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100년
마오쩌둥주의 제대로 보기
중국공산당은 1921년에 창당됐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세계 2위의 경제·군사 대국을 지배하는 정당이 됐다.
마오쩌둥(1893∼1976)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고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신중국을 건설한 주역이었다. 그의 정치 노선은 한때 중국 바깥의 일부 좌파들에게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후에 중국은 폐쇄적 국가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버리고 시장 친화적 개혁·개방의 길을 걸어 시장 스탈린주의 체제가 됐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1904~1997) 등 중국공산당의 새 지도부는 마오쩌둥의 경제 전략을 폐기하고 문화혁명을 마오쩌둥이 말년에 저지른 “오류”라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마오쩌둥과 그의 사상을 자신들의 전통으로 내세운다. 중국 헌법은 중국이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하”에 있다고 명시하고,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도 최근 마오쩌둥의 말을 부쩍 자주 인용한다. 물론 이들이 마오쩌둥주의를 현재 국가 운영에 진지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국가의 정통성이 1949년에 마오쩌둥이 거둔 군사적 승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고 애국주의(정확히는 한족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데서 마오쩌둥을 우상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 사상이 자신들을 향한 비판의 무기가 되는 것은 좌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2018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마오쩌둥주의자”를 자처하는 좌파 학생들이 노동조합을 세우려는 자스커지 노동자들에게 연대하자, 중국 당국은 학생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속한 서클들을 탄압했다.
2 한편, 오늘날의 중국을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진보적 균형추로 보는 좌파도 있다.
일부 국제 좌파들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불평등이 커진 지금의 중국을 비판하지만, 적어도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고 여긴다. 즉, “중국의 시장주의적 개혁은 사회주의를 갱신한 것이 아니라 해외 자본의 지배력 증대를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자본주의로 복고한 것”이라고 본다.그러나 마오쩌둥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 등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상이자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주의는 1925~1927년 중국에서 일어난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산물이었다. 마오쩌둥은 그 패배 후 1930년대에 중국공산당이 민족주의 세력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당의 실세로 떠올랐다.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1949년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고,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도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당시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사상은 마오쩌둥의 독재 권력과 마오쩌둥의 국가자본주의 발전 노선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1925~1927년 노동자 혁명
1919년 중국에서 학생들이 일본의 식민 침탈에 항의해 시위를 벌였다(5·4운동). 이 민족주의 저항 운동은 차츰 학생 시위를 넘어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학생들을 지지하며 연대했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중국에도 상당한 여파를 미쳤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됐다. 창당 당시 중국공산당 당원들 중에는 지식인이 많았지만, 공산당은 금세 성장하는 노동자 운동 안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당원들은 노동조합 조직화에 투신했고, 12개 도시에서 노동자 약 30만 명을 대표해 파견된 대표자들이 모인 1922년 5월의 제1차 전중국노동자대회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성장했는데, 공산당은 이 국민당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점차 독립성을 포기하고 국민당 내 왼쪽 부위처럼 행동하게 됐다. 이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내부의 변화와 관련 있었다. 1923년 독일 혁명이 패배하면서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자 소련 관료들은 국제 혁명보다는 소련 국가의 생존 그 자체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코민테른의 전략은 소련의 대외정책에 종속됐다. 소련 관료들은 국민당처럼 소련의 국경을 안정시켜 줄 파트너를 확보하려 애썼다.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를 약화시키되 소련의 통제를 벗어난 혁명적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민당을 지원하고 국민당의 급진성을 보증해 주려 했다. 1926년 3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국민당을 “노동자·농민·지식인과 도시 민주주의의 혁명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동조 정당”으로 인정했다.
1925~1927년에 중국에서 노동계급이 중심이 된 강력한 혁명적 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서방·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민족주의적 요구를 하며 시작됐다. 그러나 곧 이 투쟁은 외국 기업들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국민당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1887~1975)를 비롯한 국민당 핵심 간부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이 심화되는 것에 불안해하고 이를 적대했다. 농촌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을 수탈하는 지주들을 노렸다.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단지 외국 기업만이 아니라 중국 기업에서도 벌어졌다. 국민당의 민족 단결 호소는 그 모순과 한계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공산당의 몇몇 지도자들이 이제는 국민당을 나와야 한다고 코민테른에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당 전체는 코민테른의 노선에 계속 충실했다. 마오쩌둥도 국민당과의 동맹을 끝까지 지지했다. 코민테른의 전략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노동자와 농민들을 자제시키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혁명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민중을 동원해 자기 목적을 추구하려던 국민당의 전략은 더는 유효하지 않았다. 국민당 지도부는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했다. 특히, 1927년 4월 국민당은 상하이 노동자들에게 총부리를 돌려 노동자 5만 명을 학살하고 노동자 조직들을 파괴했다.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노동자가 살해됐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충실히 따른 중국공산당의 전략 때문에 중국의 노동계급은 무방비 상태로 국민당에 학살당했다. 그 결과는 노동자들에게도, 공산당에도 재앙적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도시 노동계급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농민과 게릴라
당시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부대는 혁명의 패배에서 그나마 타격을 덜 입은 거의 유일한 공산당 세력이었다. 이들은 국민당과 지방 군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농촌 오지로 도망쳤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소비에트’를 세웠지만, 이는 1917년 러시아에서 등장한 노동자 소비에트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이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농촌에 근거지를 둔 민족주의 세력이 됐다. 투쟁의 중심지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졌다. 여기에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장제스의 공포 통치를 일단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실용적 목적도 고려됐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투쟁의 중심을 옮기는 것만 의미하지 않았다. 투쟁의 사회적 내용도 달라졌다. 노동자들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병사가 돼야 게릴라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오로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그런 선택이 가능했고, 노동계급 전체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인민 전쟁을 수행하는가? 마오쩌둥과 그 지지자들이 찾은 답은 농민이었다.
일각에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농민의 잠재력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농민은 투쟁할 수 있다. 아니, 때로 아주 맹렬하게 투쟁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농민들이 그랬고, 오늘날에도 인도에서 농민들은 극우 모디 정부에 맞서 전투적으로 싸운다.
5 실제로 중국 안팎의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올바른 정치 지도부만 있다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낙후한 곳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부터 존재해 온 사회 집단이다. 만약 농민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자본주의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가능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즉, 생산력 발전이 사회 발전에서 하는 구실을 고려하지 않게 되고 필요한 것은 오로지 올바른 사상과 의지뿐이 될 것이다.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농민에 대해서 마오쩌둥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농민은 혁명적일 수 있으나, 사회의 지배계급이 될 수는 없다. 농민은 도시에서 발달한 계급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레닌, 트로츠키 등이 보기에 그것은 노동자들이 농촌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도시에서 자신들의 계급 이해관계를 확고히 추구하며 계급투쟁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야 가능했다.
도시가 아니라 변방 오지에 근거지를 마련했지만,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스탈린주의로 곡해된)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한 정치 세력임을 표방했다. 마오쩌둥 자신도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지도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지도”의 의미가 달라졌다.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지도’가 곧 ‘프롤레타리아의 지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심지어 그 방향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기에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다. 이처럼 정당의 계급적 성격을 그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 중심으로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방법이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공산당이 굳이 도시 노동계급과의 유기적 연관을 고집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터였다. ‘프롤레타리아의 지도’는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반(노동계급)에서 분리된 채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대행할 수 있다는 대리주의로 전락했다. 마오쩌둥과 그 지지자들이 보기에, 계급투쟁의 의미도 달라졌다. 이제 계급투쟁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이, 특히 홍군이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급투쟁의 핵심은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었다. 그렇게 군사적 승리를 거둬야 전통적 의미의 계급투쟁도 시작될 수 있었다.
이처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노선과 실천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들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됐다. 마오쩌둥의 사상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아무 관련 없는 것이었다.
군사력을 결정적인 힘으로 봤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주도성을 고무하기보다 선전 활동으로 그들의 지지를 얻는 데 중점을 뒀다. 공산당이 채택한 슬로건들은 모두 군사적 승리라는 문제에 종속됐다. 그것이 낳은 특징의 하나로, 급진적 슬로건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실천이 결합됐다. ‘지주제 타도’나 ‘토지를 농민에게’를 외쳤지만, 실제로 공산당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제한적인 개혁 조처만 실시했다.
마오쩌둥에 호의적인 좌파들은 마오쩌둥이 1930년대에 이른바 “대중 노선”을 표방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가 인민은 지식인보다 더 뛰어나니 지식인들(과 당 간부들)은 대중에게 배워서 대중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했고, 이는 당 관료화와 엘리트주의를 막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분명 마오쩌둥은 농민을 대할 때 필요한 엄격한 행동지침을 홍군에 하달했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홍군은 농민들을 마구 괴롭히는 군벌과 부패한 국민당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러나 홍군에는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가 존재했다. 사실 그런 엄격한 행동지침이 홍군에 필요했던 까닭은 그만큼 다르게 행동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농민과 홍군의 지도부가 지향하는 목표는 같지 않았다. 엘리트주의는 근본적으로 여기서 싹텄다.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땅을 갖는 것이었다. 홍군 지도부를 구성한 혁명적 지식인들은 민족해방을 달성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여러 사회 부문과 계급을 뛰어넘는 민족 이익의 대변자라고 여겼다. 농민을 동원해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들은 국가의 권력자가 돼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할 것이었다.
인민전선과 항일 전쟁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은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의 운명을 바꾼 커다란 사건이었다. 1931년 일본은 중국 동북부(만주)를 침략해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운 데 이어, 중국 화북지방을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는 전면적으로 중국 대륙을 침략해 들어갔다.
항일 전쟁은 공산당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됐다. 학생들은 홍군에 들어가려고 먼 길을 떠나 공산당이 근거지로 삼은 산시성 산악지대로 갔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의 관점은 철저히 스탈린주의적이었다. 마오쩌둥은 단계혁명론에 충실했다. 중국은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사회이므로, 먼저 민족 해방을 비롯한 민주주의적 과제를 해결하는 1단계 혁명을 완수하고 사회주의 건설은 그다음에 시작돼야 했다. 1935~1936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항일 연합 전선’을 제안했다. 계급의 적과 동맹을 맺자는 제안은 유럽 공산당들의 인민전선 전략을 본뜬 것이었다.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이 민족 단결을 위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1938년 마오쩌둥은 이렇게 주장했다. “항일전쟁 중 모든 것은 항일의 이익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확정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의 이익은 반드시 항일전쟁의 이익에 복종해야 하고, 항일전쟁의 이익에 위반할 수 없다. … 우리는 계급투쟁을 부인하지 않고 조절한다.”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을 수정해 자신의 전략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내놓았다. 1937년에 그는 《모순론》에서 사회 현실의 모순들을 ‘주요모순’과 ‘비주요모순’, ‘새로운 모순’과 ‘낡은 모순’ 따위로 기계적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각 나라가 처한 특수한 사정과 때에 따라 어떤 것이 주요모순이 될지, 비주요모순이 될지는 달라진다고 했다. 이런 모순들 사이의 변증법적 통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질적으로 다른 모순은 질적으로 다른 방법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은 사회주의혁명의 방법으로 해결되며,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모순은 민족혁명의 방법으로 해결[된다.]
그의 방법론으로는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 발전 개념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연속혁명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된다. 마오쩌둥이 《모순론》으로 주려는 핵심 메시지는 자신의 계급 협력 노선이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가 중국에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 제국주의와 중국의 모순은 주요모순이 되고 중국 내의 각 계급 간 모순(봉건제도와 인민 대중 간의 주요모순을 포함)은 일시적으로 부차적, 종속적 모순으로 전락한다.”그러나 당시 유럽 공산당들과 달리 마오쩌둥은 소련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내재적으로 각국 공산당이 민족주의로 나아갈 근거를 마련해 줬다. 그러나 당시 유럽 공산당들의 민족주의는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고, 그래서 이 공산당들은 소련의 국경수비대 구실에 충실했다. 반면, 1930년대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중국 서부 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그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독자적인 민족주의 세력이었고, 모스크바는 중국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모르거나 아무것도 몰랐다. … 유럽의 경우처럼 현존 지배자들에게 순응하기보다는 [중국]공산당[은] 스스로가 지배계급이 되는 것을 내포하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전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자제시켰지만, 항일 활동을 벌인 덕분에 세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다. 1945년에 당원 수는 120만 명에 이르렀다. 다만 당의 사회적 구성은 1927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당원의 93퍼센트는 항일 전쟁 발발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농촌 출신들이었다.
반면 국민당은 파벌 다툼에 빠졌고 더욱더 부패해졌다. 임시 수도 충칭에서 국민당 군장교와 정부 관리들은 사업에 손을 대서 사리사욕을 채웠다. 미국이 일본과 싸우라고 준 원조의 상당분도 이들의 주머니로 갔다.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병사들이 쓸 장비와 식량도 빼돌려 팔아치울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국민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데에서는 한없이 무능했고, 영토 보전에 실패한 국민당이 민족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이제 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고 민족을 구할 유일한 세력임을 자처할 수 있었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 자신들이 중국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미 공산당은 농촌에서 지주와 빈농 위에서 미래의 지배계급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공산당의 홍군은 중국의 10퍼센트 이상을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도 영향력을 키웠다. 곧바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국공내전)이 벌어졌지만 1927년과는 다른 형세였다. 이제 공산당에게는 자체의 군대와 영토가 있었다. 이번 내전은 게릴라전이 아니라 정규군 대 정규군의 전쟁이었다.
내전이 시작될 무렵 국민당은 중국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한테서 막대한 군사 원조도 받았다. 그러나 민심은 국민당에 등을 돌렸고 국민당은 자기 군대의 충성심도 유지하지 못했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국민당 군대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이탈해 홍군에 투항했다. 군대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지휘관들은 제 살 길만 궁리했다.
마침내 1949년 10월 마오쩌둥은 권력을 잡았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주했다. 게릴라군 지도자들이 새로운 국가의 지배자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마오쩌둥의 중국과 문화혁명
1949년 중국 혁명은 지식인들이 이끈 농민 군대가 옛 지배계급과 서방 제국주의자들을 중국에서 축출했다는 점에서 분명 혁명이었다. 1950년대 초기 몇 년 동안 중국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활이 개선됐다. 전쟁이 끝났고 도시의 극심한 인플레이션도 잡혔다. 서민들을 괴롭히던 고리대금업자와 지주들은 사라졌다. 문맹률, 교육, 보건, 식량 보급 등에서 두드러진 향상이 이루어졌다. 효율적인 새 정부가 들어섰고, 공산당 정부는 중국 사회가 후진성과 빈곤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전족처럼 여성들을 옭아맨 낡은 제도와 관습들도 상당수 철폐됐다. 이처럼 국민당 지배에서 벗어난 중국에는 분명 일정한 진보가 있었다. 그래서 1950년대 초반을 중국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혁명은 위대한 민족해방 혁명이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도시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투쟁에 동참하라고 하지 않고 외려 생업에 종사하라고 했다. 내전 내내 노동자들은 구경꾼이었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의 승리로 자립적 경제 발전을 시작할 수 있는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바란 민족 자립 경제는 세계 체제와 고립된 섬에서 건설되는 게 아니었다.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세계경제 속에서 중국의 새 지배자들은 강력한 경제 건설의 필요를 절감했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지상 과제가 새로운 중국 국가의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됐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낙후한 경제와 빈약한 자원으로 선진국과 경쟁할 공업 기반을 건설해야 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이 과제를 미약한 민간 자본에 맡기지 않고 국가가 경제를 직접 운영함으로써 효율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즉, 중국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창출됐고 국가 관료들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이 됐다. 이들의 지상 과제는 자본 축적이었고, 그래서 관료들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와 어긋났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서방과의 전쟁에 대한 우려가 매우 커졌다. 미국 제국주의에 포위됐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이 다시 대륙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에 훨씬 더 큰 희생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불거지는 대중의 불만은 강압적으로 눌렀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빈곤이라는 물질적 제약과 경쟁 압력에 따른 축적의 필요성 사이에서 커다란 모순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 등은 모두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상이한 경제 전략들을 놓고 논쟁하고 갈등을 빚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물론 1949년 마오쩌둥이 중국이 네 계급(노동자·농민·도시소자산계급·민족자산계급)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 국가라고 선포할 때만 해도, 마오쩌둥은 급속한 ‘사회주의’ 경제(즉, 전면적 국가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마저 악화되면서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경제로의 전환을 재촉하면서 인민민주주의론과 결별했다. 국제 정세가, 즉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 압력이 마오쩌둥이 애초의 구상을 지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강력한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받았고, 그래서 농업 집산화와, 공업에서 사기업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이런 경향의 극단적 형태였다. 마오쩌둥은 물질적 제약으로 경제성장을 늦추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중공업의 우선 성장을 위해 고삐를 더 바짝 죄고 싶어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당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불평했다. 이미 1956년에 마오쩌둥은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 분발하라고 관료들에게 촉구했다. “[철강] 생산은 올해 400만 톤 이상일 것이다. … 미국은 1억 톤을 생산할 수 있다. 50년 또는 60년 내에, 우리는 확실히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다.”
1958년에 마오쩌둥은 15년 이내에 주요 산업 산출량에서 영국을 따라잡자고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이 수치도 보수적이라고 여겨 3년이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다시 주장했다. 그해에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중국 경제가 처한 모순을 대중 캠페인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즉, 부족한 자본과 자원을 인민의 강력한 의지로, 사실 노력 동원 캠페인을 통한 착취 증대로 충당하려고 한 것이었다. 대약진운동 기간에 공업과 농업 생산 모두에서 목표량이 엄청 높게 설정됐고 강력하고 새로운 노동규율이 실시됐다. 도시에서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을 압박해 18시간 또는 24시간 교대제가 도입되고 안전 규제 등은 생산 목표량 달성을 위해 폐지됐다.
1952년 토지개혁으로 땅을 받았던 농민들이 이제는 인민공사로 재조직됐다. 일부 좌파에게 인민공사는 “농민의 협동조합 또는 평의회를 지향”하고 “농민에 대한 수탈로 귀결된 소련식 농촌 집단화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지지만, 인민공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국가가 지정한 생산 목표를 달성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농민들은 작업을 거부하거나 태업을 벌였다.
대약진 운동은 곧 공상적 시도였음이 드러났고 재앙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대약진 운동 기간에 약 3000만 명이 아사했다. 그리고 그 이전 10년의 경제 발전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렀다. 1959년 마오쩌둥은 당내에서 책임 추궁을 받고 당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제 생산 목표량이 하향 조정되고 농민들에게 일부 사유 농지를 되돌려 주는 등 정부 정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이 제기되게 만든 중국 경제의 딜레마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완만한 성장을 도모해서는 선진국 경제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외려 중국 경제는 더 뒤처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을 밀어낸 자들은 대약진 운동과 다른 대안적 전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대약진 운동 실패 후 마오쩌둥은 실권을 잃고 명목상의 국가 원수 구실만 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반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것이 바로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된 배경이었다. 계급을 궁극적으로 분쇄하고 세 가지 격차(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격차)를 해소하려는 마오쩌둥의 시도였다는 좌파 일각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문화혁명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했다. “마오쩌둥은 단 하나의 이유에서 권력 투쟁을 거리로 연장시켰다. 그 이유란 투쟁이 지배계급에 국한된다면 그가 패배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당내 정적들을 공격하며 “자본주의적 길을 걷는 권력 내부의 사람들”(이른바 “주자파”)에 대한 전국적 봉기를 호소했다. 거리와 대학으로 캠페인이 확산됐고 많은 홍위병들이 조직돼 문화혁명의 행동대 구실을 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마오쩌둥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성취했다. 당시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비롯한 정적들을 밀어내고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 1966년 8월 중국 공산당 제8기 11중전회에서 문화혁명 16조가 통과됐다. 그 내용은 주자파를 타도하고 네 가지 구습(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관습)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6조는 문화혁명의 대상을 도시의 문화·교육기관, 공산당, 정부 기구로 제한해 기본적인 생산 단위로 확대되는 것을 억제했다.
마오쩌둥은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보고 이제 문화혁명의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그의 손을 벗어나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1949년 이후 국가 주도의 자본 축적 드라이브 속에 노동자들의 불만은 쌓일 대로 쌓여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는 문화혁명의 구호를 접하고 노동자들이 파업 등의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사태를 잠재우고자 했다. 군대만이 그럴 수 있었다. 1967년 공산당은 군대에 모든 국가 기구들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노동자나 학생들이 결성한 각종 조직들은 금지됐고,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문화혁명의 혼란을 거쳤지만, 공산당과 군대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문화혁명 전후로 사회적 관계들도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당과 인민의 관계,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변함없었다. 모리스 마이스너가 지적했듯, “마오주의 시기와 그 이후에 중국에서 집단 노동은 집단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1970년대에 중국의 공장이 어떤 분위기였든지 간에 생산관계의 기본 구조는 지난 수십 년과 다르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도시 노동계급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주장, 즉 노동 분업의 혁명적 전환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문화혁명 초기인 1967년에 수출이 12퍼센트 줄었지만, 1969~1978년의 국민소득·공업산출 등 경제 주요 성과들은 1953~1985년의 평균치를 넘어선다. 문화혁명기의 부르주아·수정주의 문화 비난 분위기 때문에 대중의 소비를 희생시키고 아무런 보상 없이 노동시간을 늘리기 더 용이했다는 지적도 있다.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틀어쥐었지만,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딜레마는 그대로였다. 1970년대 초에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소련과의 전쟁 위협도 더 커지자 외부의 경쟁 압력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이 발전하면서, 국내 가용자원만으로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그러자 서방 자본주의, 특히 미국과 일본에 경제를 개방해 중국의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권좌에 있는 한 기존 노선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덩샤오핑이 이끄는 지배계급 내 ‘현대화’ 분파가 마오쩌둥의 측근들을 권좌에서 제거하고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그리고 당의 노선을 틀어 시장 친화적 개혁·개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중국 밖의 마오쩌둥주의
마오쩌둥의 사상은 1949년 이래 중국 지배계급의 공식 이데올로기 구실을 했지만, 중국 밖에서는 한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일부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여러 아시아 나라들에서 마오쩌둥주의를 지지하는 좌파가 등장했다. 이런 지역들의 지식인들에게 마오쩌둥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곳들에서 거대한 사회적 격변이 벌어질 때 마오쩌둥주의의 정치와 실천은 중요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인도, 네팔처럼 냉전 붕괴 이후에도 마오쩌둥주의 운동이 살아남은 곳들이 있다.
16 1976년 방콕에서 벌어진 학살을 계기로 급진적인 학생과 노동자들이 대거 타이 공산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타이 공산당은 마오쩌둥주의 전략에 따라 농민군을 동원하는 ‘민족민주혁명’을 추구했다. 이 당은 1973년부터 도시에서 벌어진 계급투쟁 물결에 적응하지 못했고, 1976년 학살 이후에도 연이은 실패를 겪었다. 결국 환멸을 느낀 학생들은 공산당의 정글 근거지를 떠나 도시로 돌아갔다. 사기 저하돼 정치 활동을 아예 관둔 사람들이 많았고, 일부 사람들은 엔지오NGO를 설립하는 데 가담했다. 타이에서 엔지오는 1980년대 중반 타이 공산당이 무너진 후 점차 중요한 세력이 됐다. 17
그러나 중국 바깥에서 마오쩌둥주의의 전체적인 성과는 1930~1940년대 중국과는 달랐다. 예컨대 타이에서는 1973~76년에 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타이의 수도 방콕에서 노동자들은 외롭게 싸웠다. 혁명가를 자처한 사람들이 방콕에서 멀리 떨어진 북동부 산악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20년간의 투쟁으로 방콕을 포위한다는 전망으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20년이면 파업 노동자들이 모두 나이 들어 사망한 뒤가 될 터였다.1960년대 후반부와 1970년대 전반부에 미국과 남유럽 등지의 신좌파 청년들에게도 마오쩌둥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친소 스탈린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승리, 서구 공산당들의 보수성 덕분에 마오쩌둥주의는 스탈린주의의 좌파적 버전으로서 일부 신좌파들에게 수용됐던 것이다.
미국에서 1968년 반란에 가담한 청년들은 처음에는 권위에 맞선 대결을 강조하고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배격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학생운동도 ‘자발성’을 강조했다. 이는 수많은 학생들이 운동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와 그들의 자발성만으로도 변화가 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들어맞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흔들렸던 기성 권력이 전열을 갖추고 반격을 가했다. 그래서 1968년 미국의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민주당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경찰의 폭력 탄압에 직면하는 등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진지하게 사회 내에서 작동하는 세력과 구조에 대한 이해, 즉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이때 가장 널리 퍼진 정치가 마오쩌둥주의였다.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스페인 등지에서도 1967년에 ‘반권위주의’와 ‘자발성’을 강조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단히 많은 수가 1970년대 초에는 마오쩌둥주의로 선회했다. 이탈리아 ‘자발성주의’ 단체들 중 최대 규모였던 ‘로타 콘티누아’도 1974년 무렵에는 중국공산당의 조직 모델을 모방하려 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주의를 수용한 좌파들이 지향하는 바는 저마다 달랐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제3세계주의 경향이 강했다. 제국주의 투쟁에서 ‘억압받는 인민’ 또는 ‘억압받는 국가들’의 구실이 사회주의 쟁취에서 노동계급의 구실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봤다.
포퓰리즘(민중주의) 문제도 있었다. 혁명의 주체가 더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계급을 가로지른 모호한 집단으로 규정됐다. 일단 노동자가 아니라 다른 계급들이 ‘제3세계’ 혁명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고 여기게 되자, 마오쩌둥주의 좌파가 이 생각을 선진국에 적용하게 되는 것은 거의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대부분의 마오쩌둥주의 좌파 조직들은 (적어도 조직의 초기 발전 시기에는) 승리주의적인 초좌파주의 성향도 보였다. 이는 중국 문화혁명과,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인들이 미국과 싸워 승리하는 데 따른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게릴라 운동이 퍼진 점도 영향을 줬다. 이런 분위기 속에 마오쩌둥주의 좌파들은 ‘승리는 확실하다’고 공언하게 됐고 패배에 대해 고심하고 성찰할 필요성을 소홀히 여겼고 개혁주의의 힘을 얕보게 됐다.
마오쩌둥주의를 받아들인 혁명적 좌파들은 스탈린주의 조직 형태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조직은 조직원들이 정치·전략·전술 논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부 소식지는 견해 차이를 논쟁하는 장이 아니라 지도부의 문건을 그대로 내보내는 매체였다. 사무총장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을 본떠 ‘지도자’로 묘사됐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당 노선에 대한 맹목적 복종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1970년대 중엽에 주요 자본주의 정부들이 안정을 회복하는 데 일단 성공하고 투쟁 수위도 현격히 내려갔다. 이제 단체 내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과 북미의 주요 마오쩌둥주의 좌파 단체들이 파편화되거나 붕괴했다. 많은 활동가들이 이러한 파편화를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했다. 마오쩌둥 식 규율에 반발하는 데서 더 나아가 모든 규율과 전략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일련의 국제적 사건들도 마오쩌둥주의 좌파들의 혼란을 키웠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이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비판해 서구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중국이 지지하고 마오쩌둥의 노선을 따른다고 한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이 저지른 잔악상도 알려졌다. 이 정권은 ‘일국 사회주의’(즉, 국가자본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뒤이어 중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자, 중국·베트남·캄보디아의 체제를 자기 나라에서 건설할 모범으로 여기던 많은 좌파들이 충격에 빠졌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걸쳐 마오쩌둥주의 좌파의 많은 조직원들이 사기가 저하돼 정치를 포기했다. 일부는 여러 버전의 개혁주의자들로 변신했다. 예컨대, 독일 학생 반란의 지도자였던 두치케와 콩방디는 독일 녹색당의 창당 멤버가 됐다.
결론
오늘날 중국 국가는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하며 중국 사회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회’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주의든, 그 변형된 버전인 마오쩌둥주의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이자 이론이다. 그러나 앞의 두 경향은 계급 기반에서부터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다르다.
마오쩌둥주의는 1925~1927년 중국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것의 산물이었다. 1930~1940년대 중국에서 이 운동은 제3세계에서 벌어진 민족해방 운동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단 민족해방 혁명이 승리하고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국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마오쩌둥주의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발전을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이 시장 스탈린주의 체제가 되면서, ‘사회주의’ 중국이 주는 이데올로기적 호소력은 냉전 때보다는 훨씬 약화했다. 중국 안팎 마오쩌둥주의의 역사적 궤적은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이런 정치가 근본적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함을 보여 준다.
주
- 이재권 2018. ↩
- 하트-랜즈버그, 마틴 & 버킷, 폴 2005, 8쪽. ↩
- 호어, 찰리 2002, 27쪽. ↩
- 버드, 에이드리언 2019. ↩
- 마오쩌둥주의의 이런 특징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와 유사하다. ↩
- Harris, Nigel 2015, p24. ↩
- 마오쩌둥 1989, 301쪽. ↩
- 위의 책, 175~176쪽. ↩
- 위의 책, p184쪽. ↩
- 호어, 찰리 2002, 64~65쪽. ↩
- Hore 2006. ↩
- 이정구 2009. ↩
- 호어, 찰리 2002, 90쪽. ↩
- 마이스너, 모리스 2004, 524쪽. ↩
- 이정구 2009. ↩
- Harris, Nigel 2015, p281. ↩
- Ungpakorn, Ji Giles 2004. ↩
- 하먼, 크리스 2005. ↩
- Harman, Chris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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