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고전 읽기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
마르크스주의를 명쾌하게 정의하다
1 여기서 레닌은 아주 간결하지만 명쾌하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카를 마르크스 사망 30년인 1913년에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을 썼다.레닌은 부르주아 과학이 마르크스주의를 “유해한 [종교적] 분파”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는 독일 철학, 영국 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를 각각 계승했을 뿐 아니라 종합했다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선진적인 사상이 이미 제기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 답을 주었다.”
역사유물론
유물론은 마르크스 철학의 전제다. 마르크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물질적 조건이 정신보다 앞서고, 인간이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물질적 생산이 역사를 설명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관념론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물론과는 달랐다. 오히려 18세기의 유물론은 부르주아지의 세계관이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부르주아 유물론의 특징을 이렇게 지적했다.
기존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해)의 주된 결함은, 사물·실재·감성을 감성적 인간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러니까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관조 대상이라는 형식으로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 유물론은 인간을 물질적 상황의 산물이나 결과로만 보는 기계적 유물론이었다. 이런 견해는 결정론이자 숙명론이 되고 만다. 부르주아지는 대중을 역사를 주도하거나 독립적으로 행동할 능력이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생산의 도구로만 봤다.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적 노동조합 관료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관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젠가 역사가 자신들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투쟁 건설을 등한시했다. 옛 소련의 지배계급인 스탈린주의 관료들도 노동계급을 그저 국가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변화의 과정을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과정으로 결코 여기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였다. 레닌은 헤겔 변증법 덕분에 마르크스의 철학이 풍부해졌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변증법을 “일면성을 벗어난 형식으로서의 발전된 학설, 영원히 발전해 간 물질의 반영을 우리에게 준 인간 지식의 상대성에 대한 학설”이라고 규정했다.
레닌의 설명대로 변증법은 만물이 변하고 그 변화의 과정에 모순(대립하는 힘들의 충돌)이 존재한다고 본다. 변증법은 변화·발전·진화의 논리로 사회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변화의 원리를 규명하는 이론은 세계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다.
레닌이 “과학 사상의 최대 성과”라고 평가한 역사유물론은 유물변증법을 인간의 역사에 적용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유물론은 계급투쟁이 역사를 전진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유물론의 출발을 이렇게 제시했다.
당연히 모든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전제는 살아 있는 개인들의 실존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규명해야 하는 사실은 이 개인들의 신체 조직과 그에 따른 인간과 나머지 자연 사이의 관계다.
인간이 생존하려면 의식주가 중요하고,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도구를 이용하고 사회적 노동을 함으로써 이를 능동적으로 생산한다. 역사유물론은, 생산과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을 인간의 역사 발전과 사회를 분석할 때 중요한 기초로 삼는다.
즉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에는 경제적 기초, 다시 말해 토대가 있고, 그 토대 위에 사상과 제도가 상부구조의 일부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곧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개인들의 행동과 사상이 역사에서 일정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생산 활동이 선차적이라는 것이다.
생산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이 특정 생산양식을 이룬다. “생산력 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생활의 한 제도에서 더한층 높은 수준의 제도가 발전해 온 것 ― 예를 들면, 농노제로부터 자본주의가 성장해 온 것 ― 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예컨대 무슬림을 혐오해서 미국과 서방이 중동을 침략·점령한 것이 아니라 패권을 위한 공격을 정당화하려고 무슬림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
레닌은 역사유물론이 “인류에게 특히 노동자 계급에게 위대한 인식의 도구를 주었다”고 그 의의를 밝혔다. 이 도구는 우리가 당면한 과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할 뿐 아니라 어떻게 변화를 이루느냐를 논쟁하는 데서도 매우 중요하다.
정치경제학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을 자본주의 분석에 적용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작동하고 있고 위기에 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고전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수립한 노동가치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해서 발전시켰다.” 노동가치론은 상품의 가치가 그 상품의 생산에 지출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노동가치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원리, 자본의 착취적 본질을 포착했다. 마르크스는 그들의 통찰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탁월한 저작 《자본론》에서 현대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비판을 발전시켰다.
레닌은 부르주아 경제학이 “물건과 물건의 관계(상품과 상품의 교환)를 본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헤쳐 냈”다고 지적했다. 또한 “상품 교환은 시장을 매개로 하는 개별 생산자들의 결합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고, “자본은 이 결합 관계가 한층 더 발전한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즉 인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된 것이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착취가 발생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노동자는 하루의 한 부분을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 쓰고, 다른 한 부분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잉여가치, 즉 이윤의 원천이고 자본가 계급의 부의 원천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자본과 임금노동은 적대적 관계다.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신비화되고 계급 적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은폐된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경제 위기, 팬데믹 위기, 기후 위기의 책임을 노동계급에 전가할 때 이런 적대의 진실이 드러나곤 한다.
마르크스는 착취가 자본가의 부도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임을 밝히 드러냈다.
오늘날 일부 좌파는 노동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거나, 그 힘이 약화돼 과거와 다르다거나, 계급 갈등보다 노동계급 내 격차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전히 임금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처지가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을지 몰라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다. 고용 형태나 노조 조직 여부가 달라도 노동자들은 이해관계가 같다. 또, 자본주의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노동자들을 끌어모으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에 없던 새로운 노동자 집단이 생겨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자본에 예속되는 것을 강화하는 동시에 결합된 노동이라는 위대한 힘을 만들어 낸다.” 이 힘은 노동자들이 단결할 때 가장 극대화될 수 있다
이로써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노동자 운동에 굳건한 과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 자본주의 체제가 이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체제를 무너뜨릴 힘도 노동계급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세 번째 원천으로 꼽은 것은 “프랑스의 사회주의”다. 마르크스는 이를 계승·발전시켜 인류, 특히 노동계급 해방의 길을 제시했다.
자본주의가 “새로운 노동자 억압·착취 제도를 의미하는 것”임이 명확해지면서 이것의 “반영”이자 “항의”로서 다양한 사회주의 학설이 등장했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그 야만을 제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는 그것을 가능케 할 수단을 제시하지 못했다. “새로운 사회의 창조자가 되는 능력을 준비하는 사회세력을 선보이지 못했다.” 그래서 곳곳에서 농노제가 몰락하고 혁명이 분출했지만 결정적 승리를 거머쥐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잠재력은 인간 역사와 사회 발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과 이론의 결과로서 도출된다.
(글항아리, 2018)을 보면, 1980년 이후 세계 하위 50퍼센트의 소득은 별로 오르지 않아, 상위 1퍼센트와의 소득 격차는 1980년 27배에서 2018년 81배까지 벌어졌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세계 자산의 3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2020년 한국에서 순자산이 339억 원 이상인 슈퍼 부자가 6.3퍼센트 늘었다.
오늘날 현실은 레닌이 한 세기 전에 묘사한 “생산의 난장판, 공황, 광기 가득한 시장 추구, 주민 대중의 생활 불안 증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 속에 불평등이 깊어지고 있다. 토마 피케티 등이 쓴 《세계불평등보고서 2018》그러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이런저런 측면을 “개량이나 개선”하는 것은 미봉책일 뿐이고, 노동계급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는 온전한 대안을 쟁취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헌신과 전망을 분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상의 현재적 유효성은 그의 자본주의 비판이나 철학적 기여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철학,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인류 해방이 가능한 길을 제시했다.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물론만이 지금까지 모든 피억압 계급을 고통받게 한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보여 줬다. 마르크스의 경제이론만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지위를 설명해 왔다.
이로부터 레닌은 중요한 실천적 결론에 도달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낡은 것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권력을 쥘 수 있고, 쥐어야 하는 세력을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사회에서 찾는 것, 그리고 투쟁을 위해 그들을 깨우치고, 조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어떤 이론이 아무리 그럴싸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에서 입증되지 않으면 그 이론이 얼마나 쓸모있는지 알 수 없다. 반대로, 단순히 이런저런 투쟁에 참가할 뿐 그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이론적 분석을 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방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혁명적 정치 조직은 이론과 실천을 통일시키는 결정적 수단이다.
(좌파적) 개혁주의, 좌파 포퓰리즘, 스탈린주의처럼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공격하지 않고도 심대한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거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단결 잠재력이나 자력 해방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다양한 경향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핵심 요소들을 탐구하고 현실에 적용하려고 부단히 투쟁한다면, 노동계급의 해방이 아닌 다른 샛길로 새는 것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MARX21
주
- 한국어 판은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13년)에 부록으로 실려 출판돼 있다. 이 글의 인용문은 모두 이 책에서 나왔다. 다만 일부 문장은 영역본과 비교해서 조금 다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