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주의자들의 기원》 서문 *
《국제사회주의자들의 기원》에 수록된 주요 글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계급적 성격’은 나중에 “국제사회주의자들”IS 그룹이 되는 중핵을 형성시킨 정치 입장문이었다. 물론 종합적 강령은 아니었다. 이 그룹의 창립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우리는 트로츠키주의 경향이고 러시아에 관한 우리 입장이 트로츠키주의를 우리 시대의 필요에 맞게 다듬어 완성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FI을 진정한 트로츠키주의 조직으로 건설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할 것이다. 1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창립자들은 스스로를 주류 트로츠키주의로 여겼고, 제4인터내셔널을 주도하는 그룹과 중요한 쟁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근본에서는 같은 경향에 속해 있다고 봤다.
그후 트로츠키주의 운동으로 출발한 다양한 그룹들은 모두 제4인터내셔널 1·2차 대회(1938~1948년) 당시 트로츠키주의로 이해되던 것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의 경우 이것은 의식적이었고 스스로 그 변화를 인정했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좌익반대파가 대표한 공산주의 전통의 정수를 보존하려 했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변화된 상황에 적용하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조건에 기초해 내린 결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정설” 트로츠키주의 그룹의 변화는 결코 더 작지 않았고 오히려 훨씬 컸다. 국제사회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이런 변화들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문제가 이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 준다.
트로츠키주의 경향은 갈수록 스탈린주의화하는 러시아공산당의 내부에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 내의 개혁 운동으로서 등장했다. 첫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러시아에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고 제4인터내셔널을 새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크리스 하먼은 소책자 《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나》[국역: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 2016, 233∼262쪽,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나’]에서 그 시기 러시아에서 일어난 변화를 사실 관계에 입각해 훌륭히 설명했다. 아래 내용은 이를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2 그럼에도 10월 혁명이 확보한 고지는 아직 잃지 않았다. 국제 운동의 일시적 패배는 러시아에서 반동을 낳았을 뿐이며, 이 반동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1920년대에 변질된 것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회주의 사회의 물질적 기초는 노동 생산성이 높은 발전한 산업이다. 내전 후 고립된 러시아에는 이것이 부재했다. 레닌이 지적했듯 “러시아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조차 완수하려면 한참 멀었다. 우리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원조 없이 이를 완수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적이 결코 없다. ⋯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최종 승리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특히, 부르주아적 반혁명을 왜곡된 방식으로 반영하는 우파 경향이 러시아공산당 안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부하린-리코프 그룹이었다. 이들은 좌익반대파의 일관된 반대에 부딪혔다. 둘 사이에는 동요하고 일관성 없는 중간파인 스탈린주의 분파가 있었다. 이 분파는 당과 국가 관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주적은 우파였다. 우파의 정책은 산업화는 달팽이 같은 속도로 추진하는 반면 농촌과 도시의 소자본가(쿨라크와 네프맨)들은 방임하는 것이었는데, 트로츠키가 보기에 반혁명으로 직행하는 길이었다. 스탈린주의 중도파는 우파에게 길을 열어 준다는 이유에서 비난받았다. 스탈린주의 중도파는 1926~1928년에 우파와 연합했다. 좌익반대파의 국내 정책은 공업화와 민주화를 중심으로 했다. 두 축은 러시아 노동자 운동의 부활을 도모하는 상호 보완적인 측면으로 여겨졌다.
훗날 트로츠키는 1920년대 중반에 취한 입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분명 이원 권력의 요소들이 러시아 안에 싹트기 시작했지만, 반혁명적 전복이 아니면 그런 요소들이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좌익반대파는 주장했다. 이미 관료들은 네프맨·쿨라크들과 연계가 있었지만, 그들의 주된 뿌리는 여전히 노동계급으로 뻗어 있었다. 좌익반대파에 맞선 투쟁에서 관료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네프맨과 쿨라크라는 무거운 꼬리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꼬리가 머리, 즉 지배 관료들을 때릴 터였다. 관료층 내의 분열은 필연적이었다. 반혁명적 전복의 위험이 목전에 다가오면 중간파 관료들의 핵심부는 성장하는 농촌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노동자들의 지지에 의존하게 될 것이었다. 그 충돌의 결과는 전혀 예정돼 있지 않았다. 3
따라서 소련은 여전히 노동자 국가였다. 핵심 척도는 개혁 가능성이었는데,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노동자 운동 내의 중도주의적 경향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현재의 소련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소련 프롤레타리아가 관료를 굴복시킬 가능성, 당을 부활시킬 가능성,[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재건할 가능성을 아직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도 뜻한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방법과 진로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4
이런 주장은 러시아 [좌익]반대파 내 극좌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고참 볼셰비크의 가장 빼어난 대표자인 고故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의 주장에 따르면, 산업화가 지연되고, 쿨라크와 네프맨이 성장하고, 이들과 관료 사이에 연계가 생기고, 당이 변질하는 바람에 새로운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적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 됐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권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5
이미 1926년에 스미르노프, 사프로노프, 오신스키 등 “민주집중파”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됐다고 주장했다. 핵심 문제는 권력 문제였다. 임금 제도, 상품 생산, 사회 계급이 러시아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시 됐기에(모든 경향이 인정하는 바였다) 문제는 어느 계급이 관료를 통해 실제로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민주집중파”는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지라고 봤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이라고 봤다. 그래서 개혁(트로츠키)과 혁명(스미르노프)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1928~1929년에 러시아공산당 우파와 이들이 대변하는 사회 세력은 분쇄됐다. “한 계급으로서의 쿨라크는 청산됐다.” 좌익반대파가 제기한 어떤 계획보다도 야심찬 공업화 계획이 추진됐다.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실질임금이 깎이고, 흔적만 남은 노동조합의 단체 협약권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뜻했다. 공산당과 러시아에 남아 있던 민주적 권리의 잔재가 제거됐다. 노동계급은 원자화됐다.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반대가 반역으로 간주됐다. 전체주의 국가가 수립됐다. 이런 심대한 변화를 밀어붙인 것은 “중도주의”로 간주된 스탈린주의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이제 아무에게도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잡았다. 좌익반대파는 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1929년까지도 좌익반대파는 여전히 우파에 대한 항복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태 전개가 일으킨 파장으로 인해, 투옥되거나 망명한 반대파는 정치적으로 와해했다. 다수는 “투항자”가 됐다. 핵심적인 위협은 우파이고 이제 스탈린이 공업화를 추진하고 있으니 좌파의 과제는 당내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 축에는 “양립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새로운 혁명을 지지했다. “두 극단이 성장했으며, 반대파의 쪼그라든 잔재만이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기존 견해를 재고해야 했고, 결국 소련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그 과정은 여러 해가 걸렸으며 1933~1935년이 돼서야 종합이 이뤄졌고 이는 훗날 새로운 “정설” 입장이 된다.
7 관료는 노동계급 운동 내의 중도주의 경향이 아니라 “오늘날 주로 스탈린의 보나파르티즘적 패거리로 축소된 테르미도르적 과두 지배 집단이다.” 8 국가기구는 “노동계급의 무기에서 노동계급에게 관료적 폭력을 행사하는 무기로 탈바꿈했고, 갈수록 러시아 경제를 사보타주하는 무기가 됐다.” 9
이 수정된 이론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포함됐다. 소련이 개혁을 통해 건강한 노동자 국가로 회복할 가능성은 이제 전혀 없다. 새로운 당,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토대와 경제의 경향을 보면 소련은 여전히 노동자 국가다.”10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런 주장을 넘어서서 국가가 노동계급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무기가 됐고, 그 국가의 “스탈린의 정치 기구가 훨씬 더 제멋대로인 점만 빼면 파시즘 정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으며,” 11 “억압받는 대중의 혁명적 봉기가 성공해야만 소비에트 체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 12 고 하면서도, 그런 국가가 여전히 노동자 국가일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견해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으로부터 중대한 일탈을 가져왔다. 레닌이 1921년 러시아에 대해 주장했듯이 노동자 국가에서도 불리한 조건 때문에 관료적 기형이 나타날 수 있다.그러나 레닌은 마르크스를 따라 이렇게 주장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동안에도 ⋯ 특수한 형태의 억압 기구인 “국가”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 국가는 과도기적인 국가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가 아니다. 임금 노예였던 다수가 소수의 착취자를 억압하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기 때문이다. ⋯ 이런 국가는 인구 압도 다수에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그래서 억압을 위한 특별한 기구의 필요성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13
14 관료화된 노동조합도 여전히 노동자 조직인지를 놓고 변증법에 대해 아무리 많이 얘기한들, 레닌과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 국가가 소수 착취자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도구였다는 점은 흐릴 수 없다. 트로츠키 자신의 말처럼 특권적 집단이 노동계급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된 국가를 “노동자 국가”에 포함시키는 것은 베른슈타인만큼이나 마르크스주의를 크게 수정하는 것이다.
고장 난 자동차도 여전히 자동차인지사실 트로츠키는 민주집중파의 정치적 입장(혁명)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적 근거(반혁명이 벌어졌다)는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부르주아지”인 네프맨과 쿨라크가 관료를 도구 삼아 권력을 장악했다는 스밀노프 등의 분석이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공업화는 국가 소유와 계획이라는 기반 위에서 신속하게 추진됐다. 그러나 관료에 대해서 혁명적 입장을 채택한 것은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는 트로츠키의 개념에서 그동안 핵심적이었던 요소, 즉 노동계급이 궁극적으로 권력을 잃지 않았고 개혁을 통한 재건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개념이 제출돼야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주장은 바로 산업의 핵심 부문이 국가의 수중에 있고 사적 자본이 경제에서 미미한 구실만 하기 때문에 노동자 국가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권력은커녕 민주적 권리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보나파르티즘” 비유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나파르트 정체政體들은 부르주아지에게서 권력의 궁극적 원천인 생산수단 소유를 빼앗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민주적 조직을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15 있으며, “그들이 새로운 소유관계를 전복하고 러시아를 자본주의로 되돌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노동계급이 관료를 분쇄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젖힐 것이다.” 16 “관료의 지배가 하루하루 계속될수록 경제의 사회주의적 요소로 이루어진 토대가 침식되고 자본주의가 부활할 가능성이 커진다.” 17
트로츠키가 자신의 전반적인 정치적 관점을 훼손시키지 않고도 상당히 “수정주의적”인 견해를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관료들을 매우 예외적이고 지극히 불안정한 현상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의] 부활에 맞서 “노동자들의 지지에 기댈” 세력이라던 관료들은 이제 “부활”의 핵심 세력으로 여겨졌다. 관료들은 “갈수록, 노동자 국가 안에 있는 세계 부르주아지들의 기관이 되고”이론적으로는 아주 미심쩍은 개념이다. 물론 어떤 나라의 특권 계급이나 특권층이 본질적으로 해외 부르주아지들의 도구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20세기 초 중국의 “매판買辦” 자본가들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에 의존의 기제가 매우 뚜렷했다. 매판 자본가들이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해외 무역 덕분이었고, 이 무역에서 매판 자본은 해외 자본주의 열강 대기업들과 전혀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 스탈린주의 관료의 경우에는 그런 기제가 전혀 없다. 관료들은 해외 무역을 계속 독점했고, 외국 자본가는 소련 국가를 직접 상대해야 했다. 사실 지금[1971년]도 그렇다. 대외무역부 관료들은 매판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들은 거대하고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기구의 톱니바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실, 관료들에게 “복고주의” 경향이 있다는 것은 신화였음이 드러났다.
먼 훗날(1960년대) “시장 사회주의”와 탈집중화라는 쟁점으로 관료 내부에서 경제 운영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기는 했다. 이를 이용해 일부 마오주의자들은 흐루쇼프가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부활시켰다는 이론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사실 1950년대와 1970년대의 소련은 계급 구조나 권력 체계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정권이 전면적인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1차 5개년 계획 때부터 소련은 노동자 국가가 아니게 됐거나(또는 민주집중파 주장대로 훨씬 전부터 노동자 국가가 아니게 됐거나), 지금도 노동자 국가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
어느 쪽 대안이 옳든, 1927년 이후 소련 계급투쟁에 관한 트로츠키의 분석이 틀렸음은 명백히 드러났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사실, 현재 “정설” 트로츠키주의 경향 가운데 아무도 트로츠키의 분석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름표로 분석을 대신한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혼란스럽고 변화하는 내용을 은폐한다.
1938년에는 트로츠키의 정식이 전적으로 옳은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실천적 결론은 분명했다. 제4인터내셔널은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한다는 입장이었다. 둘 모두에 맞선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권들을 전복하기 시작할 경우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것은 완전히 빠져 있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시대의 뚜렷한 과제가 된 시기에 개혁주의의 길을 택했다. 현재 스페인과 중국에 대한 코민테른의 정책은 “민주적,” “민족” 부르주아지에게 굽실거리는 것으로, 코민테른이 교훈을 얻거나 변화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 준다. 소련에서 반동적 세력이 된 관료들은 세계 무대에서 혁명적 구실을 수행할 수 없다. 18
사실 이 점이 제4인터내셔널 창립의 역사적 근거였다.
19 그러나 우리는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반대한다.
트로츠키는 1940년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새 입장을 옹호했다. 에이번, 번햄, 샥트먼 등이 이끈 혼란스런 반대파(러시아 문제에 관한 공통의 입장도 없었다)가 제기한 주장 하나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독일과 분할 점령하고, 발트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와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소련을 무조건적 방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반대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채택하고자 했다. “제국주의자들이 10월 혁명을 최종적으로 정복하고 러시아를 한 줌의 식민지들로 만들 목적으로 소련을 침공하면 우리는 소련을 지지할 것이다.”트로츠키는 이런 “조건부 방어론”을 손쉽게 논박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그에 따라 스탈린이 히틀러의 용인 속에서 주변국 영토를 점령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더 거대한 쟁투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1940년에 소련에 맞서 핀란드를 지지할 수는 없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세르비아를 지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레닌이 주장했듯이 세르비아 측의 명분은 맥락에서 떼어 놓고 보면 진보적이었다(민족 자결권이라는 근거에서). 그러나 당시에는 사태를 그렇게 떼어 놓고 볼 수 없었다. 194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핀란드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중요한 것은 샥트먼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주장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반대파가 자신의 소련 성격 분석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감지했고(실제로 이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결별한 이후 그렇게 됐다), 그래서 좌파들과의 차이를 짚으며 두 가지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다.
제4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를 통해 관료를 전복할 필요성을 오래 전에 인정했다. 관료가 새로운 착취 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제시한 것이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관료를 전복하면, 소비에트의 지배를 재확립하고 거기에서 현재의 관료들을 솎아낸다는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좌파적 비판자들은 그 외 다른 목표를 제시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 우리는 미래의 혁명을 정치 혁명으로 부른다. 몇몇 반대자들(실리가, 브루노 등)은 미래의 혁명을 한사코 사회 혁명으로 부르고 싶어한다. 그런 규정을 수용한다고 해 보자. 본질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가. 우리가 열거한 혁명의 과제에서 추가되는 것은 전혀 없다. 20
그렇다면 이 차이는 그저 용어상 차이일 뿐 내용적 차이는 아닌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용적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좌파적 입장의 논리는 사회주의가 의제에 올라 있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소련 문제는 우리 시대의 전체 역사적 과정과 별개인 것으로 분리할 수 없다. 스탈린의 국가는 과도적 형태, 즉 후진적이고 고립된 나라의 기형화한 노동자 국가이거나,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 형태(스탈린주의, 파시즘, 뉴딜 등)인 “관료 집산주의”(브루노 리치, 《세계의 관료화》, 1939년 파리)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 후자의 입장을 채택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잠재력이 모두 고갈됐고, 사회주의 운동이 파산했으며, 기존 자본주의가 새로운 착취 계급이 지배하는 “관료적 집산제”로 변모하고 있다고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인정하는 것이다. 21
이런 잘못된 주장은 이후 논쟁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 주장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마르크스는 서로 다른 두 사회 체제(고대 노예제와 아시아적 생산양식)가 수세기 동안 공존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부르주아 논자들의 주장과 달리 마르크스는 “보편적 단계” 개념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세계 체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상당한 변형들이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이것은 소련의 계급적 성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미 트로츠키 자신이 불균등 결합 발전의 효과로 온갖 혼성적인 사회 형태가 생겨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관료적 집산제 주장은 간단히 말해 본질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훗날 크게 수정된 형태로 샥트먼 그룹의 입장으로 채택됐는데, 이 경향은 끝내 일관된 입장에 이르지 못하고 동요하다가 결국 우경화했다. 제2차세계대전 말(1944~1945년), 스탈린의 후원 하에 동유럽과 북한에서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됐다. 반혁명적이고 자본주의로 회귀하고자 하는 보나파르트 관료에 의해 노동자 국가들(변질됐든 기형적이든)이 수립된 것일까? 제4인터내셔널을 주도하던 그룹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런 국가들이 노동자 국가라는 주장은 최악의 수정주의며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948년 제4인터내셔널 제2차 세계대회는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고 북한 등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입장을 엄숙하게 재확인했다.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이 노동자 국가라거나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이단자들에 관해서도, 두 수정주의 경향의 유사성이 두드러지며 혁명 운동 안에는 이들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 했다.
3차 세계대회(1951년)에서는 혁명 운동 안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던 수정주의를 채택한 한 그룹(“노동자 국가론자”들)이 제4인터내셔널에서 우세해졌다. 서두에서 언급한 토니 클리프의 글은 2차 대회(1948년)와 3차 대회(1951년) 사이에 벌어진 논쟁 중에 나온 것이다. 이 글에서 “제르맹”은 에르네스트 만델의 필명이고, ‘존 G. 라이트’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러시아 전문가”며, IS는 제4인터내셔널을 지도하는 기구인 국제사무국International Secretariat의 약자임을 독자들은 알아 둬야 한다.
그보다 2년 전에 클리프는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이라는 또 다른 글을 썼다. 이 글에서 클리프는 러시아 사회가 1928년 이래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였다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그 상세한 내용은 이 책에 싣지 않았다. 그 내용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볼 수 있다.(현재는 《소련 국가자본주의》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국역: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책갈피, 2011)])
이 책에 수록한 다른 글들은 국제사회주의자들 그룹의 초창기에 관해 무지나 악의에서 나온 거짓혐의 제기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당의 성격’은 샥트먼 경향에 영향받은 어떤 개인에게 답하는 글이다. 그 개인은 어쩌다 국제사회주의자들로 떠내려 왔다가 금세 노동당 개혁주의라는 푸르른 목초지로 떠나간 사람이다. 이 글은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채택됐으며 그 결함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주의자들 그룹이 이 문제에 관해 샥트먼의 관점을 초창기부터 단호하게 거부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 준다.
23 그럼에도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는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주의 선전 기구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관료집산제론’은 1948년에 쓰인 글로, 샥트먼의 관료집산제론을 철저하게 논파한 글이다. 마지막으로 ‘클럽 회원들에게’는 제목 그대로의 글이다. 당연히 여기서 “클럽”은 영국 노동당 내 트로츠키주의 비밀 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 조직의 지도자 게리 힐리와 존 로렌스는 자신들의 친親스탈린주의 정책들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모조리 단체에서 내쫓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잡지인 《소셜리스트 리뷰》 2호(1951년 1월 발행)에 실린 글이다. 이 글로 국제사회주의자들이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지지했다”는 거짓말을 최종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글이 나왔을 당시 세계대회에서 결정된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북한도 다음과 같은 결의 사항에 해당하는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의 자본주의적 성격 때문에 전시에는 가장 엄격한 혁명적 패전주의가 요구된다.”제4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변화에 대한 클리프의 예측은 금세 입증됐다. 다수는 미셸 파블로의 악명 높은 글 ‘스탈린주의의 성쇠’(1954년 4차 세계대회)를 수용했다. 이 글은 러시아와 충돌할 잠재력이 있거나 실제로 충돌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국가에 관해 1920년대의 개혁적 트로츠키주의로 돌아가는 입장을 취했다.
중국공산당과, 어느 정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모두 실제로는 관료적 중간주의 정당이지만 자기 나라에서 혁명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새로운 혁명 정당을 결성하거나 정치 혁명을 준비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중국공산당 내에 좌파적 경향을 형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24
이런 환상은 서유럽과 “제3세계”의 대중적 스탈린주의 정당들을 개혁할 수 있다는 관점과 맞닿아 있다.
그런 조직들은 현재와 결정적 충돌 사이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분쇄되거나 다른 조직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런 조직들은 스스로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지도부 전체나, 최소한 그 일부가 좌경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5
이는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분열로, 세 개의 “제4인터내셔널”이 창립됐고, 제4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제4인터내셔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경향”이 등장했다. 이런 분열이 단지 스탈린주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실패는 정치적 와해와 방향 감각 상실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렇게 분열한 그룹들이 이후 중국, 쿠바, 알제리, 게바라주의, ”구조 개혁” 전략, 청년 전위론 문제 등에서 보인 잇따른 선회들은 마르크스주의 근본 입장 포기라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 그 근본 입장은 바로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클리프가 1950년대에 한 비판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클리프의 비판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중요한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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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uncan Hallas, Introduction to Origins of the International Socialists, https://www.marxists.org/archive/hallas/works/1971/xx/introis.htm
↩
- Minutes of Foundation Conference, 30 September/1 October 1950 ↩
- V.I. Lenin, Collected Works, Vol. 26, p. 465. ↩
- L. Trotsky, The Workers’ State, Thermidor and Bonapartism, New Park edition pp. 39–40. 원문의 날짜는 1935년 2월 1일이다. ↩
- L. Trotsky,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USSR’. Cliff, Russia: A Marxist Analysis에서 재인용. ↩
- L. Trotsky, The Workers’ State, Thermidor etc., p. 39.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 65. [국역: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1929-1940》, 시대의창, 2017] ↩
- L. Trotsky, The Workers’ State, Thermidor etc., p. 61. ↩
- L. Trotsky, 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WIL edition, p. 38. [국역: 《사회혁명을 위한 이행기강령》, 풀무질, 2003] ↩
- 같은 책, p. 37. ↩
-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노동자 국가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1)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인구의 압도 다수고 2) 관료적 기형이 있는 노동자 국가다.” Trotsky, In Defence of Marxism, New Park edition, p. 150에서 인용한 레닌의 말. ↩
- L. Trotsky, 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p. 40. ↩
- 같은 책, p. 41. ↩
- V.I. Lenin, State and Revolution, ML edition, p. 63. 강조는 원문. [국역: 《국가와 혁명: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돌베개, 2015] ↩
- 트로츠키가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옹호하는지는 In Defence of Marxism, pp. 29–30을 보라. ↩
- L Trotsky, 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p. 37. ↩
- 같은 책, p. 37. ↩
- 같은 책, p. 40. ↩
- 같은 책, p. 41. 강조는 핼러스. ↩
- Shachtman, Trotsky, In Defence of Marxism, p. 158 재인용. ↩
- L. Trotsky, In Defence of Marxism, pp. 4–5. ↩
- 같은 책, p. 1. ↩
- ‘The USSR and Stalinism. Resolution of Second World Congress of the FI’, Fourth International, June 1948에 수록. ↩
- 같은 글. ↩
- 제4인터내셔널 4차 세계대회의 결의문 ‘The Decline and Fall of Stalinism’은 SWP, The Development and Disintegration of World Stalinism, 1970에 실려 있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힐리 그룹) 등은 이런 타협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갈라져 나와 “제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를 결성했다.(이곳은 아직도 존재한다.) 훗날(1963년)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파블로-만델 경향으로 복귀했는데, 이 경향에서 파블로와 포사다스가 갈라져 나와 각자 자신의 “국제” 조직을 만들었다. ↩
- 같은 글.[실제 출처는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USFI)의 ‘A Recall to Order’(1959)다. 핼러스의 착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