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마르크스주의와 개혁주의 문제 *
영국 상황을 보든 세계 상황을 보든 지금은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시기다. 우리 인간에게는 빈곤과 결핍을 없앨 수단이 있는데도, 매우 무질서한 사회 체제는 전 세계에서 노동계급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악하게 공격한다. 이것만큼 이례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이례성이 우리 운동에 끼치는 영향은 모순적이다. 한편에서는 중대한 투쟁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아랍에서 항쟁이 있었고, 유럽 대륙 전역에서 총파업 물결이 일었고, 터키와 브라질에서는 거대한 소요가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 시위가 벌어지다가 2011년 11월 30일에 커다란 파업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견해는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영국 - 역자] 노동당 지도자들이 온건한 요구도 내놓기를 꺼리거나 폐기하고 있는데도 개혁주의 사상, 즉 현 상황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선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이데올로기가 광범하게 거부당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 개혁주의 구조물들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며 그것들의 재생이나 갱생을 주장해 왔다. 여기에는 정치적 개혁주의가 다시 태어날 길이 있다는 기대가 있다. 이전까지는 혁명가였던 사람들 중 일부가, 진보의 속도가 더딘 것에 조급함을 느끼며 자본주의에 맞선 일반화된 저항보다는 – 또 그에 반대하며 – 파편적 운동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조직의 구속을 대체로 받지 않는 자율주의적 방법을 채택한다. 혼란스러워하거나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자본주의와 그것을 수호하는 국가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방향으로 활동할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 투쟁 방식에 의지할 것(이 방법은 조직된 개혁주의부터 운동주의와 자율주의까지 여러 모습이 있다)인지가 우리 운동에서 중심 쟁점이다. 이 선택은 이집트나 그리스에서처럼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국 같은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복지 국가와 생활 수준을 지키려면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아래로부터의 자력 행동에 기대야 하는지의 형태로 제기된다. 이 글은 20세기 초 25년, 즉 관련 경험이 비할 데 없이 풍부했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화급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개혁주의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상과 운동의 뿌리는 부르주아 혁명 시기에 대중이 정치 활동에 빨려 들어온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부상하던 부르주아지(와 그 사상가들)는 봉건제와 앙시엥 레짐(구체제)으로 요약되는 걸림돌을 넘으려고 다른 사회 계급 사람들을 동원했다. 그렇게 동원된 폭넓은 세력이 단지 부르주아지의 장기판 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처럼 세계를 뒤흔든 운동에 참가했다.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승리하자 이 광범한 동맹은 분화했다. 자본가들의 목적과 다른 동맹 세력들의 목적이 극명히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서 성장한 운동들이 개혁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아니다.
1 사회 변화를 고무할 본보기로 제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개혁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제도들을 통한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가도 아니었다. 혁명(더 정확히는 부르주아 혁명)이 또 다른 종류의 착취 체제를 낳았을 뿐임을 목격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사회 변혁의 방법으로 보지 않았다. 푸리에는 “혁명적 이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글을 써서 혁명적 방법을 명시적으로 반대했고, 오언은 “정부와 인민 둘 다를 무지한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2 일이 시급하다고 경고했다.
샤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혁명 이후 들어선 새 경제 체제가 낳은 참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정치 혁명을 대안으로 보지는 않았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당대의 계몽주의 전통을 따라, 다르게 사는 방법을 합리적인 주장과 예시로 보여 주기만 하면 완전히 공정한 사회주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다고 봤다. 예컨대, 오언은 사회주의가 “상층과 하층,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득”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자신의 핵심 글들을 “윌리엄 4세 전하”에게 바쳤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실험적 대안 마을을 세우기도 했다. 푸리에는 ‘팔랑스테르’를, 오언은 ‘뉴래너크’를 “무질서와 온갖 악이 없으며 기존의 사유재산도 건드리지 않는”바뵈프와 그의 ‘평등파의 음모’(1796년 프랑스)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당시 혁명가들은 사회주의적 신념이 아니라 자코뱅주의에서 활동의 동기를 얻었다. 자코뱅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 동안에 활동한 부르주아지 중에서 앙시엥 레짐에 맞서 대중을 동원하는 데 전념한 세력으로 등장했었다. 자코뱅주의는 19세기 초에 성장하던 노동계급 운동 안에서 반향을 얻었다. 영국에서는 이것이 급진주의Radicalism로 나타났다. 예컨대 1820년 ‘카토가街의 음모’를 꾸민 집단은 정부 각료를 암살해서 영국판 프랑스 혁명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자코뱅주의자들은 비록 극단적인 정치적 조처를 실행할 태세가 돼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부르주아 혁명의 강령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기껏해야 필요할 때 전투에 투입하고 전투가 끝나면 귀가시킬 동원 부대 정도로 여겼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을 때는 현대 노동운동이 막 활성화하던 때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와도 자코뱅주의와도 거리를 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때까지는 별 관계 없다고 여겨지던 개념들인 사회주의와 혁명을 연결 지었고, 사회주의와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개혁주의를 다루지는 않았다. 둘이 함께 써서 1848년에 출판한 《공산당 선언》의 5분의 2가 이런저런 사회주의 이론을 다루는 데 할애됐음을 고려하면 이 말이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공산당 선언》이 제시한 분석은 자본주의와의 타협 가능성을 거의 보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이 없고 … 현대 산업 노동자는 … 국민적 성격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 그에게 법률·도덕·종교는 그 이면에 부르주아적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는 여타 부르주아적 편견들과 마찬가지의 것이다.”
4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공산당 선언》에서 비판했던 다른 버전의 사회주의 사상들은 노동계급이 발전하면서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개혁주의가 아니라 세 단계의 “경로”를 예측했다. 1단계는 노동운동의 형성, 2단계는 혁명적 의식의 형성, 3단계는 혁명의 만개다. 《공산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으며 응집력이 없는 대중을 이루고, 상호 경쟁으로 파편화돼 있다.” 그 뒤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정치 조직을 만든다. 결국에는 계급 전쟁이 “일어나 혁명의 길을 연다. … 이 혁명에서는 부르주아가 폭력적으로 타도되며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위한 토대가 놓인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지나치다 싶게 압축해 놓은 위 문단을 보고서, 그들이 숙명론적이었다고 여기는 건 금물이다. 그들은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정이 평탄하게 쭉 뻗은 길을 따라 거의 저절로 이뤄지는 과정일 것이라고 내다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혁명이 역사의 본궤도에 오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 내부에 경쟁적 사상·운동이 계속 존재하는 것에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만약 위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계급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노동계급에 영향을 끼칠 터였다. 만약 개혁주의가 노동계급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공산주의자들이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맺는 관계는 어때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다른 정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만들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익과 구분되는 별도의 이익이 없다. … 공산주의자들은 현존하는 계급투쟁에서, 그리고 우리의 시야 아래에서 진행되는 역사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실제의 관계를 일반화된 말로 표현할 뿐이다.
이 말에는, 노동계급 정당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혁명이라는 목표를 채택할 것이라는 가정이 놓여 있다. 물론 내 설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너무 단순화한 것이고, 그들은 《고타강령 비판》 같은 문서를 써서 개혁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개혁주의를 이론화하지는 않았고, 1848년에 개진한 견해를 근본에서 바꾸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직된 개혁주의가 자라날 통로가 열렸을 때 (예컨대 1867년 영국에서 숙련직 남성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보장되고 1871년 독일에서 남성 보통선거권이 보장됐을 때) 그 장기적 의의를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엥겔스는 1892년에도 여전히, 영국 노동계급이 역사적 유산에 발목이 잡혀 있기는 해도 자연스럽게 벗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국에서도 노동하는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온갖 관습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계급은 움직이고 있다. … 그들이 한 걸음 내딛는다면, 마치 법칙처럼, 뒷걸음질은 결코 없을 것이다.”
돌파구를 연 로자 룩셈부르크
7 룩셈부르크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던 거대 정당 독일 사민당SPD의 당원이었다. 독일 사민당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에 헌신한다고 밝혔지만, 카를 카우츠키의 지도 아래 실천에서는 반대 모습을 보였다. 카우츠키는 《공산당 선언》의 주장을 완전히 기계론적으로 해석하며, 사회주의자는 사태 전개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노동운동 내에서 개혁주의로 흐르는 조류가 있음을 처음 식별해 낸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바로 1899~1900년에 출판된 룩셈부르크의 저작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였다.사회주의 정당은 혁명적 당이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을 성취할 유일한 방법이 혁명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의 적에게 혁명을 저지할 힘이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혁명을 창조할 힘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 모두 안다. 혁명을 벌이자고 선동하거나 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은 우리 활동의 일부가 아니다.독일 사민당 안에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세력도 있었다. 그들은 말로라도 혁명에 헌신한다고 하는 것조차 지나치다고 여겼다. 베른슈타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혁주의적인 강령을 내놨다. 베른슈타인은 신용의 팽창 덕분에 자본의 순환이 더 빨라져서 경제가 위기에 빠지는 일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보통선거권이 보장되고 노동조합이 성장하고 있으므로 혁명적 격변 없이도 사회가 쉽게 사회주의로 성장해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전망이 아주 위험하다며 조목조목 비판했다. 룩셈부르크는 이것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하면서, 결정적으로 베른슈타인의 사상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존재 자체”를 약화시킨다고 단언했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이 논쟁은 사회 변화를 어떻게 성취할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어떤 쟁점에서든,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벌일지 아니면 다음 선거나 교섭을 기다릴지 선택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룩셈부르크는 두 방법이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 권력 장악과 사회 혁명에 반대하고 그 대신에 개혁 입법을 택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같은 목적으로 향하는 더 평온하고 안정적이지만 느린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목적을 지향한다. 그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낡은 질서의 겉모습을 수정한다는 입장을 택한 것이다.
당시에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뜻한 ‘사회민주주의’가 본래의 뜻을 거의 다 잃을 정도로 바뀌고 목적 자체가 바뀌어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는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설득력 있는 선견지명이었다. 하지만 1899년의 시점에서 그 이탈은 아직 시작이었을 뿐이다. 당시에 베른슈타인 지지자들은 터놓고 개혁주의자를 자처하지는 못하고 ‘수정주의자’를 자처했다. 즉,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의 주장을 여전히 간직하면서도 최근 현실에 맞게 조금 바꾸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영국 정치인 중에서 비슷한 인물을 찾자면, 토니 블레어나 고든 브라운이나 에드 밀리반드는 턱도 없고 노동당의 창립자인 키어 하디 정도가 있겠다. 하디는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했고 오늘날 노동당 정치인들에 견주면 ‘분별 없고 위험한 선동가’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룩셈부르크가 개혁주의의 본질을 간파한 것은 대단한 성취였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도 마르크스처럼 개혁주의를 노동계급에 침투해 들어오는 외부적 존재로 봤다. 그러므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결국,
우리 당으로 유입된 프티 부르주아적 인자들의 우위를 확고히 해 주고 우리 당의 정책과 목표를 프티 부르주아적으로 바꾸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일 뿐이다.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문제, 최종 목표와 운동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프티 부르주아적 성격이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냐는 문제를 다른 형태로 제기한 것일 뿐이다.
공식적 수준에서 보면 《개혁이냐 혁명이냐》 소책자는 성공을 거뒀고 독일 사민당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에 헌신하는 정당으로 남았다. 룩셈부르크의 관점으로 보면, 독일 사민당은 《공산당 선언》에서 설명된 구실을 맡을 수 있는 정당이 된다. 그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 유지되는 한, 프롤레타리아에게서 흘러나와 프롤레타리아에 조응하는 정치 강령은 혁명적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적이지 않으면 어떨 것인가?
레닌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개혁이냐 혁명이냐》가 출판된 다음해에 발표됐다. 레닌의 책은 룩셈부르크의 선구적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개혁주의가 차르 치하의 러시아처럼 탄압이 센 곳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레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레닌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노동계급 일반을 동일시하지 않고 구분했다.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에 의존해야 한다면 혁명가와 노동계급은 동일하지 않고 구분돼야 할 것이다. 레닌은 이런 구분을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을 “외부로부터” 밀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에 레닌은 수긍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외부로부터 밀어 움직이기’가 과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 혁명에 전념하는 우리는 ‘밀어 움직이기’ 활동을 지금까지 한 것보다 100배는 더 강력하게 펼쳐야 하고 또 그럴 것이다.”진정으로 혁명적 이론의 인도를 받으며,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자발적으로 각성하는 계급에 의존하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마침내, 정말로 마침내! 그들의 막대한 힘을 모두 갖추고 온전히 성장할 때가 왔다.
레닌은 이런 관점이 필수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동자들에게는 사회민주주의적 [즉, 혁명적 — 글럭스틴] 의식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노동자들에게 도입돼야 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역사는 노동계급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노동조합적 의식까지만 발전할 뿐임을 보여 준다. … 하지만 사회주의 이론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변자들, 즉 지식인들이 일궈 낸 철학·역사·경제 이론에서 나왔다.
13 레닌은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이 언제나 유연했고, 그래서 나중에는 자신의 과거 주장을 많이 버리기도 했다. 그중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실린 것들도 있다. 그러나 계속 고수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바로 역사의 전개만으로 노동계급이 저절로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혁명을 지지하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개혁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가 둘 다 노동계급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시사한다. “노동자 대중이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독립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냐 하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14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관료주의”에 젖어들고 “조직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15 레닌은 지배계급이 제국주의로 벌어들이는 초과이윤을 이용해 노동계급의 일부와 노동계 관료를 매수한 결과로 노동귀족이 생겨난다고 봤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레닌의 사상은 급격히 발전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 소속 사회민주주의 정당 대다수는, 껍데기로만 갖고 있던 혁명적 정책을 내버리고 각자 자국 지배계급이 외국 노동자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지지했다. 개혁주의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이는 설명이 필요했다. 레닌은 ‘노동귀족’, 즉 노동자 중 특권을 누리는 얇은 관료층이 존재하고, 이들이 노동계급 속에서 개혁주의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이 분석은 미국인 [사회주의자 –역자] 대니얼 드 리언이 내놨던 주장과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1906년 출판)에서 한 주장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드 리언은 노동조합 관료들이 어떻게 “자본가 계급의 노동계 부관”이 되는지에 대해 썼다.이 이론은 일보 전진이었다. 개혁주의의 요소가 노동계급 내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함축함으로써, 개혁주의를 외부에서 침투하는 것으로 보는 개념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면, 독립적인 혁명적 정당의 건설을 바탕으로 개혁주의자들에 대응하며 노동계급 내에서 지도력을 획득해 나가는 방법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람시와 트로츠키 다른 사람들도 레닌의 노동귀족론을 받아들였다. 1926년에 발표한 ‘리용 테제’에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개혁주의가 성장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프티 부르주아와 농민의 많은 수가 노동계급으로 편입되며 프롤레타리아 내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조류가 생겨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서고” 그 속에서 “노동귀족이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17 이는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일인데,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는 개혁주의든 뭐든 반정부 세력은 모두 국가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고, 그래서 러시아 노동자들 중에서 비교적 특권을 누리는 층이 서서히 생겨나는 일도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교섭을 하는 노동 관료가 생겨나는 일도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17년 2월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하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혁명적인 볼셰비키들은, 곧 개혁주의의 바다 한가운데에 놓였다. 예컨대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공장 노동자와 반란을 일으킨 병사·수병들이 직접 선출한 소비에트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의) 개혁주의적인 대표자들이 통제했다. 소비에트 대표자 중 개혁주의자와 볼셰비키의 비율은 16 대 1이었다. 그 뒤 6개월 동안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실천 경험이 쌓인 후에야, 소비에트 내에서 혁명가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트로츠키는 2월 혁명 뒤에 개혁주의가 득세한 이유가 다음과 같다고 여겼다.
그 2년 뒤에 레온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를 쓰며 노동귀족론을 원용했다.한편으로는 자본의 관료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관료들, 즉 새 중간계층이 [있기 때문이다.] … 혁명의 성격과 그로부터 탄생한 권력의 성격 사이의 모순은 혁명적 대중과 자본가-부르주아 사이에 새로 생겨난 이 프티 부르주아의 모순된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격변이 일어난 와중에도 “노동 관료들, 즉 새 중간계층”이 불쑥 튀어나와 사태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된 의식
노동귀족론의 강점은 지배계급과 대중 사이를 중재하는 관료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한계가 있다. 첫째, 노동귀족론은 노동 관료와 고임금 노동자를 한데 뭉뚱그리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보면, 고임금 노동자의 다수는 투쟁을 벌이고 노조 조직을 강화시켜서 성과를 쟁취했다. 고임금 노동자들은 급진화를 가로막는 장벽이기는커녕 특정 상황에서는 대중의 급진화를 촉진했다. 노동자 혁명의 물결이 국제적으로 가장 크게 일었던 1917~1924년, 비교적 고임금의 숙련 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글래스고·베를린·토리노 등지에서 거듭 투쟁의 선봉에 섰고 초기 공산당들이 창당되는 데서 두드러지는 영향을 끼쳤다. 요즘에 노동조합원들이 반동적 걸림돌이 돼 자발적이고 급진적인 ‘프레카리아트’의 길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은 이런 역사를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노동귀족론은 왜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않는 지도자를 선택하고 때로는 그 지도자들의 배신을 꾹 참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기층 노동자들이 노동 관료의 배신을 용인하는 것이 그저 노동계급이 보수화하거나 심드렁해져서 생기는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투쟁이 일어났지만 금세 섟이 죽거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지도자들의 실책으로 패배했을 때 기층 노동자들이 크게 분노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그런 상황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일이 꽤나 많은 것은 개혁주의 사상이 협소한 관료층에만이 아니라 노동계급 내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제국주의자들의 탁자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와 개혁주의를 연결시키는 개념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현실의 사태 전개로 틀렸음이 확인됐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 벌어진 혁명이 이러저러한 개혁주의 탓에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1979년 이란, 1990~199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1998년 인도네시아가 그 사례이고, 최근 몇몇 아랍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노동계급이 전국 수준에서 자체의 국가를 세울 정도로 사회주의 혁명이 인구 다수의 지지를 받은 사례로는 러시아 혁명이 여전히 유일하다. 1917년 2월 혁명 같은 일은 제국주의 나라에서든 비제국주의 나라에서든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1917년 10월 혁명 같은 일은 없었다. 대개 다른 나라에서는 혁명의 잠재력이 개혁주의 탓에 계속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들은 개혁주의에 관해 여러 핵심 주장을 내놨다. 룩셈부르크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라는 출발점은 같지만, 개혁주의적 방법과 혁명적 방법은 같은 목적으로 향하는 다른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을 지향하는 것임을 밝혔다. 노동귀족론은 노동 관료가 개혁주의를 촉진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개혁주의의 존재와 복잡한 성격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개혁주의에 대응해 채택해야 하는 전술도 개발했다(이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개혁주의의 생명력이 질긴 것을 보면, 개혁주의는 단지 노동계급의 바깥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프티 부르주아적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 노동귀족론의 주장과 달리 개혁주의 사상은 선진국은 물론 개발도상국에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므로 주장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다행히 마르크스주의의 무기고에는 이를 도울 도구가 있다.
20 언론·교육 등 수없이 많은 교묘한 설득·교란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만이 인류에게 허락된 사회 형태이고, 어마어마한 부와 끔찍한 빈곤이 공존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며, 노동자는 무력하고 실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이민자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상이 유포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고도 말했다. 21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사회적 존재”는 착취, 소외와 차별, 계속되는 생산성 향상 압박, 일자리를 얻고 유지하며 생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한 악전고투 등으로 이뤄진다. 그와 함께, 조직으로 한데 뭉쳐 단결하고 부문적 수준이든 계급 전체적 수준이든 저항하고 반격해서 얻은 성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언론 등의 영향으로 나날이 뒷받침되는 한편, 눈앞의 현실과 계속 모순을 일으킨다.
개혁주의의 근원을 노동계급 외부 세력의 영향력이나 그 내 일부의 타락으로만 볼 수 없다면, 개혁주의가 노동계급 내에서도 자란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존재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하며 상호작용하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마르크스는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설명했다.물론 두 요인은 서로 연관돼 있다. 사회적 존재는 경제적 사정이나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과 월급 봉투의 영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경험 일체로 구성되고, 해외에서 벌어진 혁명들에 대해 알게 되거나, 자국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패배한 소식을 듣거나, 다른 산업 부문에서 파업이 성사됐다는 소식을 접하는 등 다양한 경험도 그런 경험의 일부다.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일상 경험의 일부이기도 한데, 바로 그 이데올로기가 경험을 해석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럼에도 만연한 이데올로기와 실제 현실은 모순되게 상호작용하고 그 모순된 상호작용이 대중적 개혁주의가 성장하는 기초를 이룬다. 이는 노동자 다수가 개혁주의적 신념을 받아들이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두 요인 사이의 균형은 성별, 고용 형태, 가족의 영향력, 교육 등 여러 이유로 사람마다 다르고, 그래서 개인들의 경험은 서로 같을 수가 없다. 그 결과 개혁주의자들과 나란히, 지배적 사상을 거부하는 소수의 투철한 혁명가도 존재하고, 지배적 사상을 흠뻑 흡수하는 반동적 소수도 존재한다.
22 이 말은 객관적으로는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순수한 형태로만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가 여러 방식으로 뒤섞여 수용될 수도 있다. 노동계급 저항에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나 점진주의적 신념이 존재하는 것이 그 사례다. 점진주의적 신념은 그것을 촉진하는 조직된 개혁주의 기구가 있으나 없으나 존재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합법적 배출구가 거의 없이 억압적인 옛 구조물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개혁주의 정당이 매우 빠르게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바로 그 때문에, 개혁주의 정당이 배신적 실천을 해 대중의 신뢰가 뚝 떨어질 때에도 대중적 개혁주의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제3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계급 간 적개심으로 찢어진 사회에서 비계급적 이데올로기나 계급을 초월한 이데올로기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이런 모순된 상호작용이 기초적인 개혁주의 의식의 토대이지만, 원숙한 개혁주의는 여전히 그보다 복잡하다. 첫째, 의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개혁주의 정치와 노조 활동을 구분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목표와 실천이 대체로 개혁주의적이지만 경제적 쟁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직접적 계급투쟁에 참여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자주적 활동의 요소, 투쟁이라는 직접 경험의 요소, 현장조합원들을 변화시킬 요소를 고무한다. 비록 노조 지도자들은 그런 요소를 억누르려 애쓰지만 말이다. 개혁주의 정당은 노조와는 달리 협소한 부문적 쟁점이 아니라 일반적인 정치 사상을 다루지만 (가끔 실시되는) 선거에서 표를 얻는 것에 주목하며 수동성을 부추긴다.
둘째, 개혁주의 조직에는 지도자와 기층 조직원이 있으며 각각 상층과 기층을 이루고, 그 각각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오늘날 노동운동은 대중적 개혁주의 의식에만 영향 받는 것도 아니고 노조 관료의 영향만 받는 것도 아니다. 둘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둘의 영향력은 안정적으로 평형 상태를 이루지 않고 상황에 따라 노조 관료의 장악력이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한다. 예컨대 중요한 파업이 승리하고 뭔가를 성취할 가능성이 커 보일 때, 또는 (1914~1918년처럼 전쟁이 터지거나 지금처럼 경제 위기가 벌어지는 등의 이유로) 위기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품을 때, 노동계급의 ‘사회적 존재’가 변화하고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힘은 그 전만 못 하게 된다. 오늘날 영국의 현실을 보자. 데이비드 캐머런[이 글이 쓰이던 시점의 영국 총리 - 역자]이 아무리 “함께 이겨냅시다” 하고 외치더라도 푸드뱅크에 의존하는 사람이 줄지는 않는다. 왕실에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주택 보조금 삭감으로 집을 잃게 된 사람에게 위안이 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수록 대중이 관료에게서 독립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그러면 대중의 의식이 더 급진적으로 변화할 가능성도 커진다.
자율주의자들은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다.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대중 조직이 개혁주의적이고 그 지도자들이 관료적인 경향이 있음을 보면서, 자율주의자들은 조직·지도 개념 일체를 내버려야 운동이 전진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제약을 덜 받는 듯 보이는 미조직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계급의 적이 고도로 집중적으로 조직돼 있다는 점, 그래서 우리 편도 그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조직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발적 행동이 형식적으로는 어떠한 제약에서도 자유로운 경향이 있을지라도, 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특정 조직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전망이 전체로는 개혁주의적인 경향이 있을 것이라는 문제도 있다. 그러므로 의식이라는 문제는 그냥 눈 감는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와 자율주의 둘 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고 서로 협력해 새 사회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고 보지 않는 비관을 공유한다. 둘 다 해답도 없다. 그 둘과는 대조되는 방법이 필요하다.
개혁주의와 관계 맺기 마르크스주의는 개혁주의의 근원을 이해하려 애쓰는 한편, 실천의 길라잡이로서 개혁주의에 대처할 실천 정책도 발전시켰다. 예컨대 룩셈부르크는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집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비록 룩셈부르크가 한 주장의 영향으로 독일 사민당이 공식으로는 베른슈타인의 견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과학적 분석은 해답의 일부일 뿐이지 전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원리는 … 기회주의적 변이에 … 반대해야 함을 미리, 단박에, 우리 모두를, 확신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변이는 운동 자체로만 극복될 수 있다.”
24 독일 사민당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악한 룩셈부르크는 당내 개혁주의 경향들을 극복할 실천 전략을 마련하려 애썼다. 그녀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노동계 지도자들의 늘쩍지근함에 대항할 힘을 발견해 냈다.
룩셈부르크는 아주 많은 노동자들이 독일 사민당을 신뢰하는 것을 보면서, 그 당이 여러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혁명은 “사민당 운동의 과제”일 것이라고 여겼다.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에서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의 행동을 거치며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강조했다. 아래로부터의 행동은 자본주의적 사상과 노동계 관료의 악영향을 낮출 강력한 해독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대중 행동을 강조했고, 또 어떻게 경제적 개혁을 위한 제한된 투쟁이 정치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으로 상승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정치 파업과 경제 파업, 대중 파업과 부문적 파업, 보여 주기식 파업과 투쟁적인 파업, 한 산업 부문의 총파업과 한 도시의 총파업, 평화로운 임금 투쟁과 유혈낭자한 거리 전투, 바리케이드 전투 등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효과를 높일 목적으로 절묘한 추론에 따라 발견한 교묘한 수단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움직일 때 쓰는 수단이고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취하는 형태다.
이렇게 대중 행동을 강조한다고 해서 룩셈부르크가 혁명적 정당의 정치적 지도가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민당이 그런 조직이 되기를 바랐다. 이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1918년 11월에 봉기가 일어나 황제가 타도되면서 독일은 사민당 지도자들이 격하게 반대했던 혁명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1919년 초 룩셈부르크는 사민당 지도자 구스타프 노스케의 명령을 받은 반혁명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룩셈부르크는 아래로부터의 행동으로 지도자들이 개혁주의적 입장을 버릴 수 있는 정도를 과대평가했다.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관료들은 그 기능 탓에 협상과 어중간한 조처에 목을 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 해야 성취를 제한하는 것으로, 최악으로는 노동자의 이익을 배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기층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상과 그에 대한 거부감(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생기는)의 불안정한 상호작용에 영향을 크게 받지만,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그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노동계 관료들에게 그 상호작용의 관계는 타협 이데올로기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노동계 관료는 착취당하지 않고, 그들의 일자리는 개혁주의가 지속되는 데에 달려 있다. 개혁주의가 사라진다면 지배계급과 대중 사이의 중재자인 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독일 사민당 지도자들이 혁명적 대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겠다는 룩셈부르크의 희망은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그럼에도 룩셈부르크가 아래로부터의 행동과 투쟁을 강조한 것, 스스로 바뀌며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중의 능력을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유산이다. 지도자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개혁주의적인 어중간한 타협에 매달려 봐야 결국 얻을 것이 없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성취한 진보를 계속해서 위협하기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부 전체를 지배해야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혁명가들이 설교를 늘어 놓거나 의지적 행동을 한다고 해서 다수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룩셈부르크는 자력 행동이 개혁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개혁주의를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레닌은 룩셈부르크와 강조점이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앞에서 살펴봤듯,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개진한 주장은 노동자 정당 안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혹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중 어느 하나가 득세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레닌은 1903년에 러시아판 독일 사민당[멘셰비키당 - 역자]과 갈라서고 볼셰비키당을 세웠다. 이 시점에 레닌은 그런 분열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러시아의 특수한 활동 환경 때문이라고 봤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을 둘러싼 사건들을 겪으며 레닌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 때문에 제3인터내셔널, 다른 말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립해 개혁주의적인 제2인터내셔널에 대항해야 한다고 봤다.
1920년 제3인터내셔널은 개혁주의와 분명하게 선을 그으라고 요구하는, 유명한 “가입 조건” 21개 항을 발표했다. 그 1~2번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제2항은 당시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매우 낙관적인 관측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확실하게 파탄났다. … 제2인터내셔널은 가망이 없다.” “제3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계급 의식적 노동자들 압도 다수에게 공감을 얻었고, 나날이 힘을 얻는 세력이 됐다.” 러시아 혁명은 십중팔구 “계급 의식적 노동자의 압도 다수에게 공감을” 얻었겠지만, 그 노동자들이 곧바로 개혁주의 조직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각국의 신생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국제 혁명의 성공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렇게 일이 지체되는 상황에서도 당시의 지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혁주의와 조직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지혜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트로츠키는 1924년에 글을 쓰며 “지난 몇 년 동안에 얻은 핵심 교훈”이 다음과 같다고 주장했다. “혁명이 대성공을 거뒀는데도 그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당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 정당 없이, 정당과 거리를 두고, 정당을 제쳐두고, 정당이 아닌 대용품을 가지고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1. 제3인터내셔널 지지자는 출판물, 대중 집회, 노동조합, 협동조합 등 수중의 모든 매체를 활용해서, 부르주아뿐 아니라 그 공범, 즉 온갖 형태의 개혁주의자들을 체계적이고 무자비하게 폭로해야 한다.
2. 공산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하기 원하는 조직은 노동계급 운동의 책임 있는 지위 일체에서 개혁주의자와 “중간주의자”를 쫓아내고 … 믿을 만한 공산주의자로 교체하기 위해 끈질기고 체계적으로 애써야 한다.
그러나 혁명적 정당을 창당하는 것만으로는 명백히 불충분하다. 역설처럼 들릴 수 있지만,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에서 분리해 나와야 하는 동시에, 바로 그 개혁주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설득해 획득하려 애써야 한다. 당시 지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이는 명백한 것이었다. 예컨대 레닌은 그 둘이 절대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에는 가장 엄격한 수준의 중앙집중주의와 규율이 필요하다. … 옛 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맞서기 위해서다. 수백만, 수천만 명에게 눌어붙은 습관의 힘은 가공할 정도로 강하다. 투쟁 속에서 단련된 철의 정당이 없으면 … 그런 투쟁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레닌은 “공동전선” 전략, 즉 혁명가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개혁주의자들과 운동을 함께 벌이는 전략을 제시했다. 공동전선 전략을 구사하면 많은 노동자들의 조건을 지키거나 개선할 수도 있고, 혁명적 방법의 우월함을 실천에서 보여 줄 수도 있다. 예컨대 레닌은 당시 영국 노동당 지도자 아서 헨더슨과 공동전선을 맺으라고 영국공산당에 조언했다.
대중이 우리를 따르기를 바란다면(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저 떠버리로 남을 위험이 있다), … 노동계급의 다수가 스스로의 경험으로 우리가 옳다고 확신하도록 도와야 한다. … 대다수 노동자가 헨더슨에게 실망해 헨더슨 정부를 타도할 가능성과 상당한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노동계급의 곁에 있어야 한다.레닌은 이 두 요점을 결합해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혁명적 정당 없이는 “승리를 위한 첫 걸음조차 뗄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승리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 승리하려면 대중이 스스로 정치적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혁명의 근본 법칙이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도, 개혁주의와 단절할 필요와 개혁주의와 관계 맺을 필요 둘 다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봤다. 트로츠키가 1922년에 쓴 “공동전선에 관한 일반적 고려사항”의 첫째 요점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도하는 것이다. … 이런 임무를 달성하려면 공산당은 분명한 강령과 엄격한 내부 규율이 있는, 완전히 독립적인 조직이어야 한다. 이 때문에 당은 개혁주의자들과 …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조직적으로 갈라서야 한다. 따라서 공산당원 가운데 “세력 통합”이나 “전선의 단결”을 들먹이며 중간주의자들과 갈라선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고 스스로 순전히 우연하게 공산당에 가입했음을 보여 줄 뿐이다.
그와 동시에,
이 시대에는 분열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공동전선 문제는 …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공동전선을 펴야 할 긴급한 필요에서 비롯한다. 이런 과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은 선전 단체일 뿐, 대중 행동을 도모하는 조직은 아니다.
공동전선 문제와 관련한 그람시의 말을 읽는 것도 가치가 있다. 볼셰비키의 경험이 서유럽 사회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1926년에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근본적 임무는 … 공산당[의 발전], 즉 그 당 안에 노동계급의 전위를 한데 결집하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계급을 이끄는 역량은 그 당이 혁명적 기관을 ‘자처하는’ 것과는 상관없다. … 오로지 대중 안에 섞여서 펼친 활동의 결과로만 그 당은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계급에게 ‘우리의’ 당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다수를 설득해 획득할 것이)다.”
그람시는 “공동전선”(혁명적 조직과 개혁주의 조직이 구체적 쟁점들을 놓고 함께 운동을 펼치는 조직 형태라는 성격이 강하다)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공동전선적 수단이라는 말을 했다. 하나의 당으로 조직된 혁명가들이 공동전선적 수단을 활용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도록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목전의 요구들을 모두 혁명이라는 목표와 연결시킨다. 모든 작은 투쟁들을 기회로 삼아, 대중이 자본의 반동적 지배에 맞서 일반적 투쟁과 봉기를 일으켜야 할 필요를 배우게 한다는 말이다. 제한적 성격이 있는 투쟁들이 모두 프롤레타리아의 힘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원돼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할 준비를 갖추고 그런 방향으로 이끈다는 말이다. … 모든 경우에 공산당은, 해당 운동의 경험과, 자기 영향력의 증대를 위해 내놓은 제안이 낳은 결과를 활용해야 한다.
그람시가 “모든 작은 투쟁들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말이 혁명적 당이 점진적 개혁에서 혁명으로 진보하는 모종의 단계적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개혁주의 정치 조직이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를 표현하거나 지도할 수 있고, 그런 거부가 미약할 때는 진일보를 뜻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정당의 건설을 포기한다면 재앙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개혁주의 조직은 급진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리더십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결국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검증
앞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를 인용한 것은 그들의 말을 성전처럼 떠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말들은 지금까지 노동계급 투쟁의 풍부한 경험에서 정수를 추출해 낸 것이고, 오늘날 모든 혁명가들이 맞닥뜨린 난제를 해결할 방법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개혁주의가 정말로 노동계급의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라면 객관적 환경이 변화하기를, “역사의 전진”이 우리를 대신해서 개혁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면 그만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세기 넘는 투쟁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혁명가들이 운동에 참여할 때는, 신기루에 불과하고 얼마 안 돼 사라질 인기라도 얻으려면 개혁주의적 대세를 따르라는 압력을 어마어마하게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는 정반대로 튀어 종파적 고립을 자초할 방어적 대응을 하게 될 위험도 언제나 있다.
일상적인 조건에서 노동계급의 다수는 개혁주의적이고 소수만이 혁명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혁명성과 대중성이 길항 관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아래로부터 변화시키려면 대중 정당이 필요한데, 비혁명적 세력이 언제나 운동의 최대 다수를 차지하고야 말 것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규모 키우기에 골몰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문제는 혁명적 정당이 제구실을 할 능력을 희생시킨다면 혁명 프로젝트가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혁명적 변화를 지지하는 사람의 규모를 최대로 키우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새로운 사람을 설득해 조직하는 일이 별로 소용없다고 보며 지금 규모에 만족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일 것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딜레마에 대처한 방법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처로 돼 있는데, 산술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첫째, 개혁주의의 문제를 인지한다. 둘째, 개혁주의와 조직적으로 결별한다. 셋째, 공동전선(또는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아도 일상 활동의 영역에서 그와 비슷한 것) 전술을 구사한다.
이 문제에서도 운동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는 각국 대표 887명이 모여,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국제적 총파업을 벌여서 전쟁을 중단시킨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대회에 참석한 몇몇 대표들의 대표성은 엄청났다. 독일에서 189명, 영국에서 84명, 프랑스에서 78명, 오스트리아에서 72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작은 나라인 덴마크의 대표단도 146명이었다. 이 대표들은 다 합치면 수백만 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었고, 각국 정당에 가맹한 노동조합의 지지자도 엄청나게 많았다. 러시아 대표단은 겨우 38명이(었고 개혁주의자와 혁명가가 섞여 있)었다. 통탄스럽게도,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이 결의안은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엄청난 수의 개혁주의 정당 당원들은 그 지도자들이 원칙을 배신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고, 지도자들이 비겁하게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지지한 것은 대개 용인됐다.
1914년 8월 러시아의 상황도 어떤 면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유럽 대륙은 국수주의로 쫙쫙 쪼개졌다. 당시에는 극소수였던 원칙 있는 혁명가들만이 시류를 거슬렀다. 레닌이 전쟁 반대 입장을 내놨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을 집필하고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의회 안에서 용감하게 전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영국에서는 존 매클린이 활발하게 반전 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국익’ 주장을 거부한 대가로 그들은 국가 탄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조롱을 당하고 심하게는 물리적 폭력도 당했다. 레닌은 계속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매클린·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는 감옥에 갇혔다. 이런 혁명가들의 주장이 옳았지만, 혁명가들은 어디에서나 소수였고 그나마도 전보다 규모가 줄었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2월 혁명 발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자기 생전에 차르 체제의 몰락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제국주의 전쟁을 끝장내고 세계를 사회주의 혁명의 목전으로 가져다 놓을 만큼 혁명가들이 회복할 수 있었던 출발점은 바로 확고한 혁명적 정치였다.
이런 대반전을 이끈 것은 볼셰비키당이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를 전쟁에서 끄집어냈고 노동자 국가를 세워 전 세계를 고무했다. 그러나 패배 직전에서 승리까지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듯, 2월 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 대 개혁주의자 대표자의 비율 차이는 엄청났다. 소비에트 대표자 1000명 중 볼셰비키당원은 겨우 60명이었다. 그럼에도 1917년 10월 볼셰비키당은 러시아 노동계급이 혁명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냈다. 규모가 커서였다기보다는 원칙을 지키는 정치적 입장과 개입주의적인 조직다운 성숙함 덕분이었다.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한 직후의 마치 꿈같은 나날 속에서 대체적인 정서는 계급의 단결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는 이제 잊자는 것, 혁명가와 개혁주의자의 차이도 한쪽에 치워 놓자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이에 저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혁주의의 “목표는 다르다”는 문제, 즉 룩셈부르크가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포착해 낸 문제가 떠올랐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제1차세계대전의 지속, 토지 분배의 연기, 자본주의의 유지를 주장했다. 이와 달리, 볼셰비키는 레닌의 ‘4월 테제’를 채택한 뒤 “평화, 토지, 빵”을 주장했다. 그러나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1917년 7월 페트로그라드의 급진파들은 즉각 사회주의 혁명을 벌이고 싶어 했다. 그때 러시아 노동자의 다수는 여전히 개혁주의를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전위와 나머지가 돌이킬 수 없이 어긋날 뻔한 상황을 피한 데에는, 경험도 많고 비교적 일관된 조직인 볼셰비키당을 통한 레닌의 노력이 필요했다. 1917년 8월 코르닐로프 장군이 반혁명 쿠데타를 벌였을 때 볼셰비키는 공동전선 전술을 구사해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 손잡고 쿠데타를 물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파를 차지하는 보상을 받았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제1차세계대전이 낳은 참상이 모두에게 분명해졌고, 의연하게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던 사람들의 영향력도 성장했다. 독일 사민당이 자국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난 뒤 룩셈부르크는 그 당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혁명적 정당의 중핵이라 할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창설했다. 1918년 11월에 시작해 황제를 끌어내리고 제1차세계대전에 최종 마침표를 찍은 독일 혁명 속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급성장했다. 러시아의 소비에트와 비슷한 기구가 독일에서는 아르바이테레테Arbeiterräte, 즉 노동자 평의회라고 불렸는데 1918년 12월에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달리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노동자 평의회 안에서 다수의 개혁주의적 입장을 변화시킬 자그마한 발언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평의회 대표자 405명 중 스파르타쿠스동맹 회원은 40명 밖에 안 됐고, 그조차 스파르타쿠스동맹 소속이라고 밝히고 선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이 난관을 극복할 수도 있었다. 독일 혁명은 1924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입지를 넓힐 기회는 많았다. 규모 자체도 무시할 수 없이 중요한 요소였지만, 더 치명적인 문제는 경험 부족이었다. 볼셰비키는 여러 해에 걸쳐 발전하면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원리에 따라 응집력 있는 조직을 건설하고 아주 다양한 조건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지도력을 획득하려 애썼다. 그 조건으로는 불법 상황, 반半합법 상황, 혁명이 만개한 상황 등이 있었고, 1905년 혁명처럼 대중이 벌떡 일어서는 시기도, 그에 뒤이은 심각한 패배의 시기도 있었다. 레닌이 멘셰비키와 결별하던 1904년에 썼듯이, “우리 당의 기구들이 더 강력해지고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자들로 채워질수록, 당 안에서는 동요와 불안정이 줄어들 것이고, 우리 당 곁에 있으며 우리 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계급 대중에 대한 우리 당의 영향력은 더 넓어지고 더 다양해지고 더 풍부해지고 더 유익해질 것이다.”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황제가 타도된 뒤에, 비록 경험은 일천하더라도 매우 열정적인 사람들이 유입되며 성장했다. 그런 신입 회원들은 좋은 동기를 가지고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최대한 빨리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치적 경험과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성급한 행동이 혁명가들과 아직은 개혁주의를 받아들이는 다수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을지 모른다는 룩셈부르크의 경고를 거의 귓등으로 흘렸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이끈 리프크네히트는 몸이 달아 있는 경험 없는 혁명적 소수의 압력을 받아서 순간의 열정에 휘말렸다. 그리고 1919년 1월의 때이른 봉기로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이끌었다. 이 봉기는 고립돼 손쉽게 패배했고, 그 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둘 다 살해당했다. (이제 독일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지도자들은 회복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규모보다 혁명적 정치와 조직적 “원숙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지혜와 이해력은 어르신의 것”이라는 속담을 되풀이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트로츠키가 《10월의 교훈》에서 무척 강조해서 지적했듯이, 혁명적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보수성이 사태 변화에 굼뜨게 대응하게 하는 보수성이 될 위험이 있다. 1917년 10월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볼셰비키당 일각의 혁명적 기백이 주저하는 일부 노련한 선임 당원들을 압도해야 했다. 러시아 당에는 있었지만 독일 당에는 없었던 자질은 개별 당 활동가들의 육체적 성숙함이나 활동 햇수가 아니다. 혁명가들의 정당이 개혁주의적 다수를 설득하고 투쟁을 전진시키려 끈질지게 활동하면서 터득한 조직적 성숙함이었다.
역사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일은 없다. 당시 독일에 볼셰비키당과 같은 정당이 있었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적 사건, 리더들의 자질, 사회 구조, 세력 균형 같은 요소들도 변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직의 절대적 규모라는 요소가 중요하기는 해도 개혁주의자들을 혁명 쪽으로 설득하는 능력보다는 덜 결정적이다.
결론
20세기 초 혁명의 성공과 실패 경험은 오늘날 사회주의자에게 중요한 길잡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 중 주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정치적 개혁주의 자체와 그것의 무능에 대한 경험이 100년 동안 쌓였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개혁주의로는 영국 노동당 같은 정당이 여전히 중요한 사례이지만, 개혁주의의 모습은 다양하다. 근본에서, 개혁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히드라의 여러 머리 중 하나에 맞서 싸우는 단일 쟁점 운동이다(물론 그런 운동이 특정한 조건에서는 혁명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노동조합의 핵심 존재 이유는 사용자-피고용인 관계의 틀 안에서 협상을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정치 조직의 갱생을 제안하는 혁명가들, 개혁주의 운동의 틀 속에 용해되고 있는 혁명가들, 노동조합에서 활동할 때는 사회주의 신념을 감추는 혁명가들은 아주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비록 그 의도가 사람들이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바뀌도록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대중적 개혁주의 의식은 개혁주의 조직의 산물이 아니다. 그 반대로, 개혁주의 조직이 대중적 개혁주의 의식의 산물이며, 이 의식은 자본주의적 생활 조건과 그에 맞선 투쟁에서 생겨난다. 룩셈부르크가 보여 줬듯이, 의식적으로 개혁주의 조직 활동을 하는 것은 체제의 폐지가 아니라 수선으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이 옆에 비껴 서서 설교나 늘어놓고 혁명적 상황이 떠오를 때까지 시간을 때우면 그만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수가 개혁주의 사상을 뛰어넘어 나아갈 가능성이 생기는 때는 거듭거듭 온다. [2011년 - 역자] 이집트 같은 곳에서는 그런 드라마가 아주 큰 규모로 펼쳐졌다. 그러나 영국 같은 곳에서도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는 일상적으로 제기된다. 긴축 정책에 맞선 투쟁에서 대중의 자력 행동을 강조하는 전술, 개별 사업장과 개별 캠페인을 넘어서 연대를 지향하는 전술, 계급적 행동과 투쟁 속 단결로 이끄는 전술은 [당시 영국 노동당 대표 - 역자] 에드 밀리반드 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목표로 향하는 데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일보 전진이다. 그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의 발전, 정치적 명확성, 혁명적 정당의 노력이 결정적이다.
주
- Owen 1970, ppvii-ix. ↩
- Owen 1970, pxiii. ↩
- Marx and Engels 1976, pp494-495. ↩
- Marx and Engels 1976, pp492-493. ↩
- Marx and Engels 1976, pp497-498. ↩
- Engels 1993, pp53-54. ↩
- Luxemburg 1971. ↩
- Kautsky 1909, p50. ↩
- Luxemburg 1971, p53. ↩
- Luxemburg 1971, p116. ↩
- Luxemburg 1971, p54. ↩
- Lenin 1901. ↩
- Lenin 1901. ↩
- De Leon 1904. ↩
- Luxemburg 1906. 이 측면에 대한 더 풍부한 논의는 Callinicos 1982를 보라. ↩
- Gramsci 1978, pp340-341. ↩
- Trotsky 1980. ↩
- Trotsky 1980, p166. ↩
-
1957년에 클리프는 ‘개혁주의의 경제적 뿌리’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노동귀족론이 개혁주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레닌의 개혁주의 분석은 소수의 얇은 보수층이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욕구를 가린다는 결론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껍질을 깨뜨리기만 하면 혁명적 용암이 분출할 것이고, 혁명적 정당이 할 일은 그저 노동자 대중에게 ‘노동귀족’이라는 ‘극소수’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배신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등지의 개혁주의가 지난 반세기 동안 걸어온 역사를 봐도 그런 결론은 확증되지 않는다. 오히려 개혁주의는 견고하게 유지되며 노동계급 전체로 확산됐고, 혁명적 소수는 모두 좌절감을 느끼며 대체로 주변화돼 있다. 이를 보면, 레닌의 주장과 달리 개혁주의의 경제적·사회적 뿌리는 ‘프롤레타리아와 노동 대중의 극소수’가 아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Cliff 1982, pp108-117.
이 글은 제국주의적 착취로 생긴 이윤의 일부가 아래로 흘러넘칠 때 꼭 노동계급의 극히 일부에게만이 아니라 “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경제적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러나 클리프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더러운 부가 개혁주의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봤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개혁주의의 등장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존재한다. … 개혁주의는 대부분의 많은 후진국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나타냈다.” 1957년에는 이른바 제3세계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벌어진, 온전하게 발전하지 못한 투쟁들은 개혁주의의 사례가 아니라, 외세 개입으로부터의 탈피와 관련 있는 일로 보였다. 클리프는 그런 사건들을 가리켜 “빗나간 연속혁명”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들을 선진 경제들의 개혁주의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요컨대, 레닌은 노동귀족과 제국주의를 처음으로 연결 지었지만 그 혜택이 극소수에게만 돌아간다고 본 반면, 클리프는 기본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혜택이 널리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두 주장의 문제는 제국주의를 개혁주의의 핵심 원천으로 본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하나의 요인이기는 하지만, 대중적 개혁주의는 제국주의의 중심지가 아닌 곳에서도 등장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줬다. ↩ - Marx 1845. ↩
- Marx 1859. ↩
- Lenin 1901. ↩
- Luxemburg 1971, p132. ↩
- Luxemburg 1971, p131. ↩
- Luxemburg 1906. ↩
- Lenin 1920b. ↩
- Trotsky 1924. ↩
- Lenin 1920a. ↩
- Lenin 1920a. ↩
- Lenin 1920a. ↩
- Trotsky 1973. ↩
- Gramsci 1978, p370. ↩
- Lenin 1904.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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