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론 비평
젠더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난해 10월 EBS가 5회에 걸쳐 주디스 버틀러의 “왜 젠더인가” 강연을 방영했다. 주디스 버틀러는 미국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이론의 주창자로, 대표작 《젠더 트러블》을 포함해 한국에도 저서 다수가 번역돼 있다. 그는 성소수자 운동과 반전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버틀러의 젠더 이론은 오늘날 종교적 보수주의자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버틀러의 EBS 강연이 예고된 뒤, 개신교 우파가 주도하는 강연 취소 압박이 있었다. 시청자 게시판이 강연 철회 글로 도배됐고, 일부 보수 단체가 EBS 사옥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EBS는 버틀러가 “소아성애 근친상간 지지자”라는 이들의 왜곡과 비방을 반박하면서 예정대로 강연을 방영했다.
버틀러는 이 강연에서 오늘날 논쟁 중인 젠더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지, 젠더 개념을 누가 왜 두려워하는지 등을 다뤘다. 버틀러의 글은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이 강연에서는 대중적 청중을 고려해 쉽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버틀러는 페미니즘(과 좌파) 사이에서도 논쟁적 인물이다. 그가 페미니즘의 전제라고도 할 수 있는 단일한 여성 범주를 해체하는 도전적 문제를 던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버틀러의 젠더 이론을 소개하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논평하고자 한다.
버틀러의 젠더 이론
버틀러도 지적하듯이, ‘젠더’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젠더는 영어로 된 용어로, 다른 언어에서 적절한 번역어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젠더 개념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논쟁도 많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젠더’를 “악마 이데올로기”라며 적대시하는데, 젠더가 생물학적 성의 경계를 허물어 이성애에 바탕을 둔 전통적 가족(과 사회)을 해체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헝가리 총리 오르반(극우 정당 피데스 소속)은 “젠더 이데올로기”를 비난하며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우파를 결집했다.
한편, ‘젠더’ 용어는 오늘날 페미니즘 내에서뿐 아니라, 주류 학계와 언론, 일부 국가기구에서도 수용돼 사용되고 있다. 젠더 폭력, 젠더 평등, 젠더 갈등 등. 이때는 단순히 ‘성’이나 ‘양성’의 대체어로 사용되는 듯하다.
젠더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1970년대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보통 생물학적 성(이하 ‘섹스’)과 구별되는, 사회적·문화적으로 인식되는 성을 가리킨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에 나오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은 생물학적 성인 섹스와 젠더를 구별하는 이론적 토대가 됐다.
이 진술인즉,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곧 사회에서 ‘여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 인형 놀이를 하고, 상냥하게 말하며, 남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것 ─ 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무엇을 입을지, 누구와 어떻게 사랑할지, 어떤 일을 할지, 출산을 할지 말지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보부아르의 이 진술은 여성 차별을 생물학적 숙명으로 정당화하는 보수적 관념(예컨대 자궁이 있는 여자가 양육과 가사 노동에 적합하다는 식)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여성 차별적 현실이 생물학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관행의 결과일 뿐이라면,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 된다.
젠더 불평등을 생물학에서 찾는 관점은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페미니즘 내에도 있다. 예컨대 급진 페미니즘의 초기 이론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젠더 불평등이 여성의 임신과 출산 능력에서 비롯한다고 봤다(생물학적 본질주의). 파이어스톤은 이런 생물학적 제약에서 벗어나야만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보고, 피임과 낙태의 확산, 시험관 아기(체외수정) 기술 같은 재생산 기술 발전을 핵심 대안으로 제시했다.
오늘날 보면, 파이어스톤의 대안은 순진하거나 엉뚱해 보인다. 낙태나 체외수정 기술이 상당히 발달한 현대에도 여성은 해방되지 않았다. 먹는 낙태약처럼 이미 발전해 있는 기술도 한국에서는 보수적 압력과 지배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여태 도입되지 않고 있다. 기술 혁신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사회 관계가 중요하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페미니즘 내에서도 여전히 한 경향으로 지속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이론적 영향을 크게 미치는 페미니스트 실라 제프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전통적 가부장제 아래 ‘젠더’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을 가진 자에게 치마와 하이힐, 무급 가사 노동을 즐기는 마음을 할당했고, 남성의 생물학적 특징을 가진 자에게는 편안한 옷과 진취성, 자주성을 할당했다.” “여자에게 열등한 성 카스트를 부여하는 기준은 생물학적 특징이며, 생물학적 특징은 여자의 종속을 강요하고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강간과 착상, 강제적 임신 지속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자를 억압하는지 보라.”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뒤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한편, 1990년대 들어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와 젠더의 구별 자체를 의문시하며 섹스도 젠더와 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사회구성주의). 이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구분되기 때문에 생물학적 남녀 범주가 있다.
3 라고 주장했다. 즉, 생물학적 성도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강력한 사회구성주의 견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보부아르의 진술을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갔다. 생물학적 특성과 상관없이 젠더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젠더는 섹스에서 비롯한 결과물이 아니다. 이런 사고에서 버틀러는 기존 페미니즘의 섹스와 젠더 구분 자체를 거부하며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버틀러가 먹고 마시고 나이 드는 신체(물질)가 없다고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버틀러는 생물학적 성도 담론을 매개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갓난아기가 ‘왕자님’, ‘공주님’이라고 호명된 후 그에 따라 남자아이는 남자다워지고, 여자아이는 여자다워진다는 것이다. “담론 밖에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다”는 포스트구조주의 관점이다.
‘섹스도 이미 젠더’라면, 젠더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일정하게 규범화된 행동들을 반복함으로써 젠더가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젠더는 본질의 외관, 자연스러운 듯한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오랫동안 응결되어 온 매우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이다.”
예컨대 우리가 일상에서 화장을 하거나, ‘뽕브라’로 가슴을 부풀리거나, 치마를 입거나, 제모를 함으로써 젠더를 수행하고, 만들어 낸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이 사회에서 큰 곤혹을 치르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젠더를 수행한다.
5 . 이런 수행성의 결과로 ‘두 개의 섹스’나 ‘두 개의 젠더’가 자연적이고 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버틀러에 따르면 이런 수행의 주체도 애초 존재한 게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주체가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례적이며 일상적인 행위의 효과로 ‘여성적’인 ‘여성’(혹은 ‘남성적’인 ‘남성’)이라는 주체(정체성)가 만들어진다이처럼 섹스가 곧 젠더이고, 젠더는 본질·근원이 없는 반복된 행위라면, 단일하고 보편적인 여성의 본질이나 범주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버틀러의 이런 주장은 급진 페미니즘의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젠더 트러블》의 부제가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성적 욕망과 실천)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강조하며 기존 규범에 맞지 않는 성적 욕망과 실천을 옹호했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운동의 연대를 고무하려고 했다. 《젠더 트러블》의 1999년 서문에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젠더의 의미를 남성성/여성성의 기존 개념으로 한정짓는 관점들[은] … 모두 페미니즘 안에서 배타적 젠더 규범을 설정하고, 그것이 때로는 호모포비아를 낳는다. … 이 책은 또한 소수자 젠더와 섹스의 실천을 불법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리 담론을 휘두르려는 모든 시도들의 뿌리를 파헤치고자 했다.”
실천적으로도 버틀러는 성소수자 운동에 몸담아 왔다. 지난해 국내 문예교양지 《대산문화》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합격생을 지지한 바도 있다. EBS 강연에서 버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트랜스젠더 혐오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관념론
생물학에 기반한 고정된 젠더 개념을 거부하고 젠더의 다양성과 변화 가능성을 주장한 버틀러의 견해는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이용된다. 이것이 종교적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버틀러에게 격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본질주의 관점은 젠더를 이분법적 규범에 욱여넣는다.
그러나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젠더가 이분법적이지 않고 젠더가 섹스에 고정돼 있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이다.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여성으로 살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 자신을 남성과 여성 둘 다 아니라고 정체화하는 사람들도 있다(논바이너리).
역사적으로도 젠더는 다양했다. 미국 선주민 사회에서는 젠더가 서너 개 있는가 하면, 어떤 사회는 몸이 아니라 하는 일에 따라 젠더를 부여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남녀 불평등이 생물학에 기초해 있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엥겔스는 본질적으로 평등했던 수렵채집 사회가 계급 사회로 바뀌는 과정에서 여성이 종속된 가족 형태가 등장했음을 설명했다.
실라 제프리스의 생물학적 본질주의 관점은 변화하는 현실과 특정 시기에 등장한 관념을 태곳적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또, 이런 관점은 젠더를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고, 남녀 관계를 적대적으로 이해하며 일부는 사회에서 천대받는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 결과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그에 따른 생식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여성해방의 전망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생물학적 본질주의 관점의 버틀러 비판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버틀러의 젠더 이론의 한계는 관념론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버틀러 철학의 바탕인 포스트구조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물론의 기본은 물질세계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질세계가 인간의 사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유가 물질세계에서 나온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섹스는 이미 젠더’라는 버틀러의 견해는, 담론에 절대적 우위를 부과해서 객관적인(세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해 존재한다는 뜻) 물질세계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반대 편향이다.
우리가 생물학적 성을 어떤 인식 틀(규범, 담론)로 이해하는지와 무관하게, 생물학적 성은 실재하고 사회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며 때로 인간의 활동에 제약을 가한다. 특히, 인류 역사에서 정착 농경이 확산되고 계급이 발생하던 특정한 시기(약 5000~7000년 전)에 그랬다.
이 시기 여성의 임신·출산·수유 능력이 당시의 사회적 노동 참가에 불리하게 작용해 여성이 주변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계급 사회가 등장하면서 수렵·채집 사회보다 성 역할이 엄격해졌고 성별 범주가 협소화됐다. 크리스 하먼은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적 필요의 상호작용이 노동 분업의 변화를 가져 온 근원이다. 사회가 계속 유지되려면 인간은 스스로 재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성인 여성들이 각자 아이를 몇 명 낳을지, 다시 말해 재생산의 규모는 엄청나게 다르다. … 농업 사회에서 각각의 아이들은 잠재적으로 또 하나의 경작자이다. 그리고 높은 사망률, 극도로 취약한 전염병의 발생, 끝없는 전쟁통에 대비해야 한다. … 여성이 (전쟁, 장거리 이동, 고된 농사일 등) 사망·불임·낙태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는 활동들에 참가하지 않는 편이 (여성을 포함해) 사회 전체에 이롭다.” “이 새로운 생산 활동의 짐을 짊어진 남성들 중 대다수는 지배하는 계급의 구성원이 되지 못했다. 쟁기를 끄는 남성들의 대부분은 왕자가 되지 못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장군이 되지 못했으며, 이들 중 누구도 사제가 되지 못했다. 사제는 흔히 최초의 지배계급이었고 그 어떤 중노동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 형태들은 공동체의 근간이 된 혈통의 몰락을 가져왔다. … 남성이 주요 잉여 생산자가 되자, 혈통을 훼손시켜 출현한 계급과 국가가 하층 계급 사이에서도 남성 지배를 부추겼다.”
물론, 오늘날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생물학적 요인이 5000~7000년 전과 똑같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육체적 힘’은 자본주의 생산에서 핵심적이지 않다. 또, 발전한 피임법, 낙태술, 체외수정 기술 등으로 재생산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분법적 젠더 규범과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는 그 근원을 자본주의 가족제도에서 찾는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더는 생산의 단위가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즉, 가족은 현 세대의 노동력을 돌보고 다음 세대 노동력을 재생산한다(양육과 부양).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 가족에 떠넘기면,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잉여가치 몫 일부를 양육과 부양에 드는 비용으로 돌리지 않아도 되므로 큰 이득이 된다. 또, 지배자들이 보기에 노동계급 성원들이 개별 가족에 얽매여 있는 것이 순종적인 노동자들을 길러 내고 사회를 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런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효과 때문에 지배자들은 이분법적 성별과 성 역할에 기초한 가족제도를 유지하려 애쓰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이분법적 젠더 규범에 사람들을 욱여넣는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섹스와 젠더의 상호작용을 역사유물론적으로 이해한다.
일부 퀴어 이론가들은 생물학적 성차를 인정하는 것이 간성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생물학적 본질주의라거나 이성애주의 옹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젠더 이분법에 대한 정당한 반감이 꼭 그렇게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다. 남녀의 생물학적 특징을 인정하면서도 간성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간성을 억압하는 사회이다. 또, 이성애는 유성생식을 하는 인간 종에게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이성애주의가 곧장 생물학적 성차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남성 간 동성애가 널리 인정되고 때로 찬양받았다는 사실이 한 반례이다. 이성애주의는 자본주의 가족제도의 재건과 함께 등장했다.
관념론의 약점은 특정 관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 해방을 성취하려면 무엇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버틀러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비판하는 이분법적 젠더 규범과 이성애주의가 역사적으로 언제 어떻게 생겨나서 왜 지금도 지배적 규범으로 관철되는지 해명하지 못한다. 그 작동 방식을 묘사할 뿐이다.
9 버틀러는 여기서 젠더가 생산양식과 관련돼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저술의 전통을 옹호한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 이후의 작업에서 유물론적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특히 1998년 낸시 프레이저와의 논쟁에서 “비규범적 섹슈얼리티가 주변화되고 비하되는 것이 단지 문화적 인정의 문제인가?” 하고 반문하면서, 물질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대치시키려는 시도를 비판했다.젠더가 생산양식과 관련돼 있다는 지적은 마르크스주의 분석과 맞닿는 측면이 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버틀러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존속시키면서도 동시에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버틀러의 젠더 이론에 이런 분석이 총체적이고 일관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특히 주체와 저항의 문제로 가면 버틀러가 역사유물론의 전통과 매우 상이함이 드러난다.
주체와 저항의 문제
버틀러는 저항과 투쟁을 고무하고 급진적 목소리를 내 왔다. 2010년에는 베를린 성소수자 자긍심 행사의 상업화와 핑크워싱을 비판하며 주최 측이 수여하는 상을 거부했다. 또,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반전 운동에도 동참해 왔다. 자신의 이론에서도 주체의 저항 가능성을 기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버틀러를 포함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주체를 “구성하는 주체”에서 “구성되는 주체”로 끌어내리고, 체제 전체를 변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래서 저항을 고무하더라도 그 저항은 부분적일 뿐이다. 앞서 봤듯이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에 따르면, “행위, 수행, 과정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위자’는 그 행위에 부가된 허구에 불과하다. 행위만이 전부이다.”
버틀러의 ‘수행적 주체’는 푸코의 권력 개념과 관련있다. 푸코에 의하면 권력은 특정 기관이나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분할돼 있고, 단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개인으로 만드는 생산적인 것이다. 이를 젠더에 적용해서 버틀러는 개개인이 날마다 젠더 규범(권력)을 반복하며 주체를 형성하고 젠더를 생산한다고 봤다.
그런데 주체가 단지 기존 규범에 의해 형성될 뿐이라면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해방의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다. 버틀러의 이론에서 주체의 저항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버틀러는 주체가 규범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변이가 생겨난다며 저항 가능성을 설명한다. “주체는 규범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그 규범이 주체를 생산하지만, 그러한 반복은 위험 영역을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적절한 방식으로’ 규범을 원상태로 복원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욱 제재받는 주체가 되고, 사람들은 지배적인 존재조건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반복이 “실패”하면 처음 의도가 달라져 새로운 의미가 생성돼 기존 담론에 균열을 내고, 마침내 기존 규범을 ‘전복’할 수 있게 된다(‘재의미화’).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그 한 예로 드래그(이성의 옷을 입고 분장하고 이성처럼 행동하는 것)를 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특정 형태의 문화적 위반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예컨대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2019년 엠넷의 서바이벌 게임 〈퀸덤〉에서 걸그룹 AOA의 ‘너나 해’ 공연을 전복적 수행성으로 예찬했다. 당시 공연에서 걸그룹 멤버들은 수트를 입었고 무대에는 보깅 댄서(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까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가 춤을 추던 할렘 볼룸 문화에서 비롯한 춤)들이 춤췄다. 그동안 “짧은 치마를 입고 … 아찔한 나의 하이힐 까만 스타킹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걸”을 부르며 ‘섹시 댄스’를 춰야 했던 걸그룹의 변신에 많은 사람들이 통쾌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위반으로 정말로 이 사회에 뿌리 깊은 젠더 이분법을 해체할 수 있는가?
심지어 버틀러에 대한 어떤 해석에 따르면 ‘퀴어’를 자처하는 것만으로도 저항이 될 수 있다.
‘재의미화’는 실제 규범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토대인 자본주의를 건드리지 않는다. 자본주의 안에서 규범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거나 문화적 위반에 대한 인정을 넓히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늘날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고, ‘문화적 위반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퀴어 퍼레이드가 국가와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성대하게 열리는 일부 나라를 보면,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동성 간 성관계가 불법이었던 것과 비교해 격세지감을 느낀다(물론 버틀러는 퀴어 퍼레이드의 상업화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곳들에서조차 이분법적 젠더 규범과 이성애주의는 해체되지 못했다. 법제도적인 평등을 상당히 이룬 나라들에서도 성소수자 차별을 끝장내지는 못했다. 그 토대인 자본주의가 해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틀러 이론은 이분법적 젠더 규범과 이성애주의를 넘어설 해방의 전망과 전략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적 대안
자본주의 수혜자인 지배계급은 물질적·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 때문에 이분법적 젠더 규범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차별을 유지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 근원에 자본주의 핵가족 제도가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착취와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젠더 해방을 위해서도 필수적이고, 여성·성소수자 차별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과 해방은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주체, 노동계급을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의 경쟁 압력 때문에 노동계급은 여러 차이들로 분열하기도 하지만, 착취 과정은 노동계급에게 직업·성별·섹슈얼리티·피부색 등의 차이를 넘어서 공통의 이해관계(착취 완화·폐지)를 갖게 하고,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이윤 생산을 중단시켜 사회를 마비시킬 힘과 집단성)을 부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투쟁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물론, 이런 잠재력이 언제나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상적 시기에 다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규범을 이래저래 수용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다.” 교육기관, 언론사 등 정신적 생산수단은 거의 전적으로 자본가 계급과 그 국가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의 사상을 고스란히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지배적 사상뿐 아니라, 그가 처한 객관적 위치의 영향도 받는다. 지배적 사상은 노동계급의 경험과 괴리되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최고의 경제 체제’라지만, 노동자들은 주기적으로 경제 불황을 경험하고 삶을 위협받는다. 주류 언론은 경쟁과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설파하지만, 노동자들은 협력 없이 살 수 없다.
그래서 보통 노동자들은 모순된 의식(상식과 양식)을 갖는다. 가령, 자본주의 그 자체는 효율적일지라도 지금의 ‘세습 자본주의’나 ‘금융 자본주의’, ‘정실 자본주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격변이나 거대한 투쟁이 벌어지면, 지배적 규범에 대한 도전이 더 크게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여러 차이와 무수한 분열들, 인종차별주의·성차별주의·동성애 혐오 등을 극복할 가능성이 생겨난다.
1997년 노동법 개악에 맞선 대중 파업에 동성애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 참가하고 남긴 소감은 이런 점을 얼핏 보여 준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추잡한 ‘변태’로 여겼을 때다. “쌍용자동차 노조의 노동자가 ‘동성애자 연대투쟁, 노동악법 철폐하자’는 구호를 외쳐주었다. 정말 용기가 솟았다.”, “극장에서 소식지 돌릴 때보다 반응이 좋았다. 전경방패에 붙어있던 핑크 트라이앵글[성소수자를 상징함-필자]이 인상적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더 극적인 사례도 있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서 그려진 1984년 영국 광원 노동자들과 성소수자들 간 연대도 그중 하나다.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적인 마거릿 대처에 맞서 수개월간 파업을 벌이는 광원 노동자들을 위해 모금을 하고 연대했다. 이듬해 광원 노동자들은 동성애자 자긍심 행진에 현수막을 들고 참가했고, 영국노총과 노동당 대회에 파견된 전국광원노조 대의원들은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하는 정책을 공식 채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런 경험을 통해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동성애자 권리를 확고하게 지지하게 됐고, 동시에 일부 성소수자들은 이런 연대의 중요성을 깨달아 사회주의자가 됐다.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사례는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혁명에 성공해 권력을 잡았을 때의 경험이다. 노동자 국가는 동성애를 비범죄화 했을 뿐 아니라(미국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야 소도미법이 폐지됐다), 여성·성소수자 억압의 근원인 핵가족의 구실을 약화시키려고 애썼다.
물론, 이런 과정은 자동이 아니고 여전히 불균등할 것이다. 그래서 조직된 혁명가들의 구실이 중요할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를 바꾸고 사람들이 기존 규범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면, 좌파는 개개인의 수행의 ‘실패’를 바랄 게 아니라, 이분법적 규범을 강요하는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하고 대중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여러 투쟁이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계급적,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계급투쟁을 핵심 문제로 여기는 것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쟁점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은 젠더·섹슈얼리티 등에 따른 차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중시하고 해방의 전망을 밝혀 준다.
여성·성소수자 해방은 인류가 쟁취할 수 있고, 쟁취해야 하는 과제이다.
주
- 제프리스 2019, 36쪽. ↩
- 같은 책, 44쪽. ↩
- 버틀러 2008, 97쪽. ↩
- 같은 책, 147쪽. ↩
- 버틀러는 ‘수행’과 ‘수행성’을 구별한다. 수행은 수행하는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고, 수행성은 그러한 주체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버틀러에게 젠더는 수행성이다. ↩
- 같은 책, 45쪽. ↩
- 콜드웰 2018에서 재인용. 번역을 약간 바꿈. 원문은 Harman, Chris 1994, ‘Engels and the Origins of Human Society’, International Socialism 65 (winter). ↩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노라 칼린이 쓴 ‘동성애 억압의 근원’,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책갈피, 2016을 참고하라. ↩
- 관련 논쟁은 버틀러 2016을 참고하라. ↩
- 버틀러 2008, 131쪽. ↩
- 캘리니코스 2017에서 재인용. 원문은 Butler, Judith 1997, The Psychic Life of Power, pp28-29, Stanford Univ Pr. ↩
- 버틀러는 1999년 개정판 서문에서 자신이 드래그를 “전복의 모범 사례”로 꼽은 것은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진 함의(그동안 당연시했던 범주들에 의문을 갖게 되고 ‘실재’라고 믿었던 것이 수정될 수 있다고 깨닫는 것)라는 것이다. ↩
- 터울 2015에서 재인용. ↩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디, 해나 2014, 《무지개 속 적색 -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 책갈피를 참고하라.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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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스, 실라 2019 《젠더는 해롭다》, 열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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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웰, 수 2018,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정치’, 《마르크스21》 24호.
터울, 2015 ‘게이 커뮤니티 운동 약사, 1995~2000’, 《친구사이 소식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