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5호를 내며
2010년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인은 여전히 경제 위기다. 한국을 포함해 적잖은 나라들에서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위기가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은행이 ‘출구전략’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현재의 회복은 국가가 개입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경기부양책의 효과인데, 이것은 심각한 불안정과 모순을 안고 있다. 위기가 경제에 ‘쓴 약’으로 작용하지 못해 이윤율이 회복할 가능성을 줄였고 거품을 키워 제2의 추락 위험마저 있다. 또, 정부가 은행과 기업 들을 구하려고 지출을 늘린 결과 재정 적자가 심각해졌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복지 등 공공 지출을 줄이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을 위협하는 등 노동계급의 조건을 공격하고 있다.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조처는 광범한 불만을 낳을 수밖에 없다. 지금 그리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파판드레우 정부의 긴축조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총파업에 나서고 있는 것을 보면 재정 적자를 메우려는 정부의 시도가 대규모 저항에 부딪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불만이 효과적인 투쟁으로 이어질지는 예정돼 있지 않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자신감 수준, 그 지도부의 정치, 좌파의 상태 등 주관적 요인들에 좌우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8년 촛불의 바통을 이어받지 않아 사람들을 애타게 했던 노동자들이 지난해부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민주대연합 노선을 중시해 투쟁의 위력을 확대하기보다 자제시키는 구실을 해, 노동자 투쟁의 잠재력이 한껏 드러나지 못하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올해 초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잠정 승리했고, 현대차 전주공장과 대림자동차에서 투쟁이 이어지고 있고, 공공부문과 금호타이어 등의 투쟁이 예고되고 있다.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고통 전가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0년대 들어 노동자 투쟁은 흔히 주변으로 밀려났는데 이제 다시 노동계급이 ‘귀환’하고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의 중요성이다. 특정 작업장이나 특정 부문의 노동자 투쟁에 그 작업장이나 부문의 노동자와 사측의 세력관계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전체 정치적 세력관계가 이런 투쟁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 예로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조문정국과 미디어법 고비를 넘긴 뒤에야 쌍용차 점거 파업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명박이 그 고비를 넘기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은 바로 민주당이었고 — 그들은 조문정국이 대규모 투쟁으로 이어질 조짐이 나타나는 시점에서 국회로 들어갔고 의도했든 아니든 한나라당에 날치기 기회를 줬다 — 민주당과의 공조에 목매던 진보진영 주류는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을 드러냈다.
이런 점에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화되고 있는 민주대연합 흐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21》은 지난 호에서 민주대연합이 아니라 진보대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 진보대연합 논의는 실종되고 진보정당들(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민주대연합 논의 테이블에서만 만나고 있다. 물론 진보정당의 후보들이 5당 합의 후보로 나온다고 해서 그들을 지지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반MB 선거연합의 위험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반MB 선거연합이 “진보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유력한 방도”라고 한다. 순전히 선거적 셈법을 따르면 선거연합은 의석과 공직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일 수 있다(특히 민주노동당의 경우). 이런 구상에 따르면 지방선거에서 성과를 거두면 다음 차례는 대선이다. “2012년 대선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선거연합은 필수적”이라며 벌써 “연립정부 구성” 얘기까지 나온다. “중앙권력 참여로 진보정당의 수권정당으로의 도약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 구상의 목적지는 집권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처럼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만약 이 국면 어딘가에서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가 선거연합의 합의 수준을 넘어선다면, 2017년 집권으로 가는 이런 포퓰리즘(계급연합)적 구상은 금세 위기에 빠질 것이다. 이런 때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민주당과의 동맹에 목을 맨다면 진정으로 “진보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유력한 방도”인 노동자 투쟁을 오히려 자제시키는 모순된 처지에 놓일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했듯이, 불안정한 경제 회복과 정치적 세력 관계가 맞물려 앞으로 노동자 투쟁이 크게 벌어질 가능성은 작지 않다. 민주대연합의 위험이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특집>에 실린 두 글을 보면 올해 정치·경제적 상황과 전망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한국 경제 불안정한 회복의 이면’은 경제 추락을 막으려 한 대규모 국가 개입의 결과로 국내외 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분석하고 금융 공황 이후 두드러진 한국 경제의 특징도 다룬다. 이 글은 올해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추락할 수도 있다며 이럴 때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정부가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 재정 지출을 삭감하려고 공공부문을 공격하면서 노동자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특집에 실린 또 다른 글인 ‘이명박 집권 3년차 — 평가와 전망’은 지난 2년 동안 정권과 운동 사이의 충돌을 분석하며 지배계급의 위기, 분열, 약점뿐 아니라 진보진영의 약점과 과제도 다룬다.
이번 호가 주목한 <쟁점>은 신자유주의 중등교육, 코펜하겐 이후 기후정의 운동, 아프가니스탄 재파병과 지방재건팀이다.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중등교육 정책’은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오르내리는 자립형 사립고와 국제중 같은 학교 다양화 문제, 일제고사, 교원평가제 등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부합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코펜하겐 이후 기후정의 운동의 전망과 과제’는 코펜하겐 회담장 밖에서 벌어진 대중 시위가 기후정의 운동의 본격화를 알렸다며,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기후정의 운동을 소개하고, 특히 그것과 일자리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프가니스탄 재파병과 지방재건팀의 정치경제학’은 파병 한국군은 물론 지방재건팀도 아프가니스탄 식민화 정책의 맞춤형 군대일 뿐이라며, 재파병이 자원 경쟁에 뛰어든 한국 정부와 기업의 이해관계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낱낱이 폭로한다.
모든 사상은 충돌 속에서 명확하게 다듬어진다. 이번 호에 새로 마련한 <논쟁> 란에는 정성진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적 대안의 문제들’을 실었다. 이 글은 ‘금융화’ 테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장하준의 ‘민주적 복지국가 모델’과 진보신당의 ‘사회연대전략’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런 개혁주의와 이론적으로 단절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반자본주의적 프로젝트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호에 실린 또 한편의 흥미진진한 논문은 오언 밀러의 ‘마르크스주의와 동아시아 역사: 유럽중심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보편주의로’다. 오언 밀러는 보기 드문 영국인 한국사 연구자다. 그는 오늘날 한국사학계와 더 넓게는 동북아시아 역사학계가 스탈린주의로 오염된 과거의 사이비 보편주의를 청산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포스트식민주의의 특수주의로 기울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보편과 특수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이론을 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론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말한 ‘결합된 불균등 발전(또는 불균등·결합 발전)’, 이집트 마르크스주의자 사미르 아민이 말한 ‘공납제 생산양식’, 그리고 이탈리아 혁명가 그람시가 ‘수동 혁명’이라고 불렀고 토니 클리프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발전시킨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 이론, 이 세 가지 이론을 종합한 것이다.
<현대 진보사상 조류>로 소개하는 글은 콜린 바커의 ‘《더 레프트 1848~2000》의 중도 걷기’이다. 《더 레프트 1848~2000》는 국내 진보진영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에게 비교적 폭넓게 읽히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좌파를 낭만화하거나 이상시하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교보문고 책 소개)는 것이다. 통속적 용어로 ‘객관적’이라 함은 ‘중립적’이라는 뜻인 경우가 흔하다. 콜린 바커는 《더 레프트 1848~2000》 서평 형식으로 쓴 이 글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제프 일리의 ‘중립적’ 태도가 흔히 불철저한 중도적 태도로 나타남을 아쉬워하면서 이 책을 세밀하게 논평한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11월 생을 마감한 크리스 하먼을 기리며 그의 정치적 삶을 돌아보는 글인 ‘한 투사의 생애’를 실었다. 이 글에서 이언 버철은 40년 동안 함께 활동한 두어 살 아래 동지인 크리스 하먼의 삶을 잔잔하게 돌아본다. 하먼은 1968년 반란의 투사였고, 부지런하고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이론가였고, 평생 당 건설과 사회주의 원칙에 헌신한 혁명가였다. 그가 쓴 논문과 책을 보면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동시대 활동가들에게 내놓아야 할 주장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규율 있는 당원으로서 그의 자세도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5호를 내면서 우리 편집팀은 몇 가지 크고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그것은 모두 더 많은 독자들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만나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이에 대한 독자들의 응답을 기대한다. 가장 큰 바람은 독자들의 정기구독 신청을 많이 받는 것이고, 더 나아가 독자의 피드백도 받아보길 기대한다.
2010년 3월 14일 편집자 김하영·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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