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공합작’ ― 반제국주의 민족공조의 모범적 사례인가?
2019년 한일 갈등 당시, 다수의 진보·좌파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국민)적 단결을 호소하며 문재인 정부와 공조하려 했다. 정의당은 일본의 경제 보복 대책 민관정협의회에 참여했고, 민주노총 집행부와 한국진보연대 등은 공개적으로 정부·여당 지지자들과 함께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민족공조를 호소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이용해 일본의 경제 보복에 맞서 국내 산업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며 기업 지원 확대, 산업 안전 규제 완화, 노동시간 연장 등을 추진했다.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자 희생 강요에 맞서기보다 반일·불매 운동을 지지하며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과 투쟁을 자제했다. 현대차지부 하부영 집행부도 국내 산업 경쟁력 회복에 협력하겠다며 파업을 유보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문재인 정부와 소위 ‘민족적’ 부르주아 세력까지 포함하는 계급동맹 전략(인민전선)은 노동계급의 양보와 후퇴, 그리고 저항 능력의 마비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1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문영찬도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부르주아지까지 포함하는 통일전선”인 중국의 국공합작이 일본을 물리치고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2
하지만 〈민플러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모범적 사례로 중국의 ‘국공합작’을 언급하며 반일 민족공조에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강조했다.이들이 칭송하는 중국의 ‘국공합작’을 반제국주의 투쟁의 모범적 사례로 볼 수 있을까?
참담한 비극으로 끝난 1차 국공합작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시작된 직후인 1925~1927년에 중국 노동자들이 거대하게 분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은 1927년 국민당 장제스의 군사 쿠데타로 철저히 분쇄됐고 수많은 공산당원과 전투적 노동자들이 학살당하며 비극적으로 끝났다.
1927년 중국공산당은 무장한 노동자들에게 모든 무기를 땅에 파묻거나 장제스 군대에 넘겨 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손쉽게 노동자 혁명을 분쇄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강력한 지침에 따른 결과였다.
1925년 중국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국주의뿐 아니라 자국 부르주아지에게도 맞서 파업과 투쟁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민당과의 동맹을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당면한 중국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 부르주아 혁명으로 제한했고, 그에 따라 국민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봤다.
스탈린의 정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러시아 멘셰비키 전략을 중국에 적용한 것이었다. 1917년 멘셰비키는 카데츠(입헌민주당)를 포함한 부르주아 정당과의 상시적 동맹을 형성하고 임시정부라는 연립정부를 구성해 부르주아지에게 정치적 지도권을 넘겨 줬다.
1926년 3월 장제스가 광둥 쿠데타를 시도해 공산당 지도자들과 파업위원회를 주도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구속했음에도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을 탈당하지 말고 묵종하라고 했다.
이에 항의하는 중국공산당에게 코민테른은 “현 시기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을 위해 쿨리(막일꾼)처럼 봉사해야 하는 시기”라며 불만을 억눌렀다. 장제스가 1927년 쿠데타를 벌이기 직전까지도 그를 중국혁명의 영웅적 지도자로 칭송했고, 코민테른 기관지 〈프라우다〉는 국민당 지도 하에 모든 계급의 단결을 호소했다. 국민당을 혁명적 세력으로 치장해 줬고 장제스를 제국주의에 대항해 전쟁을 수행하는 지도자처럼 묘사한 것이다.
이는 레닌이 주도적 역할을 했던 코민테른과 완전히 다른 정책이었다. 레닌은 식민지 또는 반半식민지 국가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자국 내 일부 부르주아지와 일시적 동맹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921년 창당한 신생 중국공산당이 제국주의에 맞선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국민당과의 일시적 동맹(국공합작)을 추진한 것이 그 적용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닌은 “억압받는 계급들, 즉 노동하며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이익과 실제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뜻하는 민족의 이익”을 구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부르주아지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지 말아야 함을 분명히 했다.
3 고 강조했다.
레닌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1920년)에서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일시적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 하나로 합동이 돼서는 안 되며, 어떠한 상황에서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립성을 굳게 지켜야 한다. 설령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주 초보적 발전 단계에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다”하지만 레닌 사후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정치적 묵종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양손이 묶인 채 국민당 장제스에게 무기력하게 당했다.
양립 불가능
·30 운동의 시작이었다. 거의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이후 반제국주의의 거대한 물결과 함께 주요 대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고, 홍콩·광저우 노동자 파업은 파업위원회가 조직되며 혁명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5·30 운동의 초기 몇 달 동안 파업 물결은 제국주의 침략의 중심이자 상징인 상하이를 중심으로 시작했고, 중국 노동자들의 끔찍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이 결합돼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1925년 5월 30일 영국이 지배하는 상하이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12명을 살해했고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5외국 자본에 맞선 파업은 중국 자본에 맞선 파업으로 이어졌고 외국인의 재산과 특권뿐 아니라 국내 자본가들의 소유권까지 위협했다. 이는 민족해방혁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고,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을 모순된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다. “노동자 총파업은 국민당에게 광둥성에 인접한 성들에게까지 통제권을 갖게 해 주었고 국민당이 유일한 전중국 정부라는 선언을 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자신감 증대는 제국주의에 대한 위협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지배와 이윤에 대해서도 위협 거리였다.”
농민 반란도 외국인 지주뿐 아니라 중국인 지주와 지방 엘리트들을 공격했다. 스탈린은 농민들이국민당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는 훈령을 보냈고 토지 몰수는 ‘악덕’ 지주에 한정하고 국민당원의 토지는 그냥 둘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지주들은 위협을 느끼자마자 바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반란을 시작한 농민들에게 ‘선량한’ 지주와 ‘악덕’ 지주의 구별은 무의미했다. 이들에게는 토지를 몰수할 대상으로서 악덕 지주와 죽여야 할 대상으로서 최악질 지주 사이의 구별만 있었다.
1925년 시작한 노동자들의 반란은 국민당의 사회적 기반을 이루고 있던 계급과 집단 즉 도시 부르주아지와 토지 혁명을 두려워하는 지주들을 위협했다. 더는 국공합작과 양립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이를 알고 있었고, 1927년 이 위험을 제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에게 대중의 급진주의를 진정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장제스와 정치적 동맹을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동맹 유지는 무기를 든 노동자들의 무장해제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중국 최대 도시이자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과 노동운동은 대학살을 당했다. 이후 도시의 노동조합과 학생 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1927년 한 해 동안 국민당의 무자비한 탄압과 테러로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당원 2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
중국공산당의 변화 1920년대 중반 중국 산업 노동자 수는 1917년 러시아와 비교해 그다지 적지 않았다. 중국 인구에 비해 노동계급은 아직 소수였지만 연안 공업 단지에 집중돼 있었고, 정치적으로 각성했으며, 무척 전투적이었다. 상하이에는 노동자 1천 명 이상을 고용한 공장이 50여 곳 있을 정도였다. 당시 노동자 탄압에 앞장선 국민당 장교조차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인정할 정도였다. “실제 20세기 어떤 지역의 노동운동도 혁명적 에너지, 조직적 창의성, 비범한 영웅주의, 자기희생정신과 혁명사업에 대한 헌신이라는 면에서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여 준 것에 미치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은 젊고 활기 찬 중국 노동계급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공산당의 창당 멤버들은 모두 지식인들이었지만 몇 달 안에 공산당은 노동계급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12개 도시 약 삼십 만의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파견된 대표자들이 모인 1922년 5월의 제1차 전중국 노동자대회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중국공산당은 제1차 중국혁명(1925~1927년) 동안 엄청나게 성장했다. 1926년 초 1천 명도 안 되던 당원 수는 1927년 4월 6만여 명이 됐다. 무엇보다 당원의 66퍼센트가 노동자였고 53.8퍼센트가 주요 산업 도시에서 일하는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1905년 1차 러시아혁명 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 7만 명(1906년 10월 기준)이었던 점에 비춰 봐도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꽤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일부 좌파는 이런 성과가 국공합작의 결과물인 것처럼 말한다.
7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문영찬은 “1차 국공합작으로 인해 중국혁명은 일취월장했으며 군벌이 토벌되고 반봉건혁명이 힘을 얻게 된다” 8 고 말했다.
〈민플러스〉는 “중국공산당은 이런 좌우합작(국공합작)을 통해 반半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했고, “이 조건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고,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성장은 국민당과의 동맹이 아니라 1925년부터 시작한 거대한 노동계급 반란 덕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당에 정치적·조직적으로 종속돼 참담한 비극을 맞았다.
1927년 패배 이후 중국공산당은 더는 노동계급 안에서 정치적 영향을 구축하지 못했다. 1928년 중국공산당의 노동자 당원 비율은 10퍼센트로 급감했고 1929년 3퍼센트, 1930년 3월 2.5퍼센트, 9월 1.6퍼센트로 추락했고, 그 해 12월 사실상 0퍼센트가 됐다. 1930년 9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당 지도자였던 저우언라이는 당원 수가 12만 명이고 그중 공장 노동자는 2천 명이라고 보고했다. 1933년 말 중국공산당은 중국에서 가장 큰 산업지역인 상하이에 ‘단 하나의 진정한 산업 세포’조차 없다고 했다. 당내 회람 보고서에도 “불행하게도 도시에 있는 당 조직들은 분쇄당하거나 고립 당했다. 중국 어디에서도 산업 세포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당시[1929년] 당원의 85퍼센트가 대도시와 주요 도시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흩어져 있던 것이다. 뒤늦게 농민봉기가 축적된 역량을 활용하며 전진하자,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내팽개치고 농민에게 몰려갔다.”
당시 중국은 믿기 힘들 만큼 혹독한 농민 억압이 존재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경작 토지의 60퍼센트를 소유했고, 매우 높은 지대(수확의 40~60퍼센트), 만연한 고리대(평균 이자율 연 40퍼센트 이상), 지나치게 무거운 조세, 정부군이나 군벌 용병으로의 일상적인 징발 등 기생적 억압 피라미드에 일본의 침략까지 더해졌다.
농민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농민과 국민당 군대에서 이탈한 반항적 병사들이 결합돼 농촌은 거대한 저항의 저수지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 중국공산당은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노동자에게서 농민에게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이 피부병이라면 공산주의자는 심장병이다”라며 일본군보다 공산당을 주적으로 삼아 무자비한 탄압과 테러를 자행한 점도 공산당이 도시에서 철수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1929년 10월 코민테른은 농민에 초점을 맞춘 중국공산당의 방향 전환을 ‘민족적 위기와 혁명적 고조의 중국적 특색’이라며 정당성을 부여해 줬다. 중국공산당은 1929년 이후 혁명을 성공시킨 1949년까지 더는 중국 노동계급 안에서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항일 투쟁에 효과가 없었던 2차 국공합작
대다수 좌파는 1937년부터 시작해 1945년까지 지속된 2차 국공합작이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공적 사례로 본다. 실제 공산당은 항일 전쟁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1945년 이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도 승리했다. 분명 1차 국공합작과 다른 결과였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 실패와 그 뒤 모진 탄압을 겪은 뒤로 정치적·사회적 계급투쟁의 결과를 결정짓는 것이 군사력이라는 인식에 도달했고, 2차 국공합작 내내 ‘총을 쥐고’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지킨 것은 노동계급의 독립성이 아니라 당의 군사적 독립성이었다. 인민전선의 틀 내에서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지킬 수는 없었지만 군사적 독립은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1927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더는 지킬 만한 노동계급 정치를 가지고 있지도 노동계급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다. 농촌 변두리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주요 집단은 노동자에서 다양한 농민 집단으로 변했다. 공산당은 게릴라 전투와 반제 민족주의를 뼈대로 한 정당으로 변모했다. 1930년대 일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때때로 격렬한 파업을 벌였지만 공산당은 벽지僻地에 근거지를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것에 역량을 집중했다.
동시에 공산당 지도자들은 노동계급 투쟁과 유리됐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 정치로 후퇴했고, 대중의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 정서에 공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자신이 능동적인 민족주의의 수호자가 됐다.
물론 공산당의 정책에서 급진적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주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럴 듯한 토지 개혁안을 전혀 내놓을 수 없었던 국민당에 비해 공산당은 토지 분배 정책을 내놓고 실천했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 자기 땅을 갖는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동맹을 위해 국민당에 대한 비판을 삼갔고 급진적 요구와 강령을 후퇴시켰다. 1936년 마오쩌둥은 일본에 맞서는 조건으로 공개적으로 장제스에게 연합을 제안했고, 공개서신·기사·전보들을 통해 국공합작의 조건으로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고 보호하겠다는 구체적 보장책을 제시했다.
홍군 점령지의 부농, 지주, 상인은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 중국공산당은 대도시에서 노사 간 충돌을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항일 집회에서 국민당과 정부에 맞서 투쟁하자는 구호를 중단했으며, 기업을 보호하고 지주와 부농의 토지 및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마오쩌둥은 1차 국공합작을 참담한 비극으로 만든 장본인 장제스에게 “당시 연합전선 때처럼, 여러분과 강력한 혁명적 연합전선을 구축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당시 합작으로 봉건적인 압제자들 모두가 우리 앞에서 흔들린 것은 바로 이런 합작 덕분이었습니다”라며 손을 내밀었다.
장제스는 반일 공동 투쟁을 조건으로 공산주의 선동과 계급투쟁의 중단을 강력히 요구했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수용했다. 2차 국공합작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이 중심적 활동을 했던 곳에서 지주에 대한 억압과 토지 분배는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당의 독자적 선전물도 없었고, 거리의 벽에서 볼 수 있는 포스터는 침략자에 맞선 투쟁, 구국·평화통일을 촉구하는 것들뿐이었다. 중국공산당은 2차 국공합작을 위해 1937년에는 급진적 토지 강령을 폐기했다.
하지만 반일 민족공조에 해당하는 국공합작은 항일 투쟁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국민당은 국공합작을 시작한 뒤에도 항일 전쟁을 제대로 벌이지 않았다. 장제스는 1938년 이른바 ‘반일 용공 단체’를 금지했고 반정부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률을 정했다. 장제스는 일본의 전면 침략이 시작된 지 5년 뒤인 1941년에야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반면 공산당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공산당 지도자들은 항일 의지가 박약하고 부패한 국민당의 약점을 이용하고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고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민당의 부패와 억압 정책이 민중의 반일 의지를 꺾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태도였다.
가령, 1944년 일본군이 허난성을 공격했을 때 주민들은 부패한 국민당 지휘관의 군대가 참패하는 것을 보고도 수수방관했고 심지어 반국민당 소요를 일으켰다. 국민당 군대보다 더 악독한 자들은 없을 것이라며 일본군을 환영하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오직 일본 제국주의의 끝없는 만행이 대중의 투쟁 의지를 유지·강화시켰을 뿐이다.
결국 일본을 격퇴한 것은 2차 국공합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잔악함에 영향을 받은 민중이 유일하게 저항해 온 중국공산당과 홍군을 따랐기 때문이다. 또 국공합작을 통해 국민당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군벌 지배 그리고 토지 문제 등을 해결하도록 강제하지도 않았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2차 국공합작을 반제국주의 민족 공조의 성공적 모델로 말할 수는 없다. 또, ‘민족적’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이 반제국주의 투쟁의 효과적 무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보여 줬다.
무엇보다 부르주아(친자본주의)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계급동맹 전략은 계급 대립을 흐리게 하고 결국 노동계급의 저항 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중국의 국공합작 사례가 이를 입증해 줬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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