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미 사회진보연대 페미니즘팀장의 ‘페미니즘은 어디서 길을 잃었나’를 읽고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의 상황
지난해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과 트랜스여성의 숙명여대 합격이 논란이 되면서, 이를 둘러싼 페미니즘 내 논란도 첨예하게 드러났다.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젠더 권리를 방어했지만, 일부 여자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여성은 여성이 아니”라며 트랜스젠더를 공격했다.
김유미 사회진보연대 페미니즘팀장(이하 직책 생략)이 쓴 ‘페미니즘은 어디서 길을 잃었나’(《계간사회진보연대》)는 트랜스젠더 쟁점에서 나뉜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자신의 대안을 소개한 글이다.
1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분리주의 페미니즘을 뜻한다. 김유미는 전자를 대변하는 책으로 《교차성X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퀴어링!》을, 후자를 대변하는 책으로 《젠더는 해롭다》를 선정해 이들 주요 논지를 소개·비평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김유미는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페미니즘 내 논쟁이 “오늘날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이 맞닥뜨린 주요한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비판하는 “오늘날 페미니즘”은 ‘포스트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다. 여기서 ‘포스트페미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는 페미니즘을 가리킨다.해당 책을 여기서 내가 다시 소개하고 비평하진 않겠다. 그러기보다 김유미가 ‘오늘날 페미니즘’에 대해 평가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논평하려고 한다.
2 을 강조함으로써 “보편적인 사회 원리가 될 수 없다.” 김유미가 두 페미니즘에 가한 비판은 합리적 측면이 있다.
김유미는 전자가 다양한 억압의 교차를 묘사하지만 “여성억압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무엇보다 여성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여성의 실존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반면, 후자는 페미니즘을 “여성이라는 특수한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폐쇄적인 정체성 정치로 전락”시키고, 남성을 배제하고 ‘4B’ 운동(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과 같이 개인적·문화주의적 실천 그간 사회진보연대는 페미니즘 운동이 남녀 적대를 전제하며 “성차별·성폭력에 문화주의적으로 대응”하는 데 치중하는 것을 옳게 비판하고, 페미니즘 운동이 “노동자운동 및 사회변혁 운동과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여성운동 내 다수가 여성과 남성을 적대적 관계로 인식하고 성폭력 문제에 거의 전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사회진보연대의 이런 강조는 공감할 측면이 많다. 사회진보연대가 여러 사회집단 중에서 여성 노동자를 중시하는 것도 좌파적 페미니즘으로서의 장점이다.그러나 김유미의 글은 일부 옳은 비판이 담겨 있음에도 핵심적인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첫째, 한국 여성운동의 주류인 엔지오 여성단체들의 페미니즘을 다루지 않았다. 이 점이 가장 큰 문제인데,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엔지오 여성단체 지도자들이 수용하는 페미니즘을 빼놓고서는 여성운동의 상태와 약점, 그 극복 방안을 제대로 논할 수 없다. 둘째, 두 페미니즘 — 포스트구조주의와 분리주의 — 의 난점에 대한 김유미의 비판에도 여러 모호한 점이 있고, 대안 제시도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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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페미니즘과 분리주의 페미니즘김유미는 국내의 급진 페미니즘을 다룰 때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국한해 서술하는데, 이런 서술은 국내 여성운동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급진 페미니즘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미국 여성운동에서 처음 등장해, 1970년대에 나름의 이론을 확립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은 거의 다 급진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아 왔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등 엔지오 여성단체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개혁주의이면서 급진 페미니즘 사상을 수용한다.
급진 페미니즘은 기존 사회가 근본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위계적 체제(“가부장제”)로 조직돼 있다고 본다. 여성 차별의 원인을 초역사적인 가부장제로 보는 것, 방법상 개인주의, 문화주의 실천, 여성에 대한 폭력 쟁점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 등이 주요 특징이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급진 페미니즘의 일종으로, 그 논리를 가장 일관되게 극단까지 밀고 나간 조류다. 이들은 남성과의 어떤 협력도 기피하는데, ‘불편한 용기’나 ‘비웨이브’ 조직자들이 그랬다.
한국에서는 급진 페미니즘과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융합돼 있다가 몇 년 전부터 분화됐다. 예컨대 2018년 불법촬영물 항의 운동을 이끈 ‘불편한 용기’의 조직자들은 남성만이 아니라 기존 여성단체들도 배제했고(이들의 “운동권 배제”가 핵심적으로 겨냥했던 바), 기존 여성단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위를 이끌었다.
한국 여성운동의 주류 페미니즘
김유미가 “페미니즘은 어디서 길을 잃었나” 하고 질문을 던지고서는 오늘날 여성운동에서 주변적인 두 경향(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과 분리주의 페미니즘)만 두드리는 것은 의아하다. 현실 운동과의 관련성보다 이데올로기 자체를 중시해서일 수 있는데, 이것은 헛다리를 짚거나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는 셈이다.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은 급진 페미니즘이다.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은 학계에서 영향력이 크지, 여성운동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경향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길을 잃은’(여성 차별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거나, 해방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가장 큰 책임은 여성운동의 주류인 급진 페미니즘에 있다. 물론, 상당수 급진 페미니스트들도 소수자와의 연대를 설명할 때 종종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개념을 차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주요 여성단체들은 급진 페미니즘을 채택해 운동을 벌여 왔다. 이들은 여성을 잠재적 피해자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면서 성폭력 문제에 집중했다. 한편, ‘남성 권력’에 맞서 전체 여성을 대변한다는 명분 아래 정치적 지분을 확보해서 국가기관과 부르주아 정당(대개는 민주당)에 들어가는 개혁주의 전략(‘성 주류화 전략’)을 취해 왔다. 이미 여연 대표 출신 상당수가 여성부 장관이나 민주당 비례의원으로 공직에 진출했다.
지난 20여 년간 여성운동은 여성 차별과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개혁 입법을 성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이용해 성평등을 이룬다는 전략은 심각한 모순과 난점을 드러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노동계급·서민층 여성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경제 위기가 심화하면서 여성 대중의 삶은 악화되기도 했는데, 주류 여성단체 지도자들은 민주당 정부와 협력하면서 운동을 협소하고 온건하게 벌였다.
‘남 대 여’ 식의 정치는 남녀 노동자의 단결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불필요한 분열을 촉진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 교리는 여성의 피해 호소가 부당하게 무시되는 관행을 극복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었지만, 그 교리에 내포된 난점과 모순 때문에 때로 억울한 희생자를 낳고 필요한 토론을 가로막으며 도덕주의 분위기를 팽배하게 만들었다.
천대받는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고약한 페미니즘의 등장도 급진 페미니즘의 자장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물론 주류 여성단체는 옳게도 트랜스젠더와 성소수자의 권리를 방어한다. 하지만 바로 이들이 강화해 온 남녀 대립 구도,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것,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혐오 사회’ 담론 등이 트랜스젠더에 대한 반감으로 미끄러지는 길을 열어 줬다.
강남역 살인 사건 직후 일어난 ‘페미니즘 열풍’이 한숨 가라앉고 나서,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다.
’여자라서 죽었다’는 한편으로 ‘여성=피해자’라는 생각을 강화하고, 그 피해자성이 ‘여성-성기female sex’에 고착되어 있다는 오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성 성기로 규정되는 ‘남성 신체male body’를 가지고 여성(-성기)의 세계를 침해하고 폭력을 휘두를 것이라는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즘이 힘을 얻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5
사회진보연대의 페미니즘은 좌파 페미니즘으로, 급진 페미니즘의 사상을 비판해 왔다. 특히 ‘성 주류화 전략’의 모순과 난점에 대한 비판은 공감할 점이 크다. 급진 페미니즘의 대항문화운동(라이프스타일의 변화)과 반성폭력운동(성폭력 범위의 확대와 처벌 강화)에도 비판적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고 일관됐는지 의문이 든다.
이는 여성 차별의 원인에 대한 분석과 해방의 전략이 모호한 데서 일부 기인하는 듯하다. 김유미는 이 글에서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억압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그도 여성억압의 원인을 무어라 규정하는지 분명히 찾을 수 없다.(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김유미는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지나가듯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런 진술은 급진 페미니즘 이론에 반쯤 문을 열어 둘 여지가 있다.
생물학적 설명을 일절 거부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착취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 생물학에 기초하여 여성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강조는 인용자의 것) 6
최미진(2015)은 이유미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이 쓴 《지금 여기 페미니즘》을 서평하며 이유미가 급진 페미니즘과는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도 여성 차별의 현실을 설명하면서 종종 “남성 권력 관계”라는 급진 페미니즘의 용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유미의 위 주장은, (김유미가 보기에) “성적 차이가 여성 억압의 핵심 요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급진 페미니즘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데, 여성 차별의 원인을 계급 사회와 관련지어 설명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등장 배경과 공과를 바로 살피기
김유미가 보기에 최근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부상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에 유입된 많은 젊은 여성들이 “포스트페미니즘이 여성 문제 해결에 무력하고 보기 때문”이다. 즉,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의 난해함과 여성 범주의 해체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 중심적이고 단순하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등장은 주류 여성운동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이 더 중심적이다.
분리적 페미니스트들이 조직한 운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2018년 불법촬영물 항의 운동이다. 이 새로운 운동의 부상은 국제적 차원에서 일어난 여성들의 (제한적) 급진화와 지난 수십 년간 여성들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와 모순(평등에 대한 드높은 기대와 여전히 지독한 차별)을 배경으로 한다. 국내적으로도 2016년 10월∼2017년 4월까지 전개된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비롯한 자신감과 ‘입페미’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여성운동이 주류 여성운동 밖에서 일어난 것은, 주류 여성단체 지도자들이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정부 비판을 대체로 회피해 온 것과 관련있다. 이 운동의 조직자들은 기존 여성운동을 온건하다며 불신했고, 배제했다. 즉, 이들은 주류 여성운동 밖에서 급진 페미니즘의 사상과 핵심 개념을 이용해, 기존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며 독자적으로 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크고 투쟁적인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다. 만약 분리적 페미니스트들이 그저 기존 여성단체들의 지도 하에 운동을 조직했다면 “급진성과 투쟁성, 활력이 떨어져 맥없고 청원식인 훨씬 소규모 집회로 열렸을 것이다.”
8 에서 김유미가 ‘전투적 여성주의’로 명명한 새롭게 부상한 페미니즘을 다루면서 한 설명이 좀더 유용해 보인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페미니즘(‘전투적 여성주의’)은 오늘날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이중 부담, 기층 여성들의 구체적 요구나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기존 여성운동의 성 주류화 전략, 사회변혁운동에 대한 약한 지향성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이런 분석을 이 글에서도 수미일관하게 적용했으면 좋았겠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다른 글불법촬영물 항의 운동의 조직자인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을 이끌었다. 물론, 이들의 주장과 구호, 조직 방식에는 온갖 난점이 존재했다. 남성 일반에 대한 배타성, ‘운동권’ 배제, 자극적인 표현 남발, ‘이너서클’ 중심의 불투명한 조직 방식 등. (당시 트랜스젠더 배제의 문제는 부분적으로만 나타났다.)
무엇보다 단일쟁점 운동의 협소함과 정치적 전망 부재로 일정 정도 성과를 쟁취한 후 급속하게 동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 운동이 한국 최초의 대중적 여성운동이었다는 의의도 함께 봐야 한다. 기존 여성운동은 늘 그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 비해 운동의 규모가 현격히 작았다. 하지만 이 운동에는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참가했다.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투쟁적 분위기에 성 불평등에 불만을 가진 많은 학생과 젊은 노동계급 여성들이 호응한 것이다. 어떤 운동을 볼 때 그 조직자들의 이데올로기나 전술을 먼저 봐서는 안 되고, 그 운동의 사회적 성격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개입주의적인 좌파라면 이 운동에 대해서 ‘비판적 지지’ 전술을 취하는 게 맞았다. 대다수 좌파가 이 운동과 거리를 두며, 조직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만 한 것은 아쉽다.
한편, 분리주의 페미니스트 일부는 트랜스젠더 배척으로도 나아갔다. 특히 지난해 숙명여대 트랜스여성 합격 논란 때 이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유미가 서평한 《젠더는 해롭다》(실라 제프리스)를 출판한 ‘열다북스’도 그런 곳이다. 이 사회에서 유독 천대받는 트랜스젠더를 ‘여성 공간을 위협하는 가해자’로 취급하는 이들의 주장은 편협하기 짝이 없고 유감이다.
이런 점에서 김유미의 《젠더는 해롭다》 비평에서 아쉬운 점을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가 비록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 권리를 둘러싼 하나하나의 쟁점에 집중하기보다는 제프리스가 섹스와 젠더를 다루는 방식을 중심으로 내용을 살펴 보겠다”고 밝혔지만, 이 책은 단지 분리주의 페미니즘 사상을 설명하는 개론서만은 아니다. 《젠더는 해롭다》는 트랜스젠더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고(“트랜스젠더리즘 비판”), 트랜스젠더에 대한 온갖 모욕과 악의적 왜곡, 확증편향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출간 전부터 많은 성소수자들이 이 책에 강한 유감을 표했다. 트랜스젠더를 방어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제프리스 책의 트랜스젠더 혐오적 측면을 먼저 비판하는 게 더 좋았겠다.
김유미의 두 페미니즘 비판이 놓치고 있는 것
서두에서 밝혔듯이,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김유미의 비판에서 공감할 점이 있다. 좀더 자세히 인용하면 이렇다.
김유미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남성 배제 전략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현실을 무시한다”고 옳게 비판한다. 이들의 분석대로라면 “이성애 관계 속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들에는 ‘폭력의 사후적 고발과 처벌’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개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도 “문제를 해체할 뿐 해결하지 못한다.” 김유미의 지적처럼, “다양한 차이와 억압이 교차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특정한 운동적 관점에 미달”한다. “맞서야 할 체제가 무엇인지를 규명·합의하지 않는다면, 페미니즘은 … [결국] 문화주의 실천에 그칠 것이다.”
이런 비판은 합당하지만, 김유미가 이들의 핵심 문제점을 섹스와 젠더에 대한 잘못된 분석에서 찾으며,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포스트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이의 논쟁은 우리 시대가 여전히 성적 차이를 ‘철저히 사유’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성적 차이를] ‘우리 시대의 주제’로 진지하게 마주할 때, 페미니즘은 비로소 잃어버렸던 길을 찾고 여성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0 또, 김유미의 지적처럼 생물학적 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곧 성소수자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성적 차이가 여성 차별의 원인은 아니다. 김유미의 글은 이 점에서 모호하다. 성적 차이에 대한 강조는 여성 차별의 원인을 오해하게 만들기 쉽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두 페미니즘의 핵심 문제점이 과연 “성적 차이를 ‘철저히 사유’하는 데 실패”한 것에 있는가? 물론, 섹스와 젠더에 대한 분리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견해는 그 자체로 논쟁할 여지가 있다. 성적 차이를 순전히 담론의 산물로 취급해서 생물학적 성차가 없다고 보는 포스트구조주의 견해는 옳지 않다.우선 성차(생물학) 그 자체가 여성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 남녀 생물학적 차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기에 존재한 무계급사회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오늘날과 같은 성역할을 강요받지 않았고,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사회적 지위에 불리하게 된 것은 농경이 발전하고 사회가 계급 사회로 바뀌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당시 여성이 임신·출산·수유를 하면서 무거운 쟁기를 사용해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밭을 일굴 노동력이 더 많이 요구되면서 여성은 더 자주 임신하게 되고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했다. 즉, 특정한 생산력 발전 국면 속에서 여성은 사회적 생산에서 점차 밀려나고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다. 그 결과, 약 7000년 전 최초의 계급사회는 부계제 사회였다. 이를 두고 엥겔스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불렀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잠시 생물학적 요인이 중요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그전의 계급 사회와는 다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가족 단위로 이뤄지지 않고, 공장·사무실 등 가족 밖에서 사회적으로 이뤄진다. 산업화로 노동계급 여성은 가정 밖의 생산에 대거 참여하게 됐다. 그러나 노동력 재생산은 주로 개별 가정에 맡겨져 있다. 노동계급 여성이 가정에서 무보수로 수행하는 양육과 돌봄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데 중요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일이다. 지배계급은 이렇게 가족제도를 통해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또, 가족은 자본주의 규범을 새 세대에게 전수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중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여성들이 차별받고 자신의 몸과 성을 통제할 수 없는 것(낙태죄, 여성 몸의 상품화 등)은 성차 그 자체도, ‘성차에 대한 사유 부족’ 때문도 아니다. 이윤 체제로서 자본주의의 성격 때문이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성차를 강조하는 것은 여성 고유 권리를 강조하려는 좋은 의도이더라도,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분리주의·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난점도 여기서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이,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이 구조화되는 방식과 이윤 체제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여성 차별을 끝낼 수 없다. 물질적 조건 변화와 집단적 투쟁을 통해 때로 차별이 완화되더라도 자본주의 하에서 ‘백래시’가 반복된다. 페미니즘이 이 핵심적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해방의 전망 자체를 회피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두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잘못 제시하거나(급진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이론), 여러 차별의 현상만 묘사하면서 그 원인을 제시하지 못한다(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원인을 잘못 진단하면 그 해결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유미 역시 여성 차별을 계급 사회(오늘날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와 작동방식과 연결해서 설명하지 않기에 여성해방의 전망과 효과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주
- 이런 페미니즘을 ‘포스트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김유미는 “[다양한] 3세대(제3물결) 페미니즘을 모두 포괄하는 말”로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포스트페미니즘’은 1980년대 이후 서구에서 유행한 담론으로, 여성은 이미 평등을 성취했고 성차별은 과거지사가 됐다고 주장했다. 김유미가 이 글에서 다룬 책의 저자들이나, 교차성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을 이런 류의 주장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포스트페미니즘과 달리, 제3물결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은 좋은 것이고 여전히 필요하다는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김유미가 ‘포스트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한 것은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으로 고쳐 읽어야 오해를 피할 수 있다. ↩
- ‘문화적 페미니즘’은 원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급진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부를 때 사용한 용어였다. 즉, 페미니즘을 사회구조의 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적 운동이 아니라 모종의 문화적 라이프스타일로 전락시킨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
- 사회진보연대의 페미니즘에 대한 더 일반적 비평은 이유미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이 쓴 《지금 여기 페미니즘》을 서평한 최미진 2015를 참고하라. ↩
- 이 부분의 논지는 최일붕 2018을 참고했다. ↩
- 손희정 2018 ↩
- 대표적으로 1970년대 대표적 급진 페미니스트인 파이어스톤이 여성 차별의 원인을 생물학에서 찾았다. 물론, “생물학에 기초하여 여성에 대한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 곧 여성 차별의 원인이 생물학이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김유미는 파이어스톤의 대안(인공 자궁을 통한 재생산 기술이 자연적 임신과 출산을 대체)에는 분명히 비판적이다. ↩
- 최일붕 2018. ↩
- 김유미 2019. ↩
- 사회진보연대도 이 운동이 다 끝난 뒤인 2019년 3월이 돼서야 관련 글이 처음 나왔는데, 그 의의를 제대로 사주진 않는다. 김유미 2019, ‘생물학적 여성의 생존을 넘어 여성의 삶을 바꾸는 힘으로’, 《오늘보다》. ↩
- 이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견해는 성지현 2017에서 비판했다. ↩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어, 주디스 2016의 3장 ‘여성 억압의 기원’을 참고하라. ↩
참고 문헌
김유미 2020, ‘페미니즘은 어디서 길을 잃었나’, 《계간사회진보연대》 겨울호.
김유미 2019, ‘페미니즘 열풍,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사회진보연대》 여름호.
미미 마리누치 2018, 《페미니즘을 퀴어링!》, 봄알람.
성지현 2017, ‘서평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엮음, 교양인, 2017 ─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마르크스21》 20호.
손희정 2018, ‘페미니즘,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 《황해문화》 통권 제99호.
쉴라 제프리스 2019, 《젠더는 해롭다》, 열다북스.
정진희 2018, ‘올해를 달군 불법촬영 항의운동을 돌아본다’, 〈노동자 연대〉 271호.
주디스 오어 2016,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최미진 2015, ‘서평 《지금 여기 페미니즘》 ― 여성 차별의 사회구조적 원인과 여성 노동자에 주목한 개론서’, 〈노동자 연대〉 149호
최미진 2019, ‘서평 《우먼스플레인》,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 ─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에 대한 예리한 지적’, 《마르크스21》 31호.
최일붕 2018, ‘급진적 페미니즘과 분리적 페미니즘,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 연대〉 269호.
한우리, 김보명, 나영, 황주영 2018, 《교차성X페미니즘》, 여이연.
황주영 2016, ‘뤼스 이리가레 — 성차의 존재론과 수평적 초월’,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