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조선의 탄생》
북한 정권 탄생 신화 재탕하기
자민통 이론가인 박경순 씨(이하 존칭 생략)가 지난 몇 년간 ‘민족’과 ‘자주’를 화두로 《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 《새로 쓰는 고구려 역사》 등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들에서 북한 측 입장을 옮겨 적었지만 현존하지 않는 먼 옛날 사회를 다룬 데다, 빈약한 사료로 많은 부분 상상력에 기초할 수밖에 없으니 터무니없는 주장을 해도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 쓴 《현대 조선의 탄생》(이하 《탄생》)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 정권 수립 과정을 다룬 역사서다. 이는 현 북한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와 긴밀하게 연결된 정치적·이론적 문제를 제기하기에 보아 넘길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박경순은 “해방 이후 이북 정권의 출발 과정을 다룬 책은 이미 많이 출간”됐지만 대다수가 “이남에서 미군의 역할”을 이북에서 소련군이 한 것처럼 주장해 이를 바로잡고자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은 시종일관 “이북 정권 건설을 이끈 세력이 조선 인민혁명군”임을 강조한다.
문제는 박경순이 새로운 문헌이나 기존 사실을 반박하는 어떠한 자료도 제시하지 않은 채, 북한 당국의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탄생》은 북한식의 과장된 언어, 사실 왜곡과 거짓을 버무린 북한 정권 탄생 이야기가 돼 버렸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가 조선을 해방시켰는가?
박경순은 김일성과 그의 부대인 조선 인민혁명군이 1945년에 일본군을 격퇴하며 진군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김일성 사령관은 1945년 5월 이후 국내 각지를 돌면서 최후 공격 작전 계획을 전달하고 결전 태세를 독려”했고, 인민혁명군은 경흥요새 돌파 전투, 훈융 해방전투, 웅기·나진·청진지구 해방작전 등에서 파죽지세로 승리했다고 한다.
박경순은 김일성이 이끈 “인민혁명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이 없었다면 원폭 때문에 일본이 과연 항복했을까?”라며 인민혁명군이 해방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먼저, 김일성은 그의 부대를 이끌고 일본 군대를 격퇴시키며 조선에 들어오기는커녕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소련 함정을 타고 조용히 입국했다. 김일성의 임무는 소련군 위수사령관 보조자였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 제25군 정치위원이었던 레베제프에게 “사령관님, 저희들도 소련 제25군과 함께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또, 《탄생》에서 언급한 지역들은 대부분 소련군이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쉽게 패퇴시킨 소련군은 8월 12일에 경흥·웅기·나진항·청진항에 도착했다. 8월 13일치 〈프라우다〉는 ‘우리의 육군 전투부대 웅기·나진 두 도시를 점령하다’ 하고 보도했다”
조선의 해방은 조선공산당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말처럼 “대중적 반전 투쟁도 이루지 못한 채로 8월 15일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왔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민중의 힘만으로 물리치기 어려웠다. 조선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종종 영웅적인 희생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지만 1930년대 후반 이후로는 거의 궤멸적인 탄압을 받았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도 1937년 6월 보천보의 소규모 전투 이후 일본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로 도주했고 해방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았다.
김일성은 조선 민중의 지도자였나?
그렇다면 해방 이후 김일성은 어떻게 북한에서 권력자로 급부상했을까?
《탄생》은 김일성이 신출귀몰한 지도자로서 북한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며 1945년 10월 14일 평양 시민대회(일명 김일성 환영대회)를 이렇게 묘사한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심지어 38선 이남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 조선 동포가 숭모하고 고대하던 영웅 김일성 장군께서 그 름름한 융자를 한 번 나타내니 장내는 열광적 환호로 숨 막힐 듯 되고 전부가 너무 큰 감동 때문에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김일성은 이날 집회에서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 김일성은 소련군 사령관들과 함께 소련 훈장을 달고 나와 “소련 군대와 스탈린 원수 만세”를 외치며 소련군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과시했다.
훗날 북한 당국은 당일 집회 사진에서 소련군 사령관들을 지워 없애고 김일성만 남겨 뒀다.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과 정책적 영향 없이 북한 민중의 전폭적 지지 속에 독자적으로 정권을 수립한 ‘자주적’ 인물임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 가슴에 달린 소련 훈장도 모두 없애 버렸다. 《탄생》에는 북한 당국이 조작한 사진만 실려 있다.
해방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이남 지역에서 강력했고, 이북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나마 일제 시대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함경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평양이 있는 평안도 일대에서는 조만식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지원으로 급속히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고, 이들 가운데 김일성은 소련의 특별한 지원을 등에 업고 단 몇 개월 만에 북한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소련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잘 알지 못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들보다 수년간 소련 극동군 25군 88특별여단에서 훈련받은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훨씬 미더웠을 것이다. 소련 제25군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이었던 레베데프는 “김일성 대위를 장차 조선의 주요 지도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아 입북시킨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국내에 기반이 취약했던 김일성이 귀국 후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점령 당국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점령군 소련
《탄생》은 “소련군은 우리나라 민중들의 자주적 국가건설 활동을 보장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담당”해 이북 정권 수립에 단순한 보조자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그렇다면 왜 후원자인 소련에 맞서 신의주·함흥 등 이북 여러 곳에서 거대한 반소 시위가 벌어졌을까?
박경순은 신의주·함흥 등에서 커다란 시위가 있었던 점은 인정하지만 “도당과 도 인민위원회의 일부 간부들이 적산 물자를 개인적으로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운 것”이 원인이었다며 개인적 일탈의 문제인 양 말한다.
하지만 1945년 11월 23일 벌어진 신의주 시위의 주요 요구 중 하나는 소련군 약탈 행위 규탄이었다. 신의주 시위 이후 공업 도시 함흥 등지로 반소 시위가 확산됐고, 함흥 시위에서는 처음부터 “소련 물러가라” 구호가 전면에 나왔다.
이남을 점령한 미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은 해방 이후 아래로부터 분출한 대중적 운동과 조직을 억눌렀다. 게다가 이북 지역에서 많은 쌀과 산업시설을 약탈했다. 한 보고에 따르면, 소련이 반출해 간 쌀이 1945년 254만 석, 1946년 290만 석이었다. 소련은 일본인 공장을 접수해 상품 생산과 수송을 직접 통제했고 함흥·원산·청진·성진 등 주요 산업 도시의 원료와 시설·설비를 약탈해 갔다.
4 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은 무척 컸고, 보안기관이 작성한 비밀 문건에도 “과거 일본 경관보다 더욱 심하다는 인민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소련군과 민중의 갈등은 소련군이 진주한 지역의 일반적 현상이었고, 북한 민중은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불만을 표했다. 특히 김일성이 장악한 보안기관소련군은 국내외 뉴스를 검열했고, 일부 신문은 폐간시켰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신문조차 검열했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다.
물론 박경순의 주장처럼 소련군은 미군과 달리 북한에서 자발적으로 건설된 인민위원회를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 조처였다. 사실 일본인 행정기구를 이용하는 것보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하는 게 모양새도 더 좋고 안정적인 통치 방식이었다. 또 인민위원회 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확고한 친소주의자들이었기에 소련군이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해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내부 구성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한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좌시하지 않았다. 예컨대,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후 평안남도에서 민족주의자들이 우세하던 인민위원회 내부 구성이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대등하게 바뀌었다.
한편, 해방 전부터 소련은 한반도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했다. 스탈린은 한때 제정 러시아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확보했던 세력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신속하게 한반도 이북 지역을 점령했고, 소련의 이익을 보장해 줄 체제를 이식하고자 했다. 이는 스탈린이 1945년 여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전쟁[제2차세계대전]은 과거와는 다르다. 누구든 어떤 영토를 점령하면 그 곳에 자신의 사회체제를 심는다. 누구든 자기의 군대가 미치는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체제를 이식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의 본질은 박경순 주장과는 달리 “전 세계 파쇼국가와 반파쇼국가(미국, 소련, 영국 등) 사이에 ‘판갈이’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 간의 충돌이었고, 전후 점령 정책은 그들 간의 세력권 재분할이었다. 한반도 이남에 미군이, 이북에 소련군이 점령한 것은 바로 그들 간의 세력권 재분할이었다.
신탁통치 논란으로 본 민족자결권
박경순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인 신탁통치가 일정한 문제점이 있지만 “당시 정세에서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제출한 영구 또는 수십 년간에 달하는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과 김일성은 신탁통치를 ‘후견제’로 표현했지만, 미국이 말하는 신탁통치와 사실상 같은 의미였고, 결국 5년간 조선의 독립을 미루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그것이 조선의 즉각적 독립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조선 민중의 신탁통치 반대는 정당했고, 조선의 즉각적 독립을 방해하는 두 강대국의 합의는 36년간 식민 통치를 겪었던 조선 민중에게 견디기 어려운 굴욕감을 준 것이었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피억압 민족의 자본가와 중간계급이 자결권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그 요구를 반대한다면,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동적 민족주의가 쉽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자들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함으로써 자국 자본가들보다 피억압 민족의 노동계급에 대한 연대를 우선함을 보여 줄 때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에 맞서는 투쟁이라는 점도 중요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자들이 위기에 빠지는 것은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혁명적 좌파는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민족해방 투쟁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독립적 정치와 조직을 유지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레닌과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채택한 민족자결권 테제를 실천에 옮겼다면, 미·소 양대 강대국의 신탁통치 협약에 반대하고 미·소 군대의 철수와 즉각적인 조선 독립, 즉 미·소의 개입 없는 정부 수립을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를 지지했다.
북한에서는 신탁통치 정국을 계기로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연립이 와해됐다. 소련군은 신탁통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조만식을 감금했다.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은 껍데기만 남은 채 조선공산당(조선로동당)의 `우당`으로 전락했다.
김일성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친일파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이라고 규정하며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장악한 보안대가 막강한 영향력을 구축했다. 결국 북한에서 신탁통치 반대는 탄압과 구속의 대상이 됐고 많은 사람들이 월남을 택했다.
박경순은 이런 과정을 두고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의 변혁과제들이 완수되었다. 이로서 이북 사회는 민주주의 변혁단계로부터 사회주의 변혁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박경순의 얘기인즉슨, 노동계급의 혁명적 행동을 통해 노동자 권력기관인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하기는커녕 노동자들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어느 날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를 두고 《탄생》은 “북조선은 김일성의 자주적 신념과 배짱, 독창적인 주견과 결단”으로 “일찍이 사회주의 역사에 없었던 새롭고 독창적인” 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고 규정했다. 즉 노동자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사회다. 그러려면 노동자들은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자 평의회 같은 민주적이고 새로운 기구를 토대로 노동자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동자 국가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의지가 반영되도록 민주적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다.
북한 정권의 계급적 본질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은 1935년 7차 대회에서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인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조선공산당의 노선도 바로 이 정책을 따랐다. 해방 직후 박헌영은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에서 “금일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도 “당의 임무는 자본민주주의 정권 수립”이며 민족통일전선은 “국제공산당 7차 대회의 인민전선”과 “본질에서 같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해방 직후 ‘자본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는 행동을 했다.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을 내쫓고 ‘공장위원회’를 구성해 각 기업과 공장을 접수하고 통제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소련군 포고문)이라며 노동자들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질서 유지”를 강조했고, 자신들 통제 아래 주요 공장의 정상 가동을 강요했다.
소련군은 ‘공장위원회’의 자주 관리를 “조합주의”라고 비난하며 중단시켰고,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모두 “좌경적 오류”라는 딱지를 붙였다. 조선공산당도 “노동자들이 조선인 기업에서도 공장관리 문제를 제기해 … 자본가들에게 일종의 공포감을 주고 …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난했다.
농촌에서도 비슷했다. 소작농과 빈농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요구했으나 소련군은 이들의 요구를 ‘좌익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해 소작료로 3을 내고 소작인이 7을 갖는 3·7제 방식을 결정했다. 한편,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군대 철수 후에도 소련 국가 이익을 보장해 줄 공고한 경제적·정치적 진지를 아직 쟁취하지 못했다”며 소련 식 체제를 서둘러 이식하려 했다.
1946년 3월 이북에서의 전면적 토지개혁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개혁”을 통해 소련과 흡사한 사회·경제적 구조가 북한에서 본격화한 것이다.
토지개혁은 친일파와 조선인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는 방식으로 20여 일 만에 신속히 완료했다. 당시 토지개혁은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농업으로부터 잉여를 추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됐다. 도시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됐지만 토지 매매, 저당, 임대차는 할 수 없었고 높은 현물세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현물세는 각종 곡물 수확고의 25퍼센트, 알곡 수확고의 27퍼센트에 이르렀다. 이것은 남한 농민의 세 부담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현물세가 일제 하의 공출과 무슨 차이가 있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탄생》은 “농민들은 기쁨에 겨워 울먹였으며 토지개혁을 이끈 김일성 위원장에게 수없이 많은 감사편지를 보냈”고 “토지개혁에 감격한 농민들은 수많은 쌀을 나라에 바치는 애국미 헌납운동을 벌였다. 당과 정부의 은덕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시작한 애국운동이었다”며 상황을 왜곡했다. 주요 산업 국유화도 시행됐다. “당시 공업 부문 자산의 90퍼센트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주요 기간산업은 거의 일본인 소유였다. 따라서 산업의 국유화는 토지개혁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국유화는 토지개혁보다 늦게 시행됐다. 소련이 많은 양의 전리품과 중공업 공장들의 신상품을 자국으로 반출하고 공장설비를 철거한 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유럽의 소련 점령지들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배상금을 지불하던 국가들에서는 국유화가 늦게 시작됐다. 가장 오랫동안 배상금을 지불했던 동독은 1950년대 초반까지 명백한 사적 부문이 존재했던 유일한 동유럽 국가였다.
친북 좌파뿐 아니라 많은 좌파들은 북한이 국유화를 단행한 시점부터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본다. 하지만 북한의 국유화는 전혀 급진적이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한국독립당 강령도 토지 국유화와 주요 산업 시설 국유화를 말했다. 당시 좌익과 우익을 막론하고 급속한 자본 축적을 위해 상당 부분의 국유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상식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의 국유화 과정은 노동자 통제와 무관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북한 당국은 생산수단의 “전인민적 소유”를 표방했지만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못했고, 생산의 계획과 분배에 관여하지 못했다. 대중의 소비는 축적에 종속됐다.
북한은 국유화한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오로지 생산 증대, 즉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했다. 노동 규율 강화, 직장 이동 제한, 노동 규율 위반자 감금, 결근이나 지각 시 식량 배급량 삭감, 다양한 성과급 도입 등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생산 목표를 달성하게 하려고 증산 경쟁 운동도 광범하게 벌였다. 그러나 《탄생》은 강요된 증산 경쟁을 노동자들의 자발적 동참으로 둔갑시킨다. “노동자, 사무원들은 그날 할 일은 그날에 마치자는 구호를 내걸고 증산의 불길을 올렸다. 기차가 정지되는 날에는 우리의 생명도 정지된다. 우리의 끓는 피로 기차를 움직이자.”
북한에서 당과 국가 관료들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자본 축적 과정을 지휘하고 노동자들을 ‘자주적’으로 착취했다.
노동자들의 반발과 저항이 있었다. 이를 두고 박경순은 “심지어 파업을 선동하기까지 했다. 당시 이북은 공산당과 노동자와 민중들이 정권의 주인이었고,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투쟁은 곧 자신을 반대하는 투쟁이며 파업은 곧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며 비난했다.
북한 정권 탄생기는 사회주의 건설의 초석을 다진 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형태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았던 시기였다. 김일성과 북한 관료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강도를 더욱 높여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를 구축했다.
결론
친북 좌파들은 지난 수십 년간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박경순이 펴낸 《탄생》도 그런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 당국 입장을 전달하는 게 진정한 ‘북한 바로 알기’는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 시기에 ‘북한 바로 알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또,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1930년대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고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주창돼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가짜 사회주의는 한국 좌파에게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겨 준다. 만약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라면 도대체 누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따라서 북한 정권의 탄생과 지금에 이르는 역사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은 한국 좌파에게 중요한 정치적·실천적 과제다. 이를 위한 길잡이로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소책자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를 추천한다.
MARX21
주
참고 문헌
김준효 2017, “제국주의, 민족 해방 운동,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태도”, 〈노동자 연대〉 232호.
김하영 2002,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책벌레.
김하영 2014,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 노동자연대.
중앙일보특별취재반 1992,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상), 중앙일보사.
하먼, 크리스 1994,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갈무리.
한규한 외 2018,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현대사》,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