 사민당은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는데, 그것은 개별 기업의 의사 결정에 노동자들의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1976년에 제정된 공동결정법은 고용주가 노동 조건과 고용 조건에 중요한 변화를 낳을 결정을 내리기 전에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그 밖에도 사용자의 배타적 권리 영역이라고 분류됐던 문제들을 단체교섭 대상으로 명시했다.
32 “제3의 길 정책의 친자본적 성격으로 인해 사민당과 LO의 관계가 악화되었고(‘장미전쟁’),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33
그러나 스웨덴 사민당은 제3의 길 정책을 추진하며 다시 노동자들의 복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3의 길에서는 성장의 회복이 노동측으로부터 자본측으로의 국민소득의 이전을 요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노동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적극적인 배신과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자행하자 노동계급은 분열했고 보수당 정부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데서도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이처럼 유럽 복지국가의 형성과 후퇴 과정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어떻게 그 힘을 소진해 버렸는지도 보여 줬다.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국가
복지국가 형성기에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얼마 못 가 대대적인 개혁이 가능했던 조건이 바뀐 현실에 직면했다. 복지 확대의 물질적 조건을 제공한 장기 호황이 1970년대 초에 끝나고 불황이 시작됐다. 그러자 복지 확대를 어느 정도 수용하던 자본가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자본가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복지 지출을 계속 늘릴 것인가, 아니면 자본가들에게 굴복할 것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자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노동계급의 힘을 총력 동원해 자본가들의 저항을 분쇄해야 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자본가들의 저항이 군대의 조직적 반발로 나타났고(복지예산을 확보하고자 군비를 일부 줄인 여파로 징병제 복무 기간을 18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하는 것에 대해), 스웨덴에서는 ‘전후강령’이 — 선택적(!) 국유화뿐이었는데도 — 부르주아 정당들의 의회 내 반발과 재계의 대대적인 대중 캠페인(‘계획경제반대PHM’)에 부딪혀 좌초됐기 때문이다. 국가가 중립적이라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가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배후에서 작동하던 진정한 권력이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노동계급이 이런 저항을 분쇄하려면 국가 권력과 정면 충돌해야 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온갖 변명과 합리화 논리를 늘어놓는 동시에 채찍을 휘둘렀다. 이것은 자본가 계급에게 자신이 자본주의 내의 정당임을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하지만 또한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자신에게 각인시키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그 본질을 이렇게 요약했다.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쉽사리 장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휘두를 수도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미 제1차세계대전을 지나며 이와 같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을 버렸고, 국가가 계급 ‘중립적’이고 노동자 정당이 정권을 잡아 국가를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제도 정치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사활적인 과제가 되는 한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제도 정치의 룰을 지켜야 한다는 압력을 강하게 받는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 투쟁도 제도 정치의 룰에 종속시키려 하게 된다. 제도 정치의 룰은 근본적으로 한 나라 안의 국민이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런 가정을 따르면 제도 정치의 룰을 무시하지 않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더는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국민과 계급을 화해시키는 것”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35 이는 곧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자본주의 국가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뜻하고 핵심적으로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실질적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낼 잠재력을 지닌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힘을 억누르는 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계급 지지자들의 삶을 개선하려면 거의 전적으로 국민적 자본주의의 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복지국가의 황금기가 지나고 난 뒤로 두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황금기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개혁 없는 개혁주의’가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서 사소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전보다 더 큰 투쟁을 벌여야 했지만 투쟁을 자기제한적 전술로 일관하는 노조 지도자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도를 받으며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했다.
36 곧,
한국에서 복지국가 전략을 채택해 추진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박하게 말해 복지국가는 정치를 통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 근거해 있다. 물론, ‘정부 실패’ 혹은 ‘정치 실패’라고 불리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문제들이 명료할수록 문제 해결을 위한 개입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외부, 즉 정치로부터 올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반을 둔 정치는 시장과는 달리, 다양한 양식의 통제와 내부적 견제의 기제를 발전시켜 왔다. 정치를 좀 더 민주적이고 책임성 있는 구조로 발전시키는 것과, 자본주의 시장 체제의 한계를 개선하려는 정치의 적극적 역할은 이론적으로 양립돼야 하는 과제이다.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는 병행 발전해 왔다.
한국의 복지국가론자들은 대체로 지금까지 살펴본 국가를 중립적이라고 보는 시각을 수용한다. 다른 일부는 니코스 풀란차스의 국가론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컨대 장석준은 “니코스 풀란차스의 후기 입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풀란차스의 국가론은 난해하고 추상적이지만 핵심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그러나 국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가 반영된 투쟁의 ‘장’이므로 피지배 계급은 그곳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를 확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국가가 반동으로 기울지 않도록 노동자 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내부에서 계급투쟁을 벌여야 한다. 동시에 국가 바깥에서 민중 정부의 맹아가 될 기관을 수립해야 한다.
국가를 계급 중립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풀란차스의 국가론은 좀 더 현실적인 듯하지만 최종 결론은 중립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 내부의 계급 투쟁, 다시 말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바깥에서 민중 정부의 맹아가 될 기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 모호하다. 그래서 개혁과 변혁 사이에서 계속 동요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적 전략이라는 비판을 피하면서도 변혁적 전략과 거리를 두는 방편으로 풀란차스 이론을 차용하곤 한다.
38 그러나 러시아 혁명과 그 뒤에 벌어진 여러 혁명 상황에서 입증된 사실은 두 권력 중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를 분쇄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난히 폭력을 애호하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갈팡질팡했다.
풀란차스의 생각이 실현되는 것은 한편에는 자본주의 국가가 남아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정부가 들어서는 이원 권력 상태일 텐데, 이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 사실 풀란차스는 이와 같은 계급 투쟁의 구체적 국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없다.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자들은 계급 지배에 정면 도전하는 노동자 정부를 내버려두지 않고 군사적 힘을 동원해 끝장내려 했다. 그래서 대체로 노동자 정부의 맹아들은 자본가들의 군대에 분쇄당했다. 반면, 러시아 혁명 당시 소비에트 정부는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분쇄해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복지동맹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전략은 복지동맹을 핵심 과제로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복지동맹은 복지에 대한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또는 여타 주요 사회집단 간의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복지동맹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지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계급 또는 사회집단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둘째, 이러한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특히 핵심적인 것은 노동자 계급의 역량이고, 이를 중심으로 한 계급간, 집단간 동맹은 서구 복지발전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서구의 경우를 보면, 복지동맹은 기본적으로 노동자 계급이 일정한 사회적, 정치적 세력화를 얻은 상태에서 가능했었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이 의회 내에 진입한 지도 얼마 안 되고, 노동자 계급조차도 노동자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복지동맹의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래서 복지동맹은 다시 과제를 두 개 제시한다. 하나는 중간계급과의 동맹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가능하게 할 ‘계급 형성 전략’이다. 계급 형성 전략의 핵심은 생활수준이 다른 노동계급의 각 부문들이 “공동의 경험”을 할 수 있게 유도함으로써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40 과 피터 볼드윈 41 등을 인용하며 스웨덴 복지국가 형성 초기에 사회 다수인 중간계급과의 동맹에 성공했기 때문에 프랑스·독일 등과 달리 훨씬 안정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한다. 또, 복지동맹이 신자유주의적 공격을 막는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고도 한다. 덕분에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다른 나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달리 장기 집권하며 개혁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중간계급과의 동맹 문제를 살펴보면,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있는 중간계급의 일부를 보편적 복지제도를 지지하는 동맹으로 만들어 광범한 복지 지지 기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윤도현 교수는 유럽의 복지국가 형성 과정을 비교 분석한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42 에서의 전후 개혁은 화이트칼라 집단, 자영 중간층 역시 노동자 계급 못지 않게 개혁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 반면,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실패는 개혁의 쟁점이 계급간의 제로섬 게임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의 양상을 띠었다. 즉 자영 중간층과 화이트칼라의 희생을 전제로 한 노동자 계급과 기타 빈민에 대한 복지급여라는 구상은 복지동맹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 한국의 계급 구조는 서구와 비교할 때, 일부 상이한 특징을 가지는데, 특히 높은 자영업자의 비율이 눈에 띤다. 따라서 복지동맹의 구축에 있어서 임노동자 계급내의 연대뿐만 아니라, 자영업 계층, 특히 자영업 계층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이익을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의 개편 속에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거의 없다고 본다면, 진보정당은 이들을 복지동맹으로 견인해 내야만 한다. 43
스웨덴과 영국
44 1997년 경제 위기 직후에 영세 자영업자의 수가 급증한 것은 이들이 대규모 정리해고로 일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은 괜찮은 일자리 창출, 노동계급 처지 개선과 깊은 연관이 있다. 게다가 정부가 이들에게 지급하는 직접적 복지 급여가 거의 없고 지나치게 높은 사회보험료 때문에 많은 영세 자영업자들이 복지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들에게 지급되는 복지 혜택은 지금보다 대폭 늘어나야 한다. 그리고 노동계급과 진보정당이 이들의 복지 확대를 요구하면 영세 자영업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이 피억압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들과 함께 사회·경제적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윤교수의 주장은 옳다. 특히 한국의 영세 자영업자들은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소득이 낮은 층과 생활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는 그들이 실업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장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윤도현 교수는 복지동맹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계급 정치를 부각하는 것은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복지 개혁을 추진하고자 할 때, 계급적 관점을 현실 정치 또는 담론 투쟁에서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 대 자본가 계급, 노동자 계급 대 자영업자층을 대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보다는 ‘서민, 민중’ 대 ‘소수의 부유층 또는 자영업자’의 격차를 부각시키고, ‘고소득 샐러리맨’들에게는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부자인 것을 적대시하기보다는, 부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다 강조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낫다고 생각한다. 즉 결과적으로는 집단, 계급 간의 ‘제로섬 게임’의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을 담론 수준에서는 계급, 집단 간의 이해 대립이 아니라, ‘개인들’의 문제로 인식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회 내 다수를 복지 정치의 지지자로 만들 수 있다.
진보정당이 노동자들의 이익만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 경우 영세 자영업자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인데, 물론 진보정당이 영세 자영업자들의 처지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급적 관점을 숨겨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은 복지동맹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먼저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계급적 관점을 숨기고 개인 문제로 접근해서야 어떻게 노동계급의 정치적 ‘세력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계급·집단 간의 이해 대립이 아니라, ‘개인들’의 문제로 인식”시키기야말로 지배자들이 피지배 계급을 지배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인데도 말이다.
윤도현 교수의 주장은 터놓고 말해 동맹의 대상을(혹은 자본가 계급까지) 속이자는 것인데, 이는 실제로는 그들 대부분을 속이지는 못하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효과만 낼 것이다. 윤교수 자신도 계급적 관점 대신 소득 수준을 잣대로 사용하다 보니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의 책임을 묻게 된 데서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비록 윤교수가 ‘고소득 샐러리맨’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가 사회연대전략 같은 정규직 책임론을 수용한 데서도 이런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불가피하게 노동계급 내 소득 수준에 따른 분열을 조장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사용했고 이명박 정부가 계승한 ‘정규직 책임론’이 노리는 바가 바로 이것인데 말이다.
46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이것을 탓하기만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복지동맹의 가정 자체, 즉 복지국가 전략의 가장 큰 어려움이 복지 지지층이 없거나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인식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복지는 OK, 세금은 NO’인 국민적 분위기가 있다는 것인데,지난 20여 년의 한국 복지 수준을 보면 이런 ‘분위기’가 왜 생겼는지 너무 쉽게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이 부담하는 비용에 비해 복지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주와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턱없이 적었는데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정부의 조세 정책과 사회보험 정책은 이런 상황을 오히려 심화시켰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 정부의 복지 정책은 ‘세금은 OK, 복지는 NO’였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세금과 사회보험료에 불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흔히 한국 노동자들이 ‘복지’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복지제도에 반감이 있다는 식으로들 말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들의 반감은 복지제도 자체가 아니라 ‘불공평한’ 부담에 있다. 나쁜 복지,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복지를 몇십 년 동안 경험한 탓에 복지제도 자체에 대해 불신이 커진 것이다. 물론 부담이 불공평하니 복지제도 자체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뒤죽박죽인 생각의 귀결이다. 그러나 복지제도 자체가 필요하니 불공평해도 참으라고 강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47 또,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기업주와 부자들의 사회보장기여금 48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프랑스(노동자 9.2퍼센트 : 고용주 25퍼센트), 독일(17.4 : 19.2), 이탈리아(5.5 : 21.4), 영국(7.8 : 10.4)뿐 아니라 복지 ‘지옥’이라고 부르는 미국(10.8 : 12.6)조차 고용주가 더 많이 부담한다. 그러나 한국은 12.1 : 8.9 로 노동자들이 훨씬 더 많이 부담하고 있다. 49
노동자들과 서민들의 부담을 줄이고 기업주와 부자들의 부담을 늘리는 것만이 복지에 대한 불신을 완화 — 복지 지지층을 확대하는 것 — 하는 길이다. 가령 1999년에 완료된 연금 ‘개혁’ 이전에 스웨덴 노동자들은 연금보험료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소득 비례 연금 보험료율이 현행 한국 연금 보험료율보다 높은 13퍼센트였지만, 실제로는 고용주들이 전액을 부담하는 방식이었다.한편, 윤도현 교수를을 비롯한 ‘복지동맹-계급형성 전략’론자들은 한국 노동계급의 힘을 매우 비관적으로 본다. 이런 비관적 전망은 오건호, 장석준 등이 추진하는 ‘사회연대전략’을 지지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사회연대전략이 노자간의 계급 재분배는 없이, 결국 ‘노동자들 간의 재분배’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김인식 2007) … 시각은,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일부 오해가 있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현 단계 한국의 계급적 관계들과 상황을 고려할 때, 짧은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구 선진 복지국가들과는 달리, 노동자 계급의 상대적 힘이 크지 않고, 매우 수세적인 입장에 있으며 또 노동자 정당 역시 기존의 정치구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 한국 사회 일각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편협한 집단이기주의적 성격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지적도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헤게모니의 확대는커녕, 점점 그 영향력이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노동운동의 사회적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일이며, 이러한 작업에서 그 첫 단추는 바로 노동자 계급이 사회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또 책임 있는 자세를 지닌다는 것을 일반 국민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사회적 헤게모니 확대는 윤도현 교수처럼 계급 정치를 숨기는 방식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과제다. 그것은 자본가 계급을 속이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을 속이는 것으로 끝난다.
또, 노동계급의 힘이 현재 약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잠재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이지 노동계급의 힘 자체가 줄어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규모는 과거 어느 때보다 크고 심지어 제조업 등 특정 부문에서 그 수가 줄어들 때조차 많은 경우에 그것이 산업 자체의 위축이 아니라 생산성 증대의 결과이므로 노동자들이 파업 등으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할 수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결정적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고 세계적 수준에서 봤을 때 여전한 활력을 갖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보수 언론 등 지배자들이 민주노총을 비난해대는 것은 조직노동자들의 막강한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그저 만만해서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왜 그들의 잠재력이 발휘되지 못하는가인데 이는 앞에서 유럽 복지국가의 역사를 소개하며 설명했듯이 노동자 투쟁을 자기제한적으로 만드는 요소들 때문이다. 이런 제약을 뛰어넘으려면 노동계급 내에 분열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에도 효과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힘들고 번거로운 투쟁 대신 대화와 타협을 선호하며 자신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자로 자리매김하는 경향 — 노동조합 관료주의 — 에 그 물질적 토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필요할 때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현장조합원들의 네트워크를 발전시켜야 한다.
‘사회연대전략’은 이런 문제들을 손쉽게 회피하려는 시도였던 듯하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책임론에 문을 열어줘서 노동계급을 더욱 “수세적인 입장”에 빠뜨릴 수 있다. 이런 전략으로는 노동계급의 힘을 키우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노동계급이 이미 강력한데 무슨 연대전략 따위가 필요하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계급 형성 전략은 노동계급이 ‘공동의 경험’을 해서 내부 동질성을 높이고 단결을 이루자는 것인데 이런 취지에는 완전히 공감할 만하다. 문제는 어떤 경험이냐는 것이다.
계급 형성 전략
이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계급과 계급 형성이라는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건호는 E P 톰슨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톰슨은 계급을 객관적 지표나 구조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오직 ‘형성’되는 존재라고 보았다. 계급 형성론의 관점에서 볼 때 계급은 동일한 경험을 거치면서 생겨난 정체성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은 고용의 구조에서 노동자면 무조건 노동자 계급이라고 생각하는 속류 계급 지위론과 다르다.
그러나 톰슨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말하고자 한 바의 핵심은 이와는 다른 것이었다. 노동계급을 이데올로기 중심적으로 분석하는 데 톰슨을 끌어다 쓰는 것이야말로 속류 이론이다. 톰슨은 스탈린주의의 왜곡에서 노동계급의 자주성을 구출하려는 목적으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썼다. 그는 노동계급이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운명이 결정된 채 외부 사건들에 단순히 반응하는 존재라는 부르주아 엘리트들의 주장뿐 아니라 당이 노동계급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노동계급 의식을 불어넣는다는 식의 “관료주의적 엘리트” 사상에도 맞서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삶을 지키려는 부단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됐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동시에 혁명적 사상과 조직이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출현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중요한 기여 덕분에 톰슨은 그 전까지 수십 년 동안 거의 잊혀지다시피해 온 ‘아래로부터의 역사관’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후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데 톰슨의 주장을 끌어다 쓰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톰슨은 노동자들이 순전히 경제 관계에 속박된 수동적 존재라는 엘리트주의적 편견에 도전하는 데서 너무 나아가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 이론이 “근본적으로 결함투성이고 교정될 수 없다”며 “이 논리에는 근본적으로 환원주의적 경향이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유명한 서문에서 “계급의 경험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 편입된 생산관계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고 썼으면서도, 계급 형성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경제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 중에 “이론적으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우선이라고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면, 마르크스는 톰슨이 경계하고자 했던 기계적 역사 해석과 위로부터의 관점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일관된 유물론적 역사관을 발전시켰다. 그는 먼저 자본주의 체제가 매일같이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유지되는,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매일매일 하는 노동에 의존하는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밝혀 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착취와 계급 적대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창출할 ‘잠재력’이 있다고 봤다. 곧,
대공업은 서로 알지 못하는 한 무리의 인민을 한 장소에 집적시킨다. … 경제적 조건들이 먼저 그 나라의 인민 대중을 노동자들로 전환시켰다. 자본의 지배가 이 대중에게 하나의 공통된 상황, 공통된 이해관계를 창출했다. 그리하여 대중은 이미 자본에 대항하는 계급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대자적 계급이 된 것은 아니다. 투쟁 속에서 — 우리는 그 중 단지 몇몇 국면들만을 지적했을 뿐이다 — 이 대중은 통일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그들이 방어하는 이해관계는 계급 이해가 된다. 그러나 계급에 대항하는 계급의 투쟁은 하나의 정치투쟁이다.
사실, 후대의 지식인들이 왜곡한 것과는 달리 톰슨은 노동계급을 단순히 의식과 경험만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톰슨에게서 나타나는 모순의 한쪽 끝을 어마어마하게 부풀려 놓았다. 이로써 노동계급은 생산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언어나 ‘담론’처럼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익숙한 추상화된 세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대상’이 돼 버렸다. 사실 이런 왜곡이야말로 톰슨의 주장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기도 하다.
계급을 ‘경험’이나 ‘의식’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낳는 가장 큰 오류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가능성을 심각하게 회의하는 결론으로 쉽사리 빠진다는 것이다. 일상적 시기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고 여러 사회적 편견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톰슨의 주장을 곡해하는 사람들은 그런 비관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비관론 때문에 한국의 복지동맹론자들의 ‘계급 형성 전략’은 애초 취지에서 빗나가 버린다.
53 물론 이런 정책들이 기업주와 부자들의 부담을 늘리는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면 실제로 저소득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장석준 등이 제시하는 “공동의 경험”은 대체로 저소득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해 전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평준화하는 데 맞춰져 있는데 지금까지 제시한 방안들은 연대임금 정책과 보편적 복지 정책 등이다.그런데 이런 정책들의 애초 목적인 노동계급 강화라는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일종의 순환논리에 빠질 수 있다.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노동계급이 단결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의 생활수준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수준의 차이를 줄일 보편적 복지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를 쟁취하려면 노동계급이 단결해야 하는데 … .’ 결국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복지국가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따라서 돌파구가 필요하다. 만일 노동계급의 투쟁력이 왕성하고 그들 사이에 연대 의식이 충만하다면 노동자들이 보편적 복지 체계를 요구하며 투쟁해서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선순환 구조에 진입할 수 있다.
54 그들은 투쟁으로 자본가들에게서 복지 재원을 쟁취할 수 없다고 보므로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이 순환 고리에서 벗어나는 장석준의 특단의 대책은 바로 정규직 고소득 노동자들이 저소득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나눔”을 실현하는 “실천”이다. 사회연대전략이나 연대임금 정책의 핵심 내용도 이런 것이었고 최근 보건의료노조 지도부가 추진하는 ‘보험료 인상으로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하기’ 계획도 비슷한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대로 한국의 복지동맹론자들은 현재 한국 노동계급의 힘을 뿌리깊이 불신하고 있다. 그래서 “투쟁을 통한 연대”는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장석준은 더 나아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다. “어느 한쪽이 임금이 오른 것 때문에 다른 쪽 노동자들이 고달파”진다면서 말이다. 그의 글을 보면 대기업 노조의 투쟁에 대한 적의마저 느껴진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 개별 회사의 종업원 조직이다. … 그동안은 대기업, 정규직 부문의 투쟁력, 교섭력과 여타 부문 노동자들의 삶 사이에는 썩 긍정적인 연관관계가 없었다. … 산별노조의 자원과 역량이 뻔히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쪽[정규직]도 계속 잘 되고 저쪽[비정규직]도 이제부터 잘 되게 만들겠다는 것은 공허하고 무책임한 약속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우선권을 양보해야 한다. … 대기업 노동조합들의 치열한 쟁의 행위는 … 오히려 [재벌의] 권력을 강화했다. …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은 이렇게 차등화된 임금 인상 요구안을 자신들의 투쟁 목표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소기업이 연대 임금수준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
그러나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다음 지적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인상 자제가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더 낮은 임금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을 떼어 간 것이 아니라, 기업주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을 떼어간 것이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2007년 위원장 선거에서 사회연대전략을 거부한 것은 당연했다. 장석준의 대책대로라면 그것이 노동자들을 단결시키자는 것인지 분열시키자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노동계급의 힘에 대한 불신과 엘리트주의적 태도 탓에 계급 형성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자는 애초의 취지와 정반대로 나아갔다.
결론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본 ‘복지국가-복지동맹’론은 아직 하나의 일관된 전략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 전략의 주요 제안자들은 종종 의견 대립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들, 예컨대 국가에 대한 태도, 계급에 대한 이해,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격 등에서 인식을 함께하며, 따라서 이런 전략은 앞으로 더욱 체계화될 가능성이 많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전략은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노동계급의 친절한 ‘대리인’으로서 집권해 노동자들에게 복지를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그래서 복지국가 전략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역동적인 투쟁을 ‘제도 정치로의 수렴’이라는 과제로 간단히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노동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을 제도 정치의 룰에 종속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이는 노동자 투쟁을 더욱 “자기제한적”으로 만들 것이다.
고세훈 교수나 윤도현 교수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복지국가론자들이 경제 성장 문제에 연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복지 확대의 원동력이 계급투쟁보다 제도 개혁에 있다고 여길수록 이런 경향은 강해진다. 예컨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그렇다.
그러나 복지를 확대하는 진정한 원동력인 노동계급의 힘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복지를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은 모두 엔진 없는 열차, 고철덩어리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전략은 유럽 복지국가의 노동자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겪은 혼란과 분열을 재현할 우려가 있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노동계급 투쟁을 제한하는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며 노동자들의 힘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그들의 투쟁을 고무해야 한다. 기존 시스템과의 정면 충돌도 불사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국민 정치’가 아니라 계급 정치, 계급 정당을 강화해야 한다. 노동계급에게 복지를 하사한다는 엘리트적 대리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말이다. 복지 확대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개혁 과정과 근본적 사회 변혁은 노동계급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알파요 오메가, 단연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계급, 계급투쟁, 노동계급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
- 고세훈,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2007, 239쪽. ↩
- 다함께가 발행한 소책자 《사회연대전략, 무엇이 문제인가》를 보라. 〈레프트21〉 웹사이트(http://www.left21.com)에서 “사회연대전략”을 검색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
-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일신사, 2006, 13쪽. ↩
- 전체 가구 중위소득의 50퍼센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득을 벌어들이는 가구의 비율. 소득에는 임금 소득뿐 아니라, 연금이나 복지 보조금 등에 의한 소득도 포함되므로 상대적 빈곤율 증가는 복지 후퇴와도 관련 있다. ↩
- 〈프레시안〉 (2009. 12. 11). ↩
- 〈중소기업신문〉 (2009. 10. 22). ↩
- 오건호, 〈프레시안〉 (2009. 9. 29). ↩
- 같은 글. ↩
- 크리스 하먼,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2009, 122~124쪽. ↩
- 김용욱, ‘1930년대식 신자유주의를 좌절시킨 투쟁’, 〈저항의 촛불〉 3호(2008. 9. 1). ↩
- 고세훈, 앞의 책, 148쪽. ↩
- 같은 책, 139~141쪽. ↩
- 같은 책, 21쪽. ↩
- 같은 책, 42쪽. ↩
- 같은 책, 39~40쪽. ↩
- 같은 책, 42~43쪽. ↩
- 김하영, 《한국 NGO의 사상과 실천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책갈피, 2009, 122~133쪽. ↩
- 고세훈, 앞의 책, 245~246쪽. ↩
- 같은 책, 250쪽. ↩
- 같은 책, 91~92쪽. ↩
- 같은 책, 293쪽. ↩
- 토니 클리프, 도니 글룩스타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책갈피, 2008, 307쪽. ↩
- 같은 책, 323쪽. ↩
- 같은 책, 333~334쪽. ↩
- 같은 책, 335쪽. ↩
- 같은 책, 372쪽. ↩
- 신정완, 《임노동자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여강출판사, 2000, 142쪽. ↩
- 신정완, ‘20세기 스웨덴 사회경제사’. ↩
- 장호종, 《국민연금·공무원연금 개악 ─ 우리의 미래를 훔쳐가지 말라》, 다함께, 2008. ↩
- 완전고용 상태에서 자본가들이 숙련 노동력을 유인하기 위해 단체협약상 체결된 임금 수준을 웃도는 추가 임금을 지급하는 것. ↩
- 신정완, 앞의 책, 125~129쪽. ↩
- 정성진,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 : 쟁점과 과제’. ↩
- 신정완, 앞의 글. ↩
- 칼 마르크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4권, 박종철출판사, 1997, 61쪽. ↩
- 토니 클리프, 도니 글룩스타인, 앞의 책, 337쪽. ↩
- 물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논자들 사이에 몇 가지 차이는 있지만 국가에 대한 태도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해서 복지를 확대한다는 전략을 채택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다만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주체 문제(어떤 정치세력이 복지를 확대할 수 있는 적임자냐)보다 제도의 중요성에 더 기울어 있는 탓에 민주당의 일부 세력 같은 지배계급 내 개혁주의 정당에도 기대를 거는 듯하다. ↩
- 고세훈, 앞의 책, 25쪽. ↩
- Colin Barker, “A critique of Nicos Poulantzas”, International Socialism 4 (Spring 1979). ↩
- 윤도현 외, 《한국의 복지동맹》, 논형출판사, 2009. ↩
-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 앞의 책. ↩
- Peter Baldwin, The Politics of Social Solidarity: Class Bases of the European Welfare State, 1875-197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
- 윤도현 교수는 볼드윈의 주장을 받아들여 영국과 스웨덴 복지국가 형성 과정의 공통점을 강조하지만 안데르센은 스웨덴 복지국가와 영국 등 다른 복지국가 형성 과정의 차이에 주목한다. 볼드윈은 스웨덴 복지국가의 기원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농민과의 동맹 형성으로 설명하는 반면, 안데르센은 스웨덴 복지국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제도의 기원을 19세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제2차세계대전까지만 해도 퇴직은 주변적 현상이었다. 사회보장연금은 19세기가 끝날 무렵에 출현하여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까지 그것은 퇴직의 제도화된 수단이 되지 못했다.” 안데르센, 앞의 책, 140~141쪽. ↩
- 윤도현, ‘한국의 복지동맹’(2009.5.16). ↩
- 황선웅, ‘제조업 기업규모간 양극화의 실체와 원인’, 《중소기업의 구조적 문제와 지역산업의 실태》, 진보정치연구소(2005.12). ↩
- 윤도현, 앞의 글. ↩
- 정세은·이상이,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산책자, 2008, 181쪽. ↩
- 주은선, 《연금개혁의 정치: 스웨덴 연금제도의 금융화와 복지정치의 변형》, 한울아카데미, 2006, 74쪽. ↩
- OECD 규정상 국민연금 보험료와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보험료가 포함된다. ↩
- 전병목, 《납세환경 변화에 부응하는 조세정책 운용방향》, 한국조세연구원, 2008, 17쪽. ↩
- 윤도현, 앞의 글. ↩
- 오건호,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산책자, 2008, 238쪽. ↩
-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사상》, 북막스, 2000, 195~196쪽에서 재인용. ↩
- 장석준, 《사회국가, 한국 사회 재설계도》, 진보정치연구소, 2007. ↩
- 김인식 외, 《사회연대전략, 무엇이 문제인가》, 다함께, 2007에서 재인용. ↩
- 장석준, 앞의 책. ↩
- 김유선, 《한국 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 후마니타스, 2005. ↩
- 김하영·최일붕, 《개량주의와 변혁 전략》, 다함께,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