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코로나 크래시 - 팬데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웠는가》
반독점 동맹이 민주적 계획 경제를 이룰 수 있을까?
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줬고, 경제적·정치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주요국 지배자들은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며 위기 극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근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는 대략 6조 달러의 재정 확대 정책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6조 달러는 미국 GDP의 30퍼센트에 이르는 엄청난 돈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코로나 크래시 - 팬데믹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웠는가》(이하 《코로나 크래시》)에서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광기의 대체물인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부상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썼다. 이 책의 번역자인 장석준도 “이제껏 조연인 척하거나 그래 보였던 국가가 무대 가장 앞에 나섰다”며, 팬데믹과 함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한다.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최근 영국에서 주목받는 좌파 경제학자이자 2015년 제러미 코빈 열풍 속에서 새롭게 급진화한 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영국 노동당 내 좌파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코로나 크래시》는 ‘팸플릿’ 형식으로, 팬데믹 이후 세계 지배자들의 대응과 이에 맞선 좌파의 과제를 총론 식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팬데믹 하에서도 국가의 강력한 지원 속에 “수혜자는 대기업, 거대 은행, 그리고 막강한 정치적 기득권층”이라는 점을 통렬하게 폭로한다. 또 이들에게서 정치적·경제적 통제권을 가져와 민주적 계획에 기반한 대안 사회 즉,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고전적 의미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는 전략을 내놓기보다 자본의 특정 조직 형태나 소유 구조(특히 거대 IT기업)를 통제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일종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다.
신자유주의의 종말?
블레이클리는 2008년 경제 위기 이래 국가와 대기업 간의 상호침투가 확대·강화돼 오던 중에 팬데믹을 계기로 새로운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독점 자본이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국가의 힘이 더욱 막강해졌다는 것이다.
블레이클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비단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20세기 초 이래 제국주의 시대의 주요 특징이었음도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다수 좌파와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도 국가의 구실이 중요했음을 옳게 지적한다. 2009년에 작고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이를 두고 국가와 자본의 “구조적 상호 의존”이라고 불렀다.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자본과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위기 시기에 국가가 무대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돼 왔다.
1970년대 말 위기 극복 방편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됐을 때도 각국 정부는 계속해서 경제에 개입해 왔다. 너무 커져 버린 기업들이 파산하게 되면 국민경제가 휘청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 경제 위기가 닥치면 국가는 재정 지출을 크게 늘려 왔다. 국가는 착취율을 높이기 위해 민영화, 외주화, 대량 해고, 임금 삭감 등으로 노동계급을 공격했다. 이를 위해 “각국 정부는 과거 케인스주의 시절보다도 더 ‘케인스주의적인’ 방식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정부 지출을 충당했다.” 각국 정부들이 이런 일을 했던 것은, 국가가 자본 축적의 전반적인 조건들을 마련하고 그 조건들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실제로 운영하는 자들은 기업이 경쟁 때문에 스스로 할 수 없는 기능을 떠맡는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는 자본들을 중재해야 하고 사법제도를 운영해야 하고 중앙은행을 통해 금융 시스템과 국내 통화를 관리·감독해야 한다.”
그런데 블레이클리는 2008년 경제 위기와 2020년 팬데믹의 결과로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이제는 비금융기관까지도, 즉 ‘독점-금융’ 혼종의 완전체가 국가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완전히 영구적으로 국가에 의존”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가 됐다고 주장한다. 블레이클리는 팬데믹 하에 국가의 부상으로 세계 자본주의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 것처럼 말한다. 좌·우를 떠나 모든 정부가 긴축 정책을 폐기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외의 국가들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은 재정 지출 확대에 소극적이다. 유럽연합의 핵심 국가인 독일을 보면, 향후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재정을 운영할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자 수전 왓킨스는 신자유주의가 유럽연합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지적했다. “경제 정책에 대한 대중 민주주의의 영향력으로 본다면, 유럽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참 멀었다.”
이 책의 번역자인 장석준은 한국의 지배자들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는 흐름에 동참할 것처럼 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 하에서도 신자유주의 규제 완화 정책을 거듭 추진했고, 이전 정부들의 민영화 정책을 거스르는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
요컨대, 팬데믹 하에서 국가의 구실이 늘어난 것을 두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질적으로 변했다거나, 신자유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섣부르거나 일면적이다.
국가와 독점자본
블레이클리는 국가와 결탁한 거대 독점자본에 주목한다. 그는 특정 자본 특히, 거대 IT기업인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 등이 국가의 비호 속에 시장 지배력을 확대해 규모가 작은 경쟁자들을 잡아먹고 세금 회피, 납품업체들 후려치기, 정부 특혜 등으로 독점을 강화해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불평등, 비효율성, 부패 등을 야기한다고 본다.
거대 IT기업과 다국적기업들의 악행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이 기업들은 1930년대 이래 가장 심각한 경제 침체의 와중에도 막대한 수익을 얻으며 번창하고 있다. 또, 정부와 이들 기업 간의 관계도 긴밀하다. 비영리 연구기관 책임정치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애플·아마존·구글·페이스북(일명 ‘공포의 4인방’)의 로비스트로 등록한 334명 중 80퍼센트 이상이 미국 연방의회나 백악관 출신 인사들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대기업 임원들이 정치권 및 정부 관료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블레이클리는 이를 두고 “우리는 경쟁 경제에서 살고 있지 않다. 소수의 모략 집단에 의해 운영되며 이들은 시장 효율성이나 경쟁 촉진이 아닌 편협한 자기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는 것이 더없이 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이 새롭게 축적되고 확장되는 부문에서 성공한 기업들이 규모를 크게 키워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계속 있었던 일이다. 철도·석유·자동차·금융·통신 등이 그랬다. 그럼에도 자본 간 경쟁은 계속됐다. 그래서 ‘공포의 4인방’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쟁하는 ‘다수 자본’에 기반해 있고, ‘영원한 독점’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업들이 시장 지배력으로 더 큰 이윤을 챙기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맞지만 현재 위기의 책임을 독점자본에게만 한정해 물을 수는 없다.
사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경제를 강타하기 직전에 이미 주요 자본주의 경제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새로운 경기 후퇴로 치닫고 있었다. 기업의 수익성은 거의 사상 최저였다. 이는 독점자본이 모든 이윤을 빨아들이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으며 자본이 노동력을 충분히 착취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경제 위기는 1970년대부터 지속돼 온 이윤율 하락과 깊은 연관이 있고, 지금의 불평등 확대도 전 세계 지배자들이 이윤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온 결과다.
즉, 현재의 위기와 불평등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 때문이다. 자본의 특정 조직 형태인 소수 독점자본만을 체제와 떼어놓고 문제를 삼으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는 대안이 아니라 소수 독점 기업들을 억제하거나 해체하고 그들의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통제해 시장 효율성과 경쟁 촉진을 대안으로 삼으려 애쓰는 개혁주의로 빠질 수 있다.
민주적 계획과 계급투쟁
블레이클리는 팬데믹 이후 “한줌의 과두집단이 지구 경제의 부와 권력을 더욱 독점할 것이다. 좌파의 과제는 바로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될 것”이며, “지배계급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민중에게 돌려” 줘 “대중의 민주적 계획”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블레이클리의 제안처럼 지금이야말로 민주적 계획 경제가 절실하다. 민주적 계획을 위해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협력적 경제 운영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지금 투자를 할지, 미래 생산을 위해 자원을 아껴둘지 같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집단적 토론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도 블레이클리가 제안한 전 지구적 협력 속에 이뤄져야 한다.
그런 계획과 결정은, 거기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들 스스로가 할 수 있어야 한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토론해 결정할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쟁점에 따라 지역적·전국적·세계적 수준에서 운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적 계획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정치 권력을 잡는 것이다. “이 과업은 오직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권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자본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그 밖의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권력 말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평의회)에서부터 1978~1979년 이란 혁명의 노동자 ‘쇼라’(평의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권력 형태는 20세기의 위대한 혁명운동 속에서 거듭거듭 나타났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정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와 정면 대결해서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 하지만 블레이클리는 《코로나 크래시》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동력이 어디에서 나오고 어떻게 가능한지 말하지 않는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경제의 주요 결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블레이클리의 제안에 이렇게 응수했다. “좋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독일식 노동이사제? 종업원 지주제? 새로운 규제 도입? 과거에 이 모든 조처들은 주요 결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데 실패했다”
또, 현 시기에 좌파가 민주적 계획 경제를 제안한다면, 지난 시기 긴축에 반대해 민주적 계획 경제를 제안했던 그리스 시리자 정부와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이 왜 실패했는지 말해야 한다.
6 당시 지배자들은 똘똘 뭉쳐 코빈을 저지하려 했고, 코빈을 물어뜯는 온갖 비방이 있었다.
코빈의 부상은 2008년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좌파 정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시리자(그리스)의 집권과 포데모스(스페인)의 성장도 같은 사례일 것이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라는 코빈의 총선 슬로건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코빈이 이끈 노동당은 2019년 총선에서 패배했다.7 이런 상황에서 코빈과 노동당 내 좌파는 여러 쟁점들에서 기존 입장으로부터 후퇴했다. 핵미사일 반대 입장, 브렉시트 입장 등에서 후퇴했고, 팔레스타인 연대가 유대인을 혐오라는 비방에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영국의 계급투쟁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의 파업과 시위, 대규모 집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좌파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거나 파업을 독려하지 않았다. 단백질을 아무리 많이 섭취해도 스스로 힘써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은 자라지 않는 법이다.이런 후퇴의 극적인 사례는 그리스 시리자였다. 이들은 당시 ‘긴축 반대’ 투쟁 속에 집권까지 했지만 반년 만에 긴축 정책 추진자가 돼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블레이클리가 제안한 민주적 계획 경제도 분명 지배자들의 강력한 방해와 온갖 비방에 시달릴 것이다. 이에 맞설 만한 수준의 계급투쟁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좌파의 과제는 급진적 요구를 제안하거나,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의회보다 거리와 일터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더 중시하는 정치와 조직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블레이클리는 그 자신이 주도적 구실을 했던 코빈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과거 급진좌파의 후퇴와 배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크래시》는 민주적 계획을 강제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인 노동계급의 투쟁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반면 국가독점자본한테서 “노동자, 공급자, 납세자 그리고 심지어는 소비자까지 모두 고통받고 있다”고 말해, 반독점 계급 동맹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거대 독점자본에 맞선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이 연대를 넓히고 힘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동맹자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동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요구와 힘을 자제하게 만들 뿐이다.
역사는 경제 위기 시기에 작은 개혁이라도 얻으려면 거대한 노동자 투쟁이 필요함을 거듭 보여 줬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소수 독점 자본 반대를 내세워 이윤 체제 자체에 대한 공격을 회피하거나 노동계급의 고유한 힘을 사용하는 데 소극적이면 작은 개혁조차 얻어내기 힘들 것이다.
민주적 계획이 실제 현실이 되려면, 자본주의 생산구조 속에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유기적으로 서로 결속돼 있고 체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이 필요하다.
블레이클리가 《코로나 크래시》에서 제안한 민주적 계획과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하지만 민주적 계획은 계급 투쟁과 분리돼 말할 수 없다.
MARX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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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로버츠, 마이클 2020, ‘초거대IT기업들의 독점이 불평등과 저성장의 원인인가?’. <노동자 연대> 331호.
정선영 2021, ‘국가도 건재했고, 신자유주의도 건재하다’. <노동자 연대> 368호.
차승일 2020, ‘정치양극화, 코빈의 부상과 좌절’, <노동자 연대> 344호.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0, 《무너지는 환상》,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2020, ‘브렉시트, 영국 총선, 노동당 좌파’, <노동자 연대> 310호
하먼, 크리스 2009,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성격’,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12, 《좀비 자본주의》,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