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코뮤니즘의 죽음 *
이 글은 팀 포터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981년 여름호에 발표한 것으로, 1970년대 서구 주요 공산당들에서 유러코뮤니즘 경향이 등장하고 전성기를 누리다 오래지 않아 위기에 빠진 과정을 다룬다. 당시 서구 공산당들의 궤적은 오늘날 한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괄호([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지난 2년간 서유럽의 주요 공산당들은 집단적 대위기에 빠졌다.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혁명으로] 스탈린주의 신화가 무너진 이래 공산당 운동 역사상 가장 큰 위기임에 틀림없다. 위기의 증세는 쉽게 볼 수 있다. 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의 공산당들이 모두 당원과 득표가 줄고 있다. 그리고 당내 문제 제기와 공공연한 의견 충돌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1980년대에 들어 직면한 문제들에 대처할 일관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은 대선과 총선에서 참패했다. 자기 표의 4분의 1을 사회당에게 빼앗겨 1930년대 이래 가장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제 프랑스 공산당은 좌파 진영에서 지위가 매우 낮은 파트너가 돼, 사회당 소속의 새 대통령[미테랑]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됐다. 당의 모든 층위에서 탈당과 제명이 잇따르고 당 내에서 불만이 공공연히 터져나온다.
스페인 공산당은 합법화[1977년 4월] 이래 5년 동안 정체했다. 프랑코 치하에서 스페인 공산당은 좌파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위상에서 한참 멀어졌고, 훨씬 큰 사회당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스페인 공산당도 모든 연방 조직들이 중앙의 노선에 반대한다고 선포하면서 당 내에서 공공연한 분열이 나타났다. 스페인 공산당의 지도적 당원들이 탈당해 당 지도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스페인 전체가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 기도 실패 이후] 새로운 쿠데타 시도 위험에 끊임없이 직면하는 상황인데도 공산당은 마비된 듯하고, 프랑코 사망 이후 당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가장 위험한 시기에 방향 감각을 잃은 듯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위기는 겉보기에만 덜 극적일 뿐이다. 떠들썩한 축출이나 열띤 논쟁은 없지만, 당을 감싸고 있는 고요함은 기층 당원들의 확고한 지지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다. 그 고요함은 당 지도자들이 2년 전 처참하게 실패한 ‘역사적 타협’ 전략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혼란과 곤혹스러움의 산물이다.
공산당들의 위기는 그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정치를 급진적으로 전환해 ‘유러코뮤니즘’을 탄생시킨 지 십 년도 안 돼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유러코뮤니즘의 등장은 세계 도처에서 히스테리에 가까운 흥분을 자아냈다. 그것을 두고 공산당의 적수인 서방의 냉전 전사들은 검은 속내를 품은 공산주의자들이 또다시 민주주의자로 둔갑해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고 깎아내렸다. 좌파적 개혁주의자들은 유러코뮤니즘의 부상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들은 거기서 그들이 갈구하던 지적 엄밀성과 일터에서의 동원력을 제공받아 자신들의 두루뭉술한 사회 개혁 강령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심지어 신좌파에서도, 1968년에 등장한 조직들이 전통적 노동자 조직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환멸에 빠진 일부가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유러코뮤니즘에서 보고 공산당에 가입했다.
동구권에서도 유러코뮤니즘의 등장은 지배계급에게 두려움을 주고 반체제 지식인들에게 희망을 줬다. 국가 지도자들은 이단을 멀리하라는 엄중한 경고를 내렸지만,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유러코뮤니즘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청사진의 하나로 보며 주목했다.
유러코뮤니즘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지 5년밖에 안 된 지금, 유러코뮤니즘은 국제적 경향으로서는 사실상 종식됐다. 언론의 주목을 받던 대표들의 회의는 이제 열리지 않는다. 한때 유러코뮤니스트를 자처하면서 명성을 누리던 인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의회를 통한 실질적 사회 변화의 꿈이 물거품이 되자 정치를 그만두고 있다. 다른 일부는 다시 부상한 옛날식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수세에 몰렸다. 또 다른 일부는 과거의 교조적 확신을 스스로 재발견하고 있다. 유러코뮤니즘의 붕괴는 다양한 증상을 낳았지만, 유럽 어디에서도 계승자를 남기지 못했다.
유러코뮤니즘의 위기는 노동자 운동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 줬다. 유럽이 중요한 시기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커다란 일부가 공산당들의 이 마비 상태에 덩달아 감염될 위험이 있다.
유러코뮤니즘의 등장
날짜를 굳이 특정해야 한다면 유러코뮤니즘의 공식 탄생일은 1975년 7월 11일로 볼 수 있다. 그 날은 스페인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공동 회의가 열린 날이다. 유러코뮤니즘의 중요한 주제들이 다 그 회의에서 흘깃 제시됐다. 소련의 요구에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주장,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을 통해 사회주의에 이른다는 점진주의 노선, 당내 풍토의 상대적 자유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유러코뮤니즘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시점은 1975년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기원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여러 책과 논문들이 다룬 바 있다. 그 문헌들에 따르면, 유러코뮤니즘의 발전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1924년]에서 시작해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국민 단결 정부들, 1950~1960년대 스탈린주의 진영의 분열로 이어지는 과정을 뒤잇는 것이다. 그러나 유러코뮤니즘이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전반부에 서구 전체에서 나타난 계급투쟁의 고양이었다. 당시 투쟁의 고양은 냉전기에 확고히 자리잡은 것들을 산산조각 냈으며, 사회 전반에서 급진화를 낳았다. 서유럽 공산당들에게는 1948년 이래 처음으로 당원과 영향력을 상당히 늘릴 진정한 기회였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급진화에서 득을 보려면 소련과 점점 거리를 둬야 했다. 서구 각국의 지배계급은 공산당의 제1 충성 대상이 누구인지 의심스러운 한 그들에게 정부 운영권을 나눠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소련과의 관계가 남아 있는 한 공산당들은 집권을 꿈꿀 수 없었다. 그 관계를 끊기 위해 공산당들은 자신들의 제1 충성 대상이 바뀌었으며, 새 주인[자국 지배계급]과 급진적으로 단절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했다.
소련과의 결별을 추구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소련은 1968년과 그 후에 새로 급진화한 집단들과 공산당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구실을 했다. 새로운 투사들은 스탈린그라드의 적군을 보며 영감을 얻은 세대가 아니었다. 투쟁이 절정에 달하자 새롭게 급진화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오랫동안 공산당과 결부돼 온 고리타분하고 책략적인 방식과는 다른 정치 활동 방식을 명시적으로 요구했다. 공산당들이 1960년대 말의 대중 운동에서 상당한 기회를 놓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8년 5월 파리의 거리에서 ‘모든 권력을 상상력으로’ 하고 외친 프랑스 학생들이 구태의연한 스탈린주의를 고집하는 관료화된 공산당 대오에 합류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분쇄하기 위한]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소련과 서구 공산당들 사이의 분열을 마침내 드러낸 사건이었다. 모든 주요 공산당들이 규탄과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 언어는 극도로 소심했지만, 처음으로 그 당들이 소련의 정책과 거리를 뒀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의견 차이는 그후 1970년대 동안 극적으로 벌어졌다. 그 방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것은 스페인 공산당이었다. 소련의 계급 기반과 소련이 과연 사회주의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다. 다른 공산당들은 좀더 조심스러웠다. “과잉, 일탈, 실수”를 비판하는 데 만족하고 총체적인 문제 제기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런 부드러운 비판은 당내 강경 스탈린주의자들과의 공공연한 충돌을 피하게 해 줬지만, 공산당 내에서 정치적 모순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부하린을 복권시키라는 요구는 허용됐지만,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를 복권시키라는 요구는 허용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숭배는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분석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예컨대 영국 공산당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견해를 반박하려고 [정통 트로츠키주의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의 주장을 갖다 쓰기까지 했다. 노선 변경을 거부한 영국과 스페인의 스탈린주의자들은 당에서 갈라져 나와 친소 종파를 형성했다. 그보다 이목을 끌지 못한 채 탈당해 정치적 광야로 나간 사람들이 네 당[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공산당] 모두에 있었다.
이런 난점이 있었음에도, 소련과의 결별은 유러코뮤니스트 정당들에게 이점을 가져다 줬다. 한때 소련 지배자들에게 바쳤던 충성을 서방의 이익에 바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대한 태도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EEC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참여자가 됐고, EEC를 [미·소]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양분하는 것에 맞서는 보루이자 세계 정치의 제3세력으로 키우려 했다. 스페인 공산당도 비슷한 노선을 취해 EEC에 가입하려는 스페인 자본가들의 노력을 지지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의 주권을 위협하는 기구 일체에 뿌리 깊은 애국주의적 적대감을 드러내 왔지만, 그럼에도 EEC의 활동에 동참했다. 오직 영국 공산당만이 EEC에 확고하게 반대했다. 국내 정치에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기에 쉽게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1 스페인 공산당은 두 초강대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유럽 방위 조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유럽 지배계급에게서는 독립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들의 가장 중대한 충성 대상 변화는 국방이라는 핵심적 쟁점에서 드러났다. 예컨대 이탈리아 공산당은 20년 동안 견지해 온 나토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버리고, 정권을 잡아도 나토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일은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단지 유럽의 불안한 세력 균형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취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나토의 보호하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이탈리아에서 건설할 것이기 때문에, 서방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한 기구인 나토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들이 충성 대상을 자국 지배계급의 이익으로 바꾼 것의 가장 충격적인 사례이지만, 스페인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도 강력한 군대의 필요성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독자적 핵 억지력 보유를 요구했고 군대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자임했다. “청년들에게 군 복무에 대한 환멸을 심어 주려는 정부의 시도에 맞서 우리는 군대를 옹호한다.”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나타난 이런 계급 협력은 각국 공산당이 제안한 사회주의 전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로 가는 일국적 길은 프랑스판이든, 이탈리아판이든, 스페인판이든 본질적으로 비슷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진보의 주된 장애물은 ‘독점 자본주의’이며, 모든 계급의 부분들이 그 장애물로 인해 진보가 가로막혀 있다. 그 반동의 중심에 맞서 모든 ‘진보적’ 조류와 계급들을 단결시키는 것이 객관적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반동 세력을 고립시키면 그들과 국가기구 사이의 연계를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기층의 일정한 압력을 통해 국가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추진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의회주의적 강령과 지향을 충족시키고자 공산당들은 자신에게 없는 자원을 밖에서 찾아야 했다. 어느 나라의 공산당도 가까운 미래에 의회 다수석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1972년 우파에 맞서 사회당과 공동 강령을 채택하고 후보를 단일화했다. 그러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공산당들은 좌파 연합을 구축해 정권을 잡아 사회를 점차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끈다는 구상을 기존 질서를 지나치게 뒤흔드는 모험으로 여겼다. 좌파 정부의 선출이 우파를 소원케 하고 도발해, 우파가 좌파 정부뿐 아니라 기존의 민주적 질서까지 파괴하러 나서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난점을 해결할 방안은 공산당이 사회 내 모든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세력과의 동맹에 참여해, 중간층을 우파의 품에 뛰어들게 할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 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스페인 공산당은 모두 ‘진보 세력’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규정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베를링구에르는 부패하고 무능한 기독교민주당과의 ‘역사적 타협’을 제안했다. 기독교민주당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로 쭉 정권을 잡아 온 주요 자본가 정당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사회당뿐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과 왕정 지지자들과도 일련의 연합을 맺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자신이 프랑코 이후의 정부 내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이 아니라 그저 여러 세력의 하나가 되는 것에 만족할 것이고, 사회주의가 아니라 정권의 민주화를 추구하겠다고 공표했다.
물론 이렇게 철저하고 실용적으로 의회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천지원수로 취급하던 세력들과 협력하려면, 공산당들은 의회 게임의 규칙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가 다른 전통에 속함을 보여 주는 그나마 남은 상징들을 포기해야 했다. 그에 따라 지난 시절의 부끄러운 기치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기 시작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레닌주의자들이라는 자기 규정을 포기했고, 프랑스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했다. 모두 다원주의를 표방했고,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은 이제 당원 자격의 기초가 더는 아니라고 선언했다.
물론 이것의 많은 부분은 위선이었다. 예컨대 스페인 공산당은 애초에 포기할 ‘레닌주의’ —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인정했을 진짜 레닌주의 — 가 별로 없었고, 나머지 세 당 모두 1970년대 내내 관료적인 출당 조처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규범을 따른 결과 당내 풍토가 크게 변했다. 거의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산당 지도자들이 심지어 공식 기관지에서 공개적으로 당의 노선을 비판하거나 그에 관해 논쟁하는 게 허용됐고, 정도는 덜하지만 기층 당원들도 그럴 수 있게 됐다.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서구 공산당 운동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전성기
새로 등장한 유러코뮤니즘 경향은 1970년대 중반이 되자 급속히 발전했다. 이 시기에 주요 공산당들은 당원 수와 득표가 빠르게 늘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반세기 동안 그 당들은 야당의 처지에 머물면서 약화돼 더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듯했지만, 이제 다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복귀하게 됐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성장이 가장 눈부셨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꾸준히 당원이 감소했었다. 느리지만 꾸준한 감소로 1970년대 초에는 당원 수가 저점을 찍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매년 6만 명씩 당원이 늘어나 1977년에는 당원 수가 25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선거에서도 눈에 띄는 진전을 보였다. 1972~1976년 사이에 득표율이 7퍼센트포인트 늘었다. 그 전까지 이탈리아 정치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고정적인 투표 패턴에 비춰 보면 놀라운 증가다. 이는 지난 25년에 걸쳐 기록한 증가 폭을 겨우 4년만에 뛰어넘은 것이다. 유권자 3분의 1 이상의 지지를 받게 된 이탈리아 공산당은 이제 집권까지 넘볼 수 있게 됐다.
스페인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은 성장이 비교적 더뎠지만 그럼에도 상당했다. 지난 40년 동안 불법화돼 있었던 스페인 공산당은 9퍼센트를 득표하고 당원 22만 명을 거느린 정당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스페인 공산당은 가장 강력하고 명성이 자자한 노동조합 조직인 노동자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도 이 시기에 당원이 늘었다. 비록 사회당의 급성장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더 중요한 점은 프랑스 공산당이 1970년대 중반 내내 집권을 목전에 둔 듯했던 좌파 연합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 정치에서 유의미한 세력이 되는 것이 확실했다.
2 자신들은 급성장하고 공산당들은 노동자 운동에서 계속 주변화될 것이라는 그들의 전망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많은 나라에서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였다. 혁명적 좌파 단체들은 계급 투쟁의 발전 수준(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다들 있었다)과 공산당의 구실(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을 재평가해야만 했다.
공산당들의 이런 급성장과 함께, 1968년 이후 유럽 전역에서 등장한 혁명적 좌파들이 갈수록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당시 많은 좌파 단체가 제시한 가장 흔한 설명은 1960년대 말에 한껏 드러난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일터 투쟁의 성과들을 굳히고 확장하기 위해 정치적 표현체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규모 혁명적 좌파 단체들이 그런 구실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자,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정치적 고향인 공산당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유러코뮤니즘의 성장은 비록 왜곡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투사들을 끌어안기 위한 좌경화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혁명가들의 과제는 그 투사들이 제대로 된 정치적 표현체를 가질 수 있도록 공산당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신좌파의 중요한 일부는 공산당들과 갈수록 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페인 반데라로하[‘붉은 깃발’] 그룹의 다수는 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탈리아 일마니페스토[‘선언’] 그룹은(더 엉성한 방식으로는 로타 콘티누아[‘계속 투쟁’]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집권을 사회주의적 변화의 불가결한 수단으로 봤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들의 성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좌파 단체들이 부심해서 개발한 이러한 분석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가장 뚜렷한 사례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사례일 것이다. 거기서는 공산당의 성장이 프랑코 체제의 지속이나 강력한 사민주의 정당의 경쟁으로 불완전하게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이어진 이탈리아 공산당의 성장은 1960년대 말에 나타난 전투성의 연장이 아니었다. 물론 많은 신입 당원은 분명 1960년대 말 투쟁의 최전선에 뛰어들고 그 속에서 급진적이 된 청년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나 그 여파 속에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사실 그 시기의 일터에서 공산당은 세가 줄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공장 세포 조직은 계속 감소했다. 또 다른 반란의 중심지였던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청년연맹FCGI은 청년들의 급진화에 압도돼 사라지다시피 했다. 공산당의 회복은 투쟁이 명백히 가라앉던 시기에 나타났다. 그 시기는 국가 기구에 맞선 대항 기구를 건설할 전망이 제시되지 못한 시기였다. 1972년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의 세는 일터와 중고등학교와 대학 모두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 회복은 공장위원회들이 노동조합 지도부로부터 계속 독립적이지 못하고, 혁명적 좌파(학생 운동 내에서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가 운동을 결속시키고 강화할 안정적 구조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을 투사들이 보고 나서야 시작됐다.
3 이처럼 이탈리아 공산당의 성장은 1968년의 열망이 좌절된 것에 따른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성장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어지고 있다는 징후였다. 물론 전투성은 여전히 상당했다. 1976년 선거 직전에 노동자들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뽑은 의회 대표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의식적으로 위임하는 것이었다.한편, 1968년과 1969년의 투사들이 이탈리아 공산당 신입 당원의 전형인 것도 아니었다. 훨씬 눈에 띄는 점은 지식인과 소상공인, 자영업자, 중간관리층, 특히 공무원 사이에서 당이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적 변화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거기에 맞선 노동계급 투사들의 압력을 훨씬 능가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가 변했어도 노동자 신입 당원들의 전투성에 부합하는 쪽으로 변한 건 전혀 아니었다. 훨씬 두드러졌던 것은 계급들을 아우르는 정당이 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기성 이탈리아 사회의 부패와 비효율에 맞서 이탈리아 국민의 모든 “건강한 부분”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려 했다. 그 당의 매력은 이탈리아 사회가 해체되는 듯한 상황에서 그런 사태를 막아 줄 응집력 있는 세력처럼 보였다는 데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러한 내부 변모에 비견할 만한 역사적 선례가 있다. 그것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사민당의 성장을 낳은 긴장이다. 당시에도 혁명적 잠재력이 풍부한 파업 물결이 최종 패배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부분적 후퇴기에 운동이 기력을 다하자 노동자들이 압도적으로 사민당에 기대를 걸었다. 물론 오늘날 경제적·사회적 위기는 그때만큼 첨예하지 않다. 노동계급의 사기 저하도 그때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유러코뮤니즘은 그때 사민당이 메운 것과 같은 공백을 메웠다. 유러코뮤니즘은 1960년대 말 급진화의 연장이 아니라 그 대안이었던 것이다. 유러코뮤니즘은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부분적으로 패배하고 개혁주의에 맞선 혁명적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 것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다.
유러코뮤니즘의 모순
그러나 유러코뮤니스트들은 집권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떠한 사회 변혁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냈다. 당 지도부가 강단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유러코뮤니즘 이론 자체가 그 실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뿌리 깊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이 집권 언저리에라도 이르는 것을 사실상 가로막은 가장 직접적인 장애물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계급 협력에 기초해 점진적이고 의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하자는 게 유러코뮤니스트 정당들의 주장이라면,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 차이가 유러코뮤니스트 정당에 몸담은 소수에게만 뚜렷한 것이라면, 유권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두 변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 진품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놔두고 새 전향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인가?
4 프랑스 공산당은 자신이 아니라 잠재적 경쟁자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내내 이 현상은 프랑스 공산당 당원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게 된다.
이 문제는 프랑스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1972년 공산당이 사회당과 공동 강령을 채택했을 때, 공산당은 좌파에서 단연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선거에서 고정 지지층이 21퍼센트에 이르고 산업 노동계급 내에서도 기반이 폭넓었다. 반면 사회당은 신뢰받지 못하고 지지 기반도 없는 따분한 지도자들의 파벌에 불과했다. 1968년 대선에서 사회당은 5퍼센트라는 형편없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공동 강령을 채택한 지 일 년도 안 돼 사회당의 득표율은 네 배로 늘어났고 공산당과의 격차를 1퍼센트포인트 미만으로 좁혔다. 공산당 서기장인 조르주 마르셰는 무거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처음으로 단결이 우리가 아니라 우리 파트너에게 득이 됐다. 또는 그들이 얻은 것이 우리가 얻은 것보다 컸다.”논쟁은 1977년 가을에 불거졌다.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이었고 좌파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파다한 시점이었다. 표면적으로 그 논쟁은 좌파 정부가 수행해야 할 국유화의 규모를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그것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계기였을 뿐이다. 계속해서 좌파 연합을 지지할 경우 공산당은 선거 이후 매우 왜소한 연정 파트너가 돼 자신이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정부에 참여하며 그 정부를 지지하게 될 운명이었다. 권력도 없이 책임만 지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정치 위기 시기에 사회의 평화를 보장하는 책임을 맡으면서도 사태 전개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공산당은 자신의 기층에 데마고기적으로 호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사회당에 더 수위 높은 조건을 요구했다. 그 조건은 기회주의적인 중도파들로 형성된 조직인 사회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당은 공동 강령 협약 없이 선거에 들어갔고 그 결과 우파가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사회당이 좌파 내의 주요 세력이 된 것이다.
스페인 공산당은 합법화됨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가장 강력한 좌파 세력으로 부상했다. 선거에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프랑코 정권이 무너지고 처음 치른 선거에서 공산당은 사회당에 훨씬 뒤처졌지만, 노동자위원회[가장 강력하고 가장 높이 평가되는 노동조합]에서 차지한 위상 때문에 공산당은 여전히 중요한 세력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의 전략은 구체제의 복권을 꾀하는 반동적 인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진보 세력의 광범한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했다. 그들에 따르면, 그러한 블록을 구축하는 데서 공산당의 구실이 핵심적인 이유가 있는데, 공산당이야말로 노동계급 내에서 그러한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런 블록에 참여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노동자들의 과도한 전투성이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부분을 겁에 질려 달아나게 할 뿐 아니라, 국가의 가장 반동적인 일부도 공포에 질리게 해, 이제야 무르익기 시작한 민주주의를 타도하러 나서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스페인 공산당은 주장)했다.
공산당의 구실은 노동자 운동이 자제력을 발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국가 기구와 그 후원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를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의 가장 유명한 결과가 몬클로아 협정이었다. 이 노사정 협정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노동자들은 그 대가로 고용과 관련된 미심쩍은 양보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이 노동조합 기구 내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모두 몬클로아 협정을 방어하는 데 동원됐다. 그 결과는 뻔했다. 당의 노동계급 기반과 공식 전략 사이에 긴장이 증대했다. 탈당이 갈수록 흔해졌고, 당원 수가 감소했으며, 마드리드의 중앙 지도부에 대해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세력들이 생겨났고, 노동자위원회의 특정 지방 조직들을 통제하기 위해 출당이라는 징계 수단이 동원돼야 했다.
사회당과 사회당이 영향을 미치던 노조인 노동자총연맹UGT도 몬클로아 협정의 공동 서명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노동자위원회보다 훨씬 유연한 노선을 채택할 수 있었다. 사회당은 중앙집권적이지 않았으므로 공산당만큼 기층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협정 이행은 공산당과 노동자위원회의 경우보다 훨씬 모순됐고, 투사들이 훨씬 많은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노동자위원회에 재앙적이었다. 프랑코 사후 노동조합 운동에서 가장 평판이 좋고 전투적이고 규모가 컸던 조직이 조합원 절반을 잃었고, 최근 직장 대표 선거에서는 UGT에 밀렸다.
선거 정치의 영역에서도 스페인 공산당은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을 자처했음에도 세를 크게 늘리지 못했다. 1979년 3월 선거에서 스페인 공산당은 득표율이 1퍼센트포인트 올랐을 뿐이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성과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성과조차도 선거주의 정치의 진정한 문제를 은폐하는 면이 있다. 그 문제는 스페인 공산당이 훨씬 큰 사회당에 계속 종속된다는 것이다. 제도권에서 발휘하는 힘은 두 정당의 계속되는 협력에 달려 있었고 이는 지역 수준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페인 공산당이 독자적 대안으로 비치려면 계속해서 스스로를 차별화해야 했다. 이런 문제는 현재까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고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의회 정치에 매여 있는 한 스페인 공산당은 노동계급 내에서 의회 정치를 가장 전문으로 하는 자들, 즉 사회당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5 물론 유럽 다른 곳의 공산당들은 프랑스 공산당처럼 거친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비열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투사들을 자신들의 깃발 아래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반핵 운동에 직면해 그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처럼 난처해 하거나, 영국에서처럼 운동 내 우파가 됐다.
스페인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 모두에게 사회당과의 관계는 성장에 걸림돌이 됐다. 그들은 좌파 전반에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강화하면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 자체는 강화시키지 않는다는 불가능한 과제에 걸려들었다. 물론 그 프로젝트에서 사회당이 공산당들보다 여러 면에서 우위를 누리며 출발했다. 이는 단지 전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회당은 자국 지배계급에게 자신이 신뢰할 만하고 존중받을 만한 세력임을 굳이 입증해 보이지 않아도, 이미 그것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당은 서유럽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운동들에 공산당보다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반면 공산당은 그런 운동들에 끊임없이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자신이 정부에 참여해도 되는 세력임을 입증하려고 그 운동들 안에서 계속해서 온건한 노선을 취해야 했다. 이와 관련한 고전적 사례는 공산당이 핵발전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운동과 맺은 관계다. 그 운동은 1970년대 말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큰 운동의 하나였다.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는 핵발전과 핵무기의 신속한 발전을 요구했으나, 그 운동은 그것의 폐지를 요구했다. 공산당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운동과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기존 체제 내에서 정부 책임을 맡기에 적합한 세력임을 입증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공산당들은 명백히 후자를 선택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프랑스에서 나타났다. 거기서는 공산당이 핵개발을 명시적으로 옹호했다. 그것이 “프랑스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비장의 카드”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반핵 시위대를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에 무심한 프티부르주아들”이라고 깎아내렸다.사회당들은 자신의 ‘책임성’을 입증할 필요성에 발목이 잡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 새로운 운동에 훨씬 포용적 태도를 취했고, 어떤 우려든 모호한 언사 뒤로 숨길 수 있었다. 엄격한 당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당 당원들은 특정한 노선에 얽매이지 않았다. 당의 좌파는 새 운동을 환영할 수 있었지만, 당의 우파는 그 운동의 요구가 실제 현실로 관철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회당들이 처음에 개방적 태도를 취한 덕분에, 운동이 정치적 표현체를 찾는 시기에 공산당이 간택될 공산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그런 경우 사회당이나 녹색당이나 혁명적 좌파 단체를 선택했다. 그런 사례는 허다하다. 가장 분명한 사례는 여성 운동과 반파시즘 운동, 성소수자 운동, 이주노동자 운동의 사례일 것이다. 이 모든 운동에서 유럽의 공산당들은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다른 정치 세력에게 밀려났다. 이것은 어느 정도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집권 가능성이 훨씬 큰 사회당이 적어도 말로는 공산당보다 더 좌파적이었던 것이다.
스페인과 프랑스 공산당과 달리 이탈리아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관계 때문에 정권 장악 시도가 유산되는 문제가 그만큼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사회당이 1970년대 내내 공산당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이 기독교민주당과 권력을 분점할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자, 유러코뮤니즘 전략의 핵심 모순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이 그런 모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탈리아 공산당만큼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핵심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976년 선거 승리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 앞에는 두 가지 진로가 있었다. 하나는 일터와 사회에서 가진 세를 이용해 이탈리아 자본주의로부터 양보를 얻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계급 충돌을 더 첨예하게 만들고, 우파와의 전면적 충돌로 이어질 터였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이 그런 충돌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봤으며, 최악의 경우 칠레의 비극[아옌데 사회당 집권 이후 피노체트 쿠데타]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그러한 노선은 이탈리아 공산당이 지난 30년 동안 명시적으로 거부해 온 것이었다. 그런 노선을 채택하는 것은 그동안 지도자들과 많은 평당원들이 익혀 온 것을 명백하게, 또 송두리째 거스르는 일이었다. 다른 진로는 ‘역사적 타협’의 길이었다. 그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사회의 모든 진보 세력, 특히 기독교민주당 등의 정치적 대표자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믿음을 밀고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공산당이 쥔 패를 모두 기독교민주당에 넘기는 것을 뜻했다. 그러한 동맹을 맺으려면 타협을 해야 했고, 기독교민주당은 동맹을 유지해 주는 대가로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었다. 기독교민주당은 당연히 공산당이 일터의 투사들과 조직들에 행사하는 통제력을 눈여겨 봤다. 기독교민주당이 동맹 유지의 대가로 공산당에 요구했던 것은 공산당의 노동계급 지지 기반으로 하여금 사용자들의 공세를 수용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바로 그렇게 했다. 실업이 증가하고 일터의 노동조건이 악화됐지만,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이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배배 꼬아 해명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책은 실패했다. 한 가지 사례로, 국가를 민주화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물론 이탈리아 공산당은 국가 기구의 계급적 성격은 물론 그것의 기능도 크게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세부적인 문제에서도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략은 실패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도 충분하다. 이탈리아에서는 몇 년 동안 경찰 내에서 노조 결성권을 요구하는 강력한 흐름이 등장했다. 그것은 경찰을 노동조합 운동에 결합시켜 경찰과 우파의 연계를 끊어 낼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 기회를 단호하게 붙잡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기독교민주당이 동맹에서 떨어져나가 동맹 전략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공산당과 기독교민주당은 ‘독립’ 경찰노조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 기구는 사회의 주요 계급과 아무런 연계가 없었기에 유명무실할 공산이 컸다. 그런 식으로 공산당은 동맹을 지켜 냈지만 중대한 변화는 하나도 성취하지 못했고 환멸에 빠진 지지자들만 늘어났다.
역사적 타협은 이탈리아 공산당 이론가들의 전망과 달리 공산당의 꾸준한 성장은커녕 정반대 결과만 낳았다. 가입 당원 수가 더디지만 꾸준히 하락했고, 탈당과 실망이 늘어났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0년대에 일어난 개혁 운동들에서도 당원들을 충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민적 권리를 위한 중요한 전투를 모두 피했다. 그런 전투에 뛰어들었다가는 기독교민주당과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혼의 권리나 임신중단권을 위한 투쟁이든, 억압적 법률에 맞선 투쟁이든, 반핵 운동이든 어느 운동에서든 스토리는 똑같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어느 쟁점에서도 투쟁을 먼저 이끌지 않았고, 그런 운동들에 관해 침묵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선거 승리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자신의 왼쪽에서 부상하는 운동들이 제기하는 위협을 날카롭게 인식했다. 그런 운동들은 공산당이 좌파적 정당을 자처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산당이 아닌 정치적 대안을 암묵적으로 제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1977년, 바로 그런 상황이 전개됐다. 학생과 실업자, 서비스 노동자 수만 명이 거리를 점거하는 “1977년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공산당은 이를 노선 전환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인식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중요한 운동을 억누르려 했다. 처음에는 운동을 포섭해서, 그다음에는 운동을 고립시켜서 그렇게 하려 했고, 급기야는 법과 경찰을 동원한 탄압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이런 운동들에 대한 탄압이 공산당의 지지하에서 늘어나자,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 확대를 요구하는 정당들에게 커다란 기회가 열렸다. 동시에, 공산당의 투표 기반에서 진정한 환멸감이 자라났다. 1979년 6월 선거는 역사적 타협의 재앙적인 결과를 뚜렷하게 보여 줬다. 공산당의 득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 사회당과 급진당이 시민적 자유에 헌신하는 세력을 자처한 덕분에 득을 봤다. 기독교민주당은 공산당과의 동맹을 가차없이 폐기했다. 3년간의 중요한 시기에 공산당의 지지를 이용해 먹은 뒤 공산당의 인기가 줄어드는 것을 본 기독교민주당은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다.
선거 결과는 공산당에게 재앙이었다. 그들이 잃은 표는 급진적이 된 중간계급의 표가 아니라 대도시의 노동계급 밀집 지구의 표, 특히 청년들의 표였다. 선거를 중심에 놓고 노동계급의 정치적 대표체를 자처하는 정당으로서는 크나큰 재앙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 수개월, 수년 동안 이탈리아 공산당은 다른 어떠한 전략도 제시할 수 없음을 드러냈고, 1940년대 말 이래 가장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1979년이 되면 유러코뮤니스트들의 프로젝트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진보 세력들의 안정적인 사회적 동맹”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오히려 그 프로젝트는 정치적 변화에 대한 환멸감을 키우고, 계급 간 격차와 계급 내 분열을 더 키웠다. 좌파를 단결시키지도 못했다. 근본적 차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득표를 늘리지도 못했다. 애초 득표에서 그대로였거나 감소한 채 그 시기는 막을 내렸다. 유러코뮤니즘은 직접·간접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자신의 세력을 침체 또는 약화시켰다. 이것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가장 큰 사회적 급진화 물결[1968년 반란]에서 공산당들이 물려받은 우울한 유산이다.
유럽 공산당들의 위기
7 그러나 그 다짐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두고 유러코뮤니즘 진영은 양극화됐다. 스페인·이탈리아·영국 공산당은 침공을 규탄한 반면, 마르셰는 침공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해 꽤 분명한 언어로 소련을 지지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둘러싼 입장 차이는 1980년 4월 프랑스 공산당과 폴란드 공산당이 세계 평화를 위한 투쟁을 주제로 파리에서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회의를 개최한 의도는 뚜렷했다. 침공에 대한 서방의 비판에 맞서 서방 비판으로 응수하려는 것이었다. 스페인·이탈리아·영국 공산당은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고, 유러코뮤니즘 경향 내의 분열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위기의 가장 뚜렷한 징후는 유러코뮤니즘의 등장을 국제적 경향으로 규정한 여러 공산당 사이의 대화가 갑자기 중단된 것에서 드러난다. 1979년 여름까지도 조르주 마르셰는 여전히 이렇게 다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국내에서 강조했듯이, 유러코뮤니즘에는 미래가 있고 우리 프랑스 공산당은 다가오는 시기에 반드시 주도권을 잡을 것이다.”유러코뮤니즘 경향에 균열이 생기자 이탈리아 공산당은 다른 데서 동맹자를 찾았다. 유러코뮤니즘의 정치에 비춰 보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당연히 유럽의 사회당들이었다. 베를링구에르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두 차례 만남을 가졌다. 먼저 [독일 사민당 당수] 빌리 브란트를 만났고, 그다음에 프랑스의 미테랑을 만났다. 베를링구에르가 미테랑을 만난 것에 격분한 프랑스 공산당은 베를링구에르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서구의 가장 강력한 두 공산당이 격돌하면서 유러코뮤니스트 경향은 완전히 분열했다.
그러나 국제적 수준에서의 분열은 각국 공산당 내의 변화를 반영했을 뿐이고, 각국 공산당은 저마다 심각한 전략, 사상, 심지어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꽤 급진적으로 들리는 발언들을 했다. 1979년 8월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문제가 가장 첨예했던 쪽은 프랑스 공산당이었다. 공동 강령이 붕괴하고 사회당이 강화되면서 프랑스 공산당은 지지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에 따라, 자신의 전통을 강조하고 당과 옛 지지 기반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좌파적” 선회를 꾀했다. 당내 변화와 지도자들의 성명에서 그런 징후가 나타났다. 그리고 1979년 말 프랑스 공산당은 새 주간지 〈혁명〉을 창간했다. 이는 훨씬 덜 급진적인 제호의 기존 주간지 〈새로운 프랑스〉과 월간 《신비평》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마르셰 자신도앞으로 매우 투쟁적인 공산당을 보게 될 것이다. 강조하건대 매우 강경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것 중 가장 반민주적이고 반동적이고 반민중적인 현 정권에 맞서려면, 계급적 기반 위에서 노동자의 이익과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지키는 맹렬한 투쟁을 확고하게 성장시켜야 한다. 현 정권은 앞으로 어려운 시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8
이런 전환에 따라 공산당은 (노동총연맹CGT에 있는 지지 기반을 통해) 노동쟁의 시기에 관여했다. 그 투쟁은 1979년에서 198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최고조에 달했다. CGT는 여러 주요 파업을 이끌었고 매우 투쟁적인 대중 피케팅, 경찰과의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9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에 대한 책임감뿐 아니라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책임감”을 운운했다.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옹호하는 투쟁적 발언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런 ‘좌선회’는 전술적이었을 뿐이고, 결코 전반적인 전략이 못 되었다. 의회주의 노선을 여전히 확고히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노선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자본주의의 정부 권력이나 경제 권력 기반에 맞서는 전면적 대결로 나아가는 다른 노선은 취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전통과 이론과 역사가 다른, 다른 종류의 정당이 필요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관심은 투쟁의 승리보다 옛 지지자들을 다시 끌어들이고 사회당의 성장을 방해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CGT는 경제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프랑스민주노조연맹CFDT(사회당과 더 가까운 노동조합 조직)과 단결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들과의 공동 행동을 거부했다. 1979년 파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조르주 세기(CGT 사무총장이자 프랑스 공산당의 지도적 당원)는 이런 전환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는 CGT가 노동계급 내에서 영향력을 잃으면 일어날 일에 관해 이렇게 경고했다. “노동자들이 무책임한 세력에 기대를 걸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폭력적이고 아나키즘적인 비공인 행동이 만연하게 될 것이다.”프랑스 공산당의 진정한 표적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당이라는 자신의 경쟁자였다. 지난 대선들에서 공산당은 주되게 이전 동맹자를 비난했다. 공산당은 그들[사회당]이 우파와 타협하려 한다면서 결선 투표에서 그들에게 지지를 표명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이것이 3년간 사회당과 그 동맹들을 공격하는 운동을 펴 온 것의 귀결이다. 그 공격 대상에는 이탈리아 공산당도 포함돼 있다. 베를링구에르가 미테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마르셰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독설을 퍼부었다. 유러코뮤니즘이 한창 인기를 끌 때와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논조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광범한 영역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둘 다 긴축을 지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한다. 두 당은 EEC를 확장해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을 포함시키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농민의 이익과 국익을 위해 거기에 반대한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하는 바는 미테랑이 그 만남을 가진 목적으로 추측되는 바에 관한 것이다. 미테랑이 베를링구에르를 만난 근본적 이유는 우파와 동맹을 맺는 그의 정책을 지지해 줄 세력을 찾는 것이다. 여러분은 한때 미테랑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정책은 역사적 타협, 즉 기독교민주당과의 동맹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책은 이탈리아에서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프랑스에서는 타당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좌파 연합이다. 그런데 미테랑은 좌파 연합을 구축하기를 포기하고 우파와 손을 잡아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그러자마자 그는 베를링구에르의 지지를 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공산당이 친소련 노선으로 전환한 것도 자신과 사회당의 차이를 부각시켜서, 이탈하는 지지 기반을 다잡는다는 똑같은 고려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태도는 앞에서 이미 살펴봤다. 동구권 반체제 세력 탄압에 대한 비판도 멈추지는 않았지만 과거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다시 친소 노선으로 돌아섰다고 해서 프랑스 공산당 내 애국주의적 경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경향은 전에 없이 기승을 부렸다. 스탈린주의와 애국주의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다. 근본적으로 국민국가를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수단이자 그런 변화를 위한 대결의 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공산당 사무국의 일원인 샤를 피테르망[이 글이 쓰이고 있을 무렵 미테랑 정부의 운송부 장관으로 입각]은 다음과 같이 애국주의를 찬양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언사는 즉시 인종차별을 초래했고,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는 우악스러운 반反이민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에 깊게 뿌리내린 민족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당원에게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공산당 소속의 비트리쉬르센 시의 시장이 폭도를 이끌고 이민자들의 숙소를 공격한 사건이나, 발두아즈에서 공산당이 한 이민자 가족을 괴롭힌 사건은 당원들과 당 바깥의 지지자들에게서 중대한 이의 제기를 자아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모로코 공산당의 신문인 〈알바야네〉는 프랑스 공산당의 이런 노선을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을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프랑스 노동자들의 당으로 여기던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 줬다”고 일갈했다.오늘날 프랑스 국가 — 우리는 이 표현에 무거운 감정을 실을 수밖에 없다 — 는 천천히 해체돼 서유럽과 북미의 복합체 속으로 점차 용해될 위험에 처했다. 자본의 주인들과 그들의 정부는 이를 주도면밀하게 추진하려 하고 있으며, 유례 없는 열의와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 그렇다! 민족은 낡은 틀이 아니다! 그렇다! 독립과 주권은 아직 낡은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나름의 경제적 응집력과 나름의 역사·문화가 있다. 그래서 강력한 것이고 위대한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의도는 뚜렷했다. 자신의 지지 기반과 노동계급 일반의 소위 편견에 영합하여 당을 독자적 세력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처방은 경제 투쟁에서 전투성을 발휘하면서 인종차별을 가미하고, 스탈린주의를 강화해 재래식 노선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첫째, 소련에 대한 명시적 지지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인종차별을 혐오하는 많은 당원(아마도 그런 당원 중 절반 이상은 1968년 이래로 입당한 사람이었다)은 그러한 처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째, 그 처방은 선거 논리로 봐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좌파가 분열해 있는 동안 정권은 계속 우파의 손아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0년을 우파 정부하에서 보낸 사람들에게는 우파를 끌어내리는 것이 사회당에 맞서 공산당을 찍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전망이었다.
1981년 4월 대선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득표는 15퍼센트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급락했다. 공산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4분의 1이 족히 되는 수가 공산당을 버리고 결선 투표에 올릴 좌파 후보로 미테랑을 선택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그들이 외면하려 했던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충격적인 심판을 받은 공산당은 미테랑에게 제시한 조건들을 모두 철회하고, 결선 투표에서 미테랑이 지스카르 데스탱[중도 우파 정당인 프랑스 민주연합의 당시 후보]에 맞서 승리할 수 있도록 미테랑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해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더 큰 승리를 거뒀지만 공산당의 득표는 4월의 저조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3년은 프랑스 공산당에게 매우 재앙적인 시기였다. 그들은 종파적이고 우악스럽게 굴다가 쓰라린 대가를 치렀다. 사회당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채 프랑스 좌파의 제2세력으로 전락했다. 당 내에서는 좌파 연합이 깨진 이래 당의 공식 노선에 대한 이의 제기가 꾸준히 늘어 왔고 이제는 만성적이 됐다. 지난해[1980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을 비난하거나 탈당하는 당원들에 대한 소식이 〈르몽드〉 신문에 거의 매주 실리다시피 했다.
이견은 대부분 당내 우파에서 나왔다. 당원의 절반 이상이 1968년 이후에 입당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해 프랑스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소련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신좌파 그룹들을 냉정하게 외면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내 우파적 비판자들은 당이 최근 여전히 소련과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당과 갈수록 거리를 두는 것을 집중 비판했다. 그들은 대부분 나중에 사회당에 입당할 공산이 크다. 정치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당 내 좌파들은 대체로 취약했고, 유러코뮤니즘으로의 전환이 낳는 이론 문제들에 골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이견의 사례들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쟁 속의 단결”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둘러싼 운동일 것이다. 여기에 연명한 사회당과 공산당 활동가 수만 명은 CGT와 CFDT가 일터에서 함께 싸우지 못하게 하는 종파주의를 끝내라고 촉구했다.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정설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프랑스 조직)이 여기에 관여했다는 사실에 공산당 지도자들은 못마땅해 했지만, 그 운동의 기반은 LCR의 저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그 운동의 주도자들을 징계했고 일부는 재입당까지 불허했다. 그러나 우파적 반대파와 마찬가지로 좌파적 반대파의 탈당과 축출도 가장 저명한 인사들의 것인 경우에만 언론의 조명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례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제명 처분이다. 발리바르는 공개 서한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인종차별과 종파주의를 호소력 있게 비판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을 변화시키거나 공산당의 대안을 자처할 만한 유력한 좌파 경향이 부상할 전망은 안타깝게도 매우 요원하다. 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는 입지가 매우 탄탄하고, 자신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듯한 비판자들을 거리낌 없이 당에서 쫓아내거나 고립시켜 왔다. 기층과 당을 묶는 충성심과 복종심은 약화됐을지언정 여전히 매우 강력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프랑스 공산당 안에 남은 반대파가 지도부에 맞서 대안적 전략을 제시할 능력이 적어도 현재까지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대안적 전략이 없으면 당 내의 광범한 불만이 모일 초점이 형성될 수 없다. 그러면 지식인들이 떠들썩하게 탈당하고 기층 당원들도 더디지만 꾸준히 당에서 이탈하게 된다.
물론 프랑스 공산당의 선거 참패와 미테랑의 승리는 프랑스 좌파에게 새로운 시기를 열어 줬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전략의 변화는 물론이고 어쩌면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변화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든 순조롭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이 사회당을 지지한다면, 사회당의 당세가 계속 커져 공산당이 기층을 더 잃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계속 야당으로 남아 새[미테랑] 정부의 안정성을 위협한다면, 우파 정부하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내며 좌파의 집권을 간절히 바라던 수많은 당원을 당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프랑스 공산당 앞에 놓인 미래는 험난해 보인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상황은 좀 다르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주는 주된 인상은 대중 정당이 서서히 수동적인 상태로 주저앉고 진로를 정하지 못해 마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기이해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명백하다. 역사적 타협으로 실행된 1976~1979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략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전략 때문에 이탈리아 공산당은 1968년 이래 처음으로 득표수와 당원을 잃었다.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이 함께 과반수를 점해 새로운 집권 세력을 이루자 공산당은 갈수록 고립됐다. 지도부와 기층의 일부 사이에 커다란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실업 증가와 노동조건 악화라는 고통을 감내하게 해 이탈리아 자본주의에 숨통을 틔워 줬지만, 지배계급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바람과 달리 그 기회를 사회를 재건하는 데 쓰지 않았다. 어느 지표로 보나 사회 문제들은 더 심각해졌다. 국내에서 더 많은 부패가 드러났고, 복지의 극적인 개선도 없었다. 실업이 급증했고 좌파와 우파, 마피아에 의한 정치적 폭력이 급증했다.
전략이 이처럼 극적으로 실패했음에도 역사적 타협에 대한 일관된 비판은 오로지 당 지도부 오른쪽에서만 제기됐다. 그들(아멘돌라 — 1981년 초 사망할 때까지 — 와 나폴리타노)은 당이 역사적 타협을 논리적 귀결로 끝까지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자본주의와 사회의 위기가 깊어질수록, 대중과 국가 기구가 서로 멀어지는 것을 막을 유일한 세력은 권력에 물들지 않은 이탈리아 공산당 같은 세력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세력이 집권할 수 없다면 정부가 권위주의로 빠져들고 무질서가 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태를 피하려면 역사적 타협을 철저하게 극단으로 밀어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일관성 결여는 노동조합이 역사적 타협에 포함된 희생을 모두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데 있었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이 필요한 희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저항에 나서는 바람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험이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무리 원성을 살지라도, 이탈리아 공산당이 전진하려면 대중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해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회복될 기회를 마련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회복이 이뤄질 때만 국가와 사회를 민주화하는 계획을 진척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파적 반대파의 이런 전략에는 명백한 난점이 하나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층 지지자들에게 지지받지 못할 대안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길로 계속 나아갔다면 이탈리아 공산당은 선거에서 더 크게 패배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지도부의 다수는 선거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우파의 대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맞서 대안이 없었다. 강경한 야당으로 돌아갔다가는 집권 블록이 해체되고 기독교민주당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그 국가도 해체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면 정치·경제 위기가 악화될 것이 뻔했고, 이탈리아 공산당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그런 상황에서 권력을 잡기를 늘 거부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는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전개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반대를 거부하면서도 당 지도부는 뾰족한 대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1979년 선거 패배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줄곧 마비 상태에 빠졌다. 1980년 9월 피아트 공장 투쟁에 대해 취한 태도가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노동자들은 2만 5000명의 정리해고를 막으려고 한 달 동안 공장을 멈췄다. 그때 베를링구에르는 극적으로 개입해,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다면 전폭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며칠 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진정한 표적이었던 정부가 무너졌다. 그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전국적 수준에서 더는 파업에 관여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해고 규모를 놓고 사용자들에게 비굴하게 항복하는 합의안에 조인했지만 말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좌선회’는 딱 여기까지였다.
프랑스 공산당에서 나타난 경향이 이탈리아 공산당에서도 발전하고 있다는 작은 징후가 몇 개 더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입장이 그것이다. 물론 소련을 비판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 비판의 어조는 매우 완곡했다. 당 사무국장 지안카를로 파예타는 올해[1981년] 소련 공산당 당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소련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을 비판하는 몇몇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볼로냐의 한 지식인 당원은 당의 내부 구조를 공공연히 비판했다는 이유로 당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엄연한 진실은 이런 사례들이 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당 내에서는 뚜렷한 대안적 전략이 어떤 것도 부상하지 않았다.
사상과 전략의 이런 부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는 1980년 11월 역사적 타협 전략을 공식 폐기했을 때였다. 그 방침은 끔찍한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에 발표됐는데, 이 지진은 이탈리아 국가의 무능함을 다시금 보여 주는 사례였다. 베를링구에르는 그 재난을 기회 삼아 기독교민주당이 동맹으로 삼기에 너무 부패한 세력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 기자가 물었듯이, 이탈리아 공산당은 대지진이 일어나고 나서야 그런 진실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더 놀라운 것은 옛 노선을 대체할 무언가가 아직도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적 타협의 폐기를 선언하고 몇 달 동안 당 지도자들은 새 전략(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이 역사적 타협의 연장인지 거부인지에 관해 서로 모순되는 입장들을 발표했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그 당의 정치를 둘러싼 혼란은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핵심 부분을 마비 상태에 빠뜨렸다.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을 마구 해고하고 투사들을 솎아내는 동안, 노동계급의 가장 강력한 부분이 뚜렷한 지도를 제공받지 못했다. 역사적 타협의 낡은 구호인 “긴축”과 “생산성”을 위해 그런 희생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기에 맞서 전면적 투쟁을 벌여야 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난 몇 년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함께 의기소침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탈리아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면, 스페인 상황은 재앙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올해[1981년] 2월 23일의 군사 쿠데타 시도는 스페인의 의회 민주주의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스페인 공산당의 전략이 의회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장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 줬다. 그것이 합법화 이후 당의 정책이 겨냥한 핵심 목표였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그 정책이 낳은 결과는 무엇인가?
집권당인 민주중도연합은 안정적인 반파시즘 연합을 건설하기는커녕 빠르게 우경화했다. 프랑코가 남긴 정치 체제는 해체되기는커녕 일련의 반反테러법으로 오히려 강화됐다. 노동조합과 정부가 일련의 협약을 맺었음에도 물가가 급등하고 실업률이 11퍼센트에 달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품격 있는 정치 세력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예전보다 권력에서 더 멀어졌다. 무엇보다도 군부가 정치 무대를 지배하고 있고,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나 스페인 공산당은 기층을 동원해 그것을 막을 힘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다른 정당들과 함께 군부를 달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그럴수록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 자신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은 간과하는 듯하다.
당내 세력들이 보기에 당연히 지난 5년의 성적은 재앙적이었고, 그래서 당 전반에서 심각한 분열이 나타났다. 전국적 수준에서 보면, 스페인 공산당이 얻은 표는 지난 선거 수준을 지켰지만, 당원 수는 빠르게 줄었다. 그 수는 1978년 22만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16만 명이 채 안 된다. 그러나 지도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지역 당 조직들 내에 강력한 반대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인 공산당의 지역 조직 중 단연 가장 강력한 카탈루냐주 조직에 있는 반대파다. 카탈루냐주 조직도 많은 당원을 잃었다. 지난 3년간 절반이 당에서 빠져나갔다. 유러코뮤니즘적인 전국 지도부에 맞서 이런 추세를 뒤집으려는 두 경향이 그 안에서 발전했다. 하나는 구식 스탈린주의의 부활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현재 이 경향은 당원의 거의 40퍼센트를 대표한다. 다른 하나는 중앙에 맞서 이들과 자주 동맹을 맺지만 훨씬 더 흥미로운 이른바 ‘레닌주의자’ 분파다. 이 분파는 당헌에서 ‘레닌주의’라는 표현을 삭제하려는 전국 지도부의 (결국 성공한) 시도에 맞서서 부상한 경향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전국 지도부보다 더 좌파적인 전략을 요구한다. 그들의 전략은 반제국주의와 반핵, 반나토 기조가 더 선명하며, 당의 노동계급 기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경제적 힘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좌파적 경향은 스페인의 다른 곳에서도 생겨났다. 아스투리아스주와 안달루시아주가 특히 두드러졌다. 두 지역에서는 공공연한 당내 논쟁과 탈당이 벌어지고 노동조합 내에서 공산당 탈당자들의 경향이 발전하기도 했다.
이런 사태 전개는 스페인 공산당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다. 당이 쪼개지거나 다음 당 대회[1982년]에서 현 지도부[산티아고 카리요 당시 사무총장이 이끄는]가 패배할 가능성도 있다. 십중팔구 후자의 가능성이 큰데, 이 때문에 스페인 공산당 전국 지도부가 카탈루냐주 조직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낸 것일 테다. 지난 카탈루냐주 당 대회가 끝나자 전국 조직의 한 지도적 당원은 이렇게 논평했다. “그 대회에서 통과된 것은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 모두 퇴행적이고 오늘날 유럽 사회의 현실과 맞지 않고 조야한 교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게 통과된 결의안들은 카탈루냐주의 공산당원 다수의 정서와 의식, 견해와 아무 관계도 없다.” 중앙 당이 당 조직의 핵심적 일부를 이런 말로 비판한다면, 당이 쪼개지는 것도 그렇게 요원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페인 공산당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카탈루냐의 공산당 조직인 카탈루냐 통합사회주의당PSUC은 당을 구성하는 단연 가장 큰 조직이기 때문이다.
반대는 당내 좌파에서만 형성된 게 아니었다. 유러코뮤니즘 세력들도 중앙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당이 여성 운동이든, 청년 운동, 생태 운동, 민족 운동이든 어떤 운동에도 전혀 관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라몬 타마메스의 탈당은 가장 파장이 컸다. 그는 당의 지도적 지식인이자 마드리드 부시장이었고, 스페인 공산당 집행위원회의 성원이기도 했다. 타마메스는 당내 민주주의의 부재에 항의하며 탈당했다. 이것은 개별적 항의가 아니었다. 후임 마드리드 부시장을 포함해 마드리드 공산당 조직의 지도적 당원 250명이 타마메스를 지지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현재 스페인 공산당이 주는 인상은 당의 구조와 전통과 전략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향들로 당이 갈갈이 찢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쪽에서 공격받는 당 중앙은 대립을 전혀 중재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주도력을 발휘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물론 군사 쿠데타의 위험이 당을 단결시키는 외부의 위협 구실을 할 수도 있지만, 당을 괴롭히는 근본 문제들은 현재로서는 해결 불가능해 보인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세 나라의 공산당은 전략의 위기와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다. 세 당 모두 10년 전 본질적으로 비슷한 이론을 채택해 그것을 시험대에 올렸다. 그리고 그 실험이 모두 실패해 그 당들은 이전에 누렸던 당세에 견줘 보면 상당히 취약해졌다. 유러코뮤니즘의 실패가 명백함에도 실패를 딛고 일어설 방향성이 그 잔해물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조만간 유럽의 공산당들은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며 이러저러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프랑스적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 일부의 단기적 이익을 옹호하는 기회주의적 종파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시도된 바 있고 1981년 프랑스의 주요 선거들에서 재앙으로 끝났다. 공산당들은 온전한 ‘국민’ 정당이 돼 보려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상이한 계급들의 ‘부문적’ 이익에 맞서 국민 전체의 ‘국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타협에 담긴 전략이었고,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실패해 당과 그 지지 기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낳았다. 게다가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그런 구실은 사회당이 훨씬 솜씨 좋은 적임자였다.
다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공산당들이 60년 전[1920~1921년] 창당 당시의 전통으로 돌아가 그 전통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전무하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은 한 세대[1925~1956년]의 스탈린주의와 다음 세대[유러코뮤니즘]의 개혁주의에 의해 기각된 지 오래다. 혁명적 관점으로 돌아가려면 현 지도부뿐 아니라 기반의 상당 부분을 갈아치우고, 더 중요하게는 당에 응집력을 부여하는 전통과 역사 전반을 갈아엎어야 한다.
물론 하루하루의 정치 상황을 이유로, 오랜 숙제로 남은 자기 비판과 토론을 무한정 미룰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미테랑의 당선이 정치 분위기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공산당은 참패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의 미약한 파트너로서 자신이 할 구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쿠데타의 그림자가 드리워 당 내에서 들끓는 비판을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도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부패 스캔들과 관련된 폭로와 정부의 붕괴 덕분에 다시금 기독교민주당의 부패가 세상에 알려지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입지가 강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 어느 것도 공산당들의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 사건들은 모두 당의 주도력 때문이 아니라, 그 주도력에 반하여 벌어진 일들이다. 이런 사건들은 각 당 내에 깊게 뿌리내린 문제들을 일시적으로 가릴 뿐이다.
유러코뮤니즘의 실패는 유러코뮤니즘의 핵심 사상의 약점과 유러코뮤니즘에 처음부터 담겨 있던 모순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유러코뮤니즘이 의심의 여지 없이 실패한 현실은 또 다른 뭔가를 드러냈다. 그것은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세 공산당이 유러코뮤니즘이 남긴 거대한 사상적 공백을 메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대중적 공산당들의 격동적 역사 이래 그들이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이런 문제들에 휘말려 노동계급 상당 부분에 대한 장악력이 느슨해졌다 하더라도 이것이 꼭 혁명적 좌파에게 희망적 징후인 것은 아니다. 공산당 당원들과 지도자들의 정치적 궤적은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편안한 곳인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뚜렷하게 향하고 있다. 오직 스페인에서만 명백히 옛 전략보다 좌파적이고 어쩌면 혁명가들에게도 열린 태도를 취할 수도 있는 상당한 경향이 부상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유러코뮤니즘의 실패가 낳은 충격 속에서 극소수의 당원과 고립된 개인들만이 좌경화한 듯하다. 혁명가들이 이런 반대자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끌어들이려면 매우 주도면밀한 활동이 필요할 것이다.
유럽 노동계급의 후퇴를 막는 데서 현재 결핍돼 있고 갈수록 절실한 것은 운동 내에서 자신감과 투쟁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정리해고와 임금 삭감에 맞선 저항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몇 안 되는 징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공산당의 패배가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의 일부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 글은 팀 포터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981년 여름호에 발표한 것으로, 1970년대 서구 주요 공산당들에서 유러코뮤니즘 경향이 등장하고 전성기를 누리다 오래지 않아 위기에 빠진 과정을 다룬다. 당시 서구 공산당들의 궤적은 오늘날 한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괄호([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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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im Potter, 1981, ‘The death of Eurocommunism’, International Socialism, 2:13 (Summer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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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마니테〉 1977년 5월 17일자. 〈뤼마니테〉는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일간지다. 프랑스에 관한 모든 인용과 대부분의 분석은 이언 버철이 준비한 것이다. 스페인에 대한 것은 더그 앤드루스가 준비했다. ↩
- 이들의 어리석은 환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C. Harman, “The Crisis of the European Revolutionary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Spring 1979를 보라. ↩
- 그렇다고 해서 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노동자 투쟁과 거기에 함축된 강령과, 전통적 의회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는 그 문제에 답해야 했던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파를 어려움에 빠뜨렸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공산당 내의 변화를, 공산당 지도부가 노동자 투쟁의 정치적 해법을 찾으려는 노동계급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려 했다.(예컨대 제4인터내셔널이 그런 주장을 한다.) 중요한 점은 대략 1972년 이후 노동계급의 요구는 명시적이고 의식적인 개혁주의적·점진주의적 해법이었고, 그것이 혁명적 전망에 대한 거부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좌파는 유러코뮤니즘이 좌파로 진화한다거나, 지도부를 ‘폭로’하면 왼쪽으로의 중대한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 Eurocommunism: Myth or reality?, Penguin, p122에서 재인용. ↩
- Le Monde, 1980년 1월 11일자, 1980년 12월 16일자. ↩
- 때로 그 정당화는 배배 꼬아 놓은 것을 넘어 가히 괴설이라 할 만했다.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 요구된 희생을 “긴축”으로 칭했고, 이것이 사회주의 사회에 이르는 수단은 아니어도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논리에서 벗어나는”(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긴축”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가치 척도를 긍정하는 것에 기초해 다양한 사회 계층의 필요와 요구를 엄격하게 선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됐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이 기층 당원들에게 ‘역사적 타협’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게 놀랍지 않다! ↩
- Le Monde, 1979년 8월 1일자. ↩
- Le Monde, 1979년 8월 4일자. ↩
- Le Figaro, 1979년 10월 25일자. ↩
- Le Monde, 1980년 3월 27일자. ↩
- Le Monde, 1978년 10월 25일자. ↩
- Le Monde, 1981년 2월 15~16일자. ↩
- 1981년 3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실림. ↩