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인터뷰
소련 붕괴와 좌파
한국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과 형성
Q. 최일붕 운영위원이 트로츠키주의, 그중에서도 국제사회주의경향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1970년대 중반에 대학에 다녔던 사람들은 1980년대 대학생들처럼 스탈린주의로 몰려가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PD 조직들인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이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리더들도 대개 75·76·77학번이었는데, 그들도 강경하고 교조적인 스탈린주의 버전으로 가진 않았죠. 신新삼민동맹이라고 줄여 부른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은 아예 스탈린주의를 거부한다고 선언했었죠.
정치적 세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광주항쟁을 경험하고 급진화해서 혁명을 생각했었지만, 소련이나 북한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스탈린주의에 휩싸이지는 않았어요.
제가 미국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어떤 책 하나를 주문했는데 알튀세르가 쓴 책이었어요. 당시 우체국에서 일하던 사람이 대학원생이었는데, 버소Verso출판사 마크가 찍힌 우편물이어서 자기가 호기심에 무언가 하고 살짝 봤다고 고백하면서 제게 얘기를 한번 나눠 보자고 했어요. 그가 바로 트로츠키주의자였죠. 그와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됐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귀국한 뒤에 많은 옛 1970년대 사람들과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1989년에 톈안먼 항쟁이 일어났죠. 그때 저는 중국을 모종의 사회주의라고 보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마르크스나 트로츠키에게 사회주의는 계급이 없는 사회이고 따라서 국가도 없는 사회로 공산주의와 거의 동의어였거든요. 트로츠키도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규정한 적이 없고, 레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모두 소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했어요. 그러나 다만 관료적으로 변질됐다고 본 것이었죠. 레닌은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 국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그런 규정에 따라서 중국을 사회주의는 아니라고 봤는데, 그럼에도 의문은 있었어요. ‘중국 혁명은 농민 혁명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노동자 국가인 거지?’ 하는 것이었죠. 그러던 차에 톈안먼 항쟁이 일어났고 이를 유심히 지켜봤어요. 6월 초에 중국 정부가 100만 명도 넘는 톈안먼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서 발포하는 것을 봤죠. 그리고 중국이 노동자 국가일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집회 참가자들이 모두 학생과 노동자 등 평범한 사람들인데, 저들을 향해서 발포하는 건 도저히 사회주의이거나 노동자 국가일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1 이라는 제목으로 냈는데, 그 책에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진영을 국가자본주의적 진영으로 규정하는 대목이 있어요. 당시 저는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관료 국가 진영’, ‘관료 국가군’이라고 부정직하게 번역했어요. 그 뒤부터는 그런 짓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럴 정도로 제가 국가자본주의는 뭔가 잘못된 표현이고, 소련이나 중국은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면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 바로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이론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제가 1989년 1월에 크리스 하먼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를 《노동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그러나 텐안먼 항쟁에서 중국 정부의 발포를 보면서 ‘이거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 아니야?’ 하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문제에서는 혼란스러운 생각들, 특히 신디컬리즘 사상을 강하게 가진 채 한동안 지내긴 했습니다.
Q. 당시 한국의 좌파들은 톈안먼 항쟁을 어떻게 봤나요?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는데요. 주대환 씨와 황광우 씨 등이 이끈 ‘인민노련’이라는 조직이 있었어요. 특히 황광우 씨가 가장 분명한 어조로 글을 많이 쓰는 분이었죠. 잘 썼다고 할 수 있죠. 그들이 냈던 저널이 《노동자의 길》이었는데, 앞서 얘기한 신삼민동맹의 저널인 《노동자의 깃발》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옹호하는 글을 냈습니다. ‘그 따위 깃발은 찢어 버려라’ 하고 매우 선정적으로 말했죠.
그리고 당시 또 하나의 PD 조직이 있었는데 그 리더가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 만한데, ‘노동계급’이라는 조직이었어요. 이진경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분이 이끌던 조직이었는데, 그는 우리보다 한 세대 밑인 1980년대 초반 학번이었죠. 어쨌든 그쪽에서도 중국 텐안먼 항쟁을 비판하는 글을 냈었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라는 조직은 초超스탈린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제가 생각하기에 약간 실수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말투로 톈안먼 항쟁을 비난하고 중국 공산당을 옹호했어요. 나머지도 이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대체로 톈안먼 항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었습니다.
Q. 올해는 소련 체제가 붕괴한 지 30년이 됩니다. 소련과 동유럽은 어떤 체제였습니까?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 착각하기 쉬웠던 이유는 그 사회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연속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저도 중국 톈안먼 항쟁을 계기로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라고 생각하게 됐을 때조차도 소련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고 어설프게 절충주의적으로 생각한 적도 잠시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러시아에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동유럽 나라나 북한은 소련 탱크가 가서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고, 중국은 지식인 게릴라들이 이끄는 농민 혁명이었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소련은 다르지 않느냐는 생각을 잠시 했던 거죠.
그 생각을 깨는 데서 두 가지가 중요했어요. 하나는 역사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였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과연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쳐서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연속적으로 이어 온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어떤 단절이 있었던 것인지가 핵심적인 질문이었죠. 그전까지는 1917년 혁명 이전의 역사에만 몰두하면서 어떻게 혁명을 성공시켰을까만 생각하고 그 뒤 역사에 대해서는 잘 공부하지 않았어요. 이제 1920년대 소련의 역사를 꼼꼼하게 공부해 봤죠. 그러니까 1920년대에 소련 안팎의 여러 어려움들 때문에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노동자 국가가 관료적으로 변질됐고, 계속되는 어려움 때문에 변질이 심화됐으며, 1920년대 말에는 그런 변질을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변질된 상황을 내재적·논리적으로 치고 나간 세력이 존재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당의 관료 세력이었죠. 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 소련이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사이에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하나는 소련을 세계 자본주의와 떼어놓고 보면 사유재산이 없어서 마치 사회주의 사회처럼 보이기 쉽다는 점이었는데요. 그 부분에 대한 열쇠는 국가를 누가 소유하고 있냐는 거였어요. 노동계급이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국가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졌을 때 그것은 이미 1920년대 후반에 끝났습니다. 노동계급의 전위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과 분리된 관료 집단이 이 국가를 소유·통제·지배하게 된 것이죠.
또 하나 굉장히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국가자본주의론을 알수록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출발점이 되는 것인데, 바로 소련을 세계 자본주의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세계 체제니까요. 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소련 국가와 경제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는 물음을 던졌고, 소련 국가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작용을 한다고 봤습니다.
이때 도움이 된 역사적 경험이 바로 미국 남부의 노예제 사례였어요. 미국 남부의 노예제는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마치 고대 사회의 노예제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기에 남부 노예제는 자본주의적 단위로 기능했어요. 저는 그런 유비에 따라서 소련도 그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볼 것이 아니라 세계 체제 내에서의 작용 양태와 방식을 봐야 한다고 봤고 그 점에서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Q. 소련과 동유럽 체제가 어떤 시기에는 성장을 했고 그러다가 후퇴와 정체를 겪었고 마침내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붕괴했는데요. 이 체제는 왜 붕괴했을까요?
우선 그 체제가 극도로 비효율적이었다는 주장들이 난무하는데요.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사실상 학계나 언론계 등을 지배한 견해죠. 국유화 체제는 비효율과 낭비가 심하다는 주장이죠. 그러니까 시장에 맡겨서 경쟁이라는 자극을 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죠. 이건 신자유주의의 가정이기도 해요.
이것은 완전히 틀린 주장인데요. 소련 경제는 20세기 중엽 동안 즉, 1930년대, 1940년대, 1950년대 그리고 1960년대까지도 급속히 성장했거든요. 특히 1930년대에는 연평균 성장률이 거의 40퍼센트에 도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죠.
그렇다면 국영 사회 체제가 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라는 얘기가 어떻게 성립하냐는 물음이 생깁니다. 어떻게 한때 높은 성장을 구가하다가 어떻게 그 뒤 수십 년 동안 지지부진한 상태를 이어 왔는가? 이것은 장기적인 리듬 속에서 봐야 합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봐도 사실 장기적인 리듬이 있어요.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제가 에르네스트 만델의 장기파동론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세계 자본주의는 대략 한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 단기적인 리듬도 있지만, 장기적인 리듬도 있어요. 만델처럼 50년이나 60년 주기로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것이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동유럽과 소련에 성장의 리듬이 있다는 것은 여기도 자본주의와 같은 내적 동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죠. 마침 1930년대나 1940년대, 1950년대에는 서방 세계도 국가자본주의 방식의 경제 성장이 효과를 내던 시기였거든요. 오히려 일본이 소련보다 더 나아갔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치 독일도 굉장한 성공을 했죠.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일종의 자본 축적의 리듬이 있었던 거고 소련은 그 리듬의 일부가 아니었겠느냐는 물음을 던질 수가 있죠. 즉, 소련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였던 것이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지만 서방 세계와는 형태가 다른 것이죠. 미국은 시장이 좀 더 주도적인 반면, 소련은 국영/국유 생산 방식이 좀 더 유력하다는 형태의 차이지, 본질은 세계 자본주의의 일부로서 같은 자본주의인 것이죠.
Q.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를 겪는 지금도 소련의 몰락이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봅니까?
그 당시에도 그런 주장을 믿진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이미 1970년대 초부터 위기를 겪기 시작해서 1990년대 초까지 20년 동안 결코 1970년대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어요. 당시 한국 좌파들은 일국적 관점의 ‘사회구성체론’으로 경제를 봤지만, 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300~400년에 걸친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과정을 봤습니다. 게다가 세계경제가 20년 동안 위기와 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승리는 턱없는 소리라고 봤습니다. 마침 소련이 무너졌을 때인 1991년과 그 이듬해인 1992년에 세계경제가 아주 심각한 불황이었어요.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어요. 전에는 서방 세계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다 결속해서 소련 진영에 맞서자고 할 수 있었는데, 1989년에 동유럽이 붕괴하고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하자 서방 국가들 내에서 갈등이 발전하게 되죠.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체제에서 불균등 발전이 있기 때문인데요. 당시 일본이 미국을 추격해서 미·일이 주된 경쟁을 할 거라는 관측들이 꽤 많았어요. 그래서 《제2의 태평양 전쟁》 같은 책이 영어로 나와서 많이 팔렸죠. 또, 통일된 독일도 만만찮은 경쟁자가 될 거라는 얘기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서방의 승리’라는 건 턱없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이런 견해를 당시에 글로 발표했습니다.
Q. 소련 몰락 전에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했는데, 무슨 정책이었고 소련 몰락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글라스노스트는 정치적 자유화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적 요소를 조금 도입하자는 것이었는데, 더 정확하게는 민주적 권리 일부를 허용하는 유화정책으로, 정치적으로 틈을 열어 주자는 정책이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시장 개방 정책이에요. 소련 경제를 해외 시장에 개방해서 다국적기업들이 소련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죠. 즉,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적인 측면이고, 글라스노스트는 정치적인 측면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1990년대 말에 김대중이 집권했을 때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썼는데 거의 맥락과 뜻이 같아요.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두 정책을 추진한 맥락은 너무 명백했어요. 소련 경제가 1980년대에 워낙 침체를 거듭하고 지지부진한 상태여서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 상태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던 것이죠. 고르바초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변에 있는 일종의 개혁파 관료들이 도표나 수치를 대며 소련 경제가 얼마나 침체를 거듭해 왔는지를 명백하게 보여 주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 서방을 향해서 개방해야 하고, 그러려면 소련의 독재적인 정치도 완화시켜야 한다’ 하고 생각해서 추진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인 경제를 민영화된 다국적 자본주의 쪽을 향해 열어서 소련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 목적이었죠.
이게 소련을 붕괴시켰나? 소련 붕괴가 지배자들이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지독하게 경험주의적인 현상론적 관측에 지나지 않아요. 지배자들이 스스로 개혁을 추진해야만 했던 상황 자체가 있잖습니까? 내재적인 압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이 개혁을 시도했던 겁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지금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지배자들도 그렇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 1950년대 영국에서 지배자들이나 노동당이 실행한 개혁이나 복지국가도 다 마찬가지인데요. 지배자들이 뭔가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괜히 선심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2 으로 전개됐던 거죠. 즉, 경제적·정치적 두 측면 모두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수준으로 전개됐던 것은 대중의 의식이 아직 그걸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소련에서도 관료들이 그 사회가 직면한 경제·정치 위기 상황을 경제적·정치적 개혁을 통해서 헤쳐나가 보려고 한 것이고, 그게 잘 안 풀리니까 관료들 내에서 분열과 쟁투가 벌어지고, 그 틈을 뚫고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분출하고 사회적 격변이 일어난 것이죠. 다만 대중 운동이 혁명적 지향성이나 노동자 국가와 같은 지향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혁을 지지하는 수준에 머물다 보니까, 소련이나 동유럽에서의 사회 변혁이 이른바 ‘벨벳 혁명’Q. 동유럽의 대격변에도 중국과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는데요. 이 국가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겁니까?
동유럽 스탈린주의 국가들도 1989년에 한꺼번에 무너진 게 아니에요. 불가리아처럼 이듬해에 무너진 곳도 있었고,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정권처럼 2000년이 돼서야 무너진 곳도 있었고요. 알바니아는 1992년에 무너졌죠. 다시 말해서 1989년에 시작된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 과정은 2000년까지 거의 10년 넘게 전개된 과정이었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변혁이든지 불균등하다는 거예요. 경제 위기도 한순간에 다 똑같지 않고 불균등하게 전개되고, 정치적 변혁은 훨씬 더 그렇죠.
중국과 북한은 지금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스탈린주의 체제인데요. 그러나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먼저 중국을 보죠. 이미 1980년경부터 40년간 시장 경제를 의욕적으로 받아들여서 국가자본주의적 경제가 크게 재편됐어요. 중국 지배자들은 이를 두고 ‘시장 사회주의’라고 부르는데요,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장 스탈린주의 체제’로 변했고, 그 변화가 마침 엄청난 경제 성장, 즉 자본 축적을 동반했기 때문에, 대중의 저항도 있었지만 동유럽보다는 처지가 유리했어요.
중국 경제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초까지도 계속 확장됐고 근본적이고 심대한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가난한 대중을 빨아들일 경제적 여지가 있었죠. 이를 통해 대중의 소득 수준도 높아지고 고용도 나아졌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중국과 동유럽 나라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뿐이죠.
또, 중국은 13억이다, 15억이다 할 정도로 엄청난 인구를 가진 만큼 풍부한 노동력이 있죠. 옛날에 리영희 선생이 번역한 글 중에 마오쩌둥도 중국 인구를 정확히 모른다는 내용이 있었죠. 세계경제가 위기일 때 중국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저임금에 기초해서 상당한 시장 점유율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은 붕괴를 모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까지고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다음은 북한인데요. 북한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중국에 사실상 붙어 있어요. 그래서 미국이 북한을 속죄양 삼아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과시하고 싶어도 중국을 의식해서 함부로 하기는 어려워요. 트럼프가 그런 시도를 해 볼까 하다가 금방 생각을 바꿨죠. 과거에 스탈린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세계적인 재편기를 틈타 1994년에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재확인하고자 북한을 한번 혼내려고 한 적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실행하지 못했고요.
다시 말해서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가 압박을 가하기는 해도 중국이라는 존재 때문에 막 두들기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북한의 핵발전소와 핵실험장들이 대개 북·중 국경 지역에 있지 않습니까? 북한 체제의 생존은 지정학적인 면에서 중국과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북한 내부적으로 보면, 매우 가난한데도 격변이 일어나지 않는데요. 가난하고 억압적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대중이 분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다 지적했던 바예요. 특히, 룩셈부르크는 대중의 고통이 오히려 대중을 더 사기 저하시킬 수 있다고도 지적했는데요. 바로 북한에 존재하는 문제인 거죠.
여기에 더해 조금 전에 말한 지정학적 측면, 즉 미국의 위협이 오히려 북한 주민과 지도부를 결속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겠죠.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요인은, 북한의 국가 형태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국가로 동유럽이나 소련과 같지만, 좀 더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가족 국가’라고도 하는 독재 국가인데, 국가 형태 중에서 하위 유형으로서 좀 더 결속력이 강하고, 통제도 더 쉽고 정보도 더 쉽사리 입수할 수 있어 내구력, 견디는 힘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요인들이 결합돼 북한 내부에서 저항과 반란, 격변이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이것도 가장 중요한 요인인 중국의 변화, 즉 중국의 격변이 상당히 성공적인 수준으로 나아간다면 북한에서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겠죠.
Q. 다음은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선,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본다는 거예요. 소련을 세계 자본주의에서 떼어놓고 보는 것은 추상이지, 절대로 현실이 아니에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소련 국가, 소련 경제가 자본주의적 단위처럼 기능했다는 것, 이 점이 결정적인 특징이에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그 맥락 속에서 본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자본들이 경쟁한다는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이란 건 하나의 추상인데, 실제 현실에서 자본은 자본들로 존재해요. 복수의 자본들이 서로 경쟁하죠. 소련 국가도 포드나 지엠처럼 경쟁하는 거예요. 다만 시장에서 자동차 가격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경우에는 압도적으로 서방 국가들과 경쟁했던 건데요. 특히 군비 경쟁이 중심이 됐죠.
이렇게 경쟁 속에서 자본 축적을 본다는 점이 우리 경향의 국가자본주의론인데요. 즉, 현실의 자본은 서로 경쟁하는 여러 자본들로 존재하고, 그것 때문에 축적의 강박에 사로잡히고, 바로 이것이 자본 축적 드라이브를 구현한다는 것이 국가자본주의의 핵심이에요.
우리와 매우 다르게 국가자본주의론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소련에서 단순히 국가가 자본 구실을 하며 노동계급을 고용해서 착취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면 왜 소련 국가가 착취를 하느냐는 물음에 제대로 답변하기가 어려워요. 무엇보다 소련에서 저항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이 자본인 소련 국가에 맞서서 싸운다는 식, 즉 ‘자본 대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계급투쟁을 추상화시켜 버리니까 신디컬리즘적인 함축을 갖게 돼요. 특히 C. L. R. 제임스, 라야 두나예프스카야 같은 사람들이 소련에 대해 범했던 이론적 오류였죠.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정치적으로 아나키즘과 신디컬리즘에 굉장히 우호적인 경향으로 기울었죠.
다음은 정치적 함축인데요.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 단계, 즉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 봤어요. 계급도 국가도 없지만, 화폐라든가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분리라든가 하는 측면을 아직은 충분히 극복하진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회주의의 의미가 마르크스가 말한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국유화된 국영 경제로 왜곡돼 버렸어요.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없는데, 스탈린주의적 개념이나 잘못된 사회주의 개념에서는 국유화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니 사회주의가 오히려 국가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거죠. 그러면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대립된다는 관점에 서게 되고, 사회주의를 억압적인 사회로 보게 되니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죠.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국유/국영 체제와 관계가 없었어요. 필요하면 국유화와 국영화를 수반하는 것이지, 본질적인 측면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었어요. 즉,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경제와 생산을 통제하는 것을 뜻했죠. 국유화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중요한 점은 누가 국가를 지배하느냐였죠.
스탈린주의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사상에 따라 사회주의를 국유/국영 체제로 이해하면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은 실종되고 대리주의가 되죠. 노동자를 대행 또는 대리한다는 것인데, 그들은 그걸 두고 ‘대표한다’고 말하죠. 대리주의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사회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 노동자가 다시 지배당하는 것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어요.
제가 정치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으로 이해하지 않고, 국가가 생산을 통제하거나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당과 계급의 관계 문제에서 대리주의적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진 셈이지요.
Q. 1991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 국제 좌파들은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나요? 먼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응부터 말해 주시죠.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러시아 문제’를 놓고 크게 나뉘었어요. 크게 세 경향이 있었습니다. 먼저 국제사회주의경향인데요. 소련 같은 사회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같은 사회든 본질은 다 똑같은 자본주의 사회고, 형태만 시장이 더 유력하냐 아니면 국유 기업들이 더 유력하냐, 사기업이 더 지배적이냐 아니면 국영 기업이 더 지배적이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죠.
다른 경향은 수적으로는 더 우세했지만 내적으로는 많이 분열해 있고 소련 붕괴 이후로는 완전 사분오열해 버린 정설파 트로츠키주의 경향인데요. 에르네스트 만델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정설파는 트로츠키를 따라 소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노동자 국가라고 봤어요. 다만 관료적으로 퇴보된 것이 문제라는 입장이었고요. 이걸 ‘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론’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경향은 매가리 없고 소련이 무너진 뒤 학계나 언론계 같은 데서 지배적인 경향이 된 관료 집산주의 경향인데요. 자신들의 명칭을 1990년대 동안 여러 번 바꿨어요. ‘포스트소셜리스트’ 등 두세 가지로 바꿨는데, 하여튼 소련 붕괴 직전 상황에서는 관료 집산주의라 불렸습니다.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했을 때 관료 집산주의 경향은 비효율과 낭비가 원인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그 안에는 그래도 시장은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게 있겠어’ 하며 자본주의 체제 내로 스멀스멀 흡수되거나 개량주의적으로 변한 사람들도 있었죠. 이 입장은 어쨌든 모호해요. 어떻게 보면 상식과 부합해서 학계나 언론계에서 인기를 누렸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상식이 언제나 옳은 건 전혀 아니잖아요? 종종 틀리는데, 바로 그런 문제점을 갖고 있었죠.
정설파 측은 굉장히 당황했어요. 어찌 됐든 문제가 많아도 노동자 국가인데 와해되니까 당혹감에 휩싸였던 거예요. 우리 나라 일부 언론에서는 그 사태를 ‘체제 붕괴’라고도 불렀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트로츠키가 말한 정치 혁명이 일어난 거라고 절충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나 트로츠키는 정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구현한다고 했지, 붕괴 이후 30년 동안 러시아나 동유럽이 밟아 온 길이 일어난다고 하진 않았잖습니까? 그러니까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졌고, 19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에는 비겁하게도 소련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반동적인 일이 일어난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스스로 ‘국제볼셰비키경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표적인데요. 이들은 이전에 스탈린주의자였던 사람들을 약간 흡수하고, 한국에서는 PD 일부를 흡수했죠. 또 다른 이들은 동유럽과 소련의 격변이 왜 필요했던 일인지, 왜 꼬였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혹스러워 하다가 완전히 투항하는 입장으로 가기도 하고요. 이런 식으로 정설파는 사분오열되고 혼란에 빠졌어요.
국제사회주의경향은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상주의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소련이나 동유럽 대중은 독재 정권 하에서 과거 계급투쟁의 경험과 단절돼 있었고, 그 독재 정권이 사회주의를 자처해 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거부감도 있을 수밖에 없었죠. 낮은 계급 의식, 이데올로기적 혼란, 전통의 부재 등 때문에 동유럽과 소련에서 일어난 변화가 사회주의자들이 바라는 대로 안 됐다는 점을 인정했고,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세계의 나머지 대중 항쟁도 그렇게 전개되곤 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혼란에 빠지진 않았죠.
Q. 사회민주당은 소련 붕괴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나요?
사회민주당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주류와 좌파로 나뉘어 왔어요. 주류와 다른, 좌파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전면적으로 국유화된 경제를 구현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위해서 때때로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동유럽과 소련이 무너지던 1989~1991년에 주류는 더 우경화했어요. ‘시장밖에 대안이 없다’고도 했고, ‘자본주의 외엔 대안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했죠. 그게 ‘제3의 길’인데,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슈뢰더가 그 길을 밟았죠. 미테랑 정부 말기라든가 그 이후 조스팽의 프랑스 사회당도 그 길을 밟았어요. 주류가 우파적 사회민주주의가 된 거죠. 이들은 199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운동이 되살아나면서 기회를 잡아 집권했다가, 대략 2015년쯤에는 대부분 정권을 내주고 무너졌어요. 지금도 별로 극복하지 못했어요. 타리크 알리는 이들을 두고 ‘극단적 중도’라고 했는데, 그 표현이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사회민주주의의 좌파, 즉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는 동유럽과 소련이 무너졌을 때 스탈린주의자들만큼 충격 받고 사기 저하되고 방향 감각을 상실했어요. 왜냐하면 그들도 소련을 모종의 사회주의나 노동자 국가로 봤기 때문이죠. 다만, 소련에는 민주주의가 없는 것이 문제라며 자신들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구현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국가를 누가 통제하고 있는지는 제쳐 놓고, 소련의 국유 경제는 그 자체로 서방의 시장 경제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도 큰 타격을 받았죠. 그래서 영국 노동당 좌파의 핵심부를 이뤘던 밀리턴트는 조직이 사분오열되고 와해됐어요. 1980년대 초부터 많은 나라들에서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이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었는데 동유럽과 소련 붕괴로 더한층 위기를 겪었죠.
2010년대 중엽에 이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어요. 그리스의 시리자가 그런 사례 중 하나였죠. 또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이 대표하는 경향도 그랬고요. 그들에게는 지금 시기가 기회이긴 하죠.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주류보다 상대적 이점이 있다는 의미지, 전체적 세력 균형은 곳곳에서 사회민주주의 내 우파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의 우파가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들도 고뇌가 깊어요.
Q. 소련 붕괴 당시 한국 좌파의 압도 다수는 스탈린주의자였는데, 친소파 스탈린주의자와 친북파 스탈린주의자가 각각 이 사태에 어떻게 반응했나요?
1980년대 한국의 스탈린주의는 혁명적이었어요. 스탈린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였는데요, 스탈린주의는 소련 지배 관료의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에서 혁명적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내재적인 모순이 있죠. 그럼에도 모순을 깨닫지 못한 채 소련과 중국 책들을 읽으면서 공부했던 거라서, 엄밀히 말하면 자리를 잡은 기성 스탈린주의라기보다는 ‘프로토 스탈린주의’, 즉 ‘원초적 스탈린주의’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동지들은 혁명가들이었고 급진적이었고 대부분 건강했어요. 특히 NL 계열 동지들은 1987년 6월 항쟁의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만큼 굉장히 건강했고요. PD 동지들 중에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은 노동조합을 굉장히 투쟁적으로 잘 이끌고 그랬어요.
그런데 동유럽이 붕괴했을 때 굉장한 당혹감에 휩싸였고 분열의 첫 갈래가 나타났죠. PD 안에서도 나타나고 NL 안에서도 나타났어요. 그전에는 좀 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좀 더 노골적으로 친북 경향인 NL과 좀 더 소련형이고 좀 더 현대적인 스탈린주의 같은 PD로 구분됐죠. 약간의 강조점 차이가 있고 그로 말미암아 실천에서 노선 차이가 있긴 했죠. 그런데 동유럽이 붕괴되면서부터 갈등이 심하게 빚어졌어요. NL 내부에서도, PD 내부에서도요.
그러다가 1990년 후반이나 1991년 상반기쯤에는 많이 회복되는 듯했어요. 특히 1991년 봄에 당시 분신 정국이라고 불린 거대한 5월 투쟁이 전개됐죠. 서울 중심이었지만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청년들이 거리로 몰려나왔죠. 공안 정국을 통해 다시 독재를 강화하려고 했던 정권에 맞서서 저항이 시작됐기 때문에 자신감이 더 생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시 옛 환상, 옛 착각이 되살아났던 건데요.
그런데 그러자마자 소련이 8월에 무너진 거예요. 그래서 1991년 여름부터 전반적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방향 감각을 상실했어요. 거기에 조금 더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던 건, 1992년 말에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지지를 받는 김대중과 구 체제 지배자들이 뒤에서 밀어 주는 김영삼이 대선에서 경쟁했는데, 김영삼이 이기고 김대중이 패배했던 거예요. 그래서 1991년 여름부터 1993년이나 1994년까지 한 2~3년은 사기 저하가 심각했죠. 그 시기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민사회 이론 등 마르크스주의와 경쟁하는 온갖 종류의 비非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이 등장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됐죠.
그럼에도 NL 진영은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내부를 좀 더 단속할 수 있었어요. 특히 북한 체제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다르다’는 식의 예외주의론으로 헤쳐나갈 수 있던 거죠. 그런데 1995년부터 북한에서 홍수와 기근이 엄청나서 북한이 남한에게 식량을 제공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알려졌고, 무엇보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죽었죠.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그들이 말하는 ‘고난의 행군’이 1990년대 중엽에 있었어요.
이 시기에 PD는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옛날과 같은 방식이기보다는 노동조합에서 조직을 복구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좀 열어 놓고 모색하는 식이었죠. 당시 노동조합 운동에서는 예리한 정치 노선 차이가 실천에서 큰 차이를 가져오지는 않았던 때니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노동자주의라고 불리던 경향인 급진적인 노동조합운동론으로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1990년대 중반 이후에 경쟁자 NL의 약화를 이용해서 세력을 더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죠.
Q. 소련 붕괴 당시 한국의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규모였고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나요?
저는 1989년 톈안먼 항쟁 후에 국가자본주의론으로 가닥을 잡고는 사람들을 모아서 1989년 여름에 수십 명짜리 느슨한 서클을 규합할 수 있었어요. 어찌 보면 그것이 우리 조직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1년 남짓 뒤에 분열이 일어났어요. 정확히 말하면 1990년 8월 31일이었죠.
아까도 말했듯이 그 당시 상황은 소련이 다시 강력하게 철권을 휘두르는 듯하고, 그래서 겉보기로 소련 체제가 힘을 회복하는 듯이 보였죠. 특히 고르바초프가 1991년 1월에 발트해 연안 3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벌어진 민족 운동을 공수부대를 보내서 진압했는데요. 일각에선 소련판 광주가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러자 1991년 봄쯤엔 좌파가 회복하는 듯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안에서도 논쟁이 벌어졌어요. 저는 더 예리하게 국가자본주의론을 밀어붙이는 입장이었어요. 지금처럼 토론만 하고 집회에서 리플릿을 뿌리거나 때에 따라 시위를 주동해서 몇백 명 규모의 조그만 시위 정도 하지 말고, 국가자본주의론에 따라서 정기간행물을 내고 조직하자고 했죠. 또, 노동자 따로 학생 따로 조직하지 말고 단일하고 집중된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자는 입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어요.
그러자 노동조합 쪽에서 일하는 동지들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국가자본주의냐 관료적으로 변질된 노동자 국가냐 아니면 관료 집산주의 체제냐 하는 것은 열어 두자고 했죠. 사실 노동조합이라는 데에만 시야를 맞추면 이 주제가 분열시킬 쟁점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노동조합에만 갇혀 있는 시각은 협소하다는 문제가 있죠. 또 당시 학생과 노동자를 따로따로 조직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특히 PD쪽에서 심했어요. 학생은 학생운동을 한 뒤에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고,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식이었죠. 제가 봤을 때 이때 노동운동은 그냥 노동조합 운동을 말하는 거였어요. 이렇게 해서 노동조합 쪽에서 일하는 동지들과 가장 심하게 충돌했죠. 당시 학생 쪽에서 문예 운동을 하던 동지도 여기에 붙었고요.
결국 조직이 분열했어요. 국가자본주의론을 분명하게 공식화한 그룹이 1990년 9월 1일에 출범했죠. 1989년에 만든 그룹 중에 저 포함해서 네 명이 1990년 9월 1일에 새로 조직을 출범한 거죠.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91년 8월 중순에 소련에서 격변이 시작되기 직전쯤엔 스물일곱 명에서 스물아홉 명 정도 됐어요.
소련이 무너질 때에 우리는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소련의 격변을 설명한 책자를 굉장히 신속하게 냈어요. A4 용지로 아주 조잡한 인쇄 글자에 외형이 형편없었는데 내자마자 일주일도 안 돼서 서점가에서 2000부가 팔려서 일주일도 안 돼서 또 새로 2000부를 찍어야 했어요. 그럴 정도로 관심을 끌었죠.
당시 조직도 석 달 만에 150명을 넘었어요. 그해 전국노동자대회를 할 때 한 160명 정도 됐으니까요. 서른 명 못 되는 조직이 석 달도 안 돼서 다섯 배 이상으로 팽창한 것이죠. 당시 대부분 대학교 1~3학년생인 젊은 회원들이었고 경험도 미숙했어요. 그럼에도 그 반년쯤 뒤에는 우리가 거의 200명에 육박하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보안 경찰이 우리를 쳤어요. 우리 회원들 40여 명이 대성리의 한 민박집에서 MT를 하며 평화롭게 토론하고 있었는데, 무장한 전투 경찰과 전경 버스 몇 대가 그걸 포위해서 대부분 젊은 대학생 회원들로 이뤄진 모임을 급습했죠.
그때 이후로 1990년대 말까지 심각하게 탄압받아서 조직은 지하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회원 규모도 160명 수준에서 머물렀죠. 약간 성장할 조짐이 보이면 공격받았거든요. 그리고 지하 활동 때문에 회원 160명 정도가 가진 영향력의 10분의 1도 채 발휘 못하고 선전 중심적 단체로 있었어요. 탄압 때문에 불가피했죠. 이게 1990년대 상황이고 당시 많이 괴로웠죠.
Q. 앞에서 잠깐 얘기해 주셨는데, 소련 붕괴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스탈린주의 운동의 이후 행보들은 어땠나요? 그런 행보가 오늘날에 형성돼 있는 한국 진보·좌파와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동유럽 격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저는 1970년대 동료, 선배, 동기들과 같이 느슨한 서클을 형성하고 있었는데요. 그 사람들의 궤적을 보면 아주 잘 드러나요. 단순히 운동 그만두고 조그마한 사업을 한다고 나간 사람, 노동조합의 간부가 된 사람, 또 한 사람은 노동조합 운동을 더 하다가 유학 가서 노동경제학인가 노동사회학 학위를 받고 지금 정부 산하 연구 기관에 책임자로 있어요. 또 노동조합 기층의 활동을 지원하고 거기서 조직해 보려던 한 동지가 있었어요. 신디컬리즘에 가까운 급진적 노동조합운동론에 따라서 운동하던 동지였는데 안타깝게도 8~9년 전엔가 사망했고요. 또 한 사람은 시민사회론 비슷하게 갔어요.
이런 사례가 잘 보여 주는데요. 운동 그만두거나, 개혁주의자가 되거나, 개혁주의 중에서도 노동조합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정치적 개혁주의로 간 거죠. 당시 운동권들이 대체로 다 그렇게 변했어요. 중심 줄기를 잡으라면 대부분은 모종의 개혁주의자들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고요. 개혁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론들은 각양각색이었는데, 그래도 점점 수렴하는 경향이 있었죠. 1990년대에는 좌파적 버전의 개혁주의였다가 2000년대에서 2010년대로 넘어와서는 좀 더 주류적이고 온건한 형태로 변해 왔어요.
Q. 소련 붕괴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경과하면서 성장한 노동조합 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당연히 영향을 미쳤는데요. 그럼에도 노동조합은 정치 조직이 아니니까 여전히 건재했죠. 노동조합은 두루 알다시피 노동자들 일반의 권익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사용자하고 협상하는 조직 아닙니까?
그럼에도 1990년대 중엽에 민주노총 건설로 수렴되는 대중적 노동조합 운동이 1987년의 대분출 이후에 형성된 거잖아요. 그때는 노동자들도 아직 경험이 없어서 대학생 출신 좌파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활동가들이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로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사기 저하되니까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조금 영향을 받았죠. 전투성과 급진성이 약간 삭감된 것인데, 노동조합 조직 자체의 성격 때문에 노동조합이 곳곳에서 와해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죠. 즉, 노동조합이 탄생해서 성장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전투성과 급진성이나 정치적인 방향 감각에서 약간의 영향을 받는 것이죠.
2008년 이후에 그 부분을 복원하자고 나온 게 바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예요. 계속되는 경제 침체 속에서 정치가 중요하고 단지 노조 운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화나 사회 운동의 지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소련 붕괴 후 20여 년이 지난 2010년대에 와서 다시 변하려고 하는 건데요. 그러나 이때 정치나 사회운동론은 많이 분화했고 옛날에 비해서 많이 온건해져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도 굉장히 다양하게 존재하고, 서로 단결도 잘 안 되고, 서로 접점도 거의 없다시피 하죠.
Q. 스탈린 체제가 몰락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오늘날 여전히 중요합니까?
네. 첫째, 신자유주의가 정점에 있었다는 1980~1990년대와 200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가장 앞서 나갔다는 영·미에서조차 국가자본주의는 그 나라 경제의 3분의 1 이상 차지했어요. 아무리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배한 것처럼 얘기해도 국가자본주의는 죽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걸 토대로 한 전쟁, 전쟁 기구, 전쟁 노력, 전쟁 실행 등이 있던 것이고요.
지금은 자본주의의 위기 때문에 이 측면이 더 강화되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걸 과장해서 이제 신자유주의가 끝났다고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중이 바뀌고 있죠. 물론 아직 전면적으로 국가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상황으로 바뀌진 않았지만요.
무엇보다 방금 말했듯이 전쟁 노력, 전쟁 기구, 전쟁 실행과 같은 측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자본주의가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또 제국주의적 경쟁이 강화되면 열강의 경쟁도 강화되고, 그것은 군사적·지정학적 경쟁과 암투, 노골적인 충돌도 강화된다는 뜻 아니겠어요?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는 현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둘째, 앞서도 말했듯이 정치적 함축의 측면인데요. 다시 말해서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착각하거나 그렇게 선전하면서 국유화가 곧 사회주의라고 설파하면 대중에게 사회주의에 대해서 완전히 그릇된 개념을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은 개념 오해에 지나지 않으니 다행이지만, 이게 대중 운동으로 된다면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어쨌든 사회주의는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투쟁, 해방을 향한 노력, 해방을 위한 수단과 기반, 행동 등입니다. 지금 이것이 복구되고 강화돼야 합니다.
Q. 지금 시기에 혁명가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주시죠.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하기 전에는 잘못된 개념이나마 레닌주의, 레닌주의적 당, 전위당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어요. 세부적인 내용의 차이를 두고 논쟁하더라도, 좌파들 사이에서 이것들은 공리처럼 받아들여졌어요. 잘못된 것이라도 어쨌든 토론과 논쟁을 했고, 그 논쟁은 무엇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고 레닌주의냐 하는 것이었죠.
이제는 아무도 무엇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인지에 대해 논쟁하지 않아요. 경제 빼고는 마르크스주의를 죽은 개 취급하죠. 마르크스주의 정치는 문제가 있다고 보고요. 심지어 레닌주의, 특히 레닌주의적 당은 끔찍하다는 반응이죠.
이러한 태도나 정서, 분위기가 지배적이 되면서 좌파적 개혁주의가 마치 사회주의인 양,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회주의인 양 생각되는 거예요. 그나마 비교적 소수 사람들 안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더 광범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지도 않아요.
따라서 지금 시기에 사상적인 전통을 방어하고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취약했던 한국의 토양에서는 전통을 세우고 강화하고 벼리고 다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현재 단연 중요한 당면 과제라고 봐요. 다만 중요한 정치적 운동을 외면해서는 안 돼요. 즉, 선전을 강화하면서도 선전주의에는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혁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