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차별, 사회주의, 국가
동구권의 여성들 *
(알바니아·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동독·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이 사회들이 등장한 이래 줄곧 논쟁거리였다. 1 최근 연구의 대부분, 특히 “국가사회주의” 사회 2 에서 여성들의 구실에 관한 연구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자코뱅》에 실린 ‘여성 공산주의자들을 빼고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멈춰라’라는 글에서 마그다 그라보프스카는 동구권에서 여성 해방이라는 목표를 위해 헌신했던 여성 정치인들이 존재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연구자들을 비판한다. 3 그라보프스카의 글은 최근에 나온 여성 관련 연구 성과들 중 하나로, 그 연구들은 옳게도 냉전적 선동을 거부하는 입장에 서 있다. 4 그러나 그런 연구 대부분에서 동구권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을 형성했던 사회적·경제적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국가사회주의” 국가 여성들의 삶은 실제로 서방 국가의 여성들보다 더 나았을까? 전반적으로 낫지 않았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나았을까? 왜 “국가사회주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이 서유럽과 그토록 비슷하게 나타났을까?
1948∼1989년에 존재했던 동구권 사회들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경제가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한 구실을 분석해야 찾을 수 있다. 즉, 국가가 여성들의 사회적 구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근대화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이 글은 네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동구권 국가들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이 국가들은 자본 축적에 맞게 운영됐고,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둘째, 가족이 노동계급 재생산의 핵심 수단이었고, 이 때문에 여성은 노동자이자 어머니로서 종속적 구실을 떠맡았다. 셋째, 동구권 지배계급이 이런 차별을 악화시켰다. 동유럽 지배계급은 민족주의와 종교 지도자들을 동원했는데, 이 때문에 소수 민족 여성들, 특히 무슬림 여성들이 특수한 형태의 차별을 겪었다. 넷째, 동유럽 여성들이 겪은 차별과 서유럽 여성들의 경험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철의 장막’ 양쪽 모두에서 가족이 한 구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5 그러면서 민족주의와 종교가 지배계급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에 어떻게 동원됐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6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태 전개에 대한 트로츠키의 고찰은 여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변화들 중 일부를 시사한다. 이는 이전 동구권 국가들에서 여성의 지위를 이해하는 데에 기준이 된다. 7 둘째 부분에서는 노동계급 재생산 과정과 가족 내 여성의 구실, 가정과 직장에서 여성의 종속적 구실이 어떻게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살펴본다. 셋째 부분은 동구권에서의 낙태·피임·섹슈얼리티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넷째 부분에서는 종교와 이슬람에 대한 볼셰비키의 본래적 접근법과 국가자본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서 무슬림 여성이 겪었던 차별을 대비할 것이다.
이 글의 첫째 부분에서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토니 클리프의 분석과 여성과 가정에 대한 레온 트로츠키의 고찰을 검토하고,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분석을 동유럽 국가들로 확장해 동유럽 여성들의 지위를 설명한다.관료적 국가자본주의
8 러시아 혁명은 모든 시민의 평등을 선언하고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오랜 차별적 법률을 폐지했으며, 이전까지 여성이 짊어지던 가사 부담을 사회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과정이 역전되며 이 성과 또한 역전됐다. 9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이자 이론가인 트로츠키는 혁명의 후퇴를 분석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은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2월 혁명을 이끌었다. 이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10월에 볼셰비키당(훗날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의 지도 하에 권력을 잡았다. 이 사건을 가능케 한 것은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 — 카를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 부른 — 이었다.지도자들은 부서진 가족이라는 껍데기를 다시 붙이도록 대중에 강요할 뿐 아니라, 엄격한 형벌로 위협하며 가정을 사회주의 승리의 신성한 중핵이라 여기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후퇴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한눈에 가늠하기 어렵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각각 서방과 소련의 관할로 양분되면서,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사회 구조가 동유럽 국가들에 이식됐다. 이 국가들은 노동자 혁명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소련 사회를 본따 만들어졌다. 이를 감안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동구권 국가들을 “기형적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한 것뿐 아니라, 트로츠키 자신이 1930년대 중반 소련을 가리켜 “변질된 노동자 국가”라고 기술한 것에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토니 클리프는 소련과 그 위성국들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한 대안적 분석을 발전시켰다.
11 그러나 실제로는, 1928년 이래로 수립된 악명 높은 ‘5개년 계획’은, 애초에는 서방을 따라잡기 위해, 이후에는 미국과의 군비 경쟁 때문에 스탈린이 추진한 것이었다. 12 소련 경제에 가해진 이런 경쟁 압력 때문에,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적 위기에 시달렸다. 소련 국가는 소수 지배계급인 소련 관료들의 수단으로 존재했으며,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미명하에 착취 관계를 그대로 유지했다.
클리프의 핵심 결론은 소련 경제가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에서 자본 축적을 향한 동력은 폐지되기는커녕, 세계적 수준에서 경쟁의 영향을 받았다. 즉, 이 사회는 개인·기업이 아닌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였다. 따라서 소련은 국가가 운영하는 하나의 거대한 국영 산업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경제는, 모든 것을 계획하는 것처럼, 개별 공장 같은 경제 단위 사이에는 내부 경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13 이들은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을 조성해 노동자들을 국가에 묶어 두고 소수 민족들을 차별할 수 있었다. 여성 차별도 계속됐는데, 전통적 가족이 노동계급 재생산 공간으로 유지됐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국가가 아래로부터의 도전을 억누르는 데에 이용되면서 벌어졌다. 14
동구권 사회들은 이 틀 안에서 소련을 모방하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사회들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던 혁명은 없었다. 동유럽에서도 국가는 자본주의적 축적을 관장했고, 노동계급에게서 잉여노동을 뽑아냈으며, “무장한 자들의 특별 기구”가 법률을 집행해 노동계급과 소수 민족들을 통제했다. 지도자들은 착취적 지배계급의 일부로서, 노동계급 자력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억압 수단으로 사용했다. 클리프가 내놓은 분석의 정확성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입증됐다. 1950년대 초반 동독과 헝가리에 경제 위기가 닥쳤다. 이 나라 정부들은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공격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위기에 대응했는데, 이는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 봉기를 촉발했다. 소련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개입했다. 이후에도 소련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과 1980년 폴란드를 휩쓴 봉기 수준의 파업 물결을 잠재우는 데에서도 핵심 구실을 했다. 소련도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시도하고, 1989년 동구권에서 대중 운동이 촉발됐다. 이는 결국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조종을 울렸다.여성 차별과 트로츠키의 유산
16 여기서 트로츠키는 세 가지 핵심을 제시한다. 첫째, 트로츠키는 가족이 여성 차별에서 근본적 구실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의 여성 관련 저술들은 간과되기 일쑤지만 사실 매우 알차다.모성에 모든 문제가 집약돼 있다. 그래서 새로운 조처, 법률, 경제적·사회적 건설 과정에서 실질적 단계 모두를 가족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즉 그 조처로 어머니의 처지가 악화될지 개선될지, 아이가 처한 조건이 개선될지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트로츠키는 사회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생산, 재생산, 사회 관계를 가능케 할 것이며, 여성과 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새롭게 형성할 것이라 주장한다.
생산력 발전은 생산력 발전 그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난 분석에서, 생산력 발전은 새로운 인간 개성을 발전시키는 데에 필요한 기반을 제공하고 … 계급 노예제에서 형성된 것보다 더 이상적이고 고결한 새 문화적 가치와 개인과 가족에 관한 새로운 태도를 창조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19 가족이 바뀌려면 심원한 역사적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셋째,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한다. “가정에서의 삶은 경제적 삶보다 더 보수적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전자가 후자보다 여전히 덜 의식적이기 때문이다.”가족을, 가정 생활의 전체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대중의 커다란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노동계급이 문화와 진보를 향한 강력한 내적 욕구를 발전시킬 때 가능하다. 쟁기질을 깊숙이 해야 무거운 흙덩어리를 갈아엎을 수 있는 법이다. 소비에트 국가에서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평등을 촉발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바로 공장에서, 노동조합에서 여성과 남성의 산업적 평등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가족 안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실질적 평등을 이루는 것은 훨씬 더 힘든 문제다. 그 전에 가정 생활 안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습관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가족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실질적 평등이 존재하기 전까지 … 사회 사업이나 심지어 정치 분야에서 양성 평등 운운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여성들이 가족을 돌보고 요리하고 바느질하는 등의 가사노동에 묶여 있는 한, 이들이 사회·정치 생활에 참여할 기회는 극도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트로츠키의 견해는 재생산을 중심에 두고 생산의 목적을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후퇴하기 전인 1920년대 중반에도 제대로 착수되지 못했다. 동유럽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여성 해방을 운운했지만 여성 해방이 진정으로 의제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구권 국가들은 노동자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노동계급 재생산을 위해 가족과 그 안에서 여성이 하는 구실에 계속 의존했다. 이 때문에 동구권 안에서 여성들은 서방 여성들과 꼭 마찬가지로 가사노동과 가정 바깥에서 이뤄지는 유급노동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썼다.
여성과 노동: 대안적 노동력 1948년 직후 동유럽에서 여성들의 노동 참여는 해방으로 가는 핵심적 단계라고 홍보됐다. 여성은 산업 성장에 필수적인 존재였고, 남성과 동등한 노동자이자 시민으로 여겨졌다. 결혼은 평등한 동반자 관계이며 개인의 선택과 애정에 따른 것이라 여겨졌다.
22 전쟁으로 인구가 많이 감소한 유럽 국가들은 노동력 늘리기라는 핵심적 문제에 직면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옛 식민지에서 오는 이주에 기댔고, 독일은 이탈리아와 터키에서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반면 코메콘 국가들은 주로 국내 노동력에 의존했는데, 농촌 남성·여성들의 도시 이주를 독려하고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지배적이던 부문에 여성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양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서 남성 노동자들이 징집돼 생긴 공백을 여성들이 채운 과정과 유사하다. 변화의 속도는 놀라웠다. 1959년 동유럽 노동력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40.9퍼센트였던 반면, 서유럽에서는 29.6퍼센트였다. 23 동독에서는 전쟁 이후 남여 인구 비율이 바로 바뀐 것이 핵심적 요인이었는데, 전쟁에서 독일 남성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동독의 문제는, 압도적으로 청년인 수백만 명이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전 서독으로 넘어가면서 더욱 악화했다. 24
1949년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 발전을 조율하기 위해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이하 코메콘]가 설립됐다. 하지만 이 기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소련 블록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운영됐다.25 하지만,
하이디 하이트링어는 동유럽에서 “여성들이 일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거의 보편적이었고 가정 바깥에서 행하는 노동이 여성들의 삶에서 중심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여성들의 자신감과 지적·사회적 문제 및 사회 문제 전반에 관한 여성의 관심에 깊은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여성의] 노동과 생활 조건을 최소한으로 재조정하는 것 이상을 성취하는 데에 실패하면서, 일하는 아버지들과 달리 대다수의 일하는 어머니들은 두 부문에서 동시에 일을 해야 했다. 하나는 가족 안에서 다른 하나는 가정 바깥에서 말이다. 이 때문에 여성의 경제 참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의도한 바와는 사뭇 다른 것이 돼 버렸다. 즉, 가정 바깥에서 하는 돈벌이를 위한 일이 가정 안에서 하는 노동에 추가된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가 운영하는 기관이 가족의 가사노동 기능을 완전히 흡수해야 한다”고 본 트로츠키의 견해와는 판이한 것이다.
노동과 젠더 효과 서유럽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으로 편입된다 해서 가정 안에서 평등해지거나 여성이 하는 노동의 성격이 바뀌거나 임금 인상과 승진의 전망이 밝아지지 않을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근원은 가족 내 여성의 구실에 있지만, 이로부터 다양한 요인들이 형성돼 여성 차별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한다. 뿌리 깊은 성차별적 태도, 서로 다른 경제 부문 사이에 그리고 부문 내에 형성된 성별 분업, 성별 임금 격차, 직장 내 성희롱, 승진을 막는 “유리 천장” 등 말이다. 여성들은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유급 노동을 가정 내 책임에 끼워 맞춘다. 여성들이 전일제로 일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일하는 여성의 40퍼센트는 시간제로 노동한다. 남성의 경우 이 비율은 13퍼센트다. 직업이 있는 어머니 10명 중 거의 3명이 육아 때문에 노동시간을 줄였는데, 직업이 있는 아버지의 경우 이 비율은 2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28 그럼에도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성별 분업은 유지됐으며, 이는 여성의 직업·임금·처우에 영향을 미쳤다. 동독은 서독보다 사회 지도층에 여성들이 더 많았지만, 가브리엘레 엥겔하르트와 다피트 마이엔라이스는 여성이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성별 임금 격차가 20퍼센트가 넘었다. 충분한 보육 서비스가 없던 것도 문제였는데, 1961년에는 여성들이 노동과 가사노동 책임을 결합할 수 있도록 시간제 노동이 허용됐다. 29
동독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남성들이 사망하자 정부가 숙련 남성 노동자들을 대신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대대적으로 기울였다. 197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20~30세 여성들의 78.2퍼센트가 전문직에서 일하거나 숙련 기술이 있었다. 여성들을 고등교육으로 끌어들이려는 특별 대책 때문에 학계에서 일자리를 얻는 여성의 숫자가 크게 늘었는데, 이는 서독보다 한 세대 빠른 것이었다.30 대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남학생은 과학 전공에, 여학생은 인문학 전공에 몰려 있었다. 31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임금 불평등은 이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1956년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6퍼센트였고 1976년에는 67퍼센트였다. 여성들은 임금이 가장 낮은 일자리에 몰려 있었고, 남성들은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 있었다. 1976년에 남성이 가계소득의 44~48퍼센트를 기여한 반면 여성은 겨우 12~21퍼센트를 기여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남성이 고위 관리직을 차지할 것이라는 가정이 일반적이었다. 32
하이트링어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여성의 젠더가 노동과 가정 생활 형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여성의 60~80퍼센트가 의료·사회복지·교육처럼 전통적으로 “여성적 경제 부문”으로 여겨지는 분야에 종사했다. 제조업에서도 여성은 식품·섬유·의류 같은 소비재 부문에서 주로 일했다.33 또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여성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 여성들을 위한 공간 조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1950년이 되면 여성은 산업 노동력의 30퍼센트를 차지하며 담배·식품·섬유·철강·광산·군수 산업에서 일했다. 34 1948년에 여성들은 출산 휴가를 90일 받았고, 출산 4개월 전과 출산 후 8개월까지 초과 근무와 야간 교대가 금지됐다. 하지만 이반 시믹은 이러한 변화가 뜻하는 문화적 전환에 대해 강력한 반발이 있었고, 실제 현실은 사뭇 달랐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은 정치·경제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1948년 이후 도입된 자주관리위원회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됐다. 1954년 자주관리위원회에서 여성 비율은 9.9퍼센트에 그쳤다. 35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출마조차 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 전임 간부의 압도 다수가 남성이었는데, 이들은 성평등을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주로 비숙련 노동에 종사했는데, 대우 받는 숙련직과 비숙련직 사이에 그리고 중공업과 경공업 사이에 상당한 임금 격차가 존재했다. 남성들이 더 자주 학습 교육 과정에 보내졌고, 작업 현장에서 성차별이 만연했다. 36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숙련 노동자를 비롯해 노동자가 부족한 상황이 1947년 수립된 5개년 계획에 영향을 미쳤는데, 여성들이 금속공학과 전기공업을 공부할 수 있도록 “기술 학교”를 설립하는 내용이 포함됐다.이중의 부담 1: 육아 많은 경우 동유럽에서 제공된 보육 서비스가 서방보다 나았는데, 이것이 일부 여성들에게 미친 차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믿을 만하고 저렴한 보육 서비스는 부부들(특히 여성들)과, 자녀가 어린 한부모 가정의 여성들이 겪는 부담을 크게 덜어 줬다. 하지만 보육 서비스는 언제나 불충분했고, 항상 질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서비스가 경제 상황에 좌우됐기 때문에 동유럽 전반을 보면 실질적인 혜택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결국 대다수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보육 서비스는 공장 건설 계획에 포함됐지만, 남성 공장 관리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경우가 흔했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대통령 요시프 티토가 스탈린과 결별한 뒤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봉쇄당했고, 이후 이미 존재하던 보육 시설조차 문을 닫았다. 동독에서 국가는 탁아소와 유치원 수요를 충족하려 줄곧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동독 국가가 제공한 보육 서비스는 영국에 견주면 인상적인 수준이긴 했다. 1962년 동독에서는 3세 미만 아동 1000명 중 오직 160명만이 탁아소와 어린이집에 다녔고, 511명은 유치원과 주간 기숙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1980년에 이르면 이런 상황은 상당히 개선됐다.
39 탁아소 운영 시간도 단축됐다. 이는 경제 위기뿐 아니라, 보육 서비스가 아동 발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국가 관료의 태도 변화와 출산율과 육아 비용 ─ 탁아소 3년에 들어가는 비용은 학교 9년에 들어가는 비용과 같았다 ─ 에 대한 우려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40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50년대에 탁아소가 빠르게 늘어났지만, 1968년 이후에는 다시 줄었다.불가리아에서 1971년 헌법은 여성에게 출산 휴가를 보장했다. 1973년부터 불가리아 여성들은 첫 아이 출산을 전후해 120일 동안 임금을 완전히 보장하는 유급 휴가를 누릴 수 있었으며, 추가로 6개월 동안 기존 일자리가 보장되는 조건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휴가를 누릴 수 있었다. 출산 휴가 기간은 여성들의 연금 계산에 포함됐다. 출산 여성들은 아이가 공립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는 만 3세가 될 때까지 무급 휴가를 쓸 수 있었다. 이후 법이 개정돼 아버지와 조부모도 아이 엄마를 대신해 육아 휴직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동유럽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보육 서비스 공급은 수요에 미치지 못했다.
이중의 부담 2: 가사 노동
41 서유럽과 꼭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여성들이 가사 노동의 대부분을 책임졌다.
서방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노동계급 재생산은 가족에 떠넘겨져 있었고, 그 부담을 짊어질 사람은 여성이라는 기대가 당연시됐다.42 처음에는 여성 평등 실현을 위한 여러 시도의 효과로 기계화, 공동 식당 및 세탁소 운영, 장보기 외 다른 일처리를 위한 지역 공동체 조직 등으로 가사 노동을 사회화하려는 과정에 자원이 일부 투입됐다. 43 세탁기, 냉장고, 진공청소기, 간편식품처럼 시간절약형 가사 물품의 보급은 경공업보다 중공업을 우선시하는 5개년 개발 계획 때문에 방해받았다. 1962~1963년에 경제 위기가 벌어져 “사회화된 가사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이 폐기됐다. 44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국가사회주의 정권 초기에 1년에 500만 시간이 가사 노동에 투여됐다. 이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전체 유급 노동시간보다 많았다.45 경제적 지위가 비교적 높았던 여성들은 청소 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했다. 애초에는 공공 식당이 빠르게 늘어났고 이 식당들은 공장이 제공하는 보조금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1963년부터 식사 비용 체계가 바뀌면서 노동자들이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정식 식사는 집에서 하는 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여성들의 부담이 급증했다. 1964~1970년에 공장직영 식당 1350개가 문을 닫았다. 전체 아동의 40~50퍼센트가 학교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말이다. 46 당시 시간에 관한 연구를 보면 가정 내 성별 분업이 극명히 드러나며, 서방 국가들에서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1959~1960년, 직장에 고용된 여성들은 매일 가사 노동에 5시간 30분을, 육아에 1시간 내지 1시간 30분을, 자신만의 시간에 1시간 40분을, 수면 및 휴식에 6시간을 썼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61년 영국 여성은 가사 노동에 평균 1시간 50분을 썼던 반면 남성은 겨우 10분을 썼다. 19개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50년 동안 진행한 가사 노동 비교 연구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지난 50년의 대부분 혹은 전체 기간에 가사 노동을 가장 많은 비율로 담당했던 여성들은, 이탈리아·스페인 여성들과 폴란드·유고슬라비아·프랑스·독일 여성들이었다.” 47
중앙 난방, 상하수도, 쇼핑 시설 등 전반적 주거 환경이 조성되면서, 이 모든 요소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뤄지는 가사 노동에 영향을 미쳤다. 가정에서 필요한 세탁의 5퍼센트만이 공공 세탁소에서 이뤄졌는데, 그나마도 농촌 지역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세탁기 보급 상황은 서방과 비슷했다.48 그러나 라이프치히대학교 시장연구소의 1965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4인 가정의 평균 주당 가사 노동 시간인 47.6시간 중 여성이 37.7시간, 남성이 5.5시간, 기타 구성원이 4.3시간을 담당했다. 49 이 같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독 정부는 학교 급식과 구내식당의 질을 높이고, 세탁기·냉장고 등 가전제품의 생산을 늘리고, 국영 지원 서비스 네트워크인 “딘스트라이스퉁스네츠”를 창설했다. 이 네트워크는 소규모 정비, 드라이 클리닝, 의류 수선과 소매상을 아울렀다. 또 어린이집, 유치원, 탁아소, 방과후 돌봄교실을 계속 신설했다. 50 그럼에도 1972년에 이뤄진 심층 연구에 따르면 결혼 가정 중 여성이 모든 가사 노동을 하는 비율이 54퍼센트였고, 34퍼센트는 여성이 거의 모든 가사 노동을 하고 남성은 아주 조금 했다. 51 이런 패턴은 동구권 전체에서 볼 수 있었다. 예컨대 유고슬라비아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육아와 가사 노동을 하리라 기대되지 않았다. 52
동독에서 1965년 제정된 가족법은 가사 노동과 양육의 책임이 남성과 여성에 모두 있으며, 부부 사이의 관계는 여성이 자신의 일과 어머니로서의 가정 생활을 결합할 수 있도록 형성돼야 한다고 명시했다.피임, 낙태, 섹스, 인구 정책
53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의사들은 1957년 낙태 합법화를 찬성했다. 이들은 낙태가 범죄화되면 가난한 여성들이 가장 크게 피해를 볼 것이고, 낙태는 흔히 피임을 위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낙태 합법화가 곧 여성이 결정권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성들은 낙태 시술을 받으려면 낙태위원회에 출석해야 했다. 1962년에는 법이 개정돼 낙태에 대한 제약이 추가됐고, 낙태위원회는 낙태 허가 건수를 제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54 당연히, 이 때문에 자가 낙태로 인한 사망이 늘었다. 55 여성 노동과 여성의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에 의존하는 정부에게는, 인구학자들이 내놓은 통계 수치들은 만만치 않은 상황으로 다가왔다. 1964년에 출산 100건 당 낙태가 44건이었고, 1969년에는 출산 건수와 낙태 건수가 동일했다. 비좁은 집, 가사 노동 부담, 경제적 어려움, 믿을 만한 피임법이 없다는 점 같은 물질적 조건 때문에, 출산 여부에 대한 여성들의 선택이 제약받았다. 1950년대에는 피임 관련 정보와 피임 자체도 제한됐다. 가임기 여성 중 6퍼센트만이 어떤 형태로든 피임을 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자궁 내 삽입식 피임 도구를 사용했다. 56 이런 이유로 일부 여성들은 자녀를 더 늘리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낙태를 이용하기도 했다. 57
여성이 합법적인 낙태 시술을 무상으로 받거나 피임을 함으로써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와, 정부의 인구 계획 태도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존재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많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일찌감치 낙태가 합법화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58 이런 물질적 유인책과 더불어, 여성이 집에서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 아이가 정서적으로 소외되고 아동 발달에도 해롭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들은 1968년 대중 저항 ‘프라하의 봄’이 패배한 이후 도입되기 시작해 1974년까지는 효과를 봤다. “후사크의 아이들”이라는 표현이 생기기도 했다. 59
출산율이 두드러지게 감소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완수하는 데에 방해가 됐다. 이에 대응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 구스타프 후사크는 일련의 임신 장려책을 시행했다. 1964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출산 휴가 기간이 연장돼, 출산 휴가 기간이 최대 2년으로, 다시 3년으로까지 늘었다. 1972년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는 자녀를 2명 이상 낳는 여성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우대 대출을 해 주고 주택 장만 혜택을 주기도 했다.60 정부는 여러 경제 정책을 펴 상황을 개선하려 하는 한편, “사회주의 가족”을 이상화하며, 아이를 한 명만 낳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61
동독도 출산율 하락 문제를 겪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여성의 태도 변화 때문이었다. 주거 환경, 가정 바깥에서의 여성 노동, 보육 서비스 부족, 도시적 생활 방식 도입, 교육 수준 상승 등이 출산율을 낮추는 요인으로 언급됐다.62 국가는 결혼 같은 영역에서 종교 기관이 하던 구실을 없애 버렸고, 남여 평등을 명시했으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이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정책들은 이혼을 수치스런 행위로 여기는 보수적 분위기가 만연한 농촌 지역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 이런 정책들은 [이혼이] 토지 소유권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도 반대를 받았다. 이혼 송사가 있을 때면 남편 측 가족들은 노동력의 일부인 자녀를 단 한 명도 빼앗기지 않으려 했고, 토지 소유권 분할을 피하려 위자료 지급도 거부했다. 63 이런 우려가 반영돼, 공산당 하급 관료들 사이에서 이혼에 대한 반대가 팽배했다. 여성들과 여성이 가정 바깥에서 하는 노동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비난받았고, 불륜을 불법화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낙태는 합법이었지만 반발을 샀다. 낙태를 한 여성들은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공개적으로 욕을 먹었고, 공산당 모임에서도 모욕당했다. 이 모든 상황에도 소농 여성들은 피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생 동안 3~4번은 낙태를 했다. 64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인구의 3분의 2가 농촌에서 일했다. 유고슬라비아 농촌은 빈곤이 극심하고 질병이 만연했으며 위생 시설이 열악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부족했고, 사람과 가축이 한 공간에서 살기 일쑤였다. 영아 사망률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가 지배적이었고,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는 샤리아의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1957년에 이에 도전하는 새 헌법이 제정됐다.65 젊은 여성들은 깔끔하고 “적절한”(즉, 얌전한) 차림새여야 했고 아침마다 머리를 빗어야 했다. 바지를 입거나 화장을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부적절한” 차림을 한 여성의 몸은 젊은 남성들에게 잠재적인 성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66 섹스는 쉬쉬하는 일이었고, “비非이성애적 행실에 관해서는 더 깊은 침묵만이 존재했다.” 67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소련과 결별한 이후 이런 금욕적 태도는 타격을 입었는데,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즐기는 생활을 담은 미국 영화가 유입된 것이 계기였다. 그런 영화들은 고된 노동과 금욕을 장려한 유고슬라비아청년단 제작 영화와 뚜렷이 대비되는 것이었다. 섹스는 결혼 생활에서만 허용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동성애는 1951년 제정된 형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젊은 여성들이 14~15살에 성생활을 시작했다. 68 결국 유고슬라비아청년단이 주최한 의사·심리학자 등 전문가들의 학술 대회에서 논문이 발표돼, 섹스에 대한 개방성을 늘리고,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하고, 피임법을 더 보급하고,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과 혼전 섹스를 할 권리를 보장하고,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남성을 교육하는 방안 등을 요구했다. 이는 1950년대를 거치며 성에 대한 태도가 완화되는 데에 일조했다. 69
섹스와 성별 역할에 관해 청년들에 권장되는 태도는 주로 금욕주의였다. 유고슬라비아청년단은 일, 건강, 청결 및 성별 역할의 철저한 구분을 강조한 프로그램을 조직했다.대동소이
70 1972년까지 성교육은 의사가 14세를 대상으로 1회 강연을 하는 수준에 불과했고, 어린이와 청년들을 위한 성교육 문헌은 턱없이 부족했다. 71 리슈코바는 1980년대에 성적 불만족이 이혼 사유로 거론되고 결혼 생활 붕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경우가 늘었다고 지적한다. 72 남여 모두 배우자와의 성 생활에 불만족을 표했다. 73 가정폭력 또한 1970년까지 이혼 사유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많은 여성들에게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74 동독은 서독보다 이혼율이 더 높았는데, 가정폭력이 사유인 경우가 많았다. 75
사회학자 카테르지나 리슈코바는 성적 관계, 여성 오르가즘의 중요성, 결혼 생활에서 섹스의 구실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 성 과학자들의 상이한 접근법을 분석했다. 리슈코바는 ‘프라하의 봄’ 패배 후 가족 단위가 다시 강조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성적 만족이 안전한 피임과 연관돼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20퍼센트가 임신을 막기 위해 섹스를 피했다.76 물론, 성적 만족을 물질적·사회적 맥락을 감안해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적 관계와 성적 만족의 정도가 나라마다 다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몇몇 동유럽 국가들이 ‘남녀가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미사여구를 내세웠던 것이 섹슈얼리티에 관한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77 리슈코바는 1950~1960년대에 성적 만족의 정도와 남여 관계에서 평등 수준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한 연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관료 계층이 여성의 성적 욕구에 개방적이었다고 기록한다. 78 이는 유고슬라비아와 판이하게 다르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보수적·전통적 담론이 지배적이던 1950년대 서방과도 대비된다.
여성의 성적 만족 문제는 앞서 열거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그림은 사실 서방 자본주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부부 관계가 토지에서 이뤄지는 집단 노동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자, 섹스는 결혼의 근간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섹스가 부부 관계를 다지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성의학이 등장했다.79 이미 1930년대부터 여가 시간을 더 많이 누리고 자립하게 된 노동계급 청년들 사이에서 성에 대한 관습이 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중 하나로, 결혼이 동반자 관계이고 부부 사이에는 성적 만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는 경향이 생겨났다. 80 이런 경향은 여성이 제2차세계대전 동안 여성이 겪은 경험 때문에 강해졌다. 돌이켜 보면, 1950년대의 금욕주의 득세는 일반적 추세를 잠시 뒤집은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81 그럼에도 여성의 성적 욕구는 1960년대 서구에서 여성해방 운동이 부상한 후에야 공적 영역에서 다뤄질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1920년대에 대량 소비가 시작된 이래 여성의 몸을 성애화하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의 이성애 커플이 서유럽의 이성애 커플보다 더 나은 성 생활을 누렸다는 주장은 복합적인 요소들을 단순화시키고, 동서방 진영의 여성 모두에 공통됐던 물질적 현실 ─ 그런 현실은 섹슈얼리티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 을 가리는 것이다.동구권의 무슬림 여성
무슬림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 등 여러 남유럽 국가자본주의 사회 모두에서 중요한 소수 집단을 형성했다. 이 나라들에서 무슬림 여성들에 대한 태도는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았는데, 국민국가가 비교적 늦은 시점인 오스만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형성됐다는 점, 제2차세계대전 이후 근대화 추진, 여기서 비롯한 기성 종교 및 소수 민족에 대한 태도 등이 그런 요소들이었다.
83 스탈린은 애초에 종교 억압을 지지했다. 하지만 억압이 실패하자 방향을 거의 완전히 바꿔서 주요 종교 축제와 관습을 통합하고 1937년부터는 러시아정교회를 제도화했다. 84 이런 접근법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국가 정책에 반영됐다.
유고슬라비아는 각기 다른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방국가로서, 종교와 언어가 서로 다른 크로아티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 민족으로 구성됐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소속국이었으면서] 마지막까지 연방을 이루고 있던 국가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특정 민족 집단이 다수를 이루지 않고,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의 무슬림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는 동질화를 추구하는 민족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인구의 87퍼센트가 불가리아인과 정교회 신자였던 불가리아와도 다른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종교 정책이 비슷했는데, 모두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27년에 스탈린은 민족주의와 종교에 관한 볼셰비키의 접근법과 근본에서 단절하며, 러시아 국수주의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국가에 묶어 놓았다.85 1922년 공식 수립된 소비에트 연방은 비非종교 국가였지만 무신론자여야만 볼셰비키당에 입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레닌은 반발을 피하기 위해 종교에 대한 모든 선전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6
마르크스는 종교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고통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활 조건이 바뀌면 종교적 믿음이 허물어질 것이라 내다봤다.87 역사가 더글라스 노스롭에 따르면, “1923년 중앙아시아 [공산]당 지도부는 우즈베크 족 여성들에게 베일을 벗을 것을 요구한 이들을 가리켜 ‘좌파적 일탈’이라며 나무랐다.” 특히, “1925년 8월까지도 … 전全우즈베크 제노텔 대회의 기조 연설자는, 베일을 벗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비非볼셰비키적인 행위라 묘사했”으며, “여성의 경제적·물질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 ‘여성 문제’ 해결로 가는 근본적 길”이라고 주장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종교적 열망과 민족적 열망이 결합됐다. 이 때문에 러시아 국수주의를 타파하고 종교를 관용하는 것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이네사 아르망이 이끌던 제노텔(공산당 여성부)의 초기 활동에서 핵심이었다. 1920년 바쿠에서 열린 제1차 동방민족대회에서 대의원 카베르 샤바노바-카레바는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 문제는 “우선순위가 가장 낮다”고 주장했다.노스롭은 볼셰비키가 자디드 운동에도 반대했다고 기록한다. 자디드 운동은 중앙아시아 이슬람의 일파이자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적 조류로, 스스로를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편이라 여겼다. 자디드 운동은 이슬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재정립했다.
자디드 운동 활동가들은 중앙아시아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내놓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쇠퇴”하고 “퇴보”하는 이유가 “순수” 이슬람이 인도하는 길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라 여겼다. … 이 반反봉건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교육 분야에서 종교를 제거하길 바랐고, 여성이 사회에서 더 적극적인 구실을 하길 원했다.이들의 중간계급적 성격 때문에 자디드 운동은 “부르카를 집어던지고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여성 해방이라 여겼다. 반면 볼셰비키는 “여성의 완전한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촉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90 이 때문에 파란지-차츠본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의 지배에 맞선 저항의 시각적 상징이 됐다. 파란지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우즈베키스탄의 풍습이 중세적이고 교양 없다고 폄하됐다. [우즈베키스탄 유목 텐트인] 유르트 안에서 아픈 이들과 건강한 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불결하다고 비난받았다. 조혼이 성병의 원인으로 지목됐고, 아기 엄마들은 아기를 전통 양식의 아기 침대에 오랫동안 방치한다며 힐난당했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 소농에도 들어맞았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풍습에 대한 공격의 본질이 바로 인종차별이자 이슬람 혐오였음을 봐야 한다. 안타깝게도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서도 같은 접근법이 도입됐다.
스탈린은 이 모든 것을 “브이뜨”(지역 풍습)를 탄압하는 “후줌”(공격) 정책으로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후줌은 1927년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처음 공표됐다. 후줌의 형태는 공화국마다 달랐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 후줌은 무슬림 여성들이 긴 베일인 파란지-차츠본을 공공 장소에서 입지 못하게 하는 데에 주력했다.유고슬라비아
91 제2차세계대전 당시 티토가 이끈 게릴라 운동으로부터 대중적 여성 단체인 반파시즘여성전선AFŽ이 생겨났다. 이들은 농촌 지역에 사는 무슬림 여성들의 전통과 충돌해 강요된 “해방”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유고슬라비아 무슬림들은 오스만 제국 시절에 코소보, 세르비아 남부, 보스니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기존 무슬림 지도부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독일 점령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고, 근대화 이론가 이브라힘 페이치가 이끄는 신생 조직 무슬림최고위원회GOM로 대체됐다. 무슬림최고위원회의 급진적 주장은 소비에트 연방 내 자디드 운동의 약점 일부를 공유했고, 무슬림 다수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신생 국가자본주의 정부를 지지했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지지하는 것을 여성들의 베일을 벗기는 캠페인과 연결시켰다.92 페이치는 이 조처를 지지했지만, 페이치의 영향력은 한계가 있었다. 많은 가정에서 여자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자, 반파시즘여성전선이 무슬림 여성에 대한 교육을 떠맡았다. 93 무슬림 여성들은 농촌 지역에서 가장 후진적인 부위로 여겨졌는데, “무슬림 사람들의 전통이 이질적이고, 세월이 가도 변치 않으며, ‘열등’하고 ‘오리엔탈적’인 오스만 제국과 결부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94 조혼, 납치혼, 일부다처제, 매매혼 같은 관습들은 모든 농촌 공동체에 공통된 특징이었는데도, 죄다 농촌 여성들이 “무슬림” 전통을 따른 탓으로 여겨졌다. 95 실제로는 당시 많은 기독교 농민 여성들이 머리수건을 썼는데도 베일을 두른 여성들은 모두 무슬림으로 치부됐다. 96 베일 착용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반파시즘여성전선은 이를 “후진적 아시아 부족의 중세적인 인습”이며, [여성들의] 사회 생활과 노동을 가로막는 물리적 장애물이라고 여겼다. 이는 그들이 무슬림 여성을 수동적 피해자로 여김을 극명히 보여 준다.
세속주의적 법률이 도입돼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샤리아 법원의 사법권이 박탈됐고, 모든 아동이 남녀공학에서 초등 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화됐다. 이슬람 교육 기관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 위치한 마드라사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폐쇄됐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후줌이 실시된 지 20년이 지난 1947년, 반파시즘여성전선은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보스니아·마케도니아·코소보에서 베일 벗기 캠페인을 벌이고 여성들이 모여 베일을 벗어던지는 대규모 행사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이 활동가들이 떠난 후 많은 여성들이 다시 머리를 가렸다. 1952년 마케도니아에서도 여성 5만 명이 마찬가지 행동을 했다. 1950년 보스니아에서는 베일 착용을 금지하고 착용자를 벌금형 등으로 처벌하는 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여성 한 명이 포함된 특별반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색출했다. 이들은 의학을 빌어 베일이 비위생적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는데, 의료 캠페인임을 내세워 가정집에 쳐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공무원들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반파시즘여성전선은 베일 벗기기 캠페인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점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슬림 여성들은 반파시즘여성전선을 피해 다녔고, 공공장소에 나가는 것조차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반응을 두고 반파시즘여성전선은 무슬림 남성들을 탓했는데, 충성심을 입증하라는 사회적 압력이 무슬림 남성에게 뜻하는 바는 “자신의” 여성들이 베일을 벗도록 압박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지방의 이슬람 율법학자들도 비난받았다. 무슬림 여성들 자신의 견해는 완전히 간과됐다.불가리아
98 뿐만 아니라 이들은 모종의 민족적 차별도 겪었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불가리아 민족주의에 의해 소외된 언어·민족 집단에 속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 무슬림 여성들도 성별과 종교에 따른 차별에 시달렸다.99 중요한 소수자 집단인 로마인들 중에도 무슬림이 소수 있었는데, 그런 무슬림들 중 다수는 터키어를 사용했다.
불가리아 독립 국가는 1878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며 처음 건국됐다. 불가리아인 압도 다수는 불가리아정교회 소속 기독교인이었고 무슬림은 약 10분의 1에 불과했다. 불가리아 무슬림 다수는 터키어를 썼다. 그러나 “포막” 또는 “불가리아 무슬림”으로 알려진 소수는 불가리아 토착 언어를 사용했고 대개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 인근 로도페 산맥에 모여 살았다.100 불가리아정교회는 국가의 재정 지원에 의존했고, 아니나 다를까 선거에서 여당 불가리아조국전선 후보들을 지지했다. 101 불가리아 정부는 1920~1930년대에 불가리아 무슬림 사이에서 발전한 자유주의 운동의 지지도 얻었는데, 이 운동은 중앙아시아 자디드 운동과 유사했다. “포막” 중에서도 소수 집단인 로디나родина(“조국”) 운동은 무슬림 해방을 지지하면서도 불가리아 국가에 충성하는 입장이었다. “터키계 무슬림들” 중에서도 근대화를 원하는 터키계 청년들과 [터키 세속주의인] 케말주의자들 역시 소수였다. 102 이 경향들은 무슬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베일 벗기기에 찬성했고, 무슬림 전통에 대한 정부의 공격에 이따금 일조하기도 했다. 103
불가리아 민족주의가 성장하며 단일 언어 사용과 기독교 신앙을 강조함에 따라, 무슬림은 열악한 처지로 내몰렸다. 이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던 불가리아인민공화국 시기에도 지속됐다. 1949년 2월 공산당 총리였던 바실 콜라로프는 이렇게 천명했다. “불가리아정교회는 불가리아인의 전통 교회이며 … 형태·본질·영성 면에서 인민민주주의적 교회다.”104 신생 공산당 정부의 외무 담당자였던 블라디미르 폽토모프는 이 점을 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애초부터 불가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만 제국 당시 이슬람으로 개종한 슬라브인들과 외부자라 치부된 “터키” 출신 무슬림들을 구분했다.우리 남부 슬라브인들에게는 역사적 과업이 있다. 바로 유럽에서 터키인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유럽이 아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왔다. 다시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106 이로 인해 “진행되고 있던 민족 혁명의 동질화 ‘성과’가 중단됐다”. 107
터키계 무슬림들을 터키로 추방하는 일은 1930년대 위기 시기에 시작돼 공산당 집권 시절에도 거듭됐다. 이 과정을 일시적으로 멈췄던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불가리아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처벌의 일종이자 충성심 테스트의 일환으로, 소련 정부는 불가리아에서 소수 언어 사용자 집단, 소수 민족-종교 집단의 권리를 광범하게 보장하는 체계를 부과했다”.108 1958~1960년 중국의 대약진 운동에 대응해 추진된 불가리아의 경제 도약 운동으로 근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109 무슬림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외관이 사라진 정도로 무슬림 거주 지역의 발전 수준을 가늠했다. 무슬림이 돼지를 길러야 했고, 무슬림 여성들이 금요일에도 양돈장에서 일해야 했다. 110 소련의 충성스런 동맹 지위를 획득한 “1970년대 들어 소련 지도자들은 터키어 교육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묵인해 줬다”. 111 1974년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 및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점점 더 터키계 무슬림들은 위험한 “내부의 적”으로 여겨졌다.
1950~1952년 민족주의 광풍은 터키로의 “자율적” 이민이라는 형태로 재개됐다. 무슬림 약 14만 명이 불가리아를 떠났고, 그 때문에 집산화에 사용될 광활한 땅이 생겼다.112 1970~1974년에는 개명 캠페인이 벌어졌다. 이런 정책들을 집행하기 위해 불가리아 국가는 여러 조처를 취했는데, 개중에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도 있었다. 113 제2차 “부활” 캠페인 때는 강제력이 더 많이 동원됐는데, 당시 대통령인 토도르 지프코프는 “이제 불가리아에 터키인은 없다”고 발표했다. 114 경찰과 탱크가 마을을 포위하고, 도로를 봉쇄하고, 전화선을 끊어버렸다. 사람들을 마을 광장으로 끌어냈다. 도시에서는 직장이나 공공기관 건물들의 이름을 바꿨다. 불가리아식 이름이 없는 터키계 사람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슬람 법률 최고전문가인 네딤 겐드제프, 터키어 사용 세속주의 터키계 사람들 중 일부, 월급 인상을 약속받은 소수 무슬림 공무원들은 이런 과정을 발 벗고 지지했다. 115 당연히 대규모 저항이 적극적·소극적 방식으로 일어났고, 수천 명이 구속·수감됐다. 1989년 5월에 지프코프가 터키인들은 터키로 떠나라며 “우리가 무슬림 20만 명을 제거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키프로스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불가리아 내 터키계 거주 지역에서 대중 시위가 분출했다. 116
추방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무슬림을 “동화”시키려는 두 번의 대규모 시도가 있었다. 1960~1970년대에는 불가리아 무슬림들이 그 대상이었고, 1980년대에는 터키계 무슬림들이 대상이 됐다. 이 프로젝트는 “부활 과정”으로 불렸다. 무슬림 전통 의상, 특히 페즈[이슬람 국가에서 남성들이 쓰는 빨간 모자]와 여성들이 입는 베일과 샬바리(여성 농민들이 입는 바지)를 금하고, 공식 문서와 묘비에 터키식·아랍식 이름 대신 불가리아식 이름을 쓰도록 강제하는 것 등이 그 일환이었다.117 애초에 불가리아공산당은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무슬림 여성 당원들의 지지를 확보할 생각이었지만, 불가리아인민여성연맹 지도부에는 무슬림 여성 당원이 한 명도 없었다. 불가리아인민여성연맹의 주요 목표는 여성 평등권을 실현하고, 무슬림 여성들을 불가리아 정치 재건 과정에 끌어들이고, 터키와 그리스 (둘 모두 나토 회원국이다) 사이의 불안정한 국경과 인접한 불가리아 영토에 서방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방파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118
무슬림에 대한 이런 적대는 불가리아 근대화 와중에 무슬림 여성 “해방” 캠페인이 등장한 맥락이 됐다. 1944년에 여성 단체들이 모조리 폐지되고 불가리아인민여성연맹BNZS으로 대체됐는데, 이 단체는 공산당의 여성 정책을 집행하는 구실을 했다.119 어린이날, 여성의 날, 산파의 날을 비롯한 국경일에 여성들을 참가시키는 대규모 행사가 조직됐다.
1940~1950년대 내내 역점 사업은 문맹 퇴치와 교육이었다. 교사들을 산골 마을로 보내 개인 소유 주택에서 교육을 하게 했다. 이 교사들의 태도인즉,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사는지, 옷을 어떻게 입는지, 무엇을 먹을지, 집을 어떻게 정리할지,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지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가정생활 기술 교육 과정은 인기가 많았다.120 정부는 무슬림 동화 정책을 충심으로 지지하는 무슬림 전문직 계층을 형성하고자 했고 일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대다수 무슬림 여성들은 저임금·미숙련 노동에 종사했고 농업·임업 부문에 종사하며 각 부문 노동력의 75퍼센트와 80퍼센트를 차지했다. 121
1950년대 후반부터는 소도시 등지에서 특별 캠페인을 벌여, 45일 동안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머물게 하는 프로그램에 무슬림 여성들을 모집했다. 이 프로그램의 효과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에서는, 베일 착용이 금지됐고 학생들은 감독 없이 학교를 떠날 수 없었다. 학생들은 ‘불가리아 무슬림의 기원’을 배워야 했고, 불가리아 전통 패턴을 수놓는 방법을 익히고 불가리아 전통 노래를 불렀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 프로그램 덕에 산골에 살던 젊은 여성들이 영화관과 대중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공장, 개척지 주택, 유치원과 병원, 유적지,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로 견학을 갈 수 있었다. 프로그램 참가자 일부는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의사·수의사·치과의사·농경제학자·교사가 됐다.정부는 시골에서 사느냐 새로운 경험과 기회를 얻느냐로 나뉜 이 세대의 “충성심”을 고취하는 데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1971년에 이 프로그램의 1기 졸업생인 간호사들은 “개명” 캠페인이 한창이던 시기에 고향 마을로 파견됐다. 그들은 마을 광장에 늘어선 줄 맨 앞에 서서 비非터키어 이름을 받아야 했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교사·의사 등은 문서에 새로운 이름으로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는데, 이를 거부하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반항은 또한 반역자나 외국 첩자 취급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개명은 전통적인 머리 스카프와 샬바리를 벗기는 캠페인과 동시에 추진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동안에는 무슬림 복장을 한 사람들의 상점·대중교통·의료기관 이용이 제한됐다. 어떤 사람들은 무슬림으로 살기 위해 이름도 복장도 두 가지인 이중의 삶을 살았다. 새로운 형태의 의복을 고안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운동복이나 바지 뒤에 밴드를 두르는 식이었다. 무슬림으로 살기 위해 공적 생활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결론
이 글은 동유럽 여성들의 삶이 ─ 서방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 경쟁적 축적에 종속된 생산의 필요와 가족 내 구실에 따라 규정됐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에서 무슬림 여성들은 이슬람 혐오로 인한 차별에도 시달렸다. 이런 압력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여성 차별, 성적 억압, 이슬람 혐오를 만들어 내는 주체는 동일했다.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진정한 여성 해방은 실현되지 않았다. 국가자본주의가 붕괴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체제 내 개혁, 상층부 교체, 국가의 재원 통제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것은 때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사실 가끔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1989년 이전 동유럽의 삶에 더 나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은 영국에서 1945년 노동당 정부 시절 및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복지 국가 시절, 즉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기대를 거는 것이다. 둘 모두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개혁이란 언제든 다시 뺏길 수 있다.
트로츠키가 주장하듯, 진정한 여성 해방은 사회를 완전히 재조직할 때만 가능하다. 생산의 목적이 바뀌어야 할 것이며, 그 변화의 핵심에는 재생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도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인데, 그 일환으로 민족주의와 일체의 인종차별도 종식시켜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만 가능하다.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들이 인간 조건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함께 참가하는 혁명 말이다. 한 세기 전, 폴란드 출신의 혁명적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뷔페에서 따뜻한 소시지와 차가운 소시지 중 하나를 고르듯 역사의 뷔페에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역사 발전의 서로 다른 방법이 아니다.” 룩셈부르크는 뒤이어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정치 권력 장악과 사회 혁명을 대체하거나 대비시켜 입법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같은 목표에 이르는 더 평화롭고 차분하고 느린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표에 이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우리는 체제를 완전히 바꾼다는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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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cGregor, Sheila 2021, Sexism, socialism and the state: women in the Eastern Bloc, International Socialism 170, (Posted on 15th April). 실라 맥그리거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고, 현재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위원이다.
↩
- 많은 동지들이 이 글의 초안을 읽고 사려 깊은 조언을 해 줘 글의 상당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조셉 추나라, 케이트 데. 이비슨, 자키 프리먼, 가레스 젠킨스, 로지 뉘닝, 커밀라 로일, 토마시 텡글리-에반스에게 감사한다. 물론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
- “국가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여러 스펙트럼의 사회 체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스웨덴 같은 선진적 복지 국가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모델에서부터 동구권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가 이 용어에 포괄된다. 그러므로 매우 느슨한 정식화이며,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일환으로 노동계급의 국가 통제’를 뜻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노동자 국가” 개념과는 다른 말이다. ↩
- Grabowska 2020. ↩
- Ghodsee 2014 and 2018, Ghodsee and Lišková 2016, Lišková 2018, Neuburger 2004, Simic 2018을 보라.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 여성을 분석한 것은 Heitlinger, 1979를 보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관점에서 동독 사회를 분석한 것은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를 보라. ↩
- Cliff 1988. 제4인터내셔널의 공식 지부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IMG 지지자가 상당히 많던 시기에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회원이었다면, 내가 이 글에서 전개할 가족과 여성 차별에 관한 주장을 어디선가 본 듯할 것이다. 하지만 Gluckstein 1952, Harman 1974 또는 Harman 1988에는 이 내용들이 담겨 있지 않다. 클리프의 《스탈린의 유럽 위성국가》가 그의 본명인 이가엘 글럭스틴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점을 주의하라. ↩
- 클리프와 하먼 모두 동구권의 민족주의와 종교에 관해 논했다. Gluckstein 1952, Harman 1974, Harman 1988을 보라. 그러나 클리프와 하먼 모두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이슬람과 무슬림 인구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 글에서 나는 관련 분석을 다룰 것이다. ↩
- Trotsky, 1970 and Trotsky, 1972a. ↩
- Marx 1867. ↩
- 스탈린이 1917년 유산을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관한 완전한 설명은 Harman 1967을 참조하라. ↩
- Trotsky 1972a, pp151-152. ↩
- 그럼에도 소련에는 임금·주택 등을 둘러싼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여전히 존재했다. 1931년 4월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스탈린의 연설을 참조하라 — Stalin 1953, pp454-458. ↩
- 1931년에 스탈린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선진국에 50년, 아니 100년 뒤처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10년 안에 좁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 Stalin 1953, p458. ↩
- [동구권 지배자들이] 러시아 혁명의 전통을 왜곡하는 것은, 서방 지배자들이 억압적 조처를 민주주의·평등·자유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였다. ↩
-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과 윈스턴 처칠은 유럽 분할 계획을 합의했다. 1948년에는 공산당이 동구권 국가들을 접수했다. 이후 각국 공산당들은 소련식 5개년 계획을 도입하고 산업 생산을 소련의 필요에 맞췄다. 변화는 기존 국가 체계를 이용해 위로부터 이뤄졌고, 이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수사가 동원됐다. 소련 정부에 발탁돼 훈련받고 소련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동유럽 각국 공산당을 이끌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런 패턴의 부분적 예외였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스탈린주의화 과정을 겪었지만, 요시프 티토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반反파시즘 유격 투쟁에서 지도적 구실을 한 덕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지 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티토는 이를 이용해 대통령이 됐다. ↩
- 더 총체적인 분석은, 토니 클리프의 《러시아 국가자본주의》 1988년판에 실린 하먼의 후기를 참조하라. https://www.marxists.org/archive/cliff/works/1955/statecap/postscript.htm ↩
- 트로츠키는 1936년 저작 《배반당한 혁명》에서 7장 “가족, 청년, 문화”를 여성이 겪은 후퇴를 다루는 데에 할애해, 혁명의 배반이 미친 영향을 생생히 보여 준다. 클리프는 소련에 관해 분석하며 가족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계급투쟁과 여성해방》 9장에서 이를 다뤘다. 트로츠키의 기여가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역사가가 있는데 바로 폴 긴스버그다 — Ginsborg 2014를 보라. ↩
- Trotsky 1970, p45. ↩
- Trotsky 1970, p42. ↩
- Trotsky 1970, p20. ↩
- Trotsky 1970, p20. ↩
- Lišková 2018, pp5, 34, 51, 68, 76-77. ↩
- 예컨대 체코슬로바키아는 자본재 공급자가 돼, 석탄 채굴, 금속공학, 중공업 분야를 확장했다. 이 때문에 주택, 간편식품, 현대 가전 등 소비재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Heitlinger 1979, p138. ↩
- Ghodsee and Mead 2018, pp113-114.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
- Heitlinger 1979, p19. ↩
- Heitlinger 1979, p19. ↩
-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2019. ↩
- Engelhardt und Maienreis 2015, p172.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174. ↩
- Heitlinger 1979, p148. ↩
- Heitlinger 1979, p151. ↩
- Heitlinger 1979, p60. ↩
- Simic 2018, p95. ↩
- Simic 2018, p96. ↩
- Simic 2018, p50. 티토가 스탈린과 결별한 이후, 노동자들의 위원회 선출 과정 등에서 공장 간 경쟁이 도입됐다. 이 위원회들은 회사를 이끌 경영이사회를 지명하는 과정에서 서로 경쟁을 했다 — Harman, 1974를 보라, pp236-239. ↩
- Simic 2018, pp103-106. ↩
- Simic 2018, p101.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185. 기숙학교는 고아, 한부모 가정 아동, 교대 노동자들에게 가정과 같은 구실을 했다. 이 학교들은 의료진의 감독하에 운영됐다. ↩
- Heitlinger 1979, 16장과 Lišková 2018, 4장. ↩
- 대규모 탁아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기들을 위한 소규모 탁아소도 존재했다. ↩
- Heitlinger 1979, pp136-137과 Lišková 2018, p70을 보라. ↩
- Heitlinger 1979, p139. ↩
- Lišková 2018, p70. ↩
- Heitlinger 1979, p139. ↩
- Heitlinger 1979, p141. ↩
- Heitlinger 1979, p143. ↩
- Altintas and Sullivan 2016.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66.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74. ↩
- 방과후 돌봄교실(“슐호르테”)은 적절한 자격을 갖춘 성인들의 감독하에 아이들이 숙제를 끝내고 집에 갈 때까지 놀 수 있도록 했다.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175. ↩
- Simic, 2018, pp101-110. ↩
-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0년에 유럽 국가들 중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하지만 1936년 스탈린 체제하에서 낙태금지법이 새로 제정됐다. 1955년 소련에서 낙태가 다시 합법화됐고, 1956년에는 불가리아·폴란드·헝가리에서, 1957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72년에 동독에서 낙태가 합법화됐다. ↩
- Heitlinger, 1979, pp186-187. ↩
- Lišková, 2018, pp116-117. ↩
- Heitlinger, 1979, p184-185. ↩
- Heitlinger, 1979, p185. ↩
- 조세 혜택은 그 효과가 모순적이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세금 감면이 있었지만, 감세 혜택은 자녀의 수가 늘수록 줄었다.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 혜택이 더 컸다. ↩
- 소련은 1968년 8월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뒤 알렉산드르 둡체크를 제거하고 후사크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세웠다.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176.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178. ↩
-
Simic, 2018, p66. 새 헌법은 1936년 소련 헌법에 바탕을 뒀는데, 가족 내 여성
Simic, 2018, p66. 새 헌법은 1936년 소련 헌법에 바탕을 뒀는데, 가족 내 여성의 구실에 관한 규정 등 부정적 요소들을 그대로 따왔다. ↩ - Simic 2018, pp66-69. ↩
- Simic 2018, pp73-75. ↩
- 유고슬라비아청년단은 15세 이상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이었다. 7~15세 아동을 위한 조직은 유고슬라비아선구자단이었다. ↩
- Simic 2018, pp180-188. ↩
- Simic 2018, p189. ↩
- Simic 2018, pp190-196. ↩
- Simic 2018, p203. ↩
- Lišková 2018, p111. 이 연구는 국가인구위원회가 한 것이었다. ↩
- Heitlinger 1979, pp184-185. ↩
- 1980년대 이전에 주된 이혼 사유는 주거 환경, 친인척과의 공동 거주, 병역 복무, 가정 바깥에서 이뤄지는 여성 노동이었다 — Lišková 2018, pp.195-196. ↩
- Lišková 2018, pp200-203. 성 생활 불만족의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달랐는데, 여성은 불만족이 점차 커진다고 말했다. ↩
- Lišková 2018, pp190-192. ↩
- Engelhardt and Maienreis 2015, p182. ↩
- McGregor 1989. ↩
- Lišková 2018, pp35-48. ↩
- Lišková 2018, pp122-123. ↩
- McGregor 1989. ↩
- 스티브 험프리스는 영국성연구에서 얻은 정보로 이를 뒷받침했는데, 어느 해의 조사를 차용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 Humphries 1991, 7장. ↩
- Humphries, 1991, p107. 자난 가네시는 리틀 리처드에 관한 글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 Ganesh 2020. ↩
- Ghodsee 2018을 보라. ↩
- Crouch 2006. ↩
- Gluckstein 1952, 9장을 보라. ↩
-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서문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
- 실제로 몇몇 기독교 교파는 혁명 정부하에서 번창했다. 1927년이 되면 복음주의 개신교 운동은 1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내전 당시 종교적 평화주의자들이 군복무 대신 의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 Crouch 2006. ↩
- Northrop 2004, p80. ↩
- Crouch 2006. ↩
- Northrop 2004, p81. 그러나 모두가 이런 접근법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이는 볼셰비키 내 쟁투로 이어졌다고 크라우치는 지적한다 — Crouch 2006. ↩
- 당시 우즈베키스탄은 신생 공화국으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민족 의식이 고양 됐다. 우즈베키스탄 민족주의의 성장과 신생 공화국에 대한 볼셰비키의 접근법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자세한 토론이 궁금하다면 Crouch 2006을 보라. 파란지와, 그와 함께 입는 차츠본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Northrop 2004을 참고하라. ↩
- 이 정보는 Omerika 2014에서 가져왔다. ↩
-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이와 아주 다르게 접근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사법 체계와 샤리아를 따르는 사법 체계가 공존하도록 허용했으나, 샤리아 법원이 내릴 수 있는 처벌의 종류에 제한을 뒀다 — Crouch 2006. ↩
- Simic 2018, p164. 교육은 육아와 수공예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심지어 이 교육에서조차 장벽이 있었는데,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각기 사용하는 언어로 교육 자료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Simic 2018, p150. ↩
- 매매혼 때 신랑 가족이 내는 ‘신부 값’은 일종의 지참금으로, 신부가 신부 측 가족을 떠나면서 생기는 노동력 공백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농민 사회의 경제적 기본 단위라는 여성의 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
- Simic 2018, pp156-157. ↩
- Simic 2018, pp171-173에서 인용. ↩
- 불가리아 내 무슬림의 역사는 지면이 허락하는 선에서 서술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더 긴 설명을 원한다면 Neuburger, 2004를 참고하시오. ↩
- “포막”이라는 표현은 널리 쓰이지만 맥락에 따라 인종차별적 함의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따옴표를 사용했다. ↩
- Gluckstein 1952, p213. ↩
- Gluckstein 1952, p212. ↩
- 터키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대부분은 대개 14~15세기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 지배 시절 정착한 터키계 사람들의 후손이다. ↩
- Neuburger 2004, p12. ↩
- 1970년대에 불가리아과학아카데미 산하 특별위원회가 터키계 무슬림들을 동화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순수 불가리아 농민 전통을 골라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 Neuburger 2004, pp73-74를 보라. ↩
- Neuburger 2004, p186. ↩
- 불가리아 정부는 1941년부터 히틀러를 지지했으나, 1944년 소련 군대가 도착한 후 입장을 바꿨다 — Kamusella 2019를 보라. ↩
- Kamusella 2019. 공산 국가 불가리아는 터키를 제외하면 터키어 문학과 출판물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됐다. 1959~1972년에 터키어로 된 책 약 120종과, 그만큼 많은 종류의 교재가 출판됐다. ↩
- Neuburger 2004, p67. ↩
- 릴리아나 브리스비에 따르면, 불가리아 정부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이 자신들도 겪던 투자 자금 부족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 Brisby 1960, p81. ↩
- Neuburger 2004, pp68-70. ↩
- Kamusella 2019. ↩
- 격자형 창문도 “후진적인” 오스만 제국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1960년대에는 농촌 주택에 테이블·의자·침대가 도입됐다 — Neuburger 2004, p132. ↩
- Neuburger 2004, pp74-75. ↩
- Neuburger 2004, p77. ↩
- Neuburger 2004, pp77-78. ↩
- Neuburger 2004, p82. 1989년 터키계 사람들 35만 명이 국경을 건너 터키로 갔다. 많은 불가리아 지식인들이 “부활” 과정의 폐지를 요구했고, 오늘날 불가리아 의회는 이 사건을 인종 청소 사례로 인정하고 있다. ↩
- 1950년에 불가리아인민여성연맹은 조국전선 전국위원회 산하 여성·소수민족 담당 부서로 대체됐다 — Nazarska 2009. ↩
- Nazarska, 2009. ↩
- Muratova 2013, p132. ↩
- Muratova 2013, pp135-137. 젊은 무슬림 여성들이 자격증을 많이 따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간호사 양성을 위한 특별 수업을 개설하는 등 인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 Muratova, 2013, p144. ↩
- Luxemburg, Rosa 1989, chapter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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