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자본주의론의 역사와 의미
보통 자본주의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국가가 경제의 구원 투수 구실을 한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촉발된 세계경제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기부양책을 서둘러 내놓았고 금융시장의 회복을 위해 양적완화 정책들을 펼쳤다. 당시 미국 정부는 부도 위기에 처한 금융기관들을 일시적으로 국유화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금융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어쨌든 국가가 경제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전면에 나섰고, 선진국이나 신흥국 모두에서 국유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대했다. 경제에서 국가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유기업의 비중이 높아진 대표적인 나라는 중국이었다. 2011년 중국 주식시장에서 국유기업 비중이 80퍼센트에 이르렀고, 전 세계 순이익 상위 10대 기업 중 세 개가 중국의 국유기업(중국석화, 중국석유, 국가전망공사)이었다.
1990년대 이래로 세계화 추세가 강화되면서 신자유주의(또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세계자본주의를 주도하고 국가 부문은 최소한도로 축소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많았다. 1991년 소련의 몰락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서방의 승리로 인식됐다. 국가의 축소, 세계화와 자유시장의 확대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널리 퍼졌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지 않는 국가들은 연줄 자본주의cronyism, 투명성 결여, 불평등과 비효율성 증대 등의 문제들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 여겨졌던 시장경제는 새천년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에서 경제 위기가 터지고,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는 ‘닷컴’ 위기가 발생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위기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안정성에 심각한 의문을 던져 줬다. 한마디로 시장의 실패가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었다.
2008년 서구 경제들이 위기를 겪는 동안, 중국 경제는 잠깐 경기 침체를 겪었지만 정부의 거대한 경기부양 정책 덕분에 빨리 회복됐다. 러시아·브라질·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지에서도 국가와 국유기업의 구실이 증대됐다. 그리고 중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유기업 비중이 높은 경제가 경제 위기로부터 타격을 덜 받았을 뿐 아니라 수익률 면에서도 국유기업이 민간기업 못지않았다. 2011년 전 세계 기업 중 순이익 상위 10개 중 4개가 국유기업이었다.
1 저명한 우파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현재 우리는 모두 국가자본주의자들이다’는 글을 발표했다. 2 이 말은 전후 서방 세계에서 케인스주의가 대세를 이뤘던 1965년에 통화주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이 《타임》에서 말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들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민경제에서 국유기업의 비중이 증대되자 ‘국가자본주의’ 담론이 인기를 얻으며 부상했다. 2012년 기업주들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국가자본주의 부상”이라는 특별 보고서를 내놓았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로 인한 경제 위기를 계기로 국가 개입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가자본주의’ 논의가 부상한 또 한 가지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있다. 2008년 이후 미국에 비해 중국식 국가자본주의가 훨씬 나은 성적표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칭화대 교수 죠수아 쿠퍼 레이모가 “베이징 컨센서스”를 주장했는데,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이 용어가 뒤늦게 인기를 얻었다.하지만 니얼 퍼거슨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시장 자본주의 대對 국가자본주의의 대립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정 시기에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수 있고 또 그런 역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국가냐 시장이냐’가 아니라 국가의 구실이 어느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지를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부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23퍼센트)보다 독일(48퍼센트)이나 네덜란드(58퍼센트)가 훨씬 높기 때문에 이런 기준으로 보면 국가자본주의는 아시아적 현상이 아니라 서유럽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중국은 13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미국과 독일은 각각 17퍼센트, 18퍼센트고 덴마크는 27퍼센트에 이른다. 중국이 서방에 비해 앞선 영역은 투자(총고정자본형성이라는 항목)였다.
이언 브레머는 국가자본주의 논의를 활성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독재정부들은 계획경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진정한 자유시장을 허용할 경우 자신들이 통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자본주의이다. 국가자본주의에서 정부는 다양한 형태의 국영기업을 통해 국가의 핵심자원을 통제하며 고용을 창출하고 유지한다. 선별한 민영기업들을 통해 특정 산업분야를 지배하며, 소위 국부펀드를 통해 여유자금을 투자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세 가지 경우 모두 최종 목표는 경제적(경제 성장 극대화)이라기보다는 정치적(국가의 권력 증대 및 정부 지도자의 생존)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지만, 정부가 경제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장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다.
이언 브레머가 말한 국가자본주의의 핵심은 세 가지인데, 국유기업과 민간 대표기업 그리고 국부펀드다. 브레머는 정부가 직접 시장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경제를 운영했던 체제는 1990년 무렵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면서 종지부를 찍었고, 중국이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룬 것도 1970년대 후반, 즉 중국 지도자들이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실험적으로 도입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
5 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옛 동구권 사회를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언 브레머는 1990년대 초반에 몰락한 동유럽과 옛 소련, 시장을 도입하기 전인 1949~1978년의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로 지칭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자본주의 용어가 “공산주의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것도 아니며, 중앙계획경제가 시대에 맞춰 변모한 것도 아니”6 니얼 퍼거슨도 전쟁과 같은 특정 시기에는 국가가 경제에 개입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등장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시기에 국가가 크든 작든 경제에 개입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모두 국가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국유기업이 정부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 극적인 부흥을 겪으면서 국민국가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가자본주의는 국유기업이 핵심을 이루는 국민경제가 자유시장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중간 기착지가 아니라 하나의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됐을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럼에도 ‘국가자본주의’를 이렇게 규정하면, 무엇을 국가 개입이라고 판단하고 또 어느 선까지를 국가자본주의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모호함이 남는다.
다른 한편 《이코노미스트》는 동인도회사가 등장했던 17세기부터 국가가 경제에 개입했다고 지적했다.7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 변화를 고려할 때 과도한 일반화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가 대 시장의 대립으로만 상황을 바라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의 근시안적 견해에는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를 부를 규제하고 분배하는 정치 제도의 일부(상부구조)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토니 클리프 등을 포함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자본주의론과는 다르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니얼 퍼거슨은 “아돌프 바그너가 국가지출 증대의 법칙을 처음으로 정식화했던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 국가가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한 세기 이상 국가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계몽적인 군주의 싱가포르에서부터 고장 난 전제정의 짐바브웨, 평등주의적 복지국가 덴마크에서 개인주의의 천국인 론 폴의 텍사스 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국가자본주의의 확립
8 그러나 처음에는 ‘국가는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혼란에 대비한 조직’이라는 환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절대왕정 시절에 국가가 국부를 증대하려고 직접 공장을 운영하는 등 개입을 했지만 말이다. 이런 환상은 ‘야경국가’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고, 고전파를 포함한 주류 경제학설은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을 철석같이 믿으면서 이런 환상을 조장했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주기적 경제 위기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국가가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위기의 소방수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은 이런 경제 위기가 저절로 해소되기를 기대했다.
상부구조로서의 자본주의 국가는 그 등장부터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밀접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형성했다.세계 지배자들은 제1차세계대전을 하나의 예외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초반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상대적 안정기를 맞이하자 그들은 전쟁 전의 경제 질서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국가는 경제 개입을 줄이고 균형예산을 추구했으며, 금본위제로 복귀하고자 했다. 1929년 대공황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경제 신조(국가의 경제 개입 금지와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위기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다.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노동력 재생산(교육, 보건, 고용보험 등), 사회적 규율(법과 질서), 제국주의적 야망의 충족(국방)을 보장해 주는 제한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대기업의 필요에 부응하는 독점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의식적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하고 잉여가치를 경제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이전하며 주기적인 경기 변동을 억제해 국민 자본주의의 상이한 구성요소의 국제 경쟁력을 보장하도록 개입하는 것으로 점차 바뀌었다.
이런 조짐들은 1930년대 이전에도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주요 참전국들은 군사적 승리를 위해 개별 자본의 생산 시설들을 통제해 어떤 재화를 생산할지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을 통제하고 원료와 식료품을 배급하는 정책도 펼쳤다. 레닌과 부하린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이런 변화를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또는 단순히 “국가자본주의”라고 설명했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경제가 물러나고 독점 자본과 금융과두제가 산업계를 다시 지배했다. 하지만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경제 위기가 도래하자 어쩔 수 없이 국가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1933년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1928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계획과 강제 집산화, 1933년 히틀러의 집권, 1931년 만주사변에서 드러난 일본의 군국주의화 등이 이런 추세를 잘 나타냈다. 일본과 독일 그리고 소련의 군사적 국가자본주의가 경제 불황에서 탈출하는 데 효과를 내자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기 시작했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맥도널드의 영국 등이 국가의 경제 개입을 강화해 철강·석탄 같은 주요 부문에서 국가독점체를 형성하고 무역을 통제하며 국가 지원을 통해 국가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세계 자본주의 추세를 설명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등장했다.
1930년대 전의 국가자본주의론 처음에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890년대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 볼마르의 개혁주의 입장에 반대해 당내 혁명가들이 처음 사용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가 국가사회주의를 준비하게 될 정책(국유화 등)을 채택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은 이런 주장에 반대하며 국가의 확장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불리한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의회 활용과 관련한 개혁주의자들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만큼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고, 국가사회주의가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을 나보다 더 확실하게 증명한 사람도 없다!” 하고 주장했다.
11 “현대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로, 자본가들의 국가이고 일국 총자본의 관념적 인격화” 12 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둘 모두에게 국가자본주의는 옛 소련이나 동유럽 또는 중국 같은 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을 뜻하지 않았다.
리프크네히트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썼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의 구실이 증대되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변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진화하면서 국가의 구실이 이전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엥겔스도 《반듀링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적 대표기구인 국가가 생산에 대한 지도를 떠맡아야만” 하는 상황을 말하거나” 그 뒤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와 제국주의를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레닌의 《제국주의론》, 부하린의 《세계경제와 제국주의》가 이런 연구의 산물들이었다. 특히 부하린은 국가가 국민경제의 모든 생산과 사회의 주요 기구들을 관리하고 국가 개입으로 국내 경쟁은 조절되며 자본들 간 경쟁은 세계시장으로 그 영역이 전환된다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이런 현상을 자본주의 발전의 더 높은 새로운 단계라고 보고,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불렀다.사회민주주의자인 루돌프 힐퍼딩과 카를 레너, 평의회공산주의자인 오토 륄레 등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14 하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자본주의가 한동안 공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15 레닌, 부하린, 오신스키 등 볼셰비키들은 국가자본주의를 국가 간섭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노동자 국가 하에서의 시장 경제로 폭넓게 해석했다.
다른 한편, 1917년 혁명 직후 러시아 볼셰비키 내에서 국가자본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오신스키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조직화는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전혀 준비되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 즉 국가자본주의가 준비될 것이다”그런데 1930년대를 거치면서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 구실을 하는 경제라는 의미가 됐다. 레닌 등 볼셰비키가 사용한 용어와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스탈린이 권좌에 오르면서 소련 사회를 설명하는 다양한 국가자본주의 이론들이 나타났다.
국가자본주의론들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국가자본주의론과 다른 (1) 평의회 공산주의의 이론들
16 1920년대에 이들 중 다수는 러시아에서의 시장 경쟁과 자본주의적 농민의 구실을 주목했지만 소수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다 1930년대에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이 경향의 주류가 됐다.
안톤 판네쿡, 헤르만 고터, 폴 매틱, 오토 륄레 등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일찍이 1920년대 초부터 소련을 자본주의라고 봤다.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노동자 평의회의 지배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로 불렸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지만 신경제정책NEP이 실시될 즈음에는 볼셰비키가 자본주의를 방어하고 전체주의를 펼친다고 공격했다. 레닌은 《좌익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이들의 초좌파적인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17 그 결과 국가의 개입이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설령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주로 오토 륄레에 의존했다. 륄레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장이 핵심이라고 보면서도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국가의 경제적 구실에 주목했다. 1931년에 쓴 ‘세계 위기인가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는가’The World Crisis, or Towards State Capitalism에서 륄레는 자본주의가 대규모 카르텔화와 독점화 과정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위기에 직면해 각국 정부의 지원이 중요해졌고, 그 결과 국가의 개입과 계획이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지배하게 됐다고 주장했다.륄레는 이런 관점을 소련에도 적용했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자유 자본주의 경제’가 충분히 발전하기도 전에 ‘계획 경제’가 도입됐다고 봤다. 즉, 세계 전쟁은 러시아의 봉건제를 파괴했고, 그다음에는 평화를 정착시킬 수 없었던 부르주아지를 집어삼켰다. 전쟁 노력이 끝난 뒤에 자본주의 기업들이 혼란에 빠졌고, 결국 국유화됐다. 은행, 상선, 대외무역 등이 국가 통제 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륄레는 이미 신경제정책 시기에 국가가 산업의 감제고지를 장악하면서 조직된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됐다고 주장했다.
국유화를 통해서 중앙 정부가 확고하게 주도하는 대규모 국가자본주의에 이를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사적 자본주의에 비해 여러 이점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몸부림을 쳐도 부르주아 정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도 볼셰비키가 해외 자본가들한테 엄청난 양보를 해, 광물 자원과 노동력이 해외 자본가들의 착취를 위해 넘어갔다. 이들은 국가와 이윤을 배분했다. 주식시장이 다시 개장됐다. 딜러들, 기업인들, 중개인들, 은행가들, 폭리 업자들, 투기꾼들, 증권 중개인들이 다시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1921년 5월 27일 포고령을 통해 다음 같은 점들이 인정됐다. 공장·작업장, 산업·교역 시설들, 생산 수단과 도구들, 농업·공업 생산물, 주식 등에 대한 소유권; 발명권·특허권·상표권; 저당을 잡거나 대부할 권리, 유증이나 상속권. 이와 함께 부르주아 질서가 완전히 확립돼 완전히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됐다.륄레를 비롯해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스탈린이 공업화와 강제집산화를 실시한) 1928년이 아니라 신경제정책이 실시된 1921년부터 자본주의로 변모했고, 1929년 경제 위기를 맞이해 다른 자본주의들이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할 때 러시아도 그 대열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스탈린의 소련 사회가 보여 준 높은 수준의 계획과 협동으로 향하는 경향은 미래 사회주의에 유익한 것이라고 주장해, 사상적 뒤죽박죽과 혼란을 드러냈다. 1960년대에 독일 출신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폴 매틱이 륄레와 비슷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도 소련 사회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외형적 차이가 있지만, 동방(국가자본주의)과 서방(혼합 자본주의)은 자본주의라는 본질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했다. 즉, 자본-노동 관계의 유지, (자본가 또는 국가의) 생산수단 통제, (자본가 또는 국가에 의한) 잉여가치의 전유와 배분 등에서 서방과 동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적 기업과 국가 통제 경제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볼 때 후자가 잉여생산물에 대한 집중적인 통제권을 가진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큰 차이가 없다.”
21 심지어 그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자본주의적 형식이라고 궤변을 늘어놨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모순되게, 매틱은 혼합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사이의 깊은 분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 생산의 의식적 조직화가 사적 자본의 전유를 전제하기에, 혼합 경제에서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라 혁명적 과정일 수 있[다.]”궤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매틱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혁명이 하나의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할 때 필요하지만 하나의 생산양식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이 빈약한 사회에서 국가가 생산과 분배의 사회화를 통해 자본 형성을 촉진할 수 있는데, 이런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매틱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서방 혼합 자본주의는 결코 국가자본주의가 될 수 없다.
22 이런 점에서 매틱의 국가자본주의는 소련을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법칙에서 벗어난 사회라고 보는 관료 집산주의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매틱은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지만, 그가 정의한 국가’자본주의’는 아주 제한적인 정의, 즉 임노동과 노동자 통제의 부재에 근거했다. 그래서 매틱은 국가자본주의와 혼합 자본주의 체제 간 경쟁(특히 군사적 경쟁), 소련 내에서 국영 기업들 간 경쟁, 가치법칙의 적용, 소련 사회에서 잉여생산물이 아닌 이윤의 존재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이 매틱은 국가자본주의 사회가 케인스주의적 조치를 통해 (자본 축적의 모순적 과정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할지라도) 노동과 유휴 자본을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는 재화’ 생산에 투입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고 봤다.(2)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국가자본주의
C. L. R. 제임스와 라야 두나예프스카야는 각각 J. R. 존슨과 F. 포레스트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존슨-포레스트 경향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1940년 제임스 캐넌이 이끌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소련과 스탈린 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맥스 샤트먼은 SWP(미국)에서 탈퇴해 노동자당WP을 만들었다. 존슨-포레스트 경향은 노동자당의 우경화에 반대해 분리해 나온 그룹이었다. 근거지는 미국 디트로이트였고, 소수의 노동자와 학생들로 이뤄진 그룹이었다. 1955년 라야 두나예프스카야가 그룹을 떠나 《소식과 편지》를 발행하는 분열을 겪기도 했지만, 1960년대 중요한 운동 중의 하나였던 혁명적흑인노동자동맹League of Revolutionary Black Workers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3 을 출판해 유명해졌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의 위대한 흑인 민족해방운동 지도자 뚜쌍 루베르뛰르를 조명하고, 연속혁명론에 근거해 흑인 해방 전략을 제시했다. 24 제임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이 노동계급 자신의 과제라고 굳게 믿었으며, 흑인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흑인 해방은 오직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운동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라야 두나예프스카야는 트로츠키의 비서 출신이었다. C. L. R. 제임스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혁명가이자 제4인터내셔널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제임스는 1932년 영국에 왔고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마르크스주의그룹’에 가입했다. 1938년에 《블랙 자코뱅》존스-포레스트 경향은 트로츠키의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이 틀렸고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봤다. 두나예프스카야는 1941년부터 1947년 사이에 소련을 분석하는 글들을 썼다. 그녀는 두 가지 현상을 예의주시했다. 첫째는 제1부문(생산수단 생산 부문)이 제2부문(소비재 생산 부문)에 비해 크게 성장한 점이었다. 둘째는 1928년 제1차 5개년계획 이후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락한 점이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이를 근거로 소련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소련이 비자본주의 사회(예를 들어 맥스 샤트먼이나 브루노 리치(또는 브루노 알)의 관료 집산주의)라는 결론을 도출하지는 않았지만, 두나예프스카야에게는 소련에서 가치의 존재와 가치법칙의 작동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가치의 축적 메커니즘과 관련해, 두나예프스카야는 축적이 두 가지 동기, 즉 거래세와 공식적인 이윤에 따라 이뤄진다고 봤다. 소련의 공식 입장은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이윤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이윤율의 균등화 경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본은 이윤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지정한 곳으로 간다.”
두나예프스카야는 “경공업의 이윤이 높은 것은 그 부문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국가가 부과하는 (낮은) 거래세 덕분에 거짓 이윤이 제공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윤은 자본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개별 자본은 총자본에 압력을 가해 잉여가치 몫을 분배받는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자본들 간 경쟁은 시장에서 이윤을 통한 경쟁이 아니라 국가 계획을 통한 경쟁으로 나타난다.
두나예프스카야는 (이윤을 뭐라 부르든 간에) 잉여가치가 분배되고 축적되는 메커니즘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소련에서 작동되는 메커니즘이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다르다고 봤지만, 개별 자본들이 총자본에 어떤 식으로 압력을 넣는지는 모호했다. 이런 압력이 국가 계획으로 나타난다면 결국 소련 당국의 공식 입장대로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두나예프스카야는 사적 자본이 존재하지 않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인 근거를 《자본》에서 찾으려 했다. “어떤 일정한 산업부문에서,거기에 투하된 모든 개별자본이 단 하나의 자본으로 합병한다면 집중은 극한에 도달할 것이다. 일정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자본 전체가 한 사람의 자본가 또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기업의 수중으로 통합될 때에만 이런 극한에 도달할 것이다.”
소련에서 단 하나의 자본만 있다면 과연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제임스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세계시장에서 구했다. 소련이 세계시장에서 다른 국가자본과 경쟁함으로써 소련 내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는 세계시장에서 자본들 간 경쟁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소련 내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배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존슨-포레스트 경향은 소련이 서방과 마찬가지로 국가자본주의 체제고, 그 내부에서 국가자본이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한다고 봤다. 토니 클리프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던 무렵에 존슨-포레스트 경향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그룹의 정치는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경향과 달랐다.
제임스는 국가자본주의 시대에 혁명적 정당과 노동계급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당시 600만~700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공산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제임스는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당이 대중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과 계급 사이의] 모순은 사라지고 있다”며, 혁명가들은 볼셰비키를 모델로 하는 혁명적 정당을 건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임무는 조직을 폐지하는 것이다. 현 시기 임무는 자발성 — 프롤레타리아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활동 — 을 요구하고 가르치고 입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해서도 “가장 위대한 성과는 … 정당의 지도 없이는 노동계급이 성공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전설을 영원히 박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임스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과 혁명적 정당을 대립시켜 전자를 칭송하고 후자의 중요성을 부정했다. 그 결과 신디칼리즘에 뒷문을 열어 줬다.
(3) 샤를 베틀렝의 국가(독점)자본주의
1961년부터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커졌다.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했고,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공격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련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먼슬리 리뷰》의 편집자들(리오 휴버먼과 폴 스위지)이 대표적이었다. 1961년 12월호 편집자 글은 소련과 중국 모두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근거해 있지만 소련의 입장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했다. 1년 반 뒤에 휴버먼과 스위지는 중국이 대체로 올바르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런데 이때는 중국이 소련에 착취와 억압이 존재한다는 비난을 철회한 뒤였다. 이처럼 중·소 분쟁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는데, 샤를 베틀렝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틀렝은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됐다고 보고, 그 사회에서 부르주아 권력이 복원된 이유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의 전제 조건을 노동계급의 생산수단 통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전위 조직이 지도하는 계급투쟁으로 봤다. 베틀렝의 사회주의 개념은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아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계급의 통제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행사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베틀렝은 소련에서 기업이 자율성을 획득해 계획이 아니라 시장 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 1965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총리 코시긴은 공장 관리자들의 성공 여부를 생산량으로만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의 견지에서 측정하는 새로운 평가 제도를 도입하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려 했다.(그러나 새로운 개혁 조처들은 곧 흐지부지됐다.) 베틀렝은 ‘코시긴 개혁’ 이후로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투쟁에서 자본주의가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계획이 아니라 시장이 지배하면서 가치법칙도 복원됐다. 베틀렝은 국가 소유가 노동 대중의 통제와 지도력에서 벗어나 관리와 행정가들의 조직에 의해 지배당한다면 그 사회는 더는 사회주의가 아니고, 관리와 행정가는 국가부르주아지가 된다고 말했다. 베틀렝은 1965년의 경제 개혁을 통해 이윤이 산업에서 객관적 범주로 자리잡고, 경제 활동이 국가의 수중에 집중됐지만 그 국가와 잉여가치는 국가부르주아지인 국가 관료들이 통제했으며, 경제 발전은 경기순환적 특징과 축적의 위기를 보여 줬으며, 노동계급은 완전 고용 상태지만 서구 자본주의에서처럼 권리를 모두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베틀렝은 ‘사회적 관계’ 개념을 상부구조, 특히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매우 협소할 뿐 아니라 생산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핵심을 놓쳤다. 그래서 그는 정부와 당이 마르크스주의적 정책을 견지했는지 여부로 사회주의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했다.
베틀렝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핵심은 기업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때 기업은 이중의 분리(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분리와 기업들 간 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소련에서도 기업은 이중의 분리를 나타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산, 가격, 임금 등에서 독립적이었다. 이것은 소련의 현실과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또한, 베틀렝은 임금이 존재하는데도 노동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임금이 성과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금노동이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오류와 혼란은 (가치법칙을 언급하면서도) 가치법칙의 의미와 그 법칙이 소련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베틀렝은 《소련의 계급투쟁》 제3권에서 1917년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가 소련에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 대해서도,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몰락한 뒤 화궈펑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확립됐다며 중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베틀렝의 이런 태도 변화는 마치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직전에 중국 사회의 토대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자본주의적 요소(즉, 주자파)가 등장해 사회를 바꾸려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로 중국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사회주의라고 보는 좌파들에게서도 베틀렝의 방법적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4) 월터 다움의 ‘국가화된 자본주의’
월터 다움은 수학자이자 미국 뉴욕에 근거지를 둔 소규모 단체인 ‘혁명당동맹’League of Revolutionary Party의 지도적 인물이다. 그는 트로츠키와 제임스-두나예프스카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1936년부터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댔다. 하나는 소련에서 추진됐던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이 대혼란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제1차 5개년계획의 결과로 공장에는 원료와 노동자가 부족했으며, 물가가 치솟고 투자 감소가 이어졌다. 다른 하나는 독일 노동자 운동의 패배와 나치의 집권이었다. 1934~1935년에 스탈린과 소련 관료들은 이런 두 가지 국내외 요인에 대응해 인민전선, 반대파 대숙청, 러시아 민족주의 조장, 노동자에 대한 통제 강화와 경쟁 장려, 성과급 도입 등 정치적으로 우경화했다. 다움은 1935년 즈음에 바뀐 소련 사회를 ‘사이비 사회주의적 자본주의’pseudo-socialist capitalism 또는 ‘국가화된 자본주의’statified capitalism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움은 소련의 국가화된 자본주의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서구 자본주의와 경쟁한다고 보지 않았다. 다움은 (국제적 규모에서) 다수 자본들 사이의 경쟁을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소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추진력을 축적 드라이브,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 임금 체제를 통한 프롤레타리아 착취로 봤다. 베틀렝과 마찬가지로 다움은 국내 경제 안에서는 경쟁이 존재한다고 봤지만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화한 자본주의 체제가 국내의 생산을 조직하는 목적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다움은 국가가 소유한 자본의 가치를 보존하고 극대화하는 것이 국가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소련 사회에서 혁명의 성과물들이 무너지고 그 과정에서 스탈린이 등장했을 때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사상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소련 사회를 ‘변질된 노동자 국가’로 잘못 이해해 사회혁명이 아니라 (처음에는 개혁이,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부터는) 정치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혁명이 무르익는 객관적 조건에 걸맞지 않은 주관적 조건 때문에 서둘러 제4인터내셔널 창립을 선언하는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사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지킨 것이 트로츠키의 주요 공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트로츠키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던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정작 트로츠키 본인과는 달리, 노동계급이 아닌 세력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봤다.(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포가 지나친 나머지 우경화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를 추종했던 많은 사람들이 소련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가 아닌 것으로 보긴 했지만, 제임스/두나예프스카야처럼 정교하지 않은 국가자본주의론을 제기하거나 버넘이나 샤트먼처럼 자본주의 운동 법칙이 관철되지 않는 관료 집산주의론을 주장했다.
27 그 후 클리프와 지지자들이 제4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된 뒤에 ‘사회주의 평론’ 그룹을 결성했는데,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이 단체의 정치적 기초를 제공했다.
마르크스가 《자본》과 다른 저작들에서 밝힌 자본주의의 핵심을 견지하면서 소련 사회를 분석해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교화시킨 사람은 토니 클리프였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1946년에 팔레스타인을 떠나 영국에 와서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인 혁명적공산당RCP에 가입했다. 클리프는 애초 소련과 동유럽이 변질된 노동자 국가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책을 준비했다. 그런데 6개월간의 작업 끝에 그는 트로츠키가 틀렸고, 소련과 동유럽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1948년에 혁명적공산당 내부 문서에 이런 입장을 발표했으며, 1955년에 《스탈린주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라는 책으로 발간했다.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이 계급 사회고 소수의 착취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배제된 직접 생산자들을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사회라는 점을 보여 줬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제임스/두나예프스카야의 국가자본주의론보다 더 포괄적이었다. 왜냐하면 제임스/두나예프스카야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생산과정의 위계적 질서를 근거로 국가자본주의를 규정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매우 협소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클리프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이 때문에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며, 이런 강제에 기초해 지배계급이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한다고 지적했다. 또, 클리프는 잉여가치의 추출과 더불어 다수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자본들 간 경쟁은 개별 자본으로 하여금 축적을 위한 잉여가치의 재투자와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게 만들며, 이런 추동력이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가속화시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촉진한다고 봤다.
클리프는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착취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켜 소련 사회에 적용했다. 소련 사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이론들(국제사회주의경향이 아닌 다른 경향의 국가자본주의론들이나 관료 집산주의 이론 등)은 소련 사회의 착취 관계에만 주목할 뿐 (세계적 규모에서 이뤄지는) 착취자들 사이의 경쟁 관계는 고려하지 않았다.
28 클리프는 소련의 관료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군사적 경쟁의 압력 때문에 중공업과 군수부문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켰고, 이런 동학이 제1차 5개년계획을 계기로 소련을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변형시켰다고 주장했다.
클리프는 (소련을 세계 자본주의와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지만) 소련은 세계적 국가 체계의 일부고, 그 체계에서 발생하는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으며, 소련과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무엇보다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에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클리프도 이를 따라 전 세계적 경쟁을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전제 조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클리프는 스탈린주의 체제를 군사적 경쟁이 지배하는 세계적 국가 체제 내에 배치함으로써 소련의 노동계급이 자본 축적의 동학에 종속돼 있음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은 국가자본주의를 직접적인 생산과정 내부의 계급 갈등으로만 이해하는 여타의 국가자본주의론과 그 변종들(제임스/두나예프스카야, 카스토리아디스, 샤트먼, 다움 등)의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었다. 클리프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세계경제의 회복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에르네스트 만델 같은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판했다. 클리프는 동방과 서방 세계의 군사적 경쟁이 소련으로 하여금 자본 축적을 강제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는데, 전쟁 이후에도 높은 수준의 군사적 경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군비 지출에 투입되는 자본은 평균이윤율 형성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 서방 자본주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대와 이윤율의 하락을 일시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또 군비 경쟁은 왜 소련 국가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지 않고 한동안 안정적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줬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지닌 확장성의 둘째 사례는 제3세계 혁명들을 분석할 때였다.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3세계(특히, 중국, 베트남, 쿠바) 혁명이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입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국가들에서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가 수립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클리프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과정이 없는 제3세계 혁명이, 반제국주의적 과제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일지라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귀결됐다는 점에서는 ‘빗나간 연속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7년에 클리프는 중국을 러시아와 비슷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이 사회를 고대의 동양 사회와 비교했다.
[이 둘 사이에는 – 인용자] 커다란 차이가 있다. 고대의 전제국가는 당시 경제 생활에서 핵심 영역이었던 관개 체계를 관리했지만 생산의 많은 부분은 개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마오주의 국가는 산업, 은행 그리고 유통이라는 핵심 영역을 관리했고, 산업·농업의 모든 생산·분배에 대한 통제를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 경제 전반에 대한 마오쩌둥의 관료적 관리와 함께 중국공산당과 국가 관료는 … 삶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확립하고자 할 것이다.
마오쩌둥은 비록 실패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통해 대중의 모든 삶을 통제하려고 했다. 서방의 많은 좌파들이 중국의 1949년 혁명과 마오쩌둥 그리고 문화혁명에 찬사를 보냈지만 신중국 등장 이후 중국 사회는 클리프가 말한 바처럼 소련과 비슷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신중국 등장 초기에 그 국가의 미래와 마오쩌둥의 노선을 정확히 예측한 클리프의 놀라운 통찰은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지닌 현실 설명력 덕분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된 소련과 동유럽의 격변이 1991년 소련의 몰락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사회들을 사회주의라 믿었던 많은 좌파들이 동유럽과 소련 몰락으로 사기 저하와 방향 감각 상실로 고통을 겪었고 우파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클리프를 비롯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국가자본주의 이론 덕분에 사기 저하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겪게 될 갈등과 모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론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혁명가들이 직면한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고 이에 기초해 새로운 전략·전술을 수립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20세기 이래로 혁명가들이 직면한 최대의 난제는 스탈린주의 러시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소련과 같은 사회구조는 동유럽 국가들과 나중에 제3세계의 일부 국가들에서도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혁명가들에게 국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많은 좌파들은 자본주의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갖고 있고, 사적 소유가 없는 국가는 모종의 사회주의 또는 적어도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따르면, 생산수단의 법률적 형태(사적 소유냐 국가 소유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을 둘러싼 집단들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에서 특정 집단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데, 국가자본주의에서 국가 관료는 집합적 자본가 구실을 한다. 더 나아가 서방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국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 집합적 자본가 노릇을 하기 때문에 소련이나 동유럽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소련과 동유럽 같은 국가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서도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된다.
주
- The Economist, Jan 21st 2012. ↩
- Ferguson 2012. ↩
- 레이모 2015. ↩
- 브레머 2011, p13. ↩
- 브레머 2011, p82. ↩
- The Economist 2012. ↩
- Ferguson 2012. ↩
- 자본과 국가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하먼(2015)과 캘리니코스(2011a)의 제2장을 참고하라. ↩
- Harman 1987, p63. ↩
- Liebknecht 1896. ↩
- 엥겔스 1988, p298. ↩
- 엥겔스 1988, p299. ↩
- 국가자본주의의 등장에 대한 평이한 설명은 추나라(2010, 80~184쪽)를 보라. 국가자본주의의 의미뿐 아니라 옛 소련 블록과 북한 등을 국가자본주의로 설명한 글을 모은 책으로는 국제주의 전통 자료집 제4권 《국가자본주의》(책갈피, 2018)가 매우 유용하다. ↩
- 린던 마르셀 판 데르 2012, 72쪽에서 재인용. 이 책의 한글 번역은 너무 형편없어서 가능하다면 영어본을 추천한다. Linden, Marcel Van der 2007, pp49~50. ↩
-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1920년대 초반에 레닌이 러시아를 국가자본주의라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192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레닌이 말한 국가자본주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
-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초좌파 정치 경향으로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있다. 하지만 보르디가는 자본주의 국가가 당의 독재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지 않고 보르디가주의로 불린다. 보르디가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반봉건적 부르주아 혁명으로 봤고, 따라서 1917년을 전후로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으로 생각했다. 보르디가는 자본주의를 착취와 착취 계급의 존재보다는 상품 생산으로만 매우 협소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 계급은 존재하지 않고 국가가 이를 대체했다고 생각했다. ↩
- Fernandez 1997, pp46~47. ↩
- Rühle 1924. ↩
- 한국에도 평의회 공산주의 입장을 따르는 조직이 있긴 하지만, 정치적 존재감은 없다. ↩
- Mattick 1969, p289. ↩
- Mattick 1969, p284. ↩
- Harman 1987, p127. ↩
- 2007년에 필맥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했다. ↩
- 캘리니코스 1994, pp94~97. ↩
- 마르크스 2015, 855쪽. ↩
- 린던, 마르셀 판 데르 2012, 233-242쪽. Linden, Marcel Van der 2007, pp183~192. ↩
- 한국어 번역본은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책갈피, 2011)다. ↩
- 알렉스 캘리니코스(2011b)와 데렉 하울(2011)은 소련에 노동력 시장이 존재하고 가치법칙이 작동했음을 보여 줬다. ↩
- 마이클 키드론과 크리스 하먼이 클리프의 주장을 정교화해 상시군비경제 이론을 발전시켰다. ↩
- Gluckstein 1957, p315. ↩
- 소련과 동유럽 몰락의 의미와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이해하는 데서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와 전망》에 실린 크리스 하먼의 논문들(‘국가와 오늘의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1부 및 2부’)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역사의 복수》가 매우 유용하다. ↩
참고 문헌
레이모, 조슈아 쿠퍼 2015, 《베이징 컨센서스》, 소명출판.
린던, 마르셀 판 데르 2012, 《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 서해문집.
마르크스, 카를 2015, 《자본론》 1권, 비봉출판사.
브레머, 이언 2011,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산북스.
엥겔스, 프리드리히 1988, 《반듀링론》, 새길.
추나라, 조셉 2010,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1a,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1b,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토니 클리프, 책갈피.
캘리니코스, 앨릭스 1993, 《역사의 복수》, 백의.
캘리니코스, 앨릭스 1994,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백의신서.
캘리니코스, 알렉스·하먼, 크리스 등 2018, 《국제주의 전통 자료집 4권 국가자본주의》, 이정구 엮음.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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