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하먼을 기리며
크리스 하먼, 한 투사의 생애 *
1 우리는 노동당 청년사회주의자들[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존속했던 노동당 산하 청년단체]의 신문 〈영 가드Young Guard〉가 주최하는 집회를 위해 리버풀로 갔다. 국제사회주의자들IS[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이 주도하던 〈영 가드〉 편집권이 다양한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넘어갈 뻔했지만, 우리가 표결에서 승리했다. 까마득한 옛날의 극좌파 간 분파 투쟁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영 가드〉는 노동당 청년 조직에서 실질적 영향력이 있었고, 40명도 채 안 됐던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IS의 전신]은 청년사회주의자들 안에서 활동하며 1964년쯤 2백 명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2백 명이 1960년대 중반의 산업 투쟁 고양과 1968년의 격변을 잘 이용하게 된다.
내가 크리스 하먼을 처음 만난 것은 1963년 봄 피터 세지윅의 다락방에서였다.2 그는 1959년 총선 후 노동당을 불신하는 다양한 좌파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결성한 독립적 좌파 청년 단체의 활동에 참여했다. 3 신좌파와도 접촉했다. 핵무장해제운동CND[1958년에 결성된 반핵 운동 단체]이 주최한 올더마스턴[영국의 핵무기 연구소 소재지] 행진에 참가했다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한 부를 산 하먼은 그렇게 잘 만든 잡지는 분명히 대규모 조직이 발행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니 클리프를 연사로 초대했다. 그때까지 하먼의 사상은 아직 확고하지 않아서, 옛 소련은 국가자본주의이지만 폴란드와 쿠바는 사회주의라고 생각했다.
하먼은 왓퍼드[런던 북쪽에 있는 도시]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다.1961년 가을 하먼은 리즈대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 마이크 헤임과 함께 활동했다. 하먼은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 가입했고, 이듬해 그 그룹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이름을 바꿨다. 리즈에서 지부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산당이 여전히 강력했고 사회주의노동자연맹(SLL: 초좌파적 종파주의자들로, 노동자혁명당WRP의 전신)도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IS 회원들은 〈영 가드〉,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소셜리스트 리뷰〉를 판매했다. 클리프가 1년에 두 번꼴로 리즈에 와서 연설했다.
1964년에 하먼은 박사 학위를 따려고 런던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이하 LSE)에 입학했다. LSE에서 하먼은 중요한 학생 리더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7년 로디지아[오늘날의 짐바브웨]의 인종차별 정권에 협력한 사람이 LSE 학장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한 학생들이 징계 처분을 받자 이에 항의하는 점거가 시작됐다. 그 점거 투쟁에서 하먼은 중요한 구실을 했다. LSE 점거는 영국 학생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4 나중에 그는 광산업의 미래를 다룬 공산당 소책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필자 이름을 “광산 통신원”이라고 썼다. 5 “혹시라도 광원을 만날까 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듬해 하먼은 헝가리 혁명 10주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글을 썼다. 그 다음 달에 나온 〈노동당 노동자〉 신문에는 헝가리 망명자의 편지가 실렸는데, 그는 “당시 사건을 직접 목격한 헝가리인도 [이보다] 더 자세하고 풍부하게 항쟁을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6
그와 동시에, 하먼은 〈소셜리스트 워커〉의 전신인 〈노동당 노동자Labour Worker〉 신문의 편집부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우리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전문화가 불가능했다. 우리는 모두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스스로 해내야 했다. 하먼은 엄청나게 폭넓은 지식과 다양한 관심사를 갖기 시작했다. 1965년 초기 몇 달 동안 하먼은 금속노조에서 벌어진 공산당원 마녀사냥, 소득정책, 유엔 등을 주제로 글을 썼다.7 펼침막이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는 판례를 확립하는 데 하먼이 일조한 것이다.
하먼은 글만 쓴 것이 아니었다. 1966년 7월 경찰이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대를 공격했다. 연행된 사람 중 몇 명은 “공격용 무기”를 소지하고 경찰을 공격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 무기라는 건 펼침막 막대기였다! 몇 명은 구속됐다. 그러나 하먼은 형세를 역전시켰다. “유능한 변호사와 증인들 덕분에 하먼은 벌금형만 받았다. 기존 판례법에 따라 공격용 무기 혐의는 기각됐다.” 1967년 10월 그로브너 광장에서 최초의 대규모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열린 것은 부분적으로 하먼이 베트남연대운동Vietnam Solidarity Campaign의 회의에 개입한 결과였다.9 하먼은 아직 25살에 불과했지만 IS 지도부에 꼭 필요한 일원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1964년부터 죽을 때까지 하먼은 항상 조직의 지도 기구 ― 운영위원회, 집행위원회, 중앙위원회 등 이름은 다양했다 ― 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1968년이 됐다. 1968년은 IS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1968년 LSE에서 하먼의 활약상을 탁월하게 묘사한 글이 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크리스 하먼은 LSE 구관 강당 연단에서 그렇게 말했다. 연설을 시작할 때 항상 그가 하는 말이었다. 실내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하먼은 자신의 모페드[모터 달린 자전거] 헬멧을 흔들면서 연설을 이어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1968년은 1793년, 1830년, 1848년, 1917년, 1936년과 마찬가지로 국제 혁명의 해입니다. 우리는 30여 년 간의 패배와 겨울잠 끝에 국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부활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혁명적사회주의학생연맹Revolutionary Socialist Students Federation을 발족하고자 모인, 너무 일찍 산전수전을 다 겪어 감수성이 무뎌진 학생 좌파 청중들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하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를 비타협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먼이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바르셀로나 항쟁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는 진심이었다. 투사들은 1830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11 요즘은 똑똑한 젊은 언론인들이 1968년을 비웃는 것이 유행이다. 하먼은 자신의 책에서 계급투쟁을 집중적으로 설명했고 인류 해방이라는 중대한 문제들과 사소한 라이프스타일 문제를 구분했다. ‘1968년 5월’은 흔히 거론되는 무지한 주장과 달리 ‘학생 반란’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었다. 그러나 하먼은 문화적 차원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특히 밥 딜런을 좋아했다. 《지난번의 불길》의 장章 제목 두 개가 밥 딜런의 노래 가사다.
2008년 나는 “1968년의 유산”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하먼이 발표할 때 사회자를 맡았다. 둘이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하먼이 [1968] 40주년을 기념하는 이유는 50주년이 되기 전에 우리가 대부분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안타깝게도 그 말은 예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발표를 시작하자 그는 1968년의 정신을 열정적으로 옹호했다. 40년 전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먼이 쓴 《지난번의 불길The Fire Last Time》[국역: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은 그 전설적인 해의 기원과 영향을 기록한 영향력 있는 책이다.1968년의 도취감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새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하먼은 명확성을 추구하다가 가끔 친구들을 잃기도 했다. 1969년 9월 사망한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의 추도식 사건은 유명하다. 한 목격자는 하먼의 추도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의 연설은 특별한 형식이 없었고 뜻밖에도 매우 솔직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먼저 호치민이 세계 혁명 운동에 기여한 바를 지적했다. …
잠시 후 하먼은 호치민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살해하는 데 한몫했다는 말을 꺼냈다. 하먼은 다양한 주제를 자세히 설명했고, IS의 관점에서 보면 비록 IS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베트남인들의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이를 위해 영국에서 많은 실천 활동도 했지만, 호치민과 그가 이끄는 정권이 북베트남이나 베트남 전체의 대안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공화국을 수립해서 현 체제를 제거해야 한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는 청중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한 채 지나갔다. … 그런데 하먼이 연설을 끝마치자 55~60세쯤 돼 보이는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단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제 막 사망한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를 완전히 중상모략하는 발언이 계속되는데도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다니 정말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IS 회원들이 아닌 청중의 60퍼센트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하먼은 자신의 연설에 대한 청중의 반응을 보고 약간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듯했다. 타리크 알리는 매우 불쾌한 듯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도한 집회가 자기 눈앞에서 엉망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장 뒤편에서 어떤 마오쩌둥주의자가 크리스 하먼을 보고 “미국의 스파이!” 하고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하먼은 더 기뻐하는 듯했다. 이제 청중석은 약간 후끈해졌다.
하먼은 학업을 완전히 마치지 못했다. 1968~69년에 그는 엔필드 공과대학(미들섹스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의 사회과학 강사로 채용됐다. 그러나 계약이 갱신되지 않았다. 최근 하먼은 나에게 말하기를, 당시 자신을 해고한 학과장이었던 에릭 로빈슨과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로빈슨이 《민중의 세계사A People’s History of the World》[국역: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를 읽고 나서 전에 하먼을 해고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길래 하먼은 자신을 학계에서 해방시켜 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하먼은 전문 학계의 특징인 분업을 참지 못했다. 하먼은 경제학자였는가, 사회학자였는가, 역사학자였는가, 정치학자였는가, 철학자였는가? 그의 탐구 주제는 정말 다양했다. 그러나 역사학자에게 뭔가를 물어 보면 “내 전공 시대가 아니라서”라는 대답을 듣기 십상이다. 《민중의 세계사》 지은이에게는 그런 전문적 경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13 하먼이 1968년에 존 M 캐밋의 책 《안토니오 그람시와 이탈리아 공산주의의 기원》에 대한 서평을 썼을 때(IS1: 32) 영국에서는 그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껏해야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뉴레프트리뷰》 편집팀의 신뢰성 떨어지는 그람시 해석밖에 없었다. 하먼은 그람시의 중요성을 지적한 최초의 영국 저술가들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하먼은 유러코뮤니스트들이 그람시를 곡해하는 데 맞서 그람시 저작의 혁명적 내용을 격렬하게 옹호하면서 유러코뮤니스트들이 계급 정치를 포기했다고 지적했다(IS1: 98/99).
하먼은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었다.SW 26/4/1969). 저술가 존 버거가 당시 하먼의 모습을 묘사한 글은 기억할 만하다.
1968년에는 세계 전역에서 새로운 투쟁 물결이 일었고 새로운 국제주의가 탄생했다. 그때 하먼은 죽을 때까지 지속한 활동 하나를 시작했다. 그것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토론하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었다. 1969년 부활절에 하먼은 당시 여전히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대학교 학생들이 사회주의와 혁명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다(런던에서 온 정치 활동가가 노동조합 통제 법률에 저항하는 영국 공장의 일상적 투쟁을 소개하고 자기 단체의 장기적 목표는 소비에트 구실을 할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배운 교훈의 일부는 체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의 연설은 가장 길고 가장 열정적이었으며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다. 연설이 끝나자 한 체코 학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방금 말한 온갖 이야기에 대해 여기 있는 우리 대다수가 뭐라고 대꾸할지 아십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읽어 봤는지 당신에게 묻고 싶군요.” 온 힘을 다해 장시간 연설을 한 그 활동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아니오”라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악령》을 읽었지만, 자칫 이상한 미로에 빠질까 봐 경계하는 듯했다.
1970년 9월 하먼은 요르단에 있었다. 당시 요르단 정부는 팔레스타인 단체들을 공격해서 요르단 밖으로 쫓아내기 시작했다. 〈소셜리스트 워커〉는 “크리스 하먼이 방금 암만에서 돌아왔다”는 제목의 1면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난민들이 근근이 살아가던 골함석 지붕 오두막, 천막, 대충 만든 콘크리트 주택단지에 포탄이 떨어져 집들이 박살났다. 저격수 한 명을 ‘색출’하려고 아파트 전체를 폭파했다.”(1970년 9월 26일치) 그때쯤 하먼은 당의 상근 활동가가 됐고, 그 후 죽을 때까지 상근 활동가였다. 하먼의 주된 활동은 간행물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는 일상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LSE 시절부터 하먼의 오랜 동지였던 조지 페이지스는 1970년 IS에 가입해서 금세 런던 북부지구 간사가 됐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먼은 나를 많이 도와 줬다. 그는 날마다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를 걸면 언제든지 전화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내 질문과 제안을 찬찬히 듣고 나서 자기 생각을 말했다.”
IS1: 35)은 1968년에 조직 내에서 벌어진 민주집중제 논쟁에 기여한 중요한 글이었다. 이 글은 그 후 빈번하게 다시 발행됐다. 16 파시즘과 공동전선을 다룬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모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특집호(IS1: 38/39)는 IS가 1970년대에 발전시킨 반파시즘 활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짐 히긴스가 쓴 논문 세 편은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의 혁명적 전술의 토대를 놓았다(IS1: 45/46/47). 하먼은 또, 사회주의적 문화를 더 폭넓게 발전시키는 데서 잡지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지 오웰을 다룬 피터 세지윅의 탁월한 글을 잡지에 실었다(IS1: 37). 나는 하먼과 몇 번 몸소 논쟁한 적이 있는데, 하먼이 사르트르는 스탈린주의를 옹호했다면서 내가 사르트르에게 너무 열광하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 역설적이지만, 하먼은 나에게 사르트르를 옹호하는 글을 쓰라고 적극 권유했다(IS1: 45/46). 그러면서, 다른 많은 동지들에게도 그랬겠지만, 내가 저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68년 말에 하먼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편집자가 됐다. 마이크 키드런과 나이절 해리스가 편집자였던 시기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은 세계에 대한 IS의 분석을 발전시키는 데서 필수적 구실을 했다. 그런데 1968년에 IS는 회원이 급증하고 그 후 산업 투쟁 지원으로 전환했으므로 《인터내셔널 소셜리즘》도 더 직접적으로 당 건설을 지향해야 했다. 하먼의 논문 “당과 계급”(IS1: 69). 안드레아스 날리아티의 글 “현장조합원 운동을 향하여”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IS 방침의 토대가 됐는데, 나는 이 글의 상당 부분도 하먼이 썼다고 생각한다(IS1: 66).
하먼은 1971년 말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를 그만뒀지만 1973년 9월에 다시 복귀했다. 이제 월간지로 바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은 조직을 이끌고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야 했다. 당시는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고, 전후 장기 호황이 끝나고, 영국에서 산업 투쟁의 격화 끝에 히스 정부가 몰락하는 등 격변의 시기였다. 하먼은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글 말고도 많은 글을 썼다. 내 이름으로 실린 “포르투갈의 4월의 꿈”은 하먼이 몇 페이지를 더 추가해서 다시 쓰다시피 한 글이었다(IS1: 63)
하먼은 또, 〈소셜리스트 워커〉에도 글을 썼는데, 당시 〈소셜리스트 워커〉의 편집자는 로저 프로츠였다. 프로츠는 1968년 창간된 그 주간지를 약간 꾀죄죄한 4면짜리 신문에서 멋진 디자인의 16면짜리 신문으로 발전시켰다. 1970~74년의 히스 정부 시절 영국에서는 192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계급투쟁이 분출했다. 1972년 솔틀리 게이츠 피케팅 때는 수많은 금속 노동자들이 광원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몇 달 뒤 총파업 위협 덕분에, 히스 정부의 노조 통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항운 노동자 다섯 명이 풀려났다. 1974년 두 번째 광원 파업으로 히스 정부는 결국 무너졌다. 당시 공산당이 산업 투쟁에서 한 구실을 분석한 글에서 하먼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점점 더 많은 투쟁에서 공산당은 당으로서 이렇다 할 지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 IS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의 단기적 목표는 공산당을 대신해서 산업 현장 투사들의 주요 지도 구심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IS1: 83). 그와 클리프는 모두 개혁주의를 과소평가했지만, 마리우 소아레스가 이끄는 개혁주의 정당인 사회당이 체제를 구했다.
바로 그때 포르투갈에서 독재 정권이 전복되고 대규모 노동자 투쟁 물결이 일었다. 하먼은 이 투쟁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반응하면서, 포르투갈이 혁명 직전의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흔히 그는 우리가 지원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도록 동지들을 들볶는 듯했다. 그 후 18개월 간의 혼란기는 하먼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그는 포르투갈을 여러 번 방문해서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포르투갈의 혁명적 좌파 단체 회원들과 토론했다. 그러나 하먼은 클리프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의 앞날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냐 아니면 극우파의 복귀냐 하는 선택만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1975년 가을 하먼은 “포르투갈의 최근 국면”이라는 글에서 “계급들 간의 첨예한 무장 충돌을 (기껏해야) 몇 달 이상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없다”고 썼다(1970년대는 IS와 SWP 내에도 폭풍우가 몰아친 시대다. 1974년 클리프는 〈소셜리스트 워커〉에 몇 가지 변화를 요구했다. 그래서 로저 프로츠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폴 풋이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가 됐다가 1975년에 다시 하먼으로 바뀌었다. 신문은 새로운 도전 과제들에 직면했다. 노동당이 내놓은 ‘사회 협약’에 노조 관료들이 찬성했고, 파업의 양상이 중대한 국가적 파업들에서 소규모 투쟁들 ― 아시아계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싸운 그런윅[필름 현상·인화 업체] 투쟁 같은 ― 로 바뀌었고, 실업이 증가해서 ‘노동권 운동’이 시작됐고,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극우파의 위협이 나타난 것 등이 그렇다. 하먼은 〈소셜리스트 워커〉를 노동자들을 위해 쓰인 신문이 아니라 실제로 노동자들이 쓴 신문으로 발전시키려는 클리프의 정책을 지지했다. 〈소셜리스트 워커〉를 둘러싼 논쟁은 더 일반적인 당내 논쟁으로 이어져, 1975년 말에 로저 프로츠뿐 아니라 짐 히긴스와 존 팔머 같은 1960년대 이래의 선임 지도자들과 몇몇 노조 활동가들, 특히 버밍엄의 노조 활동가들이 당을 떠났다. 하먼은 이 논쟁 기간 내내 클리프를 지지했다.
18 그리고 클리프 자신이 〈소셜리스트 워커〉의 편집자가 됐다.
그래서 하먼 자신이 클리프와 충돌하게 됐을 때 하먼은 틀림없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1978년 초에 하먼은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났고 신문은 “재출발”했다. 클리프는 이를 지지했다. 그 결과는 이른바 “펑크 신문” 이었다.[신문 편집 방침이 급진적인 청년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특별히 중시하고 그에 부응코자 했다는 뜻이다 — 옮긴이] 그 목표, 즉 급성장하는 반나치동맹ANL 주위의 새 청중과 관계를 맺겠다는 목표는 칭찬할 만했다. 그러나 그 수단, 즉 스포츠와 음악, 심지어 TV 연속극을 더 많이 다루고 산업 투쟁 ― 이제는 확실히 가라앉은 ― 은 더 적게 다루는, 정치가 희석된 신문이 효과가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그해 여름에 열린 SWP 당대회에서는 신문의 새 방향이 표결 끝에 부결됐다. 주된 책임자였던 기자 네 명 ― 폴 풋, 짐 니콜, 로리 플린, 피트 마스든 ― 이 사퇴했다. 다시 하먼이 편집자가 됐지만, 며칠이 채 안 돼 클리프가 책략을 부려서 하먼은 다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하먼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제 하먼은 매주 두 번씩 클리프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도 자신이 보기에 조직 건설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하먼은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하먼은 자기 조직 안에서 사실상 고립됐다. 그는 아직 40세도 채 안 됐고 그동안 쓴 글이나 책도 많았다. 하먼은 쉽게 학계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랬다면 지난 30년 동안 그의 삶은 훨씬 더 편안하고 윤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먼은 그런 가능성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과 사회주의 원칙에 완전히 헌신했다.
IS2: 4). 유럽 여러 나라 혁명가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분석한 이 논문은 클리프가 침체기에 발전시키고 있던 생각을 보완하는 중요한 글이었고, 당이 상황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하먼은 1970년대 초를 “돌이켜보건대 [당시] 혁명적 좌파의 기대는 터무니없던 듯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침체기에 혁명적 좌파의 의무는 작업장 밖에서 발전하는 피착취·피억압 집단들의 모든 운동과 관계 맺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혁명적 변화의 주체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과 … 노동계급 운동과의 연계는 단지 미사여구가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1979년 초에 하먼은 “유럽 혁명적 좌파의 위기”라는 탁월한 글을 썼다(1979년 말에 하먼은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자가 됐다. 그는 이를 두고 “위로상”을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소셜리스트 리뷰〉도 ANL 주위 집단들과 관계 맺기 위해 그 전 해에 발행되기 시작했다. 〈소셜리스트 리뷰〉의 초기 몇 호에 실린 기사들은 생생하기는 했지만 약간 혼란스러웠다. 당시 대처 정권이 등장하면서 혁명가들의 삶이 훨씬 더 힘들어지고 있었으므로 하먼은 〈소셜리스트 리뷰〉를 당의 중요한 교육 도구로 변모시켰다.
20 1960년대 초 이후 하먼의 지적 활동의 핵심에는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 연구 성과가 있었지만, 21 하먼이 그저 클리프의 결론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먼은 클리프의 연구 성과를 보완하는 중요한 저작들을 썼다.
이 시기 내내 하먼은 신문·잡지용 글을 쏟아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여하는 훨씬 더 중요한 글도 몇 편 썼다.IS1: 30)라는 글은 나중에 소책자로 여러 번 재발행됐다. 클리프는 소련을 다룬 자신의 책에서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구조를 설명했다. 그 체제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다른 국가자본주의 이론가들[라야 두나예프스카야, 다양한 좌익공산주의자들 등 — 옮긴이]과 달리 클리프는 항상 볼셰비즘을 옹호했고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에서 비롯했다는 주장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하먼의 철저하고 면밀한 주장과 설명은 어떻게 해서 혁명이 패배했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러시아 혁명 50주년인 1967년에 하먼이 쓴 “어떻게 해서 [러시아] 혁명은 패배했는가”(22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1952년에 클리프가 쓴 책 《스탈린의 동유럽 위성국들Stalin’s Satellites in Europe》의 후속편이었다. 클리프는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었다. 하먼의 설명은 [그 국가들의] 내부 모순이 훨씬 더 뚜렷해졌음을 보여 주었다. 클리프는 스탈린 체제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들, 즉 노동계급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하먼은 1953년 동독에서, 1956년 헝가리에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반격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설명했다. 《동유럽의 관료와 혁명》의 개정판인 《동유럽 계급투쟁Class Struggle in Eastern Europe》[국역: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갈무리]에는 1980년 폴란드에서 솔리다르노시치가 등장한 이야기가 추가됐다. 23 하먼이 동유럽을 다룬 저작의 에필로그는 1990년에 발표한 ‘폭풍이 인다The Storm Breaks’[국역: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책갈피]였다(IS2: 46). 이 글에서 하먼은 “공산주의”의 붕괴는 “진보도 퇴보도 아닌 옆 걸음질”이라고 주장했다.
1974년에 하먼의 첫 책 《동유럽의 관료와 혁명Bureaucracy and Revolution in Eastern Europe》이 나왔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가 필연적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흔히 IS 회원들은 혁명이 패배한 이유는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약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1918~23년에 독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다. 1982년에 나온 하먼의 책 《패배한 혁명The Lost Revolution》[국역: 《패배한 혁명》, 풀무질]은 당시 상황을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하먼은 (2004년에야 영어로 번역된) 피에르 브루에의 기념비적인 저작과독일 혁명은 초좌파주의, 공동전선, ‘노동자 정부’ 요구 같은 전략·전술 문제를 많이 제기했다. 혁명 조직의 실천 경험이 전혀 없는 학자가 《패배한 혁명》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예컨대, 독일 공산당이 창립 첫 해에 겪은 위기를 하먼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자. 많은 공산당원이 매우 초좌파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선거에 참여하거나 노조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했다. 그런 태도는 공산당에 심각한 문제였다. 당이 노동계급에 관여하거나 노동자들을 많이 가입시킬 능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공산당 지도부는 대결을 밀어붙였고[당대회를 소집해서 노조 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의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당원 자격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당원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하먼은 다음과 같이 썼다.
차라리 당 지도부가 당대회에서 자신의 정책들을 통과시킨 다음에 가장 비타협적인 반대파 인사들을 한 지역씩 차례로 공격해서 제거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특히 그 후 몇 달 동안 서로 다른 형태의 조급성 때문에 다양한 반대파들이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하먼은 분명히 LSE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과 1968년의 여파로 혁명적 학생들이 IS에 대거 가입한 것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을 것이다.
1982년 봄 하먼은 다시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가 됐고, 그 후 22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당시는 우울한 시기였다. 대처는 계속 공격했고 이에 저항하는 수준은 낮았다. SWP는 현장조합원 조직을 해소하고 ‘노동권 운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노동당 좌파를 결집시키려는 토니 벤의 노력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을 이용해서 민족주의의 불을 지피고 있었다(나중에 하먼은 그 때문에 신문의 방향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 또, 조직상의 문제도 있었다. 처음에 하먼은 일주일에 60~80시간을 편집부 일에 매달렸다.
그 후 20년 동안 하먼은 신문을 이끌고 오랜 침체기 ― 가끔은 투쟁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기도 하는 ― 를 헤쳐나오면서, 기회를 놓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시 그는 지도부의 핵심 인물이 됐다. 그와 클리프의 불화는 해소됐다. 하먼은 전국의 여러 모임에서 빈번하게 연설했다. 비록 클리프나 폴 풋 같은 대단한 웅변가는 아니었지만 하먼의 연설은 명쾌했고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광원 파업이 지속된 12개월 내내 〈소셜리스트 워커〉의 핵심 쟁점은 광원 파업이었다. 1984년 3월 10일부터 1985년 3월 9일까지 〈소셜리스트 워커〉는 딱 한 호만 빼고 모든 호의 1면에서 광원 파업을 다뤘다. 파업 초기 몇 달 동안 신문은 파업이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파업이 점차 장기 소모전으로 바뀌자 다른 방어 투쟁들과 연대 건설 필요성에 더 집중했다. 심지어 파업 마지막 주에도 “계속 투쟁하자”를 헤드라인으로 내걸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파업을 지속하는 것만이 노조를 온전히 유지하고 … 향후 [저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 채 협상을 타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1985년 3월 2일치) 〈소셜리스트 워커〉는 전투적인 광원들의 중핵이 스스로 현실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28 이론과 실천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했다.
하먼은 저널리스트였을 뿐 아니라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신문을 이끌고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오는 데 도움이 됐다. 1990년 주민세 소요 사태 후에 언론은 폭력 행위가 “아나키스트들”의 소행이라며 악랄한 마녀사냥을 벌였다. 〈소셜리스트 워커〉는 이에 맞서 “그들이 반격한 것은 당연하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그리고 소요 사태는 실업, 학생 빈곤, 경찰의 가혹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어떤 사회주의자도 소요를 일으키면 주민세가 폐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회주의자도 지난주 토요일 [런던] 웨스트엔드의 번화가를 가득 채운 분노의 함성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하먼은 자신이 1921년 독일의 3월 행동에 관해 썼던 글을 떠올렸을 것이다.1992년 가을 보수당이 탄광 폐쇄 계획을 발표하자 〈소셜리스트 워커〉(1992년 10월 24일치)는 “당장 총파업을!”이라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이것은 하먼이 열 받아서 쓴 헤드라인이 아니라 전국에 신문 지지자들과 조직자들의 네트워크가 있어서 노동계급 운동 내의 분노에 반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이후 우리가 공유했던 혁명적 희망은 사라졌지만 하먼은 신문을 계속 조직자·교육자로 이용해, 새로운 간부들이 장차 언제든지 기회가 찾아오면 그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하먼은 기자들을 육성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하먼이 죽은 후 답지한 많은 추도사 중에는 그와 함께 일했던 기자들이 쓴 조사가 있다. 케븐 오븐든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헤이즐 크로프트는 하먼이 “편집 회의 때, 신문은 노동계급 독자들의 고통과 근심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서 기자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1978년 논쟁 때 하먼과 폴 풋은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하먼은 개인적 유감 때문에 정치적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1984년 하먼은 폴 풋이 매주 〈소셜리스트 워커〉에 칼럼을 연재하도록 설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칼럼을 써 주면 우리도 좋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칼럼 기고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하먼은 미묘한 차이가 있는 정치적 견해나 어려운 개념을 쉽고 생생한 몇 마디 말로 명료하게 표현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재주가 있었다. … 심지어 간단한 헤드라인으로도 복잡한 현실을 정확히 포착하고 현실을 꿰뚫기 위해 그가 쏟은 노력 ― 그리고 신문에 글을 쓰는 우리도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든 노력 ― 은 우리 전통을 대중에게 널리 전달하는 과제를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IS2: 64). 하먼은 마르크스주의적 종교 분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알제리·이란·수단 등 광범한 사례들을 통해 이슬람주의가 출현하게 된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설명했다. 또, 토니 클리프의 빗나간 연속혁명 이론을 창조적으로 적용하기도 했다. 이슬람주의의 모순된 성격을 강조하면서 하먼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1994년 하먼은 급진 이슬람주의를 다룬 중요한 논문 “예언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썼다(하먼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가 “[이슬람주의를 ― 버철] 지지하는 일부 청년들이 사뭇 다른 독립적·혁명적 사회주의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좌파는 과거에 이슬람주의자들과 관련해서 두 가지 과오를 범했다. 첫째는 이슬람주의자들을 파시스트로 여겨서 그들과 우리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는 그들을 “진보 세력”으로 여겨서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32 그 책에는 다양한 시대와 주제에 대한 방대한 정보도 있지만,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을 인류 역사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하먼은 평생 독서로 얻은 광범한 지식을 활용했지만, 만족스런 설명을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으로 이런저런 공백을 메워야 했다. 신문 편집과 일반적인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하먼은 일주일에 몇 번씩 국립도서관에 갔다. 한번은 국립도서관에서 나와 함께 황급히 점심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하루에 책을 네 권이나 읽은 적도 있다고 했다.
하먼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1999년에 출판된 대작 《민중의 세계사》였다.사소한 부분에도 신경을 쓴 《민중의 세계사》는 귀중한 교육 자료라고 할 만하다. 특히, 당장 다음 번 신문 판매 걱정 같은 단기적 전망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혁명적 활동가들이 기나긴 인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해 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목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세계사》는 20세기 말에 많이 확산된 “아래로부터의 역사학”이 아니다. 물론 하먼은 다음과 같은 브레히트의 시로 책을 시작한다.
누가 일곱 개의 성문이 있는 테베를 세웠는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이 나오네.
왕들이 바위 덩어리를 끌어 날랐는가?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먼은 위로부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 즉 우리 지배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지배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시했다. 그래야 우리가 지배자들을 타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나 역사 전문가들은 《민중의 세계사》의 특정 시대나 나라 설명에서 이런저런 오류를 찾아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야심적인 대작을 쓰는 일에 감히 뛰어들 학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IS2: 88).
새로운 세기에는 시애틀 시위 이후의 반자본주의 운동이나 그 후의 반전 운동과 함께 새로운 기회들이 엄청나게 많이 찾아왔다. 하먼은 “반자본주의 — 이론과 실천Anti-Capitalism: Theory and Practice”[국역: “반자본주의 — 이론과 실천”, 《저항의 세계화》, 북막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이 처음으로 세계적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아무도 명령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상에 관한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논쟁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 … 새로운 운동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 ― 그리고 새로운 운동이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데 일조하는 것 ― 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IS2: 117)[이 글의 번역문 ‘영국 리스펙트의 분당 사태’는 다함께 웹사이트(http://www.alltogether.or.kr)의 문서자료실에 있다].
2004년 하먼은 〈소셜리스트 워커〉를 그만두고, 다시 35년 전에 그가 처음으로 편집했던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편집자가 됐다. 새로운 시대에도 문제들은 제기됐는데, 특히 리스펙트가 붕괴해 SWP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이 과정을 분석하면서 하먼은 “리스펙트의 위기The Crisis in Respect”를 썼다(2005년에 조지 갤러웨이가 미국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서 맹활약을 펼친 직후 런던의 프렌즈 미팅 하우스를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러 연단에 오르자 아주 당연하게도 청중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갤러웨이는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도중에 쿠바산 시가를 피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저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는 피델 카스트로의 수출 무역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실내를 죽 훑어봤더니 하먼도 두 손을 포갠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것은 원칙 있는 제스처였는가 아니면 우리의 청년기였던 1960년대의 종파적 습관으로 되돌아간 것인가?
혁명가들은 이중의 의무가 있다. 투쟁 속에서 단결을 최대한 고무하는 것과 상황을 최대한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먼이 이 둘 사이에서 언제나 올바르게 균형을 취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먼은 새로운 이니셔티브 앞에서 항상 뒤로 물러서서 실패를 예견하기만 하는 ― 이것은 가장 쉬운 선택이다 ― 사람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하먼은 죽는 그 날까지 여전히 SWP 지도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먼의 문화적 관심사는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그런 관심사를 글로써 발전시킬 수 없게 됐다는 것이 그의 뜻밖의 죽음을 슬퍼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존 로즈가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하먼은 1848년 프랑스 혁명을 묘사한 플로베르의 소설 《감정 교육》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소셜리스트 워커〉 2009년 11월 10일치). 하먼이 그 소설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평론을 썼다면 정말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33 와 연관지어 발언한 것이 생각난다. 하먼이 기피한 것은 스포츠뿐이었다. 지난해 데이브 렌턴의 책 《C L R 제임스 — 크리켓의 철인왕哲人王》 출판 기념회에서 하먼은, 크리켓을 다룬 제임스의 저작은 노동당 국회의원이 아스널 팬이라고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해서 동지들을 질색하게 만들었다.
하먼은 또, 대중 문화에 대한 지식도 놀라우리만큼 광범했다. 발터 벤야민을 주제로 토론을 하다가 하먼이 허니콤즈Honeycombs34 을 예로 들면서 나는 하먼에게 사회주의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내 단순한 공식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것은 당신이 말한 행복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달렸겠죠” 하고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서 우리는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지 못했고 이제 나는 하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됐다. 내가 진짜로 아는 사실은, 더 공정하고 더 행복한 세계를 위한 투쟁에 자신의 삶과 뛰어난 지성을 바친 사람 가운데 하먼과 견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먼과 마지막으로 토론한 것은 그가 죽기 꼭 닷새 전, 레닌을 주제로 한 SWP 하루 학교의 점심 시간 때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목표는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생산양식의 변화”라는 알튀세르의 주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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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an Birchall, Chris Harman: a life in the struggle, International Socialism 125 (Winter 2010).
↩
- 이 글이 각주에 압도되는 사태를 막고자 본문 중에 출처를 명기했다. SW는 〈소셜리스트 워커〉를 가리키고, IS1과 IS2는 각각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시리즈 1과 시리즈 2를 가리킨다.[IS 시리즈 1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발행됐고, 시리즈 2는 1978년부터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다 — 옮긴이] 하먼 저작집 ― 앞으로 더 확대될 ― 은 “마르크스주의자 인터넷 아카이브” 사이트(www.marxists.org/archive/harman/index.ht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이 사이트에 올라 있지 않은 다른 글들은 하먼의 개인 블로그(http://chrisharman.blogspot.com)에서 볼 수 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웹사이트(www.isj.org.uk)와 〈소셜리스트 리뷰〉의 웹사이트(www.socialistreviewindex.org.uk)에도 하먼의 글들이 실려 있다. 대다수 독자들은 십중팔구 나보다 인터넷 이용에 더 능숙할 것이므로 이 사이트들에서 하먼의 글을 검색하는 문제는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
- 이런 설명의 일부는 2009년 4월 내가 두 시간 동안 하먼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 Charlton, 2009에 묘사된 뉴캐슬의 비슷한 그룹과 느슨하게 연결돼 있었다. ↩
- Labour Worker, Mid-January 1965, 1 April 1965, Mid-April 1965. ↩
- Labour Worker, September 1965. ↩
- Labour Worker, November, December 1966. ↩
- Labour Worker, 5 August 1966. ↩
- Harman, 1988, p149. ↩
- See my article “Seizing the Time: Tony Cliff and 1968” (IS2: 118). ↩
- Widgery, 1976, p341. 위저리는 자신을 포함해서 동시대 개인들의 일기를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진술이 위저리 자신의 말인지 그의 친구들 말인지는 분명치 않다. ↩
- Harman, 1988. ↩
- Widgery, 1976, p414. 이 설명도 위저리의 말인지 그의 친구들 말인지 분명치 않다. ↩
- 그람시는 전통적 지식인 ― 계급투쟁에서 자유롭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학자들 ― 과 계급투쟁에서 어느 한 쪽을 대변해서 직접 행동하는 “유기적” 지식인을 구별했다 ↩
- Berger, 1972, p241. 하먼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버거가 하먼을 묘사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 2008년 10월 조지 페이지스와 한 인터뷰. ↩
- 사람들이 하먼을 때로는 클리프의 제자로만 여기기 때문에 이 글[“당과 계급”]에는 레닌과 룩셈부르크에 대한 클리프의 견해를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하먼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클리프의 주장, 즉 “선진 공업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레닌의 원래 견해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견해가 훨씬 더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클리프는 하먼의 글이 발표된 직후에 출판한 《로자 룩셈부르크》 개정판에서 위의 공식을 수정했다(바뀐 문장은 Cliff 2001, p113을 보시오). 영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
- 짐 히긴스의 책에서 하먼은 전형적인 클리프 추종자로 묘사된다. 하먼은 “클리프가 묘안을 짜 내면 이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Higgins, 1997, p116 참조. 히긴스는 자신보다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약간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하먼보다 겨우 12살 많았지만 흔히 하먼을 “그 녀석”(the boy)이라고 불렀다. ↩
- 사건 당사자 중 한 명의 자세한 설명은 Steve Jefferys, “The politics behind the row on the paper”, in the Steve Jefferys Archive, Modern Records Centre, University of Warwick, MSS.244/2/1/2을 보시오. ↩
- 2009년 4월 하먼과 한 인터뷰. 하먼이 나름대로 이 분쟁을 설명한 것으로는 그의 논문 “혁명적 신문”을 보시오(IS2: 24). ↩
- 나는 하먼의 엄청나게 많은 저작 중 극히 일부만을 소개했다. 독자들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이나 소책자를 내가 빠뜨렸다고 분개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먼의 저작을 모두 포괄하려면 이 글의 분량이 네 배나 길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 글은 비평이 아니라 전기가 되고 말 것이다. ↩
-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하먼이 중요하게 기여한 바는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25호 — 옮긴이]에 실린 조셉 추나라의 글에서 다루고 있다. ↩
- Harman, 1974. ↩
- Harman, 1983. ↩
- Broué, 2004. ↩
- 하먼의 외국어 독해 실력은 대단했다. 회화 실력은 그보다 못했다. 하먼은 알튀세르의 저작을 원어[프랑스어]로 읽었지만, 나와 함께 프랑스에 갔을 때 나는 하먼을 대신해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봐야 했다. ↩
- Harman, 1982, p153. ↩
- 이 일화에 대한 브루에의 설명은 독일 공산당 지도부의 책략에 훨씬 더 우호적이다. Broué, 2004, pp317-321을 보시오. ↩
- Harman, 1982, pp192-220. ↩
- http://tinyurl.com/yazcyc6을 보시오. ↩
- Foot, 1990, p xv. ↩
- 언론인 닉 코언은 하먼의 원래 의도와 정반대 의미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이 문장에 “몰래”라는 말을 덧붙이는 매우 수치스런 짓을 저질렀다. Cohen 2007을 보시오. ↩
- Harman, 1999. ↩
- 여성 드러머가 있는 밴드로는 처음으로 영국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한(1964년 8월) 록 그룹. ↩
- Sartre, Gavi and Victor, 1974, p197.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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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ué, Pierre, 2004, The German Revolution, 1917-1923 (Brill).
Charlton, John, 2009, Don’t You Hear the H-bombs Thunder? (North East Labour History/Merlin).
Cliff, Tony, 2001, Selected Writings: Volume One (Bookmarks), www.marxists.org/archive/cliff/works/1959/rosalux/note.htm
Cohen, Nick, 2007, What’s Left?: How Liberals Lost Their Way (Fourth E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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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tre, Jean-Paul, Philippe Gavi and Pierre Victor, 1974, On a Raison de se Révolter (Gallimard).
Widgery, David, 1976, The Left in Britain 1956-1968 (Pengu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