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위구르, 좌파 *
1 이스라엘의 살인적인 가자 지구 공격과 예멘인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유혈낭자한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은 누구의 인권 유린도 비난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위선자들이 진짜 우려하는 것은 곧 분명해졌다. 중국의 경제력 부상이 “세계경제의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을 저해하며 도전하는 비시장적 정책과 관행”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후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NATO 회의가 발표한 성명은 중국을 “명시적인 야심과 독단적인 행동으로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에 체계적인 도전을 제기하는” 전략적 경쟁자로 간주했다. 2
2021년 6월 G7 [주요 7개국] 정상들은 [영국] 콘월에서 열린 3일간의 정상회의에서 중국이 “특히 신장 지역[과 홍콩—길버트]과 관련하여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강경한 어조의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이 부상하면서 서방 지배계급의 이익에 심각한 경쟁자가 됐기에, “규칙에 기반한” 질서의 규칙들이 [중국을 막기에] 충분치 않다면 규칙을 조금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앞장서서 2018년 중국 제품에 일련의 관세를 부과했고, 그 후에는 중국 기술 회사 화웨이와 ZTE가 미국 정부와 계약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그의 후임자인 조 바이든은 다른 분야에서는 트럼프와 큰 차이가 있지만 중국에 대한 대립적인 입장은 계속 견지해 왔다.신장 지역의 무슬림 위구르인들이 겪고 있는 곤경이 홍콩에서의 민주주의 억압 문제와 함께 [중국 제재] 조처들에 고상한 겉치장을 해 주려고 거론된다. 이러한 조처들이 실제로는 서방 기업들의 지배력을 보호하려는 것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새롭게 발견된 위구르인에 대한 우려는 위구르인 100만 명 이상(전체 인구의 최소 10분의 1)이 노동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집단 학살 혐의도 받고 있다. 좌파는 이 모든 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키어 스타머의 [영국] 노동당은 이러한 혐의 전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중국에 대한 제재를 촉구했다. 하지만 좌파 중에는 중국 편을 들면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 억압을 변명하려 드는 이들도 있다. 일례로 2020년 10월 미국 《먼슬리 리뷰》는 한 대만 활동가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 내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탄압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단체인 차오컬렉티브의 보고서를 게재했다.
5 이 글에서는 이와 비슷한 입장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데, 바로 제국주의와 민족 해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위구르인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동시에 미국 제국주의와 그 하위 파트너인 영국이 이를 갖다 써먹으려 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것이다.
더 훌륭한 입장을 취한 이들도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반反중국 프로파간다와 미국 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모두에 반대해 온 단체인 ‘비판적중국학자들’은 공개 서한을 발표해 차오컬렉티브의 보고서와 이를 실어 준 《먼슬리 리뷰》 둘 다를 비판했다.증거
6 그중 하나는 워싱턴에 본부가 있는 비정부기구인 ‘중국인권수호자들’로, 자신의 마을에서 수감된 사람 수를 추산해 달라고 요청받은 위구르인 8명과의 인터뷰만을 갖고 추정한 수치다.
흔히 인용되는 수감자 100만 명이라는 수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회진보연대도 이 수치를 인용한다 ― 역자 주] 차이나파일ChinaFile 웹사이트의 수석 편집자인 제시카 배트케는 두 가지 주요 출처가 있다고 시사한다.7 그는 또한 광적인 반공주의 단체인 ‘공산주의희생자기념재단’의 선임 연구원이기도 한데, 이 단체는 입에 달라붙는 편리한 어림 숫자를 내놓는 것으로 악명 높다. 이 단체는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1억 명의 희생자를 낸 “홀로코스트”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시절 반복해 말하던 수치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이 단체도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관련해 중국을 비난한다. 8
다른 출처는 아드리안 첸츠로, 주류 언론은 그의 연구 결과를 널리 다룬다. 첸츠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연구자”라고 밝히지만, 다시 거듭난 기독교인으로서 더 높은 권위의 지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신장 지역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신장 지역을 조사하라고 “하나님이 매우 분명하게 인도하신다”고 느낀다고 주장한다.9 이 연구소의 모母단체인 미국페어팩스대학교는 표절과 “명백히 결함이 있는” 교육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2019년 규제 당국에 의해 거의 폐쇄될 뻔했다. 10
미국 지배층과 연계된 “싱크탱크”들이 첸츠의 주장을 증폭시키고 있다. 예컨대 첸츠의 또 다른 보고서인 〈신장 지역의 강제 노동〉은 뉴라인스 연구소에서 출판됐는데, 이 단체는 스스로를 “비당파적 싱크탱크”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미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11 항공 사진에서 식별된 시설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없거니와, 해당 시설의 실제 수용 인원은 고사하고 수용 가능 인원 추정치에도 분명히 큰 오차가 있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의 한 보고서는 신장 지역 재교육 수용소의 수를 프랑스 AFP통신의 181곳에서부터 우리 친구 첸츠의 1200곳에 이르는 추산치까지 언급하는 식으로 이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한다. 12 호주전략정책연구소는 또 다른 “독립적이고 비당파적인 싱크탱크”로, 자신들의 거래처를 밝히는 것에 다소 수줍어 하는 편인데 전체 자금의 무려 85퍼센트가 호주·미국·영국 정부에서 나온다고 한다. 13
“증거”의 또 다른 특징은 항공 사진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 기술은 이라크 전쟁 때 완전히 신용을 잃었다.14 그럼에도 각종 싱크탱크나 자유아시아방송같이 미국 정부와 가까운 기관들이 최고치의 숫자와 가장 선정적인 이야기를 취합해 퍼뜨리고 있다. 그 후 BBC나 휴먼라이츠워치 같이 더 널리 존중받는 조직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해 미국의 의제를 뒷받침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15
중국 정부가 수용소 수감자 수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추정치는 불가피하게 가정과 추측에 근거하고 있으며, 놀라울 정도로 광범하다. 예를 들어 정치학자 숀 로버츠는 각기 다른 출처에서 10만, 50만, 80만 명이라는 숫자를 인용한다.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 모두 이러한 의심스러운 출처에서 나온 프로파간다를 이용해 중국이 위구르인을 대하는 것을 “대량 학살”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무언가, 즉 다른 곳에서 자행되는 인권 침해보다 더 심각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암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범죄는 잘 기록돼 있음에도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16 미국은 또한 2002년 관타나모 수용소에 위구르인 22명을 구금했다. 이후 미국은 그 위구르인들이 절대 구금되지 말아야 했다고 인정했지만, 2013년에야 그들 중 한 명이 마지막으로 풀려났다. 17
미국의 위구르인 “지지”는 자기 본위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이 점은 중국이 위구르인 탄압을 새롭게 선포된 전 세계적 “테러와의 전쟁”과 엮으려 했던 것을 미국이 이전에는 수용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도덕한 정치 거래 중 하나로,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중국의 묵인을 얻기 위해 동투르키스탄독립운동East Turkestan Independence Movement을[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ast Turkestan Islam Movement의 오기로 보인다] 테러 조직으로 규정하라는 요구를 수용했다. ETIM은 중국 정부의 상상의 산물이었을 뿐이지만 여전히 테러 조직 목록에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좌파가 “적의 적은 친구”라는 태도를 취하며 중국의 옹호자가 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차오컬렉티브는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들에서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온 미국이 신장 지역에서 무슬림의 종교적 권리를 옹호할 정당한 도덕적 관심사나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옳게 지적한다. 그러나 차오컬렉티브는 “신장 지역에 대한 중국의 정책에는 비판할 측면이 있다”면서도 “테러와의 전쟁”에서 차용한 용어들로 중국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하며 어떠한 비판도 가하지 않는다.중국이 위구르인을 억압해 왔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 단연코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수많은 증거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 미국 제국주의 지지자들이 내놓는 모든 주장을 수용할 필요는 없다. 사실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중국 공산당의 국가 건설 계획에 처음부터 내재돼 있었다.
공산당과 중국의 소수민족
19 따라서 이들 민족과의 관계는 초기 중국 공산당에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처음에는 볼셰비키의 노선을 따랐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분리 독립할 권리를 포함한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했다.
중국에서 한족이 아닌 민족들은 전체 인구의 약 8퍼센트에 불과하지만 국토의 훨씬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20 만약 자결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억압 민족의 전제정”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 될 것이었다. 21 분리 독립할 권리는 억압받는 민족들을 자기 운명의 행위자로 만들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는데, 이를 지지하지 않으면 그 주도권은 지배 세력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요점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자국 지배자들이 부추기는 우월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수민족의 자결권은 “분리·분열한 작은 국가들을 형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억압에 맞선 투쟁을 표현한 것”이었다.22 그러나 “당 강령에 레닌의 민족자결권 원칙을 포함시킨 바로 그 순간부터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 한계를 정하려 했다.” 23 그들이 권력을 잡을 즈음에는 180도 방향 전환이 완전히 끝났고, 어떤 지역도 분리 독립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24 이는 1949년 혁명이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반영했다.
1930년의 결의안은 비중국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노동 대중”은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25 소수민족의 마음을 얻으면 국가가 그들의 자원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설명에 따르면, 이 새로운 국가는 “영토가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인구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인구는 한족이 많고 영토가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한 것은 소수민족들이다.” 마오는 한족 우월주의에 반대해 논쟁하면서 이 말을 했다. 불행히도, 이는 이후에 명백해졌듯 원칙적 입장이 아니라 실용적 입장이었다. 마오는 이렇게 자신의 논리를 설명했다. “어떠한 물질적 요소도 인적 요소 없이는 개발되고 활용될 수 없다.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 우리는 한족과 소수민족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조성해야 한다.”26 이 정식조차 수정하지 않고 적용하기에는 너무 엄격했지만, 표면상으로는 객관적인 이런 기준을 따라 중국 공산당은 자결권을 거부하며 소수민족의 주도권을 빼앗았고 누가 민족 지위를 가질 자격이 있으며 그들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침해했다.
중국 공산당의 민족 이론은 스탈린이 민족을 “공통의 언어, 공통의 영토, 공통의 경제 생활 및 공통의 문화에서 발현되는 일반적 기질에 따라 발생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안정적인 인민 공동체”라고 정식화한 것에 근거했다.이러한 하향식 접근법은 소수민족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저명한 사회학자 페이샤오퉁은 이렇게 썼다.
소수민족들은 대개 현대 산업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문화와 기술 수준에서 한족보다 열등하다 … 우리의 원칙은 더 발전한 집단이 경제적·문화적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낙후한 집단을 돕는 것이다.“백인의 짐”(유럽 제국들에게 이른바 문명화 과제가 있다는)과 비슷해, 한 저술가는 이러한 생각을 “한족의 짐”이라고 명명했다. 그 저술가는 이러한 엘리트주의가 어떻게 “소수민족들이 스스로 정치 행위 주체로 나서는 것을 부정”하는지도 보여 준다.
29 [자치 지역은] 해당 소수민족이 운영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5개 성 단위 자치 지역의 당 서기는 전부 한족이 차지했다.” 30 지방 정부에서 권력이 더 작은 부서기 직책만이 해당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공식적으로 승인된 소수민족은 신장·티베트와 같이 성省 단위이거나 그보다 하위 수준에서는 지地, 현縣, 향鄕 단위에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원칙적으로는 소수민족에게 자신들 고유의 정책을 발전시킬 권리가 부여되지만 이는 상급 기관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31 그러나 1980년대는 앞선 시기의 과도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대적으로 관대해졌다. 많은 예배 장소가 다시 문을 열었고 종교 활동이 다시 인정됐다. 예컨대 신장 지역의 무슬림들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성지 순례를 가는 것이 허용됐다. 32
민족 정책의 실제 집행은 중국 전체의 변동을 따랐다. 그에 따라 문화혁명 동안 티베트와 신장의 많은 사원과 모스크가 “네 가지 구습”을 없애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폐쇄되거나 파괴됐다.33 이것은 2011년 중국 정부와 가까운 두 학자가 “2세대 민족 정책”이라는 용어를 만들면서 명백해졌다. 이 정책은 소수민족을 돕는 긍정적 차별 조처를 포기하고 “공동의 문화, 의식, 정체성을 선제적으로 구축하는” 동화주의를 더 강화하는 것이다. 34
그러나 새천년이 시작될 무렵부터 공식적 입장이 확연히 강경해졌다. 이미 2000년에 베클랭Becquelin은 “민족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감지했다.35 이 두 조처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위배된다. 36 정치학자인 크리스천 소레이스Christian Sorace는 새로운 정책이 “레닌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새로운 정책을 통해 볼셰비키에서 더 멀어지는 것은 맞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80여 년 전에 레닌을 버렸다. 37
2세대 정책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적이 없지만, 시진핑 정부하에서 한 자녀 정책 면제와 대학 입학 요건 완화 같은 소수민족 “특혜”가 공격받았다. 중국어 교육이 강요되면서 모국어로 배울 권리도 공격받고 있으며, 종교 활동을 축소하려는 전방위적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신장
38 신장 지역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또 다른 거대한 유목민 연합의 등장을 막으려는 전략적 이유에서 획득한 것이었다.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1644년부터 1912년까지 통치한 마지막 제국 왕조인 청나라가 확보한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신장으로 알려진 지역은 18세기 중반 청나라가 서몽골, 즉 “준가르” 몽골을 장기간의 집단 학살과 군사 작전을 벌인 후에 분할됐다.39 국경은 “차르의 정복이 멈춘 곳”에서 멈췄고, “서로 다른 민족들을 떼어놓은 것이 아니라 비슷한 민족들을” 서로 갈라놓았다. 40
“새로운 국경”이라는 뜻인 신장 지역에 대한 정복은 한동안 자유롭게 드나들던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를 팽창하던 러시아와 중국 제국이 분할하고 영국령 인도가 상당히 개입하는 장기적 과정의 일부였다.신장은 영국의 6배가 넘는 거대한 면적이어서, 인구는 중국 전체의 2퍼센트도 안 되지만 중국 국토의 약 6분의 1을 차지한다. 이 지역은 톈산산맥에 의해 둘로 나뉜다. 북쪽으로는 준가르족이 이전에 살았던 스텝 지대인데, 청나라 때는 러시아령 중앙아시아와 국경을 접했지만 지금은 카자흐스탄과 접하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 이후 청나라는 카슈가르 지역에서 무슬림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이 북부 지역의 인구를 다시 늘렸다. 이 사람들은 농부라는 뜻인 “타란치”로 알려지게 됐지만, 20세기에는 “위구르인”이라는 재발견된 민족 범주에 포함됐다. 이로 인해 위구르 민족주의자들이 단순히 남부의 위구르 중심지만이 아니라 “신장 지역 전체”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극도로 건조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북부 지역보다] 더 넓은 남부 신장의 한복판에 있다. 인구의 대부분은 북쪽 톈산산맥과 남쪽 쿤룬산맥 산기슭의 오아시스 마을에 살고 있다. 1920년대에 동양학자 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는 “산맥에서 사막으로 흐르는 강의 끝 근처에 전형적인 오아시스가 있는데, 여기는 물의 흐름이 관개 도랑에서 부채꼴로 펼쳐지기에 충분한 추진력을 유지하는 지점이다” 하고 썼다. 오아시스 농부들과의 교환으로 곡물, 옷감, 간단한 공산품을 얻으려고 “양털, 가죽, 금속을 갖고 내려오는” 산악 유목민들의 거래는 “종적”이며 “자족적”이었다. 서로 비슷한 오아시스끼리는 거래를 할 동기가 거의 없었고, 횡적 무역은 대부분 장거리로 이뤄졌다. 북쪽과 남쪽의 오아시스 마을들은 실크로드라고 알려진 길을 따라 놓여 있다. 래티모어의 책 《아시아로의 회귀》에 나와 있는 두 지도는 사람들이 생계를 꾸리는 방식과 그들의 민족 집단이 일치함을 깔끔하게 보여 준다. 북부 스텝 지대에서 카자흐인과 몽골인은 목축 유목 생활을 했다. 위구르인들은 오아시스 농업인이었으며(다수는 여전히 그러하다), 남쪽의 고지대 지역은 키르기스 “고산 유목민”들의 거주지였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위구르인은 신장 지역 인구 2280만 명 중 50퍼센트를 약간 넘었고, 한족은 34퍼센트를 차지했다. 150만 명의 카자흐인과 100만 명이 조금 넘는 후이족(중국 전역에 퍼져 있지만 특히 북서쪽에 많이 사는 중국계 무슬림들)도 있다. 몽골인, 키르기스인과 같은 소수의 다른 집단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동투르키스탄인가, 아니면 중국의 불가분한 일부인가?
45 이 주장은 기원전 206년에서 기원후 220년 사이에 중국을 통치한 한나라가 유목민 흉노족과의 오랜 갈등 속에 기원전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에 군사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던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제임스 밀워드가 지적하듯이, 한나라가 투루판과 타림 분지를 온전하게 통치한 것은 125년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그들은 “준가리아에 발판을 마련한 적이 없다.” 46
중국과 위구르 민족주의자들은 신장 지역의 역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이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교리는 “신장 지역은 고대 이래로 중국의 불가분한 일부이다”는 것이다. 618년부터 907년까지 존속한 당나라는 “타림 [분지] 도시국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확고한 통치권을 100여 년간” 행사했고, 준가리아에 대해서는 “20여 년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투르크와의 동맹에 의존해 정복했고 그들의 통치는 “간접적이었으며, 지역의 지배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국인 정착민은 매우 적었다. 이후 또 다른 왕조인 청나라가 이 지역에 중국의 영구적 지배를 확립하기까지 거의 10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것은 준가르 전쟁의 부산물이었고, 그 당시에는 국가의 불가분한 일부를 재정복하는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드너 보빙던은 “군사 작전 동안 ‘통일’이나 ‘재통일’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지역은 제국의 “불가분한” 일부로 여겨지지 않았고, “황실과 청나라의 정책 결정자들 다수는 여러 차례 식민지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했다.”49 청나라 관리들이 감독하기는 했지만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지역 지배층이 권한을 위임받았고, 국가는 “이슬람 사법 체계나 종교 문제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50
오늘날 상황과 달리 적어도 19세기 후반까지 청나라는 이 지역을 “연성” 지배했다.51 청나라 세력을 그 지역에서 13년 동안 몰아냈던 대규모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1884년 신장이 청 제국의 성省으로 편입됐다. 52 1960년대 말 중국이 이전까지 동맹이었던 소련과 갈라진 이후 소련의 침략을 진심으로 두려워했을 때조차, “정책 입안자들은 신장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유해야 할 조국의 일부가 아니라, 주되게는 소련의 공격을 늦추고 보급을 지연시키기 위한 ‘전략적 깊이’로 봤다.” 53
따라서 현재의 신장 지역 일부분은 제국의 불가분한 일부이기는커녕 단속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다. 중국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은 오아시스의 자원을 제국에 통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지역을 적대적인 유목민 연합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였다.54 스텝 지대 유목민들은 자주 옮겨다니고 이 지역에는 실크로드 무역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신장 지역은 단일한 “민족성”이 보존되기보다는 민족과 신앙의 용광로와도 같았다.
당연히 위구르 민족주의자들도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비전을 발전시키기 위해 역사를 이용한다. 그러나 신장 지역이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지만, 반대로 (위구르 민족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름인) “동투르키스탄”이 “4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주장 또한 매우 문제가 많다.55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자 위구르인 중 일부는 오늘날 신장 지역에 있는 오아시스로 이주해 기존 오아시스 주민들과 통합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유지했지만, 문화는 이후 수 세기에 걸쳐 거의 모든 면에서 바뀌었다. 이전에는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은 농부로 정착했고, 그들은 실크로드의 종교인 마니교와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나중에는 이슬람교를 믿었다. 56
744년부터 840년까지 존속한 위구르 제국의 중심지는 동투르키스탄이 아니라 오늘날의 몽골에 있었고, 중국 당나라의 통치를 지원했다.57 정체성은 더 웅장하면서도(투르크인 또는 무슬림 같은 이름은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땅에 걸맞는다) 더 지역적이됐다(카슈가르인, 투루판인 등등의 [오아시스 정착지에 따른] 이름은 오아시스 생활의 파벌주의를 반영한다).
대륙의 무역로를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이 작은 오아시스 정착지들은 다양한 왕국과 제국들에 흡수됐고, 그중 어느 것도 오늘날의 국경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16세기가 되어서 이슬람교로 개종이 마무리되자 “위구르”라는 이름은 더는 사용되지 않게 됐다.58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민족주의적 봉기로 보는 것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이다. 신장은 청나라가 분할해 만든 지역이었기 때문에, 되찾을 독립 같은 것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청나라가 19세기 중반에 손쓸 수 없는 위기에 빠지면서 청나라 관리들과 그들이 의존하던 지역 지배층 둘 다의 “만연한 실정”과 “경제적 고통” 때문에 봉기가 일어났다. 59
세계위구르회의는 “위구르인과 동투르키스탄의 다른 주민들이 외세의 통치에 용감하게 반대했다”며 “독립을 되찾을 목적으로” 42번의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반란은 1864년 (당시에는 둥간족으로 알려진) 중국계 무슬림 후이족이 일으킨 뒤 투르크계 무슬림으로까지 퍼졌는데, 이 중 누구도 당시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구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양한 상층 계급 파벌들이 이 반란을 주도하려 했으나, 결국 이웃 코칸드 칸국에서 온 군대의 우두머리 야쿱 벡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신장 지역의 대부분을 정복한 야쿱 벡은 때로는 한족과 동맹을 맺기도 했고 때로는 위구르인들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쇠약한 청나라가 1877년에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신장 지역을 탈환할 수 있을 정도로 주민들과 멀어졌다. 밀워드는 야쿱 벡이 “위구르의 자유 투사가 아니었다”고 결론짓는다.61 제2차세계대전 와중에 일본의 잔혹한 점령과 그에 맞선 저항을 경험하고 나서야 민족주의 사상이 대중에 확산됐다.
위구르 민족주의의 발전은 19세기 말 유럽 열강의 약탈에 반감을 품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난 초기 중국 민족주의에 견줄 만하다. 종종 민족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정치가이자 정치 철학자인 쑨원은 1924년에도 “중국인들은 가족과 씨족에 가장 크게 충성한다. 고로 중국에는 가족주의와 씨족주의는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민족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 하고 개탄한 바 있다.62 1920년대 당대의 한 기록을 보면, “위구르인”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63 1912~1949년 중화민국 시기 잔혹한 중국 군벌 정권하에서 생활한 경험은 민족주의 정서를 강화시켰고, 위구르인은 1949년 이후 공산당의 민족 분류에 포함됐다. 64 그러나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 사는 성省[신장 지역]에서 민족 정체성을 촉진”한다는 목표는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출범했을 때조차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65
이와 마찬가지로 “위구르”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타란치·카슈가르의 망명 지식인들에 의해 부활하기 시작했다. 저스틴 루델슨은 1980년대 연구에 바탕해 오아시스 사회에 내재된 분열 상태로 인해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여전히 약했다고 주장한다. 지식인들은 “세속적이고, 극렬 반反이슬람적인 범투르크 민족주의자”인 반면, 농민들은 지역적 정체성을 강하게 가진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 바깥에서 거래하는 상인들은 중국과 자신을 더 동일시했다. 그러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이동량이 많아지고 중국의 억압을 경험하면서, 그 후로 위구르인 정체성이 강화돼 왔다.대중적인 위구르 민족주의는 중국 민족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외세의 억압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위구르 민족성 주창과 대단한 다민족 지역인 동투르키스탄에 대한 권리 사이에 위구르 민족주의의 핵심 갈등이 있다. 중국 국가는 [신장 지역을] 위구르인들이 통치하게 되면 지역적인 규모로 민족 억압이 재현될 것이라는 다른 소수민족 집단들의 두려움을 이용할 수 있다.
개발과 착취
67 그럼에도 1884년 성省으로 승격된 이후 신장 지역의 경계는 더 명확하게 구분돼 전통적인 조공국에서 완전한 식민지로 변모했다. 68
19세기 후반까지는 신장 지역의 천연자원을 동시대 유럽 식민지들처럼 착취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69 이는 신장 지역의 경제 발전과 민족 인구 구성의 패턴에 장기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도 산업은 북부에 집중돼 있고, 한족이 그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위구르인 대다수는 덜 개발된(그래서 더 가난한) 남부에 살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은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개발할 자본과 전문 지식이 부족했고, 그래서 투자를 위해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거리가 엄청나게 먼 데다가 인프라가 너무나 낙후돼 있어서(성도省都인 우루무치까지 가는 철도 노선이 1962년에야 완공됐다), 중국의 도시들로 보내는 수송 비용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쌌다. 이 때문에 두샨지의 유정과 여러 채굴 사업체 같은 자산들은 모두 최북단에 있었고, 생산물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령 투르키스탄으로 수출될 수 있었다. 공산당이 처음에는 주로 안보상의 이유로 신장 지역을 점령했을지라도(중국과 소련은 당시 이미 동맹 관계가 불안정했다), 중요한 경제적 고려 사항도 존재했다. 러시아가 개발한 석유·비철금속 채취 사업체들은 곧 중국의 손에 넘어갔다. 러시아 국경 너머로가 아니라 동쪽의 중국 본토로 무역이 이뤄지도록 그에 걸맞는 인프라 개발 계획이 시작됐다.71 구성원 중 약 86퍼센트가 한족이고, 이는 한족 이주민 대다수를 구성원으로 흡수한 이 조직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72
안보와 경제가 연계된 또 다른 결과물은 “빙투안”으로도 알려져 있는 신장생산건설병단의 창설이었다. 국경 지역에 군인들을 농부로 정착시키는 오랜 전통에 따라, 빙투안은 이 국경 지대에서 공산당의 지배를 굳건히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도 빙투안은 지방 정부가 아니라 베이징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다. 이 준군사조직은 창설 이후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다. 2018년 기준 구성원 수는 310만 명으로 신장 자치구 인구의 14퍼센트 가까이 된다.그럼에도 신장 지역의 개발은 1990년대까지는 지지부진했다. 중국 중앙 정부는 “서부대개발”과 이후 일대일로 구상 같은 사업들을 통해 경제 붐을 동부 해안 도시들로부터 서부로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다.
73 시진핑 주석의 말에 따르면 “개발은 안보의 근간이고, 안보는 개발의 전제조건”이다. 74 비록 이러한 접근법이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냈지만, 신장 지역의 최근 경제 성장은 기존 분열을 악화시키기만 했고 억압의 수준은 경제 성장을 억제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는 “동화와 국토 통합”의 과정이기도 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경제 성장과 억압이 상호 강화돼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실제로 신장 지역의 개발은 이미 신장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차 생산물의 생산을 더 늘려서 중국 본토의 공장에서 원자재로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일백일흑”이라는 구호 아래 면화[일백] 생산과 석유[일흑] 추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76 신장생산건설병단은 상수원을 통제하는 데다가 규모의 경제를 발휘할 수 있어서, 위구르 남부에서 널리 이뤄지는 소규모 농업보다 뚜렷한 우위를 갖고 있다. 77
도표 1은 중국 전체 면화 생산량 중 신장 지역의 기여도가 1980년대에는 불과 몇 퍼센트에 불과하던 것이 2019년에는 85퍼센트 이상으로 급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신장 지역이 1990년대 이전까지 국가 경제에서 얼마나 소외돼 있었는지도 보여 준다. 같은 기간 옷감 생산은 비례적으로 감소했고, 제조업의 중심지가 아니라 1차 생산물의 공급원으로서 지속적으로 기능할 것이 강조됐다. 2018년 기준 자치구 내 면화 생산 중 37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양이 한족의 신장생산건설병단에 의해 이뤄졌다.도표 2는 신장 지역이 에너지 생산지로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신장 지역은 이미 1990년 기준 국가 전체 석유 생산량의 5퍼센트를 차지했지만 그 이후 생산량이 거의 4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석탄과 전력 생산량은 각각 10배와 50배 이상 증가했다. 신장 지역은 또한 국가 전체 천연가스 생산량의 3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79 그러나 중동산 석유 수입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있는 좁은 항로인 믈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을 이용하는데,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취약하다. 따라서 중국은 공급망을 다각화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부터 신장 지역을 관통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인접한 카자흐스탄에서 석유를 수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장 지역은 중국 에너지 안보의 핵심 요소가 됐다.
중국은 1993년 이래 석유 순수입국이었다.
80 철도망이 카슈가르와 그 너머로 확장되면서 고립된 위구르 공동체가 중국에 더 가까워졌다. 81
이 모든 것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필요로 했다. 도표 3은 수십 년간 개발이 느리게 정체한 이후 새천년 즈음부터 갑작스럽게 개발이 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인프라 개발은 무역뿐만 아니라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연구자 조너선 힐먼은 신장을 핵심 연결 고리로 삼은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과 19세기 유럽 열강의 팽창 정책을 비교한다. 중국과 유럽 국가들은 “원주민, 환경, 경제적 안정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를 이용했다.이주와 불평등
82 한족이 이 지역으로 유입된 것도 분노의 원인 중 하나다. 1949년 한족은 인구의 7퍼센트에 불과했고 위구르인은 76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착 정책의 결과로 1978년에는 한족이 42퍼센트, 위구르인이 46퍼센트를 차지하게 돼 거의 대등해졌다.
경제 성장과 생활 수준 향상은 한 관료가 바라던 대로 “공산당에 대한 전 인민의 결집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위구르인들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최근에 신장 지역 개발이 추진되면서 한족의 대규모 이주가 동반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지만, 수치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한족 인구의 절대적 수는 최근까지 계속 증가했지만, 도표 4에서 볼 수 있듯이 2003년부터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2015년부터는 절대적 수로도 감소하고 있다. 한족의 우세가 강화되고 있다는 인식은 부분적으로는 위구르인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도시 인구는 새천년이 시작될 때는 전체의 33퍼센트였지만, 2018년에는 50퍼센트를 넘겼다.85 한족과 위구르인 사이의 불평등은 시장화와, 2세대 민족 정책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긍정적 차별 조처 공격을 겪으면서 악화돼 왔다. 2005년 인구 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샤오강우와 시송의 연구를 보면, 위구르인은 한족과의 임금 격차가 가장 적은 정부 기관이나 공공 기관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장화로 인해 이 분야의 고용이 감소했고, 국가와 민간 부문 모두에서 임금 격차가 훨씬 더 커졌다. 게다가 위구르인들은 국영 부문에서 취업하고자 하는 현지 한족 노동자들과 민간 부문에서 취업하고자 하는 이주 한족 노동자들과의 경쟁 모두에서 패했다. 86 위구르인들은 자영업을 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여기서도 한족보다 적게 벌었다. 같은 저자들은 또한 “신장 지역의 민족별 소득 격차가 비농업 부문보다 대부분의 위구르인들이 일하는 농업 부문에서 더 컸다”는 점을 보여 준다. 87 한 면화 공장에서 “위구르인들은 트럭을 운전하고 면화를 삽으로 옮기며, 소수만이 중하급 공장 관리직을 맡지만,” 관리자는 한족이 거의 독점한다.” 88
민족 불평등은 부분적으로 신장 지역 경제가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방식의 유산이다. 대부분의 위구르인이 가난한 남부에 거주하는 동안 산업은 계속해서 북부에 집중돼 왔다. 이는 도표 5에 나타나 있는데, 신장의 각 지역에서 한족이 아닌 민족이 구성하는 인구 비율에 따른 1인당 GDP를 보여 준다. 비한족 인구가 많을수록 1인당 GDP가 낮아져 둘 사이의 음의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위구르인들은 또한 소득이 도시 지역의 평균 38퍼센트에 불과한 시골 지역에 거주할 가능성이 더 높다.대부분의 관측통들은 신장의 한족과 위구르인 사이의 평균적 차이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러한 통계들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룬 스틴버그와 알레산드로 리파는 위구르인이 우세한 도시인 카슈가르에 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비록 동부 지방에서 온 한족이 경제적 측면에서 공공과 민간 부문 모두에서 우세하지만 … 위구르인 엘리트들도 국가 정책의 혜택을 받는 반면, 많은 한족 이주민들은 소외와 빈곤을 경험해 왔다.
90 한 중국인 연구자는 “서부대개발” 사업을 “서부 착취, 동부 발전”이라고 명명했다. 91
진정한 수혜자는 “광범한 지역 주민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는 무역 및 인프라 프로젝트”에 투자를 쏟아붓는 “국내 중국 기업과 국영 기관들”이다. 신규 투자의 급증과 중국 본토와의 관계 강화는 전통적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스틴버그와 리파는 한때 제화와 가죽 세공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중국 동부의 값싼 수입품에 밀려난 카슈가르 지역을 묘사한다. 전직 제화공 몇 명은 성공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수선 작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동부로 이주해야만 했다.탄압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장 지역의 경제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은 억압의 강화를 동반했으며, 이는 소련 붕괴, 2001년 9·11 공격 이후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의 도래, 2009년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민족간 폭력이라는 세 가지 주요 사건에 의해 촉진됐다.
이는 시장화와 외국인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중국 지배자들의 입에서 사회주의적 수사가 점차 사라지고 점점 더 조야한 민족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자신들이 안정과 민족 통합을 보증한다고 자처하는 중국 지배자들 사이에서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에서든 위협이 나타나면 자신들의 신용이 손상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93 가난한 한족 농부들에게 위구르인들은 의심스럽고 낯설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정부에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는 중국 정권이 위구르 분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상당수 한족 인구에 의존하면서 더욱 첨예한 초점이 되고 있다. 신장 지역의 평범한 한족은 특권적 위치에 있지 않다. 예컨대 다른 지역의 가난한 [한족] 농부들은 거짓된 약속에 속아 “자신들을 매우 착취적이고 거의 봉건적인 관계 속에 효과적으로 가둬 놓는” 신장생산건설병단의 농장에 와서 일하게 됐다.94 1980년대는 문화혁명 이후 자유화의 시기였지만, 이제 정권은 민족주의적 표현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위구르 문화를 훼손하려고 하면서 종교적 관습을 제약하기 시작했고, 교육에서 중국어 사용을 강요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 이후로 점점 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1991년 신장 지역과 접경한 옛 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 갑작스럽게 독립한 것은 중국 공산당에 큰 충격을 줬고, 위구르인의 독립에 대한 희망도 불러일으켰다. 한 저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있는데, 위구리스탄은 어디에 있는가?” 1980년대에 한족 아이들은 위구르어로 수업을 받았지만, 2000년대 초가 되면 “이중 언어” 교육이 강조됐고 이 말은 위구르인들이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2000년대 후반 무렵 “우루무치의 모든 고등학교 수업은 중국어로만 진행됐다.” 중국어는 “외딴 지역의 초등학교들”에서조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96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했고 이후에는 파키스탄으로 옮겨간 [위구르인] 망명 집단들은 규모가 작고 자원이 부족해 신장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97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C에 테러 공격이 벌어진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자신들의 신장 지역 정책을 대테러 정책으로 재구성했다. 중국 정권은 자신들이 싸워야 할 “세 개의 세력”을 “분리주의”, “극단주의”, “테러리즘”으로 규정해 이들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지난 10년간의 다양한 사건들은 전부 알카에다 또는 탈레반과 관련된 집단들이 일으킨 테러 행위로 재정의됐지만, 대부분은 사실 “자발적인 분출이거나 위구르인과 보안군 사이의 의도치 않은 충돌로 보인다.”98 매우 좁은 범위의 공인된 한계를 벗어나는 종교 활동은 일절 금지됐는데,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대중의 종교 관행이 광범하게” 영향받는 일이다. 99
“대테러 인민 전쟁”의 일환으로 “신장 지역 남부에서 경찰과 군 검문소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휴대전화와 가방을 검사하는 거리 검문소가 일상화됐다. 가택 수색은 정기적으로, 주로 밤에 이뤄졌다.”100 그러나 가장 소름끼치는 캠페인은 2013년의 “프로젝트 뷰티”로,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버리고 덜 정숙한 옷을 입도록 강요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이는 프랑스 국가의 부르키니 금지령을 연상케 한다. 여성들이 캠페인을 잘 따르는지 감시하려고 일부 지역에서는 검문소와 CCTV 카메라가 사용됐고, 반항하는 여성들은 “재교육” 대상이 됐다. 101 이러한 캠페인은 결코 사람들이 깊이 간직한 종교 신앙을 단념하게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정반대 효과를 냈을 수도 있다. 한 학교의 종교 반대 프로파간다는 “많은 졸업생들이 이전보다 더 단호하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겼다”고 보고됐다. 102
수염을 기르거나 머리 스카프를 쓰는 것과 같이 이슬람 신앙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지하는 캠페인도 행해지고 있다. 호탄의 한 주민에 따르면 이는 여성들에게 특히 어려움을 주는데, 여성들은 일터에 머리 스카프를 쓰고 갔다는 이유로 해고될 수도 있는 반면 시장에서는 쓰지 않았다고 돌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103 중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존경받는 위구르 지식인인 일함 토티에게 2014년 보복성으로 종신형이 선고된 사건은 위구르인이 한족 사회에 수용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신호였다. 104
초기에는 동의의 당근을 사용해 억압의 채찍을 완화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종교적 표현을 자제하는 위구르인은 새로운 경제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약들이 점차 광범하게 확산되면서, 그 대상은 정권의 잠재적 반대자로 인식되는 자들에서 위구르인 전체로 바뀌었다. 2015년에 도입된 “테러 방지” 법안은 “위구르인의 여러 문화적 전통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위구르인의 반대 표현 혹은 종교적 표현을 범죄화한다.” 이 법은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했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보여 주며 중화인민공화국에 통합되려고 노력한 많은 이들에게조차 심각한 파장을 일으켰다.”저항인가 테러인가?
중국 정권은 국제 테러 조직과 연계가 있는 집단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안보 조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2013년 전에는 신장 지역에서 테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건이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위구르인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선 것, 즉 부글부글 끓어오른 조직되지 않은 방식의 반란이었다. 이러한 반란은 다양한 형태를 취했는데, 대체로 경찰과 대치하는 것으로 끝난 시위들, 경찰서와 다른 국가 기관 습격, 그리고 가끔씩 일어나는 암살이 그것이었다.
크리스 하먼은 위구르인들이 겪는 곤경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오래 전에 쓴 글에서, 천대받는 집단에 대한 억압이 증가하면 정부가 해결하려 한다는 바로 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악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상황 논리는 억압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소수민족이 차별에 대해 항의를 벌이고, 국가는 소수민족이 충성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국가는 그들의 대변자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지닌 모든 대표 기관을 해산시키고, 그들의 언론을 검열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더한층 조장한다. 그에 따라 소수민족이 국가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 더 강화된다. 기존 국가 내에서 더 나은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온건한 시위가 종종 화해할 수 없는 분리 독립 요구로 귀결된다.
위구르인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갈등은 이러한 궤적을 고스란히 밟아 왔는데, 로버츠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억압은 갈수록 일부 위구르인의 폭력적인 저항을 야기하고, 이는 결국 더욱 억압적인 국가 정책을 낳고 더욱더 폭력적인 저항을 부채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점점 이 순환은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위구르인 전체 사이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통합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왔다.2009년까지는 저항의 대상이 대부분 정권의 대표자이거나 때로는 부역자로 여겨지는 위구르인이었다. 그러나 그해에 우루무치의 거리에서 민족 간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광둥성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위구르인 이주 노동자 두 명이 한족 여성 두 명을 강간했다는 거짓 혐의를 받은 후 살해된 것이었다. 이 두 명의 위구르인은 표면상으로는 빈곤을 완화하겠다는 목적으로 노동자 수만 명을 신장 지역의 고향을 떠나 중국 제조업의 심장부인 남부 지방으로 가도록 한 “노동 수출”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서방의 여러 언론 보도와는 달리, 대부분은 국가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실업과 빈곤 때문에 자의로 간 것이었다. 광둥성 살인 사건이 있은 후 주말에 우루무치 인민 광장에서 위구르인들의 시위가 열렸는데, 처음에 평화로웠던 시위는 시위 진압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일부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한족들에게 표출했다. 이틀 후 한족 자경단 패거리들이 보복했지만 보안군은 이를 눈감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7명이 살해됐고 이 중 다수는 한족이었다.
109 이는 결국 “당국에 대한 증오와 한족에 대한 증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110
위구르인들의 격렬한 반응은 동포 두 명이 무차별하게 살해된 것에 대한 단순한 반응 그 이상이었다. 인류학자 크리스 한은 “한족과 비교했을 때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인식과 좌절된 기대”가 지난 20년간 “폭력의 악순환”을 일으켰다고 설명한다.111 그해 말 우루무치에서 폭탄이 터져 43명이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신장 지역의 도시] 악수 인근 한 탄광에서 한족 광원 50명이 학살됐다. 112
2009년 폭동의 결과로 예상했던 탄압이 강화되자, 마찬가지로 예상 가능하게도 폭력이 격화됐고, 일부 위구르인들은 한족 시민들을 더욱더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2014년 [중국 남부 윈난성의 대도시] 쿤밍에서 일어난 특히 끔찍하고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위구르인 8명이 긴 칼을 휘두르며 “[쿤밍]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무차별적으로 희생자들을 차례차례 살해”해 29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113 악수의 광원들은 토지 분쟁 때문에 살해됐다는 정황도 보인다.
이러한 공격들을 “테러”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그럴싸할 수는 있겠지만,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국제 지하드주의자들과의 연계가 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 조직되고 자금을 지원받는 집단들의 행동이 아니다. 쿤밍 테러는 가해자들이 망명에 실패한 후 최후의 절망 속에서 저지른 행동으로 보인다.114 한 젊은 위구르인도 인터뷰에서 닉 홀드스톡에게 같은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해외[미국이나 영국을 뜻한다—길버트]로부터의 도움인데, 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둘째 길은 평화 시위[인데, 그것도 불가능했다—길버트] … 셋째 길은 탈레반이다.” 115 중국 정권은 자신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괴물을 만들어 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하자, 이는 자기 실현적 예언이 돼 일부 위구르인들은 이미 비난받고 있던 바로 그 방법을 채택하게 됐다.
일함 토티는 체포되기 직전에 일부 위구르인들이 그토록 절망적인 행동으로 돌아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폭력적 수단의 사용은 표현을 발산할 다른 모든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난다.”정권은 다시 한 번 탄압을 강화해 더 많은 위구르인을 “재교육”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많은 수감자들이 공식적으로 체포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감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식] 체포 건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보면 탄압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표 1 참조). 신장 지역은 인구가 중국 전체의 1.6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체포율은 2016년에 이미 두 배였고 2017년에는 8배로 뛰어올랐다. [2017년의] 이 수치는 추정치이지만 이듬해[2018년]에도 여전히 엄청난 증가세를 보인다. [2019년] 이후의 감소가 실제 투옥이 감소한 것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전술적 변화일 뿐인지는 알 수 없다.
Year | Xinjiang | National | Percentage |
2014 | 27,164 | 879,615 | 3.09 |
2015 | 34,568 | 873,148 | 3.96 |
2016 | 27,404 | 828,618 | 3.31 |
2017 | 227,882* | 1,068,802 | 21.32 |
2018 | 114,023 | 1,056,616 | 10.79 |
2019 | 63,736 | 1,088,314* | 5.86 |
* 백분율 증가 또는 5년 총계에 기반해 추정한 수치.
출처: Supreme People’s Procuratorate—www.spp.gov.cn/spp/gzbg/index.shtml; Xinjiang People’s Procuratorate—www.xj.jcy.gov.cn/jwgk/gzbg. 2017년 수치는 Chinese Human Rights Defenders, 2018에서 집계된 것이다. 이후 연도는 원래 출처에서 나온 것이다.
안보화 대 개발
2016년이 되면 중국 정부는 개발 정책이 적어도 위구르인 일부를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린 듯 했다. 오히려 모든 위구르인을 대상으로 하는 안보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자원의 원천이 된 [신장] 지역의 성장을 저해하기 시작했다.
116 카라코람 고속도로는 신장 지역 남부와 파키스탄을 연결한다. 이 고속도로는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의 핵심 연결고리이며, 힐먼에 따르면 시진핑의 국제 개발 전략의 핵심인 일대일로 구상의 “대표적인 결실”이라고 한다. 117
알레산드로 리파는 자신이 2017년 카라코람 고속도로를 따라 다시 한 번 여행했을 때, 8년 전보다 많은 비용을 들여 도로가 개선됐지만 소요 시간은 그때보다 더 많이 걸렸다고 설명한다. 이유는? “속도 위반 카메라, 차량 추적 장치 및 위풍당당한 검문소” 때문이었고, 이 모든 것은 “대중 감시 기술 장비”의 일부다.118 위구르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국가의 안보 조처에 대한 불만 때문이든, 이 지역 중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의사 표시를 하고 있는 듯하다.
안보화가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후들이 있다. 지역 GDP 성장률은 지난 몇 년간 둔화된 반면, 수출은 2018년에 7퍼센트 이상 급감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한족 인구가 2015년에서 2018년 사이에 75만 명이나 감소했다는 점이다. 불과 3년 만에 거의 9퍼센트 감소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안보 조처가 위구르 “분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한족 인구를 늘리려 한 오랜 전략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족 인구가 계속 감소하면 자원 추출은 점점 더 위구르인의 노동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강제 노동으로 목화가 수확된다는 젠츠의 주장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이 점이 그 까닭일 수도 있다. 신장 지역의 최근 발전은 이 지역을 중국 경제에서 훨씬 더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개발과 강박적인 안보화 사이의 모순은 막대하게 늘어난 안보 비용과 결합돼 현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결론
현재로서는 신장 지역에서 한족과 위구르인이 단결해 투쟁을 벌일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전체의 노동운동이 개별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파편화된 경제 투쟁에서 벗어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중국 공산당의 지배와 개발 전략에 도전하는 운동으로 나아가려면 위구르인과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들의 대의명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121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은 중국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의 이념적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에 따라 분열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투쟁이 분출할 때 이런 종류의 단결이 가능해진다. 1989년 베이징에서 일어난 톈안먼 광장 시위의 지도자 중 한 명은 위구르인인 외르게슈 될레트(우얼카이시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였다. 122
카를 마르크스는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라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민족을 노예로 만드는 민족은 자신을 옭아맨 사슬을 벼리고 있는 것이다.”123 제1차세계대전 와중에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경제적 경쟁에 뿌리를 둔 체제로, 가장 발전한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로서 서로 대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원과 시장에 독점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세계의 덜 개발된 지역들을 식민지로 분할했다. 경쟁의 압력은 이들 국가들을 서로 존재를 두고 겨루는 대결로 몰아넣었다. 124
그러나 좌파의 일부는 위구르인이나 홍콩 투쟁을 지지하면 미국의 손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 중국 국가를 옹호하는 이들은 중국을 “그저 제국주의 열강의 논리 ‘바깥’에 있다”고 여긴다.125 둘째, 자본주의의 현 문제들은 미국과 중국을 더욱 공격적인 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126 확실히 군사적 충돌이 곧장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전쟁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방법들로는 관세와 제재 따위도 있다. 127
두 가지 경향 모두 중국, 미국, 위구르 사이의 삼각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신장 지역은 유럽의 이전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게는 원자재 공급원이자 제조업을 위한 시장이다.128 브라이언 히우가 말하듯 “미국과 중국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단순히 한 가지 유형의 민족주의나 제국을 다른 유형의 민족주의나 제국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는 진영론”적 입장을 피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129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위구르인들의 대의명분을 끌어다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억압받는 이들을 지지하는 것을 보류하는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했다. “한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민족 해방 투쟁이 특정 조건하에서 다른 ‘강대국’에 의해 그 강대국의 마찬가지 제국주의적인 목표를 위해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민족 자결권 인정을 거부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130 위구르인의 인티파다는 당분간은 억눌려 있는 듯하지만, 서방의 좌파는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위구르인의 투쟁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지지를 보내면서도, 제재와 무역 전쟁 등 미국의 대중국 책략에 대해서는 완전히 반대해야 한다.
인류학자 드루 글래드니는 거의 20년 전에 신장이 “중국의 서안지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주
-
출처: Gilber, Simon 2021, China, the Uyghurs and the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172(posted on 23th October)
↩
- G7, 2021. ↩
- NATO, 2021. ↩
- Choonara, 2021. ↩
- Qiao Collective, 2020; Hioe, 2020. ↩
- Critical China Scholars, 2020. ↩
- Batke, 2019. ↩
- Chin, 2019. ↩
- Victims of Communism Memorial Foundation, 2020. ↩
- Zenz, 2020. ↩
- Redden, 2019. 미국페어팩스대학교의 원래 이름은 버지니아국제대학교Virginia International University였지만 이 추문 이후 이름을 바꿨다. ↩
- 항공 사진은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됐지만, 나중에 그러한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
- Ryan, Cave and Ruser, 2018. ↩
- www.aspi.org.au/about-aspi/funding ↩
- Roberts, 2018. ↩
- BBC, 2018; Human Rights Watch, 2021. ↩
- Roberts, 2020, pp79 and 81. ↩
- New York Times, 2021. ↩
- Qiao Collective, 2020. ↩
- 중국 인구의 압도 다수인 약 92퍼센트는 단일 민족 집단인 한족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19세기 후반부터 근대적 중국 민족주의가 발전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
- Lenin, 1986, p153. ↩
- Harman, 1992에서 인용한 레닌. ↩
- Lattimore, 1950, p115. ↩
- Leibold, 2007, p106. 소련은 1930년대에 실질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기를 그만두었지만, 말로는 계속 지지하는 척했다. ↩
- Benson and Svanberg, 1998, p89. ↩
- Mao, 1956. ↩
- Heberer, 1989, p30. ↩
- Gladney, 1996, p73에서 인용. ↩
- Leibold, 2007, p101. ↩
- Heberer, 1989, pp40-41. ↩
- Bulag, 2019. ↩
- Heberer, 1989, pp25-27; Shakya, 2000, pp315-24; Benson and Svanberg, 1998, p107. 문화혁명 중 찰리 호어가 “티베트 문화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고 부른 것(Hore, 200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샤캬의 책 12장을 참조하라. ↩
- Rippa, 2020. ↩
- Becquelin, 2004, p373. ↩
- Roche and Leibold, 2020, p32. ↩
- Holdstock, 2015, p153. ↩
- Bulag, 2019, p153. ↩
- Sorace, 2020. ↩
- 당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40퍼센트는 천연두로 사망했고, 20퍼센트는 러시아와 카자흐 지역으로 달아났으며, 30퍼센트는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하며, 나머지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Perdue, 2005, p285에서 인용. ↩
- Lattimore, 1962, p168. ↩
- Lattimore, 1950, p206. ↩
- Brophy, 2016, pp30-31 and 35; Millward, 2007, p152. ↩
- Lattimore, 1962, p68. ↩
- Lattimore, 1950, pp121-122. ↩
- XSY, 2019. ↩
- Bovingdon, 2020, p24. ↩
- Millward, 2007, p24. ↩
- Millward, 2007, pp32 and 37. ↩
- Bovingdon, 2020, p33. ↩
- Brophy, 2016, p12. ↩
- Millward, 2007, p93; Benson and Svanberg, 1998, p43. ↩
- Lattimore, 1950, p187; Millward, 2007, pp25, 38. ↩
- Brophy, 2016, pp72-73. ↩
- Millward, 2007, p297. ↩
- www.uyghurcongress.org/en/east-turkestan-2 ↩
- Mackerras, 1968, p11. ↩
- Lattimore, 1950, pp123-124. ↩
- Gladney, 2004, pp213-124. ↩
- www.uyghurcongress.org/en/east-turkestan-2 ↩
- Millward, 2007, pp116-118. ↩
- Millward, 2007, pp117-118. 늘 그렇듯 영국은 일구이언으로 행동했는데, 야쿱 벡을 지원하는 동시에 청나라에는 [신장] 재정복을 위한 차관을 제공했다—Lattimore, 1950, pp32-33. ↩
- Sun, 1925, p2. ↩
- Brophy, 2016, pp178-179. ↩
- Brophy, 2016, p245. ↩
- Millward, 2007, p188. ↩
- Brophy, 2016, p274. ↩
- Rudelson, 1997, pp117 and 168. ↩
- Kinzley, 2018, p37. ↩
- Brophy, 2016, p7. ↩
- Kinzley, 2018, p65. ↩
- Rudelson, 1997, p35. ↩
- Xinjiang Bureau of Statistics에서 나온 수치. ↩
- XPCCSY, 2017, table 3.4; Millward, 2007, p253. ↩
- Becquelin, 2004. ↩
- Rippa, 2020, p175. ↩
- Millward, 2007, p299. ↩
- Xinjiang Bureau of Statistics에서 나온 수치. ↩
- Fischer, 2014; Chaudhuri, 2010. ↩
- Cappelletti, 2020. ↩
- Bovingdon, 2020, p11. ↩
- Hillman, 2020, pp17-18. ↩
- 카슈가르는 1999년에 철도망이 연결됐으며, 2022년에 호탄-루오창 철도가 예정대로 개통되면 타클라마칸 사막의 루프선이 완성될 것이다. ↩
- Millward, 2007, pp295-296. ↩
- 자연 인구 증가율은 위구르인들이 더 높기 때문에, 이것이 한족의 이주가 일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수치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신중하게 다뤄져야 하지만, 사실 세계위구르회의는 중국 정부가 위구르 인구의 규모를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주의 사항은 여러 저술가들이 대부분의 “유동” 임시 인구가 한족일 것이라고 상당히 합리적으로 가정한다는 점이고, 이러한 유동 인구의 수치는 1990년 4만 1718명에서 2010년 179만 1642명으로 증가했다. 더 최근의 수치를 이용할 수는 없지만, 2010년에서 2018년 사이 전국적으로 유동 인구는 9퍼센트만 증가했다. 따라서 신장이 유사한 패턴을 따랐다면 일반적인 추세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Wu ang Song, 2014, p161. ↩
- XSY, 2019, table 3.1. ↩
- XSY, 2019. ↩
- 현지 한족은 신장 “후커우”(거주 허가증)을 소지한 사람들이다. 이주민들은 다른 지방의 후커우를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영 부문에서 취업하기가 더 어렵다. ↩
- Wu and Song, 2014. ↩
- Cliff, 2016, p136. ↩
- Steenberg and Rippa, 2019. ↩
- Steenberg and Rippa, 2019. ↩
- Holdstock, 2015, p147. ↩
- Steenberg and Rippa, 2019. ↩
- Cliff, 2020. ↩
- Roberts, 2020. ↩
- Holdstock, 2015, p153; Hann, 2014, p196. ↩
- Roberts, 2018, p233. ↩
- Roberts, 2020. ↩
- Steenberg and Rippa, 2019. ↩
- Harris, 2014, p294. ↩
- Harris, 2014, pp303-304. ↩
- Roberts, 2020, p167. ↩
- Roberts, 2018, p240. ↩
- Roberts, 2018, pp246 and 249. ↩
- Roberts, 2020, pp177 and 201; Holdstock, 2015, pp230-231. 로버츠가 지적하듯이 이는 “한족 반체제 인사들에게 일반적으로 내려지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이다. ↩
- Harman, 1992, p52. ↩
- Roberts, 2018, p236. ↩
- 스티브 헤스는 이 프로그램이 노동 소요가 증가하는 시기에 분열을 일으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Hess, 2009. ↩
- Bovingdon, 2020, pp168-169; Roberts, 2020, pp146-147. ↩
- Hann, 2014, p189. ↩
- Holdstock, 2015, p101. ↩
- Holdstock, 2015, pp1-3. ↩
- Roberts, 2020, pp173 and 181. ↩
- [윈난성이 위치한] 중국 남서부를 통과하는 이 경로는 당시 망명을 원하는 위구르인들이 일반적으로 이용했다. Roberts, 2020, pp183-184. ↩
- Holdstock, 2015, p231. ↩
- Holdstock, 2015, p217. ↩
- Rippa, 2020, pp198-199. ↩
- Hillman, 2020, p127. ↩
- Xinjiang Bureau of Statistics에서 나온 수치. ↩
- Zenz, 2020. ↩
- Rippa, 2020, p194. ↩
- Marx, 1870. ↩
- Rudelson, 1997, p131에 따르면 이 사실은 위구르인에게 큰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한다. ↩
- Hioe, 2020. ↩
- Bukharin, 2003. ↩
- Hunerven, 2019; Becquelin, 2004, p362. ↩
- Budd, 2021. ↩
- Bukharin, 2003, p54. ↩
- Lenin, 1986, p155. ↩
- Hioe, 2020. ↩
- Gladney,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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