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과 오늘날 제3세계 *
연속혁명론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트로츠키가 제2인터내셔널의 진화론적 사회 변화 입장과 단절했다는 점이다. 카우츠키·플레하노프 등은 정설적 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그에 따르면 각각의 생산양식들은 생산력 발전에 자동으로 대응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나로드니크인 젤랴보프가 지적했듯, 역사적 단계를 건너뛰고 역사를 밀어붙이려는 시도는 재앙적 실패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었다. 그 이면에 있는 논지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린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 따라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었다.
2 각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은 그 나라들의 내적 발전이라는 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세계 체제의 맥락 속에 놓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저술들에서 차르 국가의 특수성을 논할 때 트로츠키는 유럽 국가 체계 내 상황과 발달한 서구 열강에 뒤지지 않기 위한 러시아 사회의 현대화 압력을 언제나 확고하게 결부시켰다.
트로츠키는 이 모든 것을 논파했다. 그는 분석의 틀을 개별 사회구성체들이 아닌 자본주의 세계 체제 전체로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경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세계경제는 국민적 요소들의 총합이 아니라 국제 노동 분업과 세계 시장이 창출한 강력하고 독자적인 하나의 실재로서, 우리 시대에 국민국가 시장들을 전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3 “인간의 역사 전체는 불균등 발전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자본주의는 상이한 발전 국면에 있고 각각 엄청난 내적 모순을 지닌 다양한 인간 집단들을 찾아낸다.” 4 자본주의는 경쟁을 통해 굴러가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상이한 나라들 간에 그리고 그 내부에서 차이를 심화시킨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세계의 모든 부분들을 단일한 세계 시장과 통합된 국제 노동 분업 속으로 끌어당겨 “결합 발전의 법칙”이라는 압력을 키운다. “[결합 발전의 법칙은] 여정의 상이한 국면들이 합쳐지고 분리된 단계들이 결합되고 구식과 현대식이 혼합된다는 뜻이다.” 5 따라서 진화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추정과는 달리, 역사적 발전 국면이 다른 사회 형태들이 같은 사회 안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 특히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오직 불균등 결합 발전의 법칙을 통해서만 세계 체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역사적 후진성에도 특권이 있다. 특정 시점의 최신 성과들을 – 때로 어쩔 수 없이 – 수용해 발전의 중간 단계들을 건너뛴다. 야만인은 활을 내던지고 곧장 소총을 든다. 과거에 이 두 무기들 사이에 있던 길을 밟지 않는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 출신 식민지 주민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 독일과 미국이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지른 것은 바로 두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낙후했기 때문이다. …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국가들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역사 과정에서 상이한 국면들의 독특한 결합으로 이어진다.
이 진술들은 트로츠키가 《평가와 전망》과 《1905년》에서 러시아 사회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을 일반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트로츠키는 19세기 말 러시아라는 특수한 사례에서 “역사적 후진성의 특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군사적 경쟁 압력 속에서 최신 공업 시설과 기술을 수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차르 국가가 후원하고 해외 차관과 직접 투자로 재원을 마련한 공업화는 봉건적 농업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 몇몇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식 공장들에 집중된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이식했다. 지주와 농민의 해묵은 투쟁에 자본과 노동의 투쟁이 추가됐다. 트로츠키의 두 번째 중요한 혁신은 혁신적인 이론적 분석으로부터 적절한 정치적 결론을 도출한 것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혁명을 엄격히 분리된 과정으로 생각했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적 절대 왕정이 지배하고, 러시아 노동계급은 의회적 정치 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투쟁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훗날, 즉 낡은 봉건 질서가 분쇄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멘셰비키는 이 의견에 동의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지만, 이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지가 아니라(1905년에 부르주아가 차르 체제에 의존하고 있음이 명백히 입증됐다) 농민과 동맹한 프롤레타리아일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이 함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이런 정식화를 가차없이 비판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은 불가피하게 그 내에 존재하는 모순들에 봉착할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에 해가 되는 법령을 채택하고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사용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늘리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입지가 부르주아지에 점차 잠식되거나, 아니면 예컨대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기업들을 장악해 자본의 경제력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경계를 넘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트로츠키는 두 번째 경로를 지지했다. 불균등 결합 발전의 법칙 덕분에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단일한 과정으로 융합되고 그 결과는 노동자 권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연속혁명의 핵심이다.
8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건설을 고무할 필요성에 맞춰져 있었다. 이것은 《평가와 전망》보다 레닌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 더 가까운 노선이었다. 9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벌어진 노동자 대량 학살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을 융합시키려는 스탈린 전략의 최종 실패를 뜻했는데, 그 직후에 트로츠키는 연속혁명의 정식을 중국에 적용했다. 왜냐하면 이 전략과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혁명 ‘단계’를 별도로 설정하는 멘셰비키의 개념을 스탈린이 수용한 것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두루 알듯이 1917년 4월에 레닌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을 버리고 트로츠키의 전략을 채택했다. 그 결과가 1917년 10월 혁명이었다. 레닌의 중요한 지적 변화는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 때문에 착수한 제국주의 연구로 가능해진 것이었지만, 이런 변화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시인된 적이 없고 곧이어 스탈린이 승리하면서 부정됐다. 트로츠키는 1920년대 스탈린과의 논쟁을 거치면서야 비로소 연속혁명 개념이 단지 러시아 사회에 대한 분석틀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의 보편적 혁명 이론이라고 이해하게 된 듯하다. 뢰비가 옳게 지적했듯, “트로츠키가 연속혁명 이론을 식민지와 반半식민지(또는 옛 식민지) 세계 전체로 보편화한 데에는 십중팔구 1925∼1927년 중국 계급투쟁의 극적인 고조가 촉매가 됐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애초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자극 받아 연속혁명 이론을 정식화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중국 논쟁 초기에 트로츠키는 “단지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장기적인 선택지” 정도라고 봐 연속혁명의 전망을 배제한 듯했다. 처음에 그의 관심사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독자성을 확보하고트로츠키 이론의 세 번째 요소는 1920년대 논쟁들에서 단연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일국사회주의’ 개념을 거부하고 이렇게 강조했다.
한 나라의 경계 안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위기가 발생하는 기본 이유들 중 하나는 그 사회가 창출한 생산력이 더는 국민국가라는 틀과 조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한편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 다른 한편에서는 부르주아적 유럽 합중국이라는 유토피아가 도출된다. 사회주의 혁명은 국민적 무대에서 시작돼 국제적 무대에서 전개되고 세계적 무대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더 새롭고 광범한 의미에서 연속혁명이 된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새로운 사회가 최종 승리할 때 완결된다.
11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단일한 행동일 수 없다. 선진국 프롤레타리아가 ‘전선을 균등하게 만들 때’까지 전혀 기다리지 않고 후진국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 필연성의 압력을 받아 이룩한 10월 혁명을 경험한 성인들 사이에서 이는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없다.” 12 세계 혁명은 하나의 과정이다. 나라별로 특수하고 역사적으로 고유한 조건들 때문에 특정 나라가 선두에 설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세계 혁명이라는 과정은 세계적 규모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국민국가들을 구성 요소로 하는 세계경제의 형성은 개별 나라들이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 고립된 채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제 시스템의 압력은 철저하게 자급자족적인 경제에조차 가해질 것이었다. 활로는 오직 혁명을 다른 나라들로 확산시키는 데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이 논지는 10월 혁명기의 볼셰비키들에게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레닌 사후에 러시아 관료층이 일국적 이익에 근거한 전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폐기됐다. 물론 트로츠키는 세계 혁명을 전 세계 노동자들이 동시에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는 스탈린이 트로츠키에게 부정하게 씌운 터무니없는 개념인데,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이 받아들인다.자본주의의 국제적 성격,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하는 경향, 세계 혁명의 필요성이라는 세 가지 명제가 트로츠키 이론의 진수를 이룬다. 뢰비는 《불균등 결합 발전의 정치학》의 첫 세 개 장에서 원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동원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에서 연속혁명 개념의 계보를 추적하고, 1905년 트로츠키의 최초 정식을 개략하며, 1920년대에 이뤄진 추후 일반화를 다룬다. 그 결과물은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풍성하고 명확하며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서 보탬이 됐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개념들은 연구 목적이기보다 실전용이었고, 불행하게도 뢰비가 그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나아갈 때 문제가 생긴다. 이는 특히 뢰비가 제4인터내셔널의 정설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뢰비와 필자처럼 연속혁명론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어려움이 있다. 첫째, 유고슬라비아·중국·쿠바·베트남이 가장 중요한 사례인데, 노동계급이 무시해도 될 만한 구실을 한 후진국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알려진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둘째, 트로츠키의 예측과는 명백히 다르게, ‘신흥공업국들’로 불리는 많은 제3세계 나라들이 역동적인 산업 경제를 발전시킬 능력을 보여 줬다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 트로츠키가 노동계급을 연속혁명의 주체로 봤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컨대 《1905년》에서 트로츠키의 전반적인 분석은 러시아에서 다른 계급들이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지도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본가들은 벼락부자인 데다 의존적인 지위 때문에 그렇고, 농민은 혁명을 지도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정치적 응집력의 발전이 생산관계 때문에 가로막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 전개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가 다른 계급들이 남긴 간극을 메울 핵심이 된다. 노동계급이 일단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되면 불가피하게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뢰비는 연속혁명론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수행하는 중심적 구실과, 연속혁명론으로 중국 같은 사례를 설명하고자 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잘 안다.
1917년 10월에 노동계급은 소비에트라는 조직을 통해 직접 혁명의 주된 사회적 행위자이자 설계자가 됐다.
그와 동시에, 볼셰비키당은 이데올로기와 강령뿐 아니라 사회적 구성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예상과는 반대로, 헤게모니를 쥔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노동계급의 대규모 자주적 조직이라는 배열 형태는 중국 혁명을 비롯해 1917년 이후 혁명들에서 재현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뢰비는 중국, 유고슬라비아, 베트남, (아마도) 쿠바를 “프롤레타리아 태생의 관료 국가”로 본다. “그 국가들이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 정당들의 지도를 받은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 국가들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특수한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지닌 관료층이 독점하고 있다는 뜻이다.”
13 의 변종으로 보일 뿐 확실히 개선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정식의 장단점을 상세히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고, 다만 즉각 제기되는 난점에 초점을 맞추겠다. 예컨대, 산업 노동계급은 중국을 건국한 혁명에서 미미한 구실을 했는데 어떻게 중국이 “프롤레타리아 태생의 관료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뢰비는 중국·유고슬라비아·쿠바·베트남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 그의 주장에는 두 개의 주요 요소가 있는 듯하다.
이 정식은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 개념첫째, 그는 “농민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점은 … 철저히 재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필수적인 조처다. 왜냐하면 뢰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부른 모든 혁명들에서 농민이 대중적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농민을 “과소평가했다”는 전통적인 스탈린주의적 비난에 맞서 뢰비는 트로츠키를 방어한다. 트로츠키는 후진국들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정한 혁명적 과정에서 농민이 수행하는 결정적 구실”을 인정했다. “트로츠키가 부정했던 것은 혁명에서 농민의 결정적 중요성이 아니라 농민이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구실을 하고 독자적인 지배계급이 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농민층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은 농민의 생활 조건이 그 계급의 역량을 제한하는 방식에 맞춰져 있다.
역사는 무지크[빈농]에게 부르주아 국가를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임무를 맡길 수 없다. 분산성, 정치적 후진성,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심각한 내적 모순들 때문에 농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농촌에서 자생적 봉기를 일으키거나 군대 내에서 불만을 터트리는 식으로 옛 질서의 뒤통수를 쥐어박는 것 정도다.이 주장과 완전히 일맥상통하게, 트로츠키는 1927∼1928년 재앙 이후 중국공산당이 노동계급과 도시를 버리고 농촌에서 농민군을 결성한 전략을 강하게 비판했다. 매우 명료하게도, 트로츠키는 그런 전략이 당의 관료화를 부추길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심지어 트로츠키주의적 노동계급과 스탈린주의적 농민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16 농민과 관련해 뢰비가 트로츠키와 의견이 다른 것은, 중국 혁명과 그런 유형의 다른 혁명들이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는 뢰비의 가정 때문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뢰비의 주장은 순환론이 된다. ‘트로츠키는 농민에 대해 틀렸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농민이 프롤레타리아적인 혁명들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 세력이었기 때문인데, 그런 혁명들이 프롤레타리아적인 이유는 농민들이 참가했기 때문이다.’ 뢰비는 “농민은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지도를 받을 때만 일관되게 혁명적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트로츠키가 주장한 것은 옳았다”고 마침내 인정함으로써 순환 논법에서 벗어난다.
이 모든 것이 뢰비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뢰비는 마오쩌둥의 지도를 받는 농민군이 일으킨 혁명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뢰비는 “농민을 ‘비사회주의적인’ 계급으로 보는 것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이라고 스스로 인정했던 것을 부정할 만한 아무런 실질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뢰비는 사회 혁명들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던 농촌 인구 부분은 예컨대 고용주의 감시와 통제를 훨씬 더 많이 받는 대토지의 농업 노동자라기보다는 소농이었다고 옳게 지적한다. 소농은 토지를 소유하고 직접 농사를 짓지만 생산물 공제를 통해 수탈당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들도 바로 소농(레닌의 표현으로는 “중농中農”)이다. 사회화가 자신들이 농사짓는 작은 땅 조각에 대한 실질적·잠재적 소유권을 위협할 것 같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소농의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래서 19세기 프랑스 반동의 대중적 기반이 생겨났고, 1920년대 볼셰비키 정부가 겪은 고생의 근저를 이뤘던 농촌 보수성의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소농에 대한 지주의 장악력을 수십 년에 걸쳐 끊어내어 소농을 정치로 끌어들였는데, 그럼으로써 1949년 이후 권력 집중화에 커다란 장애물을 놓았다.유고슬라비아·중국·쿠바·베트남 혁명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옹호하는 뢰비의 두 번째 주요 논거로 가 보자. “1917년 이후 모든 혁명들은 … 혁명적 과정에서 정치적 리더십의 성격을 통해 오직 간접적으로만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프롤레타리아는 직접적으로 혁명의 사회적 주체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혁명 정당도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이고 유기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이는 베트남·중국·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서 산업 노동자 당원의 비중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뜻이다.(쿠바는 경우가 약간 다른데, 카스트로가 집권한 뒤에 비로소 “혁명 정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이 정당들의 계급 구성만을 이유로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고 본다면 이는 “사회학적 환원론”이라는 것이다. 핵심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 정당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자본주의의 폐지 등)을 지지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강령적 표현이었다. 둘째, “그 정당들의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적이었고, 당원과 그 주변이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가치와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체계적으로 교육받았다.”
두 번째 점을 먼저 살펴보자. 물론 어떤 당이 노동계급으로 구성됐다고 해서 그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이익”을 대변한다고 추론할 수 없다. 영국 노동당을 보라. 노동운동 안에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당과 여타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겨냥해 레닌은 “자본주의적 노동자 정당”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떤 조직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조직이 공언하는 이데올로기를 보긴 해야 하지만, 그것만 봐서는 안 된다. 허다한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하는 주장으로 판단한다면, 자본주의는 이미 수도 없이 철폐됐을 것이다. 확실히 정당의 실천을 봐야 하고, 특히 그 정당이 상이한 계급들과 관계 맺는 실천을 봐야 한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정당이었다. 주로 그 당의 이데올로기와 구성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 노동계급과의 관계, 즉 당의 일상 활동이 러시아 노동자들과 체계적인 연관을 맺으며 짜여졌기 때문이다. 확실히 레닌·트로츠키·그람시 등이 코민테른에서 ‘좌익’ 공산주의와 벌인 투쟁은, 노동자 정당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 관계를 맺어야만 존재할 수 있음을 확고히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이데올로기·구성·실천 등 상이한 요소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전 그룹 시기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구성 면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았지만, 이데올로기 면과 가능한 한 실천 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 훨씬 더 중요한 예를 들자면, 1920년대 초에 볼셰비키당은 오로지 이데올로기와 역사 때문에 노동자 정당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경험이 보여 주듯,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정당의 성격이 바뀔 개연성이 있다.
17 뢰비의 경우 그가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이력 때문에 그 오류가 특히 안타깝다. 유고슬라비아·중국·베트남 공산당의 “당원들과 그 주변”은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적으로 변질된 마르크스주의의 “가치와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체계적으로 교육받았다.” 뢰비는 예컨대 마오쩌둥의 저작들에 담겨 있는 스탈린주의적 입장을 잘 잡아내 비판할 수 있지만 그로부터 아무런 보편적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는 듯하다.
어느 경우에도, 정치 조직의 계급적 성격을 그 조직이 공언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심각하게 일탈하는 것이다. 일관되게 그렇게 하면 관념론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샤를 베틀렝의 저작이 그 좋은 사례다. 베틀렝은 “볼셰비키의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경제주의”라서 러시아 혁명이 변질됐다고 본다. 마찬가지 기준에서 베틀렝은 중국 문화혁명을 노동계급이 행한 구실이 아니라 관련된 이데올로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봤다.뢰비는 이런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계급적 성격과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하는 주관주의적 극단과는 반대로, 1917년 이후 혁명들에서 “프롤레타리아적” 리더십이 존재했다는 뢰비의 주장에는 객관주의적 극단이 담겨 있다. 이 생각인즉슨, 이 혁명들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스탈린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신념과 무관하게 순전히 사건들의 압력에 밀려 그들이 부르주아 질서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지는 뢰비가 쿠바 혁명을 논할 때 가장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뢰비는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거론할 수 없는데, “옛 쿠바 공산당의 후신인 대중사회당PSP이 혁명에서 아무런 의미 있는 구실을 하지 못했고, 혁명의 실질적 지도부인 반란군과 ‘7·26 운동’[피델 카스트로의 자유주의-민주주의적 운동 – 캘리니코스]은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구성 면 모두에서 ‘프롤레타리아 전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7·26 운동’이 1958∼1959년 바티스타를 타도한 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 대거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진정한 기폭제는 혁명적 과정의 논리 자체였다. 첫째, ‘7·26 운동’이 1959년까지 빈농과 그 뒤 프롤레타리아와 맺은 역동적인 관계. 둘째, 새로운 정치의 장이 억압적인 국가 기구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 셋째, 최초의 혁명적-민주주의 개혁으로 촉발된 제국주의 및 민족-부르주아지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
18 첫째, 이런 주장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하려면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구실이 필수적이라는 레닌주의적 테제와 모순되는 듯하다. 달리 표현하면, 왜 “혁명적 과정의 논리”가 선택적으로 작용해 어떤 경우에는 혁명을 가져오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가? 순전히 객관적인 요인들로 치면, 뢰비가 다룬 사례들보다 1918∼1923년 독일이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에 훨씬 더 유리했다. 트로츠키는 독일에서 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근본에서 효율적인 혁명적 리더십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명백히 뢰비가 틀렸는데, 뢰비의 주장은 역사가 헤겔의 “이성의 간지”처럼 작동해 혁명이 어디에서 일어날지를 정하고, 행위 주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회주의 혁명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썼듯이, “이런 식으로 혁명의 연속적 성격은 역사에 우선하는 법칙이 되고, 지도부의 정책과 혁명적 사건들의 물질적 전개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이 된다.” 19
이런 주장에는 원칙 수준에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피에르 후세는 이를 베트남 공산당 연구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개진하는데, 호치민이 객관적인 조건들 때문에 “경험적으로” 스탈린주의와 결별하고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완성하려고 투쟁하게 됐다고 주장했다.두 번째 난점은 혁명적 과정의 결과에서 나온다. 뢰비의 주장은 다시 한 번 순환 논법에 빠진다. 1917년 이후 혁명들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유고슬라비아·중국·쿠바·베트남 정권이 취한 조치들, 특히 사유재산의 국유화로 입증된다는 것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를 위한 충분조건인가 하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쟁점 중 하나다.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 역자]는 뢰비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태생의 관료 국가들”이 사실 국가자본주의고 따라서 우리는 국유화와 반자본주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뢰비는 카스트로가 혁명 이후에 사유재산을 몰수했다는 것만으로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을 지지”했음을 논증할 수 없다.
내 생각에, 방금 전의 주장들은 유고슬라비아·중국·쿠바·베트남 혁명이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지지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전혀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
20 그 이론은 불가피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규정한 것이 아니다. 대개 충족되지 못한 특정한 조건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역사적으로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다룬 이론이다. 그런 조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적 리더십을 따르는 계급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다. 이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연속혁명론에서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데, 연속혁명론을 정식화할 때 트로츠키가 레닌주의적 당 개념을 거부하고 정당을 그저 교육과 선전의 수단으로 봤기 때문이다. 한 부르주아 논평가는 트로츠키의 견해를 다음 같이 요약했다. “정당은 혁명 이전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혁명적 시기에는 노동자의 조직이 아니고 노동자들(과 소비에트)의 부속물이 된다.” 21 프롤레타리아가 일단 투쟁에 참가하면 필연적으로 혁명을 향해 돌진할 것이라는 것이다. 대중의 에너지와 열망을 권력 투쟁에 집중시키는 데서 혁명적 정당의 구실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트로츠키가 인정하게 된 것은 1917년이 돼서였다.
그러면 연속혁명론은 뭘까? 먼저, 연속혁명론이 대안의 이론이라는 점을 강조할 만하겠다.아무튼 레닌의 정당 이론 관점에서 볼 때, 노동계급이 혁명적 의식을 획득하고 그 결과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는 것은 분명 필연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지도로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 이래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적 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이 존재해 왔다. 식민지와 옛 식민지 세계에 존재하는 스탈린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력, 심각한 탄압, 소수 집단, 제3세계에서 때로 노동계급이 다른 근로 대중에 비해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점 등. 동시에, 많은 제3세계 대중들이 자기 나라의 객관적 상황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비롯한 급진적 변화를 열망했다. 프롤레타리아와 민족 부르주아지가 취약해서 생긴 사회적 공백은 다른 사회 계층, 즉 지식인들(이들은 전통적 프티 부르주아지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이 메웠다. 뢰비는 이 집단이 제3세계 혁명들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구실을 했고, 이는 트로츠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 전개였다고 옳게 지적한다. 그러나 “반제국주의적 지식인”이 1917년 이후 혁명들을 지도하면서 반자본주의 세력이 됐다고 뢰비가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확실히 그들은 해외 자본과 현지 민간 자본에 적대적이었고, 권력과 이윤으로부터 배제돼 있었다. 이 점이 예컨대, 카스트로가 대규모 국유화를 단행한 의도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런 류의 조치들은 국가를 통제하는 자들, 즉 당의 권력 독점에서 혜택을 보고 대중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중앙 정치 관료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지식인들이 보기에, 국가는 자신들과 민간 자본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단이자, 중앙집중화돼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자본 축적의 중심을 창출할 수단이었다. 이것이 토니 클리프가 “빗나간 연속혁명”이라고 부른 과정이다. 대중은 구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동원되지만, 자신들이 배제돼 있기로는 이전과 마찬가지인 신생 국가자본주의 질서에 종속되는 처지가 될 뿐이었다.
22 탈식민지화는 트로츠키가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듯하지만 [뢰비는 – 역자] 대체로 이런 주장과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방 자본주의 나라들이 경제 권력의 실질적인 지렛대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질·타이완·싱가포르·한국·멕시코·아르헨티나·인도 등 “신흥공업국”은 어떻게 볼 것인가?
고전적인 형태의 연속혁명론이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쟁점을 제기한다. 트로츠키가 생각했듯이 제국주의 시대에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오직 노동자 권력의 수립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 문제에서 의심이 없었다. “부르주아적 발전이 지체된 나라들, 특히 식민지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연속혁명론이 뜻하는 바는, 오직 피지배 국민, 무엇보다 농민 대중을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통해서만 민주주의와 민족 해방을 위한 과제를 완전하고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23 두 사람은 타당하고 중요한 주장을 많이 한다. 산업화 자체를 부르주아 혁명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 서방 자본의 요구에 가장 고분고분한 바로 그 나라들에서 산업화가 일어나곤 한다는 점, 산업화됐다 해도 위기에 빠진 세계경제의 운명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는 점 등.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예컨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완전하고 진정으로 해결”한다는 견해는 오늘날 제3세계 나라들에 지나치게 높은 기준치 아닌가? 뢰비는 트로츠키를 따라 세 가지를 “완전하고 진정한 해결”의 기준으로 간주한다. 자본주의 이전 착취 양식의 폐지라는 점에서 대토지 해체 등 농업 문제 해결, 민족 해방, 민주공화국 수립. 지금 뢰비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단지 하나의 사례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논리에 빠져드는 이유를 알 만한데,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모델로 삼고 군주제 폐지, 민족 통일과 독립, 농민에게 대토지 분배하기 등 프랑스 혁명의 고유한 특징을 “진정한” 부르주아 혁명의 필수 요소로 간주한다. 물론 뢰비도 인정하듯, 문제는 주요 자본주의 열강 대부분이 이런 모델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국 혁명에서 주된 수혜자는 준자본가·지주 계급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토지 지배력을 확고히 하고 군주제가 아니라 국왕들만 제거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그람시가 “수동 혁명”이라고 부른 것을 겪었는데, 봉건 지주들이 산업 자본주의에 점점 자진해 협조하게 되면서 낡은 사회 구조들의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고 남게 됐다. 그러나 뢰비는 자신이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들에 적용한 것보다 더 엄격한 조건들을 제3세계에 적용한다. 그러면서 뢰비는 “지금까지 세 가지 혁명적-민주적 변혁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나라들이 없고, 그 결과 폭발적이고 해결되지 않은 모순들이 그 나라들 사회 구조의 핵심부에 존속되고” 있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완전하고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진실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이 맞다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경우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 나라들에서는 봉건적 농촌 질서의 잔재들이 해당 세기 전반부 동안 벌어진 정치적 격변에서 중요한 요인이었다.
뢰비와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런 사태 전개가 연속혁명론의 가설이 틀렸다는 뜻임을 인정하지 않는다.24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에 답하려면 실증적 조사가 필요하고, 이 글에서는 더 다룰 수 없다. 만델의 희미한 확신보다 더 복잡할 듯하다. 내 생각에, 뢰비는 이 점을 알고 있지만 정설 트로츠키주의에 깊이 빠져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완전하고 진정한 해결”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비록 정치 질서를 민주화하거나 봉건적 사회 질서를 제거하지 못했을지라도 자본 축적의 자율적 중심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느냐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을 판단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 과정이 순전히 경제적일 수는 없는데, 축적을 가능케 하는 구조를 제공하고 어느 정도는 실질적으로 조직까지 하는 국민국가의 구실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제3세계의 핵심 문제는 서방 다국적 기업의 통제를 받든 현지 세력의 통제를 받든 산업화를 이루는 정도에 관한 것이다. 종종 현지 세력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는데, 그들을 민간 자본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산업화에서, 심지어 자유방임주의의 진열장인 동남아시아에서조차 국가가 중추적 구실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끝으로, 뢰비가 오늘날 연속혁명을 논할 때 놀랍게도 빠져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트로츠키의 전망이 지극히 국제적이라는 것을 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경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뢰비는 제3세계 혁명들의 국제적 맥락과 그 혁명들에 가해지는 국제적 제약을 일절 다루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베네수엘라나 이집트가 세계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줘야 할 때만 세계 자본주의를 언급할 뿐이다. 뢰비는 세계경제가 “프롤레타리아 태생의 관료 국가들”을 형성하고 왜곡하는 방식, 즉 특정 선택을 강요하고 매우 부족한 자원의 사용 우선순위를 부과하는 방식을 전혀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히 이것은 연속혁명을 검토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트로츠키는 사회주의가 한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면서 연속혁명론을 보편화했다. 둘째,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이른바 ‘노동자 국가들’에 가한 영향력이 최근에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코메콘[경제상호원조회의; 1949년에 창설됐고 1991년에 해체됐다 – 역자] 국가들이 서방에 진 부채가 엄청 늘어났고,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나라들이 세계경제에 점점 통합됐으며, 중국 경제가 해외 무역과 투자에 부분적으로 개방됐다. 이 모든 것은 연속혁명론과 특히 세계 혁명의 필요성을 아주 분명하게 확증시켜 준다. 연속혁명론의 열렬한 옹호자인 뢰비가 왜 이런 사태 발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25 그런 뢰비가 다른 사회 세력이 노동계급을 대행해 “구세주”로 행동한 것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애석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뢰비가 “프롤레타리아 태생의 관료 국가들”이 그럭저럭 자본주의를 능가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 뢰비의 저작이 가진 핵심적 약점이 있다. 뢰비의 예리한 고전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엄격함,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헌신이 정설 트로츠키주의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무뎌졌다. 뢰비가 1917년 이후 혁명들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과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들을 다루는 데서 보이는 형이상적인 모호함은 한편에서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실제 역사 발전 사이의 충돌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설 트로츠키주의 때문이다. 편협함이라기보다 혼란이 더 크다. 왜냐하면 특히 정설 트로츠키주의 문제에서 뢰비가 정설적 입장의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계속 그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명확성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뢰비는 청년 마르크스를 다룬 훌륭한 저작에서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중심에 놓는 역사 유물론이, 부분적으로는 자코뱅한테서 물려받았고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그토록 흔했던 “구세주”가 외부로부터 자비로운 개입을 통해 대중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관념과 어떻게 결정적으로 단절했는지를 보여 줬다.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두 가지 단서를 붙여 연속혁명론이 여전히 타당하다고 본다. 첫째,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리더십을 떠맡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가 떠맡지 못하면 다른 세력들, 특히 지식인이 그 공백을 메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거나, 제3세계에서 가장 흔한 민간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불안정한 혼성체일 것이다.(짐바브웨·앙골라·이집트·이란·니카라과를 생각해 보라.) 둘째, 일부 옛 식민지 국가들이 자본 축적의 자율적 중심으로 부상하는 “수동 혁명” 과정을 선험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인도와 브라질은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례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라들에서 제기될 민주적 요구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1918년 이전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실질적인 보통선거권과 의회 통치를 성취하지 못했다.
이런 단서들이 세계 체제의 관점, 불균등 결합 발전의 법칙 같은 트로츠키의 중요한 혁신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 연속혁명론은 후진국들에만 적용한 것이었다 — 과 트로츠키 추종자들이 때때로 잊어 버리는 듯한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주
- Löwy 1981. 이 글에서 인용된 부분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 온 것이다. ↩
- Trotsky 1969, p. 146. ↩
- Novack 1972, 4장과 Knei-Paz, 1978, pp. 62–107에 이 개념에 대한 토론들이 있다. ↩
- Trotsky, 1970, p. 19. ↩
- Trotsky, 1967, i, p. 23. ↩
- 위의 책., i, pp.22-3. ↩
- 러시아 혁명의 성격을 둘러싸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벌인 논쟁에 대한 가장 좋은 논고는 Geras, 1976 2장이다. ↩
- Trotsky, 1976, p. 129. ↩
- Trotsky, 1976에 실린 Letter to Alsky (29 March 1927), To the Politburo of the AUCP (B) Central Committee (31 March 1927), On the Slogan of Soviets in China (16 April 1927)을 보라. ↩
- Trotsky, 1969, p. 279. ↩
- Stalin, 1974와 Krasso, 1967을 보라. ↩
- Trotsky, 1970, pp. 20–21. ↩
- 이런 류의 분석들을 잘 반박한 것으로는 예컨대, Binns and Hallas, 1976을 보라. ↩
- Trotsky, 1973, p. 237. ↩
- Trotsky, 1976에 실린 Peasant War in China and the Proletariat (22 September 1932)를 보라. ↩
- Skocpol, 1979를 보라. ↩
- Callinicos, 1979를 보라. 앙리 베베르도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 Weber, 1981, pp. 58–9 n 13을 보라. ↩
- Rousset, 1975을 보라. ↩
- Trotsky, 1976, p. 349. ↩
- 콜린 스파크스의 정식이다. ↩
- Knei-Paz, 1978, p. 210, 5장. 정당과 관련해, 매우 그릇되게도 1917년 이전 시기에 집중하고(49쪽을 할애) 1917년 이후 트로츠키의 아주 중요한 정당 관련 논의를 사실상 무시한다(8쪽 할애). ↩
- Trotsky, 1969, p. 276. ↩
- Mandel, 1977, 2장. ↩
- Harris, 1978/9와 Harman, 1982를 보라. ↩
- Löwy, 1970, pp. 24ff. ↩
참고 문헌
P. Binns and D. Hallas, The Soviet Union – state capitalist or socialist? IS 91, September 1976
A. Callinicos, Maoism, Stalinism and the Soviet Union, IS 2:5, Summer 1979
N. Geras, The Legacy of Rosa Luxemburg, London 1976.
C. Harman, State capitalism, armaments and the general form of the current crisis, International Socialism 2:16, Spring 1982
N. Harris, The Asian Boom Economies and the “Impossibility” of National Economic Development, IS 2:3, Winter 1978/9.
B. Knei-Paz, The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of Leon Trotsky, Oxford 1978.
N. Krasso, Trotsky’s Marxism, New Left Review 44, July–August 1967
M. Löwy, La Theorie de la révolution chez la jeune Marx, Paris 1970.
M. Löwy, The Politics of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The Theory of Permanent Revolution, London: New Left Books 1981. [국역: 《연속혁명 전략의 이론과 실제》, 신평론, 1990. 절판.]
E. Mandel, Revolutionary Marxism Today, London 1977.
G. Novack, Understanding History, New York 1972.
P. Rousset, Le Particommuniste vietnamien, Paris 1975
T. Skocpol, States and Social Revolutions, Cambridge 1979
J.V. Stalin, On the Opposition, Peking 1974
L. Trotsky, 1905, Harmondsworth 1973.
L.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3 vols), London 1967. [국역: 《러시아 혁명사》, 아고라, 2017년.]
L. Trotsky, The Permanent Revolution and Results and Prospects, New York 1969. [국역: 《연속혁명·평가와 전망》, 책갈피, 2003.]
L. Trotsky, The Third International after Lenin, New York 1970. [국역: 《레닌 이후의 제3 인터내셔널》, 풀무질, 2009.]
L. Trotsky, Leon Trotsky on China, London 1976
H Weber, Nicaragua: the Sandinist Revolution, London 1981, pp. 58–9 n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