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혁명부터 스탈린 체제를 거쳐 푸틴까지》
국가자본주의론으로 보는 ‘러시아 문제’
지난 세기 많은 좌파들은 소련으로 대표되는 동구권을 서방 사회의 대안인 사회주의 사회로 여기고 지지했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과 최초의 노동자 국가라는 신화가 후광이 됐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이론과 정치에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소련은 해체됐다. 앞서 1989년 민주주의 혁명으로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가 붕괴할 때, 이미 소련도 심각한 모순과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마침내 소련이 무너지자, 서방 정치인과 언론들은 “역사의 종말” 운운하며 자본주의가 최종 승리했다고 기고만장했다. 시장 자본주의만이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체제라는 대대적인 선전이 이어졌다. ‘혁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위의 주장도 널리 퍼졌다. 그리고 좌파 중 일부는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 소련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물론, 당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의 호언장담과 달리 자본주의는 결코 지속 가능한 사회 체제가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장기 불황은 말할 것도 없고,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 위기를 보면 자본주의와 인류의 장기적 미래가 공존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불황, 팬데믹, 기후 위기라는 3중의 위기 앞에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라는 주장은 빛이 바래졌다.
이런 위기와 혼돈의 시대에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는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여전히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꼭 답해야 할 물음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옛 소련 체제의 성격을 따져 보는 일은 소련 체제가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게다가 아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북한 등이 건재하다. 비록 중국은 시장 지향적 개혁·개방 이후 국제 좌파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냉전 시절 소련만 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중국 헌법에는 중국 국가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고 중국 사회가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이르렀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홍콩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하고 위구르족 등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박탈하는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라고 한다면, 옛 소련 시절 회자된 다음의 농담은 여전히 중국에 어울리는 풍자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만 공산주의에서는 반대로 인간을 인간이 착취한다.”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혁명부터 스탈린 체제를 거쳐 푸틴까지》(이하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의 저자인 마이크 헤인스는 소련(러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이후 반혁명이 일어났음을 풍부한 근거를 통해 보여 준다. 소련이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관료적(전면적) 국가자본주의였음을 여러 역사적 사실과 분석으로 입증한다는 점은 이 책의 주요한 장점이다.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러시아 구력) 혁명으로 러시아 차르 체제가 붕괴했다. 이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이 유럽 전체에 낳은 위기에서 비롯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은 처음에는 유럽 곳곳에 애국주의 물결을 일으켰으나, 전쟁이 낳은 파괴와 희생은 곧 이런 분위기를 바꾸었다. 전선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불만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에서 먼저 그 불만이 폭발했다.
처음에는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파업이 순식간에 확대돼 “공장 지구에서는 거의 완전한 총파업이 벌어졌다.”(39쪽, 이 글의 인용문은 별도의 표시가 없으면 모두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투쟁이 확대되자, 수도를 방어하는 군인들도 동요하며 차르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군대가 충성을 거부하자 겨우 4년 전에 로마노프 왕조 창립 300주년을 성대하게 축하했던 제정러시아는 무너졌다.”(39쪽)
모든 가능성이 활짝 열렸고, 러시아 사회가 왼쪽으로 엄청나게 이동했다. 곳곳에서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적위대 같은 노동자 조직이 생겨났다. 농민과 병사들도 행동에 나섰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즉 노동자·병사·농민 평의회가 등장해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소비에트는 그 민주적 성격 덕분에 대중의 의지에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정치 기구였고, 노동자 국가의 맹아였다.
한편, 혁명 후 임시정부가 수립돼 소비에트와 공존했다. 이원 권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혁명의 요구를 실현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끝내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하지도 못했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겠다는 약속도 계속 얼버무렸다.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켰고,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는 급속히 양극화됐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로는 나라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현실적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는 서유럽처럼 발전할 수도 없었[다.] … 대중의 급진성이 혁명의 부르주아적 한계와 끊임없이 충돌한 것은 이 한계가 너무 협소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히려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기관들 위에 대안적 권력의 토대가 세워져야 했다.”(69쪽)
볼셰비키는 혁명을 전진시킬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레닌은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말고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많은 주류 역사가들과 일부 좌파들은 볼셰비키(공산당)가 러시아 혁명을 주도하면서 이후 일당 독재와 전체주의 국가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1917년의 볼셰비키는 그런 상像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1917년에 볼셰비키 조직은 내부적으로 가장 민주적이었고 외부적으로는 가장 집요하게 기층 대중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다.”(67쪽) ‘지도부가 당을 조종하고 당이 운동을 조종한다’는 따위의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편견으로는 당시 볼셰비키와 대중의 관계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볼셰비키의 주장들은 대중운동 내의 토론과 논쟁의 핵심을 뽑아낸 것이었고, 레닌은 “그런 주장들을 연결하고 결합해서 정치적으로 가장 분명하고 날카롭게 다듬었다.”(67쪽)
9월 이후 소비에트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쪽으로 쏠렸다. 마침내 10월에 무장 봉기로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처음으로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직접 보고 기록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저자이자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인 존 리드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러시아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없이 빠져들었지만 … 도시의 삶은 갈수록 즐거워졌고 혁명 자체도 빠르게 확산됐다.”(71쪽)
혁명의 변질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은 그 뒤에 변질됐다. 이 변질 과정에 관한 주류적 설명은 볼셰비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혁명을 정상 상태에서 역사가 잠시 일탈한 사건쯤으로 해석하는 역사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상황을 당대의 국제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
먼저 짚을 것은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 결코 필연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혁명의 변질을 이해하려면 혁명에 가해진 국내외의 압력들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혁명 러시아가 존속하려면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분명 그럴 기회들이 있었다. 세계대전이 낳은 사회적 위기는 곳곳에서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국제 혁명은 1917~1923년에 걸쳐 끝내 실패했다. 혁명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원을 받은 반혁명 세력이 궐기하면서 국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혁명 러시아는 분투했지만, 사회적·경제적 붕괴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예컨대,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는 40만 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1921년 무렵에는 그 가운데 5만 명만이 남아 있었다. 최상의 혁명 투사들이 내전 속에 수도를 비우고 사라진 것이다.
이제 볼셰비키(공산당) 정부는 국내에서도 고립되기 시작했다. “[내전과 봉쇄로 인한] 끔찍한 사회적·경제적 붕괴가 혁명의 주역인 노동계급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이제 조직자, 행정관리, 적군 군인 등의 당이 돼 버렸다.”(120쪽) 위기에 대처하고자 당과 국가 기구들은 이러저러한 실용주의적 조처들을 동원해야 했고, 점차 관료화됐다.
고립된 소련은 장기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압력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마이크 헤인스는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한 가지 해결책은 군사적 준비를 하는 동시에 혁명의 확산을 계속 지원하며 국제 혁명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국제 혁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포기한다면, … 소련은 전통적인 군사적 위협에 전통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전통적 국가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었다.”(124~125쪽)
이 와중에 스탈린을 비롯한 관료층이 성장했다. 생의 마지막에 레닌은 이런 경향의 발전을 우려하며 투쟁했다. 이것이 ‘레닌의 마지막 투쟁’이었다. 특히, 스탈린이 레닌의 핵심 타깃이었다. 그는 유언장에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남길 만큼 죽어가는 와중에도 혁명을 지키려 애썼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레닌의 마지막 투쟁을 기억하는 건 중요하다.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단순한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135쪽)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관료층에 의해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전망도 더 확실히 바뀌었다.”(142쪽) 결정적으로, 1923년 독일에서 혁명이 실패하자, 소련에서는 엄청난 사기 저하가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는 안정을 되찾은 듯했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일국사회주의론이 제안됐다. 1925년에 소련 공산당 협의회는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한 나라에서 무조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일국사회주의 전략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관료들이 보기에, 위험한 국제 혁명보다 일국사회주의론이 현실적인 정치 노선이었다. 진보가 관료들의 기량과 능력에 달려 있다는 ─ 즉 국가·당 관료들의 이니셔티브를 정당화하는 ─ 일국사회주의론은 확실히 그들에게는 더 매력적이었다.
스탈린의 반혁명
곧 결정적인 전환점이 왔다. 영국 정부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단절할 구실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아직 많은 국가들이 소련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는 전쟁 위협으로 여겨졌다. 1927년 여름 내내 소련 전역에서 전쟁 공포가 고조됐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은 정부의 기존 노선에 허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즉, 당장 가장 시급한 것은 군사적 방어를 위해 중공업 기반을 빠르게 구축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느린 경제 발전으로는 도무지 그 과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위로부터 반혁명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했다. 1931년에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들보다 50~100년 뒤처져 있습니다. 10년 안에 그들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입니다.”(165쪽) 1930년대가 되면 소련에 가해지는 군사적·경제적 경쟁 압력이 갈수록 더 커졌다. 독일은 재무장에 들어갔고,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국제 혁명을 포기했으니 이제 소련 방어는 전적으로 군사력 강화에 달려 있었다. 1937년에 소련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의 방어 능력은 국제 관계의 조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소련 육해공군의 확실한 군사력 증강에 달려 있다.”(167쪽)
소련의 경제 발전은 자본주의의 전복이 아니라 그 틀 안에서의 승리를 목적으로 됐다. 그래서 공업 투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중공업에 집중됐다. 사람들이 먹고 입을 소비 수단의 생산이 생산수단의 생산에 체계적으로 종속된 것이다. 노동자 국가의 경제 계획에서는 대중의 필요(소비)가 우선돼야 하지만, 소련에서 우선순위는 정반대였다.
군사적 경쟁 압력 속에서 군수산업이 경제를 선도했고, 군사적 경쟁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전반적 양상과 전략적 우선순위도 결정했다.”(169쪽)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에 따라 우선순위가 정해졌기에,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계획 자체가 없었다. 기껏해야 어설픈 중앙집권적 지령이 있었을 뿐이다.”(173쪽)
1928~1929년 반혁명으로 분명 소련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일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선진국들을 단기간에 따라잡으려는 과정에서 노동자·농민을 극단적으로 쥐어짜야 했다. 스탈린은 영국에서 3백 년에 걸쳐 진행됐던 일을 20년 만에 끝내려 했으니 그 착취의 강도가 오죽할까? 이를 달성하는 방법은 오직 국가의 강압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스탈린이 주도한 ‘사회혁명’은 소련의 사회관계를 크게 바꿨다. 혁명의 유산은 모두 파괴됐다. 스탈린에 반대할 사람들은 공산당 상층과 기층 모두에서 제거됐다. 무엇보다, 노동자·농민·소수민족 등 대중이 스탈린 반혁명에 희생됐다.
농민들은 1929년에 시작된 강제 집산화로 대거 희생됐다. 노동자들은 스탈린의 ‘사회혁명’에 종속됐다. 경영자의 권력이 강화되고 노동법이 노동자들에게 가혹하게 바뀌었다. 성과급 도입, 스타하노프 운동 등으로 착취가 강화됐다.
1928년 이후 소련은 극단적 억압에 의존했다. 억압 기구가 강화됐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과거와 체계적으로 그리고 인적으로 단절됐기 때문에 공포정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즉,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는 1917년 혁명의 전통에서 비롯한 게 전혀 아니다. 도리어 자본 축적을 위해 제도와 정신, 사람 모두에서 혁명적 전통을 파괴하는 구실을 했다.
당시 공포정치 수준은 처형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정권이 규정한 명백한 정치범죄 혐의로 처형당한 사람은 79만 명이고 대부분 1937~1938년에 집중돼 있다.”(237쪽) 정치범이 이 정도 규모로 처형됐다는 사실은 소련에서 거대한 사회적·정치적 단절이 일어났음을 방증한다.
이런 사회를 두고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비록 ‘관료적으로 퇴보’했지만 여전히 노동자 국가라고 여겼다.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노동자 국가의 본질적 특징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오해한 것이었다. 국가를 자본주의 바깥의 존재로 보는 것은 흔한 오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하는 기업들과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경제적 구실은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상품 경쟁만이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군사적 경쟁의 압력도 (경제적 경쟁과 마찬가지로) ‘축적을 위한 축적’의 압력이 돼 국내 경제 ‘계획’과 노동 과정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1928년 이후의 소련 사회는 1917년 혁명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였다. 그리고 이 사회는 서방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계급
옛 소련은 계급으로 분단된 사회였다. 이 책에는 소련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에 대한 풍부한 설명이 있다.
일부 좌파는 옛 소련 사회에 특권과 엘리트층이 존재했음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서방과 같은 지배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사적 소유와 상속이 없었다는 것이 그 주된 근거다.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관료가 착취 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 내부의 특권적 상층이라고 주장했다. 관료들의 권력은 생산이 아니라 분배 과정을 통제하는 데서 비롯하므로 그들을 계급으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이크 헤인스가 지적했듯이, 법률적 상속 절차가 없다고 해서 계급 지배와 착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지배계급 성원들이 개인 재산권이 없어도 농민을 착취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8년 이후 소련 지배계급의 윤곽을 추적할 때는 생산수단이 어떻게 통제됐는가 하는 이런 일반적 의미에서 출발해야 한다.”(278쪽) 관료들은 국가자본가로서 생산수단을 지배하며 권력과 특권을 누린 반면, 노동자·농민은 생산수단에 종속된 채 가차 없는 축적 압력에 놓여야 했다. 이런 구조적 관계가 소련 지배계급 권력의 토대였다.
트로츠키는 소련 관료들이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지배계급이 아니라 소비에 기생하는 기생 계층에 불과했다고 봤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소련 관료들은 트로츠키가 예측했듯 불안정하고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 관료 집단은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권력이 더 강력해졌고, 1991년까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했다.
소련 지배계급의 계급 대물림은 직접적인 상속보다는 더 광범한 공식·비공식 제도에 의존했다. 예컨대 특권적 교육 기회는 상류층 자녀들에 유리하게 주어졌고, 이 때문에 부모와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오르는 데서 훨씬 유리했다.
그리고 소련에서 “계급 간 소득 격차나 소비의 격차는 다른 나라들과 매우 비슷했다.”(292쪽)
노동계급의 실질임금은 상당히 억제됐다. 최저임금은 공식 빈곤선보다 낮았는데, 노동자 10퍼센트는 그조차도 받지 못했다. 산업재해율과 산재 사망률은 너무 높아서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노동자 국가’ 소련은 신화에 불과했다. “적어도 1988~1989년까지 고용 조건은 단체교섭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 경영자의 결정 사항이었다. … 노동조합의 진짜 임무는 노동자 착취를 지연하는 것이었[다].”(340쪽) 중공업 투자가 우선되다 보니, 예컨대 주택에 대한 투자가 제한돼 노동자들은 양질의 주택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올린 소련에서 노동자들에게 화장지·비누·생리대 같은 생필품은 늘 부족했다.
전환의 성격
한때 잘 나가던 소련 경제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에 봉착해 점차 위기에 빠지게 됐다. 세계 경제는 1970년대에 이윤율 저하로 침체에 빠졌는데, 소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련은 구조조정을 추진하거나, 더 큰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시장으로 깊숙이 통합될 때의 이점을 활용하기도 어려웠다.
1980년대에 소련 지배자들은 위기감을 느끼며 위로부터의 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위기는 해결되지 않았고, 지배계급 내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틈이 갈수록 더 벌어졌다. 1989년에 벌어진 광원 대파업 같은 아래로부터 저항도 체제 위기를 심화시켰다.
결국 1991년 소련 체제는 붕괴했다. 일당 국가는 무너졌고, 민족 억압에 기반했던 연방이 해체되자 여러 민족 공화국들이 수립됐다. 만약 소련이 모종의 사회주의였다면, 노동자들은 이 체제를 방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소련 체제의 종말이 찾아왔을 때 미래에 관한 온갖 혼란이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구체제를 방어하려는 열정이 사람들에게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324쪽)
러시아 경제는 세계 시장에 급격히 개방됐고, 국내에서는 시장 ‘개혁’이 급속도로 추진됐다. 그 전환의 부담과 혼란의 대가는 노동계급을 비롯한 대중이 치러야 했다.
하지만 지배계급 구성의 변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옛 지배계급 성원 대다수는 살아남았다. “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80퍼센트가 새로운 러시아에서 최고위급이나 그 바로 아래 자리로 이동했다.”(410쪽)
이는 소련 해체가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 즉 옆으로 가는 게걸음질이었음을 보여 준다. 소련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자본주의로 ‘퇴보’한 것이었다면, 기존의 사회 주도 세력도 새로운 세력으로 교체됐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러시아에서는 옛 지배계급과 새 지배계급의 연속성이 뚜렷했다. 이는 1991년 전후로 사회의 성격이 근본에서 바뀌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중요성
끝으로, 한국어판을 위해 저자인 마이크 헤인스가 새로 써 준 논문 수준의 후기가 포함돼 있다. 이 글은 최근 20년 동안 푸틴 체제 아래서 일어난 주요 변화들을 다루고 있다. 국내 주류의 러시아 현대사 관련 도서들에도 없는 내용이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러시아뿐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이해하는 데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유용하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의 세계이고, 오늘날 경제에서 국가 부문은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위기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류가 해방된 새로운 세계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