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020년 미국 대선(11월 3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향방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과연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할지를 두고 미국과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트럼프가 재선할 수 있을까? 지난 4년 동안 온갖 거짓말과 오물을 쏟아 내고, 가장 반동적인 자들을 고무하고, 여성·성소수자·유색인종·이주민 등 천대받는 집단 모두를 혹심하게 공격하고, “화염과 분노”를 쏟아 내며 지정학적 갈등을 부추기고, 미국과 세계 노동계급을 사지로 내몰아 온 자가? 트럼프가 초라하게 낙선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금 미국 공식 정치는, 1974년에 당시 대통령 리처드 닉슨(공화당 소속)이 워터게이트 추문을 계기로 사임한 후 약 반 세기 만에 최악의 위기다.
트럼프는 대선이 현직 대통령인 자신에게 불리하게 “조작”될 것이라며 선거 결과를 따르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을러대고, 우편 투표가 불리할 듯하자 미국 우정청USPS 재정 지원을 거부하고 우편 구조조정에 나섰다.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한 사전 투표소 폐쇄, 경범자輕犯者들에 대한 투표권 박탈 등이 줄이었다.
선거로 트럼프를 교체하고 싶어하는 미국 지배층 주류는 기겁했다. 독설과 추접한 비난이 난무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후임 지명을 둘러싼 논란은, 그동안의 관례(소위 ‘미국식 민주주의’)를 깨는 데 대한 미국 지배층 주류의 불안과 그로 인한 쟁투가 선거 논란 와중에 표출된 사례다.
1 (반면 트럼프가 군비를 증강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는 대체로 합의가 있다.)
사실 이런 쟁투는 짧게 봐도 트럼프 당선 직전부터 지금까지 4년간 계속된 것이다. 트럼프는 단 한 번도 미국 자본가 계급의 선호 후보가 아니었다.(대자본가들이 트럼프의 감세와 규제 완화에 환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제2차세계대전 이래로 미국이 주의 깊게 구축한 세계 패권 유지 전략을 트럼프가 교란하는 데에 커다란 불만이 있다. 특히 나토로 대표되는 서유럽 열강과의 관계 문제가 임기 내내 중요한 쟁점이 됐다.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패배에 선선히 승복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날카로운 쟁투의 배경에는 중첩된 위기가 낳은 정치 양극화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표출될 때면 정치 양극화가 첨예해지곤 하는데, 그런 면에서 미국은 단연코 첨단을 달리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선거를 둘러싼 상황을 근본에서 규정한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 사회의 면모들을 살펴야 한다.
2020년 미국의 풍경들: 공포와 희망
2020년 미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지옥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미증유의 팬데믹이 미국을 강타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10월 7일 현재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21만 5000명을 넘어섰는데,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70여 년간 미군 공식 전사자 수 총합(10만 2683명)의 곱절을 넘는 숫자다. 누적 확진자는 770만 명을 넘겼다.
트럼프 정부의 팬데믹 대응은 처참한 지경이다. 트럼프는 이미 2월 초에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고도 두 달 가까이 이를 은폐했고, 이 때문에 초기 방역에 완전히 실패했다. 그 결과 2019년 세계보건안전지표GHSI에서 전염병 통제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꼽힌 미국에서 전 세계 사망자·확진자의 5분의 1이 발생했다.
트럼프는 대중의 생명보다 지배계급의 이익을 철저히 우선했다. 트럼프는 수익성 하락을 걱정해 경제를 재가동하자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격렬하게 밀어붙였다. 트럼프는 방역 조처를 모조리 무시하고 경제 재가동 압박을 선도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등 전염병 대응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트럼프는 자신이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조차 방역 완화와 경제 재가동 촉구에 이용했다.
2 을 부추겼고, 코로나를 “중국산 독감”이라고 부르며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부추겼고, 이동제한령 해제를 요구하며 주정부 청사를 점거하는 극우의 시위를 부추겼다.
동시에. 트럼프는 코로나19가 허구라고 믿는 음모론 집단 큐어넌QAnon노동자와 유색인종 등이 그 피해를 가장 크게 입었다. 코로나에 걸리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의료비를 청구받거나 사망했다. 용케 전염병을 피해도 실업과 생계 곤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약 2600만 가구가 연방정부의 실업 지원금에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의존해 생계를 이어간다. 공과금과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반면 최상위 억만장자 643명의 자산은 팬데믹 6개월 만에 8450억 달러가 늘었다.
기후 재앙도 미국을 강타했다. 대서양 발 허리케인은 미리 정해 둔 이름이 다 떨어져 그리스 알파벳으로 불러야 했다. 관측 사상 두 번째 일이다. 더 묵시록적인 장면은 미국 서부에서 펼쳐졌다. 몇 년 동안의 가뭄 때문에 건조해진 12개 주州에 들불이 번져 서울 면적의 30배 가까이 되는 땅을 불태웠다.
기후 변화 부인론자이고 임기 내내 탄소 배출량 규제와 환경 규제를 완화해 온 자답게, 트럼프는 “날씨 추워지니 [들불이 꺼질 때까지] 두고 보자”고 응수했다. 그러나 두 달이 넘는 지금까지도 불은 계속 타고 있다.
잔인한 인종차별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인종차별은 질병, 경제, 교육, 사법 등 모든 면에서 유색인종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미국에서 흑인의 코로나19 사망률은 백인보다 네 배 넘게 높았다. 특히, 경찰과 극우의 인종차별적 폭력은 아주 충격적이다.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조지 플로이드, 자기 차에 타려다 경찰의 총에 등을 일곱 발 맞은 제이컵 블레이크, 집에서 자다가 경찰의 총을 여섯 발 맞은 브리오나 테일러 등.
3 , 대중이 직접 행동에 나서면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확산시켰으며, 상당히 급진적인 요구들 ─ 예컨대 경찰 재정 삭감 혹은 경찰 해체 ─ 을 공식 정치의 의제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희망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온갖 병증病症으로 짓무른 미국에서 세계적 주목과 연대를 이끌어 낸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분출해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이 운동은 세계 약 80개 국으로 번졌다. 〈뉴욕 타임스〉는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운동이라고 지적했는데, 첫 3개월 동안만 1만 건이 넘는 시위·행진·충돌·소요·쟁의가 벌어졌고 미국인 약 40퍼센트가 이런 행동들에 한 번 이상 참가했다. 이 운동은 미국 노동계급의 거의 전체를 포괄하는 진정한 다인종 대중 운동이다. 그전까지 트럼프 정부 하에서 가장 큰 저항이었던 2017년 ‘여성 행진’(약 500만 명 추산)보다 참가자 수가 훨씬 더 많다.(‘여성 행진’에는 민주당과 온건 단체들의 정치적 지원과 기업의 후원금이 훨씬 많이 몰렸다.) 이 운동은 인종차별에 대한 미국 대중의 인식을 크게 바꿨고4 이 벌어졌고, 4년 전에는 “우리에게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샌더스 선거운동이 모종의 ‘사회주의’를 공식 정치의 장에 입성시켰다(샌더스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다). 또, 여성 차별, 성소수자 혐오, 이주민 천대, ‘티파티’ 등 강경 우파의 부상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들이 분출했고,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도 조금씩 늘었다. 이 모든 것들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항쟁에 영향을 미친 전사前史들이다.
이런 급진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10년 전에는 미국 금융의 중심지 월가街에서 “1퍼센트만 구제하는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외치는 ‘점거하라’ 운동트럼프: 극우를 결집시키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드러난 각각의 위기들은 서로를 더 심화시킨다. 팬데믹 위기가 경제를 더한층 둔화시키고 경제적 양극화를 촉진하며, 경제 위기는 인종차별을 강화해 긴장을 첨예하게 만든다. 이윤 몰이는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킨다. 이런 위기들이 중첩되면서 낳은 사회 불안정 속에서 정치 위기가 커진다. 정치 위기는 대중 저항으로도 표현되지만, 수십 년 만에 미국에서 결집하고 있는 극우 운동으로도 표현된다. 이런 정치 양극화를 미국(과 세계)에서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 중 하나가 바로 트럼프다.
6 을 적극 차용하기 때문이다. 닉슨은 흑인 평등권 운동에 맞서 인종차별과 백인 국수주의를 부추기고 이를 기반 삼아 당선했다.
흔히 트럼프는 닉슨에 비견되는데, 트럼프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에 대응해 “법질서 확립”을 외치며 닉슨의 ‘남부 전략’그러나 닉슨과의 차이점도 있는데, 무엇보다 트럼프가 “법질서 확립” 구호를 이용해 의식적으로 극우 기반을 구축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트럼프는 인종차별과 보호무역주의를 ─ 둘 모두 트럼프에게는 원칙에 가깝다 ─ 이용해 미국 사회의 가장 반동적 부위를 자기 주변으로 결집시켜 당선했고, 임기 내내 그런 부위를 고무해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실정失政의 책임을 가리려 했다.
2020년 현재 트럼프에게는 팬데믹 방역 실패와 경제 추락의 책임을 가리는 것이 특히 중요해졌다. 때문에 트럼프는 팬데믹이 한창일 때 주의회 의사당을 점거한 마스크 착용 거부 시위대를 고무했고, ‘큐어넌’ 지지자를 공화당 후보로 공직에 출마할 수 있게 했다. “세계주의자들”과 “미디어”가 연루된 비밀 조직이 자신을 훼방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기성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가장 반동적 방식으로 표출하는 극우의 입맛에 꼭 맞다.
8 “정당한 응징”이었다고 옹호했다.
트럼프는 “법질서 확립” 구호를 외치지만, 동시에 극우를 고무하면서 무질서를 조장한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에 맞서 극우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는 극우 청소년(17세) 카일 리튼하우스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대를 사살한 것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으며, 연방 병력이 반파시즘 운동 지지자 마이클 레이노얼을 살해하자가장 최근 사례는, 9월 30일 1차 대선 후보 TV 토론 때 트럼프가 극우 단체 ‘프라우드 보이스’에 직접 행동 지침을 내린 일이다. “프라우드 보이스, 물러서서 대기하라.” 널리 보도된 이 말 바로 다음에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좌파이지 우파가 아니다.”
트럼프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문제를 일으킬” 때를 노리며 “대기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프라우드 보이스’의 리더 개빈 맥키네스는 이 토론 직후에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일단 “물러서서 대기”하겠지만 “전국적으로 폭력 시위가 계속되면 도시를 불태우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트럼프 자신은 파시스트가 아니다. 트럼프의 목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전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대안 우파’ 같은 신흥 우익 운동, 그 자신이 일으킨 강성 우익 운동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 ‘프라우드 보이스’·‘애국기도회’ 등 극우 조직들, 복음주의 개신교 우파 운동 등을 모조리 고무한다. 이를 통해 자신을 중심으로 이 다양한 극우들과 전통적 공화당 우파(즉 미국 지배계급 주류의 일부)를 한데 묶었다. 그럼으로써 트럼프는 극우와 백인 우월주의를 정치 무대 위로 끌어올리고, 더 지독한 우익들이 자랄 토양을 제공하며, 공화당의 기반을 더 오른쪽으로 확장시켜 주류 정치 전반의 우경화를 촉진한다. 트럼프와 경합하는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이 트럼프의 인종차별을 비판한답시고 ‘흑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대신에 다리를 쏘면 되겠다’고 말한 것이나, TV 토론에서 트럼프를 공박하면서 무슬림 비하 표현을 들먹인 것은 그 한 사례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가 만드는 “이런 시궁창”은 파시스트들이 활개칠 공간이 된다. “파시스트들은 위기 때문에 극단으로 내몰리는 중간계급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동시에 결정적으로는 상층 계급의 영향력 있는 일부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기회를 노릴 수 있다. … 주류 정당들은 스스로 풀어놓은 램프의 거인을 제어하려고 오른쪽으로 이동하지만, 이는 반동적 벨트를 더욱 강화할 뿐이다.”
바이든과 민주당: 주류의 위기
바이든은 반反트럼프 정서에 기대 대선에서 승리하려 하지만 전혀 트럼프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계급적 기반과 선거 전략 모두에서 그렇다.
바이든의 핵심 선거 전략은 트럼프가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하고 인종차별 때문에 반감을 사 제풀에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바이든은 구체적인 약속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트럼프가 아님을 부각하는 데 주력한다.
바이든은 민주당이 대변하는 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민주당은 미국 지배계급 정당 중 하나다. 그래서 바이든은 자신의 친기업 성향을 숨기려 들지도 않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 바이든은 운동의 “폭력성”을 비난하며 (트럼프를 따라) “법질서 확립”을 앞세웠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의 요구에 한사코 반대하는 카멀라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바이든은 인종차별 철폐 염원에 재를 뿌리고 우파에 호의적 손짓을 보내 “중도표”를 잡으려 하는 듯하지만, 반反트럼프 표심과는 멀어지는 일이었다.
바이든의 전략은 큰 틀에서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취한 전략의 재판이다. 이 전략의 기본 전제는 ‘트럼프(최악)만 없으면 미국 사회가 정상으로 회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당(차악)에 투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상 상태’는 앞서 묘사한 지옥도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는 지금, 이 전제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바이든에 투표하려는 사람 중 3분의 2는 단지 “트럼프가 아니기 때문에” 바이든에 투표하며, 정책이나 후보자 면면을 지지해 투표하는 비율은 고작 한 자릿수대다. 바이든이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를 줄곧 앞서지만 선거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2016년에 클린턴은 트럼프와의 격차를 바이든보다 훨씬 많이 벌리고도 트럼프에 패했다. 그런데도 바이든이 클린턴과 같은 전략을 취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려는, 그 때문에 대중과의 괴리가 점점 심해지는 ─ 타리크 알리가 “극단적 중도”라고 부른 ─ 신자유주의 정치 자체가 위기와 혼란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대목에서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유명한 리더들인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잘못을 돌아보자. 샌더스는 예비경선 초기부터 “누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든 지지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2016년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처사다. 당시 클린턴 지지를 선언해 지지자들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
샌더스와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바이든이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4~5월부터 바이든 선거운동본부에 참여해 바이든을 “친서민” 후보로 포장해 줬다.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이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주변부에 머문 것도 이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2004년 대선 결과를 돌아볼 만하다. 당시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이 강력하게 분출해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고 공화당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을 역대 최악에 가깝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존 케리는 자신이 부시보다 이라크 전쟁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고, 대중의 실망을 사 큰 표차로 낙선했다.
당시 적잖은 미국의 반전 운동가들은 ─ 지금 샌더스가 트럼프에 대해 그러듯 ─ “부시만 아니면 누구든”이라는 생각에 케리를 지지하고 반전 운동을 잠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와 어깨를 겨루는 슈퍼파워’라고까지 일컬어지던 반전 운동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고, 운동은 분열했다. 기사회생한 부시는 이라크를 계속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2020년 미국 대선의 근저에 강력한 정치 양극화가 있다는 것은, 선거 후에도 이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 결과라는 측면을 먼저 보자. 미국의 복잡한 선거 제도 때문에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수백만 표를 더 적게 얻더라도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해 당선할 ─ 그런 사례는 미국 역사에서 다섯 번이나 된다 ─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14일로 예정된 선거인단 투표에서 선거인단이 상대 후보에 투표하는 경우도 ─ 상당히 예외적·제한적이지만 ─ 원천 봉쇄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비교적 분명한 것은, 트럼프와 바이든 중 어느 한 쪽이 결정적 우세를 점하지 못한다면(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심각한 논란과 쟁투가 뒤이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는 권력욕(과 생존본능)뿐 아니라 지지층 때문에도 패배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선거 결과를 둘러싼 쟁투를 법리적 테두리 안에서 벌일 수도 있지만, 지지자들의 거리 행동을 부추긴다는 더 우려스러운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런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는 이미 무장해 있고, 거리에서 잔혹한 폭력을 휘두른다. 선거 결과를 두고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정치 체제를 상당히 교란하는 일이 될 것이고, 그 때문에 트럼프는 지배계급 주류의 실질적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바로 이를 우려해 트럼프가 패배를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트럼프가 지난 4년 동안 쌓은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퇴임 후에도 공화당 핵심부와 극우를 잇는 가교 노릇을 한다면, 극우의 부상과 주류 정치 전반의 우경화는 계속될 수 있다. 트럼프가 닦은 토양 위에서 제2, 제3의 트럼프가 등장할 수도 있다.
바이든이 승리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적잖은 미국인들과 전 세계 사람들이 트럼프 낙선에 보일 첫 반응은 안도일 것이다.(물론 트럼프의 패배는 즐거워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바이든은 미국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지배자들을 대변하는 자다. 그 때문에 바이든 정부도 체제 위기에 대처하며 인종차별과 노동계급 공격을 강화할 것이다. 이는 미국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정부 8년 동안에도 벌어진 일이었다.
13 공화당 외곽에서 시작돼 공화당 의원단 상당수를 장악한 ‘티파티’ 운동이 오바마 정부 시기에 시작됐음은 유념할 만하다.
그런데 그런 공격은 극우가 성장할 토양을 제공하고, 공식 정치 무대의 외곽에 있는 극우 운동이 무대 중앙으로 진출하는 기회를 열어 준다.그렇다면 진정한 도전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같은 강력한 대중 운동이 계속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운동이 여름에 지배자들을 겁에 질리게 하고 정국을 주도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일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이 운동이 다른 운동들을 고무하고 있다는 점은 좋은 징후다. 대규모 연대 행동으로 극우에 맞서는 운동, 팬데믹 대응 실패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전가하지 못하게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례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발발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이 속출했는데, 거리 시위 규모가 수백만 명 단위로 치솟던 6월 첫 두 주 동안에만 비공인 파업이 약 600건 벌어졌다. 이를 포함해, 미국에서 3월 초부터 반 년 새 비공인 파업이 약 1000건 이상 벌어졌다고 미국 인터넷 언론 〈페이데이 리포트〉는 추산했다(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약 260건, 6월 1일부터 9월 초까지 약 750건).
하지만 과제도 있다. 현재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은 놀랄 만한 단호함과 끈기를 보여 주고 있지만, 대개 공권력의 인종차별적 폭력 규탄을 핵심 연료로 삼아 왔다. 이 운동은 극우와 파시즘에 맞선 도전으로 광범한 대중을 단결시키고 체제의 온갖 병폐에 맞선 노동계급 저항을 고무하는 일관된 운동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확대·심화돼야 한다.
그런 일은 결코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정치적 경험이 짧은 운동일수록 더욱 그렇다). 끈질기고 꾸준하게 운동을 고무하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승리의 전략을 제시하고, 노동계급이 고유의 힘을 발휘해 투쟁에 나서도록 조직하는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 민주당의 선거 득실에 연연하거나 선거주의적 제3당 건설에 몰두하는 정치로는 그런 일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없다.
14 한 이후 줄곧, 미국에서 혁명적 정치와 조직을 건설하는 과제는 험난하지만 중요한 과제였다. 체제 위기 속에서 위대한 대중 항쟁이 분출하고 반대편에서는 극우가 부상하는 지금, 그 과제는 이전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긴요해졌다. 이는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다.
바로 이 부분에 혁명적 정치와 조직의 중요성이 있다. 미국 국제사회주의단체ISO가 대중의 변화 염원에 제대로 조응하지 못해 2019년에 내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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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지위를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 하는 전략 차원의 이견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역대 세 번째로 미국 하원에서 탄핵된 대통령인데, 그 사유가 러시아와의 관계 문제를 둘러싼 쟁점임은 의미심장하다.
더 근본에서 이 갈등은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세계화에 대한 도전을 배경으로 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마틴 업서치, “세계화는 끝나는가?”, 《마르크스21》 26호를 보시오. ↩ - 인터넷 게시판 ‘4chan’에서 Q라는 익명의 인물이 펼친 음모론을 지지하는 흐름. 클린턴, 오바마 같은 민주당 권력층이나 영화배우 톰 행크스 같은 유명 인사들이 소아성애와 식인을 일삼는 음모적 집단의 일부고, 트럼프는 이들에 맞서 싸우는 메시아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
- 미국 사회주의자 에릭 프레츠는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화상 회의에서 “사상 최초로 미국인 4분의 3 이상이 인종차별을 ‘체제의 문제’라고 여기게 됐다”고 말했다. ↩
- 관련해, 프레츠, 트루델, 2011, “미국 ‘점거하라’ 운동의 의의”, 《마르크스21》 12호 (2011년 겨울)을 보시오. ↩
-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신자유주의를 지속하기로 한, 아니 더 극으로 밀어붙이기로 한 서구 지배계급의 고집 [때문에] … 인종차별적 우익 포퓰리즘이 등장해 대서양 양쪽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현대 서구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됐으며] … 트럼프의 집권은 그런 일이 일회적인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고 지적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몰락의 전설 ― 장기 침체, 양극화와 극우의 성장, 혁명적 좌파의 과제”, 《마르크스21》 28호. ↩
- 1968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이 흑인 평등권 운동에 맞서 사용해서 유명해진 선거 전략. 당시 닉슨은 유색인종을 “범죄자”이자 “복지 사기꾼”으로 몰며 “백인들의 삶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차별 반대 조처들이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
- 그런 ‘실책’ 중에는 심지어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같은 반동적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도 포함되는데, 그 정책의 배경에는 ‘외부인을 몰아내고 일자리를 미국인(백인)에게 되돌리겠다’는 공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레이건 이래로 지지율 변동 폭이 가장 적고 ─ ‘샤이 트럼프’라는 부적절한 표현으로 불리곤 하는 ─ 고정 지지층을 확보한 대통령이라는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는, 트럼프 지지층의 결집 수준을 흘깃 보여 준다. ↩
- 8월 29일에 포틀랜드에서 도심 시위를 벌이던 극우 단체 ‘애국기도회’ 회원 애런 대니얼슨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경찰과 연방수사국(FBI)은 용의자로 지목된 반(反)파시즘 운동 지지자 마이클 레이노얼을 친구 집 앞에서 사살했다.(그전에 레이노얼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 주장했다.) ↩
- 물론 여기에는 바이든의 이력도 영향이 있다. 1970년대에 정계에 입문한 바이든은 흑백 분리 정책 지지자들과 함께 활동했고, 1994년에는 악명 높은 인종차별 법인 ‘폭력범죄 단속 및 법집행법’의 초안을 작성했고 법안 통과에 일조했다. ↩
- 도니 글럭스틴, “혐오의 컨베이어 벨트를 멈추기”, 《마르크스21》 24호 (2018년 11~12월) ↩
- 관련해 조셉 추나라, “장기 불황의 정치경제학”, 《마르크스21》 22호 (2017년 9~12월)을 보시오. ↩
- 미국 사회주의자 야니스 델라톨라스는 샌더스 선거 도전이 패배한 것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의 규모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관해서는 델라톨라스 외, “코로나19 팬데믹과 세계적 저항”, <노동자 연대> 327호와 킴버, 찰리, 2019, “오늘날 개혁주의와 혁명”, <노동자 연대> 305호를 보시오. ↩
- 글럭스틴, 2018에서 이 동학을 자세히 다룬다. ↩
- 이에 관해서는 김영익, “미국의 최대 혁명 조직 ISO 와해의 원인과 교훈”, <노동자 연대> 285호를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