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연속인가 불연속인가?
1 그럼에도 다음 같은 물음은 여전히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1991년 붕괴한 국가가 1917년에 노동자들이 혁명으로 수립한 국가였는가? 적어도 두 사건 사이에 논리적 연관성이 있는가?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문제’는 좌파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과 1991년 8월 소련 체제 붕괴는 20세기의 국제 정치 풍경을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4년 전 10월 혁명 100주년은 아무런 축하 기념 없이 지나갔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고 썼다. 스탈린 체제의 등장이 1917년 10월 혁명의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트로츠키주의 전통의 결정적 특징이다(불연속성).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 강제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 등을 통해 스탈린 체제가 형성된 것은 사회주의 건설이 아니라 반혁명의 도래였다. 당과 국가의 핵심을 이룬 관료가 새로운 지배계급이 돼 노동계급의 권리를 빼앗고 원자화시켜 착취하고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10월 혁명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던 볼셰비키 선임 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 “피의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단지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반혁명은 소련 국가의 생존, 즉 서방 제국주의 열강과의 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스탈린의 최대 국정 운영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자본 축적 논리에 종속됐다. 따라서 1989∼1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대격변은 자본주의의 복원이 아니었다. 크리스 하먼은 한 형태의 자본주의(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시장 자본주의)로 옆걸음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사회주의경향은 스탈린주의가 가장 강성했던 1940년대 후반부터, 그러니까 소련이 동유럽을 점령하고 국제 공산당 운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국제적으로 대부분의 좌파가 소련이 서방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부터 일관되게 이렇게 주장해 왔다.그러나 사회 통념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다수가 소련 역사를 연속적으로 본다(연속성). 서방 세계의 지배층 전체와 거의 모든 미디어들, 우파 역사학자들이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레닌과 레닌주의를 매도한다. 연속성 테제는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4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은 《극단의 시대》에서 “1980년대 말 산산조각 난 세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 세계였다”고 썼다. 5 이 책의 부제는 ‘단기 20세기, 1914~1991년’인데, 이런 시기 구분은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시대가 끝났음을 함축했다.
연속성 테제는 좌파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다수, 아나키스트들, (거울 이미지로서) 스탈린주의 체제와 그 운동들. 가령,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데이비드 하비는 항상 레닌주의와 거리를 뒀다.연속성 주장은 그럴듯해 보인다. 스탈린이 사용한 용어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레닌주의와 잘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시간의 순서로 보면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사물의 본질이 직접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한국 좌파 중에는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스탈린의 집권을 혁명과 반혁명의 상호 작용 메커니즘으로 파악하지 않고 레닌 시절부터 취해진 공산당의 정책들(예컨대, 민주주의 제한 조처들)이 낳은 극단적인 결과물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6 백종성은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지만, 스탈린 체제를 러시아의 사회·경제 관계들과 정치적 측면 모두에서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한 반혁명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가령, 백종성은 “러시아 혁명의 좌절”을 ‘내전과 유럽 혁명의 패배 → 소비에트 민주주의 위축 → 러시아 공산당 내 분파 금지 →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 → 생산력 발전을 위한 민족주의적 동원 체제 구축’ 식으로 연대기적으로 기술한다.백종성은 특히 1921년 러시아 공산당 10차 당대회에서 통과된 당내 분파 금지 결의안이 “심대한 오류”였다고 주장한다. 레닌 사후 스탈린이 분파 금지를 일반원리로 승격시켜 자신의 체제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성두현도 당내 분파 금지가 “치명적 오류”였다고 주장한다. “레닌과 러시아공산당이 당시의 열악한 조건과 비상사태라는 조건에서 커다란 문제의식 없이 취해간 공산당 일당제와 소비에트다당제의 파괴, 당내민주주의의 제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후 영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왜곡된 노동자민주주의는 이후 역전의 계기를 잡지 못하고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주장은 레닌(의 오류)이 스탈린 체제의 길을 열어 줬다는 함축을 담고 있다. 레닌이 1921년에 “당내 분파 금지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혁명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강요한 압력이 결정적이었다. 크론시타트 반란과 농민들의 반발 등으로 인한 객관적 위기 때문에 러시아공산당은 고립과 후퇴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레닌은 군대가 전진할 때와는 달리 군대가 후퇴할 때는 가장 강력한 규율과 가장 엄정한 군기가 필요하다고 봤다. 레닌은 당의 분열이 혁명의 패배를 부를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볼셰비키는 1918년 초 핀란드 노동자 봉기의 패배를 보면서 자신들이 패배하면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지를 마음속에 각인했다. 핀란드에서 패배한 뒤 백색테러가 일어나 좌파 노동자 8000명이 처형당했고, 포로로 붙잡힌 8만 명 가운데 1000명이 굶어 죽도록 방치됐다. 역사에서 모든 반혁명 세력들 — 스페인의 프랑코, 칠레의 피노체트, 2013년 이집트의 엘시시까지 — 은 모두 대량학살을 했다. 그래서 레닌만이 아니라 (노동자 반대파까지 포함해) 볼셰비키 당내 분위기는 분파 금지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9 레닌은 “당의 단결에 대하여”라는 결의안에 ‘이견이 있는 사람들은 토론용 특별 자료집이나 당 언론 매체에 견해를 표명하라’고 요청했다.
이때조차 레닌은 분파 금지가 곧 당내 이견을 모두 금지하는 조처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랴자노프가 ‘강령’을 내세우는 당내 분파들의 습성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 문제들을 놓고 이견이 있을 때 당에서는 논쟁할 권리를 당과 중앙위원회에서 박탈해선 안 된다. 나는 그런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내전, 국제 혁명, 볼셰비키 정책
물론, 레닌이 이끌던 시기에도 볼셰비키는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제헌의회 해산,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진압 등은 연속성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혁명을 방어하고 혁명의 근본 대의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혁명 세력이 제헌의회로 결집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근본에서 부르주아 의회의 한 형태인 제헌의회보다는 소비에트가 더 높은 형태의 민주주의(노동계급 민주주의)를 나타내기 때문에 제헌의회 해산과 소비에트 방어는 정당했다. 또, 비록 쓰라린 것이기는 했지만, 페트로그라드로 들어가는 관문 격인 전략적 요충지에서 일어난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도 불가피했다(트르츠키는 “비극적 필요”라고 말했다). 안 그랬으면 이제 막 끝난 내전에 다시 불을 붙일 위험이 있었고, 따라서 크론시타트 반란에 참가한 병사들의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반혁명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받고 있던 객관적 상황의 압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러시아의 당면 과제는 당분간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아니라 세계 제국주의 열강이 결정했다. 열강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반혁명 백군과 외국 군대를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것을 위해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반혁명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내전의 경제적·사회적 결과는 끔찍했다. 혁명과 내전 전에도 러시아는 이미 제1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17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경제가 망가졌다. 여기에 내전이 더해진 결과로, 기근과 질병이 만연했다. 도시에 먹을 것이 없어 노동자들이 농촌으로 떠나 도시 인구도 급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카데츠·사회혁명당·멘셰비키 같은 정당들의 행동이었다. 내전이 격화하기 전까지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다수파로서 권력을 장악했지만, 소비에트 안에 다른 정당도 계속 존재했다. 멘셰비키는 1918년 6월까지 합법적으로 활동했다. 정당과 계급의 민주적 변증법이 작동됐던 것이다. 그러나 내전이 격화되자,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볼셰비키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이 백군을 (반쯤) 지지했거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행동에 연루돼 있었다.
볼셰비키가 다른 정당들을 금지한 것은 바로 이런 사건들에 대한 대응이었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 결과 1917년에 수립된 소비에트 국가는 1920년부터 일당 국가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노동계급이 내전에서 혁명을 지키다가 물리적으로 해체됐다고 해서 노동자 권력을 포기해야 할까? 순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혁명의 가혹한 현실에 눈감는 것이다. 혁명을 이뤄 낸 계급이 사실상 사라져 버렸을 때, 혁명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내전에서 노동계급이 대거 목숨을 잃자(아이작 도이처의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1921-1929》(시대의창)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 홀로 권력을 잡고 사회구조의 응집력을 유지해야 했다. “국가권력이 비대해지는 데 반해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통제기구가 위축되어가는 상황은 분명한 흐름을 가진 것이었으며, 그 흐름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규정한 ‘국가 사멸’의 정식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백종성 2020)던 것은 이런 상황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볼셰비키의 프로젝트가 계획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객관적 상황 때문에 볼셰비키가 실행한 전국적·지역적 정책들은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의 역사적 이익에 따른 것이기보다 (반사회주의적인) 계급 세력에 대한 즉각적 대응과 관련돼 있었다.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이 그랬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당 자체(외부 요인들로 희석된)와 볼셰비키 당원들(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 태도에 점점 굴복하는)이 변했다. 레닌 자신의 마지막 글들에서도 나타나듯이(《레닌의 반스탈린 투쟁》, 신평론출판사; 절판됨), 당 내부의 부패 과정에 대한 우려와 그에 대응할 사회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정책을 작성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노동자반대파’가 그중 한 분파였는데, 점잖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레닌 사후 스탈린은 통합반대파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스탈린 진영에서 새롭게 등장한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요소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재앙에 저항하고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국제 혁명의 지원을 받을 때까지 버티고자 했다. 국제 혁명의 지원을 받을 때까지 버틴다는 것은 당시 모든 볼셰비키의 전망에서 중심적인 것이었고, 암담한 내전의 시기가 오기 오래전부터 그랬다. 볼셰비키는 혁명이 고립되면 외국군이나 국내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이 파괴될 것이라고 늘 말했다. 다시 말해, 국제 혁명(의 성공 여부)은 러시아 혁명에서 삽화적 요소가 아니라 결정적 변수였다
국제 혁명을 추구한 것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의 발전 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사회주의는 단지 특정한 경제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것이자 이전의 생산양식이 만들어 낸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생산력과 인류 문화의 발전을 모두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만 “다수의 이익을 위한 다수의 혁명”(마르크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불균등 결합 발전이 뜻하는 바는, 세계적 규모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생산력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들에서 기존 사회 구조를 전복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국제적 힘 관계의 산물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일국에서 고립된 채 발전할 수 없다. 일국의 낮은 생산력과 문화 발전 수준으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이길 수 없고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무엇보다 독일로 혁명을 확산시키는 불꽃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기대 속에서 혁명가들은 내전의 가혹한 조처들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10월 무장봉기 자체도 정당화했다. 1924년 말에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론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한 나라에서만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모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국제 혁명의 원조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가혹한 조처들도 불사하면서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는 볼셰비키의 전략이 옳았는가 틀렸는가? 이것이 진정한 역사적 쟁점이다. 이 전략 말고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있다면, 그것은 혁명의 패배와 반혁명의 승리라는 대안이었다. 그러나 ‘제3의 길’, 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은 없었다. 레닌은 “중간의 길은 없다. 러시아의 상황이 극단적으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든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고 코르닐로프 독재를 수립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빅토르 세르주도 볼셰비키 독재가 무너지면 “반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주장한 것과 같은, 관료주의로 일그러지지 않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 혁명, 무엇보다 독일 혁명은 황제를 전복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918∼1923년 독일 혁명이 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는 데까지 발전했다면 혁명의 국제적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20세기 역사도 아주 달랐을 것이다.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역사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 독재자의 등장은 독일 혁명의 패배가 낳은 끔찍한 결과였다. 러시아 혁명이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포 정치로 이어진 것은 혁명의 필연적 결말이 아니고, 독일 혁명이 패배한 결과였다. 독일 혁명의 패배로 말미암은 국제 혁명의 실패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반혁명이 최종 승리했다. 스탈린은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이 최종 패배하자 그 이듬해에 ‘일국사회주의’를 천명했다.”
‘일국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당내 반대파, 처음에는 트로츠키파, 나중에는 지노비예프·카메네프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일 때 깃발로 사용됐다. 왜냐하면 반대파가 국제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며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일국사회주의’론에 따라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혁명을 방어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러시아의 후진성과 필요한 희생에 대한 현실적 평가를 잘못된 낙관적 상황 인식으로 대체했다. 혁명이 고립된 상황에서 국방에 필요한 산업 육성 정책이 실시됐을 때, 러시아 인민(노동계급과 농민)이 겪어야 할 고통과 희생의 정도는 은폐돼야 했다. 고립된 소련을 방어하려면 얼마나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감추는 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면에서 득이 될 게 없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의 등뼈를 이룬 관료들에게는 ‘일국사회주의’론이 득이 된다. 국제 혁명은 자신들의 통치를 위협할 불안정한 상태를 낳을 뿐이었다. 그래서 1924년 이후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모든 정책은 국제 혁명 운동을 자신들의 이익에 종속시키고 진정한 대중 운동을 제약하는 방향이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 1930년대 독일·프랑스·스페인에서, 1940년대 이탈리아·그리스에서 동일한 ‘총노선’이 지배했다. 모스크바의 정책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이 나라들에서 혁명이 성공했을 거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성공의 기회가 더 커졌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방법론적 문제
러시아 혁명처럼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혁명으로 새로운 사회가 출현해서 80여 년 동안 변화해 온 역사적 과정을 대규모 사회 세력이 아니라, 당의 정책이나 실수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접근법이다.
스탈린 체제가 발흥한 원인에 대한 진지한 분석은 러시아 혁명 이후 국내외에서 우세해진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을 분석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물질적 조건이 어떻게 러시아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계급 세력 균형을 좌우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기계적 결정론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나 정치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만,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만든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상황과 자기 자신도 변화시킨다. 볼셰비키도 역사 속 다른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현실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의 성장은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 두 가지가 상호 작용한 결과였다. 즉,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약화와 탈진,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고립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변혁의 주체이자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을 선도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내전 이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사회를 운영할 능력도, 지도자를 통제할 능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 없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결국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 당과 국가 엘리트의 관료화는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이었다.
스탈린이 당을 지배하는 인물이 된 것은 이런 상황의 산물이었지 그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즉, 관료 집단이 스탈린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당 기구의 책임자가 되자마자(1922년에 서기장이 됐다), 그리고 나중에 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자마자(1923년 이후) 그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 지지자들을 승진시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기구를 건설했다.
스탈린주의는 점진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비록 내전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대량 학살당해 관료가 노동계급으로부터 한꺼번에 권력을 빼앗을 필요 없이 모든 영역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련의 질적 변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난하게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당내 투사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거쳐야 했다. 그 첫 번째(이면서 가장 중요한) 충돌은 1923년 좌익반대파와의 충돌이었다. 좌익반대파는 1927년에 최종 패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러시아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생산관계가 변형되고 관료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변모했다.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은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떠맡음으로써 스스로 국가자본가 지배계급이 됐다. 그리고 러시아 경제를 자본주의의 핵심 동역학에 따라 작동하는 경제로 바꿨다. 이런 경제적 변혁이야말로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반혁명으로 규정하는 이유다.(이것은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승리, 1927년 중국 혁명의 참패, 무엇보다도 1933년 히틀러의 승리를 포함한 국제적 반혁명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것을 계기로 1917년의 노동자 혁명은 마침내 패배하고, 새로운 국가자본주의 형태로 자본주의가 복원된 것이다.
결론 — 레닌주의의 현재적 의미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연속성 주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면,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라면) 레닌주의를 거부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십상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중요한 기여를 많이 했다. 특히, 국가 이론과 그리고 혁명적 정당 이론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문제는 ‘노동계급이 어떻게 국가 권력을 장악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느냐’와 연결돼 있다.
먼저,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노동자 국가(소비에트)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태도 문제는 혁명가들과 개혁주의자들을 가르는 핵심 경계선이다.
물론, 레닌 시대보다 더 고도로 구조화되고 비교적 안정적인 개혁주의 정당들이 오늘날 (한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는 레닌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 준다. 결정적으로 개혁주의 정부의 성공 사례가 없다. 단지 온건한 주류 개혁주의 정부만이 아니라 (칠레 아옌데 정부에서부터 그리스 시리자 정부에 이르기까지) 좌파적 개혁주의 정부도 실패 목록에 올라 있다. 개혁주의의 길이 닫혀 있다면, 혁명적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레닌의 국가론을 연구하고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볼셰비키당은 10월혁명에서 검증된 위대한 정치적 혁신이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레닌주의 정당을 기각하는 것이 좌파의 유행이다. 캐나다 마르크스주의 학자 라스 리가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내용을 제공했다. 리는 스탈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곡해된 “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의 레닌을 잘 떼어놓았지만, 레닌을 카우츠키 추종자로 만들어 버렸다. 레닌주의적인 혁명적 정당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리의 핵심 비판 타깃은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 1, 2》(책갈피)였다. 이 책에서 클리프는 레닌이 어떻게 정당을 건설해 1917년 10월을 준비했는지를 보여 줬다. 리는 클리프가 발전시킨 정당 모델이 기실 지노비에프-스탈린의 “볼셰비즘”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거나 레닌주의자들은 모두 스탈린주의자들이라는 오래된 거짓말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동계급 속에 뿌리를 내린 혁명적 정당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잃어 버린 좌파에게, 카우츠키주의자로 변색된 레닌이 솔깃할 수 있다. 한편으로, 더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말하지 않는 불신받는 개혁주의에 맞서 사회주의적 목표와 요구에 계속 헌신한다. 다른 한편, 이런 헌신은 대중 행동을 지지하면서도 의회적 구조를 변화의 통로로 보는 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리의 주장은 좌파 개혁주의에 빨간 칠을 하는 것이었다.
역사적 선례는 1970년대 유러코뮤니즘 프로젝트였다. 그것은 단순히 탈스탈린주의 노선이 아니었다. (좌파적) 개혁주의로의 이동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변화였다. 즉, 소비에트 권력 모델은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더는 적합하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국가 전복”의 문제가 아니라 의회 체제를 이용해 대중적 힘을 만들고 기존 국가를 사회주의 건설에 유용한 도구로 변형시키는 것을 뜻했다. 유러코뮤니즘을 계승한 정당이 그리스 시리자였다. 시리자는 사회주의로 가는 유러코뮤니즘적 길이 온건한 개혁조차 실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 또는, 수동적 혁명론, 숙명론적 대기주의, 수동적 기대 이론이었다. 크리스 하먼은 카우츠키가 “노동자들이 정당 없이 존재하는 것과 ‘때 아닌 혁명’과 관련된 위험에 대해 거의 병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15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두고 “혁명적 정당이었지만 혁명을 만드는 정당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주의는 혁명은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 없고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므로, 실천에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대기하는 수동적 급진주의 이론이었다반면, 개입주의적 정치 실천 개념이 레닌의 기본 원칙이었다. 고되더라도 노동자 투쟁 속에 뿌리를 내리는 레닌주의 정당을 참을성 있게 건설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
-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8, [러시아혁명 100주년]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1917년 10월혁명, 《마르크스21》 23호 (2018년 1∼2월). 이 글에서 캘리니코스는 1917년 10월 혁명이 보편성(노동계급이 대중 투쟁을 일으켜 이원 권력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과 특수성(그런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혁명적 정당이 존재했다는 것)의 융합을 보여 줬고, 앞으로도 그런 융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
- 하먼 2009. 클리프 2011과 캘리니코스 1993도 보라. ↩
- 존 몰리뉴의 《레닌과 21세기》(책갈피, 2019)는 국제사회주의경향의 전통에 근거해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불연속성을 규명하며 레닌이 이룩한 업적의 현재적 의미를 다룬 최근작이다. ↩
- 하비 2014. ↩
- 홉스봄 1997. 캘리니코스 2018에서 재인용. ↩
- 백종성 2020. ↩
- 성두현 2020. ↩
- 클리프 2013, 192∼196쪽. ↩
- Lenin, collected works, vol. 32, p261. 하먼 2016, 429쪽에서 재인용. ↩
- 하먼 2016, 237쪽. ↩
- Smith, 2017, pp391-392. 캘리니코스 2018에서 재인용. 스티브 스미스는 이 책에서 러시아 혁명사에 관해 배울 게 많은 연구 결과를 보여 주지만, 그와 동시에 장 조레스나 카를 카우츠키 사상에도 기대고 있다. ↩
- Harman 2018. ↩
- 김인식, 2018. ↩
- Corr & Jenkins 2014는 라스 리의 레닌 해석에 관해 상세하게 비평한다. ↩
- 하먼 2012, 35쪽. ↩
참고 문헌
김인식 2018,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기억하며’, <노동자 연대> 265호.
몰리뉴, 존 2019, 《레닌과 21세기》, 책갈피.
백종성 2020, ‘러시아 혁명의 좌절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변혁정치> 117호(11월 18일).
성두현 2020,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자》, 7월 6일.
캘리니코스, 알렉스 1993, 《역사의 복수》, 백의 (절판).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8,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1917년 10월혁명’, 《마르크스21》 23호 (2018년 1∼2월).
클리프, 토니 2011,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책갈피.
클리프, 토니 2013, 《레닌 평전 4》,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09,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12, ‘당과 계급’, 트로츠키, 레온·클리프, 토니·핼러스, 던컨·하먼, 크리스· 캘리니코스, 알렉스, 《당과 계급 — 노동계급에게는 어떤 정치조직이 필요한가?》,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16, 《크리스 하먼 선집》, 책갈피.
하비, 데이비드 2014, 《자본의 17가지 모순: 이 시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대안》, 동녘.
홉스봄, 에릭 1997, 《극단의 시대 上, 下》, 까치.
Corr, Kevin & Jenkins, Gareth 2014, The case of the disappearing Lenin, ISJ 144, (Posted on 10th October 2014).
Harman, Chris 2018, Trotsky and the New Stalinism, ISJ 160, http://isj.org.uk/trotsky-and-the-new-stalinism/. 이 글은 1967년에 처음 발표됐다.
Smith, S A 2017, Russia in Revolution: An Empire in Crisis, 1890 to 1928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