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주년
독일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함을 보여 주는가?
30년 전인 1990년 10 월 3일, 동독과 서독이 통일했다. 독일 통일은 그전 40년간 지속된 냉전이 끝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년 뒤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이 완전히 종식됐다.
소련 붕괴와 마찬가지로, 독일 통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소재다.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동독의 붕괴와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은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이자 자본주의 승리의 증거로 여겨졌다. 특히 여전히 남북이 분단돼 있는 상황에서, 한국 우파들은 독일 통일을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건으로 본다. “독일의 통일은 1945년 패전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미국 등 서방세계와의 동맹을 통해 독일의 재건을 모색”했던 노선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한국 우파는 서독이 경제적으로 강력하고 미국과의 동맹이 굳건해 “통일을 위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번영을 구가”한 것이 동독 주민들로 하여금 서독에 대해 엄청난 매력을 느끼게 했고, 이것이 동독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본다.
통일의 동력은 아래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 서독 자본주의의 경제력과 외교력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사태를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물론 결과를 보면 독일 통일은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형식을 띠었고, 통일 결정에 최종 도장을 찍은 것은 동서독 지배자들인 것은 사실이다(위로부터의 통일). 그러나 통일로 가는 문을 열어젖힌 것은 동서독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아래로부터의 통일). 양국 지배자들이 통일을 결정하기 1년 전인 1989년 11월 9일에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직접 허물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1989년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의 물결 가운데 하나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 이미 동독에서는 지배자들에 맞선 거대한 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동독을 비롯해 동유럽을 지배한 세력은 잔혹한 스탈린주의 독재 정부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이 국가들을 통제한 것은 소수의 국가 관료층이었지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동독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집회 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조차 억압당했다.
1987년부터 동독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졌다. 상점에 생필품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1989년이 되자 사람들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으로 떠나는 것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1989년 7월, 헝가리로 휴가를 떠난 일부 동독인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동독인 수천 명이 몰려들어 망명을 신청했다. 9월에 헝가리가 서독으로 향하는 국경을 개방하자 3일 만에 1만 5000명이 탈출했다. 10월에는 동독인 3000명이 서독으로 가는 열차에 태워 달라며 드레스덴역驛을 포위했다. 1989년 1월부터 10월까지 동독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약 16만 7000명에 이르렀다.
대량 이민 사태는 동독 정권을 뿌리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9월 초 노동자 밀집 지구인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시위는 10월 들어 전국 곳곳에서 수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시위대 한편에서는 “나가게 해 달라”는 요구가 제기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에 남겠다”며 동독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일에 18개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되자 사람들의 분노가 불에 기름을 붓듯 타올랐다. 군대에서도 병사들이 시위대와 일체감을 느끼며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1953년 동독 전역에서 대중 항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때 동독 지배자들은 소련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항쟁을 진압할 수 있었다.
1989년에도 동독의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련군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1953년과 달리 이제 소련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호네커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시위대의 자신감은 더한층 커졌다. “사람들은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그동안 쌓여 온 온갖 고통과 분노가 폭발했다. 갑자기 사방에서 정치 토론이 벌어졌다. 동시에 [켐니츠] 세 곳의 교회에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한 곳만으로는 몰려드는 참가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들도 비판적 논조의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집권당 당원들도 개혁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때늦은 변화였다. 집권당이 사태 변화를 통제할 방법은 없었다. 혁명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11월 4일 동東베를린에서는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 호네커는 사임해야 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호네커의 후임 에곤 크렌츠는 11월 9일에 여행 자유화 결정을 발표하면서도 “동독이 조만간 장벽을 허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바로 같은 날 밤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가 장벽을 무너뜨렸다. 서독인들은 장벽을 허물고 서독으로 온 동독인들을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여행의 자유는 민주적 권리의 상징적 요구였기 때문에 당시 집권당이 베를린 장벽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일 통일 요구는 바로 이런 투쟁 과정에서 등장했다. 시위대의 구호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이 요구는 점차 독일 통일을 뜻하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다.
서독 정부도 사태를 주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서독 정부는 빠른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태는 두 나라 정부의 계획을 앞질러 발전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터져 나온 통일 요구에 동서독 지배자들 모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은 통일이 독일 자본주의의 이익을 극대화할 기회라 여기고 서독이 이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콜은 독일이 통일하면 유럽을 좌지우지하며 초강대국들에 도전할 수 있는 강국으로 성장하리라고 봤다.
우파들은 콜이 당시 통일에서 한 구실을 추켜세우며 콜을 ‘동독 민중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사한 지도자’인 양 주장한다. 그러나 콜은 서독에서든 동독에서든 진정한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통일과 민주적 권리 쟁취의 원동력은 대중 자신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나온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승리?
동독 정권의 붕괴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 주는 것일까?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 통일돼 ‘착취 체제가 확산’됐으니 좌파들은 독일 통일을 반대했어야 할까?
그러나 동독과 서독의 대결은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 또는 ‘독재 대 민주주의’의 대결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핵심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해방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1864년에 작성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잠정규약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그 과정에서 노동자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핵심이다.하지만 동독 국가는 이 모든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고, 소련 군대의 탱크로 만들어졌다. 제2차세계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독일 대중의 의사와 상관없이 연합국인 영국·프랑스·미국·소련에 의해 1945년에 분할됐다. 마치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단했던 것처럼 말이다. 동독은 소련군이, 서독은 미군을 위시한 서방 군대들이 지배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그랬듯 동·서독에서도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초강대국들(미국과 소련)의 모습을 따르는 국가가 건설됐다.
스탈린주의 정당 사회주의통일당SED이 동독을 지배하는 정당이 됐다. 동독의 경제 발전은 소련의 요구에 종속됐다. 동독 경제는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급속한 성장을 거듭했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의 소비와 필요를 억압하고 모든 것을 경쟁적 축적, 그리고 냉전 갈등에 종속시킨 결과였다. 서독에서 자본가들이 했던 구실을 동독에서는 국가 관료들이 수행했다.
이에 대한 반발과 분노가 1953년 동독 노동자 항쟁의 동력이 됐다. 당시 벌어진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급속히 번졌고, 그 기세가 어찌나 거셌는지 소련군이 개입한 뒤에야 가까스로 분쇄될 수 있었다.
1953년 항쟁 이후 동독 지배자들은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엄격한 감시와 비밀경찰 등 억압적인 방식들에 더한층 의존하게 했다. 일례로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는데, 1953년 항쟁이 진압된 후 동독인들이 점점 더 서독에 매력을 느끼고 서西베를린으로 넘어가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동독 정부가 세운 것이었다.그러나 이런 억압 조처들도 대중의 불만이 또다시 분출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동독뿐 아니라 헝가리(1956년), 체코슬로바키아(1968년), 폴란드(1980년) 등 동유럽의 다른 스탈린주의 체제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봉기들이 잇따랐다.
3 보여 주는 증거 중 하나다.동독과 달리 서독은 ‘민주주의’ 편이었다고 보는 것도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규정이다. 동독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독에서 연합군은 전후 노동자들의 급진화 흐름을 억누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노동조합은 완전히 해체되거나 무력화됐고, 나치와 그 부역자 상당수가 권력 기구에 남았다. 1947년 이후 서독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얼마간 허용됐지만, 상당히 불완전했다. 가령 1956년에 서독에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활동이 금지됐다.
이런 노동계급 반란은 이 사회들이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 없고 서방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사회였음을1950년대 서독의 공산주의 탄압은 냉전 히스테리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서독 경제 성장의 지렛대였던 미국의 원조 계획 ‘마셜 플랜’과 결합된 것이기도 했다. ‘마셜 플랜’ 덕에 서독은 유럽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초석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서독의 높은 투자율·착취율, 그리고 미국과 달리 군사비 지출 부담에서 벗어나 있는 처지도 중요하게 작용했다.이처럼 동독과 서독의 대결은 형태에서 차이는 있지만 경쟁적 축적이라는 동일한 동학으로 움직이는 두 자본주의 국가 간의 대결이었다. 동독이 서독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회였으므로,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된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나 ‘확산’이라고 볼 까닭은 애초부터 없었다.
무너지는 환상
서독 같은 시장자본주의 사회가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리라는 환상이 동독 대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독의 현실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동독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생필품 부족과 민주적 권리 박탈의 동의어였다. 그에 견주면 서독식式 시장자본주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듯했다. 그래서 “통일 요구는 사실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동독 좌파들도 대중과 같은 환상을 공유했다. 이는 동독에서 시작된 정치 혁명이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로 귀결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동독에서 1989년 10월의 첫 번째 시위에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했던 대다수 사람들은 서방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시장경제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운동의 좌파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즉, “통일좌파 사람들도 대부분 어느 정도의 시장과 외국 자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장 사회주의 경향이 매우 강력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좌파는, 서독에서 온 사회민주주의자들, 옛 위성 정당의 당원들, 동독의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에게 서독 국가로 합병되면 모든 사람의 문제가 마술처럼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반박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5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통일 방식이 흡수 통일이라는 이유로 그 통일에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의 통일 열망에 공감하면서, 그것이 동서독 노동자들의 단결을 이루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예컨대, 동독 노동자들이 서독 노동자들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노력은 동서독 노동자들이 단결해 더 나은 조건을 쟁취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을 바란 동독 노동자들의 염원은 얼마 안 가 좌절됐다. 동독 경제의 시장화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장 폐쇄와 민영화, 그에 따른 실업을 동반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기업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동독 노동자들은 끔찍한 조건으로 내몰렸다. 통일 후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옛 동독 지역 대부분은 여전히 옛 서독 지역보다 뒤쳐진 낙후 상태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옛 동독 지역 노동자들은 옛 서독 지역 노동자들보다 임금과 생활 수준도 더 낮다.
하지만 독일 통일로 동독인들이 얻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동독 노동자들은 자유 선거, 노동조합 결성 권리 등 그전까지 누리지 못했던 민주적 권리들을 누리게 됐다.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이 얻은 성과가 소중하듯, 동독인들이 이런 권리를 얻게 됐다는 점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런 권리를 쟁취한 원동력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통일 이후 동서독 지배자들이 이전처럼 분열해 서로가 서로의 대안인 양 할 수 없는 오늘날, 과거보다 더 효과적으로 독일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투쟁할 객관적 조건과 가능성이 존재한다.
독일 통일은 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노동 대중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요체로 하는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주
참고 문헌
김하영 2000, ‘남북 해빙과 통일’, 《열린 주장과 대안》 4호.
엔겔하르트, 가비 2009,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특집③ 동독의 민주주의 혁명에 참가했던 좌파 활동가가 전하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의미’, <레프트21> 18호.
저먼, 린지 1990, ‘베를린 장벽의 붕괴 — 새로운 부활?’, 《동유럽은 어디로?(1)》, 신평론
정선영 2019,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 30년 -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교훈’, 《마르크스21》 31호.
하먼, 크리스 2009,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책갈피.
Tomáš Tengely-Evans 2019, ‘When the wall came tumbling down’,
Olaf Klenke & Win Windisch 2019, ‘9. NOVEMBER 1989: »REVOLUTION!«’, marx21.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