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종차별과 자본주의》
인종, 계급, 자본주의의 관계를 탁월하게 밝히다
세계적 마르크스주의 석학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인종차별과 자본주의》(원제 《인종과 계급 Race and Class》)가 완전히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지금 미국에서는 경찰의 조지 플로이드 살해를 계기로 터져 나온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넉 달째 지속되고 있다. 이 운동에 연대하며 인종차별적 행태를 규탄하는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 책이 지적하듯이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다. 자본주의의 심장부 미국을 뒤흔드는 반란이 어디로 향하느냐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해 온 한국 자본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한국도 어느새 이주노동자를 들여온 지 30년이 넘었고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인종차별의 기원과 원인을 추적하고 인종차별을 뿌리 뽑을 전략을 내놓는 이 책은 어느 때보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노예제도, 제국주의, 인종차별
“인종차별은 노예제도와 제국이 낳은 창조물이다. 인종차별은 자본주의가 만인에게 보장하겠노라고 약속한 권리를 식민지의 천대받는 사람들에게는 평등하게 보장하지 않은 일을 옹호하기 위해 개발됐다.”
이것이 저자가 인종차별을 분석하는 출발점이다. 즉, 인종차별은 이전에는 없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특징이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인종차별은 오래된 인간 본성이라는 주장이 흔한데, 이는 인종차별을 없앨 수 없다고 넌지시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차별의 한 형태인 인종차별이 역사적으로 유별난 점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속성들이 차별받는 집단의 선천적 속성이라는 점이다. 흔히 피부색과 관련 있지만 그것이 필요조건은 아니다.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19세기에 아일랜드인은 백인인데도 인종차별을 당했다. 현대의 유대인 혐오도 한 사례다.
물론 이 ‘선천적 속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날조된 것이다. 예컨대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모든 유전변이 중 85퍼센트가 같은 지역이나 같은 부족이나 같은 나라 사람 내의 개인들 사이에 나타난다.” 그런데도 차별받는 집단에 속하면 개개인의 특성이 어떠하든 선천적이고 고정불변이라고 주장되는 속성에 욱여넣어진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특정 집단을 선천적 열등함을 이유로 배척하고 천대하는 이데올로기와 관행이 없었다고 주장한다(물론 끔찍한 계급사회였지만 말이다). 서기 193~211년에 로마 황제를 지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흑인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더 오래된 아프리카와 아시아 문명을 존경했다. 중세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세계로 나뉘어 서로 광폭한 경쟁을 벌였지만, 인종에 따른 싸움은 아니었고 다른 신앙으로의 개종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인종차별은 자본주의가 세계적 수준에서 가장 유력한 생산양식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그 기반이 된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려고 개발됐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는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었다. 불평등은 노골적인 폭력(군사력)과 법률로 뒷받침됐다. 착취는 눈에 빤히 보였다. 중세 농노는 영주에게 생산물의 일정량을 바치거나 일정 시간을 영주의 땅에서 경작해야 했다. 노예는 불평등하게 나뉜 여러 신분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존재를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자유로운 임금노동 착취에 기초한다. 임금 노동자는 법률적·정치적으로 착취자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런 자본주의가 초기 성장의 결정적 국면에서 식민지 노예라는 부자유 노동을 사용해 엄청난 이득을 봤다.
또한 부르주아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대중을 동원했다. 1776년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됐다. 사람은 모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께 받았다.” 그런데 식민지 플랜테이션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려고 1680년대부터 아프리카 노예 수입이 점점 더 늘고 있었다. ‘창조주’의 뜻을 거스를 것이 아니라면 이제 자본주의가 노예노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해명이 필요한 일이 됐다.
게다가 플랜테이션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처지이던 백인 계약 이민 노동자들이 노예와 동질감을 느끼고 단결해 자신들의 주인을 머릿수로 압도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자본가들에게 실질적 위협이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본가 계급은 흑인이 인간 이하의 존재이고 따라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상을 개발했고 그것이 뿌리내리게 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인종차별 탓에 노예제도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노예제도의 결과물로서 인종차별이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인종차별 사상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뒤에도 살아남았다. 오히려 인종 생물학이라는 형태로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 유럽 강대국들과 유럽화된 미국이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형질을 타고나 스스로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없으니 백인은 열등한 인종의 이익을 위해 통치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종차별
오늘날 노예제도와 식민 제국은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인종차별의 형태는 변화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본 사람들이 19세기에 성행한 생물학적 인종차별에 진저리를 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생물학에서 문화로, 인종에서 민족성으로 강조점이 이동했다. “유럽인과 비유럽인은 문화 차이 때문에 한 사회에서 공존하지 못한다는 사상을 이용해 이민 통제 강화를 옹호”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변화를 너무 크게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문화 정체성”이니 “민족 정체성”이니 하는 말에도 옛 인종차별의 상스러운 고정관념이 똑같이 녹아 있고, 한번 거기에 포함되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결국 선천적 열등함이라는 옛 관념을 은근히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종차별이 오늘날에도 유지되는 물질적 토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저자의 유물론적 분석은 매우 탁월하고 오늘날의 인종차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인종차별이 아직 청산되지 못한 한물간 옛 사상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제적 경쟁을 낳는다. “특히 노동이 탈숙련화되는 자본 구조조정 시기에 자본가는 기존의 숙련 노동자를 더 싸고 기술 수준이 낮은 노동자로 대체”하려 한다. “만약 이 두 노동자 집단이 국적이 다르고 그래서 십중팔구 언어와 전통도 다르다면, 두 집단 사이에서 인종에 따른 적대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한국에서 이에 잘 들어맞는 사례는 건설업일 것이다. 기술보다는 근력이 더 요구되는 새로운 공법이 도입됐고 이 자리에 중국 동포를 중심으로 젊은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유입됐다. 그러자 기존의 고령화된 일부 내국인 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로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은 백인 노동자(한국의 경우에는 내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앨 시맨스키가 1970년대 미국 50개 주의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의 처지를 비교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 이 점을 보여 준다. “백인 소득 대비 흑인 소득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백인 소득이 미국의 다른 지역 백인 소득보다 높”았다. 또한 “인종에 따른 차별이 심할수록 백인의 소득이 줄어든다. … 인종차별이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의 단결을 해쳐서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인 노동자는 왜 객관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데도 인종차별을 받아들이는가? 저자는 흑인 급진파 지식인 듀보이스가 “공적·심리적 임금”이라고 불렀던 것을 통해 그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백인 노동자에게 비록 현실은 팍팍해도 상대적으로 유력한 집단에 속했다는 위안과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종차별은 백인 노동자와 백인 자본가를 하나로 결속하는 특정한 정체성(“상상의 공동체”)을 부여한다. 계급에 따른 불평등과 착취가 은폐되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마르크스의 종교 분석에 비유해 인종차별이 백인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가상의 해법을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비록 그것이 틀린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위기의 시기에 바로 공격할 수 있는 눈 앞의 속죄양도 제공한다.
요컨대 인종차별은 자본가 계급에 경제적 이득이 될 뿐 아니라 위기의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훌륭한 통치술인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의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부추긴다. 2018년 체감 실업률이 1년 넘게 상승하던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40~50대 가장의 마지막 피난처”라며 건설업을 콕 집어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강화 방안을 발표했던 것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인종차별에 맞선 전략
인종차별이 가상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백인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은 인종차별에 맞서는 데서 무엇이 중요한지 단초를 제공한다. 바로 노동자들의 자신감이다. 노동계급이 사용자에 맞선 전투를 잘 치르고 있다면, 그래서 집단적 조직과 행동으로 사용자에 맞서 자기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가상의 해결책에 기대거나 분노를 흑인 형제·자매에게 돌릴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저자는 “계급투쟁의 수위와 인종차별의 영향력은 반비례 관계”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개혁주의 조직들은 사용자들에 맞서 투쟁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데서 한계를 보여 왔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이나 노동조합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를 매개로 해서 경제 위기를 경험한다. 개혁주의 조직들이 실업 증가와 생활수준 하락에 맞서 실효성 있는 투쟁을 벌이지 못하는 것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인종차별적 사상에 귀를 열게 하는 핵심 요인인 경우가 흔하다.” 한국에서도 건설업에서 특히 이주노동자와 내국인 노동자의 갈등이 심한 것은 앞서 살펴본 객관적 조건과 정부의 이간질 때문만은 아니다. 건설노조 지도부가 건설 현장의 ‘불법’ 인력을 문제삼는 전술을 취하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 체류자”)를 제대로 방어하지 않는 것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적 정치조직의 의식적 노력이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무슬림 혐오에 잘 대처해 파시스트 정당의 부상을 상당히 억제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 좌파들은 히잡 금지 법안을 지지하는 등 ‘세속주의’를 오해해 차별받는 무슬림을 적극 방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파시스트 정당이 성장할 수 있었다.
저자는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인종차별의 온갖 측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자본가 계급의 의식적 노력에 맞서야 한다. 더 나아가 “인종차별에 맞서는 투쟁은 사회적·경제적 쟁점을 둘러싼 선동과 연결돼야 한다.” 그래야 백인 노동자들이 인종차별이 제공하는 가상의 해결책이 아니라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단결한 노동자들 자신의 조직과 행동으로 사용자에 맞설 자신감을 얻고, 거기에서 대안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노동자들을 경제적 경쟁으로 내몰아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여기에서 이득을 얻는 자본가 계급이 지배하는 체제를 전복하지 않는다면 인종차별은 좀비처럼 되살아날 것이다.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이며, 노동계급은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계급이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경쟁하는 여러 국민 국가들로 분열돼 있다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도 국경을 따라 분열돼 있다. 또한 노동자를 충분히 공급받기 위해 자본가가 해외에서 노동자를 들여와야 하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한 나라의 국경 안에서도 노동계급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돼 있다.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이런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투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둘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하나다.
끝으로, 저자가 1992년 로스앤젤레스 반란을 다룬 부분이 무척 흥미롭다. 이 책이 1993년에 처음 출간됐으니(이 글이 최초 발표된 것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992년 여름 호였다) 당시 가장 최근의 반란을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이 반란에 다인종이 참가했고, 여러 인종의 노동계급이 모두 경기 침체와 그 고통을 떠넘기려는 레이건 정부의 공격을 받은 것이 그 배경에 있었다는 점, 이처럼 반란의 과정에서 흑인 노동계급과 백인 노동계급은 단결한 반면 흑인 중간계급은 분열했다는 점(국가 상층부에 진출한 흑인들은 반란을 지지하지 않았다)을 특징으로 꼽는다. 이런 특징들은 바로 오늘날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살해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투쟁과 많이 닮았다.
저자는 한인 상점 약탈을 부각하며 사태의 본질이 ‘인종 간 전쟁’인 것처럼 LA 반란을 묘사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문제의 원흉(국내외 대기업)에 대한 분노가 자본과 노동 대중 사이의 중개인 계층을 형성하고 있던 한인 상인에게 향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도심 곳곳에 이런 인종적 구성이 형성된 현실을 지적하며, 분노가 주적을 비껴가지 않게 하려면 계급을 출발점으로 삼는 전략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런 결론은 오늘날 인종차별에 맞서는 투쟁에도 중요한 전략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인종차별에 분노하고 맞서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