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중등교육 정책
사람들은 흔히 교육이 이데올로기나 정치와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교육 문제는 종종 핵심적인 정치 현안으로 떠오른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교육 문제는 거듭 중요한 정치 쟁점으로 부각돼 왔고, 특히 올해는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교육 문제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정치적 심판의 중요한 고리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논리 때문에 정당 공천을 배제하지만, 유력 정치인들이 교육감 선거에 뛰어들기도 하고 출마자들은 저마다 정치적 견해를 제시한다. 계급으로 나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합의해 운영하는 사회 제도는 거의 없다. 교육이 이념의 무풍지대이기는커녕 늘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관이 경합하는 장인 까닭이다.
1990년대 중엽 이후 역대 정부가 교육에 시장 논리를 확대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을 급속하게 추진하면서 교육의 목표와 방식 등을 놓고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자유시장 예찬론자들은 교육을 마트에 진열된 상품처럼 취급한다. 1995년 이른바 5·31교육개혁 이후 ‘학부모 선택’ 같은 소비자 담론이 확산했고, 이로 말미암아 학교와 대학은 갈수록 더 큰 경쟁 압력을 받게 됐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은 대중의 불신을 받는다. 경제 위기로 대중의 삶이 나빠졌는데도 교육비 부담은 더욱 늘어나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때문에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지금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난하지만, 사실 민주당이 집권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교육 정책도 현 정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정책의 내용은 물론, 미사여구까지 닮았다. 이명박의 미친 교육 질주를 막는 방법으로 민주당과 민주대연합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영삼 정부의 1995년 교육개혁안을 환영했다. 5·31개혁안이 내세운 ‘다양성’과 ‘자율’이라는 미사여구에 현혹됐기 때문이다. 옛 소련 붕괴 뒤 대다수 좌파들이 혁명적 신념을 상실한 이념적 혼돈기에, 최초의 민간 정부가 실시한 개혁에 진보진영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었다. 특히, 오랜 군부 독재 기간에 학교와 대학에 대한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양성’과 ‘자율’을 내세운 5·31개혁안의 미사여구에 이끌렸다.
그러나 지난 15년 간의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김영삼의 교육 개혁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의 시작이었음을 깨달았다. 1970년대 중반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확산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곳곳에서 공교육을 체계적으로 공격하며 교육 제도를 크게 바꾸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교육 제도가 자본주의에서 하는 핵심 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교육
사람들은 대개 자본주의에서 교육을 지위 상승의 통로로 여긴다. 사회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던 시기에는 전보다 계급 지위가 향상되는 사람들이 상당수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확립된 뒤의 자본주의 역사 전체는 새로운 계급 질서가 공고해진 시기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에서는 공통으로 교육 제도가 체계적으로 확대됐지만, 소수 지배계급과 대다수 노동계급으로 나뉜 사회의 기본 구조가 확고해졌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교육 제도를 통해 가족의 계급적 배경을 뛰어넘어 계급 지위 상승을 이루는 개인들이 여전히 있지만, 하층 계급 출신이 상향 이동하는 폭은 초기보다 현저히 좁아졌다. 게다가 계급 이동은 상향 이동뿐 아니라 하향 이동도 있다(특히 경제 위기 시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제도들처럼 교육 제도도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동역학에 따라 구조화된다. 교육 제도의 핵심 기능은 가족 제도와 함께 사회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노동자 착취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에서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은 축적을 지속하는 데 필수다. 자본주의 노동 시장을 위해 다음 세대 노동자들이 준비돼야 한다. 건강한 노동자들이 넉넉하게 있지 않으면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획득해서 축적을 지속하기 힘들다.
다음 세대 노동자를 준비하려면 자본주의 산업과 서비스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체제에 의문을 품지 않게 하면서 이뤄져야 한다. 18~19세기 산업혁명 당시 영국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반항이 두려워 노동자들을 부려먹는 데 꼭 필요한 기본 사항 외에는 교육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산업 발전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수준이 높아져 노동계급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이 크게 늘었다.
그럼에도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창출할 만큼 똑똑한 노동자가 필요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만큼 똑똑한 노동자는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나중에는 대학) 교육의 내용은 비판적 사고를 고무하기보다 현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 치중한다. 그 내용은 나라마다 시기마다 다른데,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사독재, 미국 제국주의 정당화, 자유 시장경제 찬양, 반공주의 등이 지배적이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산업화 이후 학교 교육이 급속하게 확대됐다. 1969년 시행한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1974년 실시한 고교평준화로 중등교육이 보편화했다. 2000년이 되면 고등학교 진학률은 거의 1백 퍼센트에 가까워졌는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중적 학교 교육의 발전은 노동 대중의 삶에서 진보였다. 교육이 지배계급이나 상층 중간계급 자녀들의 특권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비록 학교 교육의 많은 부분이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노동 대중이 학교 교육에서 얻는 지식과 기술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그들의 잠재력의 일부다.
지배자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기는 하지만,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언제나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학교와 대학 교육이 대중화한 후에도 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학생 투쟁이 분출한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사회적 격변기에 대학이나 학교는 흔히 반란의 중심지가 되기도 한다. 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격차는 특정 시기에 사람들을 대거 투쟁에 나서게 만든다. 학교나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과 기술은 체제에 도전하는 데도 유용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교육 제도는 지배자들의 의도가 일관되게 관철되는 장이 아니라 모순된 개념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때로는 현실과 공공연히 충돌하기도 하는 장이다. 지배자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교육 제도가 단지 노동 시장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구실만 할 게 아니라 개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계발하고 나아가 사회를 더 평등하게 바꾸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지배계급이 대중의 이런 바람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힘들다. 자본주의는 타고난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가 아니므로, 출생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기 힘들다. 적어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우파조차 빈부격차, 여성 차별, 인종 차별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즉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지만 개인의 능력 차이 때문에 사회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 실업, 빈곤, 여성 차별, 인종 차별을 개인들이 공평한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한 탓으로 돌린다. 시험 제도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데 효과적인 장치다. 시험은 경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도록 만든다.
교육 제도를 둘러싼 갈등이 지배자와 피지배 대중 사이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배자들 사이에서도 교육 정책을 두고 많은 논쟁이 일어난다. 자본가 계급의 각기 다른 부문들이 교육 제도에서 얻고자 하는 바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온순한 노동력을 얻고자 하는 것은 공통이지만, 각 부문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수준은 꽤 상이하다.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과 적당히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가가 있는가 하면, 주로 미숙련 노동력만 필요한 자본가도 있다. 개별 자본의 상이한 요구를 조율하는 구실은 국가가 떠맡는다. 국가에도 거대한 관료제를 떠받칠 행정 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하므로 그에 따라 노동력도 계속 변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는 산업의 변화에 맞게 교육을 바꿔야 한다. 특히 국가 간 경쟁 때문에 각국 지배계급은 교육 제도를 혁신해야 할 필요를 자주 느낀다.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는 교육 개혁이 빈번히 국정 현안으로 부상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학교 교육
자본주의 교육 제도가 표방하는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전에도 이미 있었다. 1968년 반란이 일어나던 때 서구와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도 작업장뿐 아니라 대학이 격렬한 저항의 중심 무대였고, 중고등학생들도 이런 저항에 동참했다.
1 2008년 시장소득 기준 지니계수(소득불평등 지수)는 통계청 조사가 시작된 199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로 신자유주의가 확산하면서 교육의 모순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확산한 신자유주의는 한국에서는 1990년대 중엽 들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 결과, “가난의 대물림을 교육을 통해 끊”기는커녕 빈곤과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빈곤율(중위소득 50퍼센트 이하)이 1998년 8.6퍼센트에서 2008년 14.3퍼센트로 늘어났다.신자유주의 교육관은 교육을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상품 비슷한 것으로 취급한다. 경쟁과 효율을 지상 과제로 내세우면서 교육의 목적을 편협하게 만들고 불평등을 강화한다.
학교 다양화 ― 부자들을 위한 프로젝트
학교 다양화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된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시행된 정책들을 본뜬 이 정책의 핵심은 학부모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내세워 평준화 제도를 공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준화 제도 비판이 시행 초기부터 제기돼 1983년 과학고가 설립됐지만, 1980년대까지는 평준화가 확대되는 추세였다.
2 이명박이 추진하는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자사고 1백 개 만들기)와 학교 성적 공개 등이 전면 시행되면 이미 구축돼 있는 고교 서열화는 더한층 심해져 평준화가 사실상 무력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990년대부터 평준화 제도가 본격적으로 공격받기 시작해, 1992년에 외국어고가 특수목적고등학교로 지정되고, 1998년에 국제고가 도입되는 등 특목고가 급증했다. 2002년부터는 자립형 사립고가 운영되기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자율형 사립고가 늘고 있다. 이로써 평준화 제도는 상당히 약화돼, 2008년 전체 고등학교 중 평준화 적용을 받는 학교의 비율은 38.2퍼센트(학생 수로는 53퍼센트)에 그쳤다.학교 다양화는 무엇보다 부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다. 자립형 사립고, 자율형 사립고, 국제중학교 등은 모두 연간 교육비가 1~2천만 원에 이르는 ‘귀족 학교’다. 따라서 학교 ‘선택권’은 소수를 위한 선택권일 뿐이다.
3 한국의 높은 사교육비는 공교육의 질이 낮아서가 아니라 심각한 대학 서열화와 고교 서열화 때문이다. 한국은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일수록 사교육을 많이 받는다.
이명박은 학교들을 경쟁시켜 공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고 사교육비를 줄이겠다고 주장했지만, 경쟁이 심해지면서 사교육비는 도리어 늘어났다. 2008년 가을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로 한국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도 2009년 사교육비 지출은 역대 최고치를 갱신했다. 2009년 사교육비 전체 규모는 20조 9천억 원으로, 2007년보다 4.3퍼센트나 증가했다. 사실, 높은 사교육비는 정부의 교육 지출이 낮은데도 한국 교육이 이른바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비결이다. 2003년 한국의 교육비 지출 규모는 GDP 대비 7.5퍼센트로 OECD 평균 5.9퍼센트보다 높지만, 공적 지출 비중은 4.6퍼센트로 OECD 평균(5.2퍼센트)에 미치지 못한다. 사적 지출 비중은 GDP 대비 2.9퍼센트로 OECD 평균 0.7퍼센트보다 훨씬 높다.부자일수록 사교육비를 더 많이 쓰는데, 상층 중간계급조차 높은 사교육비를 부담스러워할 정도다. 노동자들이 쓰는 사교육비의 절대 액수는 부자들보다 훨씬 적지만, 가계에 주는 부담은 훨씬 더 크다. 지난해 상반기 도시 노동자 전체 가계 지출의 11.3퍼센트가 교육비였는데, 이 중 63퍼센트가 사교육비였다.
높은 사교육비에 대한 대중의 불만 때문에 정부는 사교육비 절감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지만, 높은 사교육비 지출의 근원인 고도로 서열화된 대학 체제를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학생 선발권을 대학에 주는 대입 자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학력 저하?
우파들은 고교 평준화가 학력 저하의 원인이라고 공격한다. ‘하향 평준화’ 주장은 평준화 시행 초기부터 제기된 우파들의 단골 메뉴다. 학력 저하는 특목고, 자사고 확대 정책뿐 아니라 우열반 편성, 일제고사와 교원평가제 시행의 핵심 논거로도 이용된다. 경쟁이 없으면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와 열의를 잃고 교사들이 개선 노력을 게을리해 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하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력 저하론은 다분히 허구적이다. 많은 연구들이 평준화(추첨 배정)가 학생들의 학력을 저하시킨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발표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상위권 학생들은 특목고 등 입시 배정 학교에 다니든 추첨 배정 학교에 다니든 3년 간 학업 성취 성장률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OECD가 2000년부터 3년마다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하다시피 하는 핀란드에는 입시명문고나 우열반 따위가 전혀 없다. 핀란드에는 사립학교가 거의 없고(종교학교와 대안학교뿐이다) 대학과 고등학교는 모두 평준화돼 있다. 심지어 장애아와 비장애아까지 같은 반에서 수업하는 통합 교육을 실시한다.
6 많은 특목고 학생들의 부모는 상층 중간계급 이상이다. 지난해 서울 지역 외고생 중 44.7퍼센트가 ‘상위직’(판검사, 의사, 교수 등 전문직과 경영주, 고위 공무원 등 경영·기술직) 자녀들로, 그 비율이 인근 일반고의 3.5배 가까이 된다고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밝혔다. 최고 입시명문고로 부상한 민족사관고는 87.83퍼센트가 ‘상위직’ 자녀들이었다.
많은 나라에서처럼 한국에서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결정하는 주된 요인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다. 대체로 부모의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학생들의 성적이 높다. 서울대학교 신입생 학부모의 50퍼센트 가량이 고위 공무원, 기업체 사장, 기업체 간부, 변호사, 의사, 교수 등이다.부잣집 자녀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보다 높은 학업 수준을 성취하기 쉬운 이유는 단지 비싼 사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반적 영양 상태, 부모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학습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시간적·정신적 여력 등 모든 측면에서 지배계급이나 상층 중간계급 자녀들이 노동계급 자녀들보다 월등히 유리하다. 장시간 노동과 그에 따른 피로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녀 교육에 충분한 관심을 가질 수 없다. 특히, 노동계급(특히 육체직 노동계급)을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노동계급 부모들은 평소에 위축돼 있고, 이는 자녀의 학습 의욕과 자신감에 큰 영향을 끼친다. “천재 한 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린다”(이건희)는 사고를 지닌 엘리트주의자들은 가정 배경에 따른 차등 교육을 옹호한다. 부잣집 자식과 노동계급 자식들이 섞여 공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자들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부자들이다. 우파들이 수십 년째 평준화에 이데올로기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평준화를 찬성한다. 국제중학교를 지향한다며 같은 학교에서도 교복과 건물, 학비를 달리해 아이들을 가르는 영훈중학교와 대원중학교 같은 학교들의 행태를 어떻게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엘리트주의 교육관은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이다. 현실은 소수의 천재가 다수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계급이 소수의 지배계급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교육은 부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돼야 마땅하다. 대학을 포함해 모든 학교를 평준화하고 유아 교육부터 대학 교육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무상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경쟁과 획일화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은 교육을 다양화하기는커녕 더욱 획일화한다. 시험이 교육 전반을 지배하는 현상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실시된 나라에서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다. 많은 나라에서 전국 단위 학력 평가, 잦은 시험, 시험 성적 공개 등이 시행되고 있다.
8 그래서 오바마가 한국 교육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 지배계급은 이제 학력 평가를 ‘국가경쟁력’ 지표로 여긴다. PISA 성적이 그 지표가 되면서 많은 나라에서 PISA 성적을 끌어올리려는 경쟁이 붙고 있다. 우파들의 학력 저하 주장과 달리, 한국 학생들의 학력은 다른 나라와 견줘 전혀 낮지 않다. PISA에서 한국 학생들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학업성취도가 최상위권이었다. 그러나 한국 지배자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한국 학생들의 ‘학습 능률’이 최하위이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의 학습 시간은 핀란드 학생들의 거의 갑절이고,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한국 지배자들은 한국 학생들이 학습에 흥미가 적어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학업 성취가 떨어진다고 우려한다.한국 지배자들은 특히 대학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며, ‘지식경제’ 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교육을 초중등학교에서부터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평준화는 획일화를 초래하므로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준화를 해체하면 입시 위주 교육이 심해지므로 오히려 창의력을 더욱 갉아먹을 것이다.
이미 일제고사 실시로 입시 위주 교육이 강화되고 교육 과정이 갈수록 획일화하고 있다. 정부는 창의력을 증진한다면서 초중고에 서술형 시험을 확대한다는, 전에도 실패한 정책을 재탕해 내놓고 있다. 결국, 첨단산업에 필요한 고도의 과학기술 인력을 육성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주로 영재교육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창의력 저하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가 간 경쟁에 교육이 종속되면서 대다수 나라에서 교육 과정이 획일화하고 있다. 초등교육부터 수학·과학처럼(한국은 영어도) 산업에 필요한 과목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경향이 단적인 사례다. 예술 교육은 계속해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컴퓨터와 영상매체가 발전하면서 어린이들의 삶에서 놀이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찮게 치부하는 노골적인 실용주의가 교육 과정을 지배하고 있다. 수학과 과학은 지식의 사회적 사용 문제와 분리해 순전히 기술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나 생태계 파괴, 핵무기 등 인류가 직면한 중대사들을 회피하는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실용주의자들에 반대해 주장했듯이, “진정으로 유용한 지식은 … 우리 삶의 조건과 현재 문제들을 해결하는 법을 다루는 것이다.”
시험 위주 교육은 수업과 학교 생활 전반을 왜곡한다. 창의력이 저하될 뿐 아니라 학생과 교사가 소외되고, 학생 간, 교사와 학생 간 신뢰와 협력이 파괴된다. 평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평가 방식들은 배움에서 가치 있는 피드백이 된다. 평가 결과(꼭 시험 성적이어야 하는 게 아니다)는 학습에서 뒤처진 학생들을 돕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한 때는 평가가 필수다. 외과 수술이나 운전면허 시험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평가를 하는 방식과 이용하는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11 영국에서 ‘배움을 위한 평가AfL, Assessment is for Learning’ 운동을 주도하는 킹스칼리지의 폴 블랙 교수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학생들은 등급 부여가 없을 때 교사의 논평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12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학업 성취 평가는 지금과 판이할 것이다. 그 형태를 지금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도 지금보다 더 나은 평가가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를 분명히 설명하는 평가는 진정한 피드백을 가능케 해 점수를 내거나 등급을 매기는 것보다 학습자에게 훨씬 더 유용하다.13 또, 평가가 사회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데 이용되는 것을 막아야 하므로 시험 성적 공개에 반대해야 한다.
현재 학교 교육에서 평가 비중을 대폭 줄여야 한다. 강박적 학업 성취 평가, 전국 단위 학업 성취 평가(일제고사)를 폐지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평균 시험 횟수는 꾸준히 증가했는데, 지난해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시험을 치렀다.감시 체제
14 한국도 마찬가지로, 교과부는 시도 교육청에 권한을 이양한다면서도, 학력 정보를 공개하고 교부금을 차등화하는 방식으로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은 ‘분권화’와 ‘자율’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냉혹한 감시 체제를 발전시킨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이 사라지지 않았듯이,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도 마찬가지다. ‘권한 이양’, ‘교육 자치’라는 미사여구 뒤에서 중앙 당국은 여전히 단위 학교 현장을 강력히 통제한다. 영국·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미국·스웨덴의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주요 사항은 여전히 중앙이 통제하고 하찮은 것만 하부로 이양한다.교육 과정에 대한 국가 통제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국정교과서, 검인정교과서(일본과 한국밖에 없다)를 써야 하고 교육 당국이 구체적인 교과 내용과 범위까지 지침으로 강요한다. 2008년에 교과부가 ‘좌편향’이라며 금성출판사에 압력을 넣어 집필자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역사교과서를 멋대로 수정하게 한 일도 있었다.
일제고사 실시와 시험 성적 공개도 감시 체제를 발전시킨다. 시험 성적 결과를 기준 삼아 학교를 비교·선택하라고 학부모들을 부추긴다. 2009년에 일제고사 성적이 지역별로 공개됐는데, 올해부터는 개별 학교 단위로 일제고사 결과가 공시된다.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는 교사 임금이 부분적으로 시험 성적과 연동되는데, 이명박도 성과급을 일제고사 성적에 연동시키려 한다. 이런 조처는 교원평가제와 마찬기지로 교사 통제 수단의 일환이다. 이명박은 노무현 정부 때 도입하려 했으나 교사들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된 교원평가제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대표적인 논리가 공교육의 질 향상이다. 정부와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에 진보진영 내에도 그런 논리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교원평가제 지지 여론에는 더 나은 학교를 원하는 대중의 염원도 깃들어 있다. 그러나 ‘교육의 질’은 가치 중립적 문제가 결코 아니다. 무릇 평가는 상당 정도 주관적이다. 교장의 평가든, 동료교사의 평가든, 학부모와 학생의 평가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평가든 교사들의 자발적 평가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강요되는 평가로는 더 나은 교육을 만들 수 없다. 교사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평가 제도로 좋은 학교를 만들 수는 없다.
15 교사를 맹목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신뢰·협력·개방적 대화를 발전시켜 교원평가제 같은 사이비 교육개선책에 맞서야 한다. 교육은 교사·학부모·학생들이 목표와 방법을 두고 개방적으로 대화할 때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교사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면 교사가 학생들의 학습을 두고 학부모와 더 나은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뢰가 없다면, 사람들은 에너지를 자기 방어로 돌리고 배움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16 OECD 국가 평균 학급당 학생 수는 초등학교 21.5명, 중등학교 24명이다. 17 교사를 대폭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이명박은 2009년에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교사 수를 동결했다. 18
사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자발적으로 해 왔다. 그동안 전교조 교사들이 참교육 운동을 했듯이 말이다. 이런 노력이 크게 빛을 발하기 어려운 것은 입시 경쟁이 워낙 치열해 교사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 교사들의 노동조건은 선진국보다 훨씬 나쁘다. 학급당 학생 수는 초등학교 31.6명, 중등학교 35.8명으로 OECD 평균보다 각각 10명 이상 많다. 여러 나라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신자유주의 교육 개혁은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기는커녕 ‘탈전문화’와 ‘프롤레타리아화’ 추세를 강화한다. ‘학교 자율성’ 강화 조처는 평교사가 아니라 교장 같은 관리자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평교사들은 교육 내용과 진도에서 꽉 짜인 지침을 따라야 한다. 행정 업무 증가로 교사들의 노동시간과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현상은 미국·영국·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스웨덴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된 나라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2002~04년 OECD 검토 보고서는 한국 교육을 두고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즉,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해야 할 구실, 핵심 업무·책임 등이 법규에 명료하게 규정되지 않아 교사의 잡무가 늘고 교사의 전문성이 무시될 위험이 있다, 학교 문화가 매우 위계적이다, 학부모의 요구가 늘어나 교사가 업무를 수행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학교 내 사무 직원 확보 수준이 OECD 기준에 비춰 매우 낮다 등등.신자유주의 교원 정책으로 비정규직 교원도 늘고 있다. 교육 예산은 정체하다 2009년에는 11년 만에 삭감됐다. 일제고사를 실시해 입시 위주 교육이 강화되고 교육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전교조가 6자협의체에서 정부와 대안적 평가 방안을 논의하는 것은 자승자박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전교조를 강하게 탄압하는 것이 보여 주듯이, 무엇보다 교원평가는 입시 경쟁과 시장주의 교육에 반기를 드는 진보적 교사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활용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일부 교사들과 교육운동가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더 나은 교육을 하려면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전교조의 정치투쟁은 강화돼야 한다.
다른 교육은 가능한가?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에 사람들이 대안적 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 중 핀란드 모델이 큰 주목을 받는다. 핀란드 교육을 다룬 책이 잇달아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핀란드로 교육 탐방을 가는 교사와 교육운동가들이 늘고 있다.
한국의 학부모와 교사 들이 핀란드 교육에 열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바탕을 둔 핀란드 교육이 세계적으로 높은 성취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PISA에서 매번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한국 학생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습 시간에 사교육도 없이 이룬 결과다. 한국 학생들은 주당 50시간이라는 엄청난 학습 시간에 시달리고 사교육비는 세계 최고다.
21 핀란드 교육 성취의 특징은 학교 간 차이가 거의 없고,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성적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국·독일·한국 등지에서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학생들의 성적 편차가 큰 것과 대조적이다.
많은 점에서 핀란드 교육은 숨막히는 한국 교육 현실과 대조적이다.핀란드 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골고루 높은 것은 무상 교육 덕분이다. 핀란드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무상 교육이다.(박사 과정 학생은 매달 수당 1백80만 원을 받는다.) 어린이들은 모두 무상 급식을 제공받고, 훌륭한 공공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인구가 60만 명쯤 되는 헬싱키에는 시립도서관이 36곳 있고, 주거 지역 5킬로미터 이내에 반드시 도서관을 설치하도록 법으로 정해 놨다. 핀란드 국민 1인당 연간 공공 도서관 대출 장서는 21권으로, 일본의 4.1권보다 무려 다섯 곱절이 넘는다.
핀란드에는 교사 평가 제도가 없지만, 교사들은 의욕적이고 자신의 교수법을 계속 점검한다. 종합학교(한국의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연령까지 다니는 학교)에서는 교사 두세 명이 함께 팀을 구성해 가르친다. 또, 학년을 나누지 않고 개인의 발달 과정에 따라 개별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게 개인 학습을 계획해 주는 무학년 제도와 통합 교육을 실시한다.
교직은 인기 있는 직종이다. 초등과 중등 모두 정규 교사가 되려면 석사 학위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교사들은 신뢰받으며 감시가 없다. 성가신 장학 감사 제도도 없다.(1990년대에 폐지됐다.) 국가·지역·학교 수준에서 학업 평가를 하지만, 표준화된 시험이나 평가 결과에 따른 차등 지원과 서열화는 없다. 평가 결과는 해당 학교에만 보고되며 다른 기관이 개별 학교 평가 결과를 알 수 없다.
핀란드 교육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무한 경쟁만이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며 협력과 평등으로 더 나은 교육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핀란드처럼 진보적인 교육 제도를 성취할 수 있을까? 노사정 대화로 핀란드 모델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흔한 해석은 틀렸다. 현재 핀란드 학교 제도의 틀은 1960년대 말부터 시행된 개혁의 성과다. 이 개혁으로 11세에 대학 진학 여부가 결정되고 수준별 교육을 하던 보수적 학교 교육이 폐지되고 모든 학생이 동등한 교육을 받는 종합학교제와 무상 교육이 실시됐다. 이런 변화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산업화로 교육받은 노동자를 더 많이 양성해야 했던 경제적 필요에서 이뤄졌다. 1950~73년 핀란드의 연평균 성장률은 5퍼센트에 육박했다. 이 때문에 산업 구조가 급격히 변했는데, 농업 부문에 고용된 비율이 1940년 57.4퍼센트에서 1970년 20.3퍼센트로 급감했다. 복지 제도 확대는 또한 노동계급의 전투성 덕분이기도 했다. 핀란드 자본가들이 유난히 자비로운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만 해도 고용주들은 단체협약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 성향의 노조가 계속 정치 파업을 했고, 노동조합의 전투성은 1950년대에도 이어져 자본가들을 압박했다. 1956년에는 핀란드 노동조합중앙조직SAK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3주간 총파업을 벌였다. 50만 명(핀란드 전체 인구는 지금도 5백만 명밖에 안 된다)이 참가한 이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
1960년 이전 18퍼센트이던 노동조합 조직률이 1970년에 44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노동운동 고양으로 1966년 사회민주당 등 좌파가 농민당 등과 연합해 집권하면서 오늘날 교육 제도의 틀을 만드는 개혁을 시작했다. 세계적인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영향으로 학생 운동이 부상하면서 평등·연대·민주주의 확대 요구가 고조됐다. 좌파 연립정부는 교육 개혁에 교사들의 협조를 얻으려고 상당히 많이 양보했다. 자본가들은 경제가 팽창하고 있었으므로 재정 부담에 협조했다. 이 때문에 우파가 집권했을 때도 핀란드 복지 제도는 계속 유지됐다.
24 이 때문에 핀란드에서도 신자유주의 개혁이 시도됐다. 기업들의 해고가 늘어났고, 복지 지출이 삭감됐다. 25 1999년 이후에는 학교선택권이 도입됐다. 계급 세력 관계 26 때문에 복지제도 후퇴가 급격히 진행되지는 않았지만(1990년대 중엽 IT 호황에 힘입어 경제가 회복된 것도 한몫했다), 경기 후퇴에 직면해 복지를 삭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핀란드 자본주의는 극심한 위기에 빠졌고,27 ‘노르딕 모델’ 역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아이슬란드는 나라 경제가 파산해 정권이 교체됐고, 나머지 나라들도 모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2008년 가을부터 시작한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덴마크·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아이슬란드 같은 북유럽 모델(‘노르딕 모델’)이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했지만,28 실업률과 물가가 치솟고 있다. 핀란드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핀란드 경제의 50퍼센트가 수출에 의존하는데, 세계경제의 회복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핀란드 경제는 2009년 5∼6퍼센트 정도 수축할 것으로 관측됐고, 북유럽 곳곳에서 정부들은 복지와 일자리를 공격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연금이 대폭 삭감됐고,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지난해 12월 헬싱키 공항의 지상직 노동자들이 아웃소싱에 반대해 파업을 벌였고, 그해 말에는 STX유럽의 핀란드 조선소 노동자 1천6백여 명이 대량 해고에 반대해 파업에 들어가기도 했다.자본주의가 1930년대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이한 오늘날, 노사정 합의로 복지 확대를 이룬다는 전략은 공상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장의 호황기 때 구축된 ‘핀란드 모델’을 지금 한국 땅에 쉽게 이식할 수 있는 묘책은 없는 듯하다. 한국처럼 대학이 고도로 서열화돼 있고 복지 제도가 형편없는 나라에서 현재 핀란드 수준의 교육복지 정도를 성취하려면 사실상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의 거대한 계급투쟁과 저항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만큼 높은 수준의 노동자 투쟁과 저항이 벌어지면, 단지 핀란드 교육제도를 성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분리와 제약을 뛰어넘는 훨씬 더 급진적인 실험을 시작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없고, 빈부격차와 성·인종 차별이 사라지고, 국가 간 갈등과 적대가 없을 때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인간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이것은 경쟁에 기초를 두고 모든 것을 이윤 추구에 종속시키고 온갖 부당함과 재앙을 만들어 내는 이윤 지상주의 체제를 제거할 때 가능할 것이다.
주
- <문화일보>(2009.7.20). ↩
- 김성식,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현황과 실태’, 《평준화 해체의 실상과 위기》, 2009년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5쪽. ↩
- 최민선, ‘새사연 2010 전망⑩ — ‘수평적 다양화’를 통한 수월성 교육이 대안’(2010.1.12), 5쪽. ↩
- OECD, ‘Education at a Glance’, 2006. ↩
- 김기석 외, ‘‘하향 평준화’ 현상의 실증 분석: 고입 전형 방식에 따른 학생 성적 변화의 비교,’ 《교육사회학연구》 제19권 제1호(2009). ↩
- <한겨레>(2000.11.25). ↩
- <교육희망>(2009.3.15). ↩
- 한국 학생들은 읽기 556점,과학 522점,수학 547점이었으며, 같은 분야의 OECD 국가 평균은 읽기 492점,과학 500점,수학 498점이었다. <한국경제신문>(2009.4.6). ↩
- 2007년 수학·과학 성취도 국제비교연구TIMSS에서 한국 학생들은 수학 2위, 과학 4위를 차지했으나 학습 자신감·즐거움 지수는 수학 43위, 과학 27위로 하위권을 차지했다. ‘2009년 교과부 업무보고’(2008.12.27). ↩
- Terry Wrigley, Another School Is Possible(Bookmarks Publications & Trentham Books), 2006, p. 89. ↩
- 같은 책. p. 20. ↩
- http://www.teachingexpertise.com/articles/black-william-assessment-learning-118 ↩
- 최민선, 앞의 글, 9쪽. ↩
- 조프 위티 외, 《학교, 국가 그리고 시장》, 내일을 여는 책, 2000. ↩
- Terry Wrigley, 앞의 책. p. 29. ↩
- 2005년에 OECD 평균을 넘어선 보기 드문 학교는 민족사관고로, 학급당 학생수가 14.5명이었다.(이주호 외,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 학지사, 2006, 139쪽). ↩
- OECD(2008), ‘OECD EAG table D2.2’(2006년 기준). ↩
- 권영길 의원실, 진보신당 주최 “교육혁명을 위한 토론회”(2009.6.25) 자료집, 59쪽. ↩
- 조프 위티 외, 앞의 책, 119~122쪽. ↩
- 김이경 외, ‘OECD 한국 교원정책 검토결과에 대한 비판적 분석’, 《한국교육》 32호, 한국교육개발원, 2005. ↩
- 아래에 서술한 핀란드 교육에 관한 내용은 주로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총서기획팀 엮음, 《핀란드 교육혁명》, 살림터, 2010에서 참조했다. ↩
- 전병유(편), 《미래 한국의 경제사회정책 패러다임연구(Ⅱ)》, 한국노동연구원2009, 238쪽에서 재인용. ↩
- 같은 책, 246~247쪽. ↩
- 1990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뒤 1991년에는 마이너스 7퍼센트 성장까지 곤두박질쳤다. 마이너스 성장은 1993년까지 4년 동안 지속했다. ↩
- 1990년대 초 실업률은 20퍼센트(청년 실업률은 34퍼센트)였는데, 실업률은 1990년대 중반까지 상승했다. ↩
- 핀란드 노동조합 조직률은 1990년대 이후에도 80퍼센트를 기록했다. ↩
- <한겨레>(2009.3.23). ↩
- <연합뉴스>(2009.11.6). ↩
- <연합뉴스>(2009.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