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기
서방 공산당의 궤적 — 스탈린주의에서 유러코뮤니즘으로 *
한국의 좌파는 1991년 옛 소련 몰락까지 압도적으로 스탈린주의 경향이 득세했다. 1991년 이후 지금까지 PD는 유러코뮤니즘, 사회민주주의, 신좌파, 자율주의, 노동자주의(희석된 신디컬리즘), 좌익공산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 등으로 분화했다. 물론 순수한 형태보다는 이 다양한 조류의 일부 요소들을 실용주의적으로 절충한 변형태가 더 흔하다. NL은 더는 NL로 불리지 않는 비非친북적 좌파 민족주의 경향과 친북적 좌파 민족주의 경향으로 크게 대별되는 가운데(물론 모호한 중간적 형태도 있다) ‘자민통’이나 ‘자주파’로 불리는 후자 내에서도 다양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다. 이 글과 지난 호에 실린 폴 블랙레지의 “초기 신좌파의 마르크스주의”, 또 이번 호에 실린 닐 데이비슨의 아이작 도이처 관련 소론은 우리가 한국 좌파 이데올로기 지도地圖의 윤곽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38년 트로츠키는 멕시코의 망명지에서 유럽이 새로운 세계 전쟁에 들어가고 있다고 내다봤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조각을 나치에 넘겨주는 뮌헨 협정이 히틀러 치하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막 체결된 상황이었다. 서방 공산당들은 각자 자국 국기를 흔들면서, 독일에 대항한다는 근거로 반동적이기 이를 데 없는 사회 집단들과 동맹을 모색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강요한 인민전선(국민전선) 노선이 그 절정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국제 공산당들 내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옛 코민테른의 사회적 기반은 정확히 말하면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크렘린의 보조금으로 살아가고, 그 지령에 복종하고, 이 점에서 옛 공산당 관료는 모두 소련 관료의 아우이자 부하이다. 다른 한편, 옛 코민테른의 각종 기구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똑같은 원천, 즉 제국주의의 초과이윤으로 먹고산다. 최근 공산당들이 성장하고, 소부르주아지로 침투하고, 국가기구·노동조합·국회·시의회 등에 진출하자 그들은 크렘린에 의존하던 전통을 내팽개치고 자국 제국주의에 극도로 의존하게 됐다.
일국사회주의론은 필연적으로 코민테른 지부들의 민족주의 경향 강화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10년 전에 예견된 바 있다. …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확실히 예견할 수 있다.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적대가 심화하고, 전쟁 위험이 명백히 가까워지고, 마찬가지로 소련의 고립도 분명해지면 코민테른 내에서 원심적 민족주의 경향이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 코민테른의 각 지부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애국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할 것이다. 스탈린은 제국주의 민주 국가들의 공산당이 자국 부르주아지와 타협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단계는 이제 지나갔다. … 앞으로 공산-국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은신처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관계가 항상 ‘소련 방어’와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시간 척도는 틀렸다. 획일적인 세계 공산주의는 스탈린이 강요한 몇 번의 결정적 정책 변화들을 통해 그대로 살아남았다. 특히, 공산당들은 스탈린이 1939년 9월에 히틀러와 손을 잡자 민중전선 동맹들과 결별했고, 그리고 나서 1947년에 냉전이 시작되자 다시 그들은 비슷한 결별을 하도록 지령을 받고서 이를 실행했다.
그러나 1947년 정책 변화 후 1년이 채 안 돼 획일체에 최초의 파열이 일어났다.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티토가 분열한 것이다. 장차 중·소 분열은 더한층의 충격파를 낳게 된다.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81년 폴란드 사태의 압력을 받은 서방 공산당들은 공공연히 소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 당국도 자국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도록 서방 정부들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서방 공산당을 이용하는 일에 덜 의존하게 됐다.
1970년 유러코뮤니즘의 출현은 트로츠키가 결국은 옳았음을 입증했다. 서방 공산당들은 잇따라 고전적 개혁주의 정당으로 스스로 변모하려고 공공연히 노력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이를 선도했고 이탈리아의 나토 가입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결국 1989년 가을 동유럽 혁명의 충격과 그로 말미암은 스탈린 체제들의 붕괴는 한 단계 더 진전했다. 이탈리아 PCI는 민주좌파당PDS으로 당명을 바꾼다고 발표했다. 당 지도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광범한 중도좌파 연합 건설에 몰두했다. 영국의 공산당CPGB 기관지 《마르크시즘 투데이Marxism Today》 편집자 마틴 자크는 〈더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제출되는 가장 보수적인 입장조차도 민주집중제,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이름은 내던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 더욱이 영국공산당CPGB의 사멸은 낡은 사회주의 좌파가 천천히 사멸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 공산당은 말년에 자신을 땅 속에 묻는 것을 도와주는 유용한 과제를 수행하는 셈이다. 그 과제는 지금 거의 완료됐다. 이제 묻어 줄 때다. 편히 잠들기를.자크는 당을 완전히 해산하기를 원했다. 새로 지명된 사무총장 니나 템플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신당의 명칭은 토론으로 정해질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명칭은 급진당이나 그와 비슷한 이름이다.” 그녀는 “나는 결코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약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사멸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1990년 5월 23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날 〈로이터 통신〉은 다음과 같은 짧은 보도를 내보냈다.
전 세계 공산당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문제들을 토론하려고 간행한 《세계 마르크스주의 평론》은 관심 부족으로 폐간 준비중이다. “발간을 계속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하다”고 그 월간지의 폐간 책임자 야로슬라브 프레첵은 어제 프라하에서 말했다.
《세계 마르크스주의 평론》은 소련 당국의 지도를 받아 한때 한치의 빈틈도 없는 듯했던 스탈린주의 획일체를 묶어주는 마지막 끈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서방 공산당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프랑스에서 독일 점령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운동의 핵심 간부층을 이룬 것은 공산당이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과 거의 동시에 공산당이 이끈 레지스탕스 군대가 파리를 포함해 나라 거의 전역을 해방시킨 전국적 봉기가 있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전국적 파업은 독일군이 의존하던 운송을 대부분 마비시켰다. 드골 장군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전투 인자들의 통수권은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있었다.” 1945년 4월 24일 이탈리아 북부 독일군 점령 지역의 밀라노 노동자 6만 명이 파업을 일으켜 노동자 평의회를 세웠다. 파업은 토리노로 확산돼 봉기 수준까지 발전했고 2만 명의 파시스트(무솔리니를 포함해)를 처형했다. 공산당이 주도한 그리스 레지스탕스 운동인 민족해방전선EAM은 연합군의 도움 없이 나라를 해방시켰다. 한 영국인 논평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해방의 시기에 EAM 조직원은 전체 인구 7백만 명 남짓 가운데 약 2백만 명을 헤아렸다. … EAM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이 승리한 지 겨우 6년 만에 이제 파시스트 독재가 몰락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인 듯했다. 수천 명의 공산당원들과 그 밖의 좌파들이 전면적인 게릴라전을 펴려고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가장 안정적인 서방 강대국들인 영국과 미국에서도 공산당의 세력은 성장하고 있었다. 1945년 영국 공산당원 두 명이 하원에 진출했다. 1944년 미국에서는 공산당원이 10만 명에 달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거의 혼자 힘으로 히틀러와 싸운 스탈린 치하 소련의 위세와 이에 더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공산당이 한 구실 덕분에 각국 공산당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것은 서방에서 혁명적 변화의 유령을 불러낸 급진화 물결과 시기상 일치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당원이 1937년 29만 2천7백1명에서 1944년 37만 1천4백71명, 1945년에는 61만 6천3백48명으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 공산당은 1935년 1만 6천 명에서 1948년 15만 명으로 성장했다. 핀란드 공산당은 1940년 1천2백 명에서 1946년 15만 명으로, 이탈리아 PCI는 1944년 40만 2천 명에서 1946년 2백만 명 이상으로 성장했다. 덴마크에서도 1939년 9천 명에 불과한 공산당원 수가 1945년에는 7만 5천 명에 이르렀고, 노르웨이 공산당도 1939년 5천2백72명에서 1946년 4만 5천 명으로 성장했다. 한편 종전 전에 공산당이 불법이었고 규모도 아주 작았던 일본에서도 1946년 공산당은 2백만 표를 얻어 5개 의석을 획득했다.(1949년에는 3백만 표를 얻어 35개 의석을 차지했다.) 1945년은 사회주의적 변화의 가능성이 충만한 해인 듯했다. 그러나 향후 사태가 보여 주듯이, 서방 자본주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됐을 뿐 아니라 최대의 그리고 가장 지속적인 경제 호황으로 들어섰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서방 공산당들이 한 구실이었다. 전에 스페인 공산당PCE의 지도자였던 페르난도 클라우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공산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을 멈추게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미 스탈린은 전시 대동맹(연합국)의 지속을 원하며 얄타에서 결정된 세계 분할에 만족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1943년 그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시체를 정식으로 땅에 묻었다. 그것은 실천적 의미는 거의 없었지만, 스탈린의 동맹자들에게는 미국 부통령 헨리 월러스가 1943년 3월 “세계혁명을 부추기는 트로츠키주의 사상”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미사여구조차 스탈린이 포기했음을 입증한 효과를 냈다. 오히려 스탈린은 ‘세력권’ 분할을 바탕으로 한 미국 제국주의와의 광범한 협정을 원했다.
스탈린은 동유럽을 얻기 위해 서방 공산당들의 행동을 기꺼이 제지했다. 이것은 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 공산당들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다.
(1) ‘영원한 프랑스’ 재건 운동
10 드골은 PCF가 권력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토레즈 사면령을 내렸다.
망명한 PCF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194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국가도 하나, 경찰도 하나, 군대도 하나”라고 선언했다.11 이제 PCF는 ‘생산 투쟁’을 통해 그들이 명명한 ‘영원한 프랑스’를 복구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 운동은 파업중인 탄광 노동자들에게 토레즈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우리는 내전 놀이를 멈춰야 하며 노동계급과 우리 나라에 대한 도발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12
구체적인 쟁점은 애국시민군과 해방위원회를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토레즈는 드골이 이들을 해산하는 것을 지지했다. 드골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토레즈]는 프랑스로 돌아온 순간부터 애국시민군의 자취를 일소하는 데 일조했다.”그럼에도, 그리고 공산당원을 차별하는 투표 제도에도 PCF는 1945년 10월 선거에서 최대 정당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드골에게는 노동계급을 견제하기 위해 PCF가 필요했다. 드골과 협력해서 PCF가 받은 대가는 크지 않았다. 드골은 공산당에게 경제 각료직은 허용할 수 있지만 외무·내무·국방 장관직은 결코 수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에 참여한 PCF는 다음 2년 동안 ‘영원한 프랑스’ 재건 정책을 충실히 추구했다. 프랑스 군대가 1945년 초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최초의 주요 시위에 발포해 몇천 명의 사상자를 냈을 때 PCF의 일간지는 그 발포를 옹호했다. 프랑스의 해외 제국을 옹호한 이러한 태도는 프랑스가 호치민이 지도한 베트민(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주의에서 해방시킨)을 상대로 전면전을 시작했을 때 훨씬 더 기괴한 수준에 이르렀다. 개전 후 넉 달 동안 호치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국방장관이 공산당원이었던 것이다.
1947년 3월 공산당 각료들은 ‘정부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모든 것에서 PCF는 소련 당국이 지령한 노선을 충직하게 추종하고 있었다.
(2) 이탈리아 — 저지당한 혁명
1944년 3월 PCI와 이탈리아 사회당PSI은 당시 아직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이탈리아 북부 전역에서 총파업을 공동으로 호소했다. 1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이에 호응했는데, 이것은 전시 유럽의 [나치] 점령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계급 행동이었다.
PCI의 망명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는 토리노·밀라노·제노바에서 이원 권력 수준에 도달한 노동계급 투쟁을 거스르는 국민 단결 메시지를 내보냈다. 톨리아티는 1944년 3월 나폴리에 도착했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943년 7월 국왕과 바돌리오 원수는 쿠데타로 무솔리니를 몰아냈다. 두 사람은 전에 무솔리니의 충성스런 지지자였다. 그러나 이제 바돌리오는 20년 간의 파시스트 치하에서 누적된 반감이 혁명적 분출로 폭발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목표로 여겼다.
PCI와 PSI는 바돌리오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그가 선제한 탄압 책동과 독일군에 대한 관대한 정책 때문에 협상이 결렬됐다. PCI와 PSI는 국왕과 바돌리오를 파시스트 잔당으로 올바르게 규정하면서 두 사람의 사임을 줄곧 요구했다. 처칠이 이 요구를 비웃자 나폴리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바돌리오 반대 운동이 나라의 남부를 휩쓸었다. 그러나 1944년 3월 이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스탈린은 바돌리오 정부를 승인한다고 발표했다.(처칠과 로즈벨트도 아직 그러지 않았다!) 3월 말 새로 귀국한 톨리아티는, 그의 공인된 전기의 표현에 따르면 “즉각적인 국민 단결 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톨리아티는 스탈린에게서 전권을 얻어 돌아왔고, 만일 소련 당국이 바돌리오 정부를 지지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 두고 PCI는 “살레르노 대전환”으로 공식 명명했다. 《소련 대백과사전》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월 11일 이탈리아 정부와 직접적 관계를 수립한 소련의 발의에 따라 바돌리오 내각은 1944년 4월 22일 개편돼, 반파시스트 연합 6개 정당 대표들을 포함했다.”
PCI가 ‘국민 단결’을 조성하는 데 참여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 지배계급은 북부 지역이 해방되기 전에 남부와 중부 지역의 대중 운동을 탄압하는 데 힘을 집중했다. ‘북풍’, 즉 토리노와 밀라노에서 일기 시작해 남부를 휩쓴 급진화 물결이 이탈리아 정치 상황을 지배했다.
PCI는 북부 지역의 빨치산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즉, PCI는 연합군과 이탈리아 정부(이제는 옛 사회당원이었던 보노미가 총리였다)가 체결한 ‘로마의정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이 조약은 전쟁 수행에 관한 연합군측 명령을 따르고, 연합군 장교를 이탈리아 전군全軍 지휘관으로 인정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PCI가 펴낸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이 협정으로 마치 해방 운동이 지나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합군은 단지 빨치산 운동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인을 얻었을 뿐이다. 연합군은 분명히 혁명의 위험을 우려하고 있었다.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겨울 내내 독일군과 그들의 파시스트 동맹군이 빨치산에 맹공을 거듭 퍼부을 때도 연합군은 정전협정을 충실히 준수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 붕괴 직전인) 1945년 4월 북부에 연합군이 진격했을 때는 이미 빨치산이 북부 지역을 대부분 해방시킨 뒤였다.
PCI 지도자 루이지 롱고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연합군 당국이 군대와 함께 북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민족해방위원회가 임명한 레지스탕스 인사들을 요직에서 내쫓고 그 자리를 옛 행정기관 관리들로 대체했다.
17 전후戰後 새 정부에서 PCI는 PSI를 끌고다니며 기민당에 거듭거듭 양보했다. 마침내 1945년 12월 기민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정부 수반으로 지명되고 기민당의 국가 장악력이 굳어졌을 때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톨리아티는 1945년 12월 PCI 5차 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당파 간 투쟁에서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해서 단결했습니다. 이 합의는 모든 당파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며, 우리는 그것을 가장 먼저 실행했습니다.” 기민당은 2년 간의 ‘국민 단결’ 후 1946년 1월 선거에서 이탈리아의 주요 정당이 됐다. 이런 사태는 전혀 불가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민당은 종전終戰 당시 결코 주요 정치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톨리아티는 PCI가 기민당에 비해 변별력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그들[기민당]의 경제·사회 강령은 공산당이나 사회당의 강령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국민 40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는데도 PCI는 자신을 뒤따르는 PSI와 함께 기민당 정부의 충성스런 일원으로 행동했다. 이탈리아에 강요된 강화조약은 대중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으므로 이 조약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PCI의 모든 노력이 필요했고 이는 소련 당국의 지령에 따라 실제로 PCI가 한 일이다. 톨리아티는 가톨릭 교회를 국교로 인정하는 데 동의했고, 나아가 이혼금지법과 바티칸의 특권적 지위 인정에도 동의했다.
(3) 그리스 비극
그리스 공산당KKE은 EAM 저항운동을 지도해 그리스를 해방시켜 놓고도 그리스를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킨다는 스탈린-처칠 협약을 승인했다.
19 스코비 장군의 지휘 하에 아테네를 점령한 영국 군대가 ‘해방군’으로 환영받는 동안 처칠은 지중해에 있던 외무장관 이든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소련 당국의 노선에 따라 EAM은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인 다마스키노스 섭정 하의 연립정부에 들어갔다. 1944년 10월 발표된 그리스 공산당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의 질서와 원만한 정치 상황을 확보하는 것은 모든 국민의 1차적 의무다.”내 견해로는, 우리가 그리스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 필요한 대가를 소련에게 바쳤으므로 우리는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그리스왕립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영국 군대를 이용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 EAM과의 충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그 충돌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21 전투 기간 내내 영국군 사령부에 머무른 소련 특사가 처칠의 성명서 발표 자리에 배석해 이를 확인해 주었다. 이틀 후 협상이 결렬되고 영국 공군이 아테네에 맹폭격을 가할 때 스탈린은 그리스왕립정부에 파견할 대사를 임명했다.
스코비가 EAM에 무장 해제를 명령하자 전면전이 벌어졌다. 처칠은 아테네를 방문해 EAM 지도자들에게 “영국군은 로즈벨트 대통령과 스탈린 원수의 동의 하에 그리스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22 그러나 정전에 뒤이어 전시 빨치산 지지자들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테러 물결이 일었는데, 이는 영국군과 그리스 왕정이 사주한 것이었다. 1946년 말 전면적 내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훨씬 더 불리한 처지였고, 영국을 대신해 미국이 무기(네이팜탄을 포함해)를 공급했고 그 양은 급증했다.
전투가 끝나고 EAM이 정전협정에 조인한 바로 그 때 얄타 정상회담이 열렸다. 스탈린은 “나는 영국 정부의 대對그리스 정책을 신뢰합니다” 하고 선언했다.밀월의 끝
1947년 초 공산당원이 정부 각료에 포함된 나라는 오스트리아·벨기에·프랑스·아이슬란드·이탈리아·칠레·핀란드 등이었다. 그러나 그 해 5월 널리 반복된 책략에 따라 PCF와 PCI 각료들은 해임됐다.
전후 협정은 지속될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얄타에서 합의된 세계 분할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련은 재래식 군사력으로 유럽을 지배한 반면, 오직 미국만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에는 무엇보다 서유럽 경제 재건이 결정적 문제였다.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유럽 각국에서 지속됐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다. 당시 그런 투자 재원은 미국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투자를 유치하려면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 투자 때문에 동유럽도 미국에 문을 열어놓았다. 이른바 ‘완충지대’ 나라들의 지배 집단들 중 다수가 미국의 원조를 얻는 데 혈안이 됐다. 스탈린은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겠다고 발표한 1947년 3월 냉전이 시작됐다. 이것이 트루먼 독트린 —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군사 개입을 불사하겠다는 선포 — 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6월 미국은 유럽 경제 원조 계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서유럽을 미국의 시장으로 부흥시키고 미국의 패권 속에 완전히 통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셜 원조를 받아들이는 대가의 일부는 공직에서 공산당원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톨리아티는 이탈리아가 원조를 환영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1947년 7월 체코 정부는 미국 정부와 원조 조건을 논의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8월 2일 소련 정부는 마셜 플랜을 공식 거부했고, 각국 공산당도 모두 이에 따라 움직였다.
다른 압력들도 작용했다. 프랑스에서 낮은 임금과 높은 물가에 대한 노동계급의 불만이 커져서 PCF의 기반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4월 임금 인상 파업이 거대한 르노자동차 공장을 휩쓸었다. PCF나 노동조합총연맹CGT의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르노의 극소수 트로츠키주의자 투사들이 기회를 잡았다.
4월 30일 이 운동의 압력에 떠밀린 토레즈는 PCF가 더는 정부의 물가·임금 정책을 지지할 수 없다고 내각에 말했다. 정부 신임 투표가 실시됐고, PCF는 반대표를 던진 후 내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PCF 지도부는 역사의 한 장이 끝났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마셜 원조를 둘러싼 어려움은 일시적인 듯했다. 토레즈는 여전히 PCF를 ‘진정한 여당’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늙은 지도자 마르셀 카생은 그해 6월 11차 당대회에서 토레즈[가 정부 각료직을 사임한 것]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정치인[토레즈]을 제거하다니, 저들이 미친 거 아닙니까?”
이탈리아 총리 데 가스페리가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직후 PCI도 정부에서 축출당했다. 톨리아티는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영리하고 유능한 적敵이라면 우리를 정부에서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말을 믿고 존중하고, 우리더러 그 말을 지키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우리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압도적 상황을 만들어서 우리가 만신창이가 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때 스탈린은 PCF와 PCI에 다시 한 번 정치 전략 변경을 요구하면서 이들을 굴종케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1928년의 제3기, 1930년대 중반의 국민(민중)전선, 1939년과 1941년 사이의 전쟁 정책 180도 전환과 마찬가지로 획기적인 전환이 될 터였다.
코민포름의 속박
1947년 10월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들은 폴란드에서 비밀리에 회합해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을 창립했다. 언뜻 보면 그것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분명히 코민테른의 부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작성한 초청 명단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완충지대’의 여러 국가들은 마셜 원조라는 미끼에 응답한 바 있다. 이 나라들의 경제는 여전히 서방과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1947년 7월 4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마셜 플랜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파리회담에 참가하는 데 동의했다.(체코슬로바키아 정부 내에서 공산당은 소수파였다. 비록 그들이 군부를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폴란드 공산당은 마셜 플랜 참가를 놓고 토론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그 문제를 결정했다. 7월 8일 소련 관영 라디오 방송은 폴란드가 파리회담 참가를 거부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떠났고, 거기서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가는 논의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질책을 들었다.
소련의 위성국들은 이에 따라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됐다. ‘완충지대’ 공산당들은 소련 적군의 지원을 받는 자국의 경찰·군대를 이용해, 1945년 이래 함께 연립정부를 꾸려 왔던 협력자들을 쫓아내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인민’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이 정치적·경제적 패권을 유럽에 강요하려는 것에 맞서 스탈린은 옛 동맹자들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의 목적은 단순했다. 즉, 동유럽 통제권을 확실히 하고(전후의 세계 분할이 영속적이라는 승인을 서방에게서 얻어내는 것), 미국이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나라들을 모두 미국 통제 하의 단일 블록으로 결속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코민포름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공세를 새로 시작한다는 의욕의 표현이 결코 아니었다. 그 목적은 얄타에서와 같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세계의 양분 통제를 승인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온건 노선에서 강경 노선으로 전환하고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은 이미 제3세계를 연합국측에 넘겨주는 데 동의한 바 있다. 그래서 코민포름에 중국 공산당이 빠져 있었던 것(이들이 바야흐로 권좌에 오르려는 바로 그 시점에서)이다. 그리스는 이미 넘겨주었다(처음에는 처칠에게, 그리고 이제는 트루먼에게). 그러나 PCF와 PCI는 서유럽의 가장 중요한 지역에 있는 가장 중요한 두 정당이었으므로 소련 당국의 초청을 받았다. 알바니아 공산당은 유고슬라비아의 반대로 참가하지 못했다.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때 나온 성명은 각국 공산당이 향후 나아갈 길을 밝혔다. 그 길은 전시 대동맹(연합국)을 지지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그 동맹이 추축국에 대한 승리 후에도 지속되기를 희망했다.
26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세계가 계급들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국가 또는 국가군群 간에 분할돼 있다는 개념이 깔려 있었다. 이런 개념에서는 노동계급 — 그리고 경쟁 대상 진영의 공산당들 — 은 완전히 부차적 구실을 할 뿐이었다. 즈다노프의 보고서나 그 후 9개 당 선언의 어디에도 사회주의 투쟁을 언급하는 구절은 없었다. 오히려 반제 진영의 “근본 과제는 민주주의적 평화를 확실히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제 스탈린을 대신해 그의 심복 즈다노프가 한 보고는 1953년 스탈린 사망 때까지 공산당들의 향후 임무를 명시했다. 즈다노프는 세계가 두 진영으로 갈렸다고 주장했다. “한편에 제국주의·반민주주의 진영이 있고 다른 한편에 반제국주의·민주주의 진영이 있다.” 거기서 제시된 과제는 ‘민족 자주’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동맹 결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계획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유럽의 일부 부르주아지와 동맹할 수도 있음을 밝혔다. 즈다노프는 “호혜의 원칙이 준수되고 체결된 협정이 지켜진다는 조건으로 소련과는 다른 체제를 가진 나라들과 협력할 수 있음”을 짐짓 운운했다.코민포름 시기에는 또한 공산당 언론이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뚜렷한 적대로 회귀했다. 그러나 1928~34년의 코민테른 ‘제3기’[사회민주당이 파시스트라며 그들과의 공동전선을 원칙적으로 거부한 초좌파적 종파주의가 특징이었다 — 역자]와 달리 개혁주의자들을 모두 ‘사회파시스트’라고 딱지 붙이지는 않았다. 미국과 동맹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소련에 우호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구별하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스탈린이 서방의 대중적 개혁주의 정당을 다루는 방식은 항상 특정 서방 강대국이 잠재적 동맹국인가 아닌가에 대한 소련 관료의 판단에서 출발했다. 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태도는 그 지도부에 대한 판단에 따랐다. 그런데 그 지도부는 자국의 국가와 자국 지배계급의 동향에 좌우된다. 그들은 자국 지배계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거나 아니면 자국 지배계급의 특정 주장을 노동운동 내에서 대변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는 기업주와 기업주들의 국가에 대항해 개혁주의적 노동자들과, 또 가능하다면 이 노동자들의 지도자들과 공동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다시 거리로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서유럽 전역에서 계급투쟁 수준이 고양됐다. 이것은 서방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주들이 눈앞에 열린 대호황에 참여할 기회를 붙잡기 위해 산업 합리화를 강요하려고 취한 공세에 대한 노동계급의 방어적 대응이었다.
이미 코민포름 창립 전에 공산당들은 이러한 저항에 보조를 맞추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됐다.(1947년 르노 파업에 대한 PCF의 최종 대응을 보라.)
PCF가 연립정부에서 물러난 지 1년 반이 지나 2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가한 파업이 프랑스를 휩쓸었다. 이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PCF는 이 운동에 소련 관료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적 내용을 부여하려 했다. PCF가 지도하는 노조총연맹 CGT는 마셜 플랜 반대와 핵폭탄(아직까지는 미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금지 요구를 자신의 목표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정부 — 사회당이 참여한 — 는 ‘공산당의 음모’를 날조해서 이를 구실로 파업 탄압 물결을 일으켰다. 주요 도시들에서 노동자와 탄압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공산당원 투사들은 최전선에 서서 대단한 용기를 발휘했고 투쟁을 이끌고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펼친 강력한 저항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단순히 생활수준을 지키거나 향상시키려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PCF가 정부에 다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도록 프랑스 지배계급을 강제하려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프랑스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서방 동맹을 불안정하게 하려는 것이었는가? PCF 지도부 자신이 불명확했다.
1947년 말 CGT가 분열했다.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은 PCF의 주장을 역이용해서 PCF가 소련에 종속돼 있으므로 새로운 자주적 노조 연맹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새로운 노조 연맹체인 노동자의힘FO이 만들어져서 CGT 조합원 50만 명이 빠져나갔다. FO를 안착시키는 데 거액의 미국 돈과 전문 기술이 사용됐다. FO 조합원이 1백만 명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었겠지만, FO는 노동계급의 저항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1948년 말의 광원 파업은 일부 광원들이 작업에 복귀하기 시작하고 CGT가 파업 종결 명령을 내린 뒤에 맥없이 무너졌다. 1950년에는 미쉐린 그룹에서 매우 중요한 파업이 벌어졌지만 결국 패배했다. 곧 투쟁의 침체 양상이 분명해졌다. 1947년 5백만 명이나 됐던 CGT 조합원 수는 1950년대 중반에는 2백만 명 남짓으로 감소했다.
이 시기에 오늘날까지 지속된 PCF 당원 수 감소 경향도 시작됐다. 1949년 PCF는 70만 명이 당원 등록을 했다고 주장했고, 1954년에는 50만 개의 당원증을 발급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보다 높은 수치다.)
이탈리아 PCI는 사정이 나았다. 프랑스 PCF가 완전히 고립된 반면 PCI는 넨니가 이끄는 PSI와의 동맹을 유지했다.(1947년 1월 PCI를 마녀사냥 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은 PSI에서 떨어져나가 이탈리아 노동자사회당을 결성했다.) 1948년 3월 선거가 시작됐을 때 두 당은 1946년에 획득한 약 40퍼센트보다 더 많이 득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좌파가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직면해 미국은 기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일착으로 오는 마셜 원조 선박들이 요란한 선전 속에 도착했고, 트루먼은 나치가 노획했던 금金을 이탈리아에 반환하고 29척의 상선을 기증했다. 미국 국무부는 PCI에 투표한 사람들에게는 미국 이민 비자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더 직접적인 조처들도 사용됐다. 위협용으로 미국과 영국 전함들이 주요 이탈리아 항구들에 정박했다. 바티칸도 이에 가세해 PCI·PSI 투표자들에게 고백성사를 베풀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승리를 기대했건만 좌파는 단지 31퍼센트만을 득표하는 데 그친 반면 기민당의 득표율은 48퍼센트로 증가했다.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이탈리아에서도 기업주들이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노동총동맹CGIL을 분열시켜서 피아트 같은 기업들에서 CGIL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28 그러나 언제나 충성스런 스탈린주의자였던 그는 1951년 PCI 7차 당대회에서 소련에 대한 이탈리아 정부의 태도가 바뀌면 그 답례로 노동계급 행동을 온순하게 길들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PCI는 이로부터 입은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전후 당원 수는 1953년 최고에 도달해 2백만 명을 넘었고 그해 22.5퍼센트를 득표했다. 이런 성공 덕분에 PCI는 톨리아티를 독자적인 — 스탈린주의에 비교적 덜 오염된 — 인물로 치켜세웠다.29 참조).
유럽 전역의 공산당들에게 코민포름 시기는 당원 수가 급감하는 시기였다. 페르난도 클라우딘은 다음 수치를 제공하고 있다(위의 표1948년 미국 공산당CPUSA은 “자정 5분 전 노선”으로 알려지게 되는 방침을 채택했다. CPUSA는 새로운 불황, 국내에서 “파시즘”의 승리, 미국과 소련 간의 전쟁 위험을 경고했다.
이 지구 최후의 날 시나리오에 발맞춰 CPUSA는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제3 당” 선거운동에 다걸기(올인)를 했다. 그가 로즈벨트 하에서 전시 부통령을 지내던 때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호의적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월러스는 패배했고, 많은 주요 노조에서 노조 관료들이 CPUSA의 상당한 기반을 무너뜨리고 나섰다.
고립된 CPUSA의 중앙 간부들은 전시 법률에 따라 기소됐고, 1백 명 이상이 수감됐다. 당원들과 옛 당원들은 취업이 금지되거나 국외 추방되거나 전쟁연금이 취소됐다. 위스컨신 주 상원의원 조 매카시의 이름과 결부된 이 마녀사냥 와중에 CPUSA는 내부의 “믿을 수 없는 인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인민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벌어진 숙청을 본뜬 것이었다), 이어 지하로 들어갔다. 그 결과 당원 수가 격감했고, 쓰라린 심정으로 당에서 쫓겨난 당원 수백 명은 FBI의 수사에 협조했다. 한편, 기관지 《영구 평화를 위해For a Lasting Peace》의 명칭이 시사하는 것처럼 코민포름의 전반적 목표는 강력한 평화운동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련 당국이 “평화공존”이라고 부른 것을 받아들이도록 서방 정부들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고전적인 1930년대 민중전선 노선에 따라 국제 민중전선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 당면 목표가 됐다. 1950년 세계평화대회World Peace Congress에서 탄생한 세계평화위원회World Peace Council는 핵무기 금지를 위한 유명한 스톡홀름 호소를 공표했다. “소련의 성인 인구 전체,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성인 인구 전체, 중국인 2억 2천3백만 명”을 포함한 약 5억 명의 지지 서명이 모아졌다.
이 운동은 공산당들의 일상 활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개별 “평화 투사들”의 서명과 주류 사회의 명망가 포섭을 강조하는 방식이 특히 그랬다. 이 운동의 결과는 노동조합 관료 위계의 사다리를 오를 필요성과 맞물려 작업장 조직의 중요성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계급투쟁도 희석시켜 버린 것이었다.
획일체의 첫 균열
31 프랑스의 〈르몽드〉는 이 소식을 “폭탄 같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32
획일적 스탈린 체제에 최초로 균열이 생긴 것은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이 다음과 같은 성명을 공표하면서 드러났다. “코민포름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반反소련적 태도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단지 민족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릴 뿐인 것으로 비난한다.”티토는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대중 운동을 배경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래서 그에게는 독자적인 권력 기반이 있었다. 티토는 철두철미한 골수 스탈린주의자였지만, 자기 나름의 일국사회주의, 즉 민족별로 독자적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식으로 스탈린을 모방하려 한 그의 시도는 유고슬라비아를 또 하나의 위성국 지위로 격하시키고자 한 스탈린의 의도와 충돌하게 됐다.
동유럽에서 대량 처형으로 절정에 이른 여론조작용 ‘공개’ 재판 물결은 이른바 티토 동조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전쟁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지 않고 자국에서 당을 이끌었던 공산당 지도자들은 너무 독자적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티토 비난을 별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스 공산당KKE에게 티토와의 결별은 자살 행위였다. 내전 때 유고슬라비아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제 KKE는 티토와의 연계를 모두 끊어버렸다.(KKE의 국경수비대는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가려 하는 자들에게 발포하라는 당 중앙의 명령을 받았다!) 뒤이은 숙청의 희생자 가운데는 빨치산 군대의 가장 훌륭한 인자들도 많았다. 1948년 가을까지도 CIA가 우려할 만큼 KKE는 우세했지만, 1948년 말부터 전황은 역전돼 KKE에 불리해졌다.
서방 공산당은 모두 판에 박힌 유고슬라비아 비난 성명을 잇따라 발표했다. 대단한 우연의 일치로 프랑스 공산당과 영국 공산당이 모두 똑같은 제목의 책자 《트로츠키에서 티토로》를 펴냈다.
티토는 재빨리 서방 강대국들과 서방 개혁주의자들의 지원을 모색했다. 냉전이 한반도에서 열전으로 끓어올랐을 때 티토는 UN의 개입을 지지했다. 그래서 티토의 이탈은 서방 공산당들의 심각한 파열을 낳지 않았다.
소련의 권위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이 동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49년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의 기대를 거슬러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출발부터 두 강대국의 관계는 불안했는데, 이는 두 나라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바탕으로 관계 맺은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이 잠재적 적敵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은 또한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한 해였다. 미국 국방부는 여전히 핵 우위를 지키기를 바랐지만, 소련이 그런 가공할 무기를 곧 배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핵무기의 간극은 급속히 메워지고 있었다.
실제로 소련은 1953년 8월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 서방 공산당들은 스탈린이 서방 지배계급들에게 압력을 가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위협 무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 소련은 더 효과적인 방어 장치를 개발해 낸 것이다.
33 둘째, 흐루쇼프가 이끄는 소련의 새 지배자들은 스탈린의 대서방 화해 정책을 더 정력적으로 추구했다. 두 블록은 이제 핵무기 세력 균형을 이루며 서로를 응시했다. 그래서 서방 공산당들의 가치는 더욱 떨어졌다. 코민포름은 1953년 사실상 기능을 멈췄다. 비록 공식 해산은 1956년에야 공표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소련에게는 다른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탈린 사망으로 뚜렷이 드러나게 됐다. 첫째, 비교적 현대적인 공업 경제를 관리하려면 더 정교한 수단이 필요했으므로 공공연한 탄압이라는 단순한 정책은 더는 효과가 없었다.34 유고슬라비아는 갑자기 ‘파시스트’ 국가에서 우방으로 바뀌었다. 유고슬라비아를 대대적으로 비방하던 공산당 언론들은 조용해졌다.
마지막으로, 무수히 많은 서방 공산당원들과 그 동조자들이 품고 있던 소련과 동유럽에 대한 목가적 상像이 산산조각났다. 스탈린 후계자들 간의 추잡한 내분도 이 과정에 일조했다. 처음에 보안경찰 수장 베리야가 속죄양이 됐다. 1955년 새 지도자 흐루쇼프는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해 티토에게 양국 관계가 ‘교란된’ 것은 ‘제국주의의 첩자’ 베리야가 날조한 자료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나서 1956년 2월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의 폭탄 연설이 있었다. 그는 연설을 두 번 했다. 공개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은 채 ‘개인 숭배’를 비난하는 데 그쳤다. 비공개 연설에서, 그동안 권력이 노동자나 ‘영도 당’의 손에 있지 않고 사악한 보안경찰이 떠받든 전능한 폭군의 손에 있었음이 폭로됐다. 극소수 트로츠키 지지자들만이 주의를 환기시켰던 문제들에 관한 증언이 나왔다. 즉, 스탈린이 볼셰비키 당 지도자들을 살해했고, 독일 침공 초기의 재앙에 책임이 있으며 개인숭배를 미화한 것이 지적됐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의 개인적 결함 탓으로 돌려졌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고 당면 경제 문제들에 대처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반대자들을 제압해야 했지만, 자신이 속한 지배계급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체제를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스탈린 사망은 이미 동유럽에서 첫 번째 폭발, 즉 동베를린 노동자 항쟁을 불러일으켰었다[1953년 — 역자]. 소련 탱크들이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됐다. 서베를린에 주재하고 있던 서방 당국자들은 소련이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둘 태세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에 대한 최대 타격은 1956년 10월 헝가리 노동계급 대중의 항쟁을 압살한 것과 함께 왔다. 이 항쟁은 1919년 베를린 또는 1936년 바르셀로나의 노동계급 반란의 특징들 — 대중 파업, 노동자 평의회 건설, 무장 시민군 등 — 을 모두 재현했다. 처음에 소련 탱크들은 대중의 저항에 부딪히자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헝가리의 새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수도의 전 지역을 철저히 파괴하려 다시 들어왔다. 옛 공산당원 임레 너지Imre Nagy가 이끄는 새 정부 지도자들은 처형당했다. 사태 전체는 파리 코뮌 진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36 CPGB 대표단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른다고 발뺌했다. 문제의 당대회 자체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거론한 서방 공산당 지도자는 토레즈뿐이었다. 심지어 알바니아 공산당의 엔베르 호자도 흐루쇼프를 칭찬했고 [나중에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한다 — 역자] 죽은 독재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서방 공산당들 내에서 심대한 위기를 낳았다. 처음에 비공개 연설이 있었을 때 대다수 활동가들은 서방 언론의 폭로 보도를 부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 신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고故 J V 스탈린 비판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에 속지 마시오.” 1956년 6월 PCF 정치국은 비공개 연설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사실, 이제는 대중에게 〈뉴욕타임스〉가 토레즈나 PCF보다 더 인정받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의도적으로 연설 내용을 〈뉴욕타임스〉에 흘렸다.) 비공개 연설이 있은 지 꼬박 두 달 후에야 CPGB의 해리 폴릿은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충분한 해명”을 했다. 당시 소련의 공식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스탈린은 생애 말년 20년 동안 대체로 올바른 노선을 실천했지만 … 실수, 권력 남용, 불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스탈린이 점차 보안경찰에 의존한 데서 비롯했다.”그러나 영국 공산당 내에서는 의심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1956년 7월 잡지 《더 리즈너The Reasoner》의 첫 호가 발행됐다.(3호까지 나왔다.) 당원들이 보낸 편지가 잡지에 쇄도했고, 당원들은 잡지를 앞다퉈 읽었다. 편집자 E P 톰슨과 존 새빌은 당 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의미 자체에 관한 심각한 견해 차이. ‘과학적 분석’이라는 주장과 결부된 엄청나게 비합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의 존재. 도그마로 굳어진 이론. 교리 주입으로 경색된 사회주의 교육.
한 걸음 더 나아가 톰슨과 새빌은 스탈린주의의 핵심 신조에도 의문을 던졌다.
역사는 이러한 재검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즉 마르크스주의라는 과학적 방법이 인간 이성과 정신의 최상의 전통 — 휴머니즘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 과 통합될 기회를 제공했다.
40 미국 공산당 전국위원회 의장인 스티브 넬슨은 뉴욕에서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흐루쇼프의 비공개 연설을 낭독했을 때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두 사람은 모두 당원 자격 정지 징계 처분을 받게 된다.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에서 “당 지도자 개인을 과장되게 칭찬하고 아첨하는 경향”이 발전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 당에는 그런 경향이 별로 없었다. … 그런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낯설기 때문이다.”나는 청중석에서 사람들, 특히 나이든 당 지도자들이 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보고를 끝내고 내가 처음으로 논평했다. 나는 대충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러자고 당에 가입한 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런 일을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제 더는 신 같은 존재가 없어야 합니다.”
미국판 〈데일리 워커〉[미국 공산당 기관지 — 역자]는 독자편지 란을 개방해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미국 국무부가 흐루쇼프 비공개 연설 전문을 공개하자 〈데일리 워커〉는 소련 지도부가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사설과 함께 전문을 그대로 게재했다.
서방 공산당들의 분위기가 그런 상황에서 1956년 10월 소련군 탱크가 부다페스트로 진격했다. 소련에 갔던 대표단들이 귀국하고 헝가리 노동자 항쟁이 진압당하자 획일적인 공산당들을 뿌리째 뒤흔든 지진이 시작됐다. 당 지도자들은 소련의 노선을 옹호하는 데 급급했다.
42 그러나 규율이 강력한 PCF조차 당원들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기가 어려웠다. 파블로 피카소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CGT의 투사들은 PCF의 해명이 실린 리플릿을 배포하기를 거부했다. 1957년 2월까지 7만 명이 PCF를 탈당했다.
〈뤼마니테〉[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 역자]는 11월 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PCF 중앙위원회 성명을 실었다. “헝가리에서는 외국의 지원을 받고 잘 무장되고 옛 파시스트 군대의 경험 많은 간부들이 모의한 반혁명 운동이 있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톨리아티가 흐루쇼프의 군사 개입을 충실하게 옹호했다. 1957년 1월 톨리아티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헝가리 항쟁의 — 역자] 목표가 혁명의 성과를 모두 없애고 파시스트 정권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정권은 순식간에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는 중추가 됐을 것입니다.”44 PCI는 CGIL을 계속 통제할 수 있었지만 당원 수가 1956년 2백3만 6천 명에서 1957년 1백79만 명으로 격감했다.
그러나 PCI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PSI 지도자 넨니가 헝가리 혁명을 옹호해 두 당의 동맹은 깨졌다. CGIL도 PCI의 지침을 거슬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CGIL은 … 헝가리에 외국 군대가 개입하게 된 것을 통탄할 일로 여긴다.”이런 위기로 가장 심각하게 흔들린 공산당은 당대의 주요 자본주의 열강이었던 두 나라, 즉 미국과 영국의 공산당이었다. 영국 공산당 지도부는 “헝가리의 백색 테러” 운운하며 소련의 지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당 기관지의 부다페스트 특파원인 피터 프라이어는 헝가리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혁명의 진실을 알리는 기사들을 전송했다. 영국판 〈데일리 워커〉[CPGB 기관지 — 역자]는 이 사건을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CPGB의 역사가인 크리스토퍼 힐은 노동당을 지지하는 〈뉴 스테이츠먼〉과 〈트리뷴〉에 공개 편지를 보내 CPGB 지도부의 견해를 비판한 CPGB 지식인 30명 중 한 명이었다. 당 내에서 이견은 소수 지식인들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항쟁 진압 한 달 후 당의 다양한 기구에서 실시된 당직 선거 결과는 불완전하나마 대강의 그림을 보여 준다. 3천5백82명이 집행부를 지지했고 1천80명이 반대했고 4백14명이 기권했다. 당원의 약 4분의 1이 지도부에 반대한 것이다. 탈당 러시가 시작됐다. 크리스토퍼 힐도 당을 떠났는데, 그는 7천 명이 탈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당 자체의 자료를 보면 1956년 3만 3천95명이었던 당원이 1958년 2월 2만 4천6백70명으로 감소했다. 당 지도부는 탈당자들이 “지식인들이고, 그 중 다수는 확고한 계급적 관점이 없어서 쉽게 공황 상태에 빠지고, 실수와 후퇴를 모든 것의 끝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탈당한 사람들 중에는 전기노조, 소방수노조, 스코틀랜드 광원노조 같은 노조의 지도자들도 있었다!
여전히 당에 충성하는 지식인들 중에는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있었는데, 그는 〈데일리 워커〉(영국판)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민첸티의 헝가리[민첸티는 헝가리의 가톨릭 추기경이다 — 뱀버리]가 십중팔구 반혁명과 개입을 위한 기지가 될 것이고 헝가리와 국경을 맞댄 소련·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에 중대하고 심각한 위험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소련 정부의 처지였다면 우리도 개입해야 했을 것이다.
홉스봄은 “충심으로” 개입을 지지했고, CPGB의 민주주의 결여를 비판하면서도 당에 남아 있었다.
당을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아예 정치를 포기하거나 우경화했다. 그러나 소수는 좌경화해 스탈린주의와 단절했다. 이 1956년 사태와 《더 리즈너》에서 오늘날의 《뉴레프트리뷰》가 나왔다. 한편, 활동가들 가운데 소수이지만 결정적인 한 집단이 트로츠키주의 사상 — 비록 왜곡된 형태로나마 — 쪽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영국에서 혁명적 전통이 부활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1957년 미국 공산당CPUSA 당대회에서는 흐루쇼프를 지지하는 기존 지도부와 견해가 다른 대의원들이 다수였지만 이들은 지도부와 타협했다. [매카시의 — 역자] 마녀사냥과 당내 숙청에서 살아남은 일부 공산당원들에게 헝가리 사태는 최후의 결정타였다.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가버렸고 아예 정치를 포기했다. 반대파의 지도였던 스티브 넬슨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당을 접수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다수파였다. 그러나 게이츠가 일어나서 “나는 나가겠다”고 말하고 차니도 “나도 나가겠다”고 말하는데[게이츠와 차니는 반대파의 핵심 지도자들이었다 — 뱀버리],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뉴욕의 지도부 전체가 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8개월쯤 더 당에 남아 있다가 “어라, 내가 여기서 뭐 하지? 에라, 나도 나가자”고 말하고 탈당했다.
당원 수는 1956년 1월 2만 명에서 1957년 여름 그 절반으로 줄었고 이듬해 여름에는 3천 명까지 급감했다. 한 골수 공산당원은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탈당한 사람들은 공산청년동맹YCL 출신, 히스패닉계 예비군, 대중 운동 활동가들 같은 유망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떠난 뒤 당에는 실제로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고, 우리는 도저히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노선 고수(1960년대 초~1968년)
그러나 헝가리의 충격이 가라앉자 공산당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옛 지도자들의 지도권이 다시 확립됐다. 1960년대 초쯤 서방 공산당들은 많은 경우 당원과 선거 득표의 손실을 복구했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신화는 여전히 강력했던 것이다. 1960년에 소련은 언뜻 보면 단결된 회담에 81개 당의 대표들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긴장이 점점 더 가시화하고 있었다. 소련 지도자들 자신이 서방 공산당들을 점점 더 괄시했다. 냉전의 얼음이 녹아내리자 새 친구들(예컨대 사회민주당)과 새 기회가 소련 지배자들 앞에 열리고 있었다. PCF는 소련 관료의 새 최고 이데올로그인 수슬로프가 1956년 7월 PCF 전당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모멸감을 삼켜야 했다.
소련 공산당은 형제 공산당들과 우의를 강화하는 한편, 프랑스 사회당을 포함해 여러 나라 사회당들과도 관계를 확립하고 발전시키려 합니다. 이러한 접촉이 평화와 사회주의의 대의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사회당이 참여한 정부가 알제리에서 야만적인 식민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소련 당국이 점점 더 사회민주주의화 추세를 은근히 조장하고 있었다. 일찍이 1951년에 CPGB는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의 길을 자세히 설명한 강령 문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을 채택한 바 있다. 이 강령의 초안은 코민포름의 전문가들이 스탈린의 직접 격려를 받아가며 작성했다.
50 〈프라우다〉는 이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의 길’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톨리아티의 글을 실었다.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서방 당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동맹해 “의회에서 견고한 다수를 확보해서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를 진정한 민중의 의지를 실현할 도구로 바꿀” 가능성에 대해 말한 뒤그래서 1950년대 말 내내 PCF는 사회당과 (또는 가능하다면 그 누구와도) 동맹을 모색했다. 이 때문에 알제리 전쟁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고, 알제리 이민자들에 대한 학살이나 다름 없는 만행에 맞서 대중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두 헛일이었다. 당은 여전히 고립된 채 남아 있었다. 1958년 제4공화국은 알제리 전쟁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통치권자인 드골에 의지하고자 했고 드골은 자신이 대통령제로 프랑스를 운영해 나갈 수 있다고 장담했다. 드골의 지위를 승인하는 국민투표에서 PCF의 득표는 1백만 표나 감소했다. PCF의 아성인 파리의 ‘적색 지대’에서 드골이 유효 표의 68퍼센트를 얻었다.
그러나 PCF는 이러한 일시적 지지 손실을 벌충할 수 있었다. PCF는 대체로 불신받는 사회당보다 당원 수와 득표 수가 모두 여전히 더 많은 당이었다. 드골 집권기에 PCF는 당의 고립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면서도 언사의 전투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65년 PCF는 사회당 지도자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해 사회당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공산당 지도 하에 CGT는 주기적 하루 파업 형태로 드골에 겉치레로 반대했다.
이탈리아 PCI는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 넨니가 이끄는 PSI와의 동맹 붕괴는 PSI가 기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1963년에 정점에 달했다.
사회당이 우경화하자 PCI가 선거에서 사회당을 앞질렀다. PCI는 책략을 부려서 CGT를 계속 통제할 수 있었다.
PCI는 또한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이려고 애썼다. 1956년 톨리아티는 다중심주의라는 개념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각국 공산당이 완전히 자율적이 된다는, 즉 소련 당국의 지령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구상이었다. 비록 1961년 이 견해를 공식 철회할 수밖에 없었지만 톨리아티는 자율화 추세를 촉발하는 구실을 한 셈이었다. 이미 톨리아티는 나토 지지 문제 말고는 PCI가 기민당-사회당 연립정부에 들어가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밝힌 바 있었다. 나중에 이 조건도 포기하게 된다.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은 여전히 대중적 지지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두 나라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각각 20퍼센트와 30퍼센트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에서도 공산당은 반정부 지하 운동에서 핵심이었다. 그러나 북부 유럽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1956년 서독 정부는 [취약한] 공산당을 불법화할 자신이 있었다. 1966년 벨기에 공산당은 기관지 발간을 포기했고, 오스트리아 공산당은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영국 CPGB는 점점 더 의회주의 노선을 강조했지만, 선거가 거듭될수록 이미 낮은 득표율이 더욱 낮아졌다. 출마하는 후보는 점점 더 늘었는데도 그랬다. 1945년 21명의 후보가 10만 2천7백80표를 얻은 반면, 1970년에는 58명의 후보가 3만 7천9백66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 사이에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최대의 분열을 겪게 됐다. 1963년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단절한 것이다. 4년 내에 그들은 국경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분열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내연하고 있었다. 양편 모두 상대방을 에둘러서 비난했다. 핵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주장과 함께 중국 지배자들이 사용한 급진적 언사는 대부분의 서방 공산당들에게 거의 매력을 주지 못했다. 당시 유럽의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아주 소규모의 아주 경직된 스탈린주의 조직 말고는 아무것도 건설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권위도 다시 실추됐다. ‘일국적 노선’은 이제 서로 군사적으로 치고받는 두 ‘공산주의’ 국가들을 의미했다.
1968년 5월과 그 후
52 처음에 PCF 지도자 조르주 마르셰는 조야한 노동자주의를 내세워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PCF는 곧 태도를 바꿔 학생들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이 확대돼 총파업으로 발전하자 CGT는 파업 운동을 승인했다.
파리에서 일어난 1968년 5월 학생 시위는 노동계급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촉발하고 서구가 노동계급 혁명의 망령에 사로잡히게 했다.53 사회당과 옛 급진당을 압박해서 선거 동맹을 결성하려 한 것이다. CGT는 단체협상 과정에서 사용자들과 정부가 자신을 중요한 세력으로 대우해 주기를 바랐다. 이 점에서 CGT의 소망은 여느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고전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드골이 서독으로 달아나서 군장성들과 사태 대처 방안을 논의하는 동안 권력은 거리와 공장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PCF의 구호들은 이러한 노동자 대중 투쟁을 반영하지 못했다. 5월 17일 PCF는 “프랑스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진정한 현대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라”고 촉구했다.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PCF는 프랑스의 5월 동안 운동의 선두에 서야 했고 그 다음에는 운동을 더 안전한 방향으로 돌려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 CGT는 공장 점거를 지지하고 파업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CGT는 공장 점거와 파업이 순전히 경제적 쟁점을 둘러싼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CGT 간부들은 급진적 학생들이 파업 노동자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PCF는 거리로 몰려나왔지만 선거 실시와 좌파의 연합 공천을 주장했다.
노동계급은 여전히 PCF를 자신의 당으로 보았다. 혁명적 좌파의 소그룹들은 너무나 미약해서, 프랑스를 마비시킨 노동자들의 힘이 더 확대돼 드골을 쫓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확대될 수 있다는 주장을 실천할 수 없었다.
드골이 반대파들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자, CGT 위원장 세기Seguy는 선거를 환영한다고 호응했다. 그와 동시에, 정부와 사용자들은 임금·노동시간·노동조건에서 대폭 양보했다. CGT와 그 밖의 노동조합 연맹체 지도부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러한 양보 조처를 받아들이고 일터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5월의 혁명적 파고가 6월에 가라앉자 노조 지도자들은 일터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많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5월은 이렇게 끝났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5월 같은 폭발적 투쟁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 시위가 1969년의 “길고 뜨거운 가을”을 촉발했고, 그래서 1969년 대규모 공단들로 대중 파업이 확산됐다. 혁명가들은 공장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지만 명확성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CGIL 간부들의 영향력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CGIL 간부들은 1971년쯤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았다.
1968년 5월의 사건들에 이어, 소련의 행동이 촉발한 또 다른 위기가 곧 뒤따랐다. 1968년 8월 소련군 탱크들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프라하의 봄’을 분쇄하러 나선 것이다. 체코의 개혁파 지도자들이 말로만 떠드는 동안 학생과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파업에 돌입했다. 저항이 실제의 전투로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인민(민중)이 스탈린 체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개혁들과 자유화 공약은 서방 공산당들의 찬양을 받았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1968년 사태와 ‘프라하의 봄’ 분쇄로 서방 공산당들의 사회민주주의화가 촉진됐다. 그들은 의회 밖의 게토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공산당은 정부 참여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그들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탈출하고 싶어했고 1956년의 거짓말들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당원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소련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60년대 말쯤에는 서방 공산당들이 소련에게 거의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 공산당PCE의 산티아고 카리요[‘카릴료’로도 읽는다]와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소련 지도자 브레즈네프와 만나 서로 관심사를 논했을 때 브레즈네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 공산당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허풍 떨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 어쨌든 50년 동안 그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타협, 긴축, 유러코뮤니즘(1970년대 중엽 이후)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서방 세계 거의 전역에서 노동자 투쟁이 고양됐다. 여러 나라에서 혁명 조직들이 등장해 소수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혁명 조직들은 대부분 중국과 마오쩌둥의 급진적 미사여구에 기대를 걸었지만,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전통을 받아들인 혁명 조직들도 있었다. 1969년 11월 PCI는 월간지 《마니페스토(선언)》를 발행하기 시작한 루치오 마그리와 로사나 로산다, 그 밖의 사람들을 축출했다. 《선언》은 계급 동맹을 부정하고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의제에 올랐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언》 그룹, 노동자전위(아방과르디아 오페라이아), 계속투쟁(로타 콘티누아)은 전성기에 조직원이 모두 합쳐 1만 5천 명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다.
극좌파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성했다. 그러나 서방 세계 전체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극좌파 혁명가들의 역량은 도저히 사태의 규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심지어 특정 투쟁을 지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새롭고 너무 작아서 기존 노동자 정당들의 영향력을 분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한 가지 결과는 개혁주의 정당들과 공산당들의 정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 폭발적 투쟁에서 득을 봤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개혁주의 정당과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전진을 빗나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어느 정도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PCF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미테랑의 사회당과 ‘좌파연합’에 참여했다. PCF는 득표율과 당원 수에서 여전히 사회당보다 더 큰 당이었다. PCI에게도 당시는 성장의 시기였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약 1만 5천 명의 청년이 새로 가입했고, 당의 득표도 꾸준히 증가했다.
55 민중연합이 언제나 사용자, 군부, 미국 제국주의로 이뤄진 강력한 동맹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이러한 저항은 노동계급의 급진화를 부추겼는데, 민중연합은 이렇게 날로 급진화하는 저항 운동을 의회적 통로로 이끌고 가려 했다. 마침내 내전 위협이 제기되자 민중연합은 노동계급에게 행동하지 말고, 거리에 있지 말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래서 19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이 지휘하는 야만적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1970년대 중반의 이러한 사태 전개는, 사회민주주의에서 고전적 개혁주의 정치로 양질전화가 일어나게 만든 라틴아메리카의 한 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1970년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선출돼, 사회당과 공산당과 여러 급진 정당의 연립정부인 민중연합 정부의 수반이 됐다. 아옌데는 압도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의회적 길’이 시험대에 올랐다. 전 세계 공산당들이 ‘칠레의 실험’을 주목했다. 지면 제약 때문에 여기에서 칠레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칠레의 비극을 보고 PCI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민중연합이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나아가서 상황을 양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이탈리아 상황을 언급하면서 그는 새 출발을 호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51퍼센트를 득표한다고 해서 좌파 정당들이 집권해 새로 부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를 절반으로 쪼개는 것이 우리 나라에 이롭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를 쇄신하는 실험을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칠레에서 일어난 일이다. … 경제 발전, 사회 쇄신 그리고 민주주의적 진보의 확실한 길을 마침내 열어야 하므로 … 우리가 새롭고 위대한 ‘역사적 타협’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할 필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급박해지고 있다.
타협은 기민당과 이뤄졌다. 이탈리아 사회에서 서로 다투는 계급들의 양대 정당이 서로 수렴하도록 촉구하는 데 내전의 망령이 이용됐다. 영국에서 에릭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것이 강조하는 바는 단결과 되도록 폭넓은 지지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역사적 타협’이라고 부르는 것, 즉 중간계급 가운데 잠재적 동맹 세력이나 정치적 중립 세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사회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인 것 같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아주 중요하므로 특히 강조해야 한다. 첫째,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위기가 이탈리아 자체에서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탈리아의 노동운동은 유럽에서 가장 전투적이었다. PCI는 서방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었다.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파도 세계에서 가장 컸고, 그래서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PCI와 PSI가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널리 퍼져 있었다.
둘째, ‘역사적 타협’은 다른 나라들의 부르주아지가 개혁주의 정당과 스탈린주의 정당을 활용해 “사회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방편으로 채택됐다. 그것은 노동당 정부 하의 영국에서 노동조합들이 ‘사회 계약’에 동의하게 만드는 데 사용됐다. 스페인에서도 PCE와 그들이 통제하는 전투적 노동조합연맹이 몬클로아 협약에 서명하게 만드는 데 사용됐고, 그래서 프랑코 독재가 안정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지렛대 구실을 했다. 셋째, PCI는 이제 자신의 과거와 역사적으로 단절했다. 이것을 보여 주는 지표 하나는 베를링구에르가 NATO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1976년 그는 기자에게 NATO가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의 길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말했고, 동구권을 추가로 언급하면서 “담장의 이쪽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1976년 선거에서 PCI의 득표율은 7퍼센트에서 34.4퍼센트로 증가했다.(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기민당의 득표율도 38.7퍼센트로 상승했다. 좌파가 다수를 획득하지 못하자 어느 정도 사기 저하가 일어났다. ‘역사적 타협’을 바탕으로 PCI는 기민당 정부를 지지했지만 정부 참여를 허용받지 못했다. 1977년 공산당은 기민당이 내놓은 긴축 조치들로 이뤄진 ‘비상 강령’을 지지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그 조치들이 “영국 보수당이 간단히 코웃음쳐 넘겨버릴 수 없는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논평했다.
1979년 기민당은 ‘역사적 타협’을 파기하고 PCI에 기대지 않고도 통치할 자신이 있게 됐다. 그해 선거에서 PCI의 득표율은 4퍼센트나 떨어졌다. PCI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어떤 관찰자는 ‘역사적 타협’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PCI는 국제적 게임 규칙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인플레야말로 최대 적인데, 인플레를 잡으려면 엄청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이 성립됐다. 그것은 정부가 완전고용과 기존 구매력을 지켜주는 대가로 노동계급이 긴축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국가 주도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없다고들 생각했다. 당시의 유력한 상황에서 이것은 성장 중지를 뜻했다. 그래서 이제 노동계급은 나중에 (훨씬 나중에) 경제 성장이 이뤄질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침내 크락시[기민당과의 연정에 참여한 PSI 지도자 — 뱀버리] 집권기에 경제가 성장하자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은 패배했고, 그래서 ‘개혁 없는 현대화’의 기반이 마련됐다.
노동당 정부를 기억할 만큼 나이 든 독자들은 아마도 1976~79년 힐리의 전략이 이와 비슷한 전제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비교는 아주 정확한 것이다.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은 후퇴로 바뀌었고, 생활수준은 낮아졌고, (대처가 달성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통화주의’나 ‘대처주의’로 알려진 정책들이 도입됐다. 두 나라 모두에서 승자는 우파였다.
PCI의 과거와의 단절은 ‘유러코뮤니즘’으로의 전환에서 결정적인 계기였다. 유러코뮤니즘의 핵심적 특징은 소련이나 “현실 사회주의”와 단절할 필요성이었다. 상당수 서방 공산당들은 스탈린주의의 언사와 소련 블록에 대한 충성을 포기해서 자국 지배자들에게 순응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어쨌든 1950년대에 그들이 고립당한 이유는 바로 소련과의 관계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뚜렷이 구별됐다는 점이다. 1977년 스페인 공산당 사무총장 산티아고 카리요는 《유러코뮤니즘과 국가》를 출판했다. 그의 책은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에서 많은 것을 차용해서 스탈린주의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 책의 목적은 스탈린주의를 혁명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생각 자체와 공공연하게 결별하는 것이었다. 카리요는 자본주의 국가를 “폭력으로 철저히 파괴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유용한 도구로” 변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강령에서 빼버리고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렇게 유러코뮤니즘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이끄는 사회당은 자기혁신을 이룩하고 새롭게 지지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좌파연합’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미테랑은 좌파연합에서 갈수록 중요한 인물로 부각됐다. 1976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산업 노동자의 38퍼센트가 사회당에 투표하겠다고 응답한 반면, 34퍼센트가 공산당에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1977년 조르주 마르셰가 이끄는 PCF는 사회당과 결별하고 미테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동맹자”라고 비난했다. 일련의 분파 투쟁, 출당, 사임 사태가 꼬리를 물고 오랫동안 이어졌다.
PCF는 ‘좌’선회했다. 과거의 스탈린주의 유산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PCF는 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를 무력으로 분쇄한 야루젤스키 장군의 쿠데타를 지지하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했다. PCF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선전의 초점을 미테랑과 사회당을 비난하는 데 맞췄다. 그와 동시에, PCF는 인종차별주의자들 같은 프랑스 사회의 아주 역겨운 인자들에게 영합하려 했다. 인종차별주의가 떠오르자 PCF의 신문은 “실업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이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PCF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81년 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했을 때 PCF의 득표율은 16.1퍼센트로 떨어졌다. 그 뒤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추락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스튜어트 홀은 1987년 대처가 선거에서 세 번째 승리하자 “내가 지금 어렴풋하게나마 희망을 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탈리아 공산당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PCI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을 찾기는 힘들었다. 1940년대 이래로 PSI는 선거에서 언제나 PCI에 뒤졌으나, ‘역사적 타협’ 이후 PSI의 운명이 역전될 듯했다. 1987년 선거에서 PCI의 득표율은 지난 선거보다 3.3퍼센트 떨어진 26.6퍼센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PSI의 득표율은 2.9퍼센트에서 14.3퍼센트로 상승했다. 1976년 PCI의 득표율은 PSI의 네 배였다. 1987년 두 정당의 득표 비율은 2:1이었다. 1988년 일련의 보궐선거에서 PCI의 득표율은 22.8퍼센트, PSI의 득표율은 18.1퍼센트였다.(1972년 PSI의 득표율은 9.63퍼센트였다.) PCI는 PSI가 미테랑처럼 성공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1985년 PCI는 임금-물가연동제(인플레율에 상응하는 자동적 임금 인상)를 방어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사회당의 크락시가 주도하는 사회당·기민당 연립정부는 임금-물가연동제 폐지를 공약해 놓은 상태였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믿고 PSI를 주되게 공격했다. 결국 크락시가 밀라노·토리노·제노바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3백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이러한 결과는 이탈리아 노동계급이 입은 손해와 PCI의 쇠퇴가 반영된 것이었다. PCI는 ‘역사적 타협’ 이후 효과적 전략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1987년까지 PCI의 구호는 모호한 ‘민주적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1983년 크락시의 PSI는 밀라노·토리노·로마·나폴리·베네치아에서 PCI와의 선거 동맹을 깨버렸다. PSI는 기민당 정부에 다시 참여하게 됐다. 1987년 PSI는 수권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PSI 선거 후보 명단에 구이도 로시 같은 금융업자도 포함시켰다. 크락시와 PSI는 경제 회복 국면에서 집권한 덕을 봤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PCI는 동유럽과 소련의 위기가 심화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처음에 PCI의 새 지도자 아킬레 오케토는 고르바초프 현상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1989년 3월 PCI 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가 대형 화면으로 연설을 했다. 오케토는 당이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PCI의 구호는 이제 ‘강력한 개혁주의’였다. 반면에 PSI는 약한 개혁주의라고 오케토는 말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PCI는 크락시에게 새 협약을 제안했다. 강력한 개혁주의는 자본가 계급에게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 쓰디쓴 약이었다. 오케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많은 시장경제와 더 작은 국가라는 정책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보수적인 고참 당원들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시장경제와 더 나은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문제의 조건들을 바꾸고 있다.”
동유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재촉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흘 있다가 오케토는 볼로냐로 가서 PCI가 ‘재구성’돼야 하고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바꿔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8개월 전에만 해도 그는 이러한 행동을 반대했다. 그 연설 뒤에 오케토와 영국 노동당의 닐 키녹과 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사이에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마르크시즘 투데이》에 실린 에릭 홉스봄과의 인터뷰에서 오케토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세 단계를 거쳤다. 첫째, 우리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비판적인 구성원이었다. 둘째, 우리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셋째, 우리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떠났고, 우리 자신이 유럽 좌파의 일부라고 자처했다. …
개헌을 약속한다면 기민당도 포함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0년 3월 볼로냐 당대회에서 PCI는 당명에서 ‘공산’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참관인은 PSI의 크락시였다. PCI는 또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제2인터내셔널의 후신으로, 독일 사민당이 주도하는 국제적 반공 기구] 가입을 발표했다. 이러한 추세를 보고 크락시는 재빨리 선수를 쳐서 당명을 사회주의통일당PUS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이 PCI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1990년 5월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PCI의 득표율은 1985년 지자체 선거보다 5퍼센트가 떨어졌다. 이러한 퇴조의 근본 원인은 1976년 이후 이탈리아 노동계급 운동의 쇠퇴와 그에 대한 PCI의 대응 — 지속적인 우경화 — 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PCI가 서서히 몰락했다면, PCF는 놀라우리만큼 급속히 붕괴해서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1981년에 PCF는 미테랑과 사회당을 비판하는 선거 운동을 강력하게 벌이고 돌연 태도를 바꿔 당원 두 명이 미테랑 정부에 입각하는 데 동의했다. 이 시기 내내 PCF는 미테랑의 긴축 정책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1984년 PCF는 두 각료 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테랑 정부에서 사임했다. 1986년 PCF가 기록한 9.7퍼센트의 득표율은 나치인 장-마리 르펜의 국민전선의 득표율과 같은 것이었다. 1988년 PCF는 겨우 6.76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국민전선의 득표율은 14.38퍼센트였다.
PCF는 스탈린주의 언사에 집착하다가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자 새로운 문제들에 부딪혔다. 1988년 12월 PCF 사무총장 조르주 마르셰는 페레스트로이카가 [프랑스까지 못 오고] 소련 국경에서 멈췄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PCF의 전후戰後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중앙위원 피에르 쥐캥을 중심으로 반대파가 형성된 것이다. 쥐캥의 반대파는 1986년 PCF의 선거 참패를 분석하기 위한 특별 당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여 3천 명의 서명을 받아 냈다. 마르셰는 그러한 행동이 분파주의적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1988년 쥐캥과 지역 지도부와 CGT의 상당수 주요 인물들이 탈당했다. 쥐캥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와 PCF와 경쟁했다. 에르네스트 만델이 이끄는 제4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의 프랑스 지부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은 쥐캥을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치 지형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에서 혁명정당 건설의 가능성이 새로운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쥐캥은 2.1퍼센트를 득표했다. LCR의 경쟁 조직인 노동자투쟁당LO은 직설적인 혁명적 강령을 내걸고도 2퍼센트를 득표했다. 쥐캥 지지자들은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세 경향으로 분열했다. 첫째 그룹(쥐캥 자신을 포함한)은 녹색당 가입을 주장했다. 둘째 그룹은 ‘공산당 혁신’을 옹호했다. 셋째 그룹은 ‘집권당 다수파’의 일부가 되자고(즉, 미테랑 진영으로 합류) 주장했다.
1990년쯤 프랑스의 여러 지역에서 PCF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됐다. 노동자 2만 3천 명이 고용된 소쇼 소재 푸조 공장이 있는 두Doubs 주州에서도 그랬다. CGT 안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관료들은 공산당을 탈당해 사회당에 가입했다. 공산당 지도자 마르셰가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지배자들과 너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공산당은 더욱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타도됐는데도 마르셰는 여전히 스탈린 체제들이 “세계적으로 긍정적 구실”을 했다고 평가하면서 루마니아 자체의 “성장 문제들”만을 언급했다! 또 다른 고참 지도자 자크 드니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현재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세력에게 더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최근에 나는 베를린을 방문해 베를린이 자본주의에 합병된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 NATO는 전진했지만 바르샤바조약기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독일 통일이 정의의 승리라는 소련 노보스치 통신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 나는 동지들이 어떻게 계속 장밋빛 전망 속에서 사태를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지지 감소로 애를 먹고 있었다면, 그리고 PCF가 신경성 식욕감퇴로 애를 먹고 있었다면, 영국 공산당은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1990년 5월 CPGB 주간지 《7일》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CPGB는 《7일》의 발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 주문 부수와 구독신청 부수가 현재 3천7백 부를 밑돌고 있다.” 한 달 뒤 〈인디펜던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어제 CPGB는 ‘공산주의’라는 끔직한 단어를 당명에서 삭제해서 동유럽 공산당들의 사례를 따르는 최초의 공식적 조처를 취했다. …
어떤 공산당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선택들을 따져볼 때 나는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존속시키는 결정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CPGB의 단말마적 고통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CPGB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처럼 쇠퇴하는 조직들은 대부분 곧 두 손 들고 말 것이다.”
1990년 가을 미국과 서방 군대가 이라크를 침공하려고 결집하면서 걸프에서 고조된 전쟁 위협은 서방 공산당들이 제국주의 반대를 형식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조차 포기했음을 한층 명백히 보여준 증거였다. 이탈리아 PCI는 세 경향으로 분열했다. 조르지오 나폴리타나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는 범유럽 중도좌파 연합에 참여하려 했다. 당 사무총장 아킬레 오케토와 현 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도파는 우파보다 약간 늦게 우경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소련 당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였던 인물인 아르만도 코수트, 전임 당 지도자 피에트로 잉그라오와 극좌파 PdUP[《선언》 그룹과 사회당 좌파가 연합해 만든 프롤레타리아통일당 — 역자]의 옛 지도자들인 루치오 마그리와 루치아나 카스텔리나를 중심으로 늙은 보수주의자들의 동맹이 이뤄졌다.
이탈리아 정부가 걸프에 전함을 파견해 미국을 원조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PCI 지도부는 기권했고, 그래서 UN의 이라크 개입을 사실상 지지했다. 잉그라오는 전쟁 몰이를 비난했지만, 그와 좌파는 의회에서 퇴장해서 정부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CPGB의 국제서기 크리스 마얀트는 “기계적 평화주의”를 비판하면서 서방의 개입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CF는 고르바초프와 비슷한 말로 이라크를 비난하면서, 모든 개입이 UN의 깃발 아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외?
두 나라의 공산당은 이런 쇠퇴 양상의 예외처럼 보였다. 하나는 칠레 공산당이고, 다른 하나는 남아공 공산당이었다.
1973년 군사 쿠데타 전에 칠레 공산당CPC은 각종 선거에서 보통 15~20퍼센트를 득표했다. 한 논평가는 CPC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규범과 절차, 특히 기민당의 ‘진보적’ 부문을 겨냥한 광범한 동맹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 유혈 낭자한 군사 쿠데타와 그 후의 사태에 이데올로기적·조직적으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쿠데타 후 수많은 당원이 살해당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시간이 흐르자 ‘국내’ 지도부가 새로 등장해서 피노체트 독재에 대항하는 정치·군사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83년 피노체트 독재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이 산티아고 거리에서 되살아났다. 저항이 부활하는 데서 공산당은 핵심 구실을 했다.
1983년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전선’이 무장 투쟁을 시작했고, 3년 후 피노체트를 암살하는 데 성공할 뻔했다. 망명중인 옛 공산당 지도부는 애국전선의 뜻을 따라야 했다.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칠레를 예의 주시했고, 이제 칠레 공산당은 1973년의 도살자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당은 희망의 횃불이었다.
그러나 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1986년에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피노체트 암살 기도 후에 중도우파 야당 연합은 CPC나 민중 저항 단체들과의 관계를 모두 단절했다. 이런 분열과 잇따른 빈민가 탄압으로 저항이 잦아들었다. 옛 지도부와 옛 전략이 다시 득세했다.
코르발란[공산당 사무총장]은 칠레 잡지 ASPI와의 인터뷰에서 군부와 대화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민중연합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살바도르 아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서 대통령 취임 전까지 아주 긴박했던 순간에 우리 공산당원들은 고위 군장교들과 접촉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들이 신임 대통령과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는 군장성들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 그들은 우리를 여러모로 잘 알게 됐습니다. … 그 중 여럿은 우리를 잘 알게 됐고, 우리의 성공과 정직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인터뷰 뒤에, 피노체트의 1980년 선거를 보이콧한다는 당 방침이 폐기됐다. 당은 지지자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촉구했다.
볼로댜 테이틀보임[칠레 공산당 중앙위원 — 역자]은 1988년 망명에서 돌아오는 길에 〈엘 파이스El Pais〉 신문 기자가 민중연합 경험에 대해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민중연합의 일부 세력들은 단계를 혼동해서, 신속하게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단계를 앞당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칠레에서 가능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오히려 우파의 선전 공세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전선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공산당은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이끄는 민주조정위원회를 지지했다. 아일윈은 1973년 쿠데타를 지지했던 기민당원이었다. 공산당은 군대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동맹에 공식 참여하지는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1989년 12월 아일윈이 선거에서 승리해 피노체트의 후임 대통령이 됐다. 피노체트 자신은 여전히 총사령관 직을 유지했다. 피노체트가 이끄는 보안위원회가 ‘민주화 이행’ 과정을 감독했다. 군장교들에 대한 보복은 일절 금지됐고, 군대는 경제의 15퍼센트를 계속 지배할 수 있었다. 1990년 10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대규모 탈당과 공산당의 경직된 태도에 대한 비판이 당 내에서 계속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 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사망하고 지난 3월 칠레에 민주주의가 복원된 것이 당내 이견을 부채질했다. CPC의 미래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면, 당이 ‘민중 항쟁’과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전선의 게릴라 운동을 지지하는 문제나 민주집중제에 대한 강력한 이견이 표출된다.
최근 당 활동가 488명이 중앙위원회에서 비판자들이 ‘제거’된 후 중앙위원회가 보이는 ‘억압적 태도’를 비판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공산당의 주요 지식인인 루이스 과스타비노는 CPC 지도부에 도전하면서, 적대 행위나 무장 행동을 선동하지 못하게 금지할 것과 공허한 혁명적 미사여구를 대체할 분명한 정치 프로젝트 논의를 장려하라고 요구했다.
사기 저하가 칠레 전역으로 확산·심화하면서 공산당도 사분오열하는 듯하다. 과스타비노는 CPC 지도부의 요청을 무시한 채 애국전선을 강력히 지지해서 자신의 우경화를 물타기했다.
1989년 10월 28일치 《이코노미스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대다수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처음에 성장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쇠퇴했다. … 남아공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 요즘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흑·녹·황 삼색기가 나타나는 곳마다 적기가 뒤따른다.” 1990년 3월 남아공 공산당SACP은 ANC와 함께 합법 단체가 됐다. SACP의 규모는 급속하게 커졌다.
1984년 흑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저항이 분출한 후 SACP는 전에 소련에 충성하던 강경 스탈린주의 정당을 그리워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공산주의가 후퇴한 반면 남아공에서는 공산주의가 흑인 대중 사이에서 분명히 인기가 많다. 1986년 여름 타운십township[남아공의 흑인 격리 거주 지역 — 역자] 항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SACP는 “민중권력의 시작”이라는 글을 발표할 만큼 자신이 넘쳤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때가 올 것이다. 아직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우리 혁명의 발전 수준을 노동자들의 연간 파업 일수나 특정 시기에 우리가 벌인 군사적 전투의 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에서 우리가 조직화를 지원할 민중 코뮌의 수, 아파르트헤이트 구조의 폐허 위에 건설할 민중 코뮌의 수로 평가할 그런 때가 말이다. …
이것은 급진적 전망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여전히 의제가 아니었다. SACP는 1962년 강령 “남아공 해방으로 가는 길”에서 남아공에 존재하는 것은 “특별한 종류의 식민주의”라고 주장했다. 즉, 착취자 백인 제국주의 민족과 흑인 식민지 민족이라는 두 가지 사회가 서로 중첩돼 존재한다는 것이다. SACP의 목표는 ANC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흑인들과 관련해서는 “지금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는 첨예한 또는 적대적 계급 분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SACP 사무총장인 조 슬로보는 ‘민주주의 국가’의 성격을 분명히 밝혔다. 1986년 12월 그는 《마르크시즘 투데이》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방 이후에는 혼합 경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흑인 중간계급과 흑인 소부르주아지가 성공하고 번영할 것입니다.”우리의 당면 과제는 우리의 새로운 해방구를 관리하는 것이다. … 민중 코뮌의 목표는 그 해방구에서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는 것이다. 학교, 임대 사무실, 병원, 운동장, 술집과 그 밖에 타운십에 존재하는 국유 시설은 지역사회가 관장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서비스가 더는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운영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렇게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의 분리를 강조했기 때문에 SACP의 선전은 대부분 ‘노동자주의자들’, 특히 신생 흑인 노동조합 연맹체인 남아공 노동조합회의COSATU 안에 있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그들은 계급 동맹을 거부했고 사회주의 투쟁을 강조했다. 그래서 SACP의 잡지인 움세벤지Umsebenzi[노동자라는 뜻 — 역자]는 1987년 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노동조합 강령에 공식적으로 포함시키려는 성급한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스탈린 시대를 연상케 하는 트로츠키주의 비판이 뒤따랐다. 예컨대, 1986년 조 슬로보는 사회주의가 의제에 올랐다고 비판하는 좌파들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재앙적인 폴 포트 철학의 토착 버전일 뿐이다.”
1986년 대통령 보타가 강요한 비상사태는 ‘민중 권력’이라는 원대한 포부에 찬물을 끼얹었다. 남아공 군대가 출동해서 타운십 저항을 분쇄했고, ANC의 게릴라들은 이렇다 할 무장 투쟁을 벌일 수 없었다. 1989년 SACP 7차 당대회는 새 강령 “권력으로 가는 길”을 채택했다. 그 강령은 기존의 무장 봉기 노선을 폐기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화, 협상, 정당한 타협과 무장 투쟁을 마치 상호 배타적인 것처럼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강조는 원문) 남아공 정권의 필요 때문에 1990년 3월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고 ANC와의 협상이 시작되면서 협상을 통한 타결 가능성이 열렸다.
동유럽의 위기는 SACP를 비켜가지 않았다. 올해[1990년 — 역자] 초에 조 슬로보는 《사회주의는 실패했는가?》라는 소책자를 펴낼 수밖에 없었다.(그가 말한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에 존재한 체제였다.) 그는 전에 SACP가 선전했던 미사여구를 버리고 “스탈린주의”가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하고, “사회주의 세계의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인 명령 경제”를 비난하면서 이 때문에 그가 “사회주의적 소외”라고 부른 것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만델라가 석방됐을 때 SACP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미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하고 있다. 하나는 소련 자체에서 지속되는 위기다. 이 위기의 결과 하나는, 미국과 데탕트를 추구하는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남아공과 칠레 같은 지역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싶어 안달이라는 것이다. 두 나라 공산당은 모두 해외 망명 기간에 소련과 긴밀한 관계였다. 앞서 말한 전환은 어느 정도 소련이 주도한 것이었다.
71 카슨은 전에 ‘자유 헌장’[ANC, 남아공 인도인 회의, 남아공 민주당원 회의, 유색인종 회의 등으로 구성된 남아공회의동맹의 기본 원칙을 담은 헌장. 평등과 자유, 민주주의와 기본권 보장, 토지 개혁, 은행·광산·독점기업 국유화 등이 골자다 — 역자]이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적극 옹호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대중이 보기에 여전히 사회주의나 노동계급을 표상하는 바로 그 조직의 지지자들이 이제 만델라 석방으로 부풀어오른 온갖 기대를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다른 문제는 협상을 통한 타결을 추구하다가 단계론이 더욱 확장됐다는 것이다. 케이프타운에서 발행되고 SACP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잡지 《뉴 이어러New Era》에서 토니 카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투쟁의 당면 과제는 민족 민주 국가 수립이 아니다. 정치적 경쟁이 지속될 수 있는 민주적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다.”이 새로운 현실주의로의 전환은 비극이게도, 노동조합 내에서 SACP를 가장 강경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이 SACP로 기어들어간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것은 금속노조 지도자인 모제스 메이에키소가 SACP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1980년대 중반에 금속노조는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 투사들과 지식인들의 네트워크의 핵심이었다. 1985년 SACP가 민중 권력을 이야기하고 대중 동원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 네트워크는 SACP와 ANC, 그리고 그들의 단계론을 철저하게 의심했다. SACP는 이 투사들과 지식인들을 “노동자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투사들과 지식인들이 이제 기존의 견해를 버리고, SACP를 “광범한 당”이라고 주장하면서 SACP에 가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환과 함께, 주요 흑인 노동조합 연맹체인 COSATU의 관료주의화 증대와 남아공 정권의 노조 지도부 포섭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의 실험’을 둘러싼 논쟁은 혁명의 포기로 이어졌다. 금속노조 지도자인 알렉스 어윈은 전에 ‘노동자주의’를 지지하는 주요 지식인이었는데, 이제는 노동자 통제나 자주관리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혼합경제를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남아공 경제의 산업 효율성과 노사정 협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가장 먼저 이동한 사람이 됐다.
ANC/SACP 동맹이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투쟁의 초점이 없다 보니 남아공 정권이 잉카타자유당 같은 우익 세력을 이용해 타운십에서 ANC 지지자들을 폭력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정권은 고전적인 반란 진압 수법을 쓰고 있다. 즉, 장기간 투쟁에 뒤따르는 혼란과 수동성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혼란에 빠뜨리고 좌절시키려 애쓰고 있다.
결론
[1920년대 말 이래 — 역자] 60년 동안 서방 세계의 혁명가들은 대중적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존재하는 현실과 씨름해야 했다.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혁명이 패배하고 스탈린 반혁명이 성공한 상황의 산물이자 제1차세계대전 후 유럽을 휩쓴 혁명 물결 패배의 산물이자 1927년 중국 혁명 패배의 산물이다. 이러한 패배들은 혁명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고, 그래서 스탈린이 혁명을 교살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이러한 대중적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존재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혁명가들에게는 동구권 공산당들과 서방 공산당들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유럽, 소련, 중국, 그 밖의 국가자본주의 나라들의 공산당은 지배계급의 당, 즉 기업 경영자, 보안경찰의 우두머리, 군 장성들의 당이다. 서방 공산당의 우두머리들이 그런 지위를 갈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첫번째 충성 대상이 소련이었거나 소련이라고 의심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서방의 지배 위계제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공산당의 평당원들은 노동계급의 정예분자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글래스고의 조선소, 샌프란시스코와 시드니의 항만, 르노와 피아트 자동차 공장의 투사들이 그랬다. 그리고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공산당원이 된다는 것은 조롱받거나 마녀사냥당하는, 그리고 스페인 같은 독재 체제에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했다. 트로츠키가 멕시코 공산당원들이 자신을 암살하려고 시도한 후에도 서방 공산당과 동구권 공산당을 구별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940년 6월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토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론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운동의 정당한 일부입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게페우[당시의 소련 보안경찰 — 역자]의 특별한 목적[트로츠키를 탄압하고 심지어 암살하려 하는 것]을 위해 운동을 악용하는 것과 크렘린의 목적[‘노동자 국가’인 소련을 방어하고 연대하는 것]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다른 반대파 노동 관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소련의 강력한 이해관계가 제3인터내셔널에 영향을 미치지만,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에 대한 우리의] 원칙은 다르지 않습니다. … 스탈린주의 정치 경향은 노동운동 안에 있는 하나의 경향입니다. …
프랑스의 스탈린주의자들은 대단히 용감하게 정부에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10월 혁명에 고무돼 있습니다. 그들은 혁명적 인자로 선발된 사람들입니다. 소련에 악용되고 있지만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도덕적 혐오감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트로츠키의 집을 습격한 사람들도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10월 혁명의 결정체로 출발한 이 노동자들을 우리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이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할까 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합니다. 우리는 기층과 상층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깡패라고 생각하는 소련의 깡패들은 실제로 깡패지만, 서방의 기층 스탈린주의자들은 스스로 깡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혁명가라고 생각합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탈린 체제도 대중적 스탈린주의 정당들도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 전 세계에서 혁명적 분출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후자의 예견에서 그는 우리가 본 것처럼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이 끝났을 때 소련 스탈린 체제가 더 강해졌다는 것, 그리고 국가자본주의는 붕괴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유럽에서 공고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공산당들이 어떻게 1944년과 1945년 대중의 혁명적 운동을 교살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한 상황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문제를 낳았다. 스탈린 치하 소련과 동유럽의 이른바 ‘완충지대’ 나라들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은 서방 공산당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주저 끝에 제4인터내셔널의 전후戰後 지도자들인 미셸 파블로와 에르네스트 만델은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묘사하기 위해 ‘기형적 노동자 국가’라는 문구를 만들어 냈다.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 아니라 소련 적군에 의해 전복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그 핵심 —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이라는 것 — 을 빼버리는 셈이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스탈린주의는 트로츠키가 주장한 것처럼 반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을 수행한 셈이다. 그래서 냉전이 시작되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세계를 계급 기반이 서로 다른 두 진영이 대치하는 상태로 보았다. 결국 그들은 미국과 소련의 세계관[세계가 ‘세계 사회주의 체제’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양분돼 있다는 — 역자]을 받아들인 것이다. 파블로와 만델은 제3차세계대전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서방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서방 부르주아지와 대결하도록 고삐를 풀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망은 ‘세계 혁명’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혁명가들이 취해야 할 정치적 태도를 에르네스트 만델은 (에르네스트 제르맹이라는 필명으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크렘린이 설정한 목표를 행동으로 뛰어넘을 수 있고 크렘린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대중적 기반 덕분에 공산당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 모든 공산당은 특정한 예외적 상황에서 정치 노선을 수정하고 대중의 투쟁을 권력 장악까지 이끌 수 있다. …
대중의 압력이 증대하면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은 자국 부르주아지를 ‘중립화한다는’ 평화주의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당들은 …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스스로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임무는 스탈린주의 정당에 입당해서 이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 될 터였다. 스탈린주의 조직이나 개혁주의 조직과는 다른 독립된 혁명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트로츠키의 노력은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바로 그 만델과 만델 추종자들은 다른 상황에서는 스탈린주의 공포증에 빠지기도 했다. 이 후자의 태도는 1970년대에 마오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많은 혁명가들의 정서와 비슷했다. 그들은 공산당을 단지 ‘수정주의’ 세력으로 여겼고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고양되면 공산당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 사람들은 소련을 ‘사회 파시스트’라고 생각했고 서방 공산당들도 ‘사회 파시스트’라고 보았다. 이것은 1970년대에 소련을 주적으로 보았던 중국 [지배자들]의 세계관에 잘 들어맞았다. 포르투갈의 프롤레타리아재조직운동당MRPP이라는 마오주의 조직은 이런 주장의 논리를 그 극단까지 밀고 나가서, 1975년 여름 포르투갈 북부에서 마녀사냥의 일환으로 공산당 사무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전통적 정당과 단절하지 못하고 투쟁이 침체하기 시작하면 이런 조직들(그 지도자들은 ‘수정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공산당에서 떨어져나온 사람들이었다)의 다수는 공산당의 선거 승리를 돌파구로 여기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상황이 그랬다. 1976년 프롤레타리아통일당PdUP은 자신의 임무가 “2천5백만 개의 다리脚를 움직일 모터”가 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PCI의 ‘생강단체’[ginger group : 어떤 정당의 안팎에서 그 정당이 좀 더 잘하도록 자극·격려·비판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삼는 단체 — 역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1975년 PdUP, 노동자전위, 사회주의노동자운동이 결성한 선거 연합 — 역자]는 PCI·PSI와 함께 ‘좌파 정부’를 구성하는 전망을 내놓았다. DP는 이 ‘좌파 정부’가 “혁명적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PCI가 기민당을 꺾지 못하고 역사적 타협이 쓰디쓴 열매만을 낳자 수많은 이탈리아 혁명가들이 사기저하하고 혁명적 조직들이 붕괴했다. PCI가 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당명에서 떼어냈을 때 DP는 그 이름을 넘겨받아서 PCI의 기존 좌파와 재결집을 추구하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만델 지지자들인 LCR도 1977년 좌파연합 붕괴 후 미테랑의 사회당과 PCF의 선거 협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선전했다. 이것이 그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합에 그만큼 비중을 둔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야말로 프랑스 노동계급이 나아갈 길이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역대 개혁주의 정부의 전력을 들추어내고 혁명적 대안을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74 그러나 1978년쯤 투쟁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유럽 전역과 북아메리카에서 노동계급은 수세에 몰렸다. 만델의 기대와 달리, 유러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노동계급에게 아무 성과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만델은 유러코뮤니즘의 발전으로 제4인터내셔널이 낚시를 할 수 있는 연못이 새로 생겼다고 생각하는 듯하다.이와 달리,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상당한 노동계급 기반을 가진 소규모 공산당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했다. SWP는 1970년대에 공산당에 공동 활동을 꾸준히 제안했다. 이런 공동전선 방식을 바탕으로 SWP는 공산당 사상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청중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인종차별·실업 반대 운동에 성공적인 동원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SWP가 혁명적 정치를 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SWP는 공산당이 의회 사회주의 노선, 사회 계약을 지지하는 것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칠레와 포르투갈에서 공산당이 한 구실도 비판해 왔다.
남아공처럼 여전히 공산당이 강력한 몇몇 나라에서는 혁명가들이 추구할 수 있는 방식은 이런 방식뿐이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의 몰락은 국제적으로 좌파의 공백을 만들고 있다. 그 공백은 혁명가들이 메울 수 있지만, 그것은 사상이 분명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1970년대 말 많은 혁명적 좌파의 실패에서 끌어낼 수 있는 여러 교훈 가운데 하나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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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ris Bambery, “The decline of the Western Communist Parties”, International Socialism 49 (Winter 1990), pp. 3-41.
↩
- ‘A Fresh Lesson’, Writings of Leon Trotsky, 1938-39 (Pathfinder Press, 1974). ↩
- Times, 12 September 1990. ↩
- Morning Star, 10 September 1990. ↩
- Guardian, 23 May 1990. ↩
- C de Gaulle, War Memoirs (Weidenfield and Nicolson, 1955). ↩
- I Birchall, Workers Against the Monolith (Pluto Press, 1974)에서 인용. ↩
- F Claudin, The Communist Movement: From Comintern to Cominform, Vol 2 (Monthly Review Press, 1975)에 나오는 수치. ↩
- 같은 책. ↩
- F Claudin, Vol 1. ↩
- F Claudin, Vol 2. ↩
- C de Gaulle, 앞의 책. ↩
- G Kolko, The Politics of War (London, 1967). ↩
- F Claudin, 앞의 책에서 인용. ↩
- 같은 책. ↩
- 같은 책에서 인용. ↩
- L Longo’s report in The Cominform Conference 1947. ↩
- F Claudin, 앞의 책. ↩
- 같은 책. ↩
- I Birchall, 앞의 책. ↩
- Quoted in F Claudin, 앞의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알바니아 공산당은 1941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이 창당했고, 제2차세계대전의 대부분 기간에 유고슬라비아 대표들이 지도했다. 알바니아 공산당 창당에 대해서는 S Premtaj, “Stalinism and Communism in Albania” in Revolutionary History, Summer 1990을 보시오. ↩
- Zhdanov’ report, The Cominform Conference 1947. ↩
- 같은 책. ↩
- 물론 톨리아티는 1930년대의 유혈 숙청 기간에 모스크바에 있으면서 코민테른 서기 일을 보고 있었다. 1988년 2월 PCI의 기관지 《단결》(Unita)은 1930년대부터 활동한 고참 당원이 쓴 ‘그람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가?’라는 글을 실었는데, 거기서 그는 톨리아티와 스탈린이 모두 독자적인 마르크스주의 지도자[그람시]를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Ghosts in the Machine’ by T Behan, Socialist Worker Review, May 1998을 보시오. ↩
- F Claudin, 앞의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더 자세한 분석은 T Cliff, ‘Earthquake in the East’, Socialist Worker Review, December 1989. ↩
- I Birchall, 앞의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T O’Lincoln, Into the Mainstream: The Decline of Australian Communism (Sydney, 1985). ↩
- L German, ‘1956 — Shattered Illusions’, Socialist Worker Review, October 1986. ↩
- 같은 책. ↩
- 같은 책. ↩
- T O’Lincoln, 앞의 책. ↩
- M Isserman, Which Side Were You O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82). ↩
- I Birchall, 앞의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L German, 앞의 책. ↩
- M Isserman, 앞의 책. ↩
- 같은 책. ↩
- I Birchall, 앞의 책. ↩
- 같은 책. ↩
- 같은 책. ↩
- 1968년 5월 사태와 그 후 1970년대 초까지 분출한 투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C Harman, The Fire Last Time (Bookmarks, 1988)[국역: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 2004]을 보시오. ↩
- 같은 책. ↩
- T Abse, ‘Judging the PCI’, New Left Review 153. ↩
- M Gonzalez, ‘The Coup In Chile and the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Journal 22, Winter 1984을 보시오 ↩
- Marxism Today, February 1974. ↩
- Marxism Today, October 1974. ↩
- I Birchall, Bailing out the System (Bookmarks, 1986) [국역: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 갈무리, 1995]. ↩
- D Sassoon in Marxism Today, August 1989. ↩
- S Carrillo, Eurocommunism and the State (New Left Books, 1977). ↩
- Marxism Today, July 1987. ↩
- Marxism Today, April 1990. ↩
- Marxism Today, February 1990. ↩
- Rouge, 26 February 1987. ↩
- Changes, 27 October 1990. ↩
- Independent, 1990. ↩
- Changes, 앞의 책. ↩
- J Petras, ‘The New Class Basis of Chilean Politics’, New Left Review 172. ↩
- Changes, 앞의 책. ↩
- Marxism Today, December 1986. ↩
- ‘Discussions With Trotsky’, Writings of Leon Trotsky 1939-40. ↩
- ‘What Should Be Modified and what Should Be Maintained In The Theses of the Second World Congres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On The Question of Stalinism (Ten Theses)’, E Germain, 15 January 1951. ↩
- From Stalinism to Eurocommunism (New Left Books, 1978)을 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