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의 삶과 현실을 알아보기 *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품에 안았는데 아버지가 “너 버는 것도 없고 애한테 젖 먹이면 너마저 영양실조 걸린다. 너 없으면 가족들 다 죽는다. 아이를 하나 죽이는 게 낫지 다 죽겠나?” 하는 거에요. … 아이를 굶어 죽이는 게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아이가 3일 울었어요. 그 다음에 울지도 못하고 결국 말려 죽였단 말입니다.
2003년에 탈북한 한 탈북민의 사연이다. 그녀는 자식을 굶겨 죽인 죄책감 때문에 곧 중국으로 탈북했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북한 주민이 굶어 죽었고, 이때부터 탈북이 늘었다. 굶주림은 여전히 주된 탈북 동기 중 하나다. 《2020 북한이탈주민 정착실태조사》(남북하나재단)를 보면, 탈북 동기를 묻는 질문에 ‘식량이 부족해서’라는 응답이 22.8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그런데 탈북민 다수는 목숨을 걸고 넘어 온 남한에서도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 탈북민 모자 아사 사건이다. 2019년 7월 31일 서울시 관악구의 한 임대 아파트에서 탈북민 어머니와 6살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한 지 두 달이나 흐른 뒤였다. 모자는 극심한 빈곤과 굶주림에 고통받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시신이 매우 마른 상태였고 집 안에 먹을 것이라고는 고춧가루뿐이었다고 발표했다. 13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의 월세가 9만 원이었는데, 한 달 생활비는 양육 수당 10만 원이 전부였다.
이처럼 큰 고통을 겪는 탈북민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다. 우선 《조난자들》은 탈북민이 직접 쓴 생생하고도 처절한 남한 사회 생존기다. 저자 주승현은 비무장지대에서 북측 심리전 방송요원으로 복무하다 스물두 살이던 2002년 휴전선을 넘어 탈북했다. 이후 10년 동안 대학과 직장을 힘들게 오가며 공부한 끝에 통일학 교수가 됐다. 《탈북 그 후, 어떤 코리안》은 남한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차별을 견디다 못해 ‘탈남’한 탈북민들을 밀착 취재해 쓴 책이다. 2012년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겼다. 《북조선 환향녀》는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 여성 100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탈북민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 변화 한국전쟁 이후 1990년까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은 607명이었다. 이들은 ‘귀순자’라고 불렸고, 후한 정착금과 복리후생, 안정적인 직업까지 보장받으며 반공 안보 선전에 이용됐다.
4 남한에 들어오는 탈북민 수는 2002년 1000명을 넘었고, 2009년 2914명으로 정점을 기록했다. 이후 감소하는 추세지만, 그래도 매해 1000명 넘게 입국하고 있다.(지난해에는 229명으로 급감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봉쇄되는 등 국경 통제가 강화된 탓인 듯하다.) 2010년 이전까지는 주로 생존 자체를 위해 탈북했다면, 최근에는 더 살기 좋은 사회에서 살겠다는 의지로 한국에 입국하는 이민형·목적형 탈북민이 늘어나는 추세다. 5 2020년 기준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 3000명을 넘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이 끝나고 북한의 경제난이 극심해지자 탈북민이 증가했다.탈북민 수가 늘어나자 이들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다. 탈북민 수가 늘면서 생겨난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중국·북한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 정부들이 대북 화해 정책을 펼 때도 탈북민은 소외됐다.
우선 명칭부터 귀순자에서 북한이탈주민으로 바뀌었다. 노무현 정부는 “위장·기획 탈북의 부작용 예방” 운운하며 탈북민 정착지원금을 3분의 2 수준으로 삭감했다. 그리고 탈북 브로커 단속과 처벌을 강화해 탈북민들의 한국 입국을 통제하려 했다. 노무현 정부가 대폭 삭감한 탈북민 지원금 수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남한에서도 계속되는 빈곤
6 를 안겨 주는 곳이다.
한국 정부의 냉대 속에 탈북민은 체계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 그래서 탈북민에게 남한은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만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빈곤에 시달려야 하는 공포”7 그는 북한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간질환과 고혈압 등에 시달리는 아내를 치료하기에는 북한의 의료 환경이 열악해 탈북했다. 그러나 남한에서 취업은 쉽지 않았고, 아내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청소 용역업체에서 일하다 변을 당한 것이었다.
2016년 여름 한 탈북민이 안전모도 쓰지 않은 채 빌딩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다가 13미터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탈북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낮은 교육 수준이다. 《조난자들》의 저자 주승현은 어렵게 취직한 일식당에서 첫 월급을 받던 날,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동료들보다 더 일했는데도 월급이 그들보다 수십만 원이나 적었던 것이다. 그는 일터와 학원을 오가며 입시를 준비한 끝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 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싼 등록금은 탈북민에게 큰 부담이다. 게다가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한국에 온 주승현은 입학과 동시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첫 학기 성적은 최악이었고, 성적이 나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없었다. 등록금 문제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탈북민이 적지 않다고 한다.
8 생활을 함께했던 한 탈북민은 힘겹게 대학을 졸업했지만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고, 배우자마저 그를 떠났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허름한 임대 아파트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탈북민이라는 꼬리표가 취업하는 데 발목을 잡는다. 주승현은 100곳 가까이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 그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탈북민임이 드러나는 내용을 싹 지우고 입사 지원을 해 봤다. 그러자 서류 전형 합격통지서가 줄줄이 날아 왔다고 한다. 주승현은 다행히 취업에 성공했지만, 탈북민의 취업난은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주승현과 하나원탈북민에 대한 편견 조장
탈북민을 잠재적 간첩이나 열등한 존재로 보는 편견도 적지 않다. 주승현은 “탈북자 100명, 간첩 혐의 내사”라는 뉴스가 일간지를 장식한 날, 대학 수업 시간에 교수가 대뜸 “북한에서 온 자네는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해 당황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당시 그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9 탈북민의 첫 집단행동도 “1990년대 중, 후반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한 여러 탈북민의 법정 소송과 그들을 도왔던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0 이런 인권 침해가 드러나면서 2014년에 중앙합동신문센터를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름을 바꿨지만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탈북민을 대하는 태도는 이런 편견이 자라나는 원인의 하나다. 탈북민이 한국에 오면 우선 국가정보원 소속 기관인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조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정원은 여기서 탈북민들을 잠재적 간첩 취급하며 강압적인 수사를 벌인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인 유우성의 동생 유가려가 독방에 갇혀 국정원 직원한테 폭언·폭행을 당하고 전기고문 협박을 당한 곳도 이곳이었다.탈북민을 잠재적 간첩 취급하는 정부의 태도는 탈북민의 일상 곳곳에 뻗어 있다. 주승현은 판문점 관광 행사에 대학 학부 시절 동기들과 함께 참여 신청을 했다가 주민등록번호로 탈북민임이 드러나자 참여 불가 통보를 받은 적이 있다. 이런 일이 잦을수록,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탈북민에 대한 편견이 조장되기 쉽다. 한국 정부와 우파들이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탈북민을 이용하는 것도 편견을 조장한다. 2017년 판문점 탈북 병사의 기생충 공개 논란이 그런 사례다. 군이 기획한 기자회견에서 탈북 병사 수술 중에 기생충 수십 마리가 나왔다며 건강 상태가 부각됐고,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북한의 이런 실상을 보면 남한 사회가 그래도 낫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탈북 병사는 인격을 잃었다. 이 사건 이후 어떤 이들은 탈북민과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꺼리기도 했다.” 주승현은 당시 “언론이 진실을 원한다기보다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해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12 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탈북민 중에는 “’벙어리새’처럼 입닫기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이미지와 존재감을 과시하며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다. … 그동안 ‘탈북자’와 ‘강경 보수’는 이음동의어이자 ‘전가의 보도’나 다름없었다.” 13 탈북민은 남한에서도 온전한 정치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주승현은 이렇게 한탄한다.
이런 조건 때문에 탈북민은 “남한사회가 허용하는 탈북민은 북한을 부정하고 남한을 찬양하는 한 가지 경우뿐”“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21조는 남북한 체제를 비교하며 북한을 비판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된다. 그러나 탈북민은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탈북민은 모두 우익?
《조난자들》은 탈북민 안에도 계급 분단이 있음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북한에서의 계급적 차이가 남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소수의 고위직 출신 탈북민은 남한에서도 대접받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탈북민은 푸대접을 받는다.
15 태영호는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됐고, 2020년 6월 종합부동산세를 완화하는 종부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한국 부유층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
예컨대 2016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태영호 공사가 탈북해 한국에 왔다. 그러자 “일제히 모든 언론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태영호 귀순 공사’라고 칭했으며, 정부도 그를 북한이탈주민이나 새터민으로 부르지 않았다. … 태영호가 입국할 즈음, 이미 한국사회에 정착했던 의사 출신의 한 탈북민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앞서 소개한 2016년 빌딩 유리창을 닦다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태영호의 입국은 거의 모든 언론이 머릿기사로 다뤘지만, 의사 출신 탈북민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침묵했다.”주승현은 태영호 같은 ‘금수저 탈북민’이 ‘흙수저 탈북민’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뿐 정작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무관심하다고 폭로한다.
수저계급론은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특징이 있는데 탈북 엘리트들도 마찬가지다. 한 탈북 엘리트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공부보다는 북한의 민주화와 반북 활동에 청춘을 바쳐야 의미 있는 삶이라고 독려하곤 했다. 나중에 그의 자녀 모두가 해외 유학을 다녀온 후 안정적인 직장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씁쓸했다. 실제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니던 탈북민 친구들은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북한 관련 활동에 투신했지만, 지금 그들은 중국집 배달원으로, 물류창고 경비원 등으로 살고 있다.
탈북민 모두가 우익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주승현은 남한에서의 경험을 통해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동시에 남한 사회 주류에도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됐다. 이런 탈북민은 주승현만이 아닐 수 있다.
“탈북민 청년들을 중심으로 북한 문제나 탈북민 문제가 아닌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가 많아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광화문 촛불집회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밝히며 참여한 탈북민 청년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탈북민사회의 지형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진보적 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탈북민사회의 암묵적인 금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SNS를 통해 촛불집회 사진과 정보를 공유하며 집회에 함께할 친구들을 모집하는 탈북민 청년들은 너무나 초연했다.”
18 혁명적 좌파가 탈북민을 방어하는 데 적극 나서고 우파의 위선을 폭로해야 하는 이유다.
오히려 “북한 인권 문제나 탈북민 문제를 보수 진영의 독점적 담론으로 다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탈북민도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는 측면도 있다.”‘탈남’하는 탈북민
19 2020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약 3만 3000명이니, 6~7명 중 1명인 셈이다.
한국에서의 차별과 빈곤을 견디다 못한 일부 탈북민들은 ‘탈남’해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약 5000명의 탈북민이 탈남했거나 탈남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추산한다.”목숨을 걸고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에 왔는데 평생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하며 살아야 한다면, 다시 한국을 떠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북에서 그렇게 살았어도 그래도 꿈을 갖고 살았는데 한국이라고 그냥 막 살기는 싫더라구요. 그런데 기껏 해봐야 식당일이고, 그게 제 몸에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 새터민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새로 터 닦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거죠.
물론 유럽과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다. 그러나 탈남하는 탈북민들은 같은 동포에게 차별 받는 것보다 차라리 그 나라들이 낫다고 여긴다. 사실 탈북민들이 당연히 한국행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탈북 그 후, 어떤 코리안》은 인터뷰에 응한 많은 탈북민들이 최종 목적지는 한국이라기보다는 새 삶을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탈남하는 탈북민들은 대개 난민 인정을 받으면 주택 보조나 일정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가서 난민 신청을 한다. 탈남이 시작된 초기에는 주로 영국으로 향했고, 영국의 난민 심사가 까다로워지자 벨기에·캐나다·미국 등이 새로운 목적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들은 남한에서 살다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난민 신청을 하는데, 남한에서 탈북민이 겪는 차별이 아무리 심각해도 이는 난민 인정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으로 돌아가면 처벌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 난민 인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탈남하는 탈북민이 늘자 한국 정부는 탈북민의 삶을 개선하지는 않으면서 탈남을 어렵게 하는 조처만 취했다. 예컨대 탈남 탈북민이 선호하는 영국·캐나다에 탈북민 지문 정보를 공유해 그 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탈북민이 주로 향하는 나라의 정부들도 난민 신청을 하는 탈북민이 늘면 심사를 까다롭게 하곤 한다. 이 때문에 난민 심사에 걸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탈북민은 기대했던 각종 지원은커녕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난민 신청자라는 불안정한 체류 자격으로 생활해야 한다.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이제부터는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탈남해서도 빈곤의 늪을 벗어나기 어렵다.
탈북자를 수용한 [영국의] 다른 도시의 주택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는 바람이 들어왔다. 화면에 비친 음식은 거칠었다. 녹슨 침대 다리는 위태로워 보였다. 구타와 고문으로 가득한 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곳도 수용소이긴 했다. 고립과 불안이 익숙한 이들이었지만 영국은 다른 의미로 낯설었다.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해 탈북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원래 난민 지위를 얻으려면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탈북자들은 배가 고파서 나라를 떠났고, 이것은 경제적인 이유로 간주되기 때문에 난민 지위를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미국 의회에서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면서 먹고사는 이유로 나라를 등진 탈북자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4년은 북·미 간에 긴장이 높아지던 때다. 미국은 2002년 이라크·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불안을 느낀 북한 정권은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북한인권법은 이런 배경에서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는 수단의 하나로 제정됐다.
‘미국 탈북민들의 시민권 도전 이야기’, 〈자유아시아방송〉, 2020년 9월 23일)
그러나 2006년부터 2020년 상반기까지 미국에 입국한 탈북민 수는 220명에 불과했다.(24 이처럼 지원이 거의 없다 보니 취재에 응한 한 탈북민은 하루 2~3시간만 자며 억척스럽게 돈을 번다고 말했다.
또, 미국 대사관에서 난민 심사를 받아서 통과하면 준영주권자 신분이 돼 취업증도 나오지만 그 외에 복지는 거의 없다고 한다. 심지어 “미국에 올 때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그 비행기값이 보통 한 700~800불 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게 공짜가 아니라 … 한 달에 30불씩 미국 정부에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탈북 여성들
한국에 온 탈북민의 70~80퍼센트가 여성이고, 이 가운데 중국에서 거주하다 온 여성이 대략 70퍼센트를 넘어선다고 한다. 중국 거주 탈북 여성 중에는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도 있다. 잠시 돈을 벌고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납치당한 뒤 중국 농촌의 가난한 집안에 강제 결혼으로 팔린 것이다. 더러는 인신매매를 당할 줄 알면서도 북한을 탈출하거나 중국에 돈을 벌러 가기 위해 제 발로 브로커를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팔려간 탈북 여성은 중국에서 공민증이 없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다. 중국 공안의 단속에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중국은 난민 협약에 가입된 국가지만, 탈북민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적 목적의 밀입국자로 보고 적발될 시 강제 북송을 고집하고 있다. 단속과 북송에 대한 탈북민의 두려움은 엄청나다.
거의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으로 집에 있었는데 중국 공안이 멀리서 집을 향해 오는 것을 봤다. 뒷문으로 도망쳐 산으로 올라가는데 앞에 큰 울타리가 놓여 있었다. 한걸음에 훌쩍 뛰어넘어 도망쳐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산을 하고 나서 그 울타리를 다시 뛰어넘으려 하니 높아서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신매매를 당한 탈북 여성들은 신변 보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구입’한 중국 국적 남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종속적인 처지에 놓인다. 인터뷰에 응한 한 탈북 여성은 65세나 되는 남편에게 팔렸다. 본처가 아이를 낳지 못해 씨받이로 팔려간 것이다. 시아버지에게 강간 당한 사례도 있었고, 머슴처럼 부리기도 한다. 불안한 신분은 저임금의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식당에서 일하지만 주된 일은 식당 사장의 자녀를 돌보는 일이다. 하는 일이 더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월급이 더 많은 것도 아니었다. [신분이 없는] ‘조선여성’임에도 식당에서 일을 하게 해준 것에 감사하고, 그것 때문에라도 시키지 않은 모든 일을 찾아서 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27 한국에 갔다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 중국에 온 경우도 있다. “일하는 게 힘들지 팔목이 시릴 정도로 일한다고 합디다. 그래서 [한국] 비자 받고 와서 지금 5년 되었는데 [한국에] 안 돌아가고 있어요.” 28
그래서 중국 거주 탈북 여성들은 합법적인 신분을 얻기 위해 한국행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탈북민이 받는 차별은 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이는 한국행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한국 간 사람들이 말하는 게 너무나도 살기가 곤란하다고 말하는 게 70퍼센트는 그러더라고요. 내가 알고 있는 한국에 간 애들도 전부 힘들다 하고 말하니까. 그래도 여기[중국]서 사는 게 좋다 생각하고 안 갔어요.”결심을 하고 탈북을 한 경우에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애초 본인의 의사에 반해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 여성은 그 무게가 더할 것이다. 비싼 브로커 비용 때문에 북한의 가족과 소식을 주고 받기도 어렵지만, 가는 세월에 부모님이 편찮으시거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면 중국 공안에 자수해서라도 북한에 돌아가고 싶을 정도라고 한다. 중국에서 생활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북한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기도 한다.
이주의 자유
2018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즉석 제안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갔다가 다시 김 위원장과 함께 남쪽으로 넘어오는 장면이 큰 화제가 됐다.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일도 적지 않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고, 북한에서도 부수상이 내려와 박정희를 만났다. 이를 통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각각 유신 체제 정당화와 김일성의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이처럼 남북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만나며 때로는 “교류와 협력”을, 때로는 은밀한 거래를 해 왔다.
그러나 남북 지배자들은 남북 노동자와 보통의 주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아 왔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이 대표적이다. 2021년 1월 검찰은 브로커에 속아 원치 않게 한국에 왔다며 북한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김련희 씨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만약 남북 노동자와 주민들의 자유 왕래가 가능하다면 탈북민들이 겪는 고통은 많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브로커의 농간이나 국정원의 공작 등이 개입될 여지도 없을 것이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도 알 수 없거나, 연락을 하기 위해 브로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남·북한 대중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유대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좌파 활동가들은 탈북민을 환영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가 있음을 옹호해야 한다. 탈북을 하든, 탈남을 하든, 재입북을 하든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곳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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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아래 세 권의 책을 참고해 썼다.
《조난자들 -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 주승현, 생각의힘, 200쪽, 14000원, 2018
《북조선 환향녀- 중국 현지 거주 탈북여성의 생활실태와 인권》, 강동완, 라종억, 너나드리, 408쪽, 27000원, 2017
《탈북 그 후, 어떤 코리안》, 류종훈, 성안북스, 256쪽, 14000원, 2014
↩
- 강동완 & 라종억 2017, 87~88쪽. ↩
- ‘환향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멸시하는 표현이었다. 저자들은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으로 가게 된 탈북 여성이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될 경우 오히려 북한 당국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환향녀’에 빗댔다. ↩
- 물론 귀순자들이 기대했던 진정한 자유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의 수행 기자였던 이수근은 1967년 탈북해 거물급 귀순자로 대우받았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인 1969년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이중간첩 혐의로 붙잡혀 사형당했다. 2006년 과거사위는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으로 판명했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그는 중앙정보부의 일상적인 감시와 검열 때문에 탈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난자들》, ‘1960~1970년대: 이중간첩 이수근’) ↩
- 북한은 1960년대 말까지 놀라운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루며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앞섰다. 그러나 북한도 자본주의의 동역학에서 비롯한 경기 침체와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세계화 경향이 유력해지면서 북한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됐다. 설상가상으로,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자 북한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
- 주승현 2018, 43쪽. ↩
- 같은 책, 75쪽. ↩
- 같은 책, 144~145쪽. ↩
- 탈북민이 입국 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정부의 수용 기관. ↩
- 이현주 2014. ↩
- 주승현 2018, 30쪽. ↩
- 같은 책, 105쪽. ↩
- 같은 책, 114쪽. ↩
- 같은 책, 101쪽. ↩
- 같은 책, 100쪽. ↩
- 같은 책, 69쪽. ↩
- 같은 책, 71쪽. ↩
- 같은 책, 31쪽. ↩
- 같은 책, 102쪽. ↩
- 같은 책, 89쪽. ↩
- 류종훈 2014, 51~52쪽. ↩
- 주승현 2018, 90쪽. ↩
- 류종훈 2014, 55쪽. ↩
- 같은 책, 123쪽. ↩
- 류종훈 2014, 125쪽. ↩
- 강동완 & 라종억 2017, 303쪽. ↩
- 같은 책, 258쪽. ↩
- 같은 책, 352쪽. ↩
- 같은 책, 354쪽. ↩
참고 문헌
강동완 & 라종억 2017, 《북조선 환향녀: 중국 현지 거주 탈북여성의 생활실태와 인권》, 너나드리.
류종훈 2014, 《탈북 그 후, 어떤 코리안》, 성안북스.
이현주 2014, ‘남매 간첩 조작 사건으로 다시금 드러난 진실 ─ 탈북자들을 체제의 속죄양으로 만들어 온 남한 정부’, 〈노동자 연대〉 123호.
주승현 2018, 《조난자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 생각의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