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제국주의
서론 미국과 중국의 코로나19 관련 성적표가 달리 나오면서,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가 5년 앞당겨졌다. 영국의 싱크탱크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원래 2033년에 중국 경제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코로나19 변수로 인해 그 시기를 2028년으로 잡았다. 중국 국무원 산하 국무원발전연구중심DRC이나 일본의 일본경제연구센터JCER도 2030년을 전후로 중국 경제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도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을 근거로 중국 경제가 별다른 이상 없이 현재 성장세를 유지하면 10년 이내에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시진핑을 정점으로 한 중국 지배자들은 코로나19를 대체로 통제하고 있고(약간의 의구심은 있지만) 경기 회복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 외에도 이런 전망 덕분에 자신감을 가진 듯하다. 더욱이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배하자, 중국 지배자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미·중 무역전쟁에서 트럼프보다 더 나쁜 상대는 아닐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런 분위기가 작년 12월 중순에 개최된 중앙경제공작회의에 반영됐다. 회의 내용이 자세하게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크게는 부채 증대로 인한 금융 리스크 대책과 미·중 무역 갈등에서 중국 국내 경제를 보호하는 방안들이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미·중 무역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거나 코로나19로 인해 긴박하게 경기부양책을 논의하던 때와 같은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이 트럼프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앞서 언급한 중앙경제공작회의의 의제 중 하나가 “중국 국내 경제 보호”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진핑도 바이든 행정부와 치르게 될 미·중 무역 분쟁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미·중 무역 분쟁은 단순히 두 국가가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둘러싸고 벌이는 경제적 분쟁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헤게모니 쟁탈을 두고 벌이는 제국주의 경쟁의 한 표현이다. 그래서 두 국가의 경쟁은 경제적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영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데, 대만을 포함한 남중국해, 일대일로가 펼쳐지는 주요 결절점, 그리고 한반도가 주요 무대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제국주의적 열망은 대외 정책뿐 아니라 국내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에 기초해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고 앞으로 전개될 몇 가지 상황을 예측하고자 한다.
중국을 보는 두 가지 시각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중국의 ‘굴기’를 설명하는 다양한 주장들이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21세기 초반 중국의 경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하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베이징 컨센서스’가 유행했으며,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미국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하락한 반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조공체계론’, ‘천하질서론’ 등의 주장들이 등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대체로 중화민족中華民族 우월성에 기반을 둔 화이론華夷論의 일종이다. 화이론은 인류 문명이 중화민족에서 비롯됐고, 중화민족의 거주지인 중원의 변방에 있는 오랑캐들(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중화민족이 이룩한 문명의 세례를 받아 야만인에서 벗어나 개화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중국 왕조의 역사에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지배했던 원(몽골족)과 청(만주족)도 오랑캐가 중화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명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공체계론朝貢體系論은 화이론에 근거해 중화민족과 오랑캐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변방의 속국이나 오랑캐들이 종주국인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체계를 말한다. 조공체계론에 따르면 일찍이 당나라 때 이런 체계가 완성됐고, 오늘날의 몽골·신장·티베트·베트남·만주·한국·오키나와·일본 등이 제국의 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학자 하마시타 다케시浜下武志는 이를 조공-무역체계라고 불렀는데, 변방 국가들이 중국 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그 대가로 중국은 변방 국가들에 제국과의 무역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관행을 의미했다. 1990년대 초반 다케시는 아시아 지역의 국제 관계를 조공-무역체계의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아 내 중국의 지위가 지금과 같지 않아 그의 주장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국의 지위가 부상하자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체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예를 들어 중국 신좌파의 대표적 인물인 왕후이汪暉는 조공체계론의 업그레이드 판인 초체계사회(중국을 중심으로 변방 국가들을 통합한 사회)를 주장했다. 그는 중국 국가가 특정 이익이 아닌 훨씬 포괄적인 사회적 보편성을 대변하고, 중국이 신자유주의 질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제 질서 확립에 기여할 것이며, 티베트와 대만 그리고 홍콩 문제는 중국의 변방이 아닌 중심 문제라고 주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왕후이의 이런 태도는 중국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신좌파 지식인의 굴종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굴기는 경제·정치·군사 등 다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 최대 제조품 수출 국가로 변모하면서 동아시아 경제 발전의 중심에 서게 됐고,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제조업 성장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발전했다. 아시아 국가들의 중국 의존도가 커지면서 이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증대했다. 중국은 2010년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분쟁 때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고,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인 베트남에 자본과 물자의 유통을 금지했으며, 한국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를 허용하자 자국 관광객의 한국 방문을 금지했다. 최근에 호주와 갈등을 빚자 그 나라의 철강과 원목 등 원자재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아시아 국가들과 지정학적·군사적 갈등이 터져 나올 때마다 증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무기로 사용했다.
자본주의 이전 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체계로 보는 것도 역사학계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되지만, 오늘날 중국과 아시아를 조공-무역체계의 재판再版으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다. 훙호펑Hung Ho-feng은 조공-무역체계의 핵심은 유교 사상이었고, 그 이데올로기가 제국의 중심과 변방의 관계를 지탱시켰으며, 중국 변방의 국가 대부분이 중국을 정치와 경제의 모델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 간 관계는 유교가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와 현실 정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훙호펑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날 아시아에서 중국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국가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냉전 시절에 비해 그 영향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열강으로서 중국과 패권을 겨루고 있다.
훙호펑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전자본주의 조공체계론이 오늘날의 중국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지만 정작 핵심은 제대로 짚지 못했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가 된 중국은 당송 또는 명청 시대의 중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늘날의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 속에서 성장해 왔다. 따라서 이질적인 사회 구조들을 뛰어넘는 초역사적 성격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전개되는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교차가 중국을 규정짓는 요소들이다. 학계의 많은 논자들이 매우 의도적이고 심사숙고해 가며 중국을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바로 중국을 자본주의와 관련시켜 보지 않기 때문이다.
2 를 발표한다. 이 지수는 국내총생산, 해외 직접 투자, 대외 무역 거래량, 국내 은행들의 해외 대출 자산과 예금 잔고, 군사비 지출 등 다섯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영국의 독립 연구자 토니 노필드Tony Norfield는 중국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포함시키면서도 제국주의로 보지 않는다. 그는 2012년부터 해마다 제국주의 지수index of imperialism그런데 2018~2019년에 업데이트된 지수에서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2위를 기록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1위다. 이 지수는 오늘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힘의 비중을 잘 보여 준다. 중국,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정도가 미국 지수의 20퍼센트를 조금 넘는다. 심지어 미국 지수 값의 2퍼센트 이상인 국가도 전 세계에서 30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170여 국가들은 미국 지수의 2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노필드는 2위를 차지한 중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보는 견해에는 부정적이다. 물론 노필드는 중국이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위구르인들 1100만 명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원자재를 조달하려고 독재자들과 대규모 무역 거래를 하며, 세계의 주요 거점항들을 중국 소유로 만들려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검은 자금을 지원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노필드는 제국주의의 동학은 특정 국가가 해외 시장과 해외 투자를 통해 자본주의 이윤 추구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노필드는 중국이 그런 동기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노필드는 중국이 제국주의와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것을 두고 중국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리 이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중국이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행동하더라도 이런 사실들이 중국이 오리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중국의 경제 및 정치 시스템의 동학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제국주의 열강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중국이 제국주의처럼 행동하지만 그 동기는 자본주의적 동기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노필드의 주장은 사실 그리 독특한 것은 아니다. 국내외 많은 좌파들이 국유화나 공산당 집권을 근거로 들어 중국을 여전히 사회주의 사회라고 보거나, 덩샤오핑의 시장 개방으로 인해 중국이 더는 사회주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서방 국가들보다 더 진보적인 사회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2019년 홍콩에서 벌어진 송환법 반대 운동이나 중국 정부의 탄압에 반대하는 티베트나 신장위구르의 시위를 지지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서방 제국주의 국가의 사주를 받거나 결과적으로 서방 제국주의에 이로운 행동이라고 여긴다. 또, 중국이 국내에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착취·억압하고 소수 민족의 자결권 요구를 부정하며 해외에서는 독재자들에게 재정을 지원해 주고 그 대가로 자원을 약탈하거나 현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기껏해야 일탈적 행위로 여길 뿐이며 중국의 사회 체제와 국가의 성격에서 비롯한 결과로 보지 않는다.
제국주의 개념 정의
3 국민국가의 테두리 내에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통해 독점 자본이 형성됐을 뿐 아니라 해외 식민지를 장악하기 위한 해외 진출이 활발했다. 그러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져 두 번의 세계 대전까지 초래했던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에서조차 제국주의는 식민지 존재 여부로 환원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에서 식민지 국가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국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보는 생각은 제국주의를 매우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1870년대 이래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제국주의-식민지의 구도가 제국주의의 일반적 현상이었다.러시아의 혁명가 레닌과 부하린이 당시 제국주의를 분석한 결과 내놓은 몇 가지 특징들은 그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체제를 규정하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첫째,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통해 독점 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중국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논리, 즉 중국은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이라는 견해는 자본이라는 요소를 보지 못한 결과다. 둘째, 국내에서 생산과 소비 등을 조직하는 과정이 생산의 국제화라는 맥락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가정해, 특정 국가가 국제 교역에 참가하지 않을지라도 세계 자본주의가 이룩한 생산력과 기술 등의 국제화 수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뒤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중국은 폐쇄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였지만, 서방과의 경쟁 때문에 경제 발전을 비롯해 근대화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 때문에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제3선 건설(군사력 강화를 위해 벌인 신장 등 서부 지역 개발 사업) 그리고 문화혁명 등을 추진했다. 부하린은 ‘세계적 규모의 생산관계와 교환관계 시스템’인 세계경제가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이 서로 경제적·군사적 경쟁을 하는 무대가 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특징을 종합하면, 위계화된 구조 속에서 국민국가들이 경제적·지정학적·군사적 경쟁을 벌이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바로 제국주의이고, 이 세계 체제의 상층부에 포진해 있는 국가들을 제국주의 국가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정의를 따르면 식민지를 갖고 있는 국가만 제국주의라거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가 대부분 해방된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와 무관하다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중국은 탄생부터 제국주의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누르고 중국 대륙을 장악했을 때부터 이미 제국주의적 면모를 드러냈다. 1949년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영향력을 밀치고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네이멍구 자치구를 장악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몽골은 소련의 영향을 받는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과 중국의 자치구가 된 네이멍구로 분리된다. 마오쩌둥이 소련과 경쟁을 벌인 곳은 몽골만이 아니었다. 오늘날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전에는 독립 국가를 건설한 적도 있었다. 마오쩌둥이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이 지역을 장악하자 많은 사람들이 소련으로 넘어갔다. 이듬해에 마오쩌둥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스탈린과 경합을 벌였다. 신중국 등장 초기에 마오쩌둥은 영국과 경합을 벌이며 티베트 지역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강조했다. 신중국 초기 중국 영토의 경계선은 청 왕조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건륭제가 정복 전쟁으로 확립한 국경선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대가정’론을 내세워 소수 민족 병합을 정당화했다. 중국공산당은 200여 개나 되는 소수 민족들을 선별해 55개 민족만 소수 민족으로 인정했고(‘민족 식별’), 여기에 한족(중국 인구의 92퍼센트를 차지한다)을 더해 56개 민족이 중화민족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1949년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이 주장했던 민족자결권과도 다른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은 소수 민족이 독립 국가를 수립하거나 중국소비에트연방에 가입·이탈할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자치구역을 설립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분리 독립의 의지가 있는 소수 민족들에게 자치구 설립을 강요하고 이 자치구가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함되도록 했다.
1949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탄생할 때부터 제국주의 국가였다. 1840년 아편 전쟁 이래 자본주의 강대국들한테 시달렸고, 1927년 상하이에서 노동자 혁명이 있었지만 그 뒤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국공 내전이 벌어졌던 국가가 1949년에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했다는 주장에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943년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이 중화민국의 장제스와 함께 연합국의 일본 대응과 일본 패전 뒤 아시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또, 1950년 한국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과 싸웠던 군대가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었다. 이처럼 중국은 탄생할 때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 무시하지 못할 강대국이었고, 청나라 국경선(중국에서는 변경이라 한다)을 근거로 티베트·신장위구르·몽골 등을 무력으로 지배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
신중국 정부의 최대 과제는 약육강식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빨리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신생 독립 국가 중국은 소련의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기대했다. 하지만 1956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틀어지자, 중국은 국가가 생산을 통제·관리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서둘러 확립했다.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과 맞서는 일은 중국에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벌이자, 중국은 소련이 후원하는 북베트남을 지원하지 않았다. 중·소 분쟁 때 북베트남 정부가 중국을 비난하고 소련을 편든 것이 주된 이유였다.
중국은 소련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우군을 확보해야 했는데, 바로 미·소 냉전의 한 당사자였던 미국이었다. 1971년 핑퐁 외교와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미·중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미·중 간 데탕트(화해 분위기)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미국과 소련이 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이런 대결 구도에서 어느 한 편에 서도록 강요받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을 소련에 대항하는 하나의 카드 정도로 인식했다.
중국이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작한 때는 문화혁명 시기였다. 당시 마오쩌둥과 4인방(문화혁명 동안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4인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 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소련공산당 개혁파를 수정주의라고 비판하고 중국 사회가 금세 사회주의의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에 진입할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그런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핵심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추구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중국은 1978년부터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지만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다.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92년부터 중국에 대한 해외 직접 투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중국의 해외 직접 투자는 1990년대 내내 미미한 수준이었다.)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
유입 | 35 | 44 | 110 | 275 | 338 | 375 | 417 | 453 | 455 | 403 |
유출 | 8 | 9 | 40 | 44 | 20 | 20 | 21 | 26 | 26 | 18 |
출처: UN 무역개발회의(UNCTAD)
중국 지배계급은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한 뒤 잠시 개방 정책을 뒤로 돌리는 정책을 펼쳤지만, 1992년 1월 덩샤오핑이 우한·선전·주하이 등지를 둘러보면서 시장 개혁을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1991년 소련 붕괴가 야기한 세계적 불안정성이었다. 이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에 올랐다고 판단한 미국은 잠재적 경쟁자인 일본이나 독일 등을 견제하고 세계적 불안정을 통제하려고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1991년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를 공격했다(‘사막의 폭풍’).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옛 경쟁자인 러시아의 재부상을 경계하는 한편, 새롭게 부상한 일본과 독일을 견제하는 데 몰두했다. 또한, 중국이 시장을 도입해 경제가 발전한다면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은 글로벌 자본이 홍콩을 통해 중국으로 진출하거나 중국에서 생산된 물품이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수입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때 많은 화교 자본과 대만 자본이 중국에 유입됐다.
미국의 우파 이데올로그인 애런 프리드버그는 1990년대에 미국이 독재 국가인 중국에 대한 정책적 방향이 모호하거나 부재했다고 지적했는데, 양극화된 세계 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과도기에서 미국의 (잠재적) 주적이 등장하지 않았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1980년대에 시장 개방을 추진하던 중국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반면, 1990년대에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은 소련 붕괴로 인한 승리의 도취감이나 시장의 확대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확산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 편입에 적극적이었다는 점도 이런 기대감을 갖게 했다. 중국은 회사법과 노동법 등을 만들어 사적소유제를 확립했고, 재화와 서비스 시장을 개방했으며, 많은 국유기업을 민영화했다. 또한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국제 조약에 가입하는 등 미국이 주도하는 기존의 제국주의 국제 질서를 충실히 따를 것임을 표방했다.
7 중국은 1995년과 1996년에 대만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98년에 미국과 일본이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했고, 1999년 초에 나토군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했다. 2001년 1월에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미국 정찰기가 중국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 섬에 비상 착륙했고, 4월에는 미국이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계획을 발표하고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천수이볜 대만 총통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 내에서 중국 위협론이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1995년 리덩후이 대만 총통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중국이 미국 주도 제국주의 질서를 인정하는 속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듯했다.
글로벌 경쟁자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의 중국 견제 정책에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러시아와 중국을 ‘테러와의 전쟁’에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푸틴이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체첸공화국에 인접한 잉구세티아 자치공화국을 공격하고 중국의 신장 지배에 저항하는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 세력을 중국이 테러리스트로 지목하는 것을 눈감아 줬다. 하지만 부시가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고 중국이 그 공백을 메우면서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의 균형이 중국 쪽으로 이동한다는 평가가 미국 지배계급 내에서 제기됐다.
이런 경고에도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제적 상호침투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중국은 국내에 투자된 다국적기업들이 생산한 저가품을 미국과 유럽 나라들에 판매하고, 그 매매 대금이 달러화로 중국에 들어왔으며, 미국은 국채를 발행해 중국에 있는 달러화를 흡수해 다시 저가의 중국산 제품을 구매했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은 초저금리를 유지하면서 풍부한 자금을 시중에 유통시켰고, 정부와 기업과 가계는 값싼 자금을 빌려(부채 증가) 소비를 이어 갔다.
중국·일본·한국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중국이 1990년대 초반에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 대국을 자랑하던 일본에 비해 얼마나 비약적으로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92 - 1995 | 1995 - 2000 | 2000 - 2005 | 2005 - 2010 | 2010 - 2015 | 2013 - 20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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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12.66 | 8.51 | 9.80 | 11.20 | 7.80 | 6.86 |
일본 | 1.06 | 0.73 | 1.22 | -0.39 | 1.12 | 1.11 |
한국 | 8.60 | 4.69 | 4.77 | 3.78 | 2.96 | 2.95 |
중국의 고도성장 비결은 해외 투자 자본의 유입, 농민공이라는 값싼 노동력, 미국(과 유로존)의 소비 시장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비약적으로 경제가 성장했고, 2005년 이후부터는 자본의 해외 진출도 급증했다. 2005년부터 2013년 사이 중국의 해외순투자는 거의 10배가량 증가했는데, 이라크·아프가니스탄·북한·짐바브웨·에콰도르·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도 중국 자본의 해외 투자 수혜국이었다.
중국의 자본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세계 5대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는 모건스탠리 지분 3.3퍼센트를 12억 달러에 인수했고, 2010년 공상은행은 동아은행 캐나다법인 지분의 70퍼센트(7500만 달러)를 인수했으며, 같은 해 CIC는 영국의 사모펀드 아팍스파트너스 지분 2.3퍼센트를 9억 달러에 인수했다.
9 발해임대渤海租赁는 25억 5500만 달러로 아일랜드의 항공기 리스 기업 아볼론의 지분을 100퍼센트 매입했다. 광명그룹光明集团은 21억 6700만 달러로 이스라엘의 유제품기업 트누바Tnuva의 지분 77.7퍼센트를 인수했다.
중국의 경기 둔화로 자본 수익이 줄어들자 자본의 해외 진출이 부쩍 늘었다. 2015년 중국 자본이 한 5대 인수 합병은 다음과 같다. 중국 화공그룹化工集团이 80억 달러로 타이어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자동차 관련 제조기업 피렐리Pirelli의 지분 65퍼센트를 인수해 대주주로 등극했다. 창장 삼협그룹长江三峡集团은 36억 6000만 달러로 브라질의 수력발전소Jupia & llha Solteria의 30년 독점 경영권을 인수했다. 중국차이퇀中国财团은 33억 달러로 조명회사인 필립스 루밀레드의 지분 80퍼센트 인수를 추진했다.2016년에도 이런 인수 합병 흐름이 이어졌다. 가장 관심이 집중된 사례는 중국 화공그룹이 428억 달러를 투자해 스위스 종자·농약 거대 기업인 신젠타Syngenta를 인수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 자본의 해외 인수 합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2016년 중국의 인수 합병 관심 산업은 기술·미디어·통신TMT, 농업, 소비품, 의료건강, 광산에너지, 부동산, 문화·교육·엔터테인먼트 등에 집중돼 있다.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
유입 | 407 | 469 | 527 | 535 | 606 | 724 | 727 | 835 | 1083 | 950 |
유출 | 9 | 69 | 25 | 29 | 55 | 123 | 176 | 265 | 559 | 565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
---|---|---|---|---|---|---|---|---|---|---|
유입 | 1147 | 1240 | 1211 | 1239 | 1285 | 1356 | 1337 | 1341 | 1390 | |
유출 | 688 | 747 | 878 | 1078 | 1231 | 1457 | 1961 | 1583 | 1298 |
중국 자본의 해외 진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투자 증가는 미국의 영향력 축소와 비례해 중국의 입김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는 2008년에 외채 위기로 디폴트 상태였다. 그런데 중국이 에콰도르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대출과 투자를 한 덕분에 디폴트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중국(시노 하이드로)은 에콰도르 수력발전 시설에 22억 달러를 투자할 수 있었고, 구리광산 등의 사업권도 얻었다. 그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철도, 댐, 핵발전소 등), 칠레, 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 앙골라, 나이지리아 등, 중동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예멘 등지에 투자하고 있다.
둘째, 일대일로 관련국들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다.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 중국-인도 경제 회랑 등을 건설하기 위한 투자가 증대하고, ‘실크로드 기금’과 아시아투자은행AIIB이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기업들은 일대일로 관련국 및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투자나 인수 합병을 늘려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중국 기업들은 미국·독일·프랑스 등의 첨단 기업에 대한 투자나 인수 합병을 원한다. 하지만 일부 거래는 관련 국가들의 규제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이는 서방 선진국들이 미래의 산업을 좌우할 핵심 기술의 중국 유출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의 둔화와 ‘묻지마 투자’로 인한 손실 때문에 최근 중국의 해외기업 인수 합병이 잠시 주춤하긴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핵심 산업이나 수익을 내는 기업들에 대한 인수 합병 시도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10 이라고 천명했다.
중국 자본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면 당연하게도 국가와 인민해방군이 자국 자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마련이다. 2013년 시진핑은 “중국은 결코 자국의 핵심적 이익을 두고 협상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중국은 자국의 주권, 안보, 그리고 발전을 상실하는 것을 결코 참아 넘기지 않을 것”중국 자본의 해외 진출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아프리카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2008년 미국 발 세계경제 위기로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차관, 원조 등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아프리카의 무역 규모가 처음으로 미국과 아프리카의 무역 규모를 추월했다. 하지만 중국이 아프리카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의 대부분은 원유나 철광석 또는 비철금속 등의 광물 자원인 반면 중국이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품목은 다양하다. 따라서 중국과 아프리카의 무역 구조는 자연자원을 보유한 국가들에 집중돼 있고,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도 잠비아, 나이지리아, 앙골라 등지에 편중돼 있다.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가 광물자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구가 1억 명인 에티오피아는 광물자원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중국 기업들이 댐, 도로, 철도, 제조공장 등을 건설했다. 그리고 중국 기업들이 에티오피아에 진출한 또 다른 이유는 저렴한 노동력 때문이다. 2016년 광둥성의 최저임금이 대략 300달러이지만 에티오피아 하와사 산업단지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50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원조, 직접투자 그리고 중국 기업들의 진출이 여러 가지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첫째, 중국의 과도한 천연자원 채굴로 인한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문제가 생긴다. 아프리카 목재 수출의 60퍼센트가 중국으로 향하는데, 카메룬, 가봉, 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 중국은 산림 파괴로 인해 벌어진 문제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 또 중국은 수단의 메로에 댐을 건설할 때 환경 비용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아프리카 진출 기업들이 현지 노동력을 고용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계약서 부재, 안전규칙 무시, 저임금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의 인권 단체, 농민 단체, NGO 등은 중국을 사회 개혁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셋째, 중국이 아프리카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지렛대로 정치적 입김을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자신의 80세 생일에 달라이 라마를 초청했는데, 남아공 정부는 그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중국의 압력이 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중국 식민주의’ 비판이 제기되고 중국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도 한다. 2011년 잠비아 대선에서 야당이 반중국 선거 강령을 발표해 집권했다.
중국은 아프리카에 진출해 있는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려고 현지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인민해방군을 보낼 수도 있다. 2013년 중국 국방부 백서는 해외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것이 인민해방군의 핵심 목표 중 하나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중국이 해외에 진출한 자국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언젠가는 군사력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2008년 이후: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증대
중국은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거나 미국의 패권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삼갔다. 대만이나 북한 등과 관련한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긴 해도, 미국이 최상부에 위치하는 기존 제국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국제 질서 속에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했을 때 오히려 시진핑이 자본과 무역의 자유화를 외쳤다. 따라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대한 진보적 대안을 중국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부 좌파의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중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사실은 미국 지배계급의 걱정 거리다. 중국 국가의 경제 규모 그 자체가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를 재편성하도록 했고 이제는 기존 세계 질서조차 위협할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 오바마 정부가 대중국 정책의 방향을 급선회하게 만든 이유였다. 사실 오바마 정부는 출범 초기만 해도 전임 정부들보다 중국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2009년 오바마는 중국 방문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부분적 정책 대립 정도가 아니라 미래의 세계 패권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기세 싸움의 시작이었다.
11 반면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일대일로의 해양 실크로드는 중동과 카스피해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서남아시아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들어오는 항로이자 중국산 제품들을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수출하는 항로이기도 하다. 중국 국내 자본들의 이윤율 하락 문제도 중국이 일대일로를 적극 추진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일대일로를 자본 수출의 통로로 삼으면 중국 내 과잉 생산된 장비와 제품들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자본·노동력·원자재를 동원해 건설된 해양 실크로드 거점항들은 중국 시설에 대한 보호 명목으로 인민해방군이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2011년 오바마는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을 밝히며 아시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했고, 중국을 포위하려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미·중 무역 분쟁이 아직 군사적 충돌로는 번지지 않고 있지만, 남중국해와 특히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은 계속 고조되고 있다. 물론 중국의 군사비는 미국의 절반 정도이고, 지금까지 누적된 군사비를 보면 아직 중국은 미국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높아 군사비 지출 부담이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군사력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 것이다. 중국 지배계급 중 일부는 미국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전략에 중국도 군사력 강화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집권 동안 진행됐던 미·중 무역전쟁은 지금도 진행형이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미국은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3대 통신사를 뉴욕 증시에서 퇴출시키려고 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돼 올해 경기가 회복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지만 실물경제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더해지면서 최악의 국면을 지나고 있다. 백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은 4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추락할 수 있고 심각할 경우 마이너스 성장도 가능하다고 세계은행이 전망했다. 그래서 올해 미·중 간 무역전쟁은 더 날카롭게 전개될 듯하다.
향후 전망
코로나19가 처음 중국 우한을 덮쳤을 때 트럼프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우한 바이러스”라고 불렀고, 시진핑 정부는 코로나19가 우한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서양에서 발명돼 중국으로 전파됐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를 두고 미국과 중국 정부 수반들이 벌인 설전은 미·중 간 대립과 긴장이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경제적 영역을 넘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줬다.
시진핑은 미·중 갈등을 대처하려고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 홍콩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밀어붙였고 이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범민주파 인사 5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더기 체포했다. 신장위구르 지역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소에 감금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그 외에도 인권 변호사, 우한의 실상을 알린 시민 기자,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노동 NGO 등을 탄압하고 있다. 시진핑은 홍콩에서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반대파나 저항 세력을 계속 탄압할 듯하고, 미·중 간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라고 강변할 것이다. 서방 지배자들은 노동자나 소수 민족의 처지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면서, 중국의 인권 문제를 중국과의 경쟁을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할 것이다.
한편, 중국 정부는 미·중 간 무역전쟁에서 국내 경제를 보호하는 정책을 펼치려고 하는데, 그 함의는 ‘국진민퇴’國進民退(국유기업은 전진하고 민간기업은 후퇴한다)로 나타날 것이다. 얼마 전에 중국 정부가 마윈의 앤트ANT 그룹 기업 공개를 중단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반독점 조사였지만, 진정한 이유는 마윈이 중국 당국의 금융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정책을 공공연하게 비판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져 버린 민간 기업을 손보는 것이 앤트 그룹 상장 불발의 이유였다.
이번 사건을 통해 국가와 국유기업의 영향력이 민간 기업에 비해 더 증대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시진핑은 미국과 벌일 제국주의 경쟁을 위해 민간 기업까지 정부 정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옛 소련 같은 폐쇄적이고 전면적인 국가자본주의까지는 아닐지라도, 당분간 중국 국가의 경제 개입이 강화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갈등은 이전보다 더 첨예해질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출범 초기에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주도권을 잡고자 할 것이고 한국 정부에도 동참을 요구할 것이다. 반면 시진핑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볼모로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압박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한국 지배계급의 입지가 더욱더 녹록하지 않게 될 것이다.
홍콩 송환법 반대 운동이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자 중국 당국은 송환법보다 더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통과시켰다. 이 때문에 대만에서는 반중 정서가 증대됐다. 민진당의 차이잉원은 높아진 반중 정서를 이용해 대만 독립 방향으로 더 나아갈 수 있고, 그리 되면 양안 관계가 악화돼 갑자기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주
- 물론 2000년대 초반에도 중국이 10여 년 뒤에 미국을 앞지를 것이란 전망이 학계에서 많이 나왔다. 이에 대한 비판은 호어 2006을 보라. ↩
- Norfield 2019. 노필드는 2019년부터 ‘제국주의 지수’ 대신 ‘영향력 지수’(index of power)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지수가 상위일수록 제국주의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
- 고전적 제국주의 개념은 캘리니코스 2011, 215쪽에서 인용한 것이다. ↩
- 그중 예외가 외몽골이었는데, 소련의 영향력 때문에 병합하지 못했다. ↩
- 오홍엽 2009, 100쪽. ↩
- 1975년 북베트남이 미국을 몰아내고 남베트남을 통일하자 중국은 베트남 정부를 지지했다. 하지만 1978년 베트남이 친중국 입장이던 크메르 루주의 캄보디아를 공격하자 중국은 베트남과 전쟁에 돌입했다. ↩
- 1979년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할 때 미국은 자연스럽게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따라서 대만 총통의 미국 공식 방문이나 미국 대통령의 대만 방문 또는 대만 총통과의 전화 통화 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
- 제2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매몰된 결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재철 2015, 168쪽을 보라. ↩
- 이 인수합병 계획은 2016년 1월 미국의 CFIUS(외국인투자 심의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
- 에이이치 2015, p264. ↩
- 미국·일본·캐나다 등 태평양 연안의 12개국이 참여하는 자유무역협정으로 2015년 10월 타결됐지만 2017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탈퇴를 선언해 좌초 위기를 맞이했다. ↩
참고 문헌
김재철 2015, 《중국, 미국 그리고 동아시아》, 한울아카데미.
에이이치, 시오자와 2015, 《중국인민해방군의 실력: 구조와 현실》, 한울아카데미.
오홍엽 2009, 《중국 신장: 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 친디루스.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1,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책갈피.
프리드버그, 애런 2012, 《패권경쟁: 중국과 미국, 누가 아시아를 지배할까》, 까치글방.
호어, 찰리 2006,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 다함께.
Norfield, Tony 2019, “Index of Power Update, 2018-2019: China #2.”https://economicsofimperialism.blogspot.com/2019/09/index-of-power-update-2018-19-china-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