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투쟁 30주년
단지 패배한 투쟁이었는가?
올해는 학생과 노동자들이 노태우 군사 정권에 항거한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다. 1991년 5월 투쟁은 노태우 정부 때 벌어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투쟁은 4월 하순부터 시작됐는데, 투쟁의 절정과 퇴조가 모두 5월에 교차했기 때문에 5월 투쟁으로 불린다.
1 이 등록금 인상 반대와 총학생회장 연행 항의 시위에 참가한 명지대학교 1학년생 강경대를 쇠파이프로 때려 죽였다. 등록금 인상은 당시 대학생들의 큰 불만이었다. 1989년에 노태우 정부는 사립대학교 등록금 ‘자율화’를 실시했다. 대학에 대한 국가 통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도입한 것이었다. 정부와 대학 당국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내세워 등록금 인상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진정한 수익자는 노동계급과 그 자녀들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었다.
5월 투쟁의 직접적 발단은 한 대학생의 죽음이었다. 1991년 4월 26일 백골단등록금 인상은 안 그래도 학비와 생활비 마련에 허덕이던 많은 대학생들에게 부담을 가중시켰다. 1991년 5월 25일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 작전에 압사당한 성균관대학교 학생 김귀정(1988년 불문학과 입학)은 그 무렵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몸이 열 개라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학 생활과 아르바이트 생활의 연속,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 나는 공부를 제쳐두고 돈을 벌러 다닌다.”
이런 현실 때문에 당시 많은 대학들에서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들이 벌어졌다. 4월 26일 명지대학교에서도 등록금 인상 반대 집회가 있었고, 경찰이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대가 백골단에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아 심장막 내출혈로 숨을 거뒀다.
한 대학생의 죽음이 급속하게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5월 9일 범국민대회에는 전국적으로 50만여 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운동권’의 커다란 낙관에도 불구하고(제2의 6월항쟁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투쟁은 더 광범한 대중 — 특히 노동자 대중 — 을 동원하지 못한 채 중단됐다.
2 새삼스러운 평가는 아니다. 10년 전 이 무렵 5월 투쟁 20주년을 맞아 〈경향신문〉에 다음 같은 기사가 실렸다. “87년의 6·10항쟁이 대통령 직선제라는 가시적 성과물을 거두며 ‘승리의 기억’으로 남았다면, 91년 5월 투쟁은 참담한 패배이자 트라우마가 되었다.” 3 여기에 5월 투쟁 동안 13명이 분신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그 시기를 “분신 정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승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통함 때문에 투쟁 참가자들에게 5월은 “잔인한 달”, “참혹한 슬픔”으로 기억되곤 한다. 소설가 김연수는 5월 투쟁을 다룬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5월 투쟁이 패배로 끝난 6월에 “한 시대 전체”가 “거대한 우울”을 느꼈다고 썼다. 4
그래서 5월 투쟁은 패배했거나 성과 없는 투쟁으로 평가되곤 한다. 최근에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은 “5월 투쟁은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고 썼다.그러나 5월 투쟁이 단순히 패배의 트라우마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그 투쟁은 비록 최종 패배했지만 노태우 정권의 권위주의적 반동, 즉 1987년 6월항쟁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권위주의적 반동과 대중 저항의 치열한 공방
한 대학생의 죽음이 전국 규모의 거리 시위로 확산된 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강경대가 타살된 것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노태우 정부의 권위주의적 반동이 낳은 비극적 결과였다. 노태우 정부는 군복 벗은 군인들의 정부였다.
노태우 정부는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운동이 획득한 성과물을 빼앗으려고 했다. 지배계급(정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은 대중 투쟁에 밀려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해 양보한 것을 어떻게든 되찾으려고 몸부림치는 속성을 지닌 사회 세력이다. 군부 반동의 위험성이 상존했다. 많은 사람들은 1987년 6월항쟁의 성과가 공격받고 권위주의 정치 체제로 회귀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반발했다. 양심수 현황을 보면, 노태우 정부의 반동 공세와 그에 맞선 저항이 매우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 5년 동안 양심수는 6614명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특히 1989년부터 반동적 공세를 본격화했다. 1989년은 1987년 이후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해이기도 했다. 정부는 황석영 작가(3월 20일), 문익환 목사(3월 25일), 임수경 학생(6월 30일), 문규현 신부(7월 25일)의 방북 투쟁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정부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의 방북과는 180도 다른 것이었다. 정주영은 1989년 1월 24일 방북해 북한 정부 측과 금강산 사업에 합의하고 2월 2일 남쪽으로 돌아왔다. 노태우는 정주영의 방북을 격려하고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이 정주영을 지원했다.
1989년의 잇달은 방북 투쟁은 1987년 6월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파업 투쟁이 열어젖힌 민주주의 공간 속에서 진행됐다. 거대한 대중 투쟁 덕분에 군부독재 시절에 철저하게 억눌려 있던 일들을 상상하고 현실화할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노태우 정부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빌미 삼아 ‘공안정국’을 형성해 노동자·민중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안公安의 사전적 뜻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가 편안히 유지되는 상태”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반화된 탄압 물결을 뜻한다. 그래서 ‘공안정국’은 특정 단체나 특정 운동 등을 넘어 노동계급 운동과 좌파 운동 전반을 탄압하는 정치 상황을 가리킨다.
6 ‘공안정국’이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9년 3월 30일 노태우 정부는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128일 파업 투쟁’)에 ‘아침이슬’이라는 작전명으로 경찰력을 전격 투입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88년 12월 12일부터 파업을 이어 오던 중이었다(1989년 4월 18일까지 이어졌다).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반동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이 저항했다. 1990년 4월에 KBS 노동자들이 정권의 방송 장악 시도에 반대해 파업했다. 노태우 정부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 서기원을 KBS의 관제 사장으로 임명했다. 경찰은 사장 출근을 저지하던 KBS 노동자 117명을 연행했다.
1990년 4월 25일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골리앗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부는 병력 1만 5000명을 투입해 육해공 상륙작전을 벌였다. 파업은 거리 시위로 번졌다. 5월 10일 골리앗 농성이 해제되면서 파업이 종료됐다.
1990년 10월에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차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정부는 파출소에 M16 소총을 지급해 화염병 투척자에게 발포할 수 있도록 했다.(이 조처의 후과로 1991년 9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한국원 씨가 학생 시위 해산을 위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또, ‘군기 순찰 강화’라는 명목으로 수도방위사령부와 수도권 4개 부대 소속 헌병 870여 명을 M16으로 무장시켜 민생치안 업무를 지원케 했다.
한편, 노태우 정부는 정계 개편을 통해 통치 기반의 취약성을 메우고자 했다. 노태우는 1987년 12월 대선에서 총 유효표의 30퍼센트를 득표했다. 그만큼 통치 기반이 약했다. 노태우는 일부 야당들과 합당해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1990년 1월 민주정의당(여당),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출범했다. 이름하여 “3당 합당”이다. 그 결과 국회 세력관계도 바뀌게 됐다. 1988년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는데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내각제로 개헌해 권위주의 세력의 장기 집권을 꾀했다. 내각제 개헌은 3당 합당의 합의 조건이기도 했다.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꾸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6월항쟁의 성과물인 대통령 직선제를 폐기하는 것으로 이해돼 반발이 컸다. 그런데 노태우는 김영삼이 아니라 노재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노재봉은 군부와 연결돼 있는 극우파였다. 1991년 1월에 노태우는 노재봉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노재봉 내각은 ‘공안’ 내각이었다. 이 때문에 집권당 내부에 차기 권좌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존재했고, 이 갈등은 5월 투쟁의 중요한 정치적 요소였다.
‘3저 호황’이 끝나고
노태우 정부의 반동 공세 강화는 한국 경제의 점증하는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을 단속하려는 목적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던 ‘3저 호황’이 1989년에 끝나고 한국 경제에 불황이 찾아 오기 시작했다. 3저 호황은 1986∼1988년에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 덕분에 한국 경제가 연 12퍼센트 성장하고 큰 폭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989년 3저 호황이 끝나고 불황의 전조로 소비자 물가가 폭등했다. 1990년대 물가인상률은 9.5퍼센트나 됐다.
‘전세 대란’이 일어났다. 1990년 봄에 서울 천호동 반半지하 4평짜리 단칸방에서 세 들어 살던 40대 부부와 7살·8살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치솟는 전셋값을 마련하지 못해 동반 자살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유서가 발견됐다. 그 뒤 두 달 동안 세입자 17명이 목숨을 끊었다. 1986년 말에서 1990년 초까지 전국 도시 지역 집값은 47.3퍼센트, 전셋값은 82.2퍼센트 폭등했다.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게 수서 비리였다. 서울시가 정치권의 압력과 한보그룹의 로비를 받아 한보그룹 등에 택지 개발 특혜를 준 사건이 1991년 1월에 폭로됐다. 3월 서울역에서 1만 명이 거리 시위를 벌이며 비리에 항의했다. 또, 두산전자가 방류한 화학물질 페놀이 상수원으로 흘러 들어가 영남 지역의 수돗물을 오염시킨 사건도 대중의 불만을 자극했다.
뜨거웠던 5월의 거리
이렇듯 노태우가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동 공세에 나선 것은 불안정한 경세 상황에 대한 자본가들의 우려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공할 국가 폭력에 맞서 저항했다. 국가 폭력은 한국 자본주의에 내재한 속성이었다.
강경대가 타살된 다음 날인 4월 27일 연세대에서 열린 ‘강경대 폭력 살인 규탄 백만학도 결의대회’에 학생 1만여 명이 참가했다. 5월 1일을 기점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됐다. 5월 9일 전국적으로 50만 명이 거리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이 동맹 휴업 등을 통해 거리로 나서면서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학생들의 분노는 당시 유행했던 한 구호에 잘 드러난다. “속 태우고 애 태우는 노태우를 불태우자.” 학생들의 분노는 즉각 행동으로 표출됐다.
학생들의 투쟁은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노동조합들이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6월항쟁 당시 시민으로 참가했던 노동자들이 1991년 5월 투쟁에서는 노동조합 깃발을 들고 참가했다. 이것은 전진이었다.
5월 6일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의 의문사도 노동자 투쟁에 기름을 끼얹었다. 박 위원장은 대우조선 파업 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고문을 받다가 부상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의문의 실족사를 했다. 백골단은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난입해 박 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했다. 경찰은 강제 부검을 실시해 ‘투신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박창수 의문사’는 노태우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공세를 취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공격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실질임금이 대폭 상승했는데, 노태우 정부는 임금을 한 자릿수로 묶는 임금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투쟁에도 노태우 정부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자기 몸을 불사르거나 내던져 투쟁을 잇고자 하는 시도들이 잇따랐다. 5월 투쟁 기간에 10명이 분신 자살을 했고, 1명이 투신 자살을 했다. 그리고 2명이 경찰에 살해됐다. 지배자들은 ‘분신 모의’, ‘인명 경시’라고 맹비난했다. 시인 김지하와 당시 서강대학교 총장 박홍(예수회 신부)이 지배자들의 역습을 돕는 망나니 역할을 했다. 박정희 유신 정권에 맞서다 구속되기도 했던 김지하가 〈조선일보〉(5월 5일치)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썼다. 박홍은 5월 8일에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며 전형적인 마녀사냥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자 언론들은 분신 자살에 배후가 있다고 보도하고, 검찰과 경찰은 대대적인 공안 몰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자살은 개인들에게 단 한 번밖에 없는 결단이다. 그리고 그 결단은 누군가에 의한 교사·사주·선동·지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분신 자살 항의자들은 모두 분신이 투쟁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인명을 너무도 중시했기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애통한 진실을 말하면, 하나의 투쟁 방법으로서 분신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법이라는 점이다. 분신은 자발성에 대한 극단적인 신뢰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5월 투쟁에서 진정 부재했던 것은 자발적 분노와 행동을 정치적으로 자의식적인 운동으로 승화시켜 줄 정치 지도부였다.(5월 투쟁 지도부의 정치는 뒤에서 다루겠다.)
투쟁이 퇴조하다
국가 체계의 동요 수준이나 노동계급의 계급적 동원 상태를 보건대 1991년 5월 정세는 전혀 혁명적인 상황이 아니었지만, 노태우 정부는 대중 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일정한 양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5월 27일 노재봉이 국무총리에서 사퇴했고, 그 다음 날 노태우는 내각제 포기를 선언했다.
이것은 운동의 압력에 밀린 결과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여권은 언론을 통해 노재봉의 퇴진을 미리부터 기정사실화해 놓은 채 실제로는 퇴진시키지 않고 적당한 때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투쟁의 퇴조가 확연해지던 시점에 노재봉을 물러나게 했다. 이렇듯 지배자들은 투쟁이 진정 국면에 들어갈 때 양보 조처를 취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상승세일 때 양보 조처를 취했다가는 오히려 투쟁을 더욱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재봉의 사퇴는 군부 세력의 반동 시도가 저지됐다는 뜻이다. 이것이 5월 투쟁의 역사적 의의다. 그와 동시에, 차기 통치자를 꿈꾸던 김영삼의 경쟁자가 제거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영삼은 강경대 타살 초기부터 야권의 총리 퇴진 요구를 재빨리 수용해 자기 당(민자당)에 촉구했다. 이처럼 5월 투쟁은 처음부터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과 결합돼 전개됐다. 이때 지배계급을 분열시키는 쟁점들이 노동계급의 요구들과 결합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지배계급의 일부를 지지·강화해 주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죽 쑤어 개 준다’는 말처럼 말이다.
노재봉이 사퇴하자 전대협은 빠르게 투쟁의 중심 무대에서 벗어났다. 6월 1일 (5월 투쟁의 중심 무대였던 서울이 아니라) 부산대학교에서 전대협 출범식을 치렀다.
6월 3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원식 총리서리 밀가루 마사지 사건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분노를 자생적으로 표출한 행동이었다. 정원식은 노재봉의 후임이자 문교부 장관 시절에 전교조를 탄압하며 교사 1500명을 해임·파면한 인사였다. 지배자들은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적 범죄’라며 학생들을 공격했다. 이 사건은 5월 투쟁의 패배를 확인 사살한 것이었다.
6월 25일 광역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이 압승했다. 투표율은 58퍼센트였고, 그중 20대 투표율은 48퍼센트에 그쳤다. 5월 투쟁 한복판에서 진작부터 선거 심판론이 제기됐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선거를 치른 6월은 투쟁하던 5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월 투쟁이 패배로 끝나자 집단적이고 투쟁적인 해결책을 지향하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투쟁보다 선거를 중시하는 선거주의 전략으로는 우익적인 집권당을 패퇴시킬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줬다.
5월 투쟁의 지도부
당시 운동 지도부는 ‘고 강경대 씨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 범국민 대책회의’였다. 상임대표가 8명이었는데,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신민주연합당(김대중의 당), 민주당(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 잔류파), 종교계, 노동계로 이뤄졌다. 계급적 이해관계가 분화되지 않은 채 혼재해 있는 지도부 구성이었다.
김대중의 신민당은 6월항쟁 때보다 훨씬 더 별 볼 일 없는 구실을 했다. 6월항쟁 덕분에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는 정치 공간이 마련되자, 대중 투쟁의 필요성을 전보다 더 못 느끼게 됐고 그래서 대중 행동 참여를 극구 피하려고 했다. 신민당은 “책임 있는 원내 정당”, “노태우는 선출된 대통령이기 때문에 퇴진은 안 된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를 떠들었다.
그런데 당시 학생 투사들 다수가 지지했던 혁명적 사상의 본질, 즉 스탈린주의 정치가 문제의 일부가 됐다. 이들은 민주정부 수립을 지지하면서 부르주아 야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했다.
5월 투쟁의 전위인 학생들은 생산 지점에서의 노동자 투쟁이 5월 투쟁에서 실종된 고리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치 폭로와 선동에 주력했다. 어떤 학생 좌파 세력은 노태우 퇴진만을 요구하기도 했고, 또 다른 학생 좌파 세력은 그에 덧붙여 “임시민주정부”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들 모두 노동계급을 생산 지점으로부터 동원해 내는 경제적 선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든 수많은 배너 중에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거나 호소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지도부는 하루 총파업을 호소했다. 5월 9일 98개 노조에서 4만 8000명이 동시다발 시한부 파업을 했고, 360개 노조에서 18만 명이 중식 집회, 잔업 거부, 동시 퇴근을 했다. 이것은 정치 파업이었다. 그런데 당시 노동계급의 동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경제 파업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구체적 조건을 살펴보면, 노동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힘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부 퇴진 투쟁에 진지하게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즉각적 요구를 둘러싼 파업을 하고, 이 투쟁이 학생들의 거리 시위와 결합되도록 해야 했다.
당시 좌파 활동가들은 대부분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 파업론에서 역설했던 바, 즉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상호 작용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탈린주의 전통이 룩셈부크르의 사상을 지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가인상 집값앙등/생존권을 압살하는/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를 타도하자’(스탈린주의자들의 슬로건)라거나, ‘이천만 노동자 다 죽이는 노태우-자본가 권력 분쇄하자’(아나코-신디컬리스트들의 슬로건) 같은 슬로건을 내걸며 정치와 경제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려 했다.
오늘을 위한 교훈
5월 투쟁이 정치 제도의 변화(투표 제도나 선거 규칙 같은)를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투쟁이 성과가 없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선거주의적 단견이다. 오히려 5월 투쟁은 혹독한 국가 폭력에 맞서 저항할 수 있고, 군부 반동으로의 회귀를 저지할 동력이 대중 투쟁에 있음을 보여 줬다. 다시 말해, 형식적·제도적 민주화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대중의 투쟁이다.
그럼에도 5월 투쟁이 당시 투쟁 참가자들에게 패배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은 그 투쟁 자체의 패배 때문이 아니다. 1991년 5월 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1995년에 학생들의 투쟁이 다시 일어나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켰다. 이런 학생 투쟁은 1996년 12월∼1997년 1월에 전개된 민주노총의 노동법 개악 반대 파업으로 가는 정치적 자극제가 됐다.
학생 투사들에게 진정한 트라우마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몰락이었다. 5월 투쟁이 벌어지던 때, 소련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1989년 3월 동독 인민의 투쟁에서 시작된 동유럽의 대변동이 스탈린주의 정권들의 연쇄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들과 동일시하던 좌파에게는 정치적 좌표가 사라진 것이었다. 좌파의 이런 정치적 방황에 결정타를 먹인 것이 바로 5월 투쟁의 패배였다. 마침내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로 좌파는 정치적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투쟁의 패배는 극복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대안의 붕괴는 운동 전망을 상실케 한다. 학생 활동가 대다수는 단순히 운동을 그만뒀다. 남은 학생 좌파 중 다수는 유러코뮤니즘이나 사회민주주의 같은 개혁주의 정치로 이동했고 일부는 자율주의로도 향했다. 그러나 비록 소수였어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견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트로츠키주의에서 대안을 발견했다.
5월 투쟁이 오늘날에 주는 교훈은 사회를 근본으로 변화시킬 혁명적 정치 대안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다. 1991년 5월 투쟁 때 많은 학생 투사들이 정열적이고 헌신적으로 그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많은 학생 투사들은, 위에서 살펴봤듯이, 대중 운동을 급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스탈린주의 정치가 그들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의 부담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졌다. 물론 혁명가들이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데서 직면하는 장애물은 스탈린주의만 있는 게 아니다. 혁명가들은 이러저러한 개혁주의 사상·조직·운동과 협력도 하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결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투쟁해야 할 이유와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투쟁들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사상과 정치를 제공할 수 있는 단단하고 규모 있는 혁명적 조직을 참을성 있게 건설해 나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5월 투쟁 동안 전적으로 결여돼 있었던 요소였고, 오늘날 우리가 5월 투쟁을 “잊혀진 기억”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주
참고 문헌
김연수 2007,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문학동네.
김인식 2019a, ‘역사를 기억하며: 1989년 남북 자유왕래를 향한 투쟁’, 〈노동자 연대〉 286호, 5월 15일.
김인식 2019b, ‘[역사를 기억하며] 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노동자 투쟁이 (학생의 지지와 함께) 정치적이 되던 때’, 〈노동자 연대〉 288호, 5월 30일.
장석준 2021, ‘‘5월 투쟁’ 30주년 6공화국을 돌아본다’, 〈한겨레〉 4월 1일.
정환보·정희완 2011, ‘[강경대 사망 20주기]죽음 권하는 사회서 젊은이들 ‘신음’ 여전’, 〈경향신문〉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