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과 함께 가짜 뉴스와 음모론도 유행하고 있다. “표백제를 마시거나 소독제를 주사하면 감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 “감염병이 무선 인터넷(5G)을 통해 전파된다,” “백신은 인체에 컴퓨터 마이크로칩을 심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팬데믹은 실존하지 않고 조작된 거짓이다” 등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특히 미국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만들어 낸 큐어넌(QAnon) 음모론은 서구 세계에서 놀랄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큐어넌은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 민주당 주요 인사들과 유대인 억만장자들이 사실은 국제적인 음모 집단의 하수인이며, 코로나19는 그들이 전 세계 인구 수를 조절하려고 퍼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지의 극우 세력들은 이런 음모론을 이용해서 물리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 등을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거나 팬데믹을 이주민 탓으로 돌리는 인종차별적 선동을 했다.
유행하는 또 다른 코로나 음모론은 빌 게이츠 등 부자들과 다국적 제약회사에 관한 것이다. 이들이 각국 정부나 세계보건기구와 비밀 커넥션을 맺고 백신 개발로 이익을 얻으려고 팬데믹을 고의적으로 조장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프랑스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홀드업〉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상은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에서 게시가 금지됐지만 각종 대안 사이트를 통해 6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홀드업〉은 음모론이 우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줬다. 이 영화는 프랑스 정부의 방역 실책과 다국적 제약회사의 횡포를 비판하면서 음모론을 동원한다.(이 음모론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한국에서도 목수정 작가(프랑스에 거주 중)가 이 영화를 국내에 여러 차례 긍정적으로 소개했고, 지난 3월에는 백신 음모론을 비판하는 과학자 김우재 씨와 〈한겨레〉 지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음모와 음모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음모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음모론의 생명력은 놀라울 정도로 질기다. 〈다빈치코드〉처럼 책이나 영화로 출판돼 대중의 흥미를 끄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음모론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모론이 인기를 끄는 첫 번째 이유는 기존 사회 질서에 의문과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아주 단순한 설명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존 사회 시스템이 유일하고 최선이며 잘 작동하고 있다는 말을 미디어·학교·정부 기구 등으로부터 매일같이 듣는다. 그러나 삶의 경험을 통해 이런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사회에는 ‘상식’대로 작동하지 않는 일들 투성이고 무엇보다 (코로나19와 경제 위기처럼) 대다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서 비밀스러운 힘이 이 사회의 정상적인 작동을 막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 음모론 중에서도 가장 널리 유포되고 오래 이어진 것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빌더버그클럽 등 비밀조직의 세계 통치설이다. 이런 종류의 음모론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충격적이고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음험한 비밀 엘리트 음모 집단의 소행으로 설명하려 한다.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는 두 번째 이유이자 더 결정적인 이유는 실제로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온갖 음모와 조작, 거짓말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0년대 초 미국은 이라크 침략 명분으로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들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과 그 여파로 수많은 중동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 유엔 무기사찰단장 한스 블릭스는 전쟁 전에 이라크가 1만 리터에 해당하는 탄저균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몇 년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분명히 대량살상무기가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한국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다. 군사 독재 정권은 언론을 통제하며 음모와 조작을 일삼았다. 1980년 5월 전두환 정권은 항쟁이 일어난 광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면서도 언론 보도를 철저히 통제해 광주 항쟁을 폭동으로 매도했다. 이 때문에 광주 외부에서 광주 항쟁의 진실을 온전히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민간 정부가 등장한 뒤에도 권력자들의 음모는 계속됐다. 1996년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4월 총선을 앞두고 북한 측에 판문점 근처에서 총격을 해달라고 몰래 요청한 ‘총풍’ 사건은 엄청난 충격을 줬다. 으르렁대던 남북한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한통속이 돼 대중을 속인다는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상당히 자리를 잡은 뒤에도 부르주아 정치인, 경찰, 국정원 등의 크고 작은 선거 관련 조작 시도는 수두룩하게 많았다. 2011년 재보궐 선거 때 선거관리위원회에 가해진 디도스 공격, 2012년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 2017년 대선 때 민주당 인사들이 연루된 드루킹 여론 조작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외에도 음모와 조작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중요한 결정들이 막후에서 내려진다. 이 과정에서 흔히 뇌물과 특혜 등 부정부패가 벌어진다. 〈내부자들〉, 〈더킹〉 등 고위 정치인과 검찰·경찰 관료들이 막후에서 비리 커넥션을 맺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대중을 속이는 내용의 영화들이 흥행하는 것도 이런 설정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편, 시장과 기업의 세계도 음모 천지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 기업들은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물질을 ‘살균제’로 둔갑시켰다. 전체 피해자는 현재까지 49만~56만 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무려 1만 4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가 지난해 7월에 발표한 결과인데, 정부가 기존에 발표한 것의 10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부조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현실을 수용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이것이 음모론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토양이다.
음모론의 접근법: 확증편향
권력자들이 어떤 불의한 사건의 진실을 숨기려 할 때, 운동은 불가피하게 의혹 제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할 때 지배자들을 상대로 의혹과 가설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혹자는 음모론이 비논리적이고 공상적인 난점이 있긴 해도 권력자들을 향한 의혹 제기를 활성화시킨다는 점에서 순기능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음모와 음모론은 구별해야 한다. 음모론은 지배자들이 음모를 꾸미거나 이용한다는 사실에서 더 나아가, 음모 자체가 사회와 역사의 핵심 동력이라고 보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사건을 조사하거나 주장을 논증하기도 전에 미리 결론을 정해 둔다는 것이다. 절대 권력의 사악한 음모 집단이 장막 뒤에서 꾸민 일이라는 결론 말이다.
음모론은 정해진 결론에 증거와 가설을 끼워 맞추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관을 만들어 나간다. 다음의 예화를 보자. 제시된 상황은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환자와 의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의사: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지요?
환자: 그렇죠. 어떻게 죽은 사람이 피를 흘려요.
의사: 그러면 우리 모두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오는지 확인해 봅시다. (바늘로 손가락을 찌른다)
의사: 자 보세요.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환자: 예, 선생님 제가 틀렸네요.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리네요.
이렇게 음모론은 자신에게 반대되는 가설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태도를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확증편향은 음모론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방대한 자료를 긁어 모은 일부 음모론들은 그것만 보면 얼핏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만, 다른 정황이나 반론, 반증들을 몇 가지만 살펴봐도 금세 설득력을 잃어 버린다.
예컨대, 버뮤다 삼각수역에서 배나 비행기가 자꾸 사라진다는 의혹에 대해, 유령이 출몰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우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다른 더 간단하고도 자연스러운 설명에 비하면 개연성이 훨씬 떨어진다. 버뮤다 삼각수역은 세계에서 배와 비행기가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곳 중 하나인데다 열대성 기후 때문에 악천후가 심각해 사고가 잦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이다. 대표적인 세월호 음모론자인 김어준은 세월호에서 누군가 무거운 닻을 떨어뜨려 배를 전복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배후에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것이라고 암시한 것이다. 그런데 7000톤급 배를 뒤집을 만큼 무겁고 큰 닻을 어떻게 들키지 않고 내릴 수 있는지는 제쳐두더라도, 만약 박근혜가 사람들을 속여 정보 기관의 대선 개입에 대한 공분을 피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어째서 더 큰 공분과 충격을 낳은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을까?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 정부가 보인 무능, 무관심, 무책임이 음모의 소산이라면, 메르스 참사나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 드러난 무능, 무관심, 무책임도 모두 음모의 소산으로 봐야 할까? 박근혜가 완벽한 비밀 작전으로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왜 결국엔 퇴진 운동에 밀려 쫓겨났으며 지금은 철창에 갇힌 신세가 됐을까?
세월호 참사와 국정원 대선 개입을 연관 짓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상상에 가까운 추측이다. 물론 세월호 선체나 선사 직원들의 통화 기록 등에서 국정원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선 개입 쟁점 시선 돌리기보다 훨씬 더 개연성 있는 국정원 연루 의혹 가설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근거해 찾을 수 있다. 즉, 세월호의 애초 탄생 목적이 제주 해군기지로 가는 철근을 수송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국정원이 세월호 관리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어준은 세월호 외에도 문재인 정부 하에서 여당을 옹호하려고 음모론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민주당 인사들 관련 미투,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윤미향 민주당 의원 폭로 등 문재인 정부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김어준은 그 배후에 보수 야당을 지지하는 음험한 세력이 있다는 식으로 음모론을 펴며 (민주당 대 우파 야당 식의) 진영 논리를 강화했다.
음모론의 세계관: 비관주의
언뜻 보면 음모론은 기성 질서에 매우 비판적인 듯하다. 사회가 아주 부조리하다고 개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모론이 상정하는 ‘정상 사회’의 기준은 사실 자본주의적 상식에 근거하고 있다. 또, 그들은 지배계급 전체가 아니라 극소수 음모 집단만을 겨냥해 비판한다. 한 줌의 악의 무리를 제거하면 사회가 비로소 정상적이고 이치에 맞게 돌아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급진적인 버전의 음모론조차 기성 질서를 진정으로 위협하지 않는 보수적인 세계관이다.
또, 음모론은 세계가 극소수 지배자들이 입력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인다고 가정한다. 그 지배자들이 우리의 머릿속까지 조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맞다면 우리는 백날 싸워 봐야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음모론이 가정하는 세계에서는 평범한 대중이 저항을 벌이고, 그 저항을 통해 사회를 바꿔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무기력하고 비관적인 세계관이다.
그러나 이런 비관주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지배자들은 강력한 지배 수단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했던 프랑스의 팬데믹 음모론 다큐멘터리 〈홀드업〉을 살펴보자. 〈홀드업〉은 “제약회사들이 약을 팔기 위해 병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또, ‘프랑스 정부가 국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독감의 일종일 뿐인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대중의 공포를 조장했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물론 이윤에 눈먼 다국적 제약회사의 횡포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전 세계 자본가들의 이윤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팬데믹이 제약회사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자본가들은 전체 자본가 계급의 일부다. 사실 가장 강력한 자본도 아니다. 지난해 전 세계 상위 70개 기업들 중에 제약회사는 3개에 불과했고 가장 상위에 오른 제약회사(존슨앤존슨)조차 34위에 머물렀다. 다시 말해, 제약회사가 소비자를 우롱할 힘이 있을지 몰라도, 제약회사만큼이나 자기 이윤에 민감한 전체 자본가들까지 속일 힘은 없다.
각국 정부가 대중 통제를 강화하려고 팬데믹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팬데믹 등 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각국 정부들은 하나같이 대중의 건강을 지키는 제대로 된 방역이나 안전 대처에는 무능한 반면 대중을 감시하고 저항을 억누르는 일에는 발 빠르게 나섰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가 경찰력 강화 등의 명분을 얻고자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각국 통치자들의 입장에서는 팬데믹으로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더 많다. 지배자들은 방역과 경제 위기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처해 오락가락하고 모순된 지침을 내리기 일쑤였고,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팬데믹 시기에 주요 국가 권력자들의 통치 정당성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방역 당국과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주류 언론의 권위가 추락했다.
사회의 진정한 동역학
음모론은 사회관계에서 핵심적인 두 관계를 잘못 이해한다. 첫째는 지배자들이 대중과 맺는 관계(즉,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고 둘째는 지배자들끼리 서로 맺는 관계다.
음모론의 세계는 속이는 자들과 속는 자들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의 근본적 분단선이자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바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 관계다.
소수인 자본가들이 사회에서 압도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에게 경제적·정치적 우위를 가지는 이유는 그들이 그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에게는 오직 일할 능력, 즉 노동력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오직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판매해야만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고 자신의 임금은 물론,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 하루에 몇 시간 노동할지를 통제할 권한이 없다.
이러한 경제적 지배에 더해, 지배계급은 두 가지의 핵심적인 지배 수단을 더 갖고 있다. 하나는 바로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 국가의 무장력이다. 만약 국가가 각종 수단으로 부자들의 사유재산권을 보호하고 시장 질서를 강제하지 않는다면 현 사회의 질서는 한 시간도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한편, 지배계급은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사람들이 현존 질서에 동의하게 만든다. 사장과 노동자는 한 가족이라거나, 국가는 모든 국민 앞에 평등하다거나,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단결할 수 없다거나, 여성·성소수자·흑인 등이 차별받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거나 등등. 이런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언론 조작만이 아니라 가족, 학교, 미디어, 직장, 법과 제도 등 여러 수단을 통해 공공연하고 체계적으로 전 사회에 유포된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시대에서도 지배적 사상은 곧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인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인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이 결국 정신적 생산수단도 관리하며, 그리하여 정신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그 지배 사상에 종속된다.”
한편, 음모론은 한 줌의 음모적 권력자들이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은밀한 이익을 도모한다고 본다. 물론 권력자들이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커넥션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대중이 알 수 없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커넥션은 지배계급이 더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이지 원인이 아니다. 자본가 계급은 직접적인 커넥션 이전에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다
또, 자본가들은 서로 똘똘 뭉쳐 있기만 한 단일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경쟁한다. 마치 도둑들이 절도 행각을 함께 벌이는 데서는 합심하다가 절도에 성공한 뒤에는 서로 싸우듯이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을 일컬어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말했다.
지배계급이 근본에서 서로 분열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들이 결코 배후에서 체제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무한 경쟁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더 많은 기계, 더 최신의 기술에 점점 더 많은 돈을 투자하게 만든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찾아 오면 그들은 자신들이 투자한 것에 비해 충분한 이윤을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규모 경제·정치 위기는 사회의 밑바닥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자본가들조차 두려움에 빠트린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싸우는 형제들”은 국내외 경쟁 자본을 희생시켜 위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지배계급 내 분파들은 책임을 전가하려고 폭로전을 벌이기도 한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
마르크스는 계급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통제할 힘을 갖지 못하고, 이로 인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과 단결의 잠재력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통제력 결여, 무기력감을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전지전능한 엘리트 음모 집단을 상정하는 음모론은 이러한 무기력감의 거울 이미지이자 소외되고 좌절한 사람들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음모론의 세계관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조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지배자들은 압도적인 경제적·정치적 권력과 이데올로기 수단을 쥐고 있지만 결코 노동자들의 머릿속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자본가들은 결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사랑하게, 자본주의에 열광하게 만들지 못한다. 기껏해야 단결할 수 없다고, 이길 수 없다고 체념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1915년에 쓴 글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두 가지 요인을 지적했다. 첫째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빠질 때다. 둘째는 지배계급 역시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는 경우다. 이런 두 조건이 만나 혁명이 분출한 경험은 역사에서 거듭거듭 벌어져 왔다.
20세기만 봐도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1918~1923년 독일, 1936년 스페인, 1956년 헝가리, 1974~1975년 포르투갈, 1989~90년 동유럽, 2011년 이집트 등 자본주의 역사에서 혁명은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도 군사 독재 정권의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사람들은 광주 항쟁의 진실을 알리려 했고 끝내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독재 정권을 위기에 빠뜨렸다.
지배계급의 권력과 그 사상은 대중이 수동화돼 있고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을 때 강화된다. 반대로 노동계급이 지배자들에 맞서 대규모 행동에 나설 때 지배적 사상은 약화되고 단결 투쟁의 자신감이 커질 수 있다. 비관과 수동성을 퍼트리는 음모론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일도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고양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