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주의 재평가하기 *
우리가 논의 중인 사상을 모두 살펴보고 그 뿌리를 밝혀 보겠다. 그 사상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기존 트로츠키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시점에서 출발해 보자.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점, 바로 소련 문제 때문에 갈라져 나왔다. 그것이 당대의 핵심 쟁점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트로츠키에게서 무엇을 받아들였는가? 첫째,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하는 행위자라는 점이다. 즉, 노동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다. 모든 사회 변화의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변화에서 노동계급이 능동적으로 어떤 구실을 수행하는지다. …
둘째, 관료의 부상에 대한 반대다. 셋째, 일국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이 모든 노동자 국가, 그 당시에는 러시아 노동자 국가의 발전을 뒤틀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혁명이 본질적으로 국제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트로츠키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트로츠키에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트로츠키의 결점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무엇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보기에 트로츠키가 틀린 점은 이렇다.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할 행위자라는 말이 진실이라면, 소유 형태를 기준 삼아 한 국가가 노동자 국가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는 것이다. … 노동계급이 능동적 행위자인지가 중요한 지점은 생산관계, 즉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느냐다. 즉, 철도 같은 국영 기업이든 ICI 같은 민간 기업이든 노동자들이 그것과 맺는 관계는 소유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 트로츠키는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적용하는 데서 충분히 일관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계획[경제] 여부는 국가의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문제는 누가 계획의 대상이 되고 누가 계획을 수립하느냐다. … 핵심은 단순명료하다. 우리는 노동자 통제 여부가 노동자 국가를 판별하는 데서 결정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 그러므로 노동자 국가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국가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 통제라는 요소를 제거하면, 노동자 국가의 정수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직면했던 이론적 문제이자, 여전히 직면해 있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현상, 산업화하고 있는 새로운 후진국을 대할 때, 우리는 동일한 기준과 동일한 일반적 접근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나의] 은크루마에게나 중국에서 벌어진 일은 놀랄 일이 아니다.
(토니 클리프, ‘혁명적 전통’에 관한 연설 중, 1967년)
트로츠키 사후 37년이 지난 지금, 트로츠키주의는 아주 다양한 것들을 뜻하는 말이 됐다. 차이가 크고 종종 서로 적대적인 단체들이 트로츠키주의자임을 자처하는데, 이들이 얼마나 정설적인지를 기준으로 판별하는 것은 그다지 소득 없는 일이다. 다양한 트로츠키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더구나 조직을 꽤 오래 유지한 단체 중 일부는 막대한, 그리고 때로 거듭되는 변화를 겪어 왔다. 예컨대, 오늘날 만델 경향은 10년 전에 견줘 정치가 상당히 다른데, 10년 전에도 이들은 그보다 10년 전에 견줘 뚜렷이 달랐다.
이 글의 주된 초점은, 트로츠키가 세 번째 망명기(1929~1940년)에 발전시킨 혁명적 이론과 실천의 총체인 트로츠키주의다. 내 주장은 이렇다. 첫째, 트로츠키는 진정한 공산주의 전통인 코민테른 초기 전통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보존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 방식이란, 살아 숨쉬는 현실 속에서 전통을 발전시키고 체현하는 것이다. 둘째, 당대의 극도로 불리한 상황 때문에 트로츠키의 이런 노력은 당시 상황 전개의 큰 줄기를 바꾸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트로츠키주의 조직들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그 전통 자체의 성격이 왜곡·변질됐다. 셋째, 트로츠키 또한 이를 알고 일부 변질들에 맞서 맹렬히 투쟁했지만, 몇몇 변질에는 트로츠키 자신도 일조했다.
“전통”이라 함은 레닌 시기에 코민테른이 발전시킨 원칙·전략·전술을 말한다. 트로츠키는 그런 발전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1932년에 트로츠키는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국제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 첫 네 대회의 기반 위에 서 있다. 이는 코민테른의 결정 사항을 자구 그대로 따른다는 뜻이 아니다. 코민테른의 많은 결정은 순전히 국면적 성격이 있었고 이후의 사건들로 반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핵심적 원칙들(제국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태도, 민주주의·개혁주의에 대한 입장; 무장 봉기 문제; 프롤레타리아 독재; 농민 및 피억압 민족과의 관계; 소비에트와 노동조합 안에서의 활동; 의회주의와 공동전선 정책)은 자본주의가 일반적 위기에 빠진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의 전략을 오늘날까지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남아 있다.
여기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는데, 노동계급의 능동적·자의식적 부문이라는 공산당의 본질이 그것이다. 그것만 추가하면, 위 문구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필수불가결한 이론적 기반을 정확하게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1923년 이후 코민테른은 첫 네 대회가 깔아 놓은 노선에서 급격히 탈선했다. 먼저 기회주의적 방향으로(1924~1928년, 1924년에는 “좌익” 방향으로 부분적으로 진자 운동을 했지만), 그다음에는 초좌파적 방향으로(1928~1934년), 그리고 1935년 이후에는 인민전선 전략으로 급선회하며 마침내 공산주의 정치의 기초를 완전히 폐기해 버렸다.
이런 사태 전개에 대한 트로츠키의 탁월한 분석과, 진정한 전통을 실제 운동과 재결합시키려는 트로츠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은 엄청나게 중요한 업적이었다. 우리 자신의 정치도 이에 기대고 있다. 바로 그래서 트로츠키주의 유산의 약점을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물론 앞서 인용한 클리프의 연설에 담긴 내용이다. 1933년 후반까지 트로츠키는 소련 노동계급이 관료가 장악한 국가를 평화적·합법적 방식으로 “탈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새로운 혁명 없이, 개혁의 길 위에서 개혁적 방식으로.”(강조는 트로츠키의 것)
트로츠키의 이 입장이 실제로는 비현실적이었다는 점과는 별개로, 이런 입장에서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의 능동적 행위자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과 스탈린 독재하의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는 자신의 설명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개혁주의적” 접근법을 폐기한 후에는(1933년 10월에 그랬다), 트로츠키의 이론 체계는 모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당시에는 그것이 실천적으로 어떤 중대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소련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탄생한 국가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따라서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취급할 수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과 같은 형태의 국가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자, 모순이 폭발했다. 트로츠키주의의 ─ 트로츠키 자신의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해 ─ 이론적 일관성은 산산조각 났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 그전까지는 그럭저럭 단결해 있었지만 ─ 파편들로 쪼개졌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는 “사회주의 진영”의 부상과 함께 스탈린주의가 득세한 것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오류와 단절하지 못한 것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전통에는 다른 약점들도 있었는데, 트로츠키 생전에 그 씨앗이 뿌려졌다. 그것들이 이제 각종 트로츠키주의에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선전주의와 그 대가
현재 반대파는 원칙적·이데올로기적 차이에 기반해 형성되고 있지, 대중 행동에 기반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대중 행동은 부차적이고 일회적인 차이를 불식시키고 친화적이고 유사한 경향들을 결합하기 마련이고 이는 법칙과 같다. 그와 대조적으로, 정체기나 퇴조기에 이뤄지는 이데올로기적 결집은 차이를 드러나게 하고 분열과 내부 투쟁을 불거지게 하는 경향이 강력하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기를 건너뛸 수 없다. 감내하고 돌파해야 한다. 명료하고 정확한 이데올로기적 차별화는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미래의 성공을 준비하는 것이다.
트로츠키, ‘공산주의 반대파 모임들’, 1929년
트로츠키가 마지막 망명길에 올랐을 때 직면한 첫 번째 문제는, 코민테른 내에서 혹은 코민테른을 지지하는 세력들 가운데서 반대파 운동을 어떻게 응집력 있게 만들어 낼 것인지였다. [코민테른으로부터] 독립적인 운동, 노동계급에 직접 뿌리내리려는 운동은 선택지에서 배제됐다. “제2의 정당, 제4인터내셔널을 건설하자는 주장은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 우리는 코민테른을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각국 공산당들의 노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조였다. 여러 사건들의 여파와 좌익반대파의 비판이 결합돼 공산당들을 진정한 혁명적 정치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기대해서였다. 트로츠키의 목표는 ─ 소련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 기존 공산주의 운동을 개혁하는 것이었지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방침은 실패했다. 1933년에 독일 노동운동이 나치에 의해 분쇄됐는데, 코민테른의 범죄적으로 정신 나간 초좌파적 “3기 정책” 탓이 컸고, 이 정책 때문에 독일공산당은 마비됐다. 나치의 독일 노동운동 분쇄로 트로츠키의 기조가 성공을 거둘 현실적 가능성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렇지만 트로츠키의 시도 자체는 분명 옳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독립적 정당을 건설할 가망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그때까지만 해도 최근 사건이었다)의 엄청난 권위는 스탈린에게로 돌아갔고, 코민테른 지부들의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에게도 일부 돌아갔다. 더구나 이때는 자본주의 사상 최대의 불황이 몇 년에 걸쳐 이어지던 때이자, 동시에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때였다. 서구의 대량 실업 및 산업 둔화와 러시아 산업의 눈부신 확장 사이의 대비가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에 현격하고 뚜렷했다.
그리고 독일 문제가 있었다. 트로츠키는 독일이 “국제 정세의 핵심”이라고 옳게 말한 바 있다. 독일은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로, 독일 노동계급의 규모는 유럽 최대고 독일공산당은 세계 최대 공산당이었다(소련공산당은 트로츠키도 말했듯이 더는 정당이 아니고 관료 기구였기 때문이다). 독일은 장기적인 사회적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 위기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또는 파시스트 반혁명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에 개입하기를 포기했다면 히틀러가 실제로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그에게 승리를 양보하는 처사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코민테른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공산당은, 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을 ─ 1929년 이래 그들을 “사회파시스트”라고 재규정한 것에 따라 ─ 주적으로 삼는 노선을 고수했다. 그리고 독일공산당은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노동자 공동전선 요구를 “철저히 파산한 파시스트 반혁명분자의 이론”이라며 거부했다.
독일 위기에 대한 트로츠키의 저술들만큼 탁월함과 설득력이 풍부한 글을 쓴 이는 드물고, 그것들보다 더 뛰어난 글을 쓴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지껏 없었다(마르크스·레닌의 저술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상은 사람들을 움직일 때만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는 경우에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트로츠키의 저술과 독일 현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상황 사이에는 쓰라릴 만치 큰 간극이 있었다. 독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한 줌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은 대부분 노동계급 운동에서 멀리 떨어진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이었다. 트로츠키가 1932년에 썼듯이, 독일 좌익반대파는 “자기 나라 공장 노동자 단 열 명”도 가입시키지 못했다. 독일 좌익반대파 성원들은 대개 “개인주의적이며, 프티부르주아적이고, 규율을 감당하지 못하는 룸펜들”이었다.
스탈린주의의 위력이 독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 뒤에서 살펴볼 테지만 독일뿐 아니라 다른 곳의 트로츠키주의자들도 ─ 정치적 게토로 몰아넣었는데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분명한 한계 안에 가뒀다.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층의 언저리였다. 이것이 트로츠키 지지자들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명료한 사실이다. 이들 대부분 배경이 프티부르주아적이었고, 몇몇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그 배경과 단절하지 못했다. 여기서 비롯하는 정치적 결과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발전 과정은 심각하게 뒤틀렸다.
그중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예외인 사례 하나는 미국 조직이다. 미국 조직원들 중에는 가장 중요한 비非러시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 노동계급 출신이고 운동 경험이 상당한 공산당 지도자 출신의 제임스 캐넌과, 그와 출신이 비슷한 빈센트 던, 아르네 스와벡, 휴고 올뢰 등 한두 명 더 있었다.
하지만 캐넌이 1930년대 초반 무렵 자신의 조직원들을 묘사한 아래 글을 보자.
우리가 그다지 건강하다고 보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들을 가입시키기 시작했다. … 급진주의를 가장 극단적 방식으로 표현할 기회만 찾는 별종들, 부적응자들, 떠버리들, 매사에 딴지 거는 이들, 예닐곱 개 조직에서 쫓겨난 사람들 … 다수는 공산당의 나쁜 면이 아니라 공산당의 좋은 면에 반발해서 우리를 찾았다. 즉 당의 규율, 당면한 활동에서 개인들이 당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데 반발해 우리에게 왔다. 신입 조직원 다수가 [활동을] 취미 삼아 하며, 프티부르주아적인 정신 상태이고, 일체의 규율을 못 견뎌 하며, 민주주의를 물신 숭배한다. … 이런 부류의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끝도 없이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 그들 모두 모든 문제에 대해 영원히 떠들어댈 수 있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한다).좀더 완곡한 표현으로는, 프랑스 트로츠키주의를 다룬 한 역사가가 파리에 있는 주요 트로츠키주의 단체를 묘사한 것이 있다.(너무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 조직은 개중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파리 지부 회원 다수는 지식인들 즉, 이전에는 공산당 간부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기반에서 단절된 사람들이었다.” 트로츠키주의가 이런 환경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고 트로츠키도 이를 타개해야 함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 조건 때문에 이는 극도로 어려웠다. 주관적 조건 ─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사회성 ─ 도 장애물이 됐다. 그런데 트로츠키도 이 어려움들을 더 키웠다. 트로츠키는 “폐쇄적 서클”, “학자적 오만함”, “자만과 허세 넘치는 분위기”를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토론에 반대파 모두가 참여할 때에만 이 간부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 … 일반적인 혁명적 전술 문제와 내부적 문제는 모든 반대파 조직원들의 자산이 돼야 한다.”(강조는 트로츠키의 것)
이런 접근법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프티부르주아적 성격에서 비롯하는 “지식인적” 경향을 필연적으로 더한층 강화시켰고 노동자 운동에 대한 효과적인 개입은 더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한없이 토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자연 선택”에 따라 남게 되는 경향, 캐넌이 불평한 “토론의 끝없는 잡탕” 경향이 더한층 강화됐다. 트로츠키는 반대파의 여러 지부들이 서로의 활동에 관심 갖기를 장려했다. 트로츠키는 끝도 없이 오가는 회보와 서신으로 설명을 거듭했다. 예컨대 왜 프랑스 지부가 떨어져 나갔는지를 벨기에 지부에게 설명하고, 독일 동지들 사이의 이견이 무엇인지를 그리스 지부에게 설명하고, 벨기에 지부나 미국 지부 내부의 쟁점들과 그 핵심이 무엇인지를 폴란드 지부에게 설명하는 등등. 트로츠키는 자신이 공산주의 전사들, 새로운 “혁명 간부들”을 교육·훈련시킨다고 믿고 이 모든 일을 했다.
그중 몇몇은 명백히 불가피했고 당시 정치적으로는 옳았던 선전주의 입장에서 비롯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몇몇이 그런 경우였다는 것이지 모두 그랬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트로츠키의 방식은, 자국 노동계급 운동에서는 기반을 한 뼘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세계 각지의 정책과 전략의 시시콜콜한 것들을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다고 여기도록 지적 허세를 정당화하고 북돋았다. 진지한 활동에 장애가 됐던 바로 그 “자만과 허세 넘치는 분위기”가 더 조장됐다.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은 노동계급 투사들의 세계와는 괴리된 이질적 기류의 온상이 됐고, 그럼으로써 이 조직들의 프티부르주아적 속성이 영속화됐다. 트로츠키는 이 모든 상황에 일조했다. 그 의도는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오류의 출발은, 간부들이 계급투쟁 밖에서 훈련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해로운 전통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투쟁을 지향하며 선전주의 방침을 공식 폐기하고도 오랜 후에도 이미 혈관에 퍼진 독처럼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한 가지 해악은 분파주의다. 분파주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 초기에 대단히 강했고 이후에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분파 투쟁은 만만치 않은 혁명 조직이 자체 성장을 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이다. 그러나 항구적이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분파주의는 그저 대가를 치르는 정도가 아니라 질병이다. 훗날 캐넌은 이렇게 썼다. “노동자 정치 운동에서 상시 분파보다 더 혐오스런 것은 없다. 상시 분파보다 당의 내적 생명력을 더 효과적으로 갉아먹는 것은 없다.”
분파주의에 대한 무책임한 관용은 당연히 트로츠키 탓으로 돌릴 수 없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간부 육성법은 이를 조장했는데 프티부르주아적 소집단들이 “이론” 운운하면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입당 전술과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 서클로 존재하는 시기에는 노동자 운동의 문제에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버릇이 들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도록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보수적 종파주의자로 변할 수 있다. …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토론은 중요하지만 계급투쟁을 위한 기능적 수단이다. 종파주의자에게는 토론 그 자체가 목적이다.
트로츠키, ‘종파주의, 중간주의, 제4인터내셔널’, 1935년
히틀러 집권 후 트로츠키는 각국 공산당들에 대한 개혁주의적 접근법을 폐기했다. 나치에 맞선 진지한 저항 시도조차 하지 않은 철저한 파산을 보면, 새로운 혁명 정당 건설은 필요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정치적 진단 자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2년 사이에 초좌파 사이비 급진주의인 “제3기” 정책에서, “민주주의 수호”라는 기치하에 사회민주당 및 “진보적” 부르주아 정당들과 연합하는 인민전선 전략으로 급선회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내팽개친 것이었다.
어떻게 새로운 혁명 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만들 수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이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다. 예컨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건설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경쟁하는 노동자 정당이 대부분의 경우 없었고 그 덕분에 분명한 공백이 있었다. 공산당들의 경우에는, 사회민주당이 혁명의 밀물에 쓸려 분열하는 상황에서 탄생했다.
1930년대에는 이 중 어느 조건도 없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소련이 조직한 반反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트로츠키는 히틀러와 일본 제국의 첩자였고, 모스크바 재판이 진행되던 시기에 나왔던 말처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 운동 내 파시스트 첩자”라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고립 탈피에 계속 실패한 것을 진지하게 평가할 때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처했던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을 압도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전야이자 많은 실패를 겪은 후였던 1939년에, 트로츠키는 솔직하게 상황을 평가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진보하고 있지 않다. 분명 이는 사실이고, 최근 15년 동안 노동자 운동의 전반적 퇴조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것이 가장 포괄적인 이유다. 혁명 운동 전반이 퇴조하고 있고, 패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시즘이 세계에 퍼지고, 공식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기만하는 기구인 것 등. 혁명적 부위가 전반적 역사의 시류를 거슬러 활동해야 하는 처지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의 사상, 우리의 개념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현명한 것임에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대중은 이론적 예측과 관련 개념으로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삶의 전반적 경험으로 교육받는다. 가장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모든 상황이 우리 편이 아니다.
실로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흠은, 그것들이 구조화돼 후대 세대에 계승되고 나서야 비로소 중요해졌다. 당시의 문제 중 세 가지는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다시 정리하면, 조직들은 취약했고, 프티부르주아적이었으며, 대개 노동자 운동 바깥에 존재했다. 이 게토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트로츠키주의를 프롤레타리아화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정당들로 유의미한 숫자의 노동자들을 견인할 것인가?
여러 좌파 사회민주주의·중간주의 구조물들을 “재편”하려는 (대개 성공적이지 못했던) 초기 시도 이후, 트로츠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의 입당을 제안했다. 엄밀히 말해, 트로츠키는 구체적 몇몇 경우(프랑스가 시작이었다)를 염두에 두고 주장했지만, 실천에서는 일반적으로 적용되게 됐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민주당이 좌경화하면서 혁명적 활동에 더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됐고 새로운 노동자 층에 매력을 주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 선전 조직들이 있는 곳보다 비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적 환경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활동은 단기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개혁주의자들·중간주의자들과 첨예하고 치열하게 투쟁을 벌여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세력을 결집하고, 그 후 분열해 나와 당을 창당하자는 것이었다. “개혁주의-중간주의 정당으로의 입당 전술은 그 자체로 장기적 전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 조건에서 일회성으로 제한돼 시행할 수 있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첫째 문제는 트로츠키주의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쟁점이었던 이유는, 대부분이라 할 만큼 많은 지부에서 “프랑스의 전환”(입당 전술)에 대한 반대가 다수였다는 것이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그들의 신조의 일부였다. 그런데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란 무엇인가? 혁명적 정당과 그 노동계급 기반 사이의 개방적 상호 관계, 그에 상응해서 당이 개방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매우 분명히도 이는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에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당도 아니었고 노동계급도 아니었다. 아니면 그들에게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란 프티부르주아 조직의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었던가?
13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썼다. “(프랑스) 동맹[좌익반대파 프랑스 지부]은 명명백백한 혁명적 시험대의 기치하에서 첫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동맹의 일부와 분열하는 것은 훌륭한 일보 전진이다. 그럼으로써 건강치 못하고 절뚝거리고 무능한 부위 모두를 떨쳐 버릴 것이다. 이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부위에 교훈이 될 것이고, 청년층의 비교적 나은 부위를 단련시킬 것이다….” 14
실천에서 트로츠키는 극도로 무자비했다. 트로츠키는, 교육적 이유에서는 내부 민주주의를 가능한 한 최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옳게 주장하는 동시에, 지식인적 환경에 찌든 간부들을 숙정하고 그들과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적 조직은 자기 정화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특히 혁명의 기치하에 기회주의적이고 이질적이고 타락한 요소들이 드물지 않게 모여드는, 합법 활동이라는 조건하에서는 더욱 그렇다.”이런 관점은 여러 반대자들에게서 비민주적이니 권위주의적이니 하는 비난을 받았다. 반대자들이 자신의 배경과 결별할 의지가 없는 것의 반영이었다. 결국 입당 전술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운동 상당수가 계속 프티부르주아적으로 남았기 때문에, 계급적·정치적 내용에 대한 분석 없이 “민주주의를 물신화하는” 태도가 되풀이됐고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둘째 문제는 선전주의가 강령 물신주의라는 새로운 외피를 쓰고 되살아난 것이었다. 개혁주의자·중간주의자들과의 논쟁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근본 원리들을 실제 노동계급 투쟁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들 자체를 옹호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강령”을 방어하는 것이 매우 커다란 중요성을 가졌고, 일부 사람들은 거의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다. 트로츠키 자신의 정식(실천은 아니었지만) 일부가 그런 신격화에 일부 색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능동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강령도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강령 물신주의에 젖은 것이 일정 부분은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임을 다시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물신주의 ─ 생명력 없는 물체나 한 다발의 글귀에 독립적 힘을 부여하는 것 ─ 는 그것을 야기한 상황이 개선된 뒤에도 언제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물신주의는 오늘날 몇몇 트로츠키주의 소그룹들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단말마와 제4인터내셔널의 과제’, 즉 1938년 ‘전환 강령’ 문서는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경전처럼 떠받들어졌다. 이 문서는 구체적인 정치적 분석(몇몇 중요한 측면들에서 틀린 것으로 판명났지만)과, 그 분석과 관련된 전술적 수칙, 역사, 공산주의 기본 사상의 결합이었다. 이 문서의 지도 방향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트로츠키 지지자 대부분이 비판적 재평가를 할 능력이 없었다는 입증된 사실에 비하면 훨씬 덜 중요하다. 그들이 배우지 못한 것은, 트로츠키는 자신이 오랫동안 견지해 왔던 입장이 현실에 들어맞지 않을 때면 그 입장을 가차없이 폐기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물신주의에도 물질적 근원이 있다. 자신들이 시작했던 특정한 사회적 환경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떠밀렸고, 사태 전개에 영향을 미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몇몇이 종교적 신앙과 흡사한 믿음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강령 물신주의는 그런 종교적 신앙과 사실 다를 바 없고, 강령 물신주의자들이 스스로가 무신론자임을 얼마나 강변하든 간에 그 점은 바뀌지 않는다. 셋째 문제는 기생성이다. 입당 전술을 쓴 사람들은 이질적 집단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 집단의 규범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적응이란 예컨대 언어 사용에 신경 쓰는 것 같은 일뿐 아니라 정치적 강조를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단기적 입당 전술이 최초로 시행됐던 프랑스에서 이미 벌어졌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R 몰리니에 서클의) 사람들은 [입당] 초기에 거둔 성공에 들떠서 개혁주의 정당 안에서 장기적으로 평온하게 활동할 전망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 인자들, 오른쪽의 새로운 동맹 및 준準동맹에 기대는 사람들이 우리 조직의 정치적 노선에 매우 큰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래로 몇몇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이 장기적 입당 전술, 이른바 “독특한 입당 전술” 혹은 “지도권 장악을 목표로 한 입당 전술”(deep entry)을 채택했을 때, 숙주에 정치적으로 적응한다는 것이 너무 멀리 나아가게 됐다. 입당 전술을 쓴 사람과 입당의 대상이 된 사람이 구분이 안 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신비주의가 동반됐는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역사의 근원적 힘”이 있다는 믿음, 그런 힘이 노동계급의 실제 행동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발현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표본이 될 만한 사례가 있는데, 파블로-만델 경향이 1957년에 채택한 “세계 대회” 결의의 일부다.
국제적 상황과 소련 내부 상황의 근본적 변화는 한편으로는 1943년 이래, 특히 중국 혁명의 승리 이래로 혁명적 세력이 세계 전역에서 부상한 것,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계획 경제화가 놀라운 성공을 거둬 소련이 세계 제2의 강대국이 된 것이다. 이로써 소련 관료가 전횡할 객관적 기반이 분쇄됐다. 국제적 세력 관계가 반反자본주의적 사회집단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소련 내 관계가 프롤레타리아에 유리하고 관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발전한 것과 서로 조응한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세계 혁명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전 세계에서 굳건하게 전진했기 때문에, 중국과 식민지에서의 혁명이 세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엔진이 됐다. 그 혁명의 파도가 소련과 소련 관료들이 지배하는 나라들에 이르면 관료에 맞선 정치 혁명을 세계 혁명의 두 번째로 강력한 엔진으로 만들 것이다.
위대한 역사적 힘이란 참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로구나! 이런 변질도 여러 트로츠키주의에 여전히 존재한다.
유산
그럼에도,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수행한 투쟁은 진정한 공산주의 전통을 ─ 노동계급 내에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에서 ─ 보존했다. 현실의 진지한 세력으로서 제4인터내셔널은 사산됐지만, 혁명적 시기의 코민테른에서 이어진 연속성은, 극복하기 거의 불가능할 만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우리도 오늘날 그런 연속성의 일부다. 트로츠키가 투쟁으로 지켜낸 전통은 우리의 전통이기도 하다.
전통적 트로츠키주의(트로츠키 자신의 트로츠키주의)는 부분적으로 의미를 잃었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1917년에 의미 없게 됐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여러 트로츠키주의는 여러 방식으로 변질돼 대부분의 경우 더는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트로츠키 정치의 혁명적 정수는 살아남아 있다. 그게 중요하다.
MARX21
주
- Trotsky, Writings, 1932-1933, pp51-52. ↩
- Trotsky, Writings, 1930-1931, p225. ↩
- Deutscher, The Prophet Outcast, p143. ↩
- Deutscher, p206. ↩
- Trotsky, Writings, 1930, p293. ↩
- Cannon, History of American Trotskyism, pp92-93. [던컨 핼러스의 착오다. 이 인용문의 원 출처는 제임스 캐넌이 1944년 3월 Fourth International에 쓴 ‘The Dog Days of the Left Opposition’이다.] ↩
- Craipeau, Le Mouvement Trotskiste en France, p39. ↩
- Trotsky. Writings, 1930, p297. ↩
- Deutscher, p60. ↩
- Cannon, Speeches to the Party, p185 ↩
- Trotsky, Writings, 1938-39, pp251-252. ↩
- Trotsky, Writings, 1935-36, p3l. ↩
- Trotsky, Writings, 1933-34, p90. ↩
- Trotsky, Writings, 1933-34, p91. ↩
- Trotsky, Writings, 1935-36, p3l. ↩
- SWP (US), p47. ↩
참고 문헌
Cannon, James, History of American Trotskyism
Cannon, James, Speeches to the Party
Craipeau, Yvan, Le mouvement trotskyste en France
Deutscher, Issac, The Prophet Outcast [국역: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 1929-1940》, 시대의창]
SWP (US), The Development and Disintegration of World Stalinism
Trotsky, Leon, Writings, 1930; 1930-1931; 1932-1933; 1933-34; 1935-36; 19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