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츠키의 민주사회주의, 재생할 만한가?
한국에서 누가 카우츠키의 저작을 읽기는 하는가? 그렇지도 않은데 왜 이 시기에 한국에서 20세기 초 사상가인 카우츠키를 중요하게 (그러나 비판적으로) 다뤄야 하는가?
1 한국 좌파는 비록 한 지붕 아래에 있지는 않지만, 대략 주류 사회민주주의, 좌파 개혁주의(민주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혁명적 사회주의로 분립돼 있다. 독일 사민당의 경험은 이런 한국 좌파의 정치적 결정체들을 아는 데 역사적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 내부는 우파, 중간파, 혁명적 좌파가 분립해 있었다. 이 경향들은 각각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카를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표했다.특히, 카우츠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일부 급진좌파(가령, 옛 변혁당)가 지난 몇 해 동안 중간주의에서 좌파 개혁주의로 정치적 이동을 해 온 궤적을 분석하는 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카우츠키의 사상을 인용하며 따르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 카우츠키의 책을 읽는 좌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읽었어도 레닌이 비판한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거의 읽지 않았다. 물론 요즘에는 레닌을 인용하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융통성 없는 사람 취급당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일부 좌파의 주장과 실천을 보면 카우츠키주의와 닮은 데가 의외로 많다.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 선거 정치의 구실, 소비에트형 권력에 대한 태도,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 건설하고자 하는 정당의 성격 등 핵심 전략 문제들에서 그 유사성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카우츠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죽은 1895년부터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20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었다. 그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운동의 일원이었다. 카우츠키는 조직자는 아니었지만(의원도 아니었다), 독일 사민당이라는 조직에 기반을 둔 이론가로서 권위가 대단했다. 카우츠키는 1883년부터 제1차세계대전 때까지 사민당의 이론지 《노이에 차이트》(《신시대》)를 편집했다.
1910년경에 사민당 내부에서 우파와 혁명적 좌파가 첨예하게 대립하자, 카우츠키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외견상 헌신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면 관료적이고 보수적으로 돼 가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에서 주변화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 무렵 독일 사민당 안에서 카우츠키가 이끄는 중간파가 형성됐다. 1914년 독일 사민당이 카이저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카우츠키는 사민당 우파에 완전히 타협했다. 그러나 사민당 우파는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평화주의조차 못마땅하게 여겨, 1917년에 당내 반전파들을 쫓아내면서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도 쫓아냈다. 카우츠키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독립사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1920년 독립사민당이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을 결정하자, 카우츠키는 독립사민당 잔류파들과 사민당의 재통합을 지원했다.
독일 사민당 독일 사민당은 마르크스의 정치에 전반적으로 충실한 최초의 중요한 전국 정당이었다. 빌헬름 리프트네히크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1869년에 창당했다. 1875년에 페르디난트 라살이 창설한 비非마르크스주의 단체와 통합하면서 대표적인 독일 노동계급 조직이 됐다. 그러나 두 당의 통합 강령(‘고타 강령’)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이 개혁주의와 독일 국가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고타 강령 비판》). 사민당은 사회주의자탄압법(1878∼1890년) 때문에 12년 동안 반半합법 상태에 있었지만, 살아남았고 성장했다. 1891년에 많은 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적 강령으로 간주된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다. 레닌은 1899년에 에르푸르트 강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본받고 싶다고 조금도 겁내지 않고 말해야 한다. 좋은 것을 본받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으며, 기회주의자들이 그 강령을 모호하게 비판하는 것을 자주 듣는 요즘 그 강령을 지지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 뒤 독일 사민당은 제1차세계대전 때까지 한두 차례 실수를 했어도 극적으로 성장했다. 절정기에 사민당의 당세는 대단했다. 1914년에 당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 일간지 90종을 발행했고, 전체 판매 부수가 150만 부 가까이 됐다. 이뿐 아니라 여성 신문, 풍자 잡지, 체조 잡지, 심지어 속기사 저널 등 전문지도 여러 종을 발행했다. 사민당과 동맹한 자유노조의 조합원은 거의 300만 명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민당의 스포츠·문화 동우회에 입회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치른 1912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425만 표(35퍼센트)를 득표해 제1당이 됐다.
당시 독일의 정치 상황에서 사민당을 지지하는 행위가 정치적 부담이 뒤따르는 선택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카이저(황제)가 통치하는 독일의 공적 활동에서 ‘왕따’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이런 대중적 지지를 받은 정당이 국제 운동, 즉 제2인터내셔널의 구심 정당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독일 사민당은 국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1914년 8월 4일 환상이 깨졌다. 사민당의 제국의회 의원단은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했고, 카이저의 전쟁 기구를 충심으로 지지했다. 레닌이 사민당과 카우츠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둬들인 사건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보면 훨씬 더 잘 보이듯이,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사민당의 파산은 이미 그전부터 예비되고 있었고, 1914년 이후의 카우츠키가 1914년 이전의 카우츠키를 딱히 배신한 게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교황’ 시절에 이미 카우츠키에게 정치적 결함이 있었다.
에르푸르트 강령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시작해 보자. 이 강령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카우츠키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주의자들의 목적에 대해 초안을 쓴 일반적 진술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초안을 쓴 즉각적 요구들이 그것이다. 이 강령은 전쟁 때까지 사민당의 ‘공식 전술’의 근거였다. 그리고 카우츠키는 좌파적 반대파와 (더 자주) 우파적 반대파에 맞서 아주 정열적으로 이 강령을 변호했다.
그런데 강령의 후반부, 다시 말해 특수한 개혁 목록은 현실에서 가동되는 반면, 전반부는 메이데이 연설에서만 나타났다. 게다가 전반부가 혁명적인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획득하지 않고서는 생산수단 소유를 집단적 소유로 바꿀” 수 없다고 했지만, 노동계급이 어떻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우츠키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해설한 《계급투쟁》(1899년)에서 그 간극을 메우고자 했다. 노동자들이 의회를 통해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회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경제적·사회적·도덕적 저하 상태에서 구제해 낼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렛대다.” 카우츠키는 처음부터 의회적 길에 충실했던 것이다. 의회에서 다수당이 될 때까지 확실하게 야당으로 남아 있다가 마침내 다수당이 되면 그 지위를 이용해 자본가 계급의 재산을 완전히 몰수한다는 발상이었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죽을 때까지 견지한 정치 비전이었다. 비록 파리 코뮌의 패배부터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국가 분쇄 문제가 수면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입장이 혁명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카우츠키는 이미 초기부터 레닌주의적 의미의 혁명가는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마시모 살바도리는 이미 19세기 말에 국가와 민주주의에 관한 카우츠키의 관점이 소비에트 이론 및 실천과 충돌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만의 권력을 대표하긴 하지만, 자유 선거를 통해 수립되고 사회주의적 목적에 의회를 이용하는 정치 체제라고 봤다는 것이다.
의회 활용 같은 “평화적 계급투쟁 수단”과 혁명의 필요성 강조 사이에는 명백히 긴장이 존재한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조화시켰다.
그런데 카우츠키는 《권력으로 가는 길》(1909년)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를 패퇴시키고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 있다고도 했다.“민주적-프롤레타리아적 투쟁 방식”은 사회주의에 필요한 계급투쟁을 대체할 수 없는데,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적대감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의회 정치가 힘을 결집시킬 유일한 길이다. 이를 통해 카우츠키는 혁명이 평화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에 문을 열어 줬다.
의회에 대한 태도에서도 카우츠키의 사상이 중간주의적 성격임을 알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의식적인 계급으로서 의회 활동에 개입할 때마다 의회 제도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다. 더는 부르주아지의 손안에 있는 도구가 아니게 된다.”(에르푸르트 강령에 대한 1892년 논평)
혁명적 해석과 개혁주의적 해석 둘 다 허용하는 모호한 공식이었다. 한편에서는 의회 제도의 한계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계급 적대감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의회 제도가 노동계급의 압력을 받으면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을 완전히 잃을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의회를 다른 계급적 성격으로 바꾸면 의회를 통한 권력 수립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전망은 가능하게 된다.
사실, 카우츠키는 평화적 투쟁 수단이라는 믿음 말고는 노동계급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언젠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결정적 전투를 치르겠지만, 그동안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없다. 카우츠키에게 행동 지침으로서의 혁명 이론이 결여돼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그가 관심을 기울인 의회 정치 영역은 수정주의자들의 영역이었다. 수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회주의 실천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혁명이란 목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우츠키도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그런 때는 없다) 혁명의 목표를 영원히 미뤘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수정주의와 대중 파업 논쟁
카우츠키는 독일 사민당에서 10년 동안 벌어진 논쟁에서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투쟁을 지지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당내 우파를 반대한 덕분에 카우츠키의 활동은 급진적 풍미를 풍겼고, 그의 진정한 입장이 온건하다는 사실을 가렸다.
1896∼1899년에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자본주의는 근본에서 위기에 시달리지 않으며, 두 주요 계급으로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민당은 공공연한 사회 개혁 정당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반론들이 많이 제기됐다. 가장 유명한 반론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였다. 4 카우츠키는 다소 뒤늦게 그 논쟁에 뛰어들었고, 그의 베른슈타인 비판은 좀 밋밋했다.
그럼에도 카우츠키의 베른슈타인 비판은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1899년 사민당 당대회에서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결의안이 찬성 216명 대 반대 21명으로 통과됐다. 1903년 드레스덴 당대회에서는 더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카우츠키는 “드레스덴 결의안과 표결 결과는 정치적 요소로서 이론적 수정주의가 매장됐다는 뜻이다” 하고 논평했다.
그러나 자기기만적인 논평이었다. 수정주의 반대 동의안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가장 유명한 수정주의자들조차 찬성표를 던졌는데, 수정주의의 아버지 게오르크 폰 볼마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볼마르는 바바리아 지역의 사민당 지도자였는데, 1890년대 초에 농민 표를 더 확실하게 얻으려면 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사민당에서 처음으로 수정주의가 등장했다. 볼마르는 단지 농민만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바바리아에서 만만찮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와 손잡으려는 실용주의 정치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에르푸르트 강령의 정통성을 재천명했지만, 이빨이 숭숭 빠져 있어서 실천에서 수정주의적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카우츠키는 가장 유명한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과 함께했다. 1932년에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두 사람이 19세기 말에 벌인 논쟁은 “한갖 에피소드였을 뿐”이며, 전쟁, 혁명, 독일과 세계의 변동 등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같은 관점을 취해 왔다”고 말했다.
대중 파업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카우츠키는 좌파의 대변자를 자임했다. 독일 사민당 내 대중 파업 논쟁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끼치는 급진적 영향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1905년 예나 당대회에서 원칙적으로 대중 파업의 행사를 채택할 만큼 러시아 혁명은 사민당을 급진화시켰다. 대중 파업의 행사 가능성을 지지할 만큼 카우츠키도 급진화됐다.
그러나 카우츠키가 정치적 무기로서 (비록 조심스럽지만) 대중 파업을 지지할 태세를 보이자 사민당 안에서 노동조합·의회의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잠재적 충돌 과정에 놓이게 됐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보기에, 그런 전략은 계급의 적을 자극해 의회 정치가 이룩한 성과물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전율에 휩싸였다. 1905년 노동조합 대회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격한 어투로 대중 파업을 비난했다.
카우츠키는 노조 지도자들의 비난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기 왼쪽 세력들도 비판했다. 그들이 대중 파업을 실제로 행사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조처들을 말하려 하자 이를 막았다. 카우츠키는 대중 파업의 행사가 “생사를 건 투쟁”이 될 것이고, “혁명은 만들어질 수 없다” 하고 좌파에게 경고했다. 다시 말해, 대중 파업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전술이고 실제 행사는 무한정 연기돼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카우츠키에게 대중 파업은 언제나 전술이었을 뿐이었다. 이 점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대조를 이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자극받은 룩셈부르크는 《대중 파업론》(국역 제목인데, 원제는 The Mass Strike, the Political Party and the Trade Unions, 즉 《대중 파업, 정당, 노동조합》)이라는 걸작을 썼다. 이 책에서 룩셈부르크는 대중 파업이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위대한 혁명적 투쟁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자연 발생적이고 충동적인 형태이며, 자본과 노동 간 적대가 고조될수록 대중 파업은 더 효과적이고 결정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사민당 대표 아우구스트 베벨이 노조 지도자들의 압력을 수용했다. 베벨은 1906년 만하힘 당대회에 대중 파업과 관련된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인즉슨, 대중 파업 행사에 대한 이론적 가능성은 계속 주장하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조합원들의 지지 없이는 대중 파업의 실행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거부권을 가진다는 것이고, 그들은 확실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었다. 베벨의 결의안이 통과됐다.
카우츠키는 이를 두고 “노동조합 내부의 결정적 좌선회”라고 판단했지만, 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사민당에 결정적으로 관철시킨 것이었다. 이제 우파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실천에서 사민당을 드러내 놓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 룩셈부르크가 프로이센의 참정권 제한에 맞서 대중 파업을 행사해야 한다고 선동하자, 당 지도자들은 룩셈부르크의 글을 출판하지 못하게 막았다. 카우츠키도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며 룩셈부르크를 반대했다. 결국 카우츠키가 대변한 것은 노동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방대한 관료 집단의 이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카우츠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한 갈래가 아니라 다른 계급의 이론이었다.
전쟁, 제국주의, ‘초제국주의’론
독일 사민당은 성장을 거듭하며 1912년 제국의회에서 제1당이 됐다. 의회를 통한 평화적 “혁명”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혁명 사업을 완전히 피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당내에 만연했다.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의회가 부르주아 정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초점이 되는 한, 의회 정치가 노동계급에게 실질적 권력을 가져다줬는가 하는 시험을 피할 수 있었다.
점점 위협적으로 돼 가는 전쟁 위험 속에서 치른 1912년 선거에서 사민당 지도부는 친제국주의적 부르주아 정당인 진보당과 선거 협약을 맺었다. 선거주의가 반군국주의를 압도한 것이다.
또, 1913년에 사민당 의원단은 군비 지출을 위한 세금 인상에 처음으로 찬성했다. 직접세가 포함됐다는 이유에서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태 전개를 정확하게 내다봤다. “우리 의원단의 결의안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에 참전하게 될 것이고, 전쟁 비용을 직접세로 충당할지 간접세로 충당할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며, 그리되면 논리적으로 전쟁 공채 찬성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룩셈부르크의 예견대로, 세계 전쟁이 다가오자 사민당 지도부는 군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사민당은 전쟁 직전에 베를린에서만 27차례 반전 집회를 열었지만, 막상 독일 정부가 전쟁에 참전하자 1914년 8월 4일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카우츠키는 그 전날 밤에 사민당의 제국의회 의원단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카우츠키는 전쟁 공채 발행 찬성을 지지했다. 카우츠키는 전시에 사회주의자들의 우선적 임무는 당의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봤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영국 노동당 좌파도 러시아와 나토 둘 다 비판하는 성명에 연명했다가 당내 우파의 압력을 받고는 당의 단결을 앞세우며 서명을 철회했다. 이들에게는 전쟁 반대보다 당의 단결이 우선한다. 영국 노동당을 통해서는 반전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사민당 의원들의 전쟁 찬성은 노조 지도자들의 사회적 휴전과 한 세트였다. 노조 관료들이야말로 사민당의 실세들이었다. 이들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에 통합되는 민족주의 경향이 있다. 또, 전쟁을 반대했다가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성과물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 합법주의가 강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가 시작한 전쟁은 오직 정부에 의해서만 끝낼 수 있다고 봤다. 카우츠키는 전쟁 문제에서도 당·노동조합 관료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것이다.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관점은 매우 한심스럽게 바뀌었다. 제1차세계대전 초기에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론을 주장했다. 제국주의는 대자본의 정책적 선택이지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카우츠키에게 전쟁은 군수업 같은 특정 자본 부문에만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레닌과 룩셈부르크와는 달리,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와 전쟁을 자본주의와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에서는 대기업들이 국가들에 압력을 넣어 경제 경쟁, 무역, 원료 접근에 대해 국제적 합의에 이를 것이고, 그리하여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카우츠키가 보기에 전쟁은 자본가들의 실수이며,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을 지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실수였다. 카우츠키는 평화주의적 견지에서 전쟁을 반대했고, 자연히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제한적이고 합법적인 근거에 따랐다.
9 게다가 세계 전쟁이 발발하자 카우츠키는 자신의 과거 입장을 수정해, 사회주의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 더는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10
카우츠키는 사회주의자들이 방어적인 전쟁과 공격적인 전쟁에 대해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교전 상대국의 체제 성격에 상관없이 자국의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이전 입장을 폐기했다. 또, 대중 파업으로 전쟁을 반대하자는 제안을 거부했고, 제2인터내셔널이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은 오직 평화 시에만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조국 방위의 필요성”을 인정했다.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적·의회적 길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전쟁 등 폭력은 이 길의 장애물이었다. 그는 전쟁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에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반전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을 분리시킨 것이다. 카우츠키는 전쟁이 끝나면 ‘제자리’로 — 자본주의의 평화로운 확장과 점진적인 민주화 —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활동해야 한다. 오직 자본주의의 평화로운 발전과 완만한 민주화 활동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
11 카우츠키 같은 전쟁 변호론자들을 비판했다. 룩셈부르크는 전쟁을 반대하는 데 실패한 제2인터내셔널을 비판하며 새로운 혁명적인 반제국주의적 인터내셔널을 창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민당 내 혁명적 좌파의 입장은 레닌의 입장과 가까웠다.
사민당 내 혁명적 좌파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을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 내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주적은 국내에 있다”고 주장했고,어처구니없게도, 독일 사민당 우파는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슬로건을 채택하며 자신들의 조국 방위 정책을 옹호했다. 그들은 봉건적인 차르 체제가 더 문제고, 독일은 식민지가 별로 없고 독일의 적들이 훨씬 더 많은 식민지 인민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따라서 러시아가 패배하는 게 낫고 독일의 승리는 “차악”으로 간주됐다. 사민당 우파가 ‘혁명적 패배주의’ 슬로건을 채택한 것은 독일 지배계급을 지지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더 젊고 더 강력한 강도(독일)가 과식한 늙은 강도를 털도록 돕는 게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밝혔다. 레닌은 《사회주의와 전쟁》이라는 소책자에서 싸우는 노예 소유주들을 비유로 들었다. “100명의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가 200명의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경우에 ‘방어적 전쟁’이나 ‘조국 방위 전쟁’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수일 것이며, 실천에서는 영악한 노예주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독일은 식민지 해방이 아니라 식민지 민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나눠 갖기 위해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의 승리를 “차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르주아 정의”의 관점일 뿐이었다.
그래서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강도들” 간의 전쟁을 이용해 강도들을 전복해야 한다는 관점에 타협하지 않았다. 즉, 제국주의 간 전쟁에서 러시아(독일) 사회주의자들의 핵심 임무는 차르(카이저)에 맞서는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의 노동계급과 모든 인민의 관점에서 ‘차악’은 차르 전제정과 그 군대의 패배”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극단주의와 ‘막대 구부리기’를 통해 레닌은 혁명가들과 사회주의 애국주의자들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해 줬다.
차르의 군사적 패배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위한 길을 열 것이라는 레닌의 예측은 옳았다. 독일의 군사적 패배도 마찬가지로, 이듬해 독일 혁명을 가능케 했다. 물론 일반으로 패배와 혁명을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패배가 반드시 혁명을 가능케 하지 않고 반동에 이용될 수도 있다. 가령, 1917년 러시아에서 총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과 임시정부 수반 알렉산더 케렌스키 등이 (페트로그라드 포기 또는 ‘차악’인 독일에 의한 러시아의 패배 같은) 군사적 차질을 빚어 반혁명의 승리에 이용하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전시 조건임에도 가능한 한 높은 수준의 선동 활동과 정치 활동을 지속함으로써 패배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었다.
반면, 카우츠키는 정반대로 되도록 빨리 전쟁 이전의 평시로 돌아가 사회주의 운동을 재개하고 싶어 했다. 레닌이 전쟁 동안에 카우츠키를 아주 위험한 인물로 본 이유다. 노동자들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우파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결별하기 시작했지만, 카우츠키의 정치는 그 노동자들이 혁명적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전 직후에 그 점이 입증됐다. 격화되는 제국주의의 위기와 전쟁은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에 존재하는 심각한 모호함을 밝히 드러냈다.
의회민주주의 대 소비에트
제1차세계대전 직후 중간주의자들은 대부분 말로는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금방 그 혁명을 비판했다. 카우츠키의 글들에는 마르크스주의 용어들이 가득했지만, 카우츠키의 주장은 근본에서 개혁주의자들과 일치했다.
레닌이 1914년 전에 카우츠키를 칭송한 한 가지 이유는, 카우츠키가 1905년 혁명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멘셰비키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의 이런 태도는 러시아 예외주의에서 비롯했다. 러시아에는 실질적인 민주적 제도들이 없기 때문에 평화적 투쟁 방식이 가능하지 않고, 민주주의는 (심지어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오직 혁명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혁명의 대체물일 수가 없었다.
카우츠키는 러시아와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산업화한 지역 중 하나인 폴란드를 휩쓴 거대한 파업 물결을 보며, 무장봉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으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우츠키의 대담함은 러시아 “예외주의”를 넘어서지 않았다. 카우츠키는 이론적으로는 정치적 대중 파업을 러시아 국경 너머로 일반화할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실천에서는 빠르게 그 생각에서 후퇴했다. 독일 사민당의 혁명적 좌파,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0년에 당이 운동을 전진시킬 요구로 정치적 대중 파업을 채택하라고 선동하자, 카우츠키는 반대했다. 독일의 조건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우츠키의 반대는 단지 전술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나라의 헌법이 더 민주적일수록 대중 파업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런 파업은 대중에게 필요 없으며 따라서 보통 일어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가 선거권을 충분히 가진 곳에서 대중 파업은 오직 방어적 조처로만 간주된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성장이 대중 파업을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 전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중 파업은 기껏해야 의회 활동의 보완재에 지나지 않는다.
카우츠키가 소비에트의 정치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런 이해 부족은 적어도 소비에트가 처음 등장한 1905년에는 봐줄 만했다. 러시아 혁명가들도 소비에트를 놓고 논쟁했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민주주의 독재”의 맹아로서 소비에트의 잠재력을 봤다. 새로운 형태의 국가 권력이자 피착취자와 피억압자가 민주적으로 사회를 통치하기 위한 표현체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반면, 멘셰비키는 소비에트를 고작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권력을 쥐여 주는 데 일조하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멘셰비키가 혁명의 목표를 의회민주주의의 수립으로 봤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에게 소비에트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권력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레닌의 입장이 멘셰비키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약점도 있었다. 소비에트가 통치하는 “민주주의 독재”가 차르에게서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혁명이 부르주아 한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레닌의 가정을 고려하면 일시적 국가 형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즉, “민주주의 독재”는 제헌의회로 대체돼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될 것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논쟁의 중심에는 바로 이 애매함(소비에트형 권력이 최고인지 아닌지에 관한)이 있었다. 1905년 “민주주의 독재” 시나리오에 충실한 “옛 볼셰비키”는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는 한에서 임시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레닌은 이 시나리오가 사건의 실제 과정 속에서 쓸모없어졌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의 새로운 임무는 권력 이양 과정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때 카우츠키는 자신의 “예외주의” 논리에 충실했다. 비非의회적 세력은 오직 의회 정치의 등장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가 카우츠키가 갈 수 있는 최선이었다. “민주적” 방식(즉, 의회 다수파가 되는 것) 말고는 사회주의로 가는 다른 경로는 없다. 따라서 1917년에 그 잠재력이 발현된 소비에트는 온전히 민주적이지 못하므로 카우츠키가 거부해야 하는 것이었다. 1918년에 카우츠키가 제헌의회를 해산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를 비판한 이유였다. 카우츠키는 소비에트에서 보통선거권이 행사되지 못하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민주주의”를 역행했다고 비판했다.
1918∼1919년 독일 혁명 과정에서도 카우츠키는 노동자 평의회를 혁명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옛 제국에서 새로운 공화국으로 이행하는 시기에만 존속하는 일시적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1918년 12월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트란스코카시아공화국의 멘셰비키 정부가 카우츠키를 고문으로 모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카우츠키는 1919년 9월부터 1920년 1월까지 그 나라를 방문했다.
정당 개념
. 14 카우츠키는 경제결정론과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에 근거한 대기주의 입장을 간직했다.
카우츠키 사상의 결함은 그의 정당 모델에도 투영됐다. 카우츠키는 독일 사민당이 “혁명적 정당이었지만 혁명을 만드는 정당은 아니었다” 하고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혁명이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 없고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봤다. 이것이 실천에서 뜻하는 바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대기하는 … 수동적 급진주의 이론”이었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자신들을 대행해 권력을 쟁취할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의회 정치를 지지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됐다. 크리스 하먼은 카우츠키가 “노동자들이 당과 무관하게 ‘시기상조’인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거의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듯했다”고 지적했다.당의 의회주의 전략이 얼마나 성공했는지가 실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우선순위는 이데올로기적 응집력이라는 점에서의 일치보다는 크기라는 점에서의 단결일 것이다. 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정당은 불가피하게 의식의 불균등성을 반영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사회주의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면, 불균등한 대중 의식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와 노동계급 일반을 동일시하지 않고 구별했다. 노동계급이 혁명적 상황에서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저절로 혁명을 지지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것이 레닌의 최대 강점이었다. 바로 이 점 덕분에 볼셰비키는 제1차세계대전 초기의 광적 애국주의에 무너지지 않은 유일하게 중요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됐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혁명을 성공적으로 지도한 유일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됐다. 처음에는 차르 체제 때문에 볼셰비키가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약간 이상한 사촌이 된 것쯤으로 생각됐지만, 어찌됐든20세기 초까지 볼셰비키는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 패밀리의 일부로 여겼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실천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고, 이 차이 덕분에 볼셰비키는 카우츠키가 사문화시킨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혁신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결론 — 카우츠키가 오늘날에 중요할까?
카우츠키가 변호한 좌파 개혁주의적인 정치 실천이 2010년대 동안 각광받았다. 그 시기에 좌파 개혁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스 시리자를 지지하거나 샌더스의 선거 운동에 참가하거나 제러미 코빈을 지지하기 위해 영국 노동당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카우츠키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카우츠키의 사상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좌파 개혁주의 경향의 미국 잡지 《자코뱅》에 실린 글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 아니다. 버니 샌더스의 선거 운동 조직자였던 에릭 블랑은 이렇게 썼다. “카우츠키의 급진적 민주주의 버전은 마르크스주의 정치에서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 훌륭한 출발점이다. … 우리는 현실주의 전략 없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먼저 민주적 선거에서 승리해야 반자본주의적 파열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대중적 정통성과 힘을 가질 것이다.”
17 즉, 혁명과 노동자 투쟁은 사회 변화에서 중심적인 구실을 하지 못하고 보조적 구실에 머문다. 게다가 선카라는 민주당과의 결별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래로부터의 도전을 좌절시키려는 순도 100퍼센트 자본주의적 선거 구조물이다. 18
《자코뱅》 편집자 바스카 선카라도 의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다수파를 차지하고 좌파 대통령이 선출될 때 미국에서 사회주의 사회가 시작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선거적 길이 있다는 것이다. 선카라는 좌파에게 선거주의 문제가 있고 거리 행동과 파업을 통한 대중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사회주의가 혁명과 노동자 투쟁보다는 선거를 통해 도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리스 시리자, 스페인 포데모스, 영국 노동당의 코빈 등이 차례로 몰락하거나 대중의 실망을 샀고, 미국 민주당 내에서 변화를 꾀한 샌더스가 결국 바이든의 간판 구실을 하면서 좌파 개혁주의의 물결은 썰물로 변했다. 이들은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의회주의 모델에 머무르는 프로젝트들이었다. 찰리 킴버는 좌파 개혁주의를 “겉가죽만 다른 똑같은 짐승인 ‘노동당 2.0’”이라고 불렀다.사실, 국제적으로 2010년대의 좌파 개혁주의의 부상과 실패는 처음 보는 현상이 아니었다. 1970년대 유러코뮤니즘이 역사적 선례다. 그것은 이론적 수정이었다. 그들은 “민주적인” 나라들에서는 소비에트 권력 모델이 더는 적합하거나 작동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국가 전복” 문제가 아니라 의회 제도를 활용해 국가가 사회 진보를 막는 데 이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시리자가 바로 유러코뮤니즘 혈통이다. 그러나 매우 심화된 자본주의 위기에 압착된 시리자는 집권한 지 몇 달이 안 돼 자신을 지지한 노동계급을 배신하며 평범한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신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일부 좌파들이 아직 오지 않은 좌파 개혁주의의 밀물을 기대하며 기회주의적 이합집산을 하고 있다. 이들은 따분한 노동조합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노동계급 속에 뿌리를 내린 혁명적 정당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와 분리된 고립된 섬이 아니므로, 국제적 경험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한국의 정치 상황 전개가 다른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불균등 결합 발전의 법칙이 작동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붕괴한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의 경험을 한국에서 되살리려 하는 시도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좌파 개혁주의자들은 단명한 러시아 혁명 말고는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이 없지 않냐고 말한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의회를 통해 수립된 적은 없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일터와 거리에서 대중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그곳에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노동계급의 힘이 잠재해 있다.
주
- 하먼 2007. 제1장에서 독일 사민당과 사민당 내 혁명적 좌파의 세력 관계를 요약하고 있다. ↩
- 레닌 1899, p93. 번역을 조금 바꿈. ↩
- Salvadori, Massimo, Karl Kautsky and the Socialist Revolution 1880–1938 (Verso), p12, 1990. Corr and Jenkins 2014에서 재인용. ↩
- 김인식 2021. ↩
- 몰리뉴 2005, p74. ↩
- 룩셈부르크 1995, p84. 번역을 조금 바꿈. ↩
- 몰리뉴 2005, p69. ↩
- Phillips 2020. ↩
- Jenkins and Corr, 2014. ↩
- Jenkins and Corr, 2014 ↩
- Liebknecht 1915. ↩
- 레닌 2017, p32. 번역을 조금 바꿈. ↩
- 클리프 2009, p41. ↩
- Jenkins, Gareth and Kevin Corr, 2014. ↩
- 하먼 2012, p35. ↩
- Blanc 2019. ↩
- 선카라 2021. ↩
- Phillips 2020. ↩
- 킴버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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