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
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1917∼2000)가 1996년 영국 맑시즘 행사에서 한 연설을 옮긴 것이다. 애초 토니 클리프 선집 1권 《국제 투 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 International Struggle and the Marxist Tradition》(Bookmarks, London 2001, pp. 133∼142)에 실렸다. 엥겔스의 삶과 사상을 쉽고 탁월하게 설명하는 글 이어서 독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토니 클리프의 수많은 저서들 중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정치학 가이드》(책갈피), 《소 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책갈피), 《여성해방과 혁명 — 영국혁 명부터 현대까지》(책갈피),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책갈피), 《마르크스주 의와 노동조합 투쟁》(책갈피), 《레닌 평전 1∼4》(책갈피), 《트로츠키 1927~1940 —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사수하다》(책갈피),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책갈피), 《트로츠키 사후 의 트로츠키주의 —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책갈피) 등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돼 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이인자로 자칭한 사실을 언급하며 강연을 시작하겠다. 마르크스의 이인자도 솔직히 대단한 성취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150인자조차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의 기여를 과소평가했다. 어떤 점에서 엥겔스는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인색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인자 그 이상이었고 마르크스주의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런 기여는 종종 마르크스로부터 독자적이었고 마르크스를 앞지르기도 했다.
이는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다.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살펴보라. 노동계급 중심성 개념이 어디에 처음 나오는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마르크스였을까? 아니다. 엥겔스였다. 1844년 파리에서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라는 책에서다. 이 책은 노동계급이 했던 역사적 구실은 물론 미래 사회에서 수행할 구실을 소개하는 탁월한 입문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이 책에 나온 것과 같은 사상들이 도서관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들이 도서관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썼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국제적 경험을 일반화한다. 즉, 노동계급의 경험으로부터 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 예를 들어보겠다. 1848년에 나온 《공산당 선언》은 사회주의 혁명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아주 모호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후 마르크스는 1871년에 다른 소책자를 쓰는데, 거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되면 관료제와 상비군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공직자가 선출되고 소환 가능하며 노동자 평균 임금을 받을 것이라 썼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영국 박물관에서 정말 열심히 연구했구나. 1848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1871년에 생각해 내다니!” 전혀 그렇지 않다. 1871년에 마르크스가 제시한 관점은 그해 일어난 파리 코뮌에 영향받아 형성된 것이었고 그것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코뮌을 만들어 냈고 거기에는 관료제도, 상비군도 없었다.
엥겔스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발견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 이점은 마르크스가 이주해 오기 전부터 영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영국은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출현한 곳이다. 당연히 여기 영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영국이 혁명과 거리가 먼 나라라고 배운다. 차르를 죽인 것은 러시아인들이다. 왕을 단두대에 세운 것도 프랑스인들이다. [교수형 당한 영국 국왕] 찰스 1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혁명이란 외국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어야 하므로 차티스트 운동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1842년 역사상 처음으로 총파업이 일어난 곳은 바로 이곳 영국이다. 엥겔스는 이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예를 들어, 1842년 파업과 관련해 흥미진진한 사실 하나는 바로 플라잉 피켓[파업 노동자들이 여러 작업장을 돌아다니면서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는 것]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들 플라잉 피켓을 우리가 최근에 개발했거나 우리 세대가 1970년대에 개발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전혀 아니다. 플라잉 피켓은 1842년에 개발된 것이다. 노동자들이 이 공장 저 공장을 돌아다녔다. 노동자들은 이를 ‘공장을 뒤집는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전국을 돌며 산업을 뒤집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일궈낸 탁월한 성취였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1842년 총파업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에서 차티스트 활동가들을 알고 지냈다는 사실을 빼놓고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엥겔스는 그저 목격자로 머무르지 않았다.
엥겔스가 쓴 책을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새롭고 탁월했던 사상들이 나온다. 모든 일이 다 지나고 한참 뒤에 결론을 내리기는 훨씬 쉽다. 1830년대나 1840년대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과연 엥겔스 같은 통찰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가 얼마나 탁월한지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엥겔스가 겨우 23살 때 이 책을 썼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이 책의 중요한 점은 단순히 노동계급의 삶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묘사도 매우 흥미롭기는 하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삶을 그릴 때 찰스 디킨스처럼 “오, 불쌍한 녀석들!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조금만 더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높으신 양반들?”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엥겔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그의 묘사에는 엄청난 낙관주의가 배어 있다. 노동자들은 역사의 희생자가 아닌 역사의 주체로,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로 나온다.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문장을 인용해 보겠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에 맞서 벌이는 전쟁은 지금은 개별적이고 간접적이지만 결국에는 직접적인 전면전으로 발전할 것이다. 평화적 해결책은 이미 너무 늦었다. 머지 않아 약간의 충격만으로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전쟁의 함성이 영국 전역에 울려 퍼질 것이다. ‘궁전에는 전쟁을, 판잣집에는 평화를.’ 그제서야 부자들이 정신을 차려도 이미 늦은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엥겔스는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알아봤다. 오늘날 노동조합은 흔히 그저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노동자 단체로 여겨진다. 게다가 요즘에는 토니 블레어[당시 영국 노동당 대표]의 영향으로 노동조합이 그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노동자들을 고용주에게 팔아넘기는 단체로 말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노동조합은 오로지 타협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엥겔스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노동조합 운동이 막 등장하던 시기였는데도 엥겔스는 그 잠재력을 봤다. 이미 1844년에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배우는 학교로는 노동조합만한 곳이 없다”. 엥겔스에게 노동조합은 타협이 아닌 전쟁을 배우는 학교였다. 노동조합의 목적은 보잘것없는 성과를 얻고 마는 데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쟁에는 매우 간단한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어느 한 쪽만이 이길 수 있다. 엥겔스가 보기에 노동조합은 전쟁의 무기였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레닌은 “노동조합은 공산주의를 배우는 학교”라고 말한다.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만나기 전부터 이런 용어들을 쓰고 있었다는 점을 명심하라. 엥겔스가 마르크스보다 먼저 노동계급 중심성을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당시 마르크스는 어디에 살았던가? 최근 그의 고향 트리에에 가본 사람이 있는가? 거기서 가장 큰 일터는 아마 마르크스의 집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달리 엥겔스는 당시 세계의 공장인 영국, 그것도 산업혁명의 중심지 맨체스터에 살았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먼저 떠올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상에 대해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상은 특허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위대한 사상을 누가 처음으로 떠올렸는지, 누가 원조인지를 말하기 어렵다. 사상이 강물과 같기 때문인데, 강물은 수많은 물줄기가 합쳐진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여한 수많은 물줄기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나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이인자라는 말이 싫다. 엥겔스를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기여한 독립적 물줄기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를 “마르크시스트”[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르는 것은 좋다. “엥겔시스트”[엥겔스주의자]보다 훨씬 발음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품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둘의 저작을 비교해 보면, 엥겔스가 선구자 구실을 하고 마르크스는 훨씬 깊이 파고들 때가 많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단순히 엥겔스를 따라했다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엥겔스가 선구자 구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에서 한 경험 덕분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뛰어넘어 한층 더 심화·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의 정의를 살펴보자.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고 (마르크스보다 훨씬) 간결한 문체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는: (1) 부르주아지에 맞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것. (이것은 명백히 계급적인 용어이다 — 클리프) (2) 이를 위해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공동체의 재산으로 대체하는 것. (3) 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오로지 강제에 의한 민주주의 혁명뿐이라고 보는 것.
여기에는 공산주의의 정의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담겨 있다. 공산주의는 혁명적인 강제력으로 쟁취하는 것이고, 민주적인 것이다. 어떤 50명이 유혈낭자한 쿠데타를 일으켜 다른 50명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또, 엥겔스는 혁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지배계급을 전복할 다른 방도가 없을 뿐 아니라,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피지배 계급이 그 시대의 오물을 씻어 내고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 사회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온갖 쓰레기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고 지배계급의 사상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명백하고 노골적인 사상만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인종차별주의가 나쁜 사상이고 반동적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사상은 초보적인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딸이 일고여덟 살일 때 일이 기억난다. 그 아이가 나랑 말싸움을 했다.(무엇 때문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말이 맞겠죠.” “왜 내 말이 맞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나보다 똑똑하겠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고 치자. 너는 네가 낳은 아이들보다 더 똑똑할 것이고. 그럼 사람들이 점점 더 멍청해지는 거네!” 연장자가 어린 사람보다 더 낫기 때문에 연장자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이것은 서열이다. 이런 서열은 우리가 사는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세상의 이치라는 생각을 살펴보자. 흔히들 말한다. “당연히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는 거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많은 노동계급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빠도 노동자, 할아버지도 노동자야. 너도 노동자가 될 것이고, 네 아이들도 노동자가 되겠지. 세상은 언제나 가진 자와 없는 자로 나뉘어 있어.” 그래서 결론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자는 뭔가 특출난 재주가 있는 게 틀림없다.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아홉 가지 언어로 서명을 할 수 있단다.” 정말이었다. “그런데 내 수표는 맨날 부도 처리 된단 말이지.” 그런데 아무 재능도 없는 누구가 와서 “X” 표로 서명을 한 수표는 아무 문제 없이 처리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사상이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어떤 창조적 행위, 즉 혁명으로만 떨쳐낼 수 있다. 혁명이 쿠데타와 같은 것이라면, 그러니까 어떤 극소수가 다른 극소수를 대체하는 것이라면, 예컨대 50명쯤 되는 군 장성들이 다른 군 장성 50명을 권좌에서 쫓아내는 것이라면, 대중이 지배계급의 사상을 머릿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도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해방이 오직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로만 가능한 것이라면, 대중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낡은 생각을 떨쳐내야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 그들이 스스로 과거의 낡은 생각들을 떨쳐내도록 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레닌은 “혁명의 단 하루 동안 노동자들은 한 세기 동안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자기 머릿속에 가득 찬 쓰레기들을 쓸어내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엥겔스의 생각이었다. 혁명 과정에서 투쟁하고 능동적이 될 때에만 노동계급은 비로소 집단적 힘을 발견하고 우러러볼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이 개념을 간략히 정리해 달라고 하면, 나는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나오는 일화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러시아 혁명의 파장을 기막히게 묘사한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건물 앞에 갔더니 노동자 두 명이 출입증을 검사하고 있었다.(당시에는 반혁명 분자가 폭탄을 던지러 오는 등의 위험이 있었다.) 트로츠키가 자기 외투를 뒤져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죄송한데요, 지금 허가증이 없네요. 하지만 저는 트로츠키입니다.” 그러자 노동자가 대꾸했다. “그쪽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노동자 권력이다. 누군가 총리 관저 앞을 지키고 서서 존 메이저 총리[보수당 소속의 당시 영국 총리]에게 감히 “그쪽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요” 하고 말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즉 진정한 노동자 권력이 들어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는 엥겔스의 사상은 굉장한 것이었다.
엥겔스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살펴보겠다. 다들 알다시피 《공산당 선언》의 표지에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이라고 돼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을 쓴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러나 이 책의 초안은 엥겔스가 썼다. 《공산주의의 원리》가 그것이다. 두 원고를 비교하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공산주의의 원리》에는 《공산당 선언》이 다루지 않는 여러 물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의 원리》에만 나오는 물음이 하나 있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할까? 이것은 80~90년 뒤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서 피바다가 열리게 한 질문이었다. 엥겔스는 이 질문을 던지고는 이렇게 답한다. ‘당연히 불가능하다. 세계는 국제 경제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등등. 《공산주의의 원리》를 살펴보면 엥겔스의 공헌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상들은 《공산주의의 원리》에 이미, 거창하지는 않지만 매우 분명하고 간결한 문체로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마치 환상적인 거대 벽화를 그리는 듯하다. 엥겔스는 작은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그러나 기본적 아이디어는 거기에 모두 담겨 있다.
다른 몇 가지를 더 살펴보겠다. 연속혁명 문제를 보자. 다들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창시하고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물론 사실이다. 훨씬 이전인 1848년에 엥겔스가 연속혁명에 관해 썼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엥겔스는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가 겁쟁이들이며, 동쪽으로 갈수록 더 겁쟁이들이라고 썼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왕의 목을 자를 만큼 대담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도 왕의 목을 베어버릴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왜 동쪽에 있는 부르주아지일수록 더 겁쟁이였던 것일까? 더 뒤늦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산업이 나중에 발전한 탓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이제 대규모 생산 단위의 형태로 조직됐고 강력한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19세기의 부르주아지는 이 새로운 계급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17세기 영국 부르주아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다. “우리가 혁명을 일으키면, 프롤레타리아도 우리에 맞서 들고 일어서지 않을까?” 당시에는 프롤레타리아가 봉기할 위험이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지 않았다. 식량과 물가를 둘러싼 소요는 존재했지만 공장에 집중된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엥겔스는 부르주아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너희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잠깐 동안의 지배일 것이다. 너희는 법을 정할 것이고, 너희가 세운 왕의 은총을 누리고, 넓은 궁전에서 연회를 즐기고, 왕의 딸에게 구혼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교수형 집행인의 발이 문지방을 넘고 있다.” 연속혁명이 무엇인지를 멋들어지게 설명했다. 19세기에 부르주아지는 봉건 체제에 맞서 부르주아 혁명조차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겁쟁이가 됐다. 자신들의 등 뒤에서 노동계급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정확한 제목이 무엇일까? 아직 안 읽어 봤어도 표지는 봤을 텐데, 그 책의 부제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1846년에 엥겔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이 책이 《자본론》만큼 장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26년 동안 그 책을 쓰며 어마어마한 양의 연구를 했다. 엥겔스의 소책자는 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럼에도 많은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그 책에 들어 있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차이, 착취, 잉여가치, 지대 이론 등이 그런 사례다.
나는 사람들이 엥겔스를 그저 마르크스의 추종자로 취급하는 것이 싫다. 슬프게도 엥겔스는 마르크스에 관해서는 언제나 지나치게 겸손했다. 그는 마르크스에게 완전히 헌신적이었다. 그의 헌신은 상상을 초월한다. 엥겔스가 자신의 타고난 소질을 거스르고 생애 대부분을 공장 경영자로 살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엥겔스는 그 일을 좋아서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노동자들과 경영자들이 더불어 사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오” 하는 식의 계급 조화 노선을 믿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공장 경영자였다. 엥겔스 가족은 맨체스터에서 공장을 소유했고 그에게 공장을 운영하게 했다. 엥겔스는 경영자로 일하는 매일, 매주, 매달을 증오했다.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왜 그 일을 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마르크스를 위해서였다. 마르크스는 일생 동안 아무것도 벌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도대체 왜 자본에 대한 책을 쓰는 거니? 자본을 좀 벌어 보지는 않으련?” 하고 물었을 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마르크스는 그 어떤 자본도 벌지 못했다. 수년 동안 마르크스의 가족과 자녀들에게 돈을 대 준 사람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가 죽었을 때 엥겔스는 결코 기쁘지 않았겠지만 십중팔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공장 경영자 노릇을 그만둬도 되니까 말이다. 엥겔스는 그 끔찍한 일을 결코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의 희생은 놀라웠을 뿐 아니라 당시 상황이 그의 헌신을 더욱 눈에 띄게 하기도 했다. 어디 밖에서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는 얘기인데, 마르크스에게는 사생아가 있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아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그 아이의 아버지 행세를 했다. 오늘날 보기에는 19세기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지독히 멍청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또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유물론을 마르크스의 고유한 기여라고 말한다. 하지만 엥겔스에게서도 이 같은 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막대한 부를 소유하지도 않는다. 투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야말로 부를 소유하고 투쟁을 벌인다. 역사는 마치 어떤 독자적인 인격체처럼 인류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하지 않는다.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흔히 엥겔스를 결정론자라고 말한다!
미래가 이미 결정된 것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필연적이라면 팔짱 끼고 앉아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온다니까!” 뭔가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역사로 가는 문을 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역사가 알아서 올 것이다. 역으로 파시즘의 승리가 필연적이라면 아마 팔짱 끼고 앉아 있지는 않겠지만,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서 울고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내가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엥겔스는 역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식화한다. 인간이 하는 것이 역사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쳐들어간 것은 프랑스 역사가 아니라 그곳을 습격한 남녀들이다. 역사가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러시아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러시아 혁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역사유물론의 의미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자신에게서 독립돼 있는 조건들 속에서 그렇게 한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영어로 말하고 있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어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내가 영어를 조금 비틀지는 몰라도 영어는 나에게서 독립적이다. [그러나]지금 영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언어가, 어떤 신비로운 존재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서툰 영어일지언정 여러분에게 연설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능동적 주체의 일부인 나다. 이 점이 엥겔스의 정식에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마르크스를 엥겔스와 대립되는 인물로 그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이론을 실천에서 분리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다른 시기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그리고 스탈린이 살아 있는 동안, 공산주의 운동은 대체로 스탈린을 지지했다. 스탈린이 감기에 걸려 재채기라도 하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손수건을 꺼내드는 지경이었다. 스탈린 사후에 그의 진정한 실체가 드러나자 그 똑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결심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맞서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트로츠키와 한편이 될 수는 없다. 스탈린주의자가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도 아닌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던 이들은 운 좋게도 누군가를 찾아낸다. 이탈리아 감옥에 갇혔던 한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던 그는 당연히 일상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람시다. 이들은 그람시를 따라야 할 모범으로 떠받들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도, 트로츠키주의자도 아니다! 그람시주의자다!”
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 마르크스를 공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이의 차이점을 찾기 시작했다. 엥겔스가 행동가임을 눈치챈 이들은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다고, 마르크스는 이론가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론》 3권에 나오는, 잉여가치가 평균이윤율로 전형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과 같다. 이들은 투쟁보다는 산술과 수학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인다. 이것이 그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구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같은 땅콩 껍질에 든 두 땅콩과도 같다. 사상적으로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서로에게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어떤 분야에서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와는 별개로 걸출한 기여를 했다. 1884년에 (즉 마르크스가 죽고 일 년 뒤에) 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보자. 이 책은 탁월한 기여였다. 새로운 주제를 탐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모건 등이 연구한 인류학을 활용했다. 엥겔스는 이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서 단순한 질문들을 던진다. 개인 관계는 [뭔가]? 가족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그러한 관계는 영원한가?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모든 것은 변하지. 예를 들어 예전에는 노예제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졌고 임금노동이 나타났잖아.”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변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런 변화와 무관하거나 그것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인간 본성은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엥겔스는 인간 본성이 역사적 조건의 일부임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줬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다. 탐욕이라는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나는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배달원이 우유를 놓고 가면 아무도 집 밖에 우유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상할까 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훔쳐갈까 봐 그러는 것이다. 지금 영국에서도 누군가 TV를 배달하러 왔는데 아무도 집에 없다고 TV를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유 배달원은 우유를 놓고 간다. 그렇다면 TV를 훔치는 것은 인간 본성이지만 우유를 훔치는 것은 인간 본성이 아닌가? 이것은 인간 본성과 무관하다. 이는 환경의 문제다. 우유는 싸다. 즉, 우유는 상대적으로 많다. 하지만 TV는 많지 않다. 엥겔스는 가족과 가족관계를 살펴보면서 가족이 기본적으로 계급 사회에 뿌리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가족’이라는 것의 조건은 사유재산이고 가족 내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들은 사유재산의 영향을 받는다. 엥겔스는 이 점을 자신의 작은 책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탁월하게 보여 준다.
마지막 몇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는 주로 엥겔스의 사상에 관해 말했지만, 엥겔스가 행동가였다는 점을 빼놓고 엥겔스를 논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의 가족이 엥겔스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는가? 바로 “장군”이었다. 왜 그렇게 불렀을까? (1848년 내내) 마르크스가 수많은 놀라운 글들을 써내는 동안 바리케이드에 있었던 사람은 엥겔스였기 때문이다. 군대에 들어가 전투에 참여한 것도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행동가였다. 그리고 평생 동안 행동가로 살았다.
엥겔스는 행동가였기에, 마르크스가 사건에서 약간 떨어져서 볼 수 있었던 명확한 그림을 보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론이 단지 실천과 직접적 관계를 맺고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실천과 너무 직접적인 관계를 맺다 보면 거리를 잃어버리기 쉽다. 마르크스는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엥겔스는 가끔 그 거리를 잃어버렸다. 예를 들어, 미국 남북전쟁이 벌어졌을 때 엥겔스는 남부군의 승리를 예상했다. 왜 그랬을까? 엥겔스는 여러 가지 근거를 내세웠다. 남부군은 더 잘 조직돼 있었다.(사실이었다.) 모든 사관학교들이 다 남부에 있었다. 가장 뛰어난 장군들도 남부군에 있었다. 가장 뛰어난 장교들도 남부군에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남부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북부군이 이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왜 그랬을까? 임금노동이 노예노동보다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이다. 뉴욕이 텍사스보다 선진적이고, 그러므로 북부가 이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회의 가장 천대받는 집단, 즉 흑인 노예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어디에서 어디로 도망쳤는가? 북부에서 남부로 갔는가, 남부에서 북부로 갔는가? 그들은 북부를 원했다. 그래서 남북전쟁에 관해 엥겔스는 온갖 군사 지식에도 불구하고 틀린 예측을 했고 마르크스는 옳은 예측을 했다.
이 같은 토론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찬양일색의 성인전이다. 엥겔스가 모든 것을 알았고 언제나 옳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마르크스가 항상 옳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최악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출판된 러시아 역사서가 레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라. 레닌은 언제나 옳았을 뿐만 아니라 레닌의 아버지는 투사이고 진보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레닌의 아버지는 차르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1881년 알렉산더 2세가 암살당했을 때 레닌의 아버지는 무엇을 했나? 교회에 가서 차르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찬양일색의 성인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성인은 성인에게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를 보라. 뭐라고 하는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가장 마지막 사람이 예수를 낳는다. 온통 누군가를 낳는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이 강연을 듣고 돌아가서 토니 클리프가 엥겔스는 훌륭한 사람이고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쓰레기 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엥겔스의 장점 하나는 아주 적극적인 활동가였다는 점이다. 마르크스 생전에도 그랬지만 더 중요하게는 마르크스 사후에도 그랬다. 1883~1895년, 마르크스가 죽고 엥겔스 혼자 활동한 이 12년 동안 전 세계의 혁명가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엥겔스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는 사실을 여러 군데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엥겔스는 그런 조언을 하는 데에서 아주 후했다. 그는 영국은 물론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 모든 대중운동에 관여했다.
엥겔스는 말로만 국제주의자가 아니었다. 실천에서도 국제주의자였다. 평상시 읽던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엥겔스가 매일 무엇을 읽었는지 기록한 목록이 여기 있다. 그는 7종의 일간지를 읽었는데, 그중 셋은 독일어, 둘은 영자 신문이었고, 나머지 둘은 각각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신문이었다. 또한 여러 언어로 19가지 주간지를 읽었다. 엥겔스 자신은 29가지 언어를 알았다고 한다. 어떤 언어를 읽는 것은 그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 쉽다. 엥겔스가 29개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29개 언어로 된 글을 읽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당시 러시아에는 사회주의자가 소수였고, 러시아어를 모르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운동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엥겔스는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대의를 위한 엥겔스의 기여와 헌신은 정말 대단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엥겔스의 말이 있다. 다음은 마르크스의 무덤 앞에서 그가 한 연설이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혁명가였습니다. 그가 삶에서 수행한 진정한 임무는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들어 낸 국가기구를 타도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투쟁은 그의 본령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도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엥겔스는 투사였다. 그는 추상적인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과학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무기였을 뿐이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가끔 잘못 이해되는 것처럼 누군가 책을 쓰면 이론이고 그것을 읽는 것이 실천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이론과 계급투쟁의 통일을 뜻한다.
나는 당이 계급을 가르친다는 주장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당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르치는 자는 누가 가르칠 것인가? 변증법은 그것이 쌍방향이라는 것이다. 이론은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실천은 그 자체로는 맹목적이다. 물론 현실에서 하는 실천이 이론을 앞선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밝혀내기 전에도 사과는 떨어졌다. 뉴턴은 나중에 사과가 어떻게 떨어지는지 설명하는 이론을 찾아냈을 뿐이다. 실천이 언제나 이론에 앞선다. 그러나 이론은 실천이 결실을 맺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실천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이론적인 사람들도 아니다. 이론적이면서 실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즉각적·장기적인 실천적 결과로 우리의 활동을 판단하라. 실천은 우리의 심판관이다. 우리를 좋아해서 지지하지 마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라. 그대를 시험에 들게 하라.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실천 속에서 여러분들은 셰필드 도서관의 공공노조 파업이나 영국에서 일어나는 다른 투쟁에서 효과적인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이론은 계급투쟁과 관련돼 있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하인리히 하이네가 쓴 아주 재미 있는 이야기로 연설을 마치려 한다. 하이네는 시인인데 《마르크스 교수의 꿈》이라는 짧은 작품을 썼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여기서 말하는 마르크스 교수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니다. 하이네는 이 이야기를 쓸 당시 카를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있는지 몰랐고, 마르크스는 그때 아직 꼬맹이였다. 어쨌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르크스 교수는 정원이 나오는 꿈을 꾸는데 그 정원에 화단이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 화단에는 꽃이 아니라 인용문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 화단에서 인용문을 따서 다른 화단에 심으면 거기서도 인용문이 자란다. 이것이 마르크스 교수의 꿈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꿈은 완전히 달랐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이 다른 이론을 낳고, 또 이론이 프락시스(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단어다)를 북돋는 것은 그들의 꿈이 아니었다. 그런 꿈은 순 엉터리다. 중요한 것은 이론이 현재 노동조합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현재 파시즘에 맞선 투쟁, 실업에 맞선 투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지금 벌어지는 체첸 전쟁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행동을 위한 지침이며 엥겔스는 무엇보다도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