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전선에서 민주대연합으로 *
이 글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985년 여름호에 발표한 논문(‘《마르크시즘 투데이》의 정치 비판’)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영국 공산당 기관지인 《마르크시즘 투데이》는 당시 유러코뮤니즘 경향을 대표했고, 마거릿 대처의 우파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대연합론’을 주장했다. 한편, 영국 공산당의 유관 신문 〈모닝 스타〉는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그런 변화를 ‘신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계급 정치》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두 진영의 논쟁을 혁명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괄호([ ])는 독자의 이해를 돕 위해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유러코뮤니스트 전략의 핵심은 대처주의에 맞선 민주대연합이다. 이 개념은 꽤 모호하게 쓰이고 신수정주의자들[영국 공산당 내의 유러코뮤니스트 경향]마다 상이한 의미를 부여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본질은 노동계급 투쟁과 사회주의 정치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민주대연합의 기원은 1935년 8월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제시된 인민전선 전략이다. 이 전략의 핵심을 당시 코민테른 서기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이렇게 요약했다.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 근로 대중을 동원하는 데서, 프롤레타리아 공동전선을 기반으로 한 광범한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형성은 특히 중요한 과제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성패는, 프롤레타리아를 한편으로 하고 근로 농민과 도시 프티부르주아지 기본 대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투쟁 동맹을 결성하는 데 달려 있다. 후자는 산업이 발전한 나라에서조차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
구성원의 상당수가 근로 농민과 도시 프티부르주아지 대중으로 이루어진 조직과 정당에 올바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결성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정당들과 조직들 — 정치 조직이든 경제 조직이든 — 의 다수는 여전히 부르주아지의 영향하에 있으며 부르주아지를 따른다. ⋯ 특정한 조건에서는 그들이나 그들의 일부를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끌어들여야 한다. 이러한 정당·조직들의 지도부가 부르주아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급진당이 존재하는 프랑스의 상황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나치가 소련을 위협하자 스탈린은 “민주적” 제국주의 열강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인민전선 전략은 이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해 줬다. 히틀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영국과 프랑스의 일부 부르주아지(예컨대 영국 보수당 내 처칠의 세력)에 스탈린이 구애하는 것을 정당화해 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민전선의 본질은 코민테른에 의한 부르주아 정당과 노동자 정당의 전략적 동맹이다. 인민전선의 채택은 독일 나치의 집권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나치의 집권은 스탈린이 제시한 재앙적인 “계급 대 계급” 정책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그 정책에 따라 독일 공산당이 파시즘에 맞선 사민당과의 공동 행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그에 따라 코민테른은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계급에게 ‘조국 방위’를 지지하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과 다계급 연합이라는 발상 자체가 민족주의를 복권시켰다. 디미트로프는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에 비타협적으로,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 허무주의 지지자가 아니며 그런 것처럼 굴어서도 안 된다. 노동자와 모든 근로 대중에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교육하는 것은 모든 공산당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광범한 근로 대중의 모든 민족적 정서를 경멸해도 된다거나 경멸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볼셰비키의 태도에서 한참 동떨어진 것이고 민족 문제에 관한 레닌과 스탈린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4 이러한 예측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인민전선의 실천만이 아니다. 1951년 스탈린의 승인하에 출판된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획득하여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다는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명시적으로 천명했다.
트로츠키는 제7차 코민테른 대회를 코민테른 “청산 대회”로 일컬었다. 공산당들은 사회[‘진보적’, ‘좌파적’]애국주의를 수용했고 그 논리적 귀결은 암묵적으로, 심지어 때로는 명시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에 개혁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를 사민주의자와 구별시켜 주는 것은 전통적 미사여구뿐이며, 그마저 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5 )
몇몇 신수정주의자들은 순전한, 있는 그대로의 인민전선주의자이다. 에릭 홉스봄이 가장 분명한 사례다. 홉스봄의 최근 글들은 디미트로프를 잔뜩 인용한다. 홉스봄은 자신이 인민전선 정치의 시기, 즉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공산당 내에서 교육과 경험을 얻은 사람들”(1985년 4월호, 10쪽)[본문 내 표기된 인용 출처는 모두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것이다]의 한 명임을 독자들에게 잊지 않고 상기시킨다.(공교롭게도 그 교육의 일부는 공산당이 아니라 ‘케임브리지 집담회’(또는 ‘케임브리지 사도’)에서 왔다. 이 엘리트 모임은 오늘날 앤서니 블런트[소련 스파이였던 영국의 저명한 예술사가]가 속했던 곳으로 악명 높지만, 더 중요하게는 G. E. 무어나 리턴 스트레이치, 메이너드 케인스 등 주요 부르주아 지식인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인민전선은 소련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시 동맹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며, 홉스봄은 그 시기를 노동운동의 정점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시점 이후로 쇠락이 시작됐다고 본다. 홉스봄은 인민전선을 옹호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대연합 전략은 거의 즉각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공산당을 회복·성장시켰다. 파시즘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동안, 그리고 그런 승리 후에 많은 공산당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노동자들과 다른 사회 계층의 정치적 급진화를 낳았고, 영국 노동당에게 가장 큰 승리를 안겨 줬다.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많은 곳에서 이 전략이 정치 투쟁을 (몇몇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무장 항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고,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한 10개 신생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만한 성과를 낸 다른 전략이 있다면 어디 한번 대 보시라.(1985년 4월호, 10쪽)
홉스봄은 노련하지만 부정직한 논쟁가다. 홉스봄은 《계급 정치》 그룹과 같은 신수정주의 반대자들의 주장을 초좌파적 종파주의에 빠진 스탈린의 ‘제3기 이론’으로 둔갑시킨다.
‘계급 정치’로 명명된 정치의 귀결은 코민테른이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추구한 이른바 ‘계급 대 계급’ 노선이었다. 물론, 그것은 실로 계급 정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잘못된 종류의 계급 정치였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재앙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터내셔널이 옳게 예측한 1929년 세계경제 침체가 사회주의 혁명의 준비를 당면 과제로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제출된 시기에 말이다. 그런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가 집권했다.(1985년 4월호, 9쪽)
이 논증은 당시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만을 설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제3기 이론’의 가장 철저한 비판자는 단연코 트로츠키였다. 그는 “사회파시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파시즘에 맞선 모든 노동자 정당의 공동전선을 건설하려고 온 힘을 다해 활동했다.(안타깝게도 사태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인민전선 전략에 반대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맹렬했다.
6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트로츠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계급 동맹을 이끌었다. 바로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었다. 트로츠키의 인민전선 비판은 노동계급과 도시·농촌 프티부르주아지의 진정한 동맹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농민은 그 본성상, 특히 분산적인 생산 조건 때문에 전국적 정치 무대에서 독자적 세력으로 나설 수 없다. 따라서 그들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들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조직은 보통 부르주아 정당들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그러한 정당들과 동맹을 맺으려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는 ‘자기 제한 공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싸움을 벌였다가는 동맹 세력들의 반감을 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농민을 투쟁에 동원할 기회도 모두 상실한다. 그런 동원은 농민을 대표한다는 부르주아 세력의 정치적 지배력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런 일이 1925~1927년 중국 혁명 때 벌어졌고, 그 결과는 노동자와 농민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7
인민전선 옹호자들은 트로츠키가 “계급주의”의 한 형태를 옹호했다고 주장한다. 즉, 트로츠키가 다른 계급과의 동맹을 원칙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트로츠키가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은 프랑스에서 형성된 최초의 인민전선이었다. 프랑스의 인민전선은 사회당과 공산당, 급진당을 포괄했다.
부르주아지와의 공조라는 대의를 주도적으로 제기한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는 공산당원들은 ⋯ 인민전선을 프롤레타리아와 중간계급들의 동맹으로 묘사한다. 마르크스주의를 우스꽝스럽게 왜곡하는 것이다! 급진당은 프티부르주아지의 정당이 결코 아니다. 소련의 〈프라우다〉가 제시하는 “중간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의 제휴로 형성된 블록”이라는 어리석은 규정도 맞지 않다. 중간 부르주아지는 프티부르주아지를 경제적으로 이용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이용하며, 그들 자신은 금융자본의 대리자 구실을 한다. 한쪽이 다른 쪽을 이용해 먹는 위계적인 정치 관계에 “블록”이라는 중립적인 이름을 붙이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수는 사람과 말의 연합이 아니다. 에리오와 달라디에[급진당의 지도자들 — 캘리니코스]의 정당이 프티부르주아지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심지어 근로 대중의 일부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해도, 그것은 프티부르주아지와 근로 대중을 자본주의 질서의 이익을 지지하도록 현혹하고 속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급진당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민주주의 정당이다. 다른 모든 규정은 거짓말이다. ⋯ 마르크스주의 전략의 기본 공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와 도시·농촌의 소小인민들의 동맹은 오로지 프티부르주아지의 전통적 대표자들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농민을 노동자 편으로 끌어당기려면 농민을 금융자본에 종속시키는 급진당 정치인에게서 떼어 내야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관료와 중간계급 최악의 정치적 사기꾼들의 음모인 인민전선은 오히려 혁명으로 가는 길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파괴하고 대중을 파시스트 반혁명의 품에 안겨 주기만 할 것이다.
9 프랑스의 인민전선은 1936년 6월 집권했다. 그들이 정부를 구성하기도 전에 수행했던 첫 임무는 좌파의 선거 승리가 고무한 대중 파업과 공장 점거 물결에 제동을 걸고 궁극적으로는 멈추는 것이었다. 이웃 나라인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맞서 군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회당 소속의 프랑스 총리 레옹 블룸은 영국의 “비개입” 정책을 지지했다. 그 덕분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파시스트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 블룸은 우파의 사보타주로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의 파업으로 기업주들을 강제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성취한 게 별로 없었다. 블룸의 실패는 대중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1939년 9월 제2차세계대전이 개전하자 급진당은 한때 동맹이었던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36년부터 인민전선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하원은 프랑스가 1940년 5~6월 나치의 전격전에 굴욕적으로 패하자 [나치 독일 지지자인] 페탱에게 권력을 넘기기로 표결했다.
이러한 예측은 이후 사건들로 입증됐다.세계적 수준의 인민전선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는 제2차세계대전은 어떠했는가? 《마르크시즘 투데이》 1985년 5월호는 이 위대한 “반파시즘” 투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특히, 바실 데이비드슨은 대처주의를 히틀러에 유화적이었던 보수당 내 네빌 체임벌린 일파와 비견하기도 한다.(그러나 그 호에는 헤일셤 경이 1945년에 관해 쓴 글도 실려 있다. 그는 대처의 대법관이기도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유화 정책이 유일한 쟁점이었던 그 유명한 1938년 옥스퍼드 보궐 선거에서 체임벌린 측의 후보로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자이기도 하다!)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전시 인민전선 또한 그 결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치 독일을 패배시킨 연합국은 자기들끼리 유럽을 분할했다. 서구의 공산당들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미국과 영국이 질서를 복구하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 레지스탕스가 잉태한 사회혁명의 열망을 유산시켜야 했다. 동유럽에 관해 말하자면, 홉스봄은 그곳에서 정말로 “자율적인 사회혁명”(1984년 3월호, 10쪽)이 일어났다고 믿는 것인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를 제외하면 동유럽의 공산당들은 모두 소련에서 온 점령군의 존재나 점령군의 적극적인 개입에 힘입어 권력을 잡았다. 이 “혁명”이 낳은 사회·경제체제는 상시적으로 노동계급의 불만에 대처해야 했고, 폴란드의 연대노조가 전성기를 이룬 노동계급의 잇따른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게다가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고전적인 의미의 프티부르주아지가 보잘것없는 사회 세력을 이루고 있는 영국 같은 사회 구성체에서 계급 연합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일까? 처음에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은 “반독점 동맹”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독점 자본이 프롤레타리아뿐 아니라 나머지 부르주아지와도 고립돼 있고 충돌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이 이 나머지 부르주아지를 동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기원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인민전선을 반동적인 최상위 200대 가문에 맞선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논평했다.
에리오와 달라디에를[즉, 급진당을 — 캘리니코스] 프랑스를 지배하는 “200대 가문”에 맞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자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뻔뻔한 속임수다. 200대 가문은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니라 금융자본 체제의 꼭대기에 있다. 200대 가문을 무너뜨리려면 경제·정치체제 전반을 타도해야 하지만,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는 에리오와 달라디에도 플랑댕과 드라로크[와 같은 우파 지도자들 — 캘리니코스] 만큼이나 이해관계가 있다.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의 묘사와 달리, 소수의 거물들에 맞선 ‘국민’의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필요하다. 이는 계급 투쟁의 문제이며, 오직 혁명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11 “반독점 동맹”은 영국에서 실천적인 의미가 없었다. 기껏해야 1975년 유럽경제공동체EEC 국민투표에서 ‘반대’ 진영에 가세한, 그것도 거대 금융 자본가의 한 명인 고위 보수당 인사 에드워드 두 칸에 보낸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찬사와 같은 황당한 짓들로 이어졌을 뿐이다.
독점자본이 나머지 부르주아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트로츠키의 논지는 이후 공산당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비판한 여러 논자들에 의해 더 정교해졌다.12 그러나 강령의 전반적인 강조점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페미니즘, 반핵군축운동 등)”의 “민주대연합”에 있다.
1977년판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은 독점 자본에 대항하는 동맹 전략에서 크게 후퇴했다. 물론 “이러한 자본가 계급의 일부에 속한 많은 사람들[즉, 소규모 고용주들 — 캘리니코스]과 노동계급이 영국의 거대 자본가들과 다국적 자본가들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동맹을 이룰 객관적 토대”가 있다고 여전히 주장한다.1977년 개정판의 주요 비판자 중 한 명인 존 포스터가 정확하게 지적한 이러한 “모호함”은 당시 영국 공산당 다수파 내의 이견에서 비롯했을 공산이 크다. 고故 잭 워디스 등은 민주대연합의 “반독점적 성격과 목적”을 계속 강조했다. “그 목적은 독점에 맞선 영국 내 모든 계급과 사회 세력의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1977년 9월호, 265쪽) 그리고 이러한 노선을 현재 포스터와 나머지 〈모닝 스타〉 그룹이 취하고 있다.
반면, 《마르크시즘 투데이》 그룹은 반독점 동맹이라는 개념과 분명하게 단절하는 방향으로 그 모호함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앨런 헌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렇다면 헌트와 그 밖의 신수정주의자들이 공산당 강령에 새겨 넣기를 바라는 “그람시적”이고 비“경제주의적”인 형태의 민주대연합은 무엇인가? 몇몇은 그것이 계급 정치와 단절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이런 입장을 가장 솔직하고 정교하게 옹호하는 인물이 바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다.1977년판의 의의는 그람시적 [유러코뮤니스트 — 캘리니코스] 입장으로의 중대한 변화를 알렸다는 데 있었다. ⋯ 그러나 그 글을 다시 읽어 보면 ⋯ 이전 판에 있었던 동맹에 관한 경제주의적 관점의 잔재가 몇몇 정식에 남아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강령 내에 있는 모순적 요소들의 주된 원천은 지도부가 너무 오랫동안 지도를 제공하지 않고 갈수록 서로 멀어지는 두 당내 경향의 차이를 땜질하려 해 온 데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1985년 4월호, 51쪽)
라클라우와 무프에 따르면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론은 노동과 자본의 양극 대결을 포기함으로써 이전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것이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 사회의 복잡성을 정치 투쟁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 역사적 주체의 다수성과 조화를 이루는 민주주의적 정치 실천의 기반을 마련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접근법의 함의를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고 라클라우와 무프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계급주의”[“노동자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계급주의란 노동계급이 사회 변화의 근본적 충동을 갖고 있는 특권적 행위자라는 견해를 뜻한다.”
16 따라서 사회는 서로 중첩되는 다수의 적대로 이뤄져 있으며 그 적대는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저항의 여러 형태를 낳을 수 있다. 사회는 다원적 성격을 띠기에 “이러한 새로운 투쟁들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대처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거둔 승리가 바로 그런 사례다. 17 “저항의 형태들이 집단적 투쟁의 성격을 띨 수 있는 것은 외적 담론의 존재 덕분이다.” 18 여기서 “외적 담론”은 민주주의를 뜻하는 말로, 그것은 상이한 “주체들”을 “민중”이라는 공동의 블록으로 묶어 준다. 따라서
라클라우와 무프는 “계급주의”의 파산이 최근 몇 년 동안 “신사회운동”의 부상으로 뚜렷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리 사회는 계급 착취라는 단일한 근본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인 것 안에는 다양한 잠재적 적대가 있으며, 많은 수는 서로 대립적이다.”위계적인 사회를 재건하려는 프로젝트[즉, 대처주의 — 캘리니코스]에 맞서, 대안 좌파는 민주주의 혁명의 영역에 스스로를 완전히 자리매김하고 억압에 맞선 다양한 투쟁들을 잇는 등가적 사슬을 확장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돼야 한다. 따라서 좌파의 과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급진적·다원적 민주주의 방향으로 심화·확장하는 것이다.
20 그 결과 관념론으로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그들에 따르면 진보적 투쟁은 “민주적 담론으로써 상이한 형태의 저항을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이 와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21 그들은 투쟁 자체가 우리가 세계에 관해 말하고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담론으로부터 독립한 세계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대륙 철학 유행의 첨단을 걷는 이 철학적 사변의 결론은 영미권 정치학에서 떠받드는 다원주의적 사회관을 넘어서지 못한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사회를 상충하는 집단들의 다원성으로 이해하는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를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의 논증은 거의 전적으로 개념적 수준에서 이뤄지며, 매우 나쁜 철학, 대개는 포스트구조주의류의 철학을 끌어다 쓴다.그럼에도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장은 민주대연합의 함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그 함의는 다름 아닌 계급 정치와의 결별이다. 베아 캠벨은 〈모닝 스타〉 편집자 토니 체이터가 민주대연합 내 “조직 노동계급의 주도적 구실을 강조”한다고 비판한다. 캠벨은 민주대연합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상술한다.
그러한 연합, 즉 서로와 별개이지만 동등한 파트너들의 연합을 원한다면, 캠벨은 라클라우와 무프를 따라 “계급주의”를 버리고 다원주의적 사회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라클라우와 무프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그 때문에 심지어 유러코뮤니스트들의 수호 성인(으로 크게 왜곡된) 그람시마저 비판한다. 그람시가 “모든 헤게모니 구성체에는 언제나 단일한 기본 원리가 있으며, 그것은 근본적 계급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고집했다면서 말이다.연합이란 그 안에서 서로 만나는 구성 요소들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과정이다. 연합은 정치적 대화이며, 연합을 이루는 부분들은 그런 대화를 통해 변화의 집단적 주체가 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변화한다.(1984년 12월호, 26쪽)
23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민주대연합론은 계급 적대에 기반한 구상과 다원주의로 빠져드는 것 사이에서 동요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캠벨은 “남성들의 운동이 노동조합 운동을 납치했다”라고 주장한다.(1984년 12월호, 26쪽) 마치 남성과 여성이 적대적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묘사하지만, 노동계급 여성이 노동조합 운동을 되찾아 올 여지도 남겨 놓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시즘 투데이》 필진은 선뜻 라클라우와 무프를 따라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선포하려 들지는 않는다.이처럼 양립 불가능한 두 입장의 장점만을 취하려는 시도에 따르는 모순을 치워 버리는 한 가지 방법은 오로지 이데올로기적 요인에만 골몰한 채 나머지 모든 것을 잊는 것이다. 스튜어트 홀이 이런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앞서 살펴봤듯이 홀의 대처주의 분석은 이데올로기주의의 냄새를 많이 풍긴다.[번역하지 않은 이 논문의 앞부분에서 다룬다] 그뿐 아니라 홀은 좌파의 쇠락을 진단하면서 신新우파의 미래상에 대당하는 대안적 미래상을 구성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홀은 이데올로기 문제에 몰두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상과 관념이 단일한 특정 계급에만 ‘속한다’는 가정”에 대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반박을 원용한다.
사상과 관념은 그런 식으로 그 내용과 지시 대상이 불변하게 고정돼 고립된 채 단독으로 언어나 사고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언어는 실천적 사고와 계산, 의식의 수단이다. 그것은 일정한 의미와 지시 대상이 역사적으로 확보된 방식 덕분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설득력은 ‘논리’에 달려 있다. 논리는 서로 연관된 의미의 사슬을 통해 한 명제를 다른 명제와 연결시켜 준다. 그리고 여기서 사회적 함축들과 역사적 의미들이 응축되고 서로에게 반향을 일으킨다. 게다가 이러한 사슬들은 의미들의 내적 체계에서 위치가 결코 영구히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사회 계급과 집단에 ‘귀속’되기도 한다.홀은 “민주주의”를 그런 사례로 든다. 이 말을 좌파가 쓰냐, 우파가 쓰냐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라클라우가 드는 사례는 “민족”이다. 홉스봄도 같은 사례를 드는데, 그는 디미트로프의 성실한 제자답게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좌파가 “민족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애국주의를 우파에게만 맡겨 놓는 것은 위험하다.”
26 그렇다고 해도 “민족”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쓰이든지 간에 공통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일 국가로 묶인, 계급 적대를 뛰어넘는 어떤 공동체를 뜻한다. 이러한 개념에 바탕을 둔 모든 정치 전략은 노동자들을 자본에 매어 둠으로써 노동계급의 이익에 반하게 된다. 앞서 개괄한 인민전선의 역사가 이를 풍부하게 입증한다.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추론 과정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어떤 명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그 명제와 연결된 다른 명제가 무엇이냐,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그 명제가 진술되느냐에 어느 정도 달려 있다. 그러나 단어에 고정된 의미가 전혀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결국 관념론적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예컨대 민족 개념을 보자. 민족주의의 “좌파적” 형태와 “우파적”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힐은 중세 말부터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는 여러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이 ‘영국 지배계급은 외부 정복자들의 무리이며 진정한 애국은 그들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어떻게 다양한 형태로 공유해 왔는지 추적한 바 있다.27 그러나 홀은 사상투쟁과 계급투쟁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홀은 “광원 파업을 정치화하고 일반화해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이 근본적인 사회주의적 대의를 따르는 개종자들을 얻어 내야 한다”면서 “그 싸움을 협소하고 부문적인 계급 쟁점으로 가져가면 그것의 계급적 내용을 잃는다”고 주장한다.(1985년 1월호, 19쪽) 그러나 그 암호를 해독해 보면 홀의 주장은 결국 대규모 피케팅[대체인력 투입을 막는 집단행동]이 “여론”의 반감을 살 것이라는 뜻이다. 광원 파업에 가장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정치화된 사람이라는 생각은 홀의 정치에 매우 낯선 것이다.
홀의 이데올로기주의는 결국 일종의 선전주의로 나아간다. 물론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노동자 투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 투쟁을 지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목표는 계급투쟁이라는 방법을 포기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신수정주의자들의 핵심 주장인 민주대연합론은 전통적 인민전선론을 뜻하거나(그렇다면 그것은 현재의 계급 구성 면에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인 데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대규모로 실천에 적용됐을 때 재앙을 초래했다), 아니면 다원주의적 사회 이해를 수용하며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어느 쪽이든 정치적 귀결은 분명하다. 중도를 향하고 [노동당 우파인] 키넉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노선은 신수정주의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의 맹공을 받고 있다. 특히 《계급 정치》 그룹은 그들이 말하는 “신신新新좌파” 사상을 논파하는 여러 훌륭한 반론을 제시한다. 그들은 예컨대 이렇게 주장한다. “단결은 오로지 노동계급 정치를 기반으로만 성취할 수 있다. ⋯ 평화나 성차별, 인종차별, 법·질서 문제가 계급 문제가 아니고 그런 문제들을 계급 문제로 놓고 싸울 수 없다는 주장은 경제주의와 노동자주의의 거울상이다.”그러나 《계급 정치》 그룹이 신수정주의자들을 설득력 있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비판 대상과 같은 지반 위에 있다. 그들은 1977년판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을 옹호한다.
민주대연합 구상은 진보적인 운동들이 노동계급과 그들의 조직과 진정으로 변증법적 관계를 맺게 할 대중적 잠재력을 지녔다. 우리는 민주대연합이 오늘날 영국 좌파의 전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운동들”과 노동“계급”은 여전히 서로 별개인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공산당 내 신수정주의 반대자들은 여전히 민주대연합론을 지지한다. 그래서 〈모닝 스타〉 그룹의 한 지도자 믹 코스텔로는 광원 파업 말기에 이렇게 썼다.
광원들의 전투는 [대안 경제 전략의 — 캘리니코스] 여러 측면에 대한 지지를 얼마나 광범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지 보여 줬다. 심지어 ⋯ 전문 경영자들 사이에서도 말이다.[이것은 석탄공사 내의 중론을 거스른 네드 스미스 같은 인물이나 사용자 연합인 BACM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 캘리니코스] 이것은 노동계급의 주도로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민주대연합을 일궈 낸다는 공산당의 전망이 옳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대부분인 《마르크시즘 투데이》 비판자들은 공산당의 전통을 되뇌이며, 결국 그 전통은 인민전선의 전통이다. 그래서 홉스봄은 자기 나름대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인민전선에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주의자들의 약점을 효과적으로 파고든다.
그 시기의 대연합 노선은 분명 비판할 점이 있다. 특히, 소련 국가에 득이 되는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몇몇 나라에서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희생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영국에서 보수당-노동당 연정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 것이 그런 사례다.(1985년 4월호, 10쪽)
이것은 노련한 비판이다. 홉스봄이 말하는 “판에 박힌 강경파”(1985년 4월호, 12쪽) — 예컨대 앤드류 로스스틴, 로빈 페이지 아놋 — 는 1945년에 활약한 자들로,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이러한 극단적 형태의 인민전선 정치를 옹호했을 것이다. 그리고 홉스봄은 이렇게 묻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노선은 보수당과 연정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노동당 정부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이게 “판에 박힌 강경파”의 노선보다 더 나쁠 게 무엇인가?
31 〈모닝 스타〉는 영국노총 중앙위원회 내 좌파가 석탄과 파업 파괴용 석유의 운송을 저지한다는 1984년 9월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은 것도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시즘 투데이》 그룹이든 〈모닝 스타〉 그룹이든 그들에게 “노동계급의 주도적인 구실”은 그다지 좌파적이지 않을 때가 많은 좌파 노조 관료들과의 동맹을 뜻한다.
공산당 내 《마르크시즘 투데이》 그룹과 〈모닝 스타〉 그룹은 둘 다 똑같은 스탈린주의 정치라는 모태에서 갈라져 나왔다.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의 일부와 동맹을 맺는다는 대연합 개념을 공유한다.(물론, 유러코뮤니스트들의 경우 그들이 계급 분석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광원 파업이 여전히 한창일 때 〈모닝 스타〉가 파업 반대자들과 사실상 동일한 노선을 취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스코틀랜드의 삼업연맹[석탄, 철강, 철도 노조의 연맹]이 레이븐스크레이그 제철소로 석탄 반입을 허용하는 재앙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모닝 스타〉는 “연대가 정상 궤도에 오르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거기에 환호했다.32 광원 파업의 패배를 “대처판 소련”으로 묘사했다. 33 마지막으로, 《뉴 레프트 리뷰》도 갈수록 신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뉴 레프트 리뷰》는 그러한 제목을 단 랠프 밀리밴드의 글뿐 아니라, 〈모닝 스타〉 지지자들의 기고도 실었다.(이러한 동맹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닌데, 《뉴 레프트 리뷰》가 아이작 도이처를 따라 소련을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의 혁명 세력으로 본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특히 그렇다.) 34
신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이 모두 이런 오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당 좌파의 일부는 “재편”(즉, 키넉에 굴복하라는) 압력과 이러한 노선을 지지하는 홉스봄 등의 주장에 반대해 왔다. 밀리턴트나 〈레이버 브리핑〉 등의 강경 좌파들과 간행물들이 그런 사례다. 그리고 일부 노동당 국회의원들, 특히 토니 벤이 《계급 정치》를 지지했다. 벤은 그 소책자를 “사회주의의 미래를 둘러싸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을 위한 가장 만만찮고 중요한 기여”라고 칭찬했다. 《뉴 소셜리스트》는 전반적으로 《마르크시즘 투데이》보다 훨씬 좌파적이며, 홉스봄이 쓴 “노동당이 잃은 무수한 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기사들을 연재했고,이런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흐름은, 무엇보다도 광원 파업으로 급진화한 노동당 활동가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우경화 반대 정서를 표현한다. 이런 흐름을 이루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을 여기서 살펴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지적할 만한 점은 많은 수가 유러코뮤니스트들과 유사한 사회주의 전략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랠프 밀리밴드는 노동계급의 중심적 구실을 매우 설득력 있게 옹호하고 대처에 맞서 광범한 연합을 꾸리자는 노선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망 100년을 기해 《마르크시즘 투데이》가 조직한 토론회에서 밀리밴드는 자신이 어느 정도 신수정주의에 지지를 보낼 태세가 돼 있음을 보여 줬다.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주한 문제는 새로운 노동계급들과 새로운 운동을 위한 적절한 주체를 찾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이한 전선에서의 전진을 위한, 상호 연합한 새로운 다원적 주체들일지도 모른다.(1983년 3월호, 11쪽)
이런 얼버무리기는 밀리밴드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컨대 도린 마시와 힐러리 웨인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존 노동자 기구들은 실로 구식이고 부문적이다. 그러나 광원 파업은 계급 정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런 기구들을 극복하고 그런 기구들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리고 그것이 산업 행동과 신사회운동 중 하나를 택하거나 그 둘을 그저 더하는 식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보여 줬다. ⋯ ‘계급 정치’를 단지 산업 현장에서의 전투성과 의석 획득의 단순 합으로 이해하지 않는 새로운 노동자 기구를 건설하는 것은 가능하다.두 저자가 파업 이전의 주요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좌파 지방정부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지방세율 제한에 맞선 투쟁이 얼마나 형편없이 무너졌는지를 떠올려 보면 그다지 솔깃한 사례가 아니다.
37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사회운동”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여러 차별 형태에 대한 대응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후자가 참이라면(필자는 그렇다고 본다) 쟁점은 노동계급을 어떻게 단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연합을 논하는 것은 쟁점을 흐리고 인민전선 정치를 더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들 뿐이다.
신수정주의에 맞서 계급 정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다계급 동맹을 위한 객관적 토대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그저 선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논증돼야 한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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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lex Callinicos, 1985, ‘The politics of Marxism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2:29 (Summer 1985) .
↩
- G. Dimitrov, Report to the Seventh Worl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London 1973), pp66–67. ↩
- Trotsky, Struggle, passim. ↩
- Dimitrov, p101 ↩
- Trotsky, Writings (1935–36) (New York 1970), pp84, 93. ↩
- 홉스봄이 그 사도의 회원이었다는 오랜 의심은 1985년 5월 7일자 〈가디언〉에서 사실로 확인됐다. ↩
- “계급주의”라는 용어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가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London 1985). ↩
- 특히 Leon Trotsky on China (London 1976)를 볼 것. ↩
- Leon Trotsky on France (New York 1979), pp145–146. ↩
- The Communist Movement (Harmondsworth 1975)이다. ↩
- Trotsky on France, pp147–148. ↩
- 예컨대 B. Jessop, The Capitalist State (Oxford 1982), 2장을 보라.[국역: 《자본주의와 국가》, 돌베개, 1985] ↩
- The British Road to Socialism (London 1978) (이하 BRS), p20. ↩
- Laclau and Mouffe, Hegemony. 같은 저자의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Marxism Today, January 1981도 보시오. ↩
- Laclau and Mouffe, Hegemony, p71. ↩
- 같은 책, p178. ↩
- 같은 책, p131. ↩
- 같은 책, pp168-169. ↩
- 같은 책, p159. ↩
- 같은 책, p176. ↩
- A. Callinicos, Is There a Future for Marxism? (London 1982)와 “Post-Modernism, Post-Structuralism, Post-Marxism?”, Theory, Culture & Society (근간)을 보라. ↩
- Laclau and Mouffe, Hegemony, p154. ↩
- 같은 책, p69. 유러코뮤니즘적 그람시 해석에 대한 반박은 C. Harman, Gramsci versus Reformism (London 1983)를 보라.[국역: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 노동자연대, 2016] ↩
- Laclau and Mouffe, Hegemony, p4. ↩
- S. Hall, “The Problem of Ideology”, in B. Matthews (ed.), Marx: 100 Years On (London 1983), pp77–78. E. Laclau, 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 (London 1977)를 보라. ↩
- S. Hall and M. Jacques (eds.), The Politics of Thatcherism (London 1983), p268. ↩
- C. Hill, “The Norman Yoke”, in Puritanism and Revolution (London 1968). ↩
- IS 2:11 (1980)를 보라. ↩
- B. Fine et al. Class Politics: an Answer to its Critics, p3. ↩
- 같은 책, p63. ↩
- Morning Star, 26 March 1985. ↩
- 같은 책, 12 May 1984. ↩
- J. Curran (ed.), The Future of the Left (Oxford 1984). ↩
- New Socialist, April 1985, pp2–3. ↩
- A. Weir and E. Wilson, “The British Women’s Movement,” NLR 148 (1984)와 J. Foster, “The Declassing of Language”, 같은 책, p150 (1985)을 보라. 프레드 할리데이는 The Making of the Second World War (London 1983)에서 현재 세계 정세에 대한 도이처식 분석을 제시한다. A. Callinicos, “Washington No, Moscow Reluctantly,” Socialist Review, October 1983와 C. Bambery, “NLR’s Deutscherism,” Socialist Worker Review, January 1985도 보라. ↩
- D. Massey and H. Wainwright, “Beyond the Coalfields,” in H. Beynon (ed.), Digging Deeper (London 1985), p168. ↩
- D. Massey, L. Segal and H. Wainwright, “And Now for the Good News,” in Curran (ed.) ↩
- “계급 동맹”의 후보지로 거론할 수도 있는 곳의 사례를 꼽자면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적인 계급적 위치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주장을 개진한 영국 좌파는 없다. A. Callinicos, “The ‘New Middle Class’ and Socialist Politics,” IS 2:20 (1983)를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