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그로스만과 자본주의 붕괴 논쟁
1 헨릭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을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왜곡에서 지켜 준 인물이었다. 헨릭 그로스만이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에 기여한 공헌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자.
2021년 7월 헨릭 그로스만의 책 《자본주의 체계의 축적과 붕괴 법칙 — 동시에 위기이론》(실크로드 출판)이 번역 출판됐다.헨릭 그로스만은 1881년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태어났다. 크라쿠프는 17세기 초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연방국가의 수도였고, 폴란드의 정치·경제·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그로스만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폴란드사회민주당(PPSD)에서 활동했고, 대학생 시절에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폴란드사회민주당의 민족주의에 비판적이었을 뿐 아니라 유대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1905년에는 그로스만이 창립을 주도한 유대인사회민주당(JSDP)이 폴란드사회민주당에서 분리돼 나왔다. 이 단체는 1905~190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노동자 투쟁이 고양한 덕분에 성장해 회원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1908년 말 계급투쟁이 꺾이자 그로스만은 크라쿠프를 떠나 비엔나로 이사해 학계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1911년까지 유대인사회민주당의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지만 당의 일상적 활동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 그가 머물렀던 비엔나에는 오스트리아사회민주노동당이 있었지만 그는 이 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 당이 점점 더 개혁주의적으로 바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주의에 굴복하면서 유대인사회민주당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그로스만이 정치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 기간에 그는 학위 논문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 정책과 사상 그리고 사회 통계들을 연구했는데, 그 접근법이 마르크스주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제국의 초기 무역 정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밀한 연구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그로스만은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했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핵심으로 삼는 레닌주의 정치가 그의 경제 이론에서 핵심적 기둥이 됐다. 그는 1919년에 바르샤바로 와서 폴란드 중앙통계국의 선임연구원을 지냈는데, 이때 그는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을 깊이 연구했다. 또, 1920년에 폴란드공산당에 가입했다. 1922년 폴란드 자유대학의 교수직에 임명되기 전까지 여러 경제 문제에 대한 글을 썼는데, 거기에는 마르크스 이전의 정치경제학자였던 시스몽디에 대한 평론글도 포함돼 있었다. 폴란드 자유대학은 폴란드공산당이 주도하는 성인 교육 기관이었다.
폴란드 비밀경찰은 그로스만을 비롯해 공산당원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그는 1925년에 바르샤바를 떠나 비엔나로 갔다. 거기서 학계의 스승인 카를 그륀베르크의 도움으로 사회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대학교수 자격을 얻어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수 생활을 했다.
그로스만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다. 비록 독일공산당의 지지자이긴 했지만 폴란드인으로서 고국의 정치 상황이 가변적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이런 태도 덕분에 그는 당시 좌파들 사이에서 불었던 스탈린주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다. 1928년 스탈린은 반혁명을 통해 노동자 국가 러시아를 중앙 통제적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바꿨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소련 관료 집단의 이해관계에 종속시켰다.
그로스만은 1927년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연구소에서 자리를 잡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가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이 그의 삶과 대조를 이룬다.
노동계급 투쟁
그로스만은 학창 시절 좌파 단체를 결성해 노동자 투쟁에 관여할 때나 1920년 폴란드공산당에 가입해 공산주의 운동을 펼칠 때에도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이라는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로스만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의식을 바꾸고 더 나아가 물질 세계를 변형시키는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로스만은 유대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오토 바우어의 문화적 민족주의에 비판적이었다.
1919년 이후로 그로스만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는 두 가지 견해를 비판했다. 하나는 그가 사회민주적 ‘신조화주의’라고 부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지 않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최신 조류들이었다.
카를 카우츠키뿐 아니라 그로스만과 동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루돌프 힐퍼딩, 오토 바우어 등은 경제 위기를 상이한 산업 산출물들이 불비례하게 생산되는 데서 비롯하는 것으로 설명했으며, 의회주의 국가의 정책으로 주요한 경제 변동을 제거하면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힐퍼딩과 바우어는 1920년대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핵심 지도자들이었다. 힐퍼딩은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의회에서 사회민주당을 대표했으며, 1923년과 1928~1929년에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오토 바우어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입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정설을 고수한다고 했지만 독일사민당에서 일찍부터 수정주의를 주장했던 베른슈타인과 같은 실천적 결론을 도출했다.
그로스만은 사회주의의 주된 장애가 혁명적 의지의 결여라고 생각한 프리츠 슈테른베르크의 주의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 초반에 일부 공산당들이 가졌던 정치였고, 1928∼1934년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보였던 정치 노선이었다. 이 시기 코민테른은 자본주의가 1920년대 중반의 정치적 안정기를 지나 전반적 위기를 겪으며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제3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로스만은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위기를 초래하는 경향을 갖고 있지만 항상 혁명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객관적 상황이 지배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때에만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 능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그로스만이 개혁주의와 주의주의를 비판할 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을 주요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와 《자본축적론》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그로스만은 오토 바우어의 비판에 맞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방어했다. 하지만 제2인터내셔널 개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재 부문 생산과 소비재 부문 생산 사이의 불비례 때문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오류를 지나치지는 않았다. 그로스만은 자본주의가 붕괴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당시 좌파의 주류적 입장보다 더 우수한 대안적 설명을 제공했다.
만약 자본주의가 생산을 지속할 수 있다면 노동자 계급은 생산된 부의 일부를 임금으로 받으면서 경제적 문제는 일시적으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로스만은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에 쉽게 순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같은 노동자 계급의 일상적 투쟁은 계속될 수 있지만 혁명적 조직의 지도 없이는 이런 투쟁이 오래 지속되거나 궁극적인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로스만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혁명적 당 개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래에서 인용한 그로스만의 주장은 혁명이 경제적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레닌이 1915년에 말했듯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이 ‘만들어질’ 수 없고 경제 위기에서 발전하여 역사를 바꾸며, (당과 계급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성숙한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이때에서야 주관적 조건이 중요해진다. 혁명적 대중 행동을 할 수 있는 혁명적 계급의 능력은 대중의 통일된 의지의 조직과 일상의 계급투쟁의 오랜 경험을 전제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발전에 대한 그로스만의 기여
1936년에 그로스만은 프랑크푸르트대학교 사회연구소에서 그륀베르크를 이어 소장이 된 막스 호르크하이머에게 마르크스가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범주들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바꾸기를 원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로스만의 연구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상품의 두 측면, 생산과정의 두 성격에 대한 분석, 사회적 자본의 재생산, 자본 그 자체와 자본의 유기적 구성 등을 포괄하고 있다. 경제 현상의 이중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관계를 구체적인 총체로 이해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고립된 영역으로 보는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 이론을 비판해야 한다. 그래서 그로스만은 마르크스가 리카도의 가치와 교환이라는 범주를 비판한 것은 그가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고 유물변증법으로 변형한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그로스만은 자본주의 생산이 노동 과정이자 착취를 통한 가치 창출 과정이라는 모순적 성격을 갖고 있고,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붕괴 경향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이중적 구조의 결과로서 자본주의 생산은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체제의 치유할 수 없는 격변은 필연적으로 이런 이중적 성격에서 비롯하며,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이윤과 생산성 사이의 그리고 가치화의 제한된 가능성과 생산력의 궁극적 발전 사이의 내재적인 모순에서 비롯한다. 이런 모순은 필연적으로 과잉축적과 불충분한 가치화, 붕괴 그리고 전체 체제의 궁극적 파국으로 이어진다.”
그로스만은 《자본론》 3권에 담긴 마르크스의 주장을 정교화했는데, 핵심은 가치 실현 과정이 진행되면서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하게 되고, 이 때문에 자본축적이 중단되는 지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순수하게 기술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한 노동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생산력은 제약 없이 발전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인간 노동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바로 그 과정은 이윤율의 하락을 필연적으로 초래하게 되고 따라서 경제 위기를 부르게 된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핵심에 있는 모순들이 ‘자본주의 붕괴의 법칙’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의 진정한 장벽은 자본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같은 근거에서 그로스만은 생산이 가치화 과정에서 벗어날 때에만 사회적 기초 위에서 조직될 수 있고, 경제 위기나 상품의 형태에서 비롯하는 신비화 없이 기술적인 노동과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로스만은 오토 바우어의 재생산표식을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보였다. “바우어 표식은 자본축적의 가속화와 짝을 이루는 이윤율의 하락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다. 불변자본은 급격히 증가하여, 그것은 1차 연도 총생산의 50퍼센트에서 35차 연도 총생산의 82.9퍼센트로 증가한다. 자본가의 소비는 20차 연도에 정점에 도달하고 그 이후로는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감소한다. 자본가의 소비는 34차 연도에 최저 수준에 도달하고, 35차 연도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3 이라고 지적했다.
그로스만은 이로부터 바우어의 표식에 제시된 체계가 반드시 붕괴한다고 결론 내린다. 과잉축적의 단계에서 이윤율이 하락하더라도 이윤량이 증가하면 자본가의 소비와 더불어 축적이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한계를 넘어서 이윤율과 더불어 이윤량이 하락하면 축적에 사용돼야 할 잉여가치 부분의 감소를 수반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은 그때가 되면 이윤량의 절대적 감소를 동반하며 … 감소한 이윤량이 증가한 총자본에 대비하여 [이윤율로] 계산되어야 할 것”그로스만은 자본 메커니즘에 내재하는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에 대한 반경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이 자동 붕괴론으로 왜곡되지 못하게 했다. 그가 제시한 반경향은 생산성 상승을 통한 이윤율의 상승, 생산성 향상을 통한 가변자본 비용의 절감, 회전 기간의 단축을 통한 잉여가치율의 증대, 생산 규모의 확대를 통한 잉여가치의 증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낮은 새로운 생산 영역의 출현 등이다. 자본주의 붕괴 이론과 관련한 그로스만의 총평은 새겨볼 만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제 위기의 원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데이비드 하비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조차 경제 위기의 원인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둘러싼 논쟁의 첫 20년은 자본주의의 붕괴라는 개념이 지배했다. 그 후, 세기가 바뀔 무렵, 투간-바라노프스키가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곧 힐퍼딩과 바우어, 마침내는 카우츠키가 그를 뒤따랐다. 따라서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의 아류들의 왜곡에 맞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붕괴라는 근본 개념을 방어해야 했던 것은 전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전체 체계, 특히 축적이론이라는 틀 내에서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을 검토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의 이론 구조에서 재생산표식이 방법론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질문하지 않았으며, 축적 표식을 궁극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분석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무의식적으로 아류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로스만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로 자본주의 붕괴 경향을 설명하면서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본주의 붕괴의 반경향이 일시적으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저지할 수는 있겠지만 반경향은 점차 약화될 것이다. 이때 힐퍼딩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계획이 경제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 위기가 생산의 무질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스만은 자본주의가 세계적 체제이고 개별 국가에서 효과적인 계획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경제 위기로 치닫는 경향이 단지 자본들 사이의 경쟁 때문이 아니라 근본에서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축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힐퍼딩이 주장한 ‘조직된 자본주의’조차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1929년 대공황처럼 경제 위기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첨예한 계급투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물론 경제 위기와 계급투쟁의 관계가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갈등에서 자본가들이 승리해 임금을 억제한다면 노동자들은 노동력 가치보다 적게 벌게 돼 노동력 재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갈등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해 임금과 생활수준이 높아진다면 축적률은 더 낮아질 것이고 경제 위기는 첨예해질 것이다.
그로스만은 이때 투쟁하는 계급들이 경제 위기에 직면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주요한 경제적 투쟁들이 자본주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될 것이고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이론을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이라고 왜곡한 비판자들에 맞서 그로스만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행동과 볼셰비키 같은 정당의 존재를 강조했다.
공과
그로스만이 제2인터내셔널의 혼란과 스탈린주의의 폭풍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 위기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동안 국제 노동운동은 재앙적인 후퇴를 경험했다.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관료가 승리했다. 이들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러시아 지배 관료의 이해관계에 종속시켰다. 1933년에는 독일에서 나치가 노동운동을 괴멸시켰다. 세계 노동운동이 침체하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9년에 《자본주의 체계의 축적과 붕괴 법칙 — 동시에 위기이론》이 처음 출판됐을 때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그로스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로스만의 경제 분석 방법론이 소련 스탈린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그로스만의 이론을 반기지 않았다. 상품 물신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 노동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관점, 외관 너머에 있는 사회적 본질에 대한 연구 등이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무기가 될까 봐 두려워 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와 사민주의자들도 그로스만의 이론에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고, 이 점에서 그로스만과 대립됐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로스만은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옮겼고, 다시 1936년에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로스만은 소련과 코민테른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트로츠키와 비슷한 태도를 취했는데, 모험주의적인 제3기 노선과 계급 협조적인 인민전선 전략에 대한 비판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전략이 절정에 이르렀던 1935년 2월에서 1936년 11월 사이에 그로스만은 소련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포기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프랑코 장군의 군사 반란과 뒤이은 내전이 그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파시스트 세력으로부터 스페인 공화국을 지킬 유일한 힘은 소련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결국 그로스만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갔고, 파시즘에 맞서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자는 주장도 받아들였다. 마르크스주의적 경제 위기 이론을 옹호하는 태도와 소련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 사이에는 메우기 힘든 간극이 존재했다.
1949년 그로스만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을 거쳐 동독으로 이주했고,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그는 동독의 재건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건강의 악화로 그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1930년대에 그로스만의 이론이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가 소련에 충성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뒤에도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기여한 공로는 1960년대 말까지 동면 상태에 있었다. 그로스만의 공헌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은 1968 운동으로 각성된 새 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경제 위기가 빈번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를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그로스만의 기여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MARX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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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붕괴 경향,
재생산표식,
이윤율 경향적 저하
주
- 이 글을 읽기 전에 그로스만의 책에 대한 정선영의 서평(‘이윤율 저하 경향 문제를 되살린 고전’)을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
- 그로스만, 헨릭 2021, 《자본주의 체계의 축적과 붕괴 법칙 — 동시에 위기이론》, 도서출판 실크로드, 77∼78쪽. ↩
- 위의 책, 79쪽에서 재인용. ↩
- 데이비드 하비에 대한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이클 로버츠, 김종환, 이정구 등의 비판은 ‘데이비드 하비와의 논쟁 글 모음’(<노동자 연대> 2021년 11월 3일)을 보시오. ↩
- 그로스만, 앞의 책, 15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