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낙태죄 유지 법 개정안 논란
낙태는 왜 여성이 선택할 권리인가?
문재인 정부가 끝내 낙태죄 폐지 염원을 배신했다. 10월 7일 문재인 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남겨 두고 낙태 허용 범위만 일부 확대한 형법과 모자보건법의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제269조 1항, 270조 1항)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려서 올해 12월 31일까지 낙태죄 관련 법률이 개정돼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낙태죄 처벌 조항은 그대로 유지하고 형법에 ‘낙태의 허용 요건’ 조항을 신설했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낙태를 기간과 사유에 따라 허용한다. 임신 14주까지 낙태는 조건 없이 허용되지만, 임신 15~24주 이내에는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이때 국가 지정 기관에서 상담을 받은 뒤 24시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야 한다. 임신 24주 이후 낙태는 지금처럼 금지된다.
형법상 낙태죄가 유지되므로 불법 낙태를 한 여성과 의사는 처벌 대상이 된다. 비록 임신 초기 낙태는 허용되지만, 정부의 법안은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의적 기준으로 낙태를 규제하며 여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낙태죄가 유지되면 낙태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낙태한 여성에 대한 낙인 찍기가 계속될 것이다. 법적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기간이나 사유로 낙태한 여성과 의사는 언제든지 처벌받을 수 있다. 불법 낙태를 감행해야 하는 여성들은 안전하지 못한 낙태를 할 위험이 있고 비용도 비싸게 치러야 한다. 법 개정 뒤 단속이 강화되면 처벌받는 여성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므로 여성의 낙태 선택권을 인정해야 한다. 형법의 낙태죄를 즉각 폐지하고 모자보건법의 낙태 규제 조항들도 폐지돼야 한다.
“임신 14주 이내”에 여성이 임신을 자각하고 낙태를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임신 과정을 잘 모르는 청소년이나 생리가 불규칙한 여성 등은 임신을 뒤늦게 자각할 수 있다.
물론 여성들이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면 가급적 빨리 낙태를 하려고 한다. 낙태의 95퍼센트는 임신 12주 이내에 이뤄진다. 그러나 여러 조건과 나름의 사정 때문에 얼마든지 낙태가 지연될 수 있다.
1 낙태 처벌 유지와 규제는 낙태를 줄이기보다 여성의 부담과 고통만 키울 것이다.
임신 12주까지만 낙태를 허용하는 프랑스에서는 1년에 5000여 명의 여성이 합법 낙태의 시기를 놓쳐 경제적 부담을 감내하며 임신 24주까지 낙태가 허용되는 네덜란드로 원정 낙태를 간다.일각에서는 낙태의 위험성을 내세우며 “임신 14주 이내” 허용 방안을 옹호한다. 지난해 헌재 판결 당시 단순위헌을 낸 재판관들이 “임신 14주 이내는 안전한 낙태 수술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2 한국에서 ‘위험한’ 낙태로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던 사례들은 대부분 불법 낙태로 잘못된 시술을 받거나, 가짜 낙태약을 먹거나, 자가 낙태를 한 경우였다.
그러나 낙태가 여성에게 크게 위험해지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 방식으로 낙태를 할 때이다.‘위험한’ 낙태가 걱정된다면, 여성이 되도록 빨리 낙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지 낙태 처벌을 유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낙태가 위험해서 금지한다면, ‘모성 사망’ 주요 요인인 출산도 금지해야 하는가?
소수이지만 임신 14주 이후 낙태를 하는 경우도 엄연히 있다. 직장과 학업 계획이 변경되거나, 양육 환경이 불안정하거나, 임신 뒤 이혼을 했거나, 태아의 질병을 늦게 알았거나, 임신 도중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후기 낙태는 여성의 신체에 큰 부담이 되긴 하지만, 후기 낙태도 처벌해서는 안 된다. 후기 낙태는 여러 이유로 조기에 낙태할 기회를 놓쳐서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후기 낙태를 금지해도 출산을 원치 않는 여성은 필사적으로 낙태를 시도하기에 안전하지 못한 방식으로 낙태할 위험만 높아진다.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임신 14주 이후의 낙태도 모두 허용하고 양질의 공공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정부 개정안의 사회·경제적 사유 기준도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국가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낙태 규제를 강화하려 들면 사회·경제적 사유 범위가 더 좁아질 수 있다. 양육을 위한 사회·경제적 여건이 나아졌다는 명분으로 낙태 허용을 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성이 아니라 국가나 의사가 낙태 결정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임신 유지가 불가능한 처지임을 입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여성에게 모욕적이다.
[을] … 부녀에게 인식”시키는 내용이다. 미국 텍사스주에서 여성들은 낙태 시술 전 적어도 24시간 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아 태아의 모습과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4 상담·숙려기간 의무 제도는 이미 낙태를 결심한 여성에게 죄책감만 심어주며 불필요하게 낙태를 지연시킬 뿐이다.
상담·숙려기간 의무화도 불필요하다. 낙태와 피임에 관한 의료 정보를 제공하는 상담은 필요할 수 있지만, 상담을 의무화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법안 마련 때 참고했던 독일에서 시행되는 의무적 상담은 “낙태 예방”이 목적이다. “임신의 지속을 위하여 부녀를 격려”하고, “태아가 생명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가지는 것
정부안이 통과되면, 낙태반대론자들이 의사 거부권 조항을 적극 이용해 합법 낙태를 더 축소시키려고 공격할 것이 분명하다.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들에서 의사 거부권이 포함된 곳들이 많은데, 낙태 반대론자들은 이 조항을 이용해 낙태권을 공격해 왔다.
‘성평등 정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존치를 결정하자, 여성 대중의 실망과 공분이 커지고 있다.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이 낙태죄 존치를 강력하게 고수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10월 7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낙태죄 유지에 청와대의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또한 정부가 지난 6~7월쯤에 “임신 주수에 따른 낙태죄 유지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이미 정해 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괘씸하게도 문재인은 지난 8월 중순에 발표된 법무부의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낙태죄 폐지” 권고안을 애당초 무시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부터 낙태죄 폐지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2017년 11월, 23만 명이 참가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도입’ 국민청원에 알맹이 없는 답변만 내놓았고, 2018년 3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낙태죄 폐지 권고안도 거부했다. 당시 청와대는 낙태죄 폐지 여부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을 회피하며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공을 떠넘겼다.
헌재 판결이 다가오자, 문재인 정부는 낙태죄 유지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2018년 5월, 낙태죄 위헌 심판 공개변론 때 법무부는 낙태죄 합헌 의견서를 냈다. 또, 낙태하려는 여성은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해 공분을 샀다. 몇 달 뒤에는 복지부가 불법 낙태 수술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행정처분규칙 개정을 시도했다. 법원 판결 없이도 불법 낙태를 도운 의사에게 자격정지 조처를 내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반발하고 특히 의사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2019년 4월 헌재 판결 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인 민주당은 낙태 찬반 진영의 눈치를 보며 낙태법 개정안 제출을 미뤘다. 총선을 앞두고는 “사회적 합의”와 “속도 조절” 운운하며 더욱 몸을 사렸다. 그러다 대체입법 종료시한 3개월을 앞두고 낙태죄를 유지하면서 낙태 허용 폭을 일부 확대하는 법안을 내놓은 것이다.
노동력 재생산
문재인 정부가 이토록 낙태죄 유지를 고수하는 배경에는 노동력 재생산 문제가 있다. 자본 축적을 지속하는 데에서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은 매우 중요하다. 지배자들은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개별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얻는다. 경제 위기 심화 속에서 문재인 정부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노동계급의 일자리와 조건을 공격하고 개별 가정에 노동력 재생산을 전가하며 평범한 여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저출산 현상’은 지배자들에게 골칫거리다. ‘저출산 심화’로 미래 노동력과 병역 자원이 급감해서 ‘국가경쟁력’과 국방력이 하락할 것을 크게 우려한다. 경제적·지정학적 위기 증대로 지배자들의 불안감이 높아지며 저출산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5 국공립 어린이집은 전체 보육 시설의 5퍼센트로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 국공립 어린이집 입소 경쟁률은 너무 높아 “로또”에 비유될 지경이다. 경제 위기에 코로나19 위기까지 겹쳐, 여성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더욱 늘어난 양육 부담으로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지배자들은 낙태한 여성을 죄인 취급하면서 출산과 양육에 필요한 복지 확대는 외면해 왔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도 어마어마한 경제적 부담에 짓눌려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오늘날 아이 1명을 대학 졸업 때까지 키우려면 3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의 공약은 공염불이었다. 아동·양육 복지는 찔끔 개선됐을 뿐, 필요 수준에 턱없이 미흡했다. 문재인 정부는 여성의 양육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복지 확대와 재정 투자에 지독히 인색했다. 반면 기업 살리기에는 600조, 국방비에는 5년간 301조를 쏟아 부을 예정이다.
정부는 노동계급 가정과 여성의 양육 부담은 외면하면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낙태죄 유지와 낙태 규제를 이용하려 한다. 이런 위선은 미혼모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문재인은 미혼모 문제에 ‘각별히’ 관심이 있는 척했지만, 미혼모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복지를 내놓지 않았다. 2018년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양육미혼모 실태 및 욕구 조사’(미취학 아동을 양육하는 10~40대 미혼모 359명 대상)에 따르면, 미혼모의 월평균 소득은 92만 원에 불과했고 이 중 66만원을 양육비에 쓴다. 직업이 없는 사람이 조사 대상의 절반 이상이었다.
코로나19는 미혼모에게 “대재앙”이었다. 미혼모 협회 ‘인트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소득이 절반 이상 감소한 미혼모 가구가 62퍼센트였다. 빈곤에 허덕이는 미혼모들은 아이에게 마스크조차 사 줄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냉혹하게도 문재인은 마스크조차 무상 제공하지 않았다. 낙태 반대 진영도 출산과 양육을 선택한 미혼모를 추켜세우며 낙태 비난의 지렛대로만 이용할 뿐 미혼모의 어려움과 고통에는 큰 관심이 없다.
문재인 정부가 여성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와 양육 지원 등을 크게 확대하지도 않으면서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는 것은 더욱더 부당하다.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출산은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낙태와 출산은 오롯이 여성이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허구적인 ‘태아 생명권’ 논리
문재인 정부는 낙태죄를 유지하며 낙태 허용 범위를 확대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조화”시키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권 논리는 낙태 금지론자들이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적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며 낙태 제한으로 이어질 뿐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헌재 결정문에도 “태아는 모체와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라며 태아의 ‘생명권’ 논리를 지지한 문제가 있었다.
‘태아 생명권’ 논리는 거짓된 주장에 기초해 있다. 우선, 태아는 모체에서 독립한 “인격체”가 결코 아니다. 태아는 모체의 산소와 영양분 공급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모체에 완전히 종속돼 있는 태아에 ‘권리’를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낙태반대론자들은 태아 발전의 연속성, 인간이 될 수 있는 태아의 잠재력, 태아의 인간 유전자, ‘독자 생존’ 기간을 거론하며 “낙태는 살인”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주장들은 논리 비약일 뿐이다.
6 태아 발전의 연속성 논리는 비약을 거듭하며 보수적 결론으로 이어지는데, 0.1mm 단세포 수정란도 사람으로 취급해 피임도 ‘살인’이 된다. 실제로 많은 낙태반대론자들이 모든 종류의 피임에 반대한다.
“수정 이후는 생명이 자라나는 연속적인 과정일 뿐”이므로 태아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연속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질적인 변화와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낮 12시에서 시간이 연속적으로 흐르면 밤 12시가 되는데 그렇다고 낮과 밤이 같다고 할 수 없다. 100 ℃ 물과 연속적 과정에 있는 0 ℃의 물은 끓지 않는다. 태아, 어린이, 어른이 연속적 과정에 있으므로 똑같은 “인간의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면, 왜 선거권의 나이 제한 철폐를 요구하지는 않는가?태아가 인간이 될 잠재력이 있으니 생명권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물론 태아는 인간이 될 잠재력이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잠재력이 있다고 해서 태아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취급할 수는 없다. 태아의 잠재력 실현을 방해한다고 낙태가 ‘살인’이 되면, 피임도 마찬가지가 된다.
수정란과 태아가 46개의 인간 염색체를 가졌기에 인간이고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체세포를 없애는 행위(머리카락 자르기, 손톱 깍기 등)도 살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미용사나 외과의사는 대량 학살범인가?
또, 태아가 ‘독자 생존’이 가능한 시점에서는 태아를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헌재는 태아 ‘독자 생존’ 기간을 “임신 22주 이후”, 현행 모자보건법은 “임신 24주 이후”로 삼고 있다. 정부의 개정안은 현행 모자보건법의 기준을 따랐다.
임신 후기의 태아는 인간과 유사하게 발전한다. 그럼에도 태아를 ‘독립적으로 생존 가능한’ 존재라고 볼 수 없다. 조산한 태아는 의료적 지원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임신 34주 전 태아는 폐 성숙이 불완전해 자가호흡조차 불가능하다. 조산 위험이 있는 산모들이 임신 기간을 채울 수 있도록 산부인과에서 치료하는 이유이다. 2015년에 미국 아이오와대 연구진이 임신 22주~27주에 태어난 조산아 5천여 명의 생존율을 연구한 자료를 보면,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한 22주 조산아는 한 명도 생존하지 못했다. `
‘태아 생명권’ 논리는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없다. 낙태 금지와 처벌을 합리화하기 위한 거짓이 범벅된 궤변이다. ‘태아 생명권’ 논리를 일부라도 수용하면 낙태 규제를 인정하기 쉽다. 따라서 낙태권을 일관되게 옹호하려면 ‘태아 생명권’ 논리를 굳건하게 거부해야 한다.
기독교와 낙태 ‘태아 생명권’ 논리는 종교적 측면에서도 일관되지 않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우파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이고 “낙태는 살인”이라는 교리를 성경 말씀인 양 찬양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낙태를 제대로 다룬 부분이 없다. 성경은 “인간 생명의 시작점에 대해 침묵하며, 오히려 출생시점에 시작될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언제나 낙태가 ‘살인’’으로 취급된 것도 아니었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신학자들은 임신 후 태동 시점에 이르러서야 (남아는 40일, 여아는 90일 이후) 영혼이 들어온다고 믿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기 낙태를 옹호했다. 중세 시대에 교회가 사회 통제 수단으로 여성 차별을 강하게 이용하고 낙태를 단속하기도 했지만, 태동 시점 이전의 낙태를 금지하거나 ‘살인’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공식 교리로서 모든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150여 년 전, 1869년 교황 비오 9세가 “수정 순간부터 인간”으로 규정하고 ‘모든 낙태를 살인’으로 천명했다. 뒤이어 1884년 교황 레오 13세가 ‘낙태 살인론’ 교리를 재확립했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교회는 경제적·정치적 권력에서 밀려났지만, 국가는 억압과 사회 통제를 위해 교회 이데올로기를 유용하게 이용했다. 19세기 들어 자본주의 국가는 성장하는 노동계급을 통제하고자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낙태를 허용하면 무분별한 낙태로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이들은 낙태 불법화 때문에 여성들이 생명까지 위협받는다는 사실은 깡그리 무시한다. 우파들이 ‘생명 존중’ 운운하는 것은 특히 위선적이다. 이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난민 추방과 인종차별에 앞장서는 역겨운 행태를 보여 왔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우익 테러를 부추기는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생명의 불가침성에 대한 회칙’ 〈생명의 복음〉을 낙태 반대 교리로 삼는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군사 독재 정권들을 옹호한 반면, “기초공동체(민중 교회)”와 “해방신학”을 비난하고 징계한 보수적인 전통주의자다.
9 개신교 우파 일부는 박정희 산아제한 캠페인에 적극 참가했다. 성경과 교리 해석을 변경해 ‘가족계획’을 합리화하고 박정희의 지원 속에서 ‘가족계획’을 교회사업으로 적극 활용했다. 10
낙태를 죄악시하는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우파는 정작 박정희 정부가 1960~70년대에 실시한 산아제한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국가는 인구가 많으면 경제 성장에 해롭다며 여성들에게 피임과 낙태를 공공연하게 권장했다. 1970년대에는 성가병원 같은 가톨릭 병원에서도 하루에 수십 건씩 낙태 시술이 진행됐다.11 앞에서 살펴보았듯, 성경이나 교회의 역사를 보든, 교인들의 실제 삶을 보든 가톨릭과 개신교 우파가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가톨릭의 ‘낙태 살인론’ 교리는 평범한 신자들의 삶과도 괴리가 크다. 2014년 5개 대륙 12개 국가 가톨릭 신자 1만 2천48명이 참가한 설문조사에서 낙태 반대 의견은 33퍼센트에 불과했고, 무조건 혹은 조건부 낙태 허용 의견은 67퍼센트(미국은 76퍼센트)였다.낙태 전면 합법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현행법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는 낙태죄 폐지 여론이 성장해 온 것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한 여성운동의 성과였다.
12 문재인 정부는 헌재 결정이 제시한 낙태 허용 범위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해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헌재 결정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태아 생명권 보장을 전제하고 있어, 낙태에 대한 형사 처벌 자체는 적합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제약의 범위가 문제라는 것이다.”많은 여성단체들과 노동단체 일각에서 헌재 결정의 긍정적 측면만 부각해 헌재 결정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일관되게 옹호한 것처럼 평가했는데, 이것은 과잉해석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개정안을 비판하면서 헌재 결정에 따르라고 촉구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이런 주장은 보수적인 국가기관인 헌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며 대중에게 수동성을 부추긴다.
여성운동은 헌재 결정의 한계를 인식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일관되게 옹호해야 한다. 낙태죄 폐지와 함께, 기간과 사유 제한 없이, 여성이 원하면 무조건 낙태가 허용되는 전면 합법화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만만치 않은 투쟁이 필요하다.
진보적 여성단체들과 노동단체들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해 왔다. 그런데 아쉽게도 낙태 부분 합법화를 지지하는 곳이 많았다. 20대 총선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정당들은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 부분 허용안을 제시한 바 있다.
헌재 판결 직후, 당시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낙태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낙태죄 폐지, 임신 14주 이내 낙태 모두 허용, 14~22주에는 특정 사유 낙태만 허용하는 낙태 부분 합법화 방안이었다. 불법 낙태를 시술한 의사에게 과태료 500만 원을 부과한다는 처벌 조항도 포함했다. 이런 법안은 진보정당의 법안으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많은 단체들(모낙폐와 민주노총을 포함해)과 개인들의 반발을 샀다.
최근 정의당 이은주 의원은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을 비판하며 “여성임신 중단, ‘처벌’ 아닌 ‘여성의 권리보장’으로 방향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취지를 살려 “안전한 임신 중단과 권리보장을 위한 모자보건법을 전면 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논란을 반면교사 삼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낙태 합법화의 내용은 무엇이 돼야 하는가? 여성의 삶에 실질적 이득이 되기 위한 조처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형법의 낙태죄는 당장 폐기돼야 한다. 또한 모자보건법, 의료법에 낙태 처벌 및 규제 조항도 없어야 한다. 여성은 물론이고 여성 동의 하에 낙태 시술한 의사에 대한 처벌도 안 된다.
2) 여성이 원하면 언제든지 낙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 결정권은 의사도, 국가도, 파트너도 아닌 오직 여성에게 있다. 청소년은 보호자의 동의가 없이도 자신이 원할 때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3) 건강보험으로 안전한 낙태 시술 및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다.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 청소년, 외국인 여성 등 누구든 무상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낙태약(미프진), 응급 피임약, 피임도구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관련한 의료 상담과 지원도 제공돼야 한다.
4) 국가는 가급적 모든 병원에서 낙태 진료가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합법화한 네덜란드는 국가의 승인을 받은 12개 진료소에서만 낙태 시술이 가능하다. 국가 지정 진료소가 너무 부족해 면담 약속만 몇 주가 걸린다.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또한 의과대학 정규과정에 낙태 교육을 포함해 숙련 의료인을 양성해야 한다.
5) 상담 의무화나 숙려기간은 없어져야 한다. 임신 유지를 강요하기 위해 죄책감을 주는 상담이나 낙태를 지연시키는 숙려기간은 모두 불필요하다. 낙태·피임 관련 정보 안내를 위한 의료 상담은 제공하되, 의무화해서는 안 된다.
6) 낙태 후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유급 휴가를 보장해야 한다.
계급 문제
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여성의 문제로만 여긴다. 그러나 낙태는 기본적으로 노동계급의 문제다. 낙태 금지와 처벌로 가장 고통받는 여성들은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들이다. 부유한 여성들은 낙태가 불법이어도 별 어려움 없이 낙태를 할 수 있다. 자신의 재력을 동원해 국내외 병원이나 개인 주치의를 통해 낙태할 수 있다. 노동과 양육 부담에 시달릴 걱정도 없기에, 낙태 뒤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푹 쉴 수도 있다.
낙태 불법화는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에게 특히 해악적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낙태 단속 강화 방침 발표 뒤 우익 의사들(‘프로라이프 의사회’)이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면서 병원이 낙태 시술을 거부하는 일이 크게 늘어난 적 있다.
그러자 여성들은 병원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고, 낙태할 곳을 문의하는 여성들의 절박한 상담전화가 여성단체에 빗발쳤다. 낙태 비용은 20배까지 치솟았다. 일부 여성들은 원정 낙태를 했고 가짜 낙태약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또한 낙태를 미루다가 임신 후기에야 수술을 받은 여고생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도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폐지 염원을 뭉개며 시간을 끄는 동안 여성들은 불법 낙태로 인한 부담에 짓눌리고 ‘살인자’라는 비난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온라인에서는 신뢰하기 힘든 낙태약 홍보가 활개를 쳤다.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서 그 위험성을 알리는 체크 리스트가 퍼질 정도였다. 어떤 청소년은 낙태를 하려고 피임약 몇십 알을 한꺼번에 복용해 자궁 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낙태가 합법화돼도 국가의 재정 지원이 없으면 낙태 문제의 계급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1973년 낙태 합법화 뒤에도 정부 지원금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청소년과 빈곤층 여성들이 자가 낙태를 하거나 낙태 비용 마련을 위해 성매매로 내몰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노동계급에게는 낙태죄 폐지뿐 아니라 낙태권을 실제로 보장하는 조처들이 중요하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낙태 문제를 남 대 여의 문제로 보지만, 낙태 문제에서 모든 여성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2016년, 낙태 처벌 강화 조처를 시도했다가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 ‘검은 시위’를 촉발시킨 장본인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다. 트럼프가 루스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의 후임으로 지명한 여성 판사 에이미 배럿은 지독한 낙태 반대 보수주의자다. 지배계급 여성들이 낙태 규제 같은 여성 차별적 조처를 지지하는 이유는 안정적으로 노동력 공급이 이뤄져야 자본주의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배계급 여성들도 여성 차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낙태 문제에서 보듯 부유층 여성들은 성차별로 인한 효과를 상쇄할 자원과 힘이 있다.
다른 한편, 노동계급 남성은 낙태 금지와 제한에서 득을 보지 않는다. 노동력 재생산이 개별 가정에 맡겨진 것은 남녀 노동계급 모두에게 큰 부담이고,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여성뿐 아니라 노동계급 남성도 속박한다. 자신의 동료와 가족이 불법 낙태로 고통받는 현실을 기뻐할 남성은 거의 없다.
13 ‘비웨이브’는 낙태 전면 합법화를 선명하게 주장하고, 문재인과 국가 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해 많은 여성들에게 짜릿한 청량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분리주의는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해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에 방해가 됐다.
급진 페미니즘은 낙태 금지가 ‘남성 권력’(‘가부장제’) 때문이라고 여긴다. 2018~2019년 3월에 낙태권 운동을 벌인 ‘비웨이브’는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들로서 “남성을 공공연히 배제하고 생물학적 여성의 단결을 강력히 주장했다.”14 모낙폐 조직자들도 비웨이브처럼 노동계급이 동참하는 대중 투쟁을 건설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엔지오들이 주도하는 연대체인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의 주요 활동가들도 낙태 금지와 같은 여성 차별 문제가 ‘남성 권력’에서 비롯한다고 여긴다. 이들은 ‘비웨이브’처럼 운동에 남성 참가를 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낙폐 조직자들의 정치가 진정 개방적이지는 않다. 그들도 운동의 집행 수준에서는 페미니스트들만이 참여하도록 하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배제해 왔다.‘모낙폐’의 주요 단체인 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은 페미니스트들의 국가기구 진출과 의원 배출을 통해 정부 정책 개입과 개혁 입법 활동에 주력하는 개혁주의 전략을 추구해 왔다. 이런 전략 속에서 민주당 정부 하에서 여연 간부 출신들이 정부에 입각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들어가 이를 이용해 성평등을 이룬다는 전략은 이미 세계적으로 심각한 모순과 난점을 드러내 왔다. 국가기구에 들어간 페미니스트들은 국가를 바꾸기는커녕 국가의 성차별적 조처에 침묵하거나 그 자신이 집행자가 되기 일쑤였다.
낙태권 운동에서도 개혁주의적 접근법은 한계를 드러냈다. 주류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폐지”에 열의가 있다고 여겨 큰 기대를 걸었다. 문재인 정부가 23만 명의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에서 모호하고 실효성 없는 답변을 내놨음에도 여연은 정부의 답변을 “전향적 태도”라며 추켜세웠다. 이후 ‘낙태시술 의사 처벌 강화’ 등 문재인 정부가 노골적으로 낙태죄 존치 의사를 드러냈을 때 이 조처를 비판했지만, 문재인 정부를 정면 비판하는 것은 삼갔다.
이번 정부의 낙태죄 존치 개정안 논의에 참가한 5개 부처 장관 중 여성가족부, 법무부, 교육부 장관 모두 여성장관이었지만, 주류 여성단체 활동가들의 로비와 ‘압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 했다.
고무적이게도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서 낙태죄 폐지와 낙태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낙태죄 폐지 지지 여론은 높았지만 낙태권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 했다. 2019년 3월 8일 비웨이브 주최 집회에 3천여 명이 모인 것이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 이 운동도 이 시위를 끝으로 중단됐다.
문재인 정부의 낙태 관련 법 개정안은 많은 여성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그러나 낙태 반대 세력들은 정부안에 반발하며 후퇴 압력을 넣고 있다. 정부안이 올해 국회를 통과해도 이들은 낙태 반대 운동을 지속하며 일부 확대된 낙태 허용 요건조차 축소하도록 압력을 넣을 것이다.
낙태 반대 세력의 공격과 국가의 낙태 처벌과 규제에도 맞서 여성들과 노동계급이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낙태권 운동은 노동계급의 구실이 컸다. 2018년 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로 낙태가 합법화된 것은 낙태권 운동이 노동계급이 대거 참여하는 대중 투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혁명이 여성 해방에서 결정적이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혁명으로 세워진 노동자 국가는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낙태는 어떤 조건도 없이 여성의 요청에 따라 허용됐고 법은 병원에서 무료로 낙태 시술을 하도록 했다.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받으려면 대중 투쟁이 필요하다.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투쟁의 성과는 언제나 공격받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미국 등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들에서 우파들의 낙태권 공격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력 재생산 제도로서 가족 제도를 유지해 여성 차별을 계속 만들어내고, 경제 위기 때는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조건에 대한 공격도 늘어난다. 개혁 후퇴에 맞서며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받으려면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 대중 투쟁을 벌이며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해야 한다. 나아가 노동계급이 혁명을 통해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한다면, 여성 해방을 향한 거대한 전진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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