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패배를 껴안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껴안은 일본인
‘제2차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이라는 부제가 달린 뛰어난 역사서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가 한국어로 번역됐다. 미국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 존 다우어가 1999년에 썼고 2000년 퓰리처상을 받은 이 책은 패전 직후 점령군 하에서 일본인이 느낀 심리적 상태와 처지를 자세히 보여 준다.
특히 이 책의 탁월한 점은 점령군, 즉 미군 점령 정책의 위선과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은 패전을 껴안으며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되뇌는 일본 민중들의 삶을 풍부하고 구체적인 사료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저자가 비록 외국인이지만 일본 사회를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갈 때마다 돋보이는 저자의 재치 있는 표현, 탁월한 문장력과 구성은 무려 8백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과 양장본의 무게(심지어 들고 다니며 읽을 수가 없다)에도 불구하고 끝내 책 읽기를 멈출 수 없게 한다.
급진화와 좌파의 혼란
패전 직후의 일본은 피로와 허무가 가득 찬 ‘교다쓰(허탈)’ 상태였다. 일본인들은 전쟁으로 지치고 패전으로 허망해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를 수장으로 한 점령군은 6년 8개월 동안 일본을 점령했다.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쿄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부유촌의 멋진 주택가와 금융가는 각각 점령군 장교의 숙소와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정 사령부의 본거지가 됐다. ‘리틀 아메리카’로 불린 이 곳은 “‘잿더미와 시커멓게 탄 나무, 녹슨 고철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피엑스와 미군 판매부에는 미국인들을 위한 생필품과 사치품이 넘쳐났다.
항복 선언과 함께 일본인을 또 한 번 허탈하게 만든 것은 군벌과 특권층의 사리사욕이었다. 당시 유용된 물자의 규모와 가치는 대략 3천억 엔으로 국가 예산인 2천5백억 엔을 넘었다. 반면 이 때 대다수의 평범한 일본인은 구걸을 하고 자식을 팔고, 살기 위해 암시장을 찾아야 했다.
이렇듯 패전은 특권층에 대한 회의와 분노를 자아냈고 빈곤은 노동자들을 급진화시켰다. 전국의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군국주의에 가담했던 교사나 당국자의 사임, 학생 권리 확대 등을 내걸고 항의했으며 이런 움직임은 사회 전반에 퍼졌다.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으며 이는 서서히, 그러다 폭발적인 노동 쟁의로 이어졌다. 1946년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내각을 구성하는 데 간신히 성공한 요시다 시게루(아소 다로의 외할아버지)는 ‘붉은 깃발의 바다’ 한 가운데 있었다. “1946년 초부터 1950년 말에 이르기까지 노동 쟁의는 6천4백32건을 기록했으며 참가 연인원은 1천9백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3천48건은 파업을 포함한 것이었고 여기에 참가한 인원은 5백만 명을 헤아렸다.”
1936년 정부가 금지한 이래 처음으로 열린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 집회에는 경찰 추산으로만 전국에서 125만 명, 도쿄에서 50만 명이 참가했다. 메이데이 전날 요코하마에 사는 한 노동자의 일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어제는 천황 탄신일이었지만 회사에 나가 일을 했다. 내일 메이데이에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그러나 당시 좌파 지도부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혼란이 문제를 낳았다. 전쟁을 반대해 가장 굳건히 저항해 탄압받던 공산주의자들은 전후 폭발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공산주의자들은 점령 초기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착각해 열렬히 환호했다. 천황에 대한 태도도 문제였다. 새 헌법의 초안이 나오고, 남녀 모두 선거권을 갖는 첫 총선을 치르고, 직장에서의 전통적 노사관계가 노동자에 의해 부정되고, 여성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고, 학생들은 학교의 자치를 부르짖고, 사람들이 처음으로 공공연히 천황을 소재로 농담하던, 그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이 분출하던 시대에, 당시 대중 운동을 조직하던 지도부는 천황에게 “식량 위기를 시정하고 혁명의 대의에 함께해 달라고 공손히 부탁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세계 민주주의 운동사를 아무리 살펴봐도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찾아볼 수 없다”며 개탄한다.
당시 일본 민중의 움직임은 점령군이 용인할 수 있는 “일본인 스스로의 ‘실력 행사’”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좌파 지도부가 근본적 사회변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안 미군정은 이 운동을 강경 대응하며 분위기를 급속히 냉각시켰다.
천황을 보호한 미군정의 위선
전쟁으로 지치고 패전으로 허망해진 일본인에게 미군정 사령관 맥아더는 그들을 천황의 ‘신민’에서 해방시켜 준 해방군인 동시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져다 준 메시아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실제 미군정 치하 일본은 ‘신식민지 군부독재’나 다를 바 없었다.
점령군은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을 직접 통치할 언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탓에 기존의 일본 정치 조직을 통한 ‘간접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그래서 항복 이전의 일본 정치 체제 중에서도 가장 비민주적인 기구인 관료제와 천황(황실)이 살아남았다. “이제 연합국 사령부의 엄호를 받게 된 일본 관료들은 전쟁을 위한 국가 총동원이 절정에 달했던 때보다도 훨씬 더 큰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미군정에 의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혁명’이 안고 있던 모순을 보여 준다. “승자는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상명하달에 기대어 통치했고, 평등 사상을 옹호하면서도 자신은 불가침의 특권 계급”으로 존재했다.
미군정의 위선과 점령 정책의 모순은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공작에서 더 드러났다. 점령군은 “소련이 주도하는 ‘전 세계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 천황제 유지가 긴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당시 여론 조사를 보면 일본인 대다수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천황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성급하고도 드라마틱한 헌법 개정으로” 천황을 보호하는 대신 ‘탈군사화와 민주화’를 내세운 헌법 초안을 불과(!) 1주일 만에 작성했다.
“점령군은 천황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혔다. 이로서 일본 민중이 기대했던 정의는 그 기준을 잃었다.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최근의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는데, 평범한 신민들이 왜 전쟁 책임을 반성해야 한단 말인가?”
한편, 1946년 5월 3일에 시작된 도쿄 전범 재판은 31개월이나 지속됐다. 저자는 새 헌법 초안을 미군정이 1주일 만에 탈고한 과정을 기술한 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도쿄 재판 과정을 폭로한다. 도쿄의 ‘A급’ 전범 재판은 ‘전범 재판’이 아닌, 승자의 ‘복수’극이자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한 ‘쇼윈도 속의 처벌’이었다. 새 헌법에서 천황 히로히토의 역할이 ‘평화의 화신’, ‘보수적 군국주의 세력에 의한 희생자’였다면, 도쿄 재판의 무대에서 그는 아예 맡은 배역이 없었다.
도쿄 전범 재판은 “범죄와 피고인들의 성격” 면에서 뉘른베르크에서 있었던 나치 전범 재판과 달랐다. 뉘른베르크에서 히틀러와 나치당, 게슈타포(정치경찰)와 SS(히틀러 친위대)가 기소된 것과 달리 도쿄 재판에는 ‘혐오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특정 집단이나 범죄 자체가 빠져 있었다. 기나긴 재판 동안 검사 측의 주장에조차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공동 계획이나 공모’의 중심부, 천황 히로히토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말해 일부 공모자만 있고 주모자는 없었다. 게다가 침략으로 이익을 챙겼을 뿐 아니라 ‘전쟁으로 향하는 과정’에 긴밀하게 개입했던 산업가, 조선과 대만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징용했던 책임자들, 수만 명의 비일본계 젊은 여성을 대규모로 징집해 ‘위안부’로 만들고 일본 제국 군대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당사자들도 기소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죄수들을 상대로 잔악하고 치명적인 실험을 자행했던 만주의 731부대 간부들과 연구원들은 실험 결과를 미국과 공유하는 조건으로 기소에서 제외됐다.
도쿄의 ‘A급’ 전범 재판이 끝날 즈음 세상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승전을 구가하던 연합국의 동맹은 냉전으로 산산조각 났고 도쿄 재판 판사들의 모국은 아시아의 내전과 식민지 전쟁에 얽혀 들어갔으며 미국의 점령 정책 또한 애초의 ‘탈군사화와 민주화’라는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는 중이었다.” “1948년에 이르면 뉘른베르크와 도쿄 재판이 국제법 및 정의의 새로운 국제 질서에 기반한 평화로운 세계의 바탕이 되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일곱 명의 피고가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당한 다음 날인 1948년 12월 24일, 그곳에 구금돼 있던 악랄한 군국주의자 기시 노부스케 등을 포함한 열아홉 명의 용의자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풀려났다. 저자는 “국제법의 미묘한 해석에 익숙치 않던 보통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법 정의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정치적 변덕의 시작인지 알 수 없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꼬집는다.
또한 저자는 “침략이 반드시 처벌받는 국제 질서의 확립을 선한 의도로 주창한다고 해도, 그런 의도 하에 진행되는 사법 절차에는 여전히 인종, 권력, 무력함이라는 현실에 의해 왜곡된 세계가 투영되고 있었다”며 도쿄 재판 판사의 ‘국제적’ 구성비를 단적인 예로 들었다. “일본이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을 침략하고 점령했지만, 그리고 일본인의 약탈로 인해 사망한 아시아인 수가 엄청났지만, 열한 명의 판사 중 아시아계는 불과 세 명”이었다. 이마저도 초기 단계에선 아시아계는 중국인 판사 단 한 명이었다가 여론의 동요로 늘어난 것이었다. 추가된 필리핀과 인도의 판사는 각각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46년과 1947년에 독립을 약속받은 나라 출신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프랑스·영국이 일본에 의해 고통당한 아시아 사람들을 대표했다. “도쿄 군사 재판소는 근본적으로 백인 법정이었다.”
심지어 도쿄 재판이 열리는 동안 일본의 이전 식민지들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였다. 인도인 판사 팔은 도쿄 군사 재판 속에 내재한 이중 잣대를 들춰냈다. 그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언급하면서, “중국을 포함한 동반구에서 서구 열강이 주장하는 이익의 대부분은 바로 (일본이 저지른 것과 같은) 그러한 침략 행위에 의해 확보되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인도인 판사는 미국이 일본에 행한 공포 확산용 공습 특히 원자폭탄 사용을 인류에 대한 범죄로 보고 미국의 이중 잣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판결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으로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어떤 무차별적 파괴도 전쟁에서는 여전히 불법이며 태평양 전쟁에서는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황제나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지도자들의 지시에 유일하게 가장 근접한 행위라는 사실을 밝히는 정도로 충분하다. 이와 같은 어떤 행위도 현재 기소된 자들에게 책임 소재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즉, 아시아 전쟁에서 나치의 잔학상에 상응하는 행동은 미국 지도자도 저질렀다는 말이다. 이 재판을 지켜본 많은 일본인들도 그의 말처럼 자기 나라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쿄 전범 재판의 문제점을 비판하던 저자는 “위험한 역사적 가정 속으로 들어”간다. 만약 일본인들이 도쿄 재판에서 배제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일본인 스스로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본 대중이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역코스
패전 직후 승자와 패자가 모두 동상이몽 속에 껴안은 ‘군국주의 일소와 민주화’ 그리고 ‘평화’와 ‘민주주의’는 냉전의 기운이 감돌면서 애초의 이상을 잃어 갔다. 특히 승자인 점령군은 공공연히 일본의 보수파 심지어 우익 세력과도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체포된 전범 혐의 유력자 다수는 스가모 구치소의 안락함을 누리다 최종 기소가 취하됐다. 군국주의에 가담했던 거대 자본가와 중앙 관료 다수가 다시 정치 무대에 섰다. 대표적 우익들은 살아남아 훗날까지 요직을 대물림했다. 한편 급진적 좌익 세력은 ‘빨갱이 사냥’에 내몰려 추방당하거나 해고됐다. ‘민주주의 혁명’의 이상은 허무하기만한 신기루로 변한 듯했다. 이와 같은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은 점령이 끝나기도 전에 승자가 패자에게 단행한 극적인 방침 변화였다. 재벌 해체 등의 ‘경제 민주주의’ 또한 ‘역코스’ 정책 하에서 흐지부지됐다.
1950년 6월 25일 일본의 옛 식민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아이러니이게도 미국의 은총으로 일본이 재건의 기회를 부여 잡을 수 있는 호기로 작용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일본 경제의 실권은 점령군이 아닌 일본의 관료 조직에게 계승됐다. 국가 주도형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일본의 통상산업성은 일본이 전시 총동원 체제의 정점에 있을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경제 권력의 집중을 달성해 1990년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 고도성장의 사령탑 구실을 하게 된다.
한편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예전의 적국을 신속하게 재무장시켰다.” 1950년 7월에 창설된 지상군의 명칭은 군대가 아니라 ‘경찰 예비대’였으며 대포·전차 등의 장비를 강화했다. 심지어 점령이 끝나기 전까지 한국 전쟁에 참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총리 요시다는 재무장 압박에 매우 신중했다. 재무장이 가져올 경제적 압박과 왜곡,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헌법’과 재무장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으로 일본 전국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부상하거나 “일본이 일으킨 참담한 전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아시아 민중을 심각하게 자극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전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한 일본 지배자들과 ‘전시 동원체제’ 하에서 착취와 수탈을 당한 일본 민중을 ‘일본’이라는 단일한 존재로 생각해 왔다. 전쟁 중에 일본 군인이 타국뿐 아니라 자국에서도 자행한 수탈과 강간, 살인(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 ‘카미카제’로 대표되는 자살공격 등은, 일본인은 장교부터 사병, 그 가족들 모두 하나같이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야만적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을 추진한 세력과 이들에게 강제로 동원돼 전쟁에 나간 일본‘인’을 동일시해야 할까?
이 책은 그동안 ‘일본적인’ 특수성으로 여겨져 동일시됐던 일본의 지배자와 민중을 분리해 바라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저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맛보며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실생활 속에서 활력 있게 전개해 나가는 일본 민중의 ‘패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와 이를 둘러싼 논쟁은 점령군과 천황, 그리고 그 일당들에 의해 우스갯소리가 돼 버렸다. 그리고 저들의 책임 회피로 인해 평범한 일본인들은 패전 직후 활발히 진행하던 자신들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논쟁도 (어느 정도는 강제로) 일소해 버린 것이다.
2009년 일본에서 전후 처음으로(물론 1993년 연립정권이 집권했지만 단명했다) 자민당 일당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지만, ‘헌법 9조’에 대한 개악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후 계속된 ‘평화헌법’ 개악 시도를 막아낸 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양심 있는 평범한 민중이었다. 전쟁과 야만, “패전과 재건의 잡탕”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둘러싼 여러 논쟁과 싸움 들이 단지 일본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억압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한국인에게도 이 책은 진지한 고민거리를 던져 줄 것이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