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투고
코로나19, 이주민, 한반도 단일 민족 신화
2019년 통계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이주민 가정은 전체 가정의 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초등학생의 3.8퍼센트가 ‘다문화’ 가정 어린이다. 이주 노동자들의 손길 없이 한국인의 밥상이 차려지기 힘들 정도로 이주민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그러나 ‘우리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는 관념도 꽤 만만찮다. 그러나 단일 민족 관념은 한반도 주민들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도 맞지 않다. 이 글은 그 근거로 주되게 세 가지 점을 들고 있다.
첫째, 필자는 한반도에 다양한 종족 기반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역사적 사례들을 소개한다. 실로 한반도는 여러 종족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면서 융합되고 투쟁했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단군의 ‘자손’들은 매우 다양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애초 한반도에 살았던 주민들과 다양한 지배와 피지배 관계, 복속과 종속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왔다. 고대 ’국가’에 민족 국가의 국적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정당한 까닭이다.
둘째, 이런 종족 또는 공동체들은 생김새나 생활방식 그 자체 때문에 체계적인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이주한 주민들은 차별을 받는 처지로 내몰리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경우 고려와 조선에서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본래적 속성(피부색, 종교, 생활방식 등)이 체계적 차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백정이 감당해야 했던 지독한 차별은 ‘조선인’들과 외모가 달라서는 아니었다. 가축 도축 기술로 부를 쌓은 집단도 있었다. 그들이 받은 차별과 멸시는 천민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셋째, 출신지를 체계적인 차별과 억압으로 활용한 것은 한반도에서도 제국주의와 관련있다. 일본은 중국 출신 이주민들과 조선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면서 이들을 반목하게 해 저임금 구조를 유지했다. 일본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군사적 경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국 내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이주한 중국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을 조신인 노동자들보다 더 차별했다.
한반도는 다양한 종족들이 세력을 겨루고 공존했던 공간 단일 민족 통념과는 달리 한반도는 다양한 종족이 세력을 겨뤄 오고 융합됐던 공간이었다. 고대부터 한반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종족과 주민들이 유입됐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단군 무리가 평양 일대로 이주하기 전에, 나중에 말갈족으로 불리게 될 예맥족이 한반도에 살고 있었고 한반도 중남부에는 후세에 한인으로 불리는 족속이 정착해 있었다는 기록과 해석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민족의 기원이라 믿는 단군 무리부터 한반도로 유입된 이주민인 셈이다.
문헌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이방인의 한반도 유입 시기는 고조선 건국 이후다. 진 시황의 폭정(만리장성 노역, 농민 봉기에 대한 폭압적 진압 등)을 피해 수만 명이 한반도로 피난해 왔다. 15세기 한반도 인구가 5백만 명 정도였다는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을 염두에 둔다면 중국계 이주민들의 규모는 매우 큰 셈이었다. 이들 이주민은 위만조선의 주요 구성원이 됐고 5만 명의 한나라 원정군에 맞서 1년 동안 저항해 싸우기도 했다.
2 삼한 성립 시기에는 한반도 남부에 왜인이 정착해 있었다는 기록과 해석도 있다.
위만조선이 패망했을 때 이들은 도망자 신세가 돼 영남 일대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적지 않다. 진나라 유민 상당수가 한반도 영남 일대에 정착한 뒤 이곳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무덤 양식인 목곽묘를 조성했다.3 그들 모두 이른바 단군의 자손은 아니었다.
요컨대 고대 한반도는 예맥족, 고조선인, 한인, 중국계 이주민, 왜인 등 다양한 ‘인종’ 조합으로 구성됐다. 한민족의 영웅적 과거를 상징하는 고구려는 어떤가. 고구려는 한나라의 압박을 견제하기 위해 한나라 왼쪽의 흉노 후예인 오환과 선비, 그 뒤를 이른 유연과 돌궐과 끊임없이 교섭했다.신라 유적은 아랍인들과 고대 한반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터번을 쓰고, 눈이 쑥 들어가고 수염은 곱슬곱슬한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경주 괘릉 호인상과 경주 용강동 호인 토용, 경주 구정동 방형분 호인상은 잘 알려진 사례들이다. 한반도에 정착한 주민에는 무슬림들도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에 활약한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 Masaudi, ~965년)와 또 다른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Iban Khurdadhibah 820~912년)가 남긴 사료 등이 이를 방증한다. “중국의 맨 끝 깐수의 맞은 편에는 많은 산과 왕국이 있다. 바로 그곳이 신라라고 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풍부하다. 무슬림들은 이곳에 일단 들어가면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고야 만다.”(쿠르다지바의 《도로 및 왕국 총람》, 이희근 2008, p68에서 재인용). 신라 왕 무덤의 무인석들의 형상들이 아랍인의 모습을 닮아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5 한반도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조선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회회’라고 불렸는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대조회, 망궐례 등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 때마다 초청받아 참석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서도 무시 못 할 존재였다. 이주 무슬림은 고유 의복을 착용하는 등 그들 풍속대로 생활했고 그들의 신앙을 유지한 채 살아가기도 했다.
심지어 신라 공주와 결혼한 페르시아 왕자의 이야기가 오래된 서사시로 기록돼 있을 정도다. 서기 650년경 서아시아의 사산조 페르시아가 새롭게 등장한 아랍 이슬람에게 멸망당하자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아즈데게르드 3세는 중국 당나라로 피신한 뒤 신라로 오게 됐고 신라의 공주와 결혼했다. 쿠쉬나메에 따르면 이 왕자는 화랑에게 무기 제조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영국 국립도서관 희귀 문서인 쿠쉬나메에 기록돼 있는데 몇 년 전 그 전문이 한글로 번역됐고 영국에서도 영어로 출판됐다.백정 차별
6 조선 개국공신 네 명 중 한 명인 이지란은 한반도 동북면 출신으로서 ‘쿠란투란티무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여진족의 일원이었다.
고려 이후에도 이주민들, 특히 거란족, 여진족들도 한반도 주민의 일원으로 정착했다. 이들이 고려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음은 《고려도경》 등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특히 거란인들은 유목인들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한반도에 오래 전부터 정착했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사냥, 소·말의 도축, 유기 및 가죽제품 제조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양수척, 백정, 화척, 재인 혹은 달단(몽골족의 한 부족인 타타르)이라 불렸던 이들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중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 특정 지역(오늘날의 전북 남원)에서는 평민의 4분의 1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7 샌즈는 “조선 사람들은 … 선사시대에 한반도로 이주해 온 흔적이 다소 보이고 대륙 인접국과의 간헐적 접촉과 남쪽으로부터의 유입의 흔적도 보인다” 하고 썼다. 8
구한말 고종의 고문으로 조선 왕실에 머물렀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사냥꾼들과 백정의 외모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긴 수염에 회색과 푸른색 그리고 갈색의 눈에 머리칼은 붉고 안색이 좋았다.”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북방 유목민 출신자들은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유목민적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주 몽골인과 함께 도축업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기존 주민들 중 일부 지배층만이 육식 문화를 향유했지만 이들 덕분에 고려 후기에 와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손님 접대에 소고기를 이용할 정도로 육식이 일반화됐다. 이들이 한반도에 단백질 공급원을 널리 보급한 셈이다. 이들 중 일부는 도축의 대가로 보통 소의 피와 내장, 가죽 등을 받아 시장에 내다팔아 상당한 이익을 남기도 했다.
9 그리고 천민으로 분류됐다. 백정이 관직을 얻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은 백정 신분이면서 전공으로 무관이 되어 참판 자리에까지 오른 자들이 매우 많다고 기록한 바 있다. 10 그러나 백정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경우는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자 백정이 천민으로 분류돼 가혹한 신분적 차별을 받았다. 평민조차 상종하지 않는 집단으로 천대받은 백정은 고려 시대만 해도 일반 백성을 뜻했다. 군인이나 관직을 부여받지 않은 일반 백성을 고려 시대에는 백정이라 불렀다. 그러나 백정은 조선 초에 접어들면서 재인, 화척만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 이들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도축, 사냥, 가죽공예품 생산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가다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동원되기도 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조선의 주력 부대는 당시 미군들이 ‘호랑이 사냥꾼들’이라고 부른 백정 출신의 ‘조선 예비 병력’이었다.조선 시대에 접어 들어 백정이 천민으로 분류됐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선 시대는 농사를 지어 쌀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그 세수에 의존해서 왕조의 재정 기반을 확보했기 때문에 농사를 기피하는 집단은 배척의 대상이 됐다. 둘째, 농경 사회에서 소는 매우 중요한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소 도축은 장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풀을 먹는 소와 달리 돼지는 많은 사료가 필요해 당시 돼지는 소보다 키우기 어려운 가축이었다).
조선의 개국 이후 소 도살이 금지되자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게 됐다. 백정들이 자신의 생계수단인 도축을 고수할 경우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가 부의 원천이자 쌀로 세금을 충당한 까닭에 이들의 오랜 생활방식인 유목조차 범죄 행위로 간주됐다. 한 마디로 백정이 받은 차별과 천대는 태생적 생김새와 출신지 등 선천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었다. 특정 생산방식과 신분 차별이 백정이 겪은 차별의 원인이었다.
국적이 차별의 이유가 되기 시작하다 국민 국가, 민족의식이 생겨난 뒤에야 국적 내지는 출신지가 차별의 이유가 되기 시작했다. 출신지 자체가 차별의 근거가 됐던 것은 근현대에 와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임금이 저렴한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하여 그들을 대거 고용했다. 관영 사업에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 수는 1920년대에 급증했다. 1925년에 조선에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 수는 27만 6510명에서 1929년에 90만 7425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중국에서 내전, 가뭄, 홍수 등으로 이주하는 노동자들을 조선인 노동자들보다 더 낮은 임금으로 고용했다. 예를 들어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 일본인은 50~120원을 받았는데 조선인 노동자는 16원 50전을 받았다. 반면 중국인 노동자는 15원을 받았다. 이런 임금 차별은 조선 노동자와 중국 노동자들 사이의 긴장을 낳기도 했다. 때때로 조선 노동자들은 중국 노동자들의 고용을 저지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13 조선총독부는 끔직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조선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중국 노동자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기도 했다. “노동시장에서 여러 노동자 집단이 서로 경쟁하는 현실이 분열을 낳고 자본가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분열을 최대한 키우려고 애”쓴다는 점은 일본 자본가들에게도 딱 들어맞았다. 14 인천, 평양 등지에서 일본인 경찰이 화교 배척 폭동을 지휘했다. 당시 화교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습격 현장에서 일본인이 조선옷을 입고 난동을 지휘하기도 했다. 15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병참기지가 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더 열악해졌는데 일본 제국주의는 그 불만을 중국 노동자들로 향하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노동자들과 중국 노동자들이 함께 저임금에 항의하며 동맹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예컨대 1928년 중국인 세탁 노동자와 조선인 세탁 노동자가 함께 단체협약권 획득을 위한 동맹 파업을 벌였다. 1930년에는 작업 시간 10시간 제한을 요구하면서 중국인과 조선인 철공소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하기도 했다.나오며
다시 단일 민족 얘기로 돌아가 보겠다. 사실 구한말 이전에는 구성원 전체가 단군의 후손이라는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 양반, 평민, 심지어 천민까지 신분을 초월하여 공통의 조상을 가진 한 민족이라는 논리가 설 여지는 없다. 천민과 노비와 왕족이 한 핏줄 한 가족이라는 생각은 당시 사회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민족주의가 성장한 것은 19세기 개항과 함께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고,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강점한 것과 때를 같이했다. 19세기 말에조차 현재의 국경 개념은 분명하지 않았다. 단일 민족, 단군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기록상으로 보면 1904년부터 등장했다. 1880년대 평안도에서 김염백이 주도한 단군 신앙 운동이 일어났고 백봉을 중심으로 한 단군 교단이 생겨났다. 백봉의 단군 교단이 1904년 개천절 백두산에서 발표한 ‘단군교 표명서’에는 “무릇 우리 동포 형제 자제는 모두 우리 대황조 백세본지의 자손이요, 본교는 4천 년 우리 나라의 고유한 종교다”라는 구절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처음 출현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생각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항의, 저항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낳은 산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과 신분제도의 폐지 등이 민족의식을 만들었다. ‘군주’ 대신에 ‘민족’이 국가의 중심 개념이 됐다.
예컨대 <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1일자 논설에는 “단군시조자손으로 이 국가를 이질손가”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황성신문>은 1908년 3월 13일자 논설 ‘금일의 사람은 모두 형제이다’에 “이천만 민족은 동일단군자손이니”라는 표현을 썼다.
민족 국가, 민족주의가 모두 근대의 산물이기에 ‘고대 국가’에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민족의식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민족》의 저자인 아자 가트나 알렉산더 야콥슨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고트족이나 프랑크족 같은 종족 범주가 고정적이었고, 중세-근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서는 같은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이탈리아적 의식이 확고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체로 정직한 역사가들은 이런 해묵은 주장에 근본적 이의를 제기해 왔다.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이 지역 지배자들의 자가당착적인 역사 왜곡이 계속되고 있다. 시진핑은 현대의 중국을 수·당 왕조를 이어받은 역사체라며 중국몽을 내세운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은 한족 출신이 아니라 유목민 출신이었고 당나라는 여러 종족들을 포괄하고 수용함으로써만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17 조공은 중국 왕조 주변국이 중국 왕조에 1을 주면 중국 왕조가 2~3을 주는, 일종의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외교 관계의 일종이었다. 6~8세기의 동아시아의 조공 제도는 지금 현대 제국주의 체제에서의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질서와는 다르다. 18
조공과 책봉을 중국 왕조의 세력권 형성으로 직결시키는 것도 넌센스다. 책봉을 매개로 하는 정치 관계가 중국 문화를 확장시켰다는 것도 현재의 바람을 투영한 역사 왜곡이다. 동쪽 지역 나라들 이외 지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주류 역사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베트남이 중국화됐다는 근거는 없다.물론 저항하는 민족주의와 지배층의 민족주의는 명백하게 다르고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민족’이라는 표어를 사용해도 그 민족 안에는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계급이 있다. 심지어 재난의 무게조차도 다르다는 현실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재난지원금도 지급하지 않은 것이 한국 정부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차별에 맞서 무수히 저항했고 그 저항은 자주 본토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본주의는 그런 저항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토양을 제공한다. 자본이 국경을 만들고 민족의식을 싹트게 하면서도 국경의 담장을 허물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물론 자동적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주
- 이희근 2018, p13. ↩
- 이희근 2018, p.97 ↩
- 이희근 2018, p14. ↩
- 권오영 2020, p218~231. 그는 이 책에서 특히 중앙아시아와 한반도 고대 국가들 사이의 소통 교류 역사에 주목한다. 동아시아가 한중일 관계로 환원된다면 그는 동아시아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 서술에 그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를 다양한 유적 유물의 사례를 들어 방증하고 있다. ↩
- 이희수 2014, 《쿠쉬나메》, 청아출판사. ↩
- 이희근 2018, p118. ↩
- W.F. 샌즈.1999, p.41. ↩
- 이희근 2013, p.22에서 재인용. ↩
- 이준구 2000,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 양수척 재인·화척·달단’, 《조선사연구》 9. ↩
- 이희근 2013, p.270. ↩
- 같은 책, p256. ↩
- 김태웅 2016, p.44 ↩
- 김태웅 2016, p.98. ↩
- 캘리니코스 2020, p.87. ↩
- 김태웅 2016, p.126. ↩
- 이희근 2018, p.228〜229. ↩
- 이성시 2001, p.162. ↩
- 이에 대해서는 김한규 2015, 《천하국가》, 소나무에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
참고 문헌
권오영 2020,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21세기북스.
김태웅 2016, 《이주 노동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아카넷.
김한규 2015, 《천하국가》, 소나무.
나인호 2019,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역사비평사.
이성시 2001, 《만들어진 고대》, 삼인.
이준구 2000,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 양수척 재인·화척·달단’, 《조선사연구》 9.
이희근 2018,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따비.
이희근 2008,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너머북스.
이희근 2013,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책밭.
이희수 2014, 《쿠쉬나메》, 청아출판사.
이홍규 2012, 《한국인의 기원》, 우리역사연구재단.
캘리니코스, 알렉스 2020, 《인종과 계급》, 책갈피.
W.F. 샌즈.1999, p.41. 조선비망록,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