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고전 읽기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자본주의적 소외의 비밀을 풀다
1844년에 카를 마르크스는 26세의 청년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의 급진 민주주의 신문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의 편집자였다. 그는 도벌법(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가면 절도죄로 처벌하는 법)을 비판하는 등 법적·경제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점차 철학과 봉건제 타파 문제를 넘어선 계급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
마르크스는 1859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하 ‘서문’)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의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우선 먼저 경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 내가 도달한 일반적 결론이자 일단 도달하자 내 연구의 원칙이 된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일정한 관계, 즉 물질적 생산력 발전의 일정한 국면에 적합한 생산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이런 연구 원칙이 적용된 초기 저작 중 하나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이하 《1844년 수고》)였다. 이 책은 마르크스가 1844년에 쓴 노트 필기를 모아서 마르크스 사후에 출판된 것이다. 책으로 출판할 용도로 쓴 글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청년 마르크스의 초기 탐구 궤적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는 임금·이윤·지대 등에 대해 아담 스미스 등 당대 경제학자들이 쓴 글에 대한 논평과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비평이 담겨 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이 책의 가치는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소외된 노동’ 개념과 역사유물론의 개요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
소외는 마르크스가 처음 사용한 개념은 아니었다. 마르크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인간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며 본래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현상을 두고 ‘소외’라는 용어를 사용해 인간의 조건을 묘사했다. 예컨대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마르크스는 특히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헤겔(1770~1831년)이 사용한 소외 개념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헤겔의 변증법 사상은 십대 후반의 마르크스를 포함해 당대 청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헤겔 사상에는,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일관되게 보이는 체계일지라도 그 내부에는 틀림없이 모순이 있고 그 모순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변화가 시작된다는 혁명적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헤겔 사상은 추상적이고 복잡한 관념론이었다. 헤겔은 인간이 “절대 정신”이라는 최상의 지적 상태로부터 배제돼 있기 때문에 소외를 겪는다고 봤다. 게다가 헤겔에게 소외는 삶의 발현, 즉 “외화”이므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이상 필연적인 것이었다. 헤겔이 제시한 대안은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헤겔은 정신의 힘으로 ‘소외를 소외시키기’(부정의 부정)라고 불렀다.
헤겔뿐 아니라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당대 모든 철학자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정신적 생활을 특별히 중시했고, 먹고 입고 자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일(즉, 생산적 노동)은 하층민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정반대로 생산적 노동을 인간의 본질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헤겔을 비롯한 앞 세대 철학자들의 전제를 뿌리부터 뒤집어 버렸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 존재다. … [자연적 욕구인] 배고픔을 해결하고 달래려면 그것[인간] 바깥에 있는 자연, 대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자연을 만나고 이용하고 변화시킴으로써 생존하는 존재다. 객관적 세계를 대상으로 노동하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영원한 조건”이자 인간의 본질이다.
그런데 자연에 힘을 가해 생존해 나가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의식된 생명 활동”, 즉 의식적 노동을 하는 존재라고 봤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은 10년이 지나든, 100년이 지나든 그 종이 바뀌지 않는 한 대체로 똑같은 생명 활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 지식과 노동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발전해 왔고, 오늘날에 이르러 인류가 이룩한 생산력 수준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압도한다.
인간이 그런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바로 의식적으로 노동하는 능력, 즉 과거의 노동을 평가·반성하고 그 과정에서 동료 인간과 토론해 더 나은 대안을 찾으며, 그 기억을 축적해 역사로 남기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다른 인간과 협력했다. 마르크스는 《1844년 수고》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 종의 본질은 또한 사회적 존재다. 사회는 그저 개인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총체다.” 마르크스는 이런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뜻에서 인간을 “유적 존재”species-being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에게 노동이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라면,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삶이 과연 즐거울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보기에 소외의 진정한 원인은 여기에, 즉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과 맺는 관계에 있었다. 인류 역사에 계급이 발생한 이래로 노동은 결코 직접 생산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소외의 네 가지 측면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는 단지 많은 노동자들이 지루하고 위험하고 단조로운 노동에 시달린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노동이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중요하게 봤다.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통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마르크스에게 소외된 노동은 “임금 노동”의 다른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돈을 주고 구입하는 하나의 상품이 된다. 상품으로서 기계가 기계와 경쟁하고 노동자가 노동자와 경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제 “기계는 노동자에게 경쟁자로 나타난다.” 결국 노동자가 만들어 낸 기계가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시장에서 최대한 낮은 가격의 상품이 선호되듯,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최대한 낮은 임금을 지급하려고 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낮고 오직 필요한 임금률은 노동자가 가족을 부양하고 노동자라는 종이 멸종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만큼이나 노동하는 동안 노동자에게 최저 생활을 제공하는 것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보통 임금은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된 인간성, 즉 소 같은 존재와 교환된다.”
다른 요인으로 임금이 상승한다 해도, 그것은 임금 상승분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자본이 많이 축적됐을 때 가능하다. 무엇보다 노동자는 여전히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희생을 통해서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임금을 다 모아도 자신이 만들어 낸 생산물들을 결코 구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총생산이 증가하면 — 그리고 증가한 만큼 — 필요·욕구·청구도 증가하므로 절대적 빈곤이 줄어들어도 상대적 빈곤은 늘어날 수 있다.”[강조는 마르크스의 것]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과잉생산이 하나의 상시적 경향이 되지만, 그 생산물들은 인구의 다수인 노동계급이 아닌 자본가 계급의 것이 되고 자본가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든다.
또, 분업이 세계적 규모에서 이뤄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다. 노동자 개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공장에서 만든 물품이 어느 국가의 군수 물자로 들어가 살상 무기가 될지 모른다. 이렇듯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 생산물이 핵 전쟁의 위협과 기후 위기로 노동자에게 되돌아 올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력과 체제의 힘을 강화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생산물에서 소외됨으로써 노동 과정에서의 소외 또한 겪게 된다고 말했다. “생산물은 결국 생산 활동의 집약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 생산물이 소외라면 생산 자체는 적극적 소외, 활동의 소외, 소외 활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가가 노동 생산물의 축적인 자본을 전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본가가 이미 확정해 놓은 생산 공정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도록 강요당한다. 노동자는 기계의 작동 방식과 속도에 종속되지만, 기계는 노동자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강요된 노동에서는 노동 과정 자체가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대립물로 다가온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서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며, 만족감이 아니라 불만족감을 느끼며,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계발하지 못하고 자기 몸에 굴욕감을 느끼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자신을 느끼고, 노동할 때는 자신이 외부에 있다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는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할 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다. 강요된 노동이다. … 노동의 소외된 성격은 육체적 또는 다른 강요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전염병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강조는 마르크스의 것]
이렇게 강요된 노동 속에서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 즉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이 불가능해지고 삶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된다.(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또 다른 본질인 사회성과 협력 정신도 파괴된다. 자본가들은 서로 더 많은 이윤을 가지려고 다투고,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협력도 하지만) 경쟁하면서 서로 소외된 관계를 맺는다.(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애덤 스미스, 장 바티스트 세이, 존 스튜어트 밀 등 당대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과 교환하려는 성질로 규정하고 상품 경제와 자본주의적 분업을 찬양했는데, 마르크스는 《1844년 수고》에서 이들을 여러 차례 비판한다.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이론을 구축했지만, 인간은 “오직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동물이다.”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으로 지목한 특성들은 사회성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경쟁과 이기심, 인간 관계의 파편화는 자본주의를 발생시킨 원인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부추겨지고 강화되는 소외의 측면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반복되는 패배감, 두려움에 빠진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소외를 보상받기 위한 활동을 찾아다닌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보상 심리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고 여가·미디어·성 산업 등을 육성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자기 이웃의 가장 타락한 욕구 충족을 도와 주고, 그의 요구에 영합하고, 그의 불건전한 욕망을 부추긴다”고 썼다. 또, 《1844년 수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필요는 극도로 상냥하게 보이는 탈을 쓰고 이웃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할 기회가 된다: 이보게 친구, 내가 자네에게 필요한 것을 주겠네, 다만 자네도 알다시피 필수 조건이 있다네; 자네가 알다시피 자네는 나에게 이렇게 서명해야 하네; 자네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가로 나는 자네에게 바가지를 씌울 걸세.”
이제 인간의 가치를 드러내 주는 제1의 척도는 의식적인 노동이나 주변 인간들과 맺는 관계가 아니다. 화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고나기를 힘이 없어도 돈이 있으면 경호원을 고용해 힘이 세질 수 있다. 말주변이 없어도 돈이 있으면 전관 변호인들을 고용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 돈을 주고 사람을 사 추악하고 비열한 짓을 시킬 수 있다. 돈이 있으면 품위를 가진 인격도 만들어낼 수 있다. “화폐는 신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 돈이 없는 사람은 무가치하고 비인간적이게 된다. 돈이 없으면 다른 인간에게 복종해야 하고, 모욕을 참고 구걸해야 한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수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수요는 나나 제삼자나 다른 이들에게 아무 효과나 실재가 없는 상상일 뿐이며, 그래서 나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목적이 없는 것으로까지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화폐는 보편적 소외의 산물”이고 “판매는 소외의 실천이다” 하고 말했다. 결국 소외된 노동은 소외된 사회, 소외된 세계를 만들어 낸다.
현재적 의의
마르크스는 《1844년 수고》를 통해 불가항력처럼 여겨지던 소외 현상의 외관을 걷어 내고, 그 이면에 계급적 이해관계가 있는 인간 집단의 주체적 행위가 있음을 드러냈다. 《1844년 수고》에서 제시된 소외된 노동 개념은 《독일 이데올로기》 등 이후 저작들에서 더한층 정립된 역사유물론으로 발전했고, 《자본론》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로 정립되는 마르크스 이론의 중요한 맹아가 됐다.
또한 《1844년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유재산의 사상을 대체하는 데서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현실의 사유재산을 대체하려면 진정한 공산주의 활동이 필요하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그런 관점에 따라 실천했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쓴 직후에 엥겔스를 만났고, 두 사람은 1846년 2월에 공산주의자통신위원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 뒤 마르크스가 건설한 여러 정치 조직의 초기 형태였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1844년 수고》는 불행하게도 마르크스주의를 치명적으로 왜곡했던 스탈린주의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찬밥 신세를 당했다. 스탈린(소련)과 마오쩌둥(중국) 등은 마르크스주의를 생산력주의로 둔갑시키고 자국에서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쥐어짰고, 그리하여 소련과 중국의 스탈린주의 체제에서도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소외가 만연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을 기각했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루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 사상을 전기와 후기로 자의적으로 구분하면서 《1844년 수고》의 가치를 폄하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1844년 수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이 가진 객관적 잠재력보다 그들이 부당하게 겪고 있는 소외의 비참함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경제 법칙과 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은 아직 이 책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1844년 수고》는 마르크스가 장차 발전시킬 이론의 단초를 보여 준다.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따라서 《1844년 수고》는 마르크스 사상 발전의 과정으로 봐야지 단절시켜야 할 사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한편, 195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에 반발하며 등장한 서구의 신좌파가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이용해 스탈린주의 사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일부 신좌파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려다 마르크스 소외론의 진정한 출발점인 유물론적 분석까지 내다 버렸다. 그리하여 소외는 비민주적으로 무시당하는 상태 또는 그 심리를 의미하게 됐다. 만약 소외가 단지 심리의 문제일 뿐이라면 사회 구조의 혁명적 전복 없이도 소외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예컨대 에리히 프롬은 소외가 “다양한 고정관념”에서 비롯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질 수 있는 “환상의 사슬”이라고 주장했다. 1840년대 마르크스가 소외론을 발전시키며 비판했던 관념론을 되살린 것이다.
마르크스의 《1844년 수고》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는 일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지키고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인류 앞에는 여전히 통제 불능의 세계, 극심한 빈부 격차의 세계, 생산력 발전이 오히려 기후 위기와 전쟁과 감염병 위기 등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계가 놓여 있다. 혁명가들이 이런 야만적 세계를 전복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대중 운동을 건설할 때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은 통찰력 있는 사회 분석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
MARX21
주
- 이 글에서 특별한 언급 없이 인용된 부분은 모두 <1844년 수고>에서 가져 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