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회주의 고전 읽기 《제국주의론》
제국주의는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예리하게 관찰하다
레닌은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소책자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이하 《제국주의론》)를 썼다. 이 소책자는 “차리즘의 검열을 의식하면서 쓰인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해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논증한다.
《제국주의론》은 온갖 학살, 약탈, 범죄를 낳은 제1차세계대전이 제국주의 전쟁임을 입증하는 게 1차적 목표였다. 당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이 전쟁에 대한 입장을 두고 거대한 분열과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적 조직이었던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과 1912년 대회에서 국제주의적 반전 입장을 채택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이 벌어지자 이 입장은 180도 바뀌었다.
유럽 각국 지배자들은 대중이 국가의 이해관계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동일시하게 만들고자 했다. 지배자들은 음악, 시, 소설, 언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선동했다. 전쟁 초기에 참전국들에서 애국주의 열풍이 불었다. 전쟁을 지지하지 않으면 ‘배신자’가 됐다.
제2인터내셔널 소속 주요 정당들 중 러시아의 볼셰키비키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은 기회주의적 선택을 했다. 전쟁에 반대했다가 탄압을 받아 당의 안정적 기반(재정, 조직, 매체, 일상 활동의 틀 등)이 무너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거에도 못 나갈 정도의 탄압은 의회주의자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레닌은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사회 배외주의는 곧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신이며 부르주아지 측으로의 완전한 도피”라고 일갈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론》은 제1차세계대전이 제국주의 간 전쟁이고, 제국주의가 세계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임을 낱낱이 밝힌다. 이런 분석과 논증은 전쟁을 진정으로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운동을 고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무엇보다 이 책은 중요한 정치 소책자다.
그런데 레닌의 시대와는 많이 변화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100년도 더 지난 이 책을 왜 읽어야 할까?
근본적 연속성
제국주의는 흔히 “제국”과 혼용돼 식민 지배를 비롯한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의로는 대개 제국주의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동역학보다는 다른 데서(정상에서 벗어난 일탈, 호전적 지도자의 성향과 이념, 돈에 눈이 먼 군수업체와 정부의 결탁 등)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동역학이 낳은 필연적 결과이고, 여러 지정학적 갈등과 전쟁 위기가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한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에 따른 결론은 혁명적 대안이어야 할 것이다.
레닌, 부하린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무엇보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지배권 다툼으로 이해했다. 레닌은 서구 열강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때를 살았다. 1876년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중에서 10퍼센트 정도를 지배했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00년에는 아프리카의 90퍼센트 이상이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식민지 쟁탈전은 결국 제1차세계대전을 낳았고, 4년 동안 약 10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오늘날 강대국 간 갈등 양상은 식민지 쟁탈전은 아니다. 그러나 강대국 간 전면전이 벌어질 때 예상되는 파괴력은 훨씬 크다. 핵전쟁의 그림자 아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는 아주 위험한 제국주의 단층선이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 대중국 동맹을 강화하고 이곳저곳에 군사 기지를 세우고 첨단 무기를 도입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을 태평양 반대편으로 밀어내고 싶어 한다. 기존의 최강자와 떠오르는 신흥 강자 사이의 제국주의 갈등이 동아시아의 불안정을 키우고 있다.
최근에는 대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이는 불길한 시나리오들이 언론에 종종 보도된다. 실제로 대만 국방장관 추궈정은 “내가 군에 몸담은 40년 동안 (지금이) 가장 엄혹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취임 후 10차례 이상 동맹국들과 함께 대만해협을 통과했다. 중국 시진핑도 대만의 방공식별구역 안으로 군용기를 보내 대만을 압박하고 나섰다. 무력 시위의 규모가 크고, 주기가 빈번하고, 말과 실천도 일관되게 악화일로를 보여 준다. 대만을 둘러싼 갈등이 당장 전쟁으로 번질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만나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은 분명 내재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특징
레닌은 제국주의를 소수 강대국들이 세계 체제를 지배하고자 경제·정치·군사적으로 서로 갈등하며 경쟁하는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기본 특징을 분석했다.
첫째,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 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은행 자본이 산업 자본과 융합하여 ‘금융 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셋째, “상품 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 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넷째, “국제적 독점 자본가 단체가 형성돼 세계를 분할한다.”
다섯째, “자본주의 거대 열강에 의한 전 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
물론 레닌이 꼽은 이런 기본 특징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떤 특징은 다른 특징보다 부차적이고, 일부 특징은 오늘날은 물론 당대의 현실과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기본적 이해는 틀리지 않았다.
레닌이 지적했듯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을 때, 자유 경쟁은 압도적 다수의 경제학자들에게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자유 경쟁’을 내세우는 자본주의는 오히려 독점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다수 자본들 간 경쟁에 기초를 둔 사회 체제다(물론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선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어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을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규정했다). 여러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윤을 향한 강박적 경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축적한다. 즉, 끊임없는 재투자로 자본은 몸집을 키워간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집적’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경제 위기에서 파산한 자본은 살아남은 자본에 흡수된다. 경제력은 점차 소수의 자본들에게 집중된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집중’이라고 불렀다.
이 결과로 거대 기업들이 출현했다. “생산의 집적에 의해 독점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현 발전 단계의 일반적·근본적 법칙인 것이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상위 10대 그룹의 자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87퍼센트인데, 이것은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거대한 다국적기업들이 지배한다.
그러나 레닌이 말한 “독점”이 ‘경쟁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한 거대 기업이 국가의 도움으로 국민경제 분야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해도 그 기업은 국내외 경쟁 압력을 피할 수 없다. 레닌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 의해 움직이며 “독점이 경쟁을 없애지 못한다” 하고 봤다.
제국주의의 둘째 특징인 금융 자본의 경우, 레닌은 은행의 규모와 힘이 커져서 산업 자본과 은행 자본이 융합된 “금융 자본”이 성장한다고 했다. 다만 레닌 당대에도 이 “금융 자본”의 발전 수준은 강대국마다 달랐다. 당대 영국보다 독일에서 더 많이 발전한 경향이었다. 한편, 레닌은 《제국주의론》 후반부에서 기생적 금융 자본의 해외 자본 수출이 금리 생활자들에게 득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금융 자본”의 이윤 원천도 근본에서는 산업의 원활한 이윤 창출·확장에 있다. 이런 점에서 레닌이 금융 자본의 기생성을 강조한 것은 당대나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다소 지나치다 할 수 있다.
거대 기업들은 자국 경제에 만족할 수 없었다. 레닌은 자본이 더는 자국 경제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시장을 무대로 다른 나라의 자본들과 경쟁을 벌이고, 이때 자본 수출이 매우 중요해진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의 셋째 특징이다.
세계 무대를 둘러싼 다수 자본들의 경쟁은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이다. 레닌은 이것이 당대 식민지 확장, 열강의 지정학적 갈등과 연결돼 있음을 포착했다. “세계의 대다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의 토대이며, 한 줌밖에 안 되는 부유한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기생성의 토대”라며 세계를 무대로 한 다수 자본과 열강의 야만적인 이윤 경쟁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다만 레닌의 주장과 달리, 당시 자본 수출과 식민지 쟁탈전의 관계는 훨씬 더 불균등했다. 가령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은 자본 수입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도 영국, 프랑스와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의 넷째 특징으로 “독점 자본가 단체”들이 세계 시장을 두고 분할 경쟁을 벌인다고 했다. “국제 카르텔은 자본주의적 독점체가 현재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다양한 자본가 단체들이 서로 투쟁하는 목표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후자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바로 그것이야말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역사적·경제적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이다.”
다수 거대 자본들은 이윤을 증대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세계 시장을 두고 경쟁을 벌인다. 몸집이 커지고 생산의 규모가 증대하니 자국 내의 이윤 추구 활동으로는 성에 안 차는 자본들이 세계 시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거대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원자재 등을 최대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이 국제화하는 과정과 함께 벌어지며 더 심화했다. 이제 기업들은 경쟁자가 자원을 획득하지 못하게 자원을 선점하거나, 경쟁자들의 운송로와 운송시설 확보를 차단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한다. 강력한 지원군이 필요해진 것이다.
“자본가 단체들 간에 세계의 경제적 분할을 토대로 하여 일정한 관계가 성장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또 이와 관련하여 정치적 동맹체 사이, 국가들 사이에서도 세계의 영토적 분할, 식민지 획득을 위한 투쟁, 즉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을 토대로 하여 일정한 관계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독점 자본가 단체”들이 벌이는 세계 시장 분할 경쟁이 열강의 세계 영토 분할로 이어졌다고 봤다. 거대 자본들이 국가와 결합해 국가의 권력을 이용해 해외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고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본들은 국경 밖에서 경쟁할 때 자국의 외교력과 군사력에 의지하게 된다. 경쟁은 더는 개별 기업 간 경쟁에 국한되지 않고 강대국들 사이의 국가 간 경쟁, 지정학적 경쟁을 수반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레닌이 살던 때와 같은 강대국의 세계 영토 분할, 즉 식민지 세력권 분할은 없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둘러싼 다툼은 여전한 현실이다. 태평양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 동유럽을 둘러싼 미국·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갈등이 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귀결된 것에서 보듯이 말이다.
국가는 무기와 군대를 육성해 무력을 과시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고 동맹을 구축한다. 또 이것이 자본의 활동에 도움을 준다. 국가가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는 힘은 자본이 원활하게 축적하는 것에 의존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쟁은 기업들 사이의 경제적 경쟁만이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국가들 간 경쟁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이고 내재적인 논리다. 그래서 여러 나라들은 자국이 확보한 시장, 정치적 영향력, 동맹 세력을 지키려고 군비를 늘리고, 경제적 압박을 행사하고, 심지어 전쟁도 불사한다.
불균등 발전
레닌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각자 갖고 있는 “자본과 힘에 비례해” 세계를 “분할”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세력 관계는 자본주의의 역동적 성격 탓에 변할 수밖에 없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두 국가는 식민지 쟁탈 경쟁국이었다. 또,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 기업이 특혜를 입을 수 있게 더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신흥 강자 독일이 등장했다. 독일은 당시 식민지가 거의 없었지만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영국과 프랑스 등을 압박했다. 이제 이 신흥 강자를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연합했다. 제국주의 국가들 간 경쟁 격화는 결국에 ‘모로코 위기’와 발칸 전쟁을 낳았다. 그리고 경쟁과 갈등이 누적되며 제1차세계대전으로 확전됐다.
레닌은 이렇게 지적했다. “전 세계는 완전히 분할됐다. 따라서 앞으로는 오직 재분할만이 가능할 뿐이다. 즉 이제 영토는 주인 없는 상태에서 어느 ‘주인’에게로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인’으로부터 다른 ‘주인’에게로 이전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레닌의 핵심 개념이 불균등 발전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국가별·지역별로 경제 발전 정도가 제각각 다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각국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은 바뀐다. 이는 특정 시기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 아래 형성된 질서도 시간이 흐르면 균열이 생겨 긴장이 조성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레닌은 전쟁과 전쟁의 사이가 “휴전”이지 결코 평화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강대국들이 평화적으로 힘의 균형을 바꾸고 세계를 분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연합을 이루며 전쟁 위험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레닌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을 반박하며 이런 주장과 날카롭게 논쟁했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전 세계 제국주의들 간의 투쟁이 아닌 연합의 국면이고, 자본주의 하에서 전쟁이 종식되는 국면이며,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 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 착취’가 일어나는 국면을 말한다.” 즉, 카우츠키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나 전쟁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리해, 전쟁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봤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카우츠키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현실 ― 경제적·정치적 조건의 다양성, 발전 속도에 있어서 여러 나라의 심각한 불균형,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폭력적인 투쟁 ― 을 ‘평화로운’ 초제국주의라는 카우츠키의 어리석은 우화와 대비해 보라. 그것이야말로 냉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겁먹은 속물의 반동적인 시도가 아닌가?”
1870년대 독일 경제는 영국에 비해 상당히 뒤처져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30년 동안 급속히 성장해 1900년 무렵 공업 생산량 등에서 영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심지어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질 무렵인 1910년, 독일이 영국을 앞서 가게 된다.
불균등 발전의 다른 사례도 있다. 냉전 시기 내내 일본과 서독은 미국이 이끈 자본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득을 보며 성장했다. 그 결과 일본과 서독은 경제적으로 미국의 우위를 위협하게 됐다. 오늘날 미·중 갈등도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국가 간 힘의 균형을 흔들고, “재분할” 압력이 상시적이며, 힘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과정이 커다란 불안정과 새로운 전쟁 위험을 낳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다.
그래서 지배자들의 협상으로는 평화를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 20년간 강대국들이 서로 맺은 협약이 100개가 넘었는데, 이런 협약들이 1914년 강대국들이 일제히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는 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제국주의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분석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레닌의 기본적 이해는 오늘날의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하다. 강대국들 사이의 적대와 전쟁은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동역학에서 비롯한 것이고,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의 집적과 집중 경향에서 비롯한 것이다. 레닌의 분석을 실천에 적용한다면 제국주의와 전쟁은 오로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쓰러뜨려야만 없앨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가 계급이 선택하는 일종의 정책 정도로 여기고, 자본주의와 분리시키는 입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자본주의에서도 항구적 평화가 가능하다는 환상은 근본에서 개혁주의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레닌의 반제국주의 전략에서 중요하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이라는 무기를 사용해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이때 제국주의적 전쟁을 국내에서 “지배계급”을 상대로 한 노동계급의 “내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간 전쟁을 계급 간 내전으로 전환해 지배계급을 타도해야만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대 제국주의 열강과 부르주아지의 승리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국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는 혁명적 도전이 결국 경쟁국 노동계급과의 진정한 국제적 연대와 단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실천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레닌은 민족자결권을 옹호하고, 이를 위해 투쟁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 안에서 많은 소수 민족들이 억압받고 있었다. 레닌은 억압받는 민족들이 원한다면 분리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해야 하고, 그래야만 노동계급의 국제주의적 단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러시아만이 아니라 여러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도 적용됐다. 특히 제국주의 열강 본국에 맞선 식민지 국가의 저항이 벌어졌을 때, 본국 노동계급이 반제국주의 저항에 연대해 본국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는 게 결정적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전 세계 피억압 민족과 노동계급이 단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오늘날의 의의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오늘날에도 참고할 만한 고전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레닌에게 약점과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그중에 “노동귀족”론도 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소속 주요 정당들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왜 이들이 자국 지배자들의 전쟁을 지지하는지를 규명하고 혁명적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파고들었다. “노동귀족”론은 개혁주의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노동운동 내 분열에 대한 관찰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사실 면에서 부정확했고, 잘못된 도덕적 함의를 암시하기도 한다.
레닌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자본이 수출된 식민지에서 “초과 착취”가 일어난다고 여겼다. 이렇게 얻은 이윤이 본국으로 송금되면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자들은 노동자 일부(“노동귀족”)를 매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착취율은 오히려 본국에서 더 높았다. 식민지 경제 덕분임을 인정하더라도 당시의 식민 본국의 호황은 노동계급 일부가 아니라 전반적인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숙련 노동자의 상대적 고임금은 그들이 선진적이고 투쟁적인 이유도 있었다. 어쨌거나 매수론은 자칫 이런 전반적인 개혁(상대적 고임금 또는 복지 제공) 쟁취마저 ‘매수’로 볼 위험이 있다. 레닌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은 초좌파적 도덕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치라는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앞장선 노동자들은 비교적 고임금을 받던 금속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약점을 염두에 두면서도, 제국주의에 관한 레닌의 통찰을 현실에 적용해 보자.
많은 좌파들이 현실이 많이 바뀌어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100여 년 전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레닌이 살던 시대와 오늘날의 제국주의 사이에는 근본적 연속성이 있다.
레닌이 살던 시대 이후에도 자본의 집적과 집중 과정은 계속돼 거대 기업들이 세계경제에서 갖는 지배력은 상당히 커졌다. 또 이 복수의 자본들은 (특히 주요 열강) 특정 국가에 발 딛고 국가와 상호 긴밀하게 움직인다.
미국은 소련이 붕괴하고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이미 냉전 시기 동안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경제력의 상대적 하락을 막강한 군사력으로 만회하려고 걸프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등을 벌였다. 여기서 미국의 힘을 보여 주면 세계경제에서 미국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쟁은 크게 실패했다.
일부 좌파들은 세계화로 각국 경제가 이전보다 더 상호 의존하게 됐고, 자본들이 특정 국가와 맺는 관계에서 많이 벗어났으며, 국가들 간 지정학적 충돌은 더는 우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가릿 대처는 “맥도날드 매장이 존재하는 두 국가는 결코 서로 전쟁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뒤에도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국가들 간의 전쟁이 20년 내내 계속 일어났다. 중국 베이징에도 맥도날드 매장은 있다.
따라서 자본이 세계화될수록 오히려 국가 간 경쟁과 국가들의 국제 서열은 더욱 중요해진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 질서에 편입돼 중국이 성장한 결과가 미·중 갈등이라는 점이 그 대표적 사례다.
우리는 특히 미·중 갈등이 격화될수록 반제국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 중국 정부의 홍콩 항쟁 탄압과 신장 위구르 소수 민족 억압 문제 등에서 일부 좌파들은 미국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며 중국을 편든다. 권위주의 국가에 맞서야 한다며 미국의 행위가 진보적이라고 포장하는 그 반대 주장도 있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가들이 싸우는 제국주의 국가들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해서는 안 되고 이들 모두의 패배를 바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치는 오늘날에도 필요한 무기다.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론》은 그 시작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기를 바란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