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진보사상 조류
트로츠키 전기 작가 아이작 도이처의 사상 *
이 글은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Trotsky: 1879-1921, The Prophet Unarmed. Trotsky: 1921-1928, The Prophet Outcast. Trotsky: 1929-1940 (London, 2003)[국역: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5.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2007]에 대한 서평이다.
1 그 주제를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가장 흔치 않은 것이 전기傳記다. 왜 그런가? 한 가지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개인의 역사적 구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주의 전기 작가가 전기의 주인공을 균형 있게 다루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역사서 가운데 전기가 드문 것은 당연하다. 2 톰슨이 쓴 《윌리엄 모리스》(1955년, 1977년) 같은 책들은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 특정 개인보다 더 광범한 주제를 다룬 저서들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 [전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경우다. 이런 어려움을 감안하면 아이작 도이처(1907~67)의 성과는 훨씬 두드러진다. 그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 가운데 전기를 자신의 표현 방식으로 삼은 매우 드문, 아마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도이처가 쓴 중요한 소논문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 사후에 출판된 모음집 《마르크스주의, 전쟁, 혁명Marxism, Wars and Revolution》(1984년)에 실려 있는데, 이런 에세이들을 제외하면 《스탈린》(1949년, 1966년)과 《트로츠키》 3부작(1954~1963년)[이하 3부작]이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하고 길이 남을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유명한 역사가인 고故 에드워드 톰슨은 유물론적 역사관이 “아마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일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3 와 논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결국 트로츠키 전기는 [도이처가] 뛰어난 개인적 재능을 낭비한 매우 불행한 작품이다.” 4 그래도 호로위츠는 트로츠키 전기를 읽어 보기는 했다. 그런 노력조차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틴 에이미스 5 는 히친스와 벌인 또 다른 논쟁에서 자신은 트로츠키에 대한 견해(“살인마 개자식에다 후안무치한 거짓말쟁이”)가 아주 분명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에이미스가 “아니, 나는 아이작 도이처의 《무장한 예언자》, 《비무장의 예언자》, 《추방된 예언자》는 안 읽었지만 볼코고노프의 《트로츠키: 영원한 혁명가Trotsky: The Eternal Revolutionary》 6 는 읽었다”고 말한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 역시 에이미스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도이처를 존경하던 많은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급진적 학생 운동 출신으로 《얄타에서 베트남까지From Yalta to Vietnam》(1965년)를 썼고 나중에 네오콘으로 변절한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최근 크리스토퍼 히친스 호로위츠·에이미스·히친스는 그럴듯한 묘지를 찾아 헤매는 정치적 시체들이다. 그들이 문학적 죽음의 춤을 추라고 내버려두자.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사람들이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3부작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도이처의 정치적 판단에 어떤 문제가 있었든지 간에(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상당히 문제가 많다) 3부작에 대한 어떤 비판이라도 먼저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즉, 3부작은 마르크스주의 전기의 모범일 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다룬 필독서라는 점이다. 따라서 버소Verso 출판사가 3부작을 다시 출간해서 새 세대 활동가들이 사회주의 문헌의 고전을 읽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전기 작가의 자격 전기 작가라면 당연히 전기의 주인공에게 대체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도이처에게, 이런 재능은 트로츠키를 대할 때 두드러지는 듯하다. 두 사람의 개인적 특성이나 경험에 네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트로츠키와 도이처는 모두 정치적으로 헌신적이었다. 도이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분파 투쟁이 절정에 달한 1926년이나 1927년에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했다. 도이처는 빠르게 성장해서 지도부의 일원이 됐지만, 1932년 스탈린의 재앙적인 독일 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당 기관지에 썼다는 이유로 당에서 쫓겨났다. 다시 말해, 도이처는 트로츠키의 분석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할 태세가 된 극소수 공산당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도이처는 폴란드 트로츠키주의 조직 건설을 지원했고 1930년대 내내 그 조직을 지도했다. 더욱이, 당시의 대다수 트로츠키주의 운동 지도자들과 달리 도이처는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었다. 예컨대, 1938년 9월 제4인터내셔널 창립 대회에 참석한 폴란드 대표단은 당시 새 조직 창립을 선포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도이처의 주장(근본적으로 올바른 주장)을 개진했다.
11 이 말은 도이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둘째, 트로츠키와 도이처는 모두 망명 경험이 있었다. 1939년 런던에서 언론사 일자리를 구하던 도이처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제3제국[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자신의 조국[폴란드]을 분할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1945년 이후 스탈린이 폴란드에 강요한 체제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이처는 한때 트로츠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투키디데스·단테·마키아벨리·하이네·마르크스·헤르첸 등 많은 사상가·시인들과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도 망명 중에야 저술가로서의 온전한 명성을 얻었다.”12 을 비판하며 쓴 하찮은 글을 근거로 마르크스의 이론적 견해를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3 도이처는 영국에서 교수직을 얻어 미완성 저작인 《레닌의 생애Life of Lenin》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과 소득이 보장될 기회가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교수직을 거부당했다. 14
셋째, 트로츠키와 도이처는 모두 학계에서 배제됐다. 도이처가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다면 생계를 위한 언론 활동에 의존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도이처가 언론에 기고하려고 쓴 글들은 그의 글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없는 글들이다. 사실, 도이처가 소련학 연구자로서 쓴 글은 흔히 매우 사변적이었고 예측은 대부분 틀렸다. 그럼에도 피터 세즈윅Peter Sedgwick이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쓴 추도사에서 말했듯이, 도이처가 사실상 생업의 일환으로 쓴 글을 근거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보수 언론에서 팔머스톤15 한 세대 전의 폴란드 망명객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와 마찬가지로 도이처도 웬만한 영국인들보다 영어를 더 잘 구사했다. 도이처의 중요한 저작들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헌신성과 직접 체험한 노동운동 지식뿐 아니라 1차 자료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분야에서 도이처가 보여 준 재능은 그가 거부당한 교수직을 안온하게 유지하는 데 급급했던 많은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교수로 채용되지 못한 도이처가 누린 한 가지 이점은 영국 학계의 예의 차리기 같은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저작은 어떻게 아이러니(요즘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감성의 자기만족적 징표로 쓰이는)가 역사가에게 꼭 필요한 솜씨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6
넷째, 트로츠키와 도이처는 모두 문학적 표현력이 뛰어났다. 3부작은 러시아 혁명의 정치를 주로 다루지만, 흔히 ‘정치적’ 전기의 특징인 몰개성적 경향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무장한 예언자》의 서두에는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사상을 그 논리적 결론까지 밀고 나아가려는 자신만만하고 성마른 청년이 나온다. 책의 말미에서 이 청년은 혁명적 국가 존속을 위해 필요하다면 노동조합의 군사화도 강행하려는 지도자가 돼 있다. 또, 도이처는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운명을 유비하고 둘 사이의 연관을 보여 주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 터무니없게 만들지는 않는다. 《추방된 예언자》의 ‘이성과 비非이성의 광기’라는 장章은 특히 독일에서 파시즘이 발호하는 과정을 다루는데, 여기서 도이처는 트로츠키의 큰딸인 지나가 베를린에서 심리적 공황에 빠져 자살하게 되는 과정과 지나가 헛되이 피난처로 찾은 독일 사회가 광기에 빠져드는 과정을 찬찬히 비교한다.18 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운동의 위대한 웅변가로 유명하다. 3부작에서 도이처는 대중연설가인 트로츠키와 청중 사이의 관계를 지표 삼아서 혁명의 활력과 트로츠키의 개인적 운명을 모두 보여 준다. 먼저,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페트로그라드의 원형경기장에서 빽빽하게 들어찬 군중에게 연설하는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쟁취하고자 다른 당들과 경합하는 볼셰비키당의 당원이자 선동가다. 그 후 내전이 끝나고 크론시타트 반란을 진압하고 신경제정책을 도입한 1921년의 트로츠키는 집권당의 고위 인사라는 공식 자격으로 군중에게 연설한다. 훨씬 뒤인 1926년 스탈린과 그의 분파가 권력을 강화하고 있을 때 트로츠키를 비롯한 좌익반대파 지도자들은 당 세포 조직과 작업장 집회에서 기층 당원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려고 애쓴다. 마지막으로, 1932년 말 트로츠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대중 집회에서 연설할 때의 상황을 보자. 최후의 망명 생활이 3년째로 접어든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 또는 둘 다의 공격 위협에 시달리던 차에 덴마크 사회민주당 학생들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과 정치가 사뭇 다른 그 학생들을 “적대자들”이라고 불렀다. 19 각각의 경우에 트로츠키의 모습은 웅변가에서, 정치가로, 반대파로, 망명객으로 계속 바뀌지만 그의 웅변 능력은 변함 없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어떤 상황에서 그 능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래서 도이처는 트로츠키 생애의 특징들을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주장(인간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역사를 만들 뿐 아니라 역사를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자체도 그런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는)이 옳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도이처의 방법을 보여 주는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트로츠키는 장 조레스비극적 영웅이 된 혁명가
20 여기서 말하는 비극은 무슨 뜻인가? 인간의 염원과 그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의 괴리는 비극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런 괴리를 극복하려는 노력, 즉 역사의 장애물이 아무리 완강할지라도 “주먹을 불끈 쥐고 역사와 맞서 싸우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생애가 비극적이라는 생각이 부당하다며 일축했다. 1929년, 즉 세 번째이자 마지막 망명이 시작된 첫해에 그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에게 닥친 비극을 주제로 쓴 신문 기사들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 비극을 알지 못한다.” 21 당시 이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옳은 듯했다. 한편으로,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러시아 국민의 집단적 경험이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정치적 비중이 낮아졌다는 이유만으로 민중의 집단적 경험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몫을 특권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트로츠키가 보기에는 러시아 혁명의 패배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러시아 국가가 퇴보해서 자신을 추방하긴 했지만 노동계급의 압력으로 개혁될 수 있다고 여전히 생각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비극을 떠올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비극이라는 말은 첫째 경우에는 자기 자랑에 불과하고, 둘째 경우에는 성급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은 트로츠키가 역사적 인물로서 겸손할 뿐 아니라 이론가로서 신중하다(기존 견해가 틀렸음이 최종 입증될 때까지는 그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것도 보여 준다. 그렇지만 그의 판단은 모두 틀렸음이 장차 입증된다.
거의 10년 동안 도이처의 책과 견줄 만한 것은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사History of the Bolshevik Revolution》뿐이었다. 그러나 카는 고위 공무원처럼 글을 쓴 반면(실제로 카는 한동안 고위 공무원을 지냈다) 도이처는, 피터 세즈윅의 표현을 빌리면 “비극 작가”로서 글을 썼다.22 지금껏 다른 어떤 전기나 예술 작품도 그 비극의 성격을 이토록 잘 포착하지 못했다. 23
1917년에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나아갈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은 오직 국제 운동의 일부로서만 그랬다. 1921년에 내전이 끝났을 때처럼 고립되고 파괴된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런 고립과 파괴로 말미암은 관료적 퇴보는 1928년의 반혁명에서 절정에 달했고, 이 반혁명이 어찌나 철저했던지 반혁명을 직접 실행한 당사자들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반혁명이 승리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트로츠키는 말년에 가서야 그런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했는데, 그것도 이론적 가능성으로만 검토했다. 그러나 이 점은 중요하지 않다. 트로츠키의 분석에 무슨 약점이 있든지(그리고 트로츠키가 볼 수 없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트로츠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 영웅이라는 그의 지위는 반스탈린 투쟁, 특히 마지막 망명 기간에 벌인 투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도이처가 “트로츠키의 삶은 진실로 고전적 비극, 아니 현대 정치의 세속적 용어로 말하면 고전적 비극의 재생”이라고 말한 것은 옳다.24 오늘날 우리는 트로츠키가 정치국에서 레닌의 유언장 공개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 문제를 중앙위원회로 끌고 가지 않은 이유는 자기 만족 때문이 아니라 당의 의사 결정 과정을 존중해서, 그리고 개인적 야심을 품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안다. 25 도이처는 대중이 좌익반대파를 지지하는 수준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좌익반대파의 핵심 주동자들을 빼면 대다수가 수동적 지지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빅토르 세르주 같은 목격자들의 회고와 당시 좌익반대파에 가담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대중의 지지는 도이처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도이처가 그런 증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분명히 그런 증언을 알았을 텐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스탈린주의를 바라보는 도이처의 태도가 트로츠키의 태도와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 대중이 좌익반대파를 지지한 수준이 도이처가 인정한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강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6 그러나 이런 사례들이나 그 밖의 다른 사례를 인용하더라도 트로츠키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1989~91년에 스탈린 체제가 몰락한 후에 개방된 소련의 각종 문서보관소 자료들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가장 최근에 트로츠키 전기를 쓴 러시아인 저술가이자 마틴 에이미스가 칭찬한 고故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은 “옛 중앙당 문서보관소, 국립 10월혁명 문서보관소, 소련군 문서보관소, 국방부 문서보관소, 국가보안위원회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새로운 자료들을 바탕으로 전기를 썼다고 했다. 27 그러나 이런 자료들도 앞서 말한 주장을 전혀 수정하지 못한다. 대니얼 싱어가 볼코고노프의 책에 대해 썼듯이 “중요한 것은 새롭지 않고, 새로운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28 따라서 도이처의 책은 당시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책이고 주인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책이다. 29
도이처가 3부작을 쓴 후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고, 따라서 도이처의 일부 결론들은 수정돼야 한다. 예컨대, 도이처는 트로츠키가 1923년 12차 당대회 전에 정치국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레닌의 유언장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표결에서도 기권했다고 주장했다. 도이처는 트로츠키가 자신의 지위가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스탈린을 경멸했고, 경쟁자들과 타협했다고 생각해서 그 타협을 위험에 빠뜨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봤다.도이처 정치의 문제점
30 앞에서 나는 도이처가 개인적으로 트로츠키에게 특별히 감정 이입할 만한 이유가 네 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이 있음에도 도이처는 비관론 때문에 두 가지 점에서 트로츠키와 중요한 정치적 차이가 있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트로츠키의 생애를 다룬 도이처의 설명이 왜곡됐을 뿐 아니라(특히 3권 《추방된 예언자》가 그렇다) 그의 책을 읽은 많은 급진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로 빠졌고, 그래서 그들의 정치가 심각하게 손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3부작을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많은 장점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도이처는 폴란드 공산당과 폴란드 트로츠키주의 운동 둘 다에서 지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구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비관적으로 봤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비관론에 빠졌고, 그래서 미국이나 소련을 지지하게 됐다. 물론 지지하는 정도는 달랐지만 말이다. 도이처는 조지 오웰이 쓴 《1984년》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많은 점에서 그의 태도는 냉전에서 마지못해 서방측을 편든 오웰의 태도를 거울에 비춘 것과 마찬가지였다.31 토니 클리프는 도이처가 사실상 자신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며, 망루로 올라간 도이처의 처지와 그가 거부하는 듯한 상아탑의 처지가 실천적으로는 결코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32 뒤에서 보겠지만, 도이처가 말년에 망루에서 내려왔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그가 트로츠키 전기를 쓸 당시에는 분명히 클리프의 비판이 대체로 옳았다. 도이처는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트로츠키 사후 제4인터내셔널에서 분열한 어떤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매우 경멸했고, 그래서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똑같이 그를 경멸했다. 33
첫째 차이점은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나 활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개전 후, 더 정확히 말하면 소련의 제2차세계대전 참전 후 도이처는 정치 조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게 된 듯하다. 1951년 도이처는 공산당 탈당 저술가들이 혁명을 포기하고 다양한 종류의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것을 자기 합리화하는 고백록 모음집인 《실패한 신The God that Failed》을 서평했다. 도이처가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공산당 탈당자들이 “망루”로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4 도이처에게는 이런 점이 눈에 띄지 않았고, 그래서 《추방된 예언자》에는 적어도 심각한 불균형이 나타난다. 도이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트로츠키]의 성격과 주위 환경이 모두 그로 하여금 공식적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나날의 투쟁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35 그러나 우리는 이 책에서 트로츠키가 1930년대에 지지자들의 내부 분쟁을 해결하고자 쏟은 온갖 에너지, 그들이 노동운동의 더 생산적인 활동에 참여하도록 지도한 노력이 모두 사실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는 인상을 받는다. 도이처가 어느 정도 자세히 다룬 분쟁은 1930년대 말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분열뿐인데, 여기서도 그는 사실 소련 사회의 계급적 성격에만 집중할 뿐 조직 내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게 된 정치적 방향 논쟁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도이처는 왜 자기 저작의 주인공이 망명 시작부터 살해당할 때까지 줄곧 몰두하다시피 했던 문제에 그토록 관심이 없었을까? 그가 조직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답인 듯하다. 즉, 도이처는 사회주의를 가져다줄 수 있는 다른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트로츠키와 도이처의 둘째 차이점으로 넘어가게 된다. 바로 스탈린주의를 대하는 태도 차이다.
도이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약점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많은 소그룹들이 보통 비생산적인 논쟁에 끝없이 몰두했다. 논쟁하지 않을 때 그들이 한 활동은 대부분 아무 성과도 없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온갖 인적 자원을 동원해 반드시 제3인터내셔널 초기와의 조직적·이론적 연속성을 확립하고 제3인터내셔널로 구현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5년 그는 일기에 “이제 내가 하는 일은 말 뜻 그대로 ‘필수불가결한’ 일이다”라고 쓴 뒤 옳게도 “이 말에 오만함 따위는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36 처음 견해는 스탈린이 권력을 굳히기 전에 노동자들이 기존 소비에트를 통해 국가 기구와 당 기구를 개혁해서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퇴보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견해는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억압당한 것을 인정하고 노동계급이 정치 혁명으로 관료 집단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사회 혁명이 아니라 정치 혁명인가? 트로츠키에 따르면, 생산수단 국유화가 지속되고 있으므로 소련은 여전히 노동자 국가였기 때문이다. 관료 집단은 이 소유관계 위에 기생하는 카스트이지 새로운 지배계급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1948년에 클리프가 썼듯이, 이런 노동자 국가 정의定義는 트로츠키가 초기에 내린 노동자 국가 정의와 달랐다. 러시아 혁명 직후에 트로츠키는 레닌을 비롯한 모든 볼셰비키 당원들과 마찬가지로 사적 소유 여부와 무관하게 노동계급이 자신의 대의 기구를 통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국가가 노동자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17년부터 1928년까지 러시아의 생산수단은 대부분 사적 소유로 남아 있었고 특히 농촌에서는 더욱 그랬다. 물론 이 기간에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까지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했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노동자 국가를 정의하는 기본 개념 자체는 분명하다. 37 트로츠키의 수정된 노동자 국가 정의에 비춰 본다면, 1928년 이후 스탈린이 일으킨 ‘2차 혁명’은 ‘노동자 국가’의 토대라는 생산수단 국유화를 도입했으므로 1917년 10월 혁명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생산수단 국유화가 결정적 기준이라면 그런 조처를 어떤 계급이나 사회 세력이 도입하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혁명정당과 노동계급, 심지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원칙들도 왜 필요하겠는가? 적군赤軍만 있어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트로츠키의 태도는 어땠는가? 1923년부터 1940년까지 스탈린주의를 보는 트로츠키의 견해는 적어도 네 번 바뀌는데, 그때마다 항상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노동자 국가의 기준이] 노동계급 권력에서 생산수단 국유화로 바뀐 것의 반反마르크스주의적 함의는 트로츠키 자신의 책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말년 저작들에서 생산수단 국유화가 노동자 국가의 잔재 또는 마지막 흔적일 뿐이며 국유화의 진보적 내용은 관료 집단이 타도돼야 실현될 것이라고 신중하게 강조했다. 더욱이, 그는 스탈린 체제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체제가 매우 불안정해서 노동계급 혁명이나 자본주의로의 원상회복에 의해 전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50년 뒤[1989~91년 소련 블록의 붕괴를 가리킴]가 아니라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 체제가 지배하는 지역이 확장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체제가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관료 집단이 계급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터였다.39 심지어 미셸 파블로를 중심으로 한 제4인터내셔널의 가장 유력한 경향(동유럽과 중국의 스탈린주의 국가들도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도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예외적 상황에서” “대중의 압력” 등등 때문에 미래의 혁명을 지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이처가 스스로 “그 어떤 숭배에도 기울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40 그것은 스탈린주의뿐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로도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존재를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으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국내에서 자체 개혁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개혁을 하지 않더라도 세계 혁명의 주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어찌 보면 이 말은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결과였을 뿐이다. 따라서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도이처에게 느낀 분노는 칼리반 41 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났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더 확장됐다. 더욱이, 각국의 토착 스탈린주의 운동이 새로 창건한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본뜬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현실에서 부적절함이 입증된 견해를 굳건히 고수했고, 심지어 그 견해를 동유럽과 중국으로까지 확장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도이처도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가들과 소련을 모방한 국가들이 모두 생산수단 국유화를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노동자 국가’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도이처는 《배반당한 혁명》(1937년)이 “당대의 트로츠키주의 종파들과 그들만의 예배당에서 성경처럼 떠받들어졌고 트로츠키 사후에도 오랫동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에서 경건하게 읊조려졌다”며 그들이 트로츠키 말년의 저작들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다시피 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왜 그랬는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과 관련해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가’ 정의를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 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2 나는 이 주장이 의심스럽다. 스탈린주의를 대하는 트로츠키의 견해와 양립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도이처는 분명히 이런 소유관계가 민주주의로 보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충돌이 폭력적·폭발적 형태로 일어나 한때 트로츠키가 주장한 ‘정치 혁명’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협상과 타협, 자유의 점진적 확대를 통해 평화롭게 해결될지를 확실히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3 이런 주장은 여전히 모호하긴 하지만, 사실상 관료 집단이 자체 개혁을 할 수 있고 퇴보한 정치적 상부구조를 사회주의 경제 토대와 조화시킬 수 있다고 인정한 셈이다. 트로츠키는 심지어 마지막 망명 전에도 관료 집단이 스스로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훨씬 더 해로운 것은 도이처가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 관료 집단의 자체 개혁을 위협해서 자본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그런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헝가리·폴란드·동독 등 동유럽은 스탈린 시대 말기에 부르주아적 복고가 임박한 상황이었다. 소련의 군사력이나 군사적 위협만이 그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4
도이처의 견해는 적어도 일관성이라는 장점은 있다. 안타깝게도, 일관되게 틀렸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도이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자신의 태도에 내재한 논리 때문에, 동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현실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스탈린주의 방식을 혐오하면서도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을 노동자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45 이런 말은 이 서평을 쓰고 있는 필자를 포함해서 이 잡지의 몇몇 기고자들의 견해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도이처가 자신의 부르주아 혁명 모델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확장한 데서 비롯한다. 둘은 근본적으로 구조가 달랐던 것이다. 46
도이처의 이런 태도는 이론적으로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했다. 《미완의 혁명Unfinished Revolution》(1967년)에서 도이처는 실제로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에 대해 몇 가지 옳은 주장을 했다. 특히, 부르주아 혁명의 계급적 성격은 혁명 과정에 부르주아지가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결과가 “부르주아의 재산 증식과 그에 따른 사회관계의 성장을 가로막는 사회·정치 제도들을 일소”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점에서 도이처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의 재산이 증대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47 헤겔이 나폴레옹을 말 등에 올라탄 세계정신으로 보았다면, 도이처는 스탈린을 탱크에 올라탄 세계정신으로 본 셈이다. 따라서 트로츠키가 독재자의 계보에서 스탈린이 차지하는 위치를 지적한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트로츠키의 견해는 도이처의 견해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역사에서 스탈린과 비슷한 인물을 찾을 때, 크롬웰·로베스피에르·나폴레옹·레닌은 물론 무솔리니와 히틀러도 비교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트로츠키가 선호한 비교 대상은 케말과 디아스(각각 터키와 멕시코의 근대화를 추진한 독재자들)였다. 48 도이처는 분명히 스탈린을 보는 자신의 견해가 트로츠키와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이런 진술[트로츠키의 비교]은 역사적 척도와 관점의 결함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어서 당황스럽다.” 49 사실,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맞지만 도이처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유사성은 아니다. 스탈린의 역사적 구실은 독특하다. 1928년 이후의 ‘2차 혁명’은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반혁명이고 (국가)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부르주아 혁명에 해당하는 기능을 했다. 스탈린과 진짜 비슷한 인물을 찾으려면 부르주아 혁명의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자본의] 시초 축적을 실행한 지주·자본가·제국주의자 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본의 시초 축적 과정은 영국에서는 거의 2백50년 걸렸지만, 러시아에서는 25년밖에 안 걸렸고 그에 따른 고통도 대단히 압축적이었다. 도이처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차이에 대한 혼란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관련해 두 가지 중대한 왜곡을 했다.
도이처는 여러 곳에서 “위대한 혁명”(영국·프랑스·러시아 혁명)은 모두 똑같은 패턴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혁명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지도자의 구실도 똑같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크롬웰·로베스피에르·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혁명적 독재자의 반열에 든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50 언뜻 보면 이 문장은 기묘한 듯하다. 트로츠키는 혁명 과정에서 대중이 한 구실을 적절하게, 다시 말해 대중이 탁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을 아주 잘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이처가 대중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문장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하나는 노동계급의 구실과 관련 있다. 도이처는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 혁명사》를 논하면서 “트로츠키는 대중의 구실을 과장하지 … 않았다”고 썼다.1921년쯤 러시아 노동계급은 스스로 독재를 행사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사람들도 통제할 수 없었다.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기진맥진한 그들은 정치 세력으로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게 돼 버렸다.
52 물론 트로츠키가 어떤 상황에서도 일당 국가의 중앙집권적 권위가 필요하다는 식의 끔찍한 주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주로 《테러리즘과 공산주의》(1920년)에서 그랬다. 당시 트로츠키가 불가피한 일을 마치 미덕인 양 정당화한 방식은 그의 정치 생활에서 좋게 말해 가장 영예롭지 못한 에피소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트로츠키의 최종 견해는 아니었다. 예컨대, 1930년대 이후의 독일을 다룬 저작들에서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승리하기 전의 이원 권력 시기에 “노동자 통제는 개별 작업장에서 시작된다. 공장위원회가 통제 기구 구실을 할 것”이라고 썼다. 권력 장악 후에는 “공장위원회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소비에트가 경영 기구가 된다.” 53 “경영”은 “통제”보다 높은 수준의 활동이다. 소비에트는 다른 곳에서 내려진 결정을 점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러시아 노동계급을 대하는 도이처의 태도는 제1차세계대전 후의 유럽 노동계급 전체를 바라보는 태도의 일부였다. 그는 유럽의 노동계급이 결코 개혁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54 이런 주장도 트로츠키의 견해와 달랐다. 일부 추종자들이 트로츠키의 견해를 터무니없이 과장한 것은 사실인데, 트로츠키의 주장인즉슨 노동계급이 일관되게 혁명의 길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 지도력의 위기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과제라는 것이었다. 도이처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능력도 과소평가했지만 혁명적 지도부의 구실은 훨씬 더 과소평가했다. 여기서 도이처가 1917년 당시의 레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기진맥진한” 것과 “능력이 없는” 것은 다르다. 기진맥진한 계급은 다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능력이 없다는 것은 영원히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끔 도이처는 트로츠키가 후자의 주장을 지지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근거로 드는 것은 모두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가 경제 붕괴와 내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일시적 조처들뿐이다.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1917년 4월 레닌이 러시아에 도착한 것이 볼셰비키당을 사회주의 혁명과 권력 장악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서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없었다면, 기회주의 지도부가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위기가 아주 첨예하게 오랫동안 지속됐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이라는 상황은 당이 임무를 수행할 시간적 여유를 많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방향을 잃고 분열한 당이 여러 해 동안 혁명의 기회를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55 이런 견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도이처는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사》에서 논의한 것보다 훨씬 더 길게) 몇 페이지나 할애해서 트로츠키의 주장을 반박하려 했다. 도이처가 보기에 그런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전통”에서 일탈한 것이고 트로츠키의 고립감에서 비롯한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트로츠키]는 1917년의 레닌이든 1930년대의 자신이든 지도자는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신념에서 그는 자신의 고독하고 영웅적인 노력을 지속하기 위한 힘을 끌어냈다.” 56 3부작 전체에서 최악이라고 할 만한 이 부분은 사실 트로츠키의 “필요”보다는 도이처 자신의 필요를 드러낸다.
트로츠키의 말은 레닌이 없었다면 볼셰비키가 결코 올바른 전략을 추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거나 혁명적 기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혁명 상황에서는 시간이 핵심적이며 레닌이 없었다면 타이밍을 놓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레닌은 역사 발전에서 우연적 요소가 아니라 러시아의 과거 역사 전체의 산물이었다.”57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만들어 내는 사회 체제를 일컫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다. 그러나 도이처는 이런 결론을 극구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정반대의 결론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대중과 지도자들이 모두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데 유효하지 않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세력이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가? 도이처는 흔히 스탈린·마오쩌둥과 그 아류들의 “속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고전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을 옹호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저작의 장점은 이것이 괜한 허풍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도이처는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 같은 제2인터내셔널의 많은 사상가들도 “고전 마르크스주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들의 특징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극단적 결정론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사회주의는 생산력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이처가 말한]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자들과 레닌·트로츠키·룩셈부르크·루카치·그람시처럼 물질적 환경과 인간 행동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도이처의 3부작을 읽다 보면 러시아 혁명의 패배 경험 때문에 그가 제2인터내셔널의 결정론을 되살렸다는 결론을 피하기 힘들다. 패배가 너무 압도적이면,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면, 사이비 변증법의 주술呪術을 써서 패배를 승리라고(또는 적어도 패배가 승리로 바뀌고 있다고) 우기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추방된 예언자》의 후기 제목은 “패배 속의 승리”다. 즉,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이 오직 서구의 선진 공업국에만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제 소련 사회 안에서도 그런 조건들이 창출되고 조합됐다”는 것이다.도이처의 영향
3부작은 1956년 이후 등장한 신좌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책 자체만큼이나 모순된다. 그 점을 이해하려면 3부작이 어떤 상황에서 읽히고 토론됐는지를 떠올려 봐야 한다.
58 이런 맹공격에 맞서는 효과적인 방어는 거의 없었다.
1940년 트로츠키가 살해당했을 때 스탈린 체제의 지배력은 소련 자체와 서부 접경 지역에 국한돼 있었다. 1954년 3부작의 제1권이 처음 출판됐을 때 스탈린 체제는 동유럽 전체와 중국·북한·북베트남까지 확산돼 있었다. 또, 세계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분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 체제 지배계급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들도 이미 일부 나타났다. 1948년에 코민포름(코민테른의 후신)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1953년 동독 노동자들의 항쟁은 최초의 만만찮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국가자본주의의 고유한 문제점을 드러낸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사실, 1950년대 초에 서방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진정한 대안은 오직 스탈린 체제뿐인 것처럼 보였다. 언뜻 보면 트로츠키의 철천지 원수가 수립한 체제가 욱일승천하는 듯한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있으나마나 한 인물, 다른 시대나 다른 세계에서(도이처가 몇 차례 언급한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도이처가 《무장한 예언자》 머리말에서 지적했듯이 “거의 30년 동안 스탈린주의의 강력한 선전 기구가 혁명 기록에서 트로츠키의 이름을 삭제하거나 오직 대大반역자의 동의어로만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는 작업을 맹렬하게 벌였다.”59 같은 단체들까지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포함시켜서 트로츠키주의 조직원 수를 헤아리더라도 비교적 소규모인 영국 공산당(이하 CPGB)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당대 학계의 지도적인 사회주의적 사상가라 할 수 있고 1940년대 말에 스탈린주의와 조직적으로 결별한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과 그 직후에 트로츠키 저작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명목상의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발행한 소수 팸플릿을 제외하면 당시 출판된 트로츠키 저작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의 규모와 영향력이 미미했다. 서방의 3대 트로츠키주의 조직(미국·영국·프랑스의 조직) 회원들을 모두 합쳐도 3천 명쯤이었을 것이다. 제4인터내셔널 지지자들뿐 아니라 미국 노동자당이나 영국의 사회주의평론그룹아니오, 그것이 결정적으로 결핍된 점이었습니다. 훨씬 나중에야 나는 소련에 사회주의적 반대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60 와 게슈타포의 자금 지원을 받는 계급 반역자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세대간 장벽”의 존재를 말한 것은 옳았다. 61 이 점은 1956년까지 CPGB 당원이었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 존 새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 전후前後에 나는 개인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를 만난 적도 없고 내가 연설한 어떤 집회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와 마주친 적이 없다.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독립노동당ILP 당원을 만난 적도 없다.” 62 어떤 트로츠키주의자가 우연히 새빌과 윌리엄스를 만났더라도 그는 이 두 사람이 트로츠키의 이론·실천과 결코 가까워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가담한 많은 이들이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사람들이었지만, 알래스대어 매킨타이어가 《추방된 예언자》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았다.
이것은 약간 솔직하지 않은 답변이다. 윌리엄스는 CPGB 안에 있을 때 “소련의 사회주의적 반대파”는 MI6이른바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가장 하찮은 운동 축에 들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한때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추상적 도그마로 만들어 놓고 이를 신성시했다. 순전히 정치적 차원에서는 그런 일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더 기괴한 종교적 종파들의 역사를 보면 그와 비슷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알프레드 — 데이비슨] 로스메르와 나탈랴 [세도바 — 데이비슨]의 진정한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기껏해야 몇백 명뿐이었을 것이다.
64 트로츠키의 사상은 학자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도이처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스탈린주의 역사관이 “심지어 무소속인 서구 역사가들과 학자들의 견해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65 1967년에 《뉴레프트리뷰》는 트로츠키의 저작을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글이라며 니콜라스 크라소가 쓴 논문을 게재했는데, 그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혁명 전후前後의 실천적 정치 투쟁에서 그[트로츠키]는 정치 기구들의 구체적 효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다.” 66 (이 잡지는 나중에 편집부의 극단적인 도이처주의를 전파하는 매체가 된다.)
혁명가가 아닌 트로츠키 숭배자들도 트로츠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몇몇 중간주의 조직과 개인들이 나름대로 스탈린주의를, 특히 스탈린주의의 국제적 구실을 해명했다. 그런 분석 —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1938년)가 최상의 사례일 것이다 — 은 트로츠키의 주장과 양립할 수 있었지만 머지않아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의 정치적 결론이 트로츠키와 사뭇 다르고 대부분의 경우 꽤나 비혁명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더 일반적으로는 많은 지식인들, 특히 미국 지식인들이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적·이론적 재능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혁명적 망명객의 낭만이라고 본 것(트로츠키 자신은 거부한 비극적 영웅이라는 피상적 이미지) 때문에 트로츠키에게 이끌렸다. 그중 일부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가입하기까지 했지만 조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정치 활동에는 별로 헌신하지 않았다. 도이처는 그들의 점진적 후퇴를 생생하게 묘사했다.67 트로츠키 전기가 출판된 것도 도이처의 책이 처음은 아니었다. 버트럼 울프Bertram D Wolfe가 1948년에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을 다룬 전기 《혁명을 일으킨 3인방Three Who Made a Revolution》을 출판했다. 그렇지만 도이처의 3부작이 미친 영향은 질적으로 달랐다.
트로츠키가 잘해야 해롭지 않은 반스탈린주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거나 최악으로는 사회주의의 대의를 저버린 반혁명 배신자로 취급되던 1954년에 도이처가 쓴 트로츠키 전기 1권이 전격 출판됐다. 우리가 도이처에게 진 적잖은 빚은 그와 트로츠키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도이처가 자신의 주인공이 남긴 유산을 후세대에 전해 주는 데서 중대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책이 출판된 시기도 운이 좋았다. 1권이 출판된 지 2년 뒤에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이 있었고 동유럽에서 격변이 일어났다. 그 격변은 헝가리 혁명 탄압에서 절정에 달했고 스탈린주의 신화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러시아 혁명에서 트로츠키가 한 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이 도이처였던 것은 아니다. 오웰도 《동물 농장》(1945년)의 스노우볼과 《1984년》(1949년)의 이매뉴얼 골드스타인 같은 등장 인물을 통해 트로츠키를 묘사했고, 도이처 자신도 인정했듯이 오웰의 책 《과두제적 집산화의 이론과 실천The Theory and Practice of Oligarchic Collectivism》은 분명히 《배반당한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68 1956년부터 1968년까지는 도이처의 전기 세 권이 책상 표면을 꽤나 많이 차지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광원들의 지도자였고 1956년에 CPGB를 탈당한 로런스 데일리Lawrence Daly는 도이처를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쓴 스탈린과 트로츠키 전기는 분명히 수많은 능동적 노동조합원들을 각성시켰고, (노동조합 의식뿐 아니라 정치 의식도 있는) 이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 노동운동에 헌신적인 노동자들이 박제된 마르크스주의를 떨쳐버리고 자신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질식시킨 협소하고 무의미한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69 예컨대, 타리크 알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정치적 성장은 아이작 도이처, 레온 트로츠키, 에르네스트 만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순서대로).” 70 비록 알리가 트로츠키보다 도이처를 먼저 거론했다는 사실이 기껏해야 이 저자들의 책을 읽은 순서를 의미했을지 몰라도 새로 급진화한 노동자·학생들은 대체로 도이처가 해석한 대로 트로츠키를 이해했다. 위저리의 글을 보면, 도이처의 트로츠키 저작 선집 《연속혁명의 시대The Age of Permanent Revolution》는 1960년대 말 학생 반란 때 런던대학교 사회과학대학LSE의 도서 판매대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셋 중 하나였다. 71 그래서 적어도 일부 급진파들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도이처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1989년에 폴란드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실토했다.
러시아 혁명에서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한 구실에 대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대체로 뒷받침하는 방대하고 상세한 역사책이 출판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더 중요한 점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접한 적이 없는 개방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독자적 정보 소스를 얻게 됐고, 그래서 무너져 가는 스탈린주의 정설이 아닌 대안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언젠가 데이비드 위저리David Widgery가 지적했듯이 “심지어 [1968년에도 — 데이비슨] 읽어 볼 만한 사회주의 문헌은 책상 하나의 표면을 다 덮지 못할 정도였다.”나는 아이작 도이처라는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감명을 받아 신좌파에 가담했었습니다. 그는 내 스승이었습니다. 도이처가 고안한 이론 덕분에 우리는 사회주의의 꿈을 되살릴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토니 클리프는 자서전에서 1960년대에 사람들이 도이처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느낀 우려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천 명 남짓한 사람들이 참석한 도이처 강연회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청중석에서 도이처의 견해를 비판하는 발언을 두 번이나 했지만 청중의 반응은 썰렁했다. … 스탈린주의를 강경하게 비판하는 작고 약한 우리 그룹[사회주의평론그룹]은 도이처의 감언이설을 당해내지 못했다.
클리프는 도이처의 견해가 스탈린주의와 완전히 결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전에 스탈린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더 강경한 트로츠키의 견해보다 도이처의 견해를 받아들이기가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견해[스탈린 체제를 국가자본주의로 보는]는 아예 말할 것도 없었다. 클리프의 주장은 도이처의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어느 정도 타당했다. 분명히 로런스 데일리의 열렬한 반응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으면서도 처음으로 사회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도이처의 주장에서 매력을 느낀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공산당의 다수가 스탈린주의의 본질을 인정한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도이처의 주장에 매혹된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앞서 암시했듯이, 그 대답은 도이처 사상이 위안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1975년 이후 국제 계급투쟁이 침체하기 시작할 때부터 1989년 동유럽의 스탈린 체제가 몰락할 때까지 도이처 사상의 영향력이 극에 달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유럽이나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에 도심 번화가에서 [사회주의] 신문이 아무리 안 팔려도, 사회주의(나 사회주의로 ‘이행 중인’ 사회)가 지구 상에 이미 존재하고 그 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위안이었다.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앙골라, 에티오피아,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이 ‘노동자 국가’가 저지른 대학살극이 곧 드러났지만), 아프가니스탄이 그런 사회였다.
74 프레드 핼리데이의 책 《제2차 냉전의 형성The Making of the Second Cold War》(1983년과 1986년)은 “도이처 이론을 적용”한 핵심 사례라고 할 만한데, 이 책을 두고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름지기 현재의 냉전을 다룬 최상의 저작이라면 [도이처의 — 데이비슨] 사례에서 직접 영감을 얻어 쓴 책이어야 할 것이다.” 75 아마 도이처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은 마이크 데이비스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야말로 결국은 서로 대립하는 국제 계급 세력들의 역사적 긴장이 모두 수렴되는 지점이다.” 76
이런 견해를 전파하는 주된 매체는 도이처의 글을 정기적으로 실은 잡지인 《뉴레프트리뷰》였다. “도이처적 이론”의 전형은 1983년에 페리 앤더슨이 쓴 에세이 “트로츠키의 스탈린주의론Trotsky on Stalinism”이었다.(이 글의 제목은 약간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앤더슨은 소련을 바라보는 트로츠키의 견해 변화를 탁월하게 요약한 후 그 한계를 논하면서 이 때문에 트로츠키의 예측이 빗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은 도이처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 진영이 몰락하자 도이처 사상의 기본적 가정들도 모두 붕괴했다. 도이처 추종자들 중 일부는 1989~91년의 몰락 전에 이미 다른 편으로 넘어갔지만, 그들이 그랬을 때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사회주의적 자체 개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였다. 1989년 호로위츠는 폴란드 청중에게 자신이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자체 개혁을 “헛되이 기다리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도이처가 틀렸다. 사회주의적인 경제 토대 위에 사회주의적인 정치적 민주주의가 세워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78 놀랍게도, 전에 스탈린주의의 성격에 대한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견해를 받아들인 저술가 중 일부는 소련 몰락 후에 도이처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79 모든 도이처주의자가 이제 [히친스처럼] 편을 바꿔서 미국, 자본주의 세계화, “자유주의적 가치들”, 골칫덩어리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침략을 지지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 것이다. 핼리데이나 히친스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데이비스나 알리 같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이처의 사상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충성할 대상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바꾸기 쉽게 해 주었다.
소련 진영이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진보를 구현하고 있다고 본 프레드 핼리데이 같은 사람들에게 소련 진영 붕괴는 “20세기 공산주의 프로젝트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셈”이었다.결론
도이처는 말년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5년 그는 워싱턴에서 열린 전국 토론회에 초청받아 가서 전쟁을 주제로 연설했고, 그 다음에는 버클리에서 똑같은 제목으로 열린 훨씬 더 정치적인 행사에도 참가했다. 도이처는 버클리 행사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30년 전 폴란드 노동자들에게 연설한 이래로 가장 흥미진진한 강연회였다.” 더 중요한 사건은 아마 이듬해 ‘사회주의 학자 토론회’에서 (“사회주의적 인간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한 연설일 것이다. 그 연설에서 도이처는 행사장에 모인 좌파 학자들(물론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소수였다)이 미국 노동계급과 연관 맺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여러분은 청년 노동자에게 다가가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말해 줄 수 없습니까? 미국에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학자의 품위에 어긋나는 일입니까? … 여러분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사회주의 사상을 노동계급에게 가져가서 자본주의의 요새들을 급습하는 것, 맞습니다, 급습, 급습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이런 발언을 하고 또 버트란드 러셀의 ‘국제 전쟁범죄 법정’에 참여한 것은 망루에서 세계를 관조하는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라크 침략과 점령을 둘러싼 위기도 미국 제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냈을 뿐 아니라 전에 활동을 떠났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만행을 저지르기 전의 유럽 사회주의의 최상의 전통을 물려받은 도이처가 자기 주변에서 되살아난 투쟁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상황 변화 때문에 도이처는 다시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3부작의 장점과 단점은 모두 그 전 수십 년 동안 유력한 상황의 산물이었다. 스탈린주의에 저항한 도이처의 모습에서 3부작의 장점이 드러난다. 반면에 스탈린주의에 투항한 도이처의 모습은 패배의 시기를 연상시킨다. 스탈린주의라는 가짜 대안이 과거지사가 됐으니 후자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지겠지만, 우리가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계속 토론해야 하는 한은 도이처가 쓴 대작의 장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책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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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괄호( )와 인용문의 대괄호 [ ]는 데이비슨 자신이 넣은 것이고, 본문의 대괄호[ ]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 또는 편집자가 써 넣은 것이다. 또, 각주(*) 역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넣은 것이다.
출처: Neil Davidson, “Isaac Deutscher: the prophet, his biographer and the watchtower”, International Socialism 104 (Winter 2004).
↩
- E P Thompson, ‘The Poverty of Theory: or an Orrery of Errors’, The Poverty of Theory And Other Essays (London, 1978), p193. ↩
- 다른 견해는 M Perry, Marxism and History (Houndmills, 2002), p9을 보시오. ↩
- 한때 급진적 좌파였으나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지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을 지지하고, 종교 비판이라는 미명으로 이슬람·무슬림 비판을 해 자신의 친제국주의적 정치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자. ↩
- D Horowitz, ‘David Horowitz Versus Christopher Hitchens’, History News Network, http://hnn.us/articles/893.html ↩
- 히친스와 함께 좌파 저널에서 활동했으나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고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영국의 소설가, 문학비평가, 교수. ↩
- 볼코고노프는 소련군 고위 장성 출신으로, 소련 전 대통령 옐친의 군사문제 고문과 옛 소련 정부 문서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이런 지위를 이용해 소련 공산당의 각종 비밀자료를 바탕으로 《스탈린》(1990), 《레닌》(1994), 《트로츠키》(1992)를 써서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 세 책은 이런 관심에 값하지 못하며 자유주의적 반공주의 시각을 드러낸다. ↩
- M Amis, Koba the Dread (London, 2002), pp251, 252. ↩
- 한국에서는 필맥출판사가 2005~2007년에 3부작을 번역·출판했다. ↩
- 다른 구체적 언급이 없으면 도이처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D Singer, ‘Armed with a Pen’, in D Horowitz (ed), Isaac Deutscher: The Man and His Work (London, 1971); P Anderson, ‘Preface’, in I Deutscher, Marxism, Wars and Revolutions (London and New York, 1984), ppi-vi; and T Deutscher, ‘Isaac Deutscher, 1907-1967’, www.deutscherprize.org.uk을 참고한 것이다.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341. ↩
- 같은 책, p176. ↩
- 19세기 중엽 영국 총리를 지낸 보수 정치인. ↩
- P Sedgwick, ‘The Tragedy of a Tragedian: An Appreciation of Isaac Deutscher’, International Socialism 31, First Series (Winter 1967/8), p11. ↩
- M Ignatieff, Isaiah Berlin: A Life (London, 1998), pp 93, 235를 보시오. ↩
- 도이처는 역사가로서의 트로츠키를 마르크스, 처칠, 칼라일과 다양하게 비교했다. 사실, 마르크스를 제외하면 트로츠키의 가장 적절한 비교 대상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다. 그의 책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Accession of James VII to the Revolution (1848-53)은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와 놀랄 만큼 구조가 비슷하다. ↩
-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428; The Prophet Outcast, pp94-95.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p141-146, 157-158. ↩
- 장 조레스(1859~1914). 프랑스 사회주의자로 1902년부터는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기도 했다.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했는데, 1914년에 파리의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
- 두드러진 사례 두 가지는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p216-217과 The Prophet Unarmed, pp22, 235-236과 The Prophet Outcast, pp148-149을 보시오. ↩
- P Sedgwick, 앞의 글. ↩
- L Trotsky, My Life: An Attempt at an Autobiography (Harmondsworth, 1975)[국역: 《나의 생애》, 범우사, 2001], p604. ↩
-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ix. ↩
- 중요한 예외가 둘 있다. 하나는 트로츠키의 멕시코 망명 생활을 재구성한 메건 델라헌트Meaghan Delahunt의 소설 In the Blue House (London, 2001)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이다 르보브나Zinaida Lvovna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 켄 맥뮬런Ken McMullen의 영화 Zina (1985)다. ↩
- I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pp76-77. ↩
- P Broue, ‘Trotsky: A Biographer’s Problems’, in T Brotherstone and P Dukes (eds), The Trotsky Reappraisal (Edinburgh, 1992), pp20-21. ↩
- I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pp308-310; and The Prophet Outcast, pp49-65와 M Reiman, The Birth of Stalinism: The USSR on the Eve of the ‘Second Revolution’ (London, 1987), pp22, 27-28, 54-55; V Z Rogovin, 1937: Stalin’s Year of Terror (Oak Park, 1998), pp374-392; and B Starkov, ‘Trotsky and Ryutin: from the History of the Anti-Stalin Resistance in the 1930s’, in T Brotherstone and P Dukes (eds), 앞의 책을 비교해 보라. ↩
- D Volkogonov, Trotsky: The Eternal Revolutionary (New York, 1996), pxxiv. ↩
- D Singer, ‘The Prophet Vulgarised’, The Nation, 25 March 1996. ↩
- P Broue, Trotsky (Paris, 1988)가 도이처의 책보다 얼마나 나은지 말하기 힘들다. 상당한 비중이 있는 트로츠키주의자[P Broue]가 쓴 이 중요한 책이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I Deutscher, ‘1984: The Mysticism of Cruelty’, in Heretics and Renegades (London, 1955) and Marxism, Wars and Revolutions. ↩
- I Deutscher, ‘The Ex-Communist and His Conscience’, in Heretics and Renegades, p20; Marxism, Wars And Revolutions, pp57-58. ↩
- T Cliff, ‘The End of the Road: Deutscher’s Capitulation to Stalinism’, International Socialism 15, First Series (Winter 1963), p20; Trotsky, vol. 4, The Darker the Night the Brighter the Star, 1927-1940 (London, Chicago and Melbourne, 1993), pp304-307.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p45-49, 342-328. 예컨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비판에 대한 도이처의 반박은 I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p449, n64을 보시오. ↩
- L Trotsky, Trotsky’s Diary in Exile (London, 1958), p54.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210. ↩
- A MacIntyre, 앞의 책, pp54-55; P Anderson, ‘Trotsky’s Interpretation of Stalinism’, New Left Review I/139 (May/June 1983), pp49-54. ↩
- T Cliff, ‘The Nature of Stalinist Russia’, Selected Writings, vol. 3,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London, 2003), pp3-4. V I Lenin, ‘Left Wing Childishness and the Petty Bourgeois Mentality’, Collected Works, vol. 27 (Moscow, 1972), pp335-336도 보시오. ↩
- L Trotsky, ‘The USSR in War’, In Defence of Marxism (Against the Petty-Bourgeois Opposition) (London, 1966), pp9-11.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266. ↩
-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x. ↩
-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추악한 인물.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421. ↩
- I Deutscher, The Great Contest (London, 1960), pp21-22. ↩
- I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p429, n69. I Deutscher, ‘Russia in Transition’, Ironies of History (Berkeley, 1971), pp44-46도 보시오. ↩
- I Deutscher, The Unfinished Revolution (London, 1967), p22. ↩
- 이 점은 당시 맥스 샤트만Max Shachtman이 ‘Isaac Deutscher’s Stalin’, The Bureaucratic Revolution: The Rise of the Stalinist State (New York, 1962), pp229-234에서 매우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또, N Davidson, Discovering the Scottish Revolution, 1692-1746 (London and Sterling, Virginia, 2003), pp9-15, 290-295와 A Callinicos, Making History (Houndmills, 1987)[국역: 《역사와 행위》, 사회비평사, 1997], pp229-233과 ‘Bourgeois Revolutions and Historical Mater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43, Second Series (Summer 1989), pp122-127도 보시오. 나는 이 주제를 2004 Deutscher Lecture, ‘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in Historical Materialism, vol. 13, no. 3 (2005)에서 더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
- I Deutscher, Stalin: A Political Biography (London, 1949), pp565-566. ↩
- L Trotsky, Stalin: An Appraisal of the Man and his Influence, edited and translated from the Russian by C Malamuth (London, 1947), p413. ↩
-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372.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369. ↩
- 같은 책, p189.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p80-81. ↩
- L Trotsky, ‘What Next?’, Fascism, Stalinism and the United Front, 1930-34, International Socialism Special Double Issue 38/39, First Series (August-September 1969), p43; The Struggle Against Fascism in Germany with an Introduction by E Mandel (Harmondsworth, 1975), p228. 다음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www.marxists.org/archive/trotsky/works/1930-ger/ ↩
- I Deutscher, The Prophet Unarmed, p368. ↩
- L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London, 1977), pp343-344. L Trotsky, Trotsky’s Diary in Exile, pp53-54도 보시오.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p197, 198, 201. ↩
- 같은 책, pp422-423. ↩
-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viii. ↩
-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 ↩
- 영국의 해외 담당 보안경찰인 비밀정보국. ↩
- R Williams, Politics and Letters (London, 1979), pp49, 402. ↩
- J Saville, ‘The Communist Experience: A Personal Appraisal’, The Socialist Register 1991 Edited by R Miliband and L Panitch (London, 1991), p21. ↩
- A MacIntyre, ‘Trotsky in Exile’, Against the Self-Images of the Age (London, 1971), p59. 이 글을 썼을 때 매킨타이어는 자신이 속해 있던 IS[영국 국제사회주의자 단체] 회원들을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자들] 몇백 명에 포함시킨 듯하다.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353. 이 그룹에 대한 탁월한 설명은 A Wald, The New York Intellectuals (Chapel Hill and London, 1987)을 보시오. ↩
- I Deutscher, The Prophet Armed, pviii. ↩
- N Krasso, ‘Trotsky’s Marxism’, New Left Review I/44 (July-August 1967), p85. 도이처의 통찰력 있는 인터뷰 기사 ‘On the Arab-Israeli War’가 똑같은 호에 실려 있다. ↩
-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261. ↩
- D Widgery, ‘Ten Years for Pandora’, Socialist Review 2 (May 1978), p21. ↩
- L Daly, ‘A Working Class Tribute’, D Horowitz (ed), 같은 책, p89. ↩
- T Ali, Revolution From Above (London, 1988), pix. ↩
- D Widgery, The Left in Britain, 1956-1968 (Harmondsworth, 1976), p525. 다른 두 권은 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와 핼 드레이퍼Hal Draper의 Berkeley: The New Student Radicals였던 듯하다. ↩
- D Horowitz, ‘Reality and Dream’, www.frontpagemag.com ↩
- T Cliff, A World to Win: Life of a Revolutionary (London, Chicago and Sydney, 2000), p67. ↩
- P Anderson, ‘Trotsky’s Interpretation of Stalinism’, 앞의 책, p57. I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373와 비교해 보라. ↩
- P Anderson, ‘Preface’, Marxism, Wars and Revolutions, pxix. ↩
- M Davis, ‘Nuclear Imperialism and Extended Deterrence’, New Left Review (ed), Exterminism and Cold War (London, 1982), p44. ↩
- D Horowitz, ‘Reality and Dream’. ↩
- F Halliday, ‘The Ends of the Cold War’, New Left Review I/180 (March/April 1990), p12. ↩
- C Hitchens, ‘Left-Leaning, Left-Leaving’, Los Angeles Times, 16 November 2003. 다행히도, 히친스가 《무장한 예언자》의 머리말이라며 미리 공개한 글이 실제로 책에 실리지는 않았다. ↩
- S Unger, ‘Deutscher and the New Left in America’, in D Horowitz (ed), 앞의 책, pp215, 218-219에서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