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제국주의, 전쟁, 좌파 *
두 약탈자·압제자들이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만을 두고,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쥐어짤지만을 두고, 누가 더 많이 차지할지만을 두고 전쟁을 벌일 때, 누가 그 전쟁을 시작했느냐, 누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느냐 따위의 문제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 - 레닌, “‘루스카야 볼랴’의 발자취를 쫓아”, 1917년 4월 13일
모든 나라에서 우선해야 할 것은, 바로 그 국가[“조국”]의 국수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 자국 정부에 대한 증오를 일깨우는 것 … 교전 당사국 노동자들의 연대를 고취하는 것, 부르주아지에 맞선 내전을 공동으로 벌이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실천에서 언제 얼마나 “정당할”지를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핵심은 그게 아니다. … 중요한 것은 그런 기준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오직 그런 행동만이 사회주의적인 것이고, 국수주의적이지 않은 것이다. 오직 그런 행동만이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 레닌, “알렉산드르 쉴랴프니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1914년 10월 31일
2014년 9월 초 세계 최강의 군사 동맹이 웨일스 뉴포트시市에서 회담했다. 이번 나토NATO 정상회의는 아마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가장 중요한 회담이었을 것이다. 두 가지 쟁점이 핵심 의제였다. 첫째,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의 부상. 둘째,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거둔 뜻밖의 승리.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무장 충돌이 다섯 달째 이어졌다. 3000명 넘게 죽고 6000명 넘게 다쳤다. 유엔난민기구UNRA는 약 100만 명이 난민이 됐고, 그중 94퍼센트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두 주州에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추산했다. 그 지역 주민의 약 15퍼센트가 집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주택가가 집중 포격을 받아 피해가 막심하다. 피란을 떠나지 않은 사람 중 다수는 식량·식수·전기를 거의 구하지 못한다.
나토 정상회의 몇 주 전,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리주의자들은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푸틴은 러시아의 “근외 지역”에서 굴욕을 겪었다. 하지만 8월 중순에 이 분리주의자들은 러시아제 무기와 군수품으로 무장하고 상당히 많은 러시아군(“자원병들”)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성공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분리주의자들이 아니라 선봉에 선 러시아인들 때문에 전세가 역전됐다고 주장했다. [분리주의자와 러시아군의] 비중이 어찌 됐든지 간에,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퇴각해야 했다. 9월 5일 우크라이나의 신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는 휴전에 응했다. 푸틴은 러시아가 약해지긴 했지만 특히 자기 앞마당에서는 무시 못할 제국주의 강대국임을 서방에 각인시켰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전투가 재개될지 여부와 별개로, 우크라이나의 “동결된 갈등”은 발트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러시아 접경지의 남쪽 지대 전체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와 서방이 각각 이해관계를 가지고 조지아와 몰도바 역시 여전히 불씨가 될 수 있다.
4 라고 서방에 상기시켰다.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유럽과 러시아 모두 경제 위기가 계속되고 제재와 에너지 공급 전쟁이 벌어질 상황을 앞두고 있다.
우크라이나 위기의 여파로 나토는 발트 3국과 동유럽에 “신속대응군”을 배치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나토가 러시아 인접국들도 회원국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돌아보면 가능하지 않을 법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발트3국과 폴란드는 자국에 나토군이 (지금처럼 임시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 주둔해 달라고 요구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9월에 대규모 전략 핵미사일 기동 훈련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손꼽히게 강력한 핵무장 국가이고, 이것은 그저 허풍이 아니라 실제”아마겟돈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말은 아니다. 서방과 러시아 모두 운신의 폭에 실질적 제약이 있고, 이들의 전략은 현재로서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피하는 것에 무게가 실려 있다. 현재로서는 발트3국과 폴란드에 나토군이 영구 주둔할지 확실하지 않다. 나토 지도자들은 전세를 되돌릴 군사 장비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포로셴코에게 확언했다. 그런 지원이 러시아의 전면적 침공을 부를 수 있고 충돌이 확대될 위험이 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겁에 질리고 굴욕을 당한 포로셴코가 휴전에 합의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러시아도 러시아대로 우크라이나 동부를 영구 점령해 그곳에 발목 잡히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푸틴은 자신의 대리인들을 상대로 권위를 발휘해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세력 내 러시아인 지도자들을 억눌렀다. 비록 이들이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은폐해 주는 구실을 했지만, 그럼에도 러시아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푸틴의 환상 때문에 결국 전략적 신뢰를 얻지는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세력의 지도부가 러시아 정부에 더 순종적인 사람들로 교체된 후에야 푸틴은 이들에게 병참을 지원했고, 위장한 러시아군을 동원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도록 해 줬다. 전황이 낳을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 휴전 협정을 대개 러시아에 유리하게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서 말이다.
냉전이 종식된 후 사반세기가 지나, 러시아와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양측 모두가 직접적 군사 충돌을 벌이거나 더 넓은 지역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한 세기 동안 군사적·경제적 경쟁이 경쟁 당사국들의 의도나 계획 이상으로 번지곤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지금 우크라이나 위기는 러시아, 유럽연합EU, 미국 모두에게 뜻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유럽 전쟁 발발이 목전에 있다고 결론 짓는 것이 실수일 수 있지만, 이 갈등은 자연스레 해소될 일은 아니다. 지금은 전환점이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경쟁에는 실질적 위험이 있고, 좌파와 반전 운동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할 것이다.
아나톨 리벤은 1999년 저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싸우는 형제들》에 쓰기를, 다음의 세 조건이 충족되는 한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대체로 낙관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이 세 조건 모두가 물거품이 됐다. 리벤이 (지금은 몰라도 당시에는) 서방과 러시아가 온건한 대외 정책을 펼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음을 지적해야겠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희망 사항에서 출발할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세계적·지역적 동역학이라는 맥락 속에서 국가 간 갈등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 즉 경쟁하는 자본들과 경쟁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체제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레닌과 그의 동료 혁명가들이 1914년 발발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취할 입장을 밝힐 때 출발로 삼았던 점이다. 이는 오늘날 사회주의자들도 반드시 출발로 삼아야 할 점이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자들 및 러시아계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국가가 러시아와 단절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
● 러시아가 국수주의적 버전의 러시아 민족주의를 국경을 넘어 퍼뜨리려 하지 않을 것. ● 서방이 충돌을 빚을 “힘의 균형” 전략을 추구하지 않을 것.
둘째,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충돌을 살펴볼 때 우리는 국가·민족 분단선을 뛰어넘는 노동계급의 단결을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추상적 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문제다.
우크라이나: 제국주의 경쟁과 학살의 역사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은 ‘접경지’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역사 내내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군대가 이곳을 짓밟았다. 근대에만 해도 차르 제국,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그랬다. 러시아 혁명기에는 내전에서 적군赤軍과 백군白軍이, 또 폴란드군과 독일군이 벌인 가장 중요한 몇몇 전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다. 반혁명 세력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이라는 기치하에 결집하면서, 민족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의 태도가 매우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다.
레닌 등이 정치 투쟁을 벌인 후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인정했다. 혁명 직후에 우크라이나의 예술과 문화는 만개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반혁명을 일으켰다. 1928년에 농업 강제 집산화 정책이 시작됐다. 막대한 식량·토지 자원이 농민에게서 강탈됐고, 소련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인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이 일어나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혁명은 민족과 언어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포함해 혁명의 성과물을 모조리 없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화”에 동참했던 우크라이나의 옛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숙청됐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들 대다수와 공산당원 약 37퍼센트(약 17만 명)가 목숨을 잃었다.
7 대숙청은 전반적으로 끔찍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공산당에서 숙청이 심각했다. 이 숙청은 스탈린이 이후 유럽의 정세를 결정지을 전략으로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을 고려하던 시기에 벌어졌다. 8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는 1937~1938년에 처형된 1만 구의 시신 매장지가 나치에 의해 발견됐다. 소련 치하에서는 이 대학살을 언급도 할 수 없었으며, 1988년 전까지는 이 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조차 부정됐다.
제국주의 경쟁 역시 스탈린이 벌인 숙청의 동인이었다.제2차세계대전 동안 우크라이나인 70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90만 명은 나치의 손에 살해된 유대인들이었다. 또다시 제국주의가 우크라이나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는데, 우크라이나계, 러시아계, 폴란드계, (당연하게도) 유대계가 서로 적대하도록 했다. 독-소 조약에 따른 소련의 우크라이나 점령의 경험과 스탈린 시기의 고통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 중 소수는 나치를 “해방자”라고 보게 됐다. 반동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부상했다. 그 운동 안에 포함돼 있던 많은 파시스트들은 나치와 협력해 유대계·폴란드계뿐 아니라 많은 우크라이나계 사람들도 학살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인 숙청이 낳은 재앙적 결과에 격분했다.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벌어진 이후 우크라이나 서부의 그 누구도 이제는 크렘린의 관할 아래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비록 지금도 이름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이지만 말이다. 우크라이나 서부, 부코비나 지역, [우크라이나 동부의] 카르파토-우크라이나의 노동자·농민 대중은 혼란에 빠졌다.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가? 무엇을 요구해야 하나? 이런 상황 때문에 가장 반동적인 패거리가 자연스레 지도력을 갖게 된다. 이 패거리는 각자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독립이라는 허상을 약속받는 대가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이런저런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팔아넘겼다.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정책의 토대에는 바로 이런 비극적 혼란이 있다.우크라이나 국경 지역 사람들은 분단을 거듭 겪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발트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러시아 접경지의 남쪽을 따라 뻗은 긴장의 호號에 박힌 쐐기 같은 존재이다. 셔먼 가넷은 우크라이나가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차지한 핵심적인 지정학적 위치를 언급하며 우크라이나를 “호의 주춧돌”이라고 불렀다. 가넷과 리벤 모두 서방 측이 우크라이나를 놓고 벌일 전쟁 도발 일체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이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전체에서 국토가 가장 넓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다.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헝가리·슬로바키아·폴란드와, 북쪽으로 벨라루스와, 북쪽과 동쪽으로 러시아와, 남쪽으로 루마니아·몰도바 및 몰도바에서 친러시아적으로 분리한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우크라이나가 흑해와 아조프해에 면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음을 밝히 보여 줬다. 이 바다들은 터키·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과 (이들 나라들 모두 저마다 갈등과 충돌의 주체다) 접해 있으며, 이 바다 너머에는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또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인 중국이 있다.
계급 갈등과 민족 분열
마이단 시위(키예프 중앙 광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는 2013년 가을에 시작됐다. 이 시위는 당시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과의 협력 협정 체결을 거부한 것 때문에 촉발됐다. 시위 초기에는 학생들이 주된 구성원이었는데, 이들은 시장 경제를 기대했고, 우크라이나 엘리트들의 부패와 옛 소련 몰락 이후 경제의 희망이 산산조각난 것의 대안이 유럽연합과 서방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정권에 도전한 첫 번째 저항 운동이 아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0년에도 학생들이 마이단 광장을 점거했다.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영감을 줬다. 첫 번째 사건은 1989년 소련을 뒤흔든 광원 파업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주를 비롯한 곳곳에서 광원 수만 명이 도시 광장을 점거하고 헬멧을 두드리며 시위를 벌였다. 석탄 가루로 눈가가 까매진 광원들은 비누와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두 번째 사건은 중국 학생들의 톈안먼 항쟁이었다. 학생들은 천막 농성과 단식 투쟁에 돌입해 우크라이나의 자치(독립은 아니었다)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 시위는 마이단 광장의 포석에서 이름을 따 “화강암 혁명”이라고 알려졌다. 시위의 규모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이 시위는 소련 제국 전역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중 운동 물결의 일부였다.
그런데 1990년 10월 중순에 시위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고, 정부가 무력 진압 태세를 갖추며 반동의 위협이 드리웠다. 돌파구를 낸 것은 키예프 소재 대공장 노동자들의 거대한 행렬이었다. 소련 군산복합체의 핵심이었던 이 대공장들에 고용돼 있던 노동자 수만 명이 학생들을 지지하며 의회로 행진했다. 보흐단 크라우첸코가 묘사하듯,
뜻밖에도 10월 18일에 키예프 최대 공장들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대가 학생들을 지지하며 의회로 행진했다. 노동자들이 외친 것은 오직 한 단어, 자기 공장의 이름 “아스널[무기]”이었다. 노동자들이 세력 균형을 흔들었다. 그날 저녁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승리에 환호하는 분위기가 키예프를 휩쓸었다. 학생들이 다가오던 반동을 저지한 것이다.
독립과 민주주의를 요구한 투쟁과, 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어진 파업은 단결된 저항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에서 벌어진 광원 파업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지지를 받았고, 민족주의의 보루였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광업 중심지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에서 독립 찬성에 투표한 비율은 84퍼센트에 이르렀다. 도네츠크·루한스크 등 우크라이나 동부의 산업 지구들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자가 다수이고 러시아계 주민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지만 독립 찬성에 투표한 비율이 83퍼센트를 밑돌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소련 제국주의의 군사적 요새였던 크림반도였는데, 이곳에서도 유권자의 54퍼센트가 독립 찬성에 투표했다.
13 생활 수준이 급격히 악화됐고 평생 동안 모은 저축과 연금이 휴지조각이 됐다. 우크라이나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적 태풍의 눈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옛 동구권 국가 중 유일하게 생산 수준이 1993년 이전보다 낮다(그래프1을 보시오).
그러나 소련 몰락 후 경제가 붕괴하며 분열이 커지기 시작했다. 1989~1991년의 희망은 [대규모 시장화 정책인] 충격 요법, 하이퍼인플레이션, 러시아 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타격 때문에 스러졌다. 1993~1995년 우크라이나의 연평균 물가 상승률은 2001퍼센트였다.(같은 기간 러시아의 연평균 물가 상승률은 460퍼센트였다.)경제는 2000년 이후 약간 회복했지만 2008년 경제 위기가 찾아 왔다. 철강의 국제 거래 가격이 급락했다. 우크라이나의 외채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외환 보유고가 텅텅 비었다. 경제는 15퍼센트 수축했고, 우크라이나 화폐 가치는 40퍼센트 떨어졌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2013년 우크라이나의 1인당 소득 수준과 평균 기대수명을 이웃 나라들과 견줘 보면 알 수 있다. 1인당 소득 (미국 달러 대비) 출처: 세계은행
우크라이나 | 헝가리 | 폴란드 | 러시아 |
3900 | 12560 (2012년 데이터) | 13432 | 14612 |
우크라이나 | 헝가리 | 폴란드 | 러시아 |
63.78 (동부는 61.2) | 71.73 | 72.74 | 64.37 |
우크라이나 동부·서부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미래가 물거품이 됐지만, 우크라이나인들 중 한 집단만은 소련 붕괴 이후 호시절을 보냈다. 바로 올리가르히, 즉 옛 소련 시절 지배계급(“노멘클라투라”) 출신으로 신흥 기업가 겸 폭력배에 가담한 집단 말이다. 이들은 국가 자산과 새 기업체가 헐값에 팔리는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예컨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부유한 올리가르히인 리나트 아흐메토프는 우크라이나 동부 광업·철강업에서 부를 쌓았다. 다른 올리가르히 대부분이 그렇듯, 아흐메토프는 러시아 시장과 서방 시장 모두에 지분이 있고, 자신이 이윤을 얻는 산업 부문에 러시아와 서방측 경쟁자들 모두가 진입하지 못하게 하려 애쓴다. 아흐메토프의 자산은 (알려진 것만) 140억 달러가 넘는다. 아흐메토프는 우크라이나의 전력·에너지·석탄 생산의 50퍼센트 이상을 통제하며, 광업·철강·언론·부동산·석유·천연가스 산업에 지분이 있다.
아흐메토프의 부에는 또 다른 면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광업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우크라이나에서 석탄 1만 톤당 사망률은 중국의 3배, 러시아의 10배, 미국의 100배다. 이 광원들은 한 달에 200파운드도 채 벌지 못한다. 아흐메토프가 소유한 광산 중 하나인 수호들시카-스흐드나 갱도에서는 2011년 메탄 가스 폭발로 127명이 목숨을 잃었다. 광원 스메타닌 이고르 블라디미로비치는 폭발 사고가 난 갱도의 조건을 이렇게 묘사했다.
어제 저는 갱도에서 시신들을 지상으로 올리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울었어요. 어떤 사람이 공기 중 메탄 비율이 0.5퍼센트가 아니라 5퍼센트라고 말한 걸 들었어요. 가스 누출이 있어도 아무도 도망칠 수 없어요. 그냥 신선한 공기를 좀 불어넣어 주고 계속 일을 시킵니다. 아니면 일자리를 잃어요.
14 입니다. 석탄 분진이 어마어마한데도 환풍 시설이 없어요. 겨울에는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옵니다. … 짐승 같은 취급이에요.
이 형편없는 갱도 일자리의 임금이 1300흐리브냐죽은 사람들을 봤는데, 신발이 없었어요. 한 명은 머리 절반이 없어졌어요. 저는 그날 종일 일했어요. 하지만 저녁에는 쓰러져서 새벽 3시까지 울었습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울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에요. 인간적으로 그들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가슴이 사무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죽은 건 이 [말을 들었기 – 필자] 때문입니다. “어서! 더 빨리! 석탄을 캐 내라. 갱도를 새로 뚫어라! 떼돈을 벌게 해 줘라!”
올리가르히의 어마어마한 부는 당시 대통령 야누코비치 일가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대통령 일가 저택에 쳐들어간 시위 참가자들은 사치스러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동판 기와, 개인 동물원, 지하 사격장, 18홀 골프 코스, 테니스장, 볼링장, 금으로 도금한 비데 등. [대통령 일가 저택에 대한] 지출 내역서에는 샹들리에에 3000만 달러를, 샹들리에를 설치하고 전원 스위치를 다는 데에 500만 달러를 썼다고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국민 35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사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1991년 이후 위기 때문에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삶이 파탄 나자, 올리가르히와 정치인들은 지역감정과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했다. 정치 지도자들은 서로 경제적·지역적 이익을 놓고 경쟁할 때 경쟁자들에 맞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대중의 분노를 자신들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부패하기로는 모두가 매한가지인 정치인·올리가르히들 사이에서 분열이 커지면서 2004년에 “오렌지 혁명”이 발발했다. “오렌지 혁명”은 부정선거 때문에 촉발됐지만, 어느 쪽도 민주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서방 정치인들은 선거 부정에 대해 진작에 알고 있었다(선거 부정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들은 대중 시위를 조직했지만 이 시위가 지지를 받거나 탄압에 맞설 수 있을지에 전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훨씬 넘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친서방 정치인들이 필요로 하던 압력 수단이 나타난 것이었다. 위기가 심화하자 우크라이나 동부의 지배 엘리트들은 분리 독립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물러섰다. 이 “혁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편 지배 엘리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8년 위기 이후 지배계급 내 파벌들은 혹심한 분열 지배 전략을 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을 “식민 점령자”, 외세와 내통하는 집단,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려 음모를 꾸미는 자들, 기근과 학살의 공범이라고 묘사했다. 반대편에서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우크라이나어 사용자들을 역겨운 나치 부역자들, 러시아계 및 러시아어 사용자를 혐오하는 자들이고, 러시아어 사용을 탄압하고 러시아계의 권리를 억압하려 한다고 묘사했다. 위기의 충격과 엘리트들이 한 구실 때문에 민족적 분열이 심화된 것이다. 분열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적 DNA에 내재돼 있던 것이 아니라 조장된 것이다.
16 하지만 이는 유센코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임기 말에 유센코는 지지가 바닥을 쳐, 2010년 대선에서 고작 5퍼센트를 득표했다. 2009년까지만 해도 민족적 갈등에 대한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걱정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프2에서 보듯 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엘리트들이 긴장을 조성하면서 그런 걱정이 갑작스레 늘었다. 17
친서방 성향의 빅토르 유센코 정부는 극단적 민족주의로 역사를 다시 썼다. 나치 부역자 스테판 반데라가 복권돼 2010년에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추서됐다. 한편 주류 언론은 나치 정당인 자유당Svoboda에 관해 점점 더 많이 보도했다.18 을 반박하며 이렇게 썼다. “피셔가 터무니없게 주장하는, 우크라이나를 양분하는 ‘실제의, 물리적 분단선’은 없다. 오히려 민족적 정체성과 투표 이력이 현재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분단선과 꼭 들어맞지는 않는, 그러면서도 완만한 차이가 있는 인구 집단들이 섞여 있다.” 19
그러나 정치지리학자 에반 센터니의 관찰에 따르면, 주류 언론은 우크라이나 내 분열을 잘못 표현했다. 센터니는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맥스 피셔의 글20 마이단 위기 전에는 언어와 민족성을 둘러싼 오랜 분열은 사라지고 있었는데, 특히 우크라이나계 청년들 사이에서 그랬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중 한 언어만 쓰는 청년들의 비율은 2003~2010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줄었다. 두 언어 모두를 사용하는 비율은 2003년 18.9퍼센트에서 2010년 40.3퍼센트로 늘었다. 21 진실은 우크라이나 동부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러시아계 주민들과 결혼하고, 또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가정과 일터에서 두 언어를 모두 쓴다는 것이다.
언어 문제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다. 옛 소련은 우크라이나어를 체계적으로 억압했다. 1988년에는 우크라이나 어린이 중 28퍼센트만이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를 배웠는데, 1930년대 후반에 이 수치는 89퍼센트였다.마찬가지로, 젊은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노동할 권리, 주택을 가질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임의적 체포를 당하지 않을 권리, 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였다. 이는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소수 정당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최서단인 갈리시아·볼히니아 지방에 국한돼 있는 상황을 아는 데에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대大러시아 국수주의도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 및 남부 일부 지역 바깥에서는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협소한 국수주의에 기반한 운동의 정치적 호소력이란 한계가 있다. 2014년 5월 이전에 긴장이 고조될 때조차도 러시아계의 다수는 분리 독립에 반대했다. 전체 우크라이나인의 14퍼센트만이 지역의 분리 독립을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이 비율은 전국 평균보다 약간 높은 18퍼센트였고, 심지어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어 사용자들 중에서도 분리 독립을 바라는 비율은 27퍼센트에 불과했다.
1989~1991년 투쟁과 사회적 통합의 증대는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단결할 잠재력을 보여 줬다. 두 요소가 이 과정을 억눌렀다. 첫째, 계속되는 정치·경제 위기에 직면해 서로 경쟁하는 지배 엘리트 분파들이 지역적·민족적 분열을 조장한 것. 둘째, 이 경쟁 파벌들이 경쟁국에 맞선 “완충 지대”를 구축하고자 한 서방과 러시아 쪽으로 각각 이끌리게 됐다는 것.
마이단
23 지배계급은 유럽연합·국제통화기금IMF의 것이든 러시아의 것이든 구제금융이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커다란 대가가 뒤따를 것이었고, 양측 모두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지속시키기만 할 것이었다. 야누코비치는 얼마간 주저하다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고, 유럽연합과 협상 중이던 협력 협정에 조인하기를 거부했다.
2013년 말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고는 두 달치밖에 남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의 디폴트 가능성은 그리스보다 두 배나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이는 반발을 촉발했다. 그 반발의 근저에는 동부·서부 모두에서 똑같은 위기에 대한 분노와 올리가르히에 대한 증오가 있었다. 하지만 시위의 요구가 유럽연합·서방에 얽매어 있는 한 결코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분열의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다. 요구의 성격 때문에 2013년 초가을에 학생들이 주도했던 시위는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고 더 일반화되지 못할 듯했다. 11월 말 시위는 약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30일 야누코비치와 그 지지자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했다.
야누코비치의 지지율은 2년 만에 42퍼센트에서 14퍼센트로 추락했다. 야누코비치는 이 정도 시위만으로도 자신이 축출될까 두려웠다. 2004년 “오렌지 혁명”과 그 이전 1990년 “화강암 혁명”의 기억은 우크라이나 지배자들에게는 상징적 여운 이상이었다. 야누코비치는 시위대를 광장에서 아예 쓸어버리기로 결정하고, 시위를 즉각 중단시키려고 행동했다. 야누코비치는 내무부 산하의 악명 높은 부대 “베르쿠트(황금 독수리)”를 투입해 학생 시위를 폭력 침탈했다. 베르쿠트 부대의 연원은 소련이 광원 파업과 독립 운동에 대응해 1980년대 말에 만든 특수부대 오몬OMON이었다. 베르쿠트 부대원들은 일반 경찰보다 봉급을 2배나 더 받았고 반유대주의 문화에 찌들어 있었다. 베르쿠트 부대는 시위대를 광장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거리에서 시위 참가자들을 곤봉으로 폭행했으며, 시위 참가자 다수가 피신한 성 미카엘 수도원을 포위했다.
24 데이비드 카디에가 관찰했듯, “시위는 애초에는 협력 협정 거부 때문에 촉발됐지만, 유럽연합·러시아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는 문제보다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정치 지도자들을 끌어내리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25 한때 광장에서는 야당이 제기한 요구가 더 부각됐다. 그럼에도 시위 참가자들에게 가장 지지하는 요구 세 가지를 꼽으라는 질문에 ‘유럽연합 협력 협정 체결’을 포함시켜 답한 비율은 절반 이하로 4위였다. 압도적 1위는 체포된 마이단 시위 참가자 석방 및 탄압 중단이었다. 2위는 정권 퇴진, 3위는 야누코비치 퇴진 및 조기 대선이었다. 26
시위의 규모가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커졌다. 12월 초에는 시위가 50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시위 참가자들의 동기를 살펴보면 시사적이다. 12월 7~8일 마이단 광장 인근 시위 참가자 1037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조사에서 70퍼센트가 시위 참가 동기를 11월 30일의 경찰 폭력 때문이라고 했고, 53.5퍼센트는 유럽연합과의 협력 협정을 지지해서, 50퍼센트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삶을 바꾸려고”, 40퍼센트는 “정권 교체”를 위해서라고 답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관세 동맹에 가입할 것을 우려해서 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쪽으로 다시 기우는 것에 반대해서라고 답한 사람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야당 지도자들의 호소에 응해서라고 답한 사람은 5.4퍼센트로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충돌과 시위는 겨울 내내 계속됐다. 그리고 1월 16일 정부는 개악된 시위법을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법은 “독재법”이라고 불렸는데, 정부 건물을 봉쇄하면 10년 금고형, 정부 관료를 비방하거나 “공공 질서를 집단적으로 위반”하면 1년 금고형, 베르쿠트 부대원을 비롯한 법집행기관원들이 시위 참가자들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소 면제 등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때문에 대중 시위 물결이 또다시 촉발됐는데, 베르쿠트 부대는 이 시위를 유혈낭자하게 진압해 100명 넘는 시위 참가자가 목숨을 잃었다. 파시스트와 극우는 희생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베르쿠트에 맞선 가장 단호한 수호자 구실을 자처하면서 많은 충돌에서 전면에 나섰다.
정부의 전략은 재앙적 역효과를 냈다. 야누코비치는 도망쳤고 집권당인 지역당은 올리가르히와 소속 의원들이 당과의 관계를 끊으면서 붕괴했다. 친서방 올리가르히·정치인들이 혜택을 입었다. 이들은 파시스트 정당인 자유당과 ‘우파 부대’를 끌어들였고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
좌파 일각에서는 [마이단 시위의]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쿠데타였다고 묘사한다. 이는 위험한 헛소리고, 잘 봐 줘야 의도와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 묘사는 베르쿠트의 구실과 시위대 학살이라는 점을 무시하는데, 이는 친정부 폭력배와 ‘우파 부대’가 오데사에서 반정부 활동가들을 학살했다는 점을 정부 지지자들이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초기 시위를 대중 시위로 전환시킨 것은 자유당도, ‘우파 부대’도, 친서방 정치인들도 아니었다. 바로 야누코비치와 그 지지자들이 전적으로 폭력에 의존한 점, 야누코비치 자신의 몰락을 자초한 결정, 친유럽연합·친서방 정치인들이 남겨 둔 공백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옛 소련 몰락 이후 줄곧 유럽연합과 나토는 옛 소련 블록 지역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가능하다면 1991년 이후 독립한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인 “근외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만회하려 했다.
오랫동안 세력 균형은 서방에 유리했고, 발트 3국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하나둘씩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하는 동안 러시아는 거의 혹은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2009년이 되면 옛 소련권 국가들 중 12곳이 나토에 가입했고, 그중 11곳은 유럽연합에도 가입했다. 2014년에는 조지아·몰도바·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심화적·포괄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동유럽 및 러시아 주변에서 경쟁하는 무역 블록들 간 긴장이 증대한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고 유럽연합 일부의 공세적 대외 정책의 문제만도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옛 제국에 대한 감성적 애착 문제만도 아니고, 러시아가 포위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만의 문제도 아니다. 매력적인 제안이나 협상을 따내기 위해 “클럽”에 참가하는 문제인 것만도 아니다. 이 지역 경제 블록들 간 경쟁은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들이 벌이는 경제적 경쟁의 표현이다.
막대한 자원과 시장이 판돈으로 걸려 있다. 각 블록은 경쟁 블록에 대해 최대한의 경쟁적 우위를 누리고 세계 시장 경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혈안이 돼 있다.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이 다른 대규모 경제인 미국, 일본, 동남아시아, 그리고 현재는 중국을 상대로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목적으로 창설됐다. 냉전 종식 후 유럽연합의 동진東進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28 양쪽 모두와 모순된 이해관계가 있다. 주요 경쟁국들 역시 서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데이비드 카디에는 유럽연합 대 러시아가 후원하는 유라시아관세동맹ECU 간 경쟁의 동학과, 이 경쟁이 [각각의 경쟁 블록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국가들에 가하는 모순된 압력을 (학술적인 경제학자의 언어로이긴 하지만) 꼼꼼히 추적했다. 우크라이나가 그랬듯, 한쪽 경제권의 영향력 안으로 순탄하게 편입된 국가는 하나도 없다. 이들은 러시아 및 유라시아관세동맹 회원국들, 그리고 러시아의 가스·에너지 공급에 크게 의존하는 유럽연합 시장그럼에도 이 양측 “파트너십”은 모두 상호 배제적이다. 한쪽에 가입하면 다른 쪽에 가입하는 것이 규칙으로 금지돼 있는 것이다. 한 세기 전에 레닌과 부하린이 카를 카우츠키를 반박하며 살펴봤듯, 세계적 규모의 경제적 통합이 강화된다 해서 경쟁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쟁 자본의 희생을 대가로 우위를 차지하고 상대의 자원과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매우 “비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경쟁은 언제나 벌어지게 된다.
29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고전적 분석(자본 블록 간 경제적 경쟁이 발전한 것)과 국가 간 군사적 경쟁의 문제로 돌아간다.
카디에는 이런 경제적 “파트너십들”이 러시아 “근외 지역”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두 지역을 구축하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러시아와 유럽연합 모두 자기 이웃 나라들과 경제적·행정적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구조물을 만들려 시도한다. 수단은 서로 다르고, 성공의 기록도 다르지만 말이다.”유럽연합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경합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어느 쪽도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양쪽 모두 심각한 오판을 했지만 말이다. 2008~2009년 세계경제 위기 때문에 지역 단위의 대규모 무역 블록에 속하지 않은 국민국가 지배계급들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트너십” 협상이나 블록 가입을 도모해야 한다는 압력을 더 크게 받게 됐다. 무역 위기와 재정 적자 악화의 충격 때문에 관세(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경쟁의 도구다)를 인하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진다. 이것이 외환 보유고 급감과 맞물려 그런 국민국가들은 조건이 무엇이든 “파트너십”에 가입해야 한다는 커다란 압력을 받는다. 물론 그런 조건들은 그 나라 노동자들이 치를 대가가 돼 돌아온다.
우크라이나가 전형적 사례이다. 야누코비치는 유라시아관세동맹과 유럽연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양쪽 모두에 한 발 걸치려 했다. 야누코비치는 유라시아관세동맹 참관국 지위를 얻고자 하는 동시에 유럽연합과 협력 협정을 협상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경제 위기가 심해지고 러시아와 유럽연합 모두 “최후통첩적” 조건들을 들이밀면서 그런 줄타기가 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유럽연합은 자만심에 일을 그르쳤고, 야누코비치는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줄타기가 끝나자 우크라이나는 발칵 뒤집혔다.
러시아는 언제나 인접국인 벨라루스·몰도바·우크라이나·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을 한계선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국가들 중 몇몇은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우크라이나가 가장 중요했다. 우크라이나의 유라시아관세동맹 가입은 푸틴의 지역 경제 프로젝트에서 핵심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없으면 유라시아관세동맹에는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밖에 없게 돼, 이 프로젝트 자체가 훼손되고 다른 국가들로서도 가입할 매력이 줄어들게 된다.
유럽연합의 경제적 확장에는 나토의 군사적 잠식 증대 위협이 수반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하면, 러시아의 지역적·세계적 지위는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었다. 푸틴은 결코 이를 두고 보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푸틴은 야누코비치가 실각하고 그 후임으로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서방 역시 러시아의 투쟁 의지를 엄청나게 과소평가했다. 야누코비치가 실각하고 우크라이나가 서방 쪽으로 기울자, 러시아의 경제적 지렛대가 더는 충분치 못하게 됐고, 이에 푸틴은 러시아의 지정학적 우위와 군사력을 이용해 최소한 우크라이나를 불안정하게 하고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서방 경제·군사 동맹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을 막으려 파병했다.
30 차리리 러시아는 민족적·인종적 갈등을 부추겨 인접국들을 불안정에 빠트린 다음, 그런 국가들이 러시아의 선의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의 대對우크라이나 전략은 러시아가 1990년대 이래로 실행해 온 개입의 패턴을 따랐다. 러시아는 인접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을 피해 왔다(체첸은 중요한 예외인데, 체첸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한 후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1차 체첸 전쟁은 러시아 국내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렀고, 그 유산이 러시아의 대외 정책에 여전히 남아 있다.31 러시아는 중무장한 대부대를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병들”에 의존했다. 이들은 대개 고도의 훈련을 받았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중하급 장교 및 정보관들로, 전장에서 현지 병력을 지도·지휘했으며 러시아가 지원하는 무기·군수물자를 전달하는 구실을 했다. 이런 전투 과정에서, 러시아/소련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극도로 반동적인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라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집단이 등장했다.
이런 정책을 편 결과, 러시아의 “근외 지역”에서 러시아가 핵심적 구실을 한 유혈낭자한 갈등이 잇달아 벌어지게 됐다. 분리 독립 여부를 두고 벌어진 조지아 대 압하지야·남南오세티야의 갈등, 몰도바와 몰도바에서 분리해 나간 친러시아 성향의 트란스니스트리아 사이의 갈등,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두고 벌어진 아르메니아 대 아제르바이잔의 갈등이 그런 사례들이다.그런 자들 다수는 파시스트 알렉산드르 두긴이 이끄는 극우 “유라시아주의” 운동, 반유대주의 신문 〈자브트라[내일]〉, 극우 반동 알렉산드르 프로카노프가 주도하는 언론사 ‘덴[한 시대]’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이들은 “적-갈” 동맹의 구성원인데, 이 동맹은 스탈린주의자들, 대러시아 국수주의자들, (지도자들은 러시아 정부와 거리를 두는) 파시스트들 간의 동맹이다.
2000년 이래로 푸틴은 전문성과 장비를 대폭 보강한 직업 군대를 만들었다. 석유·가스 국제 거래가가 배럴당 30달러에서 130달러로 뛰어 막대한 자본이 유입된 덕에 밀물처럼 밀려든 에너지 부富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런 군사적 자원은 ‘대리인’을 이용해 인접국을 불안정하게 하는 러시아의 전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데에 쓰였다.
2008년에 러시아가 조지아의 나토 가입 시도를 저지하려 5일 동안 신속하고 전격적인 전쟁을 벌여 서방에 굴욕감을 안겼을 때, 러시아의 전략은 절정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거주하는 친러시아 성향의 소수 민족을 이용해 조지아를 불안정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가동했다. 그러자 조지아는 서방이 자신을 지지해 주리라 기대하고 남오세티야를 공격하는 우를 범했다. 러시아는 군대를 투입하고 반란군을 공중 엄호해 주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때 이래로 러시아는 특히 에너지 공급을 통해 조지아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서방 제국주의와 러시아 “불곰”
제국주의 강대국들 중 어느 한 쪽이 “그나마 덜 나쁜지” 가늠하려는 사람들은 러시아의 위협과 미국의 위협 중 어느 하나를 과장함으로써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려 하곤 한다. 이 말이 곧 러시아와 미국이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대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두 측면 모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러시아를 압도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더 강력하다고 해서 제국주의적 충돌이 그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밝혔듯 제국주의는 체제이지 권투 경기 같은 것이 아니다. 특히 자본들 간 경쟁의 변수들이 바뀜에 따라 긴장과 충돌은 커지게 마련이다.
지금 서방과 러시아가 벌이는 갈등에서 양측 모두 저마다의 취약성과 상대적 강점·약점이 있다. 개중에는 명백한 것들도 있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시리아 전쟁터의 폐허에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라는 신보수주의적 몽상이 배경에 깔려 있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래 자국의 경제적 지배력의 상대적 약화를 만회하려고 군사적 우위에 크게 기댄다. 그러나 그 군사적 우위는 분쟁 지역이 성장·부흥하는 경쟁 강대국(중국이나 러시아)에서 가까울수록 빛이 바랜다. 미국은 과잉 확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방향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한편, 러시아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러시아의 군사 재정비는 매우 불균등하고 갖가지 문제에 시달렸다. 러시아의 성장세는 뒷걸음질치고 있으며, 푸틴의 인기가 얼마나 많아 보이든 경제 침체기에 전쟁에 휘말리면 삽시간에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지난 경험은 보여 준다. 크림반도에서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있기 하루 전에 모스크바에서 반전 시위가 약 5만 명 규모로 열렸다. 시위 참가자들은 전쟁에만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수가 (아마도 과반이) 크림반도 병합 자체에 반대했다. 그 상황에서 보자면 매우 인상적인 입장으로, 서구 좌파들 다수가 부끄러워 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방과 러시아 모두 같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미국·영국과 그 동맹국들의 시리아·이라크 개입을 제한하는 데서 반전 운동이 한 구실과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 맞선 대중적 반대가 있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푸틴이 러시아 제국주의의 자부심을 회복했기 때문에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렁에 빠지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까 봐 푸틴은 두려워할 것이다.
33 (“휴가 처리된” 러시아 군인이 우크라이나에서 사망한 숫자를 은폐한 것에 대해 군인 가족·친척들이 분노를 터뜨린 데서도 수면 아래의 반反푸틴 정서를 읽을 수 있다.) 34
겉으로 보기에 우크라이나 동부에 대한 푸틴의 전쟁 도발이 많은 지지를 받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숫자의 속임수다. 도네츠크·루한스크 지방의 분리주의자들과 전사들에게 러시아가 지지를 보내야 할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인 50퍼센트가 찬성, 20퍼센트가 반대, 20퍼센트가 확신 없음이라고 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병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40퍼센트가 찬성, 45퍼센트가 반대라고 답했다. 관변 언론의 프로파간다가 판을 치고 조직된 반전 운동은 취약한 현 상황에 비춰 이런 태도가 매우 인상적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다. 청년층의 태도는 더 인상적이다. 또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러시아가 어떤 식으로든 지지를 보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18~30세 층에서는 반대 답변이 찬성 답변과 똑같이 41퍼센트였다.전쟁터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둘 능력에 한계가 있고 자국 내에서 대중적 반대에 부딪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서방과 러시아 모두 대리인에게 기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모험을 벌이게 됐다. 이런 조건에서는 분리주의와 민족 간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우선시된다. 심지어 이라크·시리아·우크라이나 같은 곳에서처럼 의도치 않은 결과 때문에 지배계급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할 때조차 말이다. 그런 전략은 [결과를]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후원의 대상이 되는 행위자들 중에는 그들 자신의 반동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국주의 후견국들에 반기를 드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점은 예측 가능하다. 그런 전략은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단결된 저항의 전망을 파괴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임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지배자들은 어떤 “현지에서의 어려움”이라는 대가도 감수할 것이다.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될지 여부는 그들이 직면할 반발에, 그리고 좌파의 정치와 국제적 반전 운동에 일부 달려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상황과 좌파의 과제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
36 이제 이 전략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서방은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원하며, 이 정부의 노골적인 반동적 성격 및 자유당과 ‘우파 부대’의 구실을 못 본 체한다.
야누코비치 퇴진과 지역당의 몰락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의 전략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확고히 묶어 두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서방 측 동맹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이는 5월 2일 오데사에서 반정부적인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을 때도 계속됐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는 “테러리스트 소탕 작전”으로 3000명 넘게 목숨을 잃고 100만 명이 살던 곳에서 피신했다. 우크라이나군 사병들과 그 가족들의 불만과 우크라이나군의 취약한 상태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파 부대’를 비롯한 준군사 조직들의 나치를 활용하는 데에 더 기대야 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 동부(특히 도네츠크·루한스크)에서 증오를 받고 있는데, 이전까지는 편이 나뉘어 있던 많은 사람들도 이제 정부를 증오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노동자들 내 분열이 매우 심각한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리주의] 운동을 반反파시스트적이라거나 그보다 강력한 우크라이나 서부의 [민족주의] 운동에 견줘 조금치라도 덜 반동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핵심이었다. 크림반도에는 흑해를 면한 러시아 해군의 핵심 기지가 있다(우크라이나로부터 임대받은 것이다). 크림반도는 1980년대 이래로 대러시아 국수주의의 시금석이었다. 크림반도 병합 요구는 러시아 정부·의회 내에서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크림반도에는 이전의 대리전들을 거치며 군사적 역량을 갖춘 네트워크가 있는데, 이 네트워크는 크림반도와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가 정치적 교두보를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그중에는 매우 반동적인 인물인 세르게이 악쇼노프가 있다. 악쇼노프는 ‘크림자치공화국’의 총리가 됐는데, 2010년 선거에서 악쇼노프의 정당은 고작 4퍼센트 득표했다. 또 다른 인물로는 이고르 기르킨(“소총수” 스트렐코프라는 이명異名이 있다), 알렉산드르 보로다이, 이고르 베즐레르, 블라디미르 안튜페예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트란스니스트리아 분쟁을 비롯한 이전 전투들에 참전했던 자들이다. 비교적 덜 알려졌던 안튜페예프는 아마도 지금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됐을 텐데, 그는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보안군 사령관으로 복무했고, 미수에 그쳤던 1991년 라트비아 쿠데타에도 관여한 바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후 기르킨과 보로다이는 우크라이나 동부로 건너가 분리주의 단체에서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이들의 커넥션이 분리주의 단체들이 러시아에서 무기·군수물자·자원병을 공급받는 데에서 핵심적이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한 반감과 우크라이나 정부가 동부에서 벌인 학살 때문에 분리주의자들이 상당한 수준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오직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위한 대리인 구실을 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전사들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한정돼 있다. 기르킨 자신이 이에 대한 불만을 격하게 토로하며, 우크라이나 동부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힐난했다. 2013년 6월에 기르킨은 러시아 정부에 친화적인 통신사가 러시아의 군사 전략을 주제로 주최한 좌담회에 참가했다. 기르킨의 핵심 논지는 이스라엘이 국경 너머의 적들을 상대로 벌인 “선제적” 타격 모델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러시아가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연찮게도, 기르킨은 “러시아 사회의 인구학적 타락”이 러시아 안팎에 사는 러시아계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떠들었다. 기르킨은 이민자들과 급진 이슬람의 위협에 대해 불평했고, 볼셰비키가 1917년에 “국제적 비밀 결사체”(유대인)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볼셰비키를 “무력화시킬” 조처를 충분히 빨리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불평했다.
좌파 일부는 분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반파시스트” 수사에 기꺼이 속아넘어가 주는 듯하다. 스탈린주의적이고 반동적인 내력이 있는 수사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이 수사는 1953년 동독 항쟁과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반대할 때 사용됐고, 1968년 바르샤바조약 세력이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지지를 정당화할 때도 또다시 사용됐다. “민족 파시스트”라는 혐의는 1980년대 말 이래로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서 독립 운동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한 러시아인의 적대감을 부추기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문제는 몇몇 개인들의 반동적 성향보다 훨씬 심각한 쟁점이다. 분리주의 운동이 대중으로부터 받는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의 성격과 정치 자체는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민족 분열에 기반해 있다. 사실 분리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수동적 지지를 상당히 받을 수 있었지만, 결코 대중 봉기를 조직하지 않았다. 전투 부대들, 심지어 대규모 시위조차도 그런 지침을 받지 않았다. 분리주의 세력은 러시아계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 내의 몇몇 크고 작은 도시들 바깥에서는 점령을 유지하지도 확대하지도 못했다.
서방과 러시아 모두 우크라이나에서 각자의 대리인을 지원했고, 그 결과로 충돌하는 양쪽 모두에서 반동이 활개쳐 왔다. 양측 모두 우크라이나 노동자들 내 분열을 부추겼고, 그럼으로써 전체 노동계급이 제국주의 경쟁에 더 강하게 사로잡히도록 했다. 유럽과 러시아의 일부 좌파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운동이 계급적 요구가 맺은 진보적 결실에 기반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다. 우크라이나에서 계급 운동이라는 주관적 요인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국수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의 정치 지형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이토록 재앙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다.
제국주의와 좌파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한 구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좌파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쟁의 배경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이해와 20세기 초 혁명가들이 발전시킨 고전적 제국주의론에 대한 이해의 적용 문제를 놓고 차이가 있다.
옳게도, 나토 측의 간섭과 개입 일체를 반대하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영국의 혁명가들과 반전 운동가들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러시아의 구실을 두고 이견이 있다고 해서, 서방 전쟁광들에 맞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지체돼서는 안 된다. 서방 전쟁광들의 위선은 어처구니없는 수준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더 크고 더 강하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 다른 나라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것은 21세기에 국제법과 국제 규범이 준수되는 방식이 아니다.” 그 21세기의 규범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가자지구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가 보다.
39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전통을 내세우는 좌파 일부도 그런 입장을 내는데, 이는 러시아와 옛 소련 블록 내 좌파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 반전 운동 내에는 이 갈등을 제국주의 간 갈등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 측 제국주의자들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어야 하고 러시아의 구실을 비판하기를 자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40
하지만 이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한 구실의 성격을 가볍게 볼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제 반전 운동 건설에 해가 될 뿐이다. 까다로운 것은, 미국의 군사적 지배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러시아의 구실을 보는 경향이다. 그 때문에 미국·영국 제국주의에 가장 원칙적이고 끈질기게 반대해 왔던 사람들 몇몇이, 러시아는 이 대립에 책임이 없고 미국·나토에 맞서 “방어”를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강조점은 저마다 달랐지만, 놈 촘스키, 존 필저, 조너선 스틸, 〈가디언〉 칼럼니스트 시우마스 밀네, 미국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요한 비판자였던 스티븐 F 코헨 등이 그런 입장을 취했다.41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고 자국의 영향권뿐 아니라 중동 등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나름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있다. 러시아는 세계 제국주의 체제에서 ([미국에 견줘] 약하지만) 도전자다. 러시아는 경쟁하는 자본들의 세계적 체제의 일부이고 러시아 노동자 대중과 특히 “근외 지역”의 노동자 대중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해 경쟁 강대국들과 갈등을 빚는다.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 2위 핵무기 강국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 아니고, 미국 패권 및 나토 확장과 러시아 사이의 관계만 떼어놓고 볼 수가 없다.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제국주의 간 전쟁과, 강대국들이 종속국들 혹은 피억압 국가들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가 양쪽의 교전 당사국에 똑같은 정도로 반대한다면 결국 가장 강력한 쪽을 지원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 간 충돌을 제국주의 국가와 종속국 사이의 갈등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42 이런 입장이 위험한 것은, 대중적 반전 운동 건설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반제국주의 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나마 덜 나쁜” 제국주의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함축도 있다. 한편, 자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고수하면서도 “진영 논리”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냉전 때 그랬듯이 심오한 변호론을 펴다가 경쟁 제국주의 세력을 더는 옹호할 수 없을 때면 순식간에 입장을 바꾸는 쪽으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
위험한 것은, 냉전 때 그랬듯이 “진영 논리”로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진영 논리”란 특정 제국주의가 상대편에 맞선 나름의 “균형추”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들과 반전 운동가들은 경쟁 강대국들의 “그나마 덜 나쁜” 모험을 정당화하는 입장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 분리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을 취했다.강대국들 간 경쟁에 제국주의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추상이 아니다. “중립”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이것은, 현실을 잠깐 유보하고 러시아가 주된 팽창주의 세력이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나토의 개입과 제재를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라는 뜻이다. 자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해서 그 경쟁 상대의 구실을 왜곡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해 우리가 할 유일한 주장은 모든 나라에서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의 목표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국가 간 전쟁에서 계급 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 국제 “강도단”에 맞서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키는 것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 보리스 카갈리츠키의 입장은, 러시아를 이 문제에서 제외했을 때의 문제점을 보여 준다.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의 좌파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감안하면 특히 문제다. 카갈리츠키는 1980년대 [소련에 대한] 주요한 급진적 비판자였고 “아래로부터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주장을 최초로 개진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카갈리츠키는 국제적으로 유명해졌고 반자본주의·반세계화 포럼에서 중요한 인사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위기 이전에도 카갈리츠키의 약점은 분명했다. 카갈리츠키는 대선 부정에 항의해 2011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 “볼로트나야”를 폄하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이를 노동자들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벌어진 “중간계급”의 시위일 뿐이라고 치부한 것이다(이는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한 카갈리츠키의 기조이기도 하다).
44 실제로, 카갈리츠키는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충분히 강력하게 개입하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2014년 9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만 6000명 규모의 반전 시위를 폄하했다. 45 이는 비극적인 정치적 입장인데, 서구 좌파들도 여기에 책임이 있다.
안타깝게도 카칼리츠키는 (영국에서처럼) 러시아에서 “주적은 국내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나토를 비판하지만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러시아의 대리인들을 지지하고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을 찬양했다. 우크라이나 좌파들은 재앙적으로 분열돼 있다. 스탈린주의적 전통이 강한 “보로트바”라는 단체는 스탈린주의자들과 대러시아 국수주의자들 사이의 동맹으로 전락해 우크라이나 동부 국수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제4인터내셔널과 연계가 있는 또 다른 단체는 마이단 시위에서 떠오른 운동에 적응했다. 안타깝게도 이 단체는 주로 러시아 반대에 집중했고, 우크라이나 서부에 존재하는 나토와 유럽연합에 대한 커다란 환상에는 맞서지 않았다. 서방에서도 마이단 운동이 ‘점거하라’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들의 특징이었던 “자발성”을 고취시켰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러시아가 주적이고 서방 제국주의는 그저 부차적 행위자일 뿐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결론
현재 휴전의 결과를 이러저러하게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경제 위기와 제국주의 경쟁이 우크라니아를 심각하게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 노동자들이 단결된 대응을 할 객관적 잠재력은 있다. 이는 운동과 좌파 세력이 부상해 올리가르히들뿐 아니라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 그리고 그 강대국들이 부채질하는 경쟁 민족들의 국수주의에도 도전할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어느 한쪽의 국수주의를 편들거나 어느 한쪽에 사회주의라는 가짜 포장을 해 주거나 어느 한 제국주의 세력이 방어적이라고 하는 것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혁명가들이 끌어낸 교훈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방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서로 다른 구체적 과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과제들은 두 가지 공통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첫째, 이것이 제국주의적 충돌임을 인식하는 것. 둘째, 사회주의자들은 일체의 민족적 분열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구축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 이런 원칙하에서만 각자 나라의 지배자들이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벌이는 경쟁에서 타협적이지 않은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상대편 제국주의 강대국과 그 대리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런던에서도, 모스크바에서도, 키예프에서도, 도네츠크에서도 진실이다.
레닌은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어서 레닌은 한 강도가 다른 강도를 상대로 벌이는 강도질을 돕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강도들 사이의 쟁투를 이용해 그 강도들 모두를 타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회주의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진실을 소리 높여 말해야 한다. 즉, 이 전쟁은 노예주들이 노예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라고 말이다.”부르주아지의 정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 독일은 영국·프랑스에 적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을 것이다. 독일은 식민지 쟁탈전에서 “배제돼” 있기 때문에 독일의 적들은 독일보다 비할 바 없이 많은 수의 나라를 억압하고 있으며, 독일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에 의해 억압받는 슬라브계는 실로 “민족들의 감옥”인 차르 제국에 의해 억압받는 슬라브계 사람들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훨씬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은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억압하기 위해 투쟁한다.
제1차세계대전 시기에 존재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쟁, 위기, 국수주의에도 불구하고 단결한 국제 노동자 운동을 건설하면서 얻은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계급투쟁 수위가 낮았고 운동이 부침을 거듭했던 것에서 좌파들은 정치적 대가를 치러, 다수가 변화의 동력을 다른 사회 세력에서 찾게 됐다. 궁극적으로 이는 기존 체제와 타협할 위험을 낳는다. 사회주의자들의 책무가 우크라이나 문제만큼 화급한 것도 없다.
스탈린 반혁명 이후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실패했던 것도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냉전기에 토니 클리프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을 최초로 제시해, 제1차세계대전 시기에 레닌과 볼셰비키가 취했던 원칙적 입장을 되살렸다. 클리프가 이런 일을 했던 때는, 좌파가 국제적으로 “진영 논리”에 빠져 양대 제국주의 진영 중 하나(특히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자국 제국주의와 “강도단” 모두를 파멸로 이끌 능력이 있는 국제 노동계급에게서 등을 돌리던 상황이었다. 좌파는 이런 입장을 경쟁하는 자본과 국가들의 다극화된 세계라는 맥락 속에서 되새겨야 한다.
두 거대한 제국주의 강대국이 이윤과 부를 향한 미친 질주를 벌이며 세계 문명의 존폐를 위협하고, 핵전쟁이라는 끔찍한 고통으로 인류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인류의 이해관계에 따르면 어느 쪽의 세계적 제국주의 강대국도 지지해서는 안 되고, 양쪽 다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다. 오늘날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전투 구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
주
-
출처: Ferguson, Rob 2014, Ukraine: imperialism, war and the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144(Posted on 10th October)
↩
- Lenin, 1917. ↩
- Lenin, 1914. ↩
- Cumming-Bruce, 2014와 유엔난민기구, 2014. ↩
- Stratfor, 2014a. ↩
- Lieven, 1999, pp7-9. 리벤은 좌파가 아니지만 체첸과 우크라이나에 관해 흥미롭고 유익한 글을 써 왔다. ↩
- 고전적 제국주의론이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는 Harman, 2003을 보시오. 다른 글에서 하먼은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콕 집어 반박했고(Harman, 1980), 니콜라이 부하린의 접근법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Harman, 1983). 또, 알렉스 캘리니코스, 리오 파니치, 샘 긴딘 사이의 논쟁도 살펴보시오(Callinicos, 2005; Panitch and Gindin, 2006; Callinicos, 2006). 이 논쟁에 관해서는 Rees, 2006, pp212-217도 보시오(리즈의 글은, 최근에 나와 리즈가 우크라이나에 관해 보인 차이에 비춰 보면 특히 흥미롭다). ↩
-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1939, pp331-352. 《소련공산당(볼셰비키당)사》의 마지막 장인 “짧은 요약”은 국제 상황에 대한 서술로 시작해 “부하린-트로츠키 첩자 집단, 파괴자, 반역자들의 잔재를 청산”한 내용으로 끝난다. ↩
- 1937년에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동맹을 내다봤고, 스탈린이 나치 정권과 합의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을 Dewey Commission, 1937에 기록했다. 피에르 브뤼에는 폴란드 공산당에서의 숙청이 스탈린이 나치를 상대로 한 폴란드 분할 협상으로 가는 길을 닦으려는 이유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독-소 조약의 일환으로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갈리시아·볼히니아 지역과 리보프 등지를 점령했다. 브뤼에가 맞다면, 그와 유사한 계산법이 우크라이나 공산당에도 적용됐을 것이다.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일러 준 개릿 젠킨스에게 감사하다. ↩
- Trotsky, 1939. ↩
- Garnett, 1997; Lieven, 1999. Goodby, 1998도 보시오. 같은 “현실주의” 학파의 입장에서 마이단 이후에 대한 탄탄한 분석을 한 것으로는 Trenin, 2014를 보시오. ↩
- Harman and Zebrowski, 1988; Harman, 1990. 이 두 글은 소련이 최종 붕괴로 접어드는 시기에 쓰였는데, 위기의 원인에 대한 고전적 분석과 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서 벌어진 민족 해방 운동의 구실에 관해 썼다. ↩
- Krawchenko, 1993. ↩
- Gillman, 1998, p398. ↩
- 1300 우크라이나 흐리브냐는 당시 환율로 약 62파운드[약 9만 6600원]다. ↩
- Vladimirovich, 2011. ↩
- Rudling, 2013, pp228-231. ↩
- Pew Research Centre, 2014, p10. ↩
- Fisher, 2013. ↩
- Centanni, 2014. ↩
- Lieven, 1999, p16. ↩
- Diuk, 2012, pp120-121. ↩
- Pew Research Centre, 2014, p4 ↩
- Rao, 2013. ↩
- Ilko Kucheriv Democratic Initiatives Foundation, 2014. ↩
- Cadier, 2014. ↩
- Ilko Kucheriv Democratic Initiatives Foundation, 2014. ↩
- Stewart, 1997, pp18-21. ↩
- 유라시아관세동맹의 경우, 무역은 러시아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은 부차적 행위자에 머물렀다. ↩
- Cadier, 2014. ↩
- 심지어 체첸의 경우에서도, 푸틴은 1994~1996년의 패배의 경험에서 배웠다. 전쟁 초기부터 푸틴은 체첸 현지에 옛 체첸 반군 출신인 잔혹한 인물 아흐마트 카디로프가 이끄는 강력한 정권을 세우려 엄청나게 공들였다. 2004년에 카디로프가 암살당하자, 잔혹하고 부패하기로는 카티로프와 꼭 마찬가지인 그의 아들 람잔 카디로프가 정권을 이었다. 푸틴은 카디로프 부자父子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 그로즈니 재건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
- 체첸 전쟁과 1990년대의 분쟁에 관해서는 Ferguson, 2000을 보시오. ↩
- 이 시위들은 인상적이었지만 규모가 수백 명에 불과해, 러시아 좌파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자유 시장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운동의 정치적 방향 설정을 주로 지배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
- Levada, 2014. ↩
- Schlossberg, 2014a 와 2014b. ↩
- Goryashko, 2014. ↩
- 예컨대 Stratfor, 2014b를 보시오. ↩
- Stewart, 1997, pp21-26. ↩
- Investigate This, 2014. ↩
- Chomsky, 2014; Pilger, 2014; Milne, 2014; Steele, 2014; Vanden Heuvel and Cohen, 2014. ↩
- German, 2014; Nineham, 2014. ↩
- 예컨대 세르비아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비교하기 위해서는, Nineham, 2014를 보시오. ↩
- Kagarlitsky, 2014a; 2014b; 2014c; 2014d; 2014e. ↩
- Kagarlitsky, 2011. Haynes, 2008; Crouch, 2002도 보시오. 카갈리츠키의 핵심 접근법에 대한 비판으로는 Harman, 1994와 Callinicos, 1990을 보시오. 이 두 글은 민족 문제뿐 아니라 러시아 “좌파”에 대한 카갈리츠키의 모호한 입장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다. ↩
- Kagarlitsky, 2014a; 2014b; 2014c; 2014d; 2014e. ↩
- Rabkor, 2014. ↩
- Zizek, 2014. ↩
- Lenin, 1915. ↩
- Cliff, 1950. ↩
참고 문헌
Broué, Pierre, 1997, Histoire de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 (Fayard).
Cadier, David, 2014, “Eurasian Economic Union and Eastern Partnership: the End of the EU-Russia Entredeux”, LSE (27 June).
Callinicos, Alex, 1990, “A Third Road?”, Socialist Review (February)
Callinicos, Alex, 2005, “Imperialism and Global Political Economy”, International Socialism 104 (autumn).
Callinicos, Alex, 2006, “Making Sense of Imperialism: a Reply to Leo Panitch and Sam Gindin”, International Socialism 110 (spring).
Centanni, Evan, 2014, “How Sharply Divided is Ukraine, Really? Honest Maps of Language and Elections” Political Geography Now (9 March).
Chomsky, Noam, 2014, “Interview: Noam Chomsky”, Chatham House (June)
Cliff, Tony (as R Tennant), 1950, “The Struggle of the Powers”, Socialist Review (November).
CPSU, 1939, 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Bolsheviks)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Crouch, Dave, 2002, “The Inevitability of Radic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97 (winter).
Cumming-Bruce, Nick, 2014, “More than a Million Ukrainians have been Displaced, UN says”, New York Times (2 September).
Dewey Commission, 1937, “The Case of Leon Trotsky, 8th Session” (14 April).
Diuk, Nadia M, 2012, The Next Generation in Russia, Ukraine, and Azerbaijan: Youth, Politics, Identity and Change (Rowman and Littlefield).
Ferguson, Rob, 2000, “Chechnya: The Empire Strikes Back”, International Socialism 86 (spring).
Fisher, Max, 2013, “This One Map helps explain Ukraine’s Protests”, Washington Post (9 December).
Garnett, Sherman W, 1997, Keystone in the Arch: Ukraine in the Emerging Security Environment of Central and Eastern Europe (Carnegie).
German, Lindsey, 2014, “Does Opposing our Government’s Wars mean we Support ‘the Other Side’?” (13 July).
Gillman, Max, 1998, “A Macroeconomic Analysis of Economies in Transition”, in Amnon Levy-Livermore (ed), Handbook on the Globalization of the World Economy (Edward Elgar).
Goodby, James E, 1998, Europe Undivided: The New Logic of Peace in US–Russian Relations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Press).
Goryashko, Sergei, 2014, “Russians do not Understand the Objectives of the Lugansk and Donetsk Republics”, Kommersant (4 September).
Harman, Chris, 1980, “Imperialism, East and West”, Socialist Review (February).
Harman, Chris, 1983, “Increasing Blindness”, Socialist Review (June).
Harman, Chris, 1990, “The Storm Breaks”, International Socialism 46 (spring), [국역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책갈피, 2009]
Harman, Chris, 1994, “Unlocking the Prison House”, Socialist Review (July/August).
Harman, Chris, 2003, “Analysing Imper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99 (summer), [국역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04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책갈피, 2009]
Harman, Chris, and Andy Zebrowski, 1988, “Glasnost-Before the Storm”, International Socialism 39 (summer).
Haynes, Mike, 2008, “Valuable but Flawed”, International Socialism 119 (summer).
Ilko Kucheriv Democratic Initiatives Foundation, 2014, “Maidan 2013: Who, Why and for What?”
Investigate This, 2014, “Ukraine Crisis: Militia Leader Igor Girkin a Hardline Russian Ex-FSB Colonel (Updated)” (15 August).
Kagarlitsky, Boris, 2011, “Boris Kagarlitsky: A Very Peaceful Russian Revolt”, Links: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ist Renewal (11 December).
Kagarlitsky, Boris, 2014a, “Boris Kagarlitsky: Crimea Annexes Russia”, Links: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ist Renewal (24 March).
Kagarlitsky, Boris, 2014b, “Boris Kagarlitsky on Eastern Ukraine: The Logic of a Revolt”, Links: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ist Renewal (1 May).
Kagarlitsky, Boris, 2014c, “Solidarity with the Anti-fascist Resistance in Ukraine Launch”, (Video Link with Boris Kagarlitsky-2 June).
Kagarlitsky, Boris, 2014d, “Boris Kagarlitsky: Eastern Ukraine People’s Republics between Militias and Oligarchs”, Links: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ist Renewal (16 August).
Kagarlitsky, Boris, 2014e, “Ukraine’s Uprising against Nato, Neoliberals and Oligarchs-an Interview with Boris Kagarlitsky”, Counterfire (8 September).
Krawchenko, Bohdan, 1993, “Ukraine: the Politics of Independence”, in Ian Bremmer and Ray Taras (eds) Nations and Politics in the Soviet Successor Stat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Lenin, V I, 1914, “Letter to A.G. Shlyapnikov” (31 October).
Lenin, V I, 1915, “Socialism and War” (July-August), [국역 《사회주의와 전쟁》, 아고라, 2017]
Lenin, V I, 1917, “In the Footsteps of Russkaya Volya” (13 April).
Levada, 2014, “Russian Views on Events in Ukraine” (27 June).
Lieven, Anatol, 1999, Ukraine and Russia: a Fraternal Rivalry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Press).
Milne, Seamus, 2014, “It’s not Russia that’s Pushed Ukraine to the Brink of War”, (30 April).
Nineham, Chris, 2014, “Ukraine: Why Being Neutral Won’t Stop a War”, (23 March).
Panitch, Leo, and Sam Gindin, 2006, “Feedback: Imperialism and Global Political Economy-a reply to Alex Callinicos”, International Socialism 109 (Winter).
Pew Research Centre, 2014, “Despite Concerns about Governance, Ukrainians Want to Remain One Country”, Pew Research Global Attitudes Project (8 May).
Pilger, John, 2014, “In Ukraine, the US is Dragging us Towards War with Russia”, Guardian (13 May).
Rabkor, 2014, “Anti-fascists were Removed by Police from the ‘Peace March’ in Moscow”, Rabkor (21 September).
Rao, Sujato, 2013, “Banks Cannot Ease Ukraine’s Reserve Pain”, Global Investing (9 December).
Rees, John, 2006, Imperialism and Resistance (Routledge). [국역 《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 책갈피, 2008]
Rudling, Per Anders, 2013, “The Return of the Ukrainian Far Right: The Case of VO Svoboda”, in Ruth Wodack and John E Richardson (eds), Analysing Fascist Discourse: European Fascism in Talk and Text (Routledge).
Schlossberg, Leo, 2014a, “The Army and the Volunteers”, Novaya Gazeta (3 September).
Schlossberg, Leo, 2014b, “They weren’t just Tricked, They were Humiliated”, Novaya Gazeta (4 September).
Steele, Jonathan, 2014, “The Ukraine Crisis: John Kerry and Nato must Calm Down and Back Off”, Guardian (2 March).
Stewart, Dale B, 1997, “The Russian-Ukrainian Friendship Treaty and the Search for Regional Stability in Eastern Europe (Thesis)”, Monterey Naval Postgraduate School (December).
Stratfor, 2014a, “Potential New Dangers emerge in the US-Russian Standoff” (3 September).
Stratfor, 2014b, “Ukraine: Russia Looks Beyond Crimea” (3 March).
Trenin, Dmitri, 2014, “The Ukraine Crisis and the Resumption of Great Power Rivalry”, Carnegie Moscow Center (9 July).
Trotsky, Leon, 1939, “The Problem of the Ukraine”, Socialist Appeal (9 May).
UNHCR, 2014, “Number of Displaced inside Ukraine more than Doubles Since early August to 260,000” (2 September).
Vanden Heuvel, Katrina, and Stephen F Cohen, 2014, “Cold War Against Russia-Without Debate”, The Nation (19 May).
Vladimirovich, Smetanin Ihor, 2014, “Coal miner: People are Expendable”, Kyiv Post (5 August).
Zizek, Slavoj, 2014, “What Europe Can Learn from Ukraine”, In These Times (8 Apr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