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
혁명적 인내심과 타협이 필요한 이유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은 레닌이 쓴 마지막 주요 저작으로,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전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은 1920년 4~5월에 쓰여져, 같은 해 7월 19일부터 20일간 열린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 2차 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됐다. 코민테른 2차 대회는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제1차세계대전 후 첫 혁명의 물결이 실패한 상황 속에서 열렸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러시아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려면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1918년과 1919년에는 부르주아지가 너무 지리멸렬하고 낙담해 그런 일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었고,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낙관적 전망이 퍼졌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투쟁할 태세와 엄청난 희생 정신, 영웅적 행동을 보여 줬지만, 승리는 여전히 요원했다. 1920년 중반쯤에는 파업·시위 물결이 잦아들고 고립된 봉기들이 모두 분쇄되면서 혁명 운동이 퇴조하는 추세임이 분명해졌다.
중·서부 유럽의 신생 공산당들이 미숙함에서 비롯한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 혁명 퇴조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신생 공산당들에게 전략과 전술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볼셰비키는 일찌감치 개혁주의(레닌이 기회주의라고 부른)와 조직적 분열을 하고, 10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14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며 훈련을 받았다.(레닌은 이를 3장 ‘볼셰비즘 역사의 주요 단계들’에 요약해 놓았다.) 반면, 중·서부 유럽의 공산당들은 혁명의 승리를 위해 단기간의 훈련을 거쳐야 했다.
레닌은 신생 공산당들에게 전략과 전술을 가르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코민테른 2·3차 대회는 이와 관련된 쟁점들이 주로 다뤄진 전략·전술의 학교였다.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은 이런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
독일 혁명의 실패
러시아 밖의 혁명 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공업국이었던 독일의 운동이었다. 독일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러시아의 고립을 타개하고, 유럽으로 혁명을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었다. 1918년 11월 2일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에 주둔해 있던 해군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이 순식간에 확산돼 황제(카이저)를 타도했고, 제1차세계대전을 끝냈다.
황제가 타도된 뒤 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에 나섰다. 파업 일수와 노동조합원 수가 급증했다.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가 독일 전역에 확산됐고, 전국적으로 서로 조율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1918년 12월에 창당된 독일공산당은 이런 상황에 미숙하게 대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 유능한 지도자가 있었지만, 젊은 당원들은 대체로 경험이 없었고 아직 전략·전술적 사고를 배우지 못해 조급하게 행동하려 했다.
이 젊은 당원들은 반동적 지도자들이 이끄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아가 기존 노동조합에서 분리해 나와 ‘순수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의회 선거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정당과 개혁주의 정당이 대립할 때 후자를 지지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타협도 안 된다’는 명목으로 견지됐다.
이런 태도는 경험 많고 영향력 있는 대공장 노동자 투사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상태에서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일어났다. 그 봉기는 세력 균형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것이 아니었고,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해 사민당 지도자 구스타프 노스케가 이끈 우익적 준군사 조직 ‘자유군단’에 의해 분쇄됐다. 그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당했다.
어떤 타협인가? 어떻게 타협해야 하는가?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바로 이 독일공산당 내 초좌파들의 주장을 상세하게 비판한다. 비록 전후 혁명의 첫 물결이 퇴조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혁명적 분위기가 상당했기 때문에, 레닌은 초좌파들이 오류와 경험에서 배워 머지않아 다시 다가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우선 레닌은 모든 타협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는 초좌파들의 주요 구호를 다룬다. 초좌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타협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간단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당신의 차를 무장강도들이 가로막았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그들에게 돈과 여권과 권총과 차를 건네 준다. 그 대가로 당신은 희희낙낙하는 이 떼강도로부터 풀려난다. 바로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타협이다. … 그러나 그러한 타협을 “원칙상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거나 (비록 강도들이 또 강도질을 하는 데 그 차와 총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타협한 사람을 강도들의 공범이라고 부르는 상식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군사 작전에 빗대어 이렇게도 설명한다.
[타협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마치 1만 병력으로 5만 명의 적군과 싸울 때, 바로 참전하지 못하는 10만 명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휴전하거나” “길을 돌아가고” 혹은 심지어 “타협을 해도” 좋을 판에 오히려 적에게 달려드는 것과 똑같다. 이것은 혁명적인 계급의 신중한 전술이 아니라 지식인의 치졸함이다.
그러면서 레닌은 러시아 10월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사회혁명당의 농업 강령을 고스란히 채택해 농민층과 동맹을 맺은 것을 타협의 역사적 사례로 제시하기도 한다. 농민이 압도 다수였던 러시아에서 이런 ‘타협’을 하지 않았다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훗날 스탈린이 강제 집산화를 했던 것과 달리, 볼셰비키는 혁명에 성공한 후에도 도시 노동계급이 선진 농업 기계를 농촌에 제공해 농민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고 봤다.
사실 타협을 해야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불가피한 타협과 기회주의적·배신적 타협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구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타협할 때는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룬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개혁주의가 자리잡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 점이 특히 유용할 것이다.
레닌이 타협의 필요성과 전술의 유연함을 강조한 것은 결코 무원칙하게 실용주의적으로 대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레닌이 무장강도 사례를 들어 불가피한 타협도 있다고 얘기했지만, 레닌과 볼셰비키는 목숨을 걸고 혁명적 원칙을 지켰다. 예컨대 제1차세계대전에 직면해 독일 사회민주당 등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이 그동안 말해 온 국제주의 원칙을 저버리고 저마다 자국 정부를 지지할 때, 레닌과 볼셰비키는 차르와 임시정부의 전쟁 노력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레닌은 독일의 첩자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전시에 자국 정부를 반대한다는 것은 엄청난 탄압과 (적어도 한동안은) 정치적 고립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3 고 강조하며 타협이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지적한다. 바로 그래서 온갖 어려움과 희생을 각오하고 일정한 타협을 해서라도 대중이 있는 곳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혁명성, 싸워 이길 능력 등의 전반적인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끌어올리기 위하여 이러한 전술들을 적용[즉 타협]할 줄 알아야만 한다”불가피한 타협과 배신적 타협을 구별하고 올바른 전술을 결정해 구사하려면 투쟁으로 단련된 혁명적 지도부와 혁명적 당이 필요하다.
때때로 계급들과 정당들 사이의 — 국내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 아주 복잡한 상호관계가 문제가 되는 정치에서는 당연히, 파업에서의 정당한 “타협”이냐 아니면 파업 파괴자, 배신한 지도자 등이 저지른 변절적 “타협”이냐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경우들이 숱하게 있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 적용될 처방전이나 일반 법칙(“어떤 타협도 안 된다!”)을 만들어 내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사람들은 각각의 경우에서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스스로 분별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사실, 이런 사명에 걸맞은 당 조직과 당 지도자들의 의의라는 것은, 일정한 계급의 모든 분별력 있는 대표자들의 장기적이고 집요하며 다양하고 다각적인 작업으로써, 복잡한 정치적 문제들을 신속하고 올바르게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 필수적인 경험, 그리고 — 이런 지식과 경험에 덧붙여 — 필수적인 정치 감각을 계발하는 데 있다.
이 구절에서 지적하듯이, 불가피한 타협인지 여부와 적절한 전술을 세우려면 이론과 경험으로 터득한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당면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분석해야 한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객관적 정세와 노동자들의 정서를 민감하게 파악해 의회 보이콧과 의회 참여 전술을 유연하게 오간 것을 사례로 든다.
1905년 8월 차르가 일종의 자문 “의회”의 소집을 선포했을 때 … [볼셰비키의] 보이콧은 당시에는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동적 의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객관적 상황을 정확히 평가하였기 때문인데, 당시 객관적 상황은 대중적 파업을 처음에는 정치 파업으로, 다음에는 혁명적 파업으로, 그리고 마침내 봉기로 빠르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식으로, 무비판적으로 다른 조건들과 다른 상황들에 적용하는 것은 큰 오류일 것이다.
레닌은 이런 관점으로 노동조합 활동과 의회 참여 문제를 다룬다.
노동조합은 근본적으로 노동력 판매 조건을 두고 자본가들과 협상하는 기구다.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노동조합이 보수성을 띄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해 단결하기 시작한 것은 커다란 진보였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발전하는 초기 단계를 나타냈다.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은 심지어 혁명적 상황에서도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들의 구실은 노동자들의 의식 발전 과정에 개입해 발전을 더욱 촉진하고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어야지 그런 “보수성”을 이유로 회피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의 반동성, 반혁명성을 빌미로 노동조합에서 탈퇴하자!!,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한다!!, 새로이 고안해 낸 형태의 노동자 조직을 만들자!! …… 고 결론짓는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이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다. …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거나 후진적인 노동자 대중들을 반동적인 지도자들, 부르주아지의 앞잡이들, 노동귀족들, 또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들” … 의 영향력하에 내버려둠을 뜻한다.
또 레닌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의회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의회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를 전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할 때는 혁명적 사회주의 활동을 위한 연단으로 의회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당이 벌이는 투쟁의 무게 중심이 의회 밖에, 즉 파업과 시위 등에 있어야 하고 혁명적 사회주의자 의원의 활동은 이런 대중 활동에 종속돼야 한다.
물론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의회주의는 “정치적으로 폐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폐물이 된 것을 계급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대중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다시 우리는 “좌익들”이 어떻게 사고해야 되는지를 모르며, 계급 정당으로서, 대중 정당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신은 대중 수준으로, 계급의 후진 부위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당신은 그들에게 쓰디쓴 진실을 말해 주어야만 한다. 당신은 그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의회주의적 편견을 편견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은 (계급의 공산주의적 전위뿐만 아니라) 바로 계급 전체의, 그리고 (대중의 선진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로 모든 근로인민 대중의 의식과 준비 정도의 실제 상태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펴보아야만 한다.
8 이라고 지적한다.
타협을 통해 다른 정치 세력과 동맹을 맺을 때에도 혁명적 당은 정치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타협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 즉 노동계급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영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골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에 맞서 노동당과 선거 연합을 이룬다면 “선전, 선동, 정치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갖자. 물론 이 맨 나중의 조건 없이는 우리는 이 연합에 들어갈 수 없는데, 그런 연합은 배신일 수 있기 때문”당과 계급의 관계
레닌의 이와 같은 주장들은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그의 통찰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원칙을 매우 잘 드러낸다. 레닌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불균등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노동계급 내의 일부 부문과 개인이 다른 부문과 개인보다 정치적으로 더 선진적이다. 이들의 정치적 경험을 종합해 공유하고,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계획할 수 있는 조직으로 그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선진적인 부문과 개인이 당으로 조직돼 이런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당과 그 당원들은 가능한 모든 곳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동료 노동자와 대중의 정치 의식을 높이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선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에 나서 지배자들이나 개혁주의 등 다른 정치 세력이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이 옳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
레닌은 이를 책의 첫 장에서 잘 요약하고 있다.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당의 규율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 규율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성에 의해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 곧 전위의 끈기와 자기희생 및 영웅적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일차적으로는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과, 뿐만 아니라 비非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과도 연결을 갖고 가장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융합할 수 있는 전위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셋째, 이 전위가 발휘하는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에 의해서, 곧 전위의 정치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에 의해서인 바, 이것은 가장 광범한 대중이 자신들의 경험으로써 그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 다른 한편, 이러한 조건들은 단번에 생겨날 수 없다. 그것들은 꾸준한 노력과 고난 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해서만 창출된다.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 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 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의 의미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은 오늘날에도 운동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오류를 극복하고 운동을 전진시키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지난해 10~12월 이태원 참사를 전후로 한 시점에서 윤석열 퇴진 운동과 그에 대한 좌파들의 태도를 사례로 이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윤석열 정부 집권 초부터 윤석열 퇴진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초박빙으로 끝난 대선 결과가 말해 주듯이, 대중은 우파에 반감을 품었지만 전임 문재인 정부가 개혁 염원을 배신한 기억도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이재명의 대선자금을 수사하자 그에 대한 반감으로 윤석열 퇴진 운동의 규모가 크게 늘었다. 이는 그 운동이 놓인 정치적 맥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지정학적 복합 위기가 심화하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공공요금과 대출금리 인상과 같이 노동자 등 서민층의 삶을 공격하는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지지율이 추락하고 정치 위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자, 우파 결집을 꾀하고 법치주의를 명분으로 제1 야당을 압박해(결국 노동운동과 좌파를 겨냥할) 위기를 돌파하려 하면서 이재명 대선자금 수사가 정치적 초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를 비교적 신속하게 감지하고, 이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런 와중에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다. 정부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참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대중의 분노가 광범하게 일었고 윤석열 책임론이 커졌다. 노동자연대는 윤석열 퇴진 요구가 정당함을 주장하며, 대중의 분노가 윤석열로 집중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반면 정의당, 진보당, 민주노총 등 노동계 주요 조직들부터 그보다 왼쪽에 있는 많은 좌파들이 윤석열 퇴진 운동과는 거리를 뒀다. 저마다 이유는 달랐지만, 일부는 아마도 윤석열 퇴진 요구가 민주당에 유리할 뿐이라고 본 듯했다. 선거적 관점에서 그런 경우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 좌파인 경우에도 민주당이 득을 볼 것을 예상하며 떨떠름해 했다.
또 일부 좌파는 동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퇴진 요구의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 듯했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발전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태도는 현명하지 못하다. 물론, 이 운동이 성장해 만약 정말로 윤석열을 퇴진시키더라도 일차적인 정치적 수혜자는 민주당이 될 공산이 있다. 그러나 퇴진 운동이 우파를 강타해 여권이 동요하고 분열하면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분출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운동과 좌파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영국공산당의 초좌파들에게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정당과 대중적 개혁주의 정당이 대립할 때 후자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다음 구절을 곱씹어볼 만하다.
만일 우리가 단지 혁명적인 집단이 아니라 혁명적인 계급의 정당이라면, 만일 우리가 대중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그리고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허풍선이가 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첫째, [노동당 지도자] 헨더슨이나 [독립노동당 지도자] 스노우든이 [자유당 소속의 당시 총리] 로이드 조지와 [보수당 지도자] 처칠을 이기도록 도와야만 한다. 더 올바르게 말하자면 헨더슨이나 스노우든이 로이드 조지와 처칠을 이기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승리를 두려워하니까! 둘째, 우리는 노동계급 대다수가 우리의 올바름을 확신하도록, 곧 헨더슨파와 스노우든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천성적으로 프티부르주아적이고 변절적이며, 그들의 파멸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노동계급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확신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셋째, 우리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헨더슨파에 환멸을 느낀 것을 기반으로 헨더슨파 정부를 확실한 전망을 갖고 일거에 타도할 수 있을 시점에 다가서야만 한다.
운동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나 그 참가자들의 의식 수준을 핑계로 대중 운동에 동참하고 개입하기를 회피한다면, 결국 그 지도자들에게 참가자들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개혁주의와 초좌파주의가 서로를 보완한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초좌파주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부분적으로 볼셰비키의 공적으로 돌려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초좌파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기회주의(즉 개혁주의)에 언제나 가장 가차없이 비타협적으로 투쟁해 왔던 볼셰비키의 존재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바로 그런 혁명적 당과 혁명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을 꼭 읽어봐야 하는 이유다.
MARX21
주
참고 문헌
〈노동자 연대〉 2022, ‘[이렇게 생각한다] 윤석열 퇴진 요구는 정당하다!’, 〈노동자 연대〉 439호.
김인식 2018,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기억하며’, 〈노동자 연대〉 265호.
레닌, 블라디미르 1995,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존 몰리뉴 2015, ‘초좌파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44호.
클리프, 토니 2013, 《레닌 평전4 - 볼셰비키와 세계혁명》, 책갈피.
최일붕 2017, 《러시아 혁명: 희망과 좌절》,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