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두 개의 전쟁? *
제2차세계대전(1939~1945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혈낭자한 충돌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전쟁” 또는 정의로운 전쟁의 사례로 여겨졌고 지금도 그렇다. 아우슈비츠를 끝낸 전쟁, 정규군만의 전쟁이 아니라 파시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대중 운동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스에서는 네오나치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2012년 6월 총선에서 7퍼센트나 득표했지만, 아직도 민족해방전선EAM과 그 군사 조직인 민족인민해방군ELAS의 반反파시즘 레지스탕스 운동은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오늘날의 투쟁에 영감을 주고 있다. 이 시기는 역사 전쟁의 전장이기도 하다. “수정주의적인” “새 역사”를 표방하는 자들은 나치와 협력한 우파 부역자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면죄부를 주면서, “흑색 테러”와 “적색 테러”가 객관적으로 별로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어떤 역사가들은 그리스 좌파를 둘러싼 오해를 바로잡고 파시즘에 저항한 그들의 업적을 방어하려 한다.
그러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제2차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본다. 제2차세계대전은 1930년대 대불황의 압력으로 고조된 제국주의 경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레온 트로츠키의 분석이었다. 당시 제4인터내셔널 대열에 주로 결집해 있던 소수의 혁명적 세력들은 이런 분석으로 무장하고 유럽 나라들의 전쟁과 점령에 대응했다. 이들은 위기와 파시즘의 대안을 노동자 혁명으로 봤다. 그리고 엄청난 피를 흘려가면서도 국제주의와 혁명적 원칙을 지켰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분석한다면, 제2차세계대전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설명하면서도 전쟁에 휘말린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정치·투쟁·관점도 설득력 있게 종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도니 글럭스틴의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는 그런 종합을 시도한 책이다.[출판사는 저자의 성을 “글룩스타인”으로 표기했으나 저자 자신이 부르는 발음을 따라 “글럭스틴”으로 표기한다 — 옮긴이] 이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는데, 폴란드나 라트비아를 다룬 장이 그렇고 인도를 다룬 장도 그렇다.
“연합국” 정부들에게 이 전쟁은 민주주의나 반反파시즘과 아무 상관이 없었고 오로지 각국 지배계급의 이기적인 이해득실과 전략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고 글럭스틴은 역설한다. 사실, 이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1940년 10월 그리스가 영국 제국주의를 편들며 전쟁에 가담했을 때 그리스는 왕실·군부의 독재 체제였다. 당시 그리스를 통치한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정권은 파시스트 이탈리아, 나치 독일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메탁사스 정권은 “국가조합주의”를 표방하고,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국민청소년단을 창설하고, 모든 공식 행사에 파시스트식 경례를 도입했다.
평행 전쟁?
1 글럭스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글럭스틴은 제2차세계대전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 전쟁을 두 개의 전쟁, 즉 제국주의 전쟁과 인민 전쟁이 나란히 진행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변증법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제2차세계대전은 “대립물의 통일”이다.사회의 상이한 부문들이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고 상이하게 움직인다는 주장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런 차이가 저절로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의 독특한 점은 이런 긴장이 동일한 전쟁 내의 긴장이 아니라 평행 전쟁의 형태를 띠었다는 것이다. 2이 점이 제1차세계대전과 다른 점이라고 글럭스틴은 주장한다. “제1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과 나란히 진행되는 인민 전쟁을 낳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주의 전쟁을 멈추는 인민 봉기를 낳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우리가 목도한 것이 “대립물의 통일”이라면 그 대립물들을 통일시키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 전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글럭스틴처럼 이 전쟁의 본질이 제국주의 전쟁이면서 인민 전쟁이기도 하다고 답하는 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이런 순환 논리를 채택하면 제2차세계대전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었다는 시각을 수용하게 되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어쨌든 나치의 군사력을 분쇄한 것은 결국 미국의 폭격기와 소련의 탱크였고, 레지스탕스 전사들 중 압도 다수는 자신의 투쟁을 연합군의 노력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4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런 분석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글럭스틴은 책의 첫 장을 “스페인의 전주곡”에 할애한다. 그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2차세계대전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라면 그것은 1939년 폴란드가 아니라 그보다 3년 앞서 스페인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인민 전쟁을 수반하는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개념과 관련해 제기할 수 있는 한 가지 반론은 현대의 모든 제국주의 전쟁이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것으로 포장된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경험이 보여 주는 것은 제2차세계대전 때 모습을 드러낸 인민 전쟁 조류가 독립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연합국 정부들의 적대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5
나치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동기에 “독립적” 기원이 있다(이것은 글럭스틴이 라트비아를 다룬 장에서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듯이 나치 편에서 싸운 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글럭스틴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인민 전쟁의 시작은 1936년 스페인이 아니라 1934년 오스트리아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조직한 ‘방어동맹’이 비엔나와 린츠의 노동계급 지구에서 우익 무장 조직인 보국단과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맞서 싸웠을 때 말이다. 게다가 여기서 멈출 이유가 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 1922년 이탈리아의 노동자 결사대 ‘아르디티 델포폴로’가 활약한 파르마시市에서 울린 총성을 그 기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의 경험”은 매우 다른 것을 보여 줬다. 파시즘과 전쟁의 대안이 존재했으며 그것은 노동자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전주곡”이라기보다는 “종결부”(에필로그)에 가깝다.
마지못해 전쟁을 벌이는 전쟁광들?
글럭스틴의 책을 읽으면 “민주주의” 나라 지배계급들은 별로 전쟁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글럭스틴은 프랑스 지배계급이 그랬다고 한다. 이는 오랫동안 좌파 역사가들과 논평가들이 주장해 온 바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프랑스 지배자들이 독일보다 인민전선을 두려워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1939년 9월이 되기 한참 전에 이미 인민전선은 시체였고 노동자 운동이 패배했다(1938년 11월 30일 총파업의 패배가 그 시기의 종지부였다)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 지배계급이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결의로 전쟁에 임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장기화되는 유혈 사태로 프랑스의 강대국 지위가 더 쇠퇴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1938년 뮌헨 협정을 맺은 것이다. 동시에 달라디에 정부는 노동계급이 인민전선 시기에 거둔 성과들을 최종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6 사실, 프랑스 장성들은 프랑스 북부의 참호가 아니라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탁 트인 지형에서 결정적 전투를 벌이려 했다. 그래서 모든 정예·차량·기갑 부대를 국경 근처에 집중 배치했던 것이다. 마지노선은 주요 전선으로 삼으려고 구축한 것이 아니라, 튼튼한 방벽을 세우고 병력을 다른 지역에 투입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마침내 당도했을 때 독일군은 “섬뜩하리만치 쉽사리 장애물을 극복”한 게 아니었다. 스당 지역에는 애초에 장애물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7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엄밀한 의미의 전격전이라기보다는, 적의 전력에서 가장 취약한 곳에 압도적 힘을 집중하라는 나폴레옹의 고전적 원칙을 구현한 전투였다.
“프랑스 장성들의 보수적인 자세”에 관한 언급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물론 그들의 태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최신 기술은 도외시한 채 제1차세계대전의 참호전 위주”로 사고했다거나 “항공기와 장갑차 대열에 기댄 히틀러의 군대가 섬뜩하리만치 쉽사리 장애물을 극복했다”는 진술은 완전히 틀렸다. 프랑스 제국주의가 이렇게 “프랑스 침공”에서 패배하고 나서야 프랑스 국가 운영자들은 나치와 협력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글럭스틴이 암시하는 이유들 때문은 아니다. 전쟁으로 이어지는 몇 달 동안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방향 감각 상실, 냉담함, 냉소주의가 만연했지, “인민 전쟁”에 대한 열의가 타오르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파시스트들을 혐오했다. 그러나 기꺼이 전쟁에 참가해 목숨을 내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무엇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겠는가? 글럭스틴은 프랑스 공산당PCF이 1938년 뮌헨 협정에 반대하며 내놓은 입장을 긍정적으로 인용한 다음, 그 후 [프랑스가 함락됐을 때] 프랑스 공산당이 누가 봐도 비열하게 “독일 제국주의”를 “일시적 동맹”으로 환영한 것을 비판한다. 마치 1938년 공산당의 입장이 어떤 이유에서든 “나은 것”이었다는 듯 말이다.프랑스가 패배한 이유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려면 트로츠키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노망난 원수 패탱의 정권은 제국주의 쇠락기의 노망난 보나파르티즘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 정권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오랜 급진화가 1936년 6월의 폭발로 이어졌지만 혁명적 출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그리고 “인민전선”이라는 반동적 협잡이 노동계급을 속이고 그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과 집단 안보를 지지하는 선전이 5년 동안 이어지고, 그 후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히틀러와 손을 잡자, 프랑스 노동계급은 허를 찔렸다. 전쟁은 공포에 휩싸인 방향 감각 상실, 수동적 패배주의, 더 정확히 말하면 절망적 무관심을 자아냈다. 이런 상황들이 결합돼 처음에는 군사적 재앙이 벌어지고 그런 다음에는 썩어 빠진 패탱 정권이 등장했던 것이다. 9
세계 지배를 위한 전쟁
10 그러나 ‘인도를 떠나라’ 운동에 참가한 수많은 인도인들은 어떠한가? 어째서 글럭스틴은 1940년대 중국 혁명의 복잡성을 전혀 다루지 않는가? 어째서 두 가지 전쟁만이 나란히 진행됐다고 하는가? 에르네스트 만델은 제2차세계대전을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전쟁이 결합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그중 하나는 “불의한” 전쟁이고 나머지 넷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불의한 전쟁은 세계 지배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전쟁이고, 나머지 넷은 소련을 방어하는 전쟁, 중국 인민의 투쟁, 아시아의 민족해방 전쟁, 파시즘 점령 기간 유럽에서 일어난 투쟁이라는 것이다. 11 만델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지만, 적어도 제2차세계대전의 복잡성을 보여 준다는 장점이 있다. 글럭스틴은 만델보다 더 단순한 설명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난제를 가까스로 피한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글럭스틴은 파시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반대가 인민 전쟁을 추동하는 힘이었다고 시사하는 듯하다. 유럽과, 정도는 덜하지만 북아메리카 노동계급 운동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타당할지도 모른다. 살해당하기 얼마 전에 트로츠키는 미국 노동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히틀러를 마음속 깊이 증오하며 이 증오는 계급적 정서와 뒤죽박죽돼 있다. 그들은 도적떼가 승리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12 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이 (독일 침략자들에 맞선) 애국 전쟁, (파시스트 정권에 맞선) 내전, (20년 동안 파시즘을 지지한 산업 자본가와 지주에 맞선) 계급 전쟁의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해는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모순된 의식”을 탐구하고, 기존의 사회 질서가 혁명적 도전을 받는 동안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서 상이한 요소들이 결합하는 복잡한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사고와 정서가 어떠했든 간에,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현실이 매우 무자비하게 당시 상황을 규정했다. 1944년 11월 연합국은 앞으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새 작전은 없을 것이며 유격대원들은 무기를 놓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발표했다. 영국과 미국 장성들이 이렇게 말한 뒤 유격대원들은 독일의 계속된 공격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클라우디오 파보네13 이런 폭격에도 레지스탕스나 도시 주민들은 연합국의 대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폭격은 “인민 전쟁”에 상당한 장애물이 됐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1944년 5월 24일 마르세유에서 일어난 일이다. 식량 부족에 항의해 여성들이 일으킨 시위가 총파업을 촉발했다. 그러나 이틀 후 연합국의 폭격으로 1700명이 사망하면서 총파업은 와해됐다. 두 달 후인 7월 14일 공산당 레지스탕스 조직이 총파업을 호소했지만 도시는 조용했다.14 ‘성공적인 운동’에 관해 글럭스틴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글럭스틴은 이렇게 주장한다. “한편, 인민 전쟁은 성공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했던 식민지 해방 투쟁이나, 복지 국가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프랑스 제국주의가 인민 전쟁을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민 전쟁의 여파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레지스탕스 투사였던 스테판 에셀의 말을 빌리면, 광범한 경제·복지·교육 개혁을 포함한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CNR 강령은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과 가치를 제시했다.” 2010년에 에셀은, 그 강령이 채택된 지 65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가 일어나고 나서야 그 유산의 마지막 남은 흔적을 위협할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서구 유럽에서는 맞는 말이다. 1945년 이후 서구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컨센서스”가 우세해졌으며 오늘날 이를 위한 투쟁이 다시 한 번 벌어지고 있다. 15
16 유명한 도시 게릴라 부대인 FTP-MOI(의용유격대 이주노동자 조직) 17 대오에 속했던 공산당 계열 이주노동자들이 투쟁과 죽음으로 쟁취하려 한 것이 오늘날 프랑스 국가였다는 주장을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오만이고 이데올로기적 후퇴에 뒷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18
알제리인들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의 근간을 이룬 원칙에 관해 클럭스틴과 견해가 다를 것이다. 물론, 스테판 에셀은 여러 정의로운 대의를 옹호한 훌륭한 행적을 남긴 사람이지만(예를 들어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방어했다),오늘날 찬미의 대상이 되지만 언제나 그 뜻은 불분명한 전후 장기 호황기의 “사회민주주의 컨센서스”는 “인민 전쟁”의 영향과는 사뭇 다른 요인들로 생겨난 것이다. 사회적 “평화”(낮은 수준의 계급투쟁)와 정치적 무관심이 곧 “컨센서스”[합의]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수십 년에 걸쳐 노동조합이 약화됐고, 생활 수준이 경제 성장에 항상 뒤쳐졌으며, 공산당들은 정치적 고립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 1968년과 그 이후 파업으로 반격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따낼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
19 은 일본 점령군뿐 아니라 “자신들의” 지주들, 1946~1956년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정권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1943~1945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파시스트 사회공화국[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실각한 후 세운 나치 괴뢰 정부]과 독일군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 나치 점령 기간 그리스에서 활약한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 활동가들과 투사들, 티토의 빨치산, (전부는 아니지만) 프랑스 레지스탕스 상당수 등은 분명 처칠이나 루스벨트, 스탈린과 동기가 매우 달랐다. 동기만이 아니라 목표도 달랐다. 이탈리아 북부의 많은 노동자들, 어쩌면 다수의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는 ‘붉은 이탈리아’를 쟁취하고자 했을 것이다.(많은 이탈리아 공산당PCI 활동가들도 그랬을 것이다. 당 지도부는 이러한 “초좌파적” 생각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리스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 투사들의 목표는 “라오크라티아”[인민 권력]였는데, 이는 계급 불평등과 국가 탄압이 극심했던 전쟁 이전의 그리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단지 전시 유럽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필리핀의 후크발라합[인민항일군]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선, 평행 전쟁이라는 개념은 오해를 자아내기 쉽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다가오면서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휘하에서 활동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레지스탕스 군대인 프랑스국내군FFI은 프랑스 정규군으로 편입됐다. 그들을 지휘한 장교들은 레지스탕스는 물론, 심지어 드골이 이끄는 세력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스의 민족인민해방군도 스스로 영국 육군 중동사령부 휘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단지 “편의적 동거”가 아니었다. 이런 운동들에서 언제나 정치적으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한 공산당들은 이러한 “군사적·기술적 공조”(“종속”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를 “반파시즘”, “애국” 전쟁이라는 정치적 개념의 표현으로 여겼다. 게다가 이런 개념은 “전례”가 있다. 바로 1930년대의 계급 협력 노선인 인민전선이다. 그리고,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전략을 구사한 결과 혁명이 분쇄되고 프랑코가 최종 승리했다.
영웅적인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투쟁의 역사는 파업, 유격대 투쟁, 애국행동단[공산당의 레지스탕스 조직], 반란의 역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1944년 4월 “살레르노의 전환”과 1944년 12월 ‘로마 합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살레르노의 전환”이란, 이탈리아 공산당 총서기 팔미로 톨리아티가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이 엠마누엘 3세 하의 바돌리오 정부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을 말한다. ‘로마 합의’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 유격대는 연합군의 지시를 받게 됐고, 이탈리아가 해방된 후에 연합군에게 모든 무기를 넘기기로 했다. 그리스 민족해방전선과 민족인민해방군의 역사 또한 그리스 산악 지대의 “인민 권력”, 아테네 노동계급 지구에서 벌어진 감동적인 총파업과 시가전의 역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1944년 5월 ‘레바논 회의’, 9월 ‘카세르타 협약’의 역사이기도 했다. 레바논에서 3일간 회의를 한 민족해방전선은 겨우 장관직 4개를 받고 그리스 망명 정부에 입각하기로 했고, 회의에 파견된 대표들은 망명 정부 군대에서 일어난 병사·수병 반란을 범죄 행위로 규탄했다. 한편, 카세르타 회의에서 민족인민해방군은 영국군 장군을 모든 그리스 군대의 지휘관으로 인정했고 민족인민해방군이 아테네에 진입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민족인민해방군과 영국군이 충돌한 1944년 아테네의 “붉은 12월”뿐 아니라 1945년 2월의 배신적인 바르키자 협정(이 협정에서 민족인민해방군은 무장 해제와 해산을 약속했다)도 그리스 레지스탕스 역사의 일부다. 바르키자 협정은 1946~1949년 그리스 내전에서 저항군이 왕당파와 그들을 지원하는 영국·미국에 패배하는 토대를 놓았다. 물론, 이 모든 타협과 배신을 결정한 것은 공산당 지도부였으며, 많은 기층 투사들은 본능적으로 여기에 비판적이었고 “더 나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애국적 반파시즘 전쟁이라는 정치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으며, 기층에서 제기되는 모든 의문과 이견, 심지어 반란을 제약하고 산산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리스 혁명의 비극
20 그리스 사례는 폴란드 사례와 달리 레지스탕스 운동이 좌파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 공산당KKE이 그 운동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민족해방전선과 민족인민해방군이 “유고슬라비아 유격대보다는 공산주의 운동과 연계가 덜 직접적이었다”는 글럭스틴의 주장은 틀렸다. 21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 공산당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제하지 않았다거나 레지스탕스 운동이 자기들끼리 심하게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레지스탕스 운동이 급진적이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와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나라는 폴란드와 그리스 두 곳이었다.22 민족해방전선 내에는 소규모 사회민주주의 그룹, 좌파 그룹들, 다양한 자유주의 정치인·학자들이 있었지만 “공산당”이 민족해방전선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1941년 봄 추축국 군대가 그리스를 점령했을 때에는 공산당원 2000여 명이 투옥돼 있거나 섬에 유배돼 있었고 200여 명 정도가 체포되지 않은 채 서로 적대적인 작은 단체들로 조직돼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전국 당대회가 열릴 즈음인 1942년 12월에는 당의 “재건”이 완료됐고 당원 수가 1만 5000명에서 2만 명에 이르렀다. 그 후 그리스 공산당은 극적으로 성장해서 1944년 10월에는 당원이 41만 2000명이 이르렀다. 티토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른 점도 있었다. 글럭스틴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주요 활동가였던] 밀로반 질라스의 말을 인용한다. 질라스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유격부대가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을 때 공산당원은 그곳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테네가 해방될 무렵 그리스 공산당은 인구가 60만 명인 아테네에서 3만 5000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테네 판 당 기관지의 발행 부수는 4만에서 6만 부에 이르렀다.23 민족인민해방군도 마찬가지다. 가장 유명한 지도자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본명은 “타나시스 클라라스”다)는 단지 “명목상 공산당원” 24 이 아니었다. 그는 1920년대 중반 이래 당원이었고 당 일간지 〈리조스파스티스〉[급진주의자들]의 기자였으며, 당이 운영하는 비합법 기구의 일원이었다. 그가 “의심스러운 자”로 묘사된 것은 메탁사스 정권 시절 수감됐을 때 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치 점령 시기에 그는 당의 지령에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간” 충성스러운 당원이었다. 민족인민해방군 참모총장 스테파노스 사라피스는 자유당 출신의 장군이었지만 1944년 공산당에 가입하고 1957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원이었다.(1951년에는 후보 중앙위원이 되기도 했다.) 민족인민해방군의 모든 대부대 지휘관과 “카페탄”[레지스탕스 부대의 선출 지도자]들은 점령이 끝날 때쯤에는 모두 당원이었다. 25
역사가 하겐 플라이셔에 따르면, 1942년이 되면 민족해방전선에 합류한 농민당 조직은 “은밀하게 공산당을 따르는 조직”이 됐다. 이것은 1935년부터 시작된 오랜 과정이었다.따라서 문제는 이처럼 공산당이 철저히 지배한 운동이 어쩌다가 1944년 12월부터 33일 동안 아테네 거리에서 영국군과 싸우게 됐냐는 것이다.
26 그러나 운동의 기층, 특히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리스군 병사·수병들의 좌파 조직들에게 이 위원회의 설립은 “산악 지대의 정부”와 더불어 마침내 “우리의 권력이 수립됐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이 충돌은 필연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여러 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민족해방전선과 민족인민해방군을 포섭하려 했다. 물론, 영국은 그리스를 자기 영향권 아래에 두고 그리스 국왕을 다시 왕좌에 앉히고 싶어했지만, 민족해방전선과 그리스 공산당의 참여를 원칙적으로 배제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민족해방전선과 그리스 공산당도 스스로 협력에 나섰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처럼 말이다. 글럭스틴은 민족해방정치위원회PEEA를 언급한다. 1944년 3월에 설립된 이 위원회의 목적은 카이로에 망명한 그리스 군주 정부와 영국에 민족해방전선을 동등한 국정 파트너로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그리스에서 펼쳐진 드라마의 주인공은 둘이 아니라, 지배계급·제국주의자들, 운동, 운동의 지도부, 이렇게 셋이었다. 지배계급의 문제는 그들의 국가가 붕괴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대다수 그리스인들의 눈에 정통성을 잃지 않은 국가 기관은 하나도 없었다.
한편 운동의 중심부에는 단지 급진화한 농민뿐 아니라(물론 이들은 운동의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급진화하고 잘 조직된 노동계급이 있었다. 세 번째 주인공인 운동 지도부는 역사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개혁주의 지도부들이 부딪혔던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서로 반대되는 압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지도부는 기층의 급진성을 무디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다. 사태가 어떻게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보여 준 첫 번째 사건은 1944년 이집트의 그리스 망명 정부 군대에서 일어난 사병 반란이었다. 몇 주 후인 10월에 찾아온 해방과 아테네의 폭발적인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도부는 또다시 통제력을 잃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장 충돌이 벌어지기에 충분했다. “붉은 12월”이 시작됐다.
운동은 이런 충돌로 나아갈 만큼 강력했지만 이를 끝까지 밀고갈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이런 정치적 약점을 낳은 한 가지 요인은 이 전쟁을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우리 위대한 연합군”의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12월 사태” 초기에 벌어진 한 작은 사건이 이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아테네 주재 미국 무관보 윌리엄 하디 맥닐은 다음과 같이 썼다.
12월 6일 민족인민해방군은 희부연 여명 속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민간인 복장에 소총으로만 무장한 인원들이 왕실 정원을 통과해 철조망을 넘고 키피시아 대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넓은 대로를 따라 외무부, 전쟁부, 그 외 주요 정부 부처들이 있는 곳이었다. 공격은 실패했다. 공격이 과감하지 않았고 인원이 비교적 소수였던 탓이다. 더 중요하게는, 대원들이 목표 지점 근처에 도달했을 때 예상치 못한 영국군의 존재를 보고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코비 장군[그리스 주둔 영국군 사령관 — 인용자]은 좌파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코비 장군이 알았든 몰랐든, 공격 개시 몇 시간 전 주요 정부 건물들 앞에 영국군 보초가 투입됐다. 민족인민해방군은 영국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민족인민해방군 대원들도 영국군과 충돌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햇살이 밝고 각 건물 앞에 영국 군인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대원들은 난처해 했다. 좀더 무모한 자들은 개의치 않고 밀고 나갔지만 나머지는 망설였다. 그래서 공격은 미약했고, 건물 경비에 배치된 경찰 병력에 의해 쉽게 격퇴됐다. 영국군 보초들도 전투에 합류했다. 이렇게 민족인민해방군과 영국 병력은 처음으로 서로에게 총을 쐈고 공공연한 전쟁이 시작됐다. 27
이것이 그리스 혁명의 비극이었다. 생쥐스트가 남긴 유명한 말대로 “혁명을 반쯤만 하는 자는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다.” 아리스 벨루히오티스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했다. 충성스러운 당원으로서 그는 점령 기간에 회의와 이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당 중앙위원회에 두 차례 서한을 보내기만 했을 뿐이다. 1944년 11월 그는 라미아시市에서 민족인민해방군 사단 카피탄들의 회의를 조직했다. 그리고 카세르타 협약(중무장한 민족인민해방군의 “산악” 사단들은 이 협약에 따라 아테네 외곽 멀리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을 무시하고 부대를 아테네 근처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한 카피탄이 “당 정치국은 이에 관해 알고 있는가?” 하고 물음을 던지자 회의는 혼란 속에서 끝나 버렸다.
이후 벨루히오티스는 바르키자 협정에 따라 민족인민해방군 동원 해제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아테네로 가서 민족인민해방군 재향군인회 대표를 맡으라는 당의 지시를 따르지는 않았고, 알바니아로 가서 “그곳의 동지들과 대화”를 하려고 했다. 당이 자신을 돕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 민족인민해방군”을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투쟁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지도자”인 자하리아디스의 귀환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지도자”는 1930년대 이후 당이 자하리아디스에게 부여한 공식 직함이었다.) 그러나 자하리아디스는 돌아오자마자 벨루히오티스를 “모험꾼,” “이탈자,” “의심스러운 자”라고 규탄했다. 당 조직에게 도움을 거부당하고 자신이 이끄는 소규모 그룹도 국민방위대[그리스 정부가 조직한 우익 무장 조직]에 포위당하자, 벨루히오티스는 결국 1945년 6월 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8 “이곳에서 두 전쟁 간의 대립은 전면적이고 폭력적이었다.” 29 그러나 이것은 묘사일 뿐 설명이 아니다. 설명을 위해서는 평행 전쟁 개념이 아닌 다른 분석 도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이 광범한 사회적 격변·반란·혁명을 촉발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에 뒤따른 반란이 러시아에서 성공적인 노동자 혁명을 낳고 독일·이탈리아·헝가리에서 자본주의 사회 질서와의 정면 대결로 이어졌다면, 제2차세계대전 때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그 급진화가 어느 정도 대중적인 혁명적 당으로 표현되지도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차이다.
글럭스틴은 다음과 같이 쓴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은 단일한 세계적 충돌 내에서 나타난 의견 차이가 아니었다. 두 유형의 전쟁이 충돌한 것이었고 그랬던 만큼 폭탄·탱크·고문·강간·투옥이 그 결과를 결정했다.”결론
30 전투 그 자체뿐 아니라 전투의 여파 또한 세계적이고 파괴적이었다. 리지 콜링엄이 썼듯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1943~1944년 베트남 통킹 지역의 기근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기근으로 그 이후에 벌어진 전쟁들보다 더 많은 농민들이 죽었다.” 31
제2차세계대전이 앞선 세계대전과 여러 차이점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파시즘에 맞선 전투라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은 앞선 세계대전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전 세계적인 충돌이었다. 북극권, 버마의 정글, 세네갈의 다카르, 솔로몬 제도에서도 전투와 군사 작전이 벌어졌다.양차 대전 모두 제국주의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팽창하는 시기 이후에 벌어진 반면 제2차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던 1930년대 대불황 이후에 벌어졌다.
다른 차이점도 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모든 나라에서 열광적인 분위기가 자발적으로 일었다. 거대한 군중이 거리로 나와 “자기” 정부에 지지를 표했다. 전쟁이 조만간 영광스럽게 끝날 것이라 기대했다. 반면 1939년 9월에 결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그런 열광이 없었다. 대중은 앞으로 다가올 일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죽음, 고통, 파괴 말이다.
32 그러나 이번 책에는 그런 성취가 없다. 이번 책은 제2차세계대전의 “민중사”라기보다는 “인민 전쟁” 개념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에 가깝다. 처칠과 스탈린의 유명한 “퍼센트 협정”[전쟁 막바지에 전후에 각자가 세계를 나눠 먹을 비율을 정한 협정]처럼, 글럭스틴은 일람표를 만든다. 그리스는 100퍼센트 인민 전쟁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90퍼센트가 인민 전쟁 10퍼센트가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60 대 40이었고, 라트비아는 100퍼센트 제국주의 전쟁이었다고 말이다. 설득력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 위기, 파시즘, 전쟁 사이의 관계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결국 이어진다. 글럭스틴은 독일에서 나치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해 매우 중요한 책을 쓴 바 있다. 이 책은 사회주의자라면,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 책의 강점은 매우 많은데, 그중 하나는 독일 사회를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 살펴보면서 “나치즘이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움직이는 계급 세력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양차 세계대전, 특히 제2차세계대전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 연관을 단지 일반적 노선으로 제시하는 것을 넘어 상세한 연구와 광범한 종합으로 밝혀내는 것은 오늘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꼭 필요한 과제다. 이 점과 관련해 트로츠키의 사상과 분석은 언제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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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olaris, Leandros, 1983, Two in one?, International Socialism 138,(Posted on 10th April) http://isj.org.uk/two-in-one/
↩
- Gluckstein, 2012, p208. ↩
- Gluckstein, 2012, p209. ↩
- Gluckstein, 2012, p210, 강조는 글럭스틴의 것. ↩
- Gluckstein, 2012, p15. ↩
- Gluckstein, 2012, p21. ↩
- Gluckstein, 2012, p85. ↩
-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과 균형 잡힌 논의는 Jackson, 2004을 참고하라. ↩
- Gluckstein, 2012, p87. ↩
- Trotsky, 1973a, p498. ↩
- Trotsky, 1973b, p302. ↩
- Mandel, 2011, p45. 만델의 책에 대한 비판으로는 Hallas, 1987을 보라. [원문의 참고문헌 목록에는 해당 문헌이 빠져 있는데, 다음 글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Hallas, 1987, “Wars within wars,” https://www.marxists.org/archive/hallas/works/1987/03/ww2.htm — 옮긴이] ↩
- 파보네의 관점에 대한 설명은 Behan, 2009, pp56-60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
- Jackson, 2001, p558. ↩
- Gluckstein, 2012, p214. ↩
- Gluckstein, 2012, p96: 강조는 인용자의 것. ↩
- 그러나 에셀이 자유프랑스[드골 주도의 망명 정부]의 정보 기관 BCRA의 드골파 요원이었다는 점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 FTP는 공산당 레지스탕스의 무장 조직이었다. MOI는 1920년대 초 이후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조합 연맹인 CGT-U의 이주노동자 조직이었다. ↩
- 이는 좋게 말해 매우 기이하기 짝이 없는 정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를 다룬 장의 제목은 ‘제국의 영광 대 레지스탕스 이데올로기’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던가? “프랑스의 영광”이나 공화국의 영광이 과연 제국주의적 영광, 프랑스 식민지들, 프랑스 문화가 그 식민지들에 끼친 “문명화” 영향과 별개였을까? 자유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일부였고 드골주의 이데올로기의 짐 가방에는 “제국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 가득했다. ↩
- 후크발라합(인민항일군)은 필리핀 공산당의 무장 조직이었다. 이상하게도 글럭스틴의 책에는 후크발라합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에 한 장을 할애했다. 그곳의 민족해방투쟁이 일본의 패망 이후에 시작됐고 수카르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일본의 지배에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했는데도 말이다. ↩
- 벨기에에서는 1944년 11월에 가까스로 군사적 충돌을 피했다. Kolko, 1990, pp97-98을 보시오. ↩
- Gluckstein, 2012, p41. ↩
- 도미니크 외드가 제시하는 수치는 그의 다른 많은 설명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확하다.(Eudes, 1972) 필자가 제시한 수치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adzis, 1977, pp52-57, KKE, 2005, pp461-462, Bartziotas, 1983, pp263-264. 타나시스 하지스는 공산당의 후보 중앙위원이었으며 1941~1944년에 민족해방전선 총서기를 지냈다. 바실리스 바르지오타스는 공산당 정치국원이었고 1943~1946년 아테네 당 조직 책임자였다. ↩
- AKE에 가입시키고 마을 당 세포 조직을 해체시켰다. ↩
- Gluckstein, 2012, p40. ↩
- 글럭스틴의 설명에는 그 외에도 부정확한 사실관계가 여럿 있다. 예를 들어 1936년 8월 4일 메탁사스와 국왕이 자신들의 독재를 관철시켰을 당시 메탁사스는 장군이 아니라 총리였다. 공산당 지도자인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양극 이론”(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그리스가 균형을 잡아야 하며 영국 제국의 “정당한” 이해관계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정식화한 것은 나치 점령 시기가 아니라 1945년 6월 제12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였다. 영국의 장군 알렉산더가 아테네를 “로테르담”처럼 [쑥대밭으로] 만들자고 한 것은 “12월 사태” 동안 더디게 진척된 작전에 관해서 한 얘기이지 “마나 작전”[독일이 철수한 후 민족해방전선이 아테네를 접수하기 전에 영국군 병력을 진입시키기 위한 작전]에 관해 한 얘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영국이 충돌 첫 24시간 동안 2500개의 포탄을 발사해 1만 3700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
-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를 다룬 장의 후주로만 처리돼 있다. Gluckstein, 2012, p230. ↩
- McNeill, 1947, pp145-146. ↩
- Gluckstein, 2012, p54. ↩
- Gluckstein, 2012, p213. ↩
- A J P Taylor는 《제2차세계대전의 기원》에서 두 전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서방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간상 겹친” 동방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Taylor, 1991, Kindle locations 612-616. ↩
- Collingham, 2011, Kindle locations 181-182. ↩
- Gluckstein, 1999, p2; p221.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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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uckstein, Donny, 2012, A People’s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Resistance versus Empire (Pluto).[국역: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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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ylor, A J P, 1991,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Penguin, Kindle Edition).[국역: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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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tsky, Leon, 1973b, [1940],” Discussions with Trotsky”, in Writings 1939–40 (Pathfi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