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 지성’은 유효한 개념인가?
이 글은 International Socialism 저널 105호(2005년 겨울)에 실린 Joseph Choonara의 “Marx or the multitude?”의 후반부를 조명훈이 번역하고 최일붕이 감수한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전망이 가장 잘 들어맞는 듯한 경제 부문에 대해 살펴보자. 하트와 네그리는 에릭 S 레이몬드의 저서 《성당과 바자》를 인용하며 개방형 소스 프로그래밍을 묘사한다. 개방형 소스 프로그래밍에서는 소프트웨어와 함께 저작권 시비 없이 ‘소스 코드’도 공유한다. 예컨대,
[소스를 개방하지 않는] 프로그래머들은 자신의 프로그램이 초창기 성당과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단 소스 코드가 공개되면 … 더 많은 버그들이 수정되며 개선된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 … 레이몬드는 이것을 ‘성당’ 식과 대조되는 바자 식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이라 칭한다. 여기선 자기 나름의 방식과 어젠다가 있는 다종다양한 프로그래머들이 협력적으로 기여한다. 앞서 필자가 ‘대중 지성’과 관련해 주목했듯이, 우리는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 더 똑똑하다.
이런 생산 방식은 개별적이지만 서로 협력하는 프로그래머들이 하트와 네그리의 다중 모델과 매우 흡사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이 암시하는 것과 좀 다르다. 가장 성공한 개방형 소스 프로그램은 리눅스 컴퓨터 운영체제다. 리눅스 개발은 네트워크나 대중에 의해 이뤄지기는커녕 ‘핵심 개발팀’을 통해 중앙집중적으로 이뤄지는데, 소스 코드 변경 제안은 반드시 이 팀에 제출돼야 한다. 이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오직 1천 명만이 정기적으로 리눅스의 개선에 기여한다. 심지어 최근에 일어난 3만 8천 건의 개선 중 3만 7천 건이 겨우 1백 명의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들은 모두 운영체제 개선을 위해 기업에 고용돼 있는 사람들이다. 직원들을 풀어서 리눅스 개선 작업을 시키는 주요 기업 중에는 인텔, IBM, 휴렛패커드 등등의 대기업들이 있다. 이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운영 체제와 경쟁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고, 또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덕분에 세계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개방형 소스 프로그램이 더 나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만일 높은 수준의 중앙집중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같은 문제에 매달리느라 프로젝트의 발전 속도가 더뎌지고 시간이 낭비되는 경향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존재한다.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경쟁 그룹들 간의 쟁투로 파편화하거나 사람들이 흥미를 잃으면서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성공한 프로젝트는 장차 이윤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자본주의 시장에 급속도로 흡수된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본가들은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고 또 이를 위해 자본을 축적하려고 노동자들로부터 이윤을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트와 네그리의 마지막 주장은 “물질 생산이 … 생활 수단을 만들어 내는 반면에 사상·이미지·지식·통신·협동·감정관계 등을 생산하는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 생활 자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완전히 거꾸로 세운 극단적 형태의 관념론이다. 이것은 하트와 네그리의 진짜 목적을 반영하는데, 즉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구체적 분석 대신에 순수한 주관의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제국이 곧 권력이고 다중이 곧 창조력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경제 이론이 취약하므로 자본가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원인이 무엇이고, 자본이 어떻게 여러 부문으로 나뉘고, 어떻게 불균등한 방식으로 축적되는지를 그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트와 네그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약점을 분석하지 못하고 또 그 약점을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을지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제국이 ‘매끈하다면’ 모든 지점이 똑같이 취약할 것이다. 만일 무주택자나 실업자가 단지 그들의 ‘비상한 다재다능함과 창조력’ 덕분에 산업 노동자만큼 자본주의 체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 사회의 각 계급이 갖는 서로 다른 힘을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제국에 맞서는 데 모종의 전략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하트와 네그리는 레닌식 당 건설 시도가 결국 새로운 엘리트를 낳아 다중의 투쟁에 해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다중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갖는 공통점 덕분에 그들은 함께 “협동, 통신, 삶의 형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생적으로 정치적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중》은 다중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주권으로부터의 일탈·비상·탈주의 모습을 띤다.” 이 주장은 자본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자는 반자본주의 운동 내 자율주의자들의 호소를 반영한다.
여기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반론이 존재한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우리가 그들의 지배와 영향에서 자유로운 민주적 세계를 만들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노동이 만들어 낸 막대한 생산력을 결국 뒤에 남겨두게 될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런 주장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다중의 집단 지성이 결론에 이르기만 하면 다중은 제국을 버릴 것이고, 그러면 제국은 곧바로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암시한다. 이 과정에 약간의 ‘방어적 폭력’이 수반될 것이다. 일단 제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다중에게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중의 비물질 노동이 사회 생활을 창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과 자본주의 반대 운동이 발전하면 직면케 될 도전을 얕잡아보는 위험천만한 견해인 듯하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하트와 네그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협력하지 못하게 만들 벽을 쌓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중’이 운동의 메타포 이상인 개념임을 분명히 해둬야 한다. 근본적으로 다중 개념은 변화의 주체가 노동계급이라는 생각에 대한 공격이자 우리 지배자들을 타도할 전략을 위해 투쟁하는 정치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